서하집 제11권 / 제문(祭文) /임춘(林椿) - 고려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이다.
우봉에서 익재를 서원에 봉안하는 제문(牛峯益齋書院奉安祭文)
선생은 / 先生
산하의 빼어난 기운 타고난 / 山河間氣
조정의 큰 인재이니 / 廊廟偉器
학문은 하늘과 사람의 이치 다 통하였고 / 學窮天人
도는 말세에 으뜸이었도다 / 道冠叔季
명성이 삼한을 뒤덮었고 / 名蓋三韓
명예가 중국까지 퍼졌으니 / 譽流上國
충선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 忠宣在元
공이 와서 모셨네 / 公執羈靮
진량처럼 북학하고 / 北學如良
계찰처럼 관풍하였으며 / 觀風如札
서쪽으로 아민에 사신 가고 / 西使峨岷
남쪽으로는 오월까지 따랐도다 / 南從吳越
만리를 떠돌아다니며 / 間關萬里
충성과 절의 드러났는데 / 顯忠著節
거두어 동국으로 돌아옴에 / 斂以東歸
당대의 태산북두 되었네 / 爲世山斗
누차 재상 지위 맡아서는 / 累秉國勻
백성들은 부모가 있게 되었으며 / 民有父母
위기 임해서 더욱 확고하여 / 臨危益堅
험난함 겪을수록 더욱 곧았도다 / 履險逾貞
덕이 성대하고 사업이 크며 / 盛德大業
장수하고 명예 드높아 / 壽考尊名
공업과 교화 면면히 전해지고 / 功化綿邈
문교가 크게 새로워졌네 / 文敎丕變
당시에는 영화로웠고 / 當時榮焉
후대에서 사모함 게으르지 않았는데 / 後思不倦
융숭한 보답 미처 못하여 / 崇報未遑
배향한 사우가 없구나 / 腏食無所
나라 사람들 분해하고 부끄러워하며 / 邦人憤恥
모두 함께 도모하여 거행하니 / 共謀齊擧
우산의 남쪽 / 牛山之陽
바로 공이 노닐던 곳이로다 / 寔公遊處
터를 보아 사우 짓고 / 相址創宇
은혜 바라며 봉안하니 / 徼惠揭虔
수많은 유자들 / 靑襟詵詵
분주히 와서 제사 지내도다 / 奔走執籩
백 대는 먼 세월 아니기에 / 百世非遙
감응이 어긋나지 않을 것이니 / 感應不爽
밝으신 영령은 앎이 있거든 / 明靈有知
부디 흠향하소서 / 庶歆肸蠁
<끝>
[註解]
[주01] 우봉(牛峯)에서 …… 제문 : 이제현(李齊賢, 1278~1367)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ㆍ역옹(櫟翁)
이다. 고려 충선왕(忠宣王)을 보필하여 원(元)나라를 드나들며 외교적으로 큰 공로를 세웠다. 저서로는 《익재난고(益齋亂藁)》,
《역옹패설(櫟翁稗說)》 등이 있다.
우봉은 황해도 금천(金川)의 옛 이름이다. 1652년(효종3)에 우봉현과 강음현(江陰縣)을 합하여 강음 금교(金郊)의 북쪽 우봉 오조
천(吾助川) 남쪽에 관아를 세우고 금교의 ‘금(金)’과 오조천의 ‘천(川)’을 따서 이름을 금천이라 하였으니, 이제현의 묘소가 있는 곳
이다.
《국역 여지도서 제26권 황해도 금천》 이제현을 봉안한 서원은 금천에 위치한 도산서원(道山書院)으로, 금천의 유학(幼學) 기명혁
(奇命爀)이 상소하여 사액을 내려 줄 것을 청하여, 숙종이 해조에 내려 시행하도록 윤허하였다. 《국역 숙종실록 10년 10월 21일》
[주02] 충선왕(忠宣王)이 …… 모셨네 : 충선왕이 왕위를 충숙왕(忠肅王)에게 전하고 자기는 태위(太尉)가 되어 원나라 서울의 저택에 머
물며 만권당(萬卷堂)을 지어 놓고 스스로 즐기면서 이제현을 원나라 서울로 불러들이자, 이제현이 원나라에 와서 충선왕을 모셨다.
《국역 목은문고 제16권 계림부원군 시 문충 이공의 묘지명》
[주03] 진량(陳良)처럼 북학(北學)하고 :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진량은 초(楚)나라 태생이니, 주공(周公)과 공자의 도를 좋
아하여 북으로 와서 중국(中國)에서 배웠는데, 북방의 학자 중에 혹시라도 앞서는 자가 없었다.[陳良, 楚産也. 悅周公仲尼之道,
北學於中國, 北方之學者, 未能或之先也.]” 하였으니, 진량이 남방 출신으로서 중원의 도를 배웠음을 말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이제현이 중국에 와서 학문한 것을 가리킨다. 이제현이 충선왕의 부름을 받고 중국에 와서 중국의 유명한 학자인 요수
(姚燧)ㆍ염복(閻復)ㆍ원명선(元明善)ㆍ조맹부(趙孟頫) 등과 어울리며 학식이 더욱 진취되었다. 《국역 목은문고 제16권 계림부원
군 시 문충 이공의 묘지명》
[주04] 계찰(季札)처럼 관풍(觀風)하였으며 : 춘추 시대 오(吳)나라 사람인 계찰이 예악(禮樂)에 밝아 노(魯)나라로 사신 가서 주(周)나라
음악을 듣고 열국(列國)의 치란흥망을 알았다는 고사가 있다. 《春秋左氏傳 襄公29年》 여기에서는 이제현이 중국에 와서 견문을
넓혔음을 말한 것이다.
[주05] 서쪽으로 …… 가고 : 아민(峨岷)은 서촉(西蜀)에 있는 아미산(峨眉山)과 민산(岷山)을 합하여 말한 것이다. 1316년(충숙왕3)에
이제현이 사명을 받고 서촉 지방에 가서 아미산에 강향(降香)한 일이 있다. 《국역 졸고천백 제1권 이익재의 후서정록 서문》
[주06] 남쪽으로는 오월(吳越)까지 따랐도다 : 1319년에 충선왕이 강향사(降香使)로서 강남으로 갔는데, 이제현이 이때 호종하였다. 《국
역 익재집 습유 익재선생 연보》
[주07] 당대의 태산북두(泰山北斗) 되었네 : 태산북두는 덕과 명망이 탁월한 사람을 가리킨다. 《국역 목은문고》 제16권 〈계림부원군 시
문충 이공의 묘지명[鷄林府院君諡文忠李公墓誌銘]〉에 이색(李穡)이 명(銘)에 이제현을 칭송하며 “태산북두 같기는 창려(昌黎)
의 한퇴지(韓退之)로다.[北斗泰山, 昌黎之韓.]” 하였다.
[주08] 위기 …… 곧았도다 : 1339년(충혜왕1)에 충숙왕(忠肅王)이 승하한 뒤 정승 조적(曺頔)이 심양왕(瀋陽王) 고(暠)를 몰래 왕위에
올리려고 하자 충혜왕이 조적을 죽였는데, 심양(瀋陽)에 있는 조적의 무리들이 충혜왕을 모함하자, 원(元)나라가 사신을 보내 왕을
소환하였다. 이에 이제현이 글을 올려 진상을 밝혀 일을 해결하였다. 《高麗史 권110 李齊賢列傳》
[주09] 장수하고 명예 드높아 : 귀국한 뒤에는 소인들이 더욱 날뛰었으므로, 물러나 《역옹패설(櫟翁稗說)》을 저술하였는데, 그 서문에
“내가 일찍이 대부의 반열에 있다가 스스로 물러나 옹졸함을 지키면서 호를 역옹(櫟翁)이라 하였으니, 이는 그 재목감이 되지 못함
으로써 장수할까 하는 뜻에서이다.” 하였고, 또 공민왕(恭愍王) 즉위 후에 우정승에 올랐는데, 원종공신(元從功臣) 조일신(趙日
新)이 자기보다 높은 자리에 이제현이 오른 것을 시기하자, 세 번이나 표문(表文)을 올려 정승 자리를 고사(固辭)하였다.
그해 겨울에 조일신이 한밤중에 궁궐로 침입하여 자기가 꺼리던 사람들을 해쳤는데, 이제현은 이때 화를 면할 수 있었으니, 선견지
명이 있어 81세의 수를 누릴 수 있었다. 이제현은 1362년(공민왕11)에 조정의 공론에 의해 계림부원군에 봉해졌다. 《국역 목은문
고 제16권 계림부원군 시 문충 이공의 묘지명》 《국역 역옹패설전집 역옹패설 전집 서》
ⓒ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ㆍ한국고전문화연구원 | 전형윤 채현경 장성덕 (공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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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牛峯益齋書院奉安祭文
先生山河間氣。廊廟偉器。學窮天人。道冠叔季。名蓋
三韓。譽流上國。忠宣在元。公執羈靮。北學如良。觀風如札。西使峨岷。南從吳越。間關萬里。顯忠著節。斂以東歸。爲世山斗。累秉國匀。民有父母。臨危益堅。履險逾貞。盛德大業。壽考尊名。功化綿邈。文敎丕變。當時榮焉。後思不倦。崇報未遑。腏食無所。邦人憤恥。共謀齊擧。牛山之陽。寔公遊處。相址創宇。徼惠揭虔。靑衿詵詵。奔走執籩。百世非遙。感應不爽。明靈有知。庶歆肸蠁。<끝>
西河先生集卷之十一 / 祭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