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시안[서안(西安)]에서 5일(2-1)
(2024년 4월 24일∼28일)
瓦也 정유순
2-1. 사마천사당(司馬遷祠堂)
조반을 마치자마자 사마천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선다. 사마천(司馬遷, BC 145년∼BC 86년)은 한나라의 시안에서 동북쪽으로 230km 떨어진 용문[(龍門), 지금의 한성(韓城)]에서 태어났다. 시안에서 버스로 약 3시간 정도 걸린다. 한성은 인구 40만 명의 작은 도시로 수나라 시대인 598년에 지금의 지명이 되었다. 사마천이 살았을 때는 하양(夏陽)이라고도 불렀다. 그의 부친 사마담(司馬談)은 천문·역법과 학문을 연구하는 직책인 태사령(太史令)이었다.
<사마천사당 관리사무소>
사마천의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 의하면 기본적인 공부를 마친 후 관직으로 나가기 전인 20살 때부터 중국의 여러 사적을 탐방하면서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남쪽으로 내려가 장강(長江)과 회수(淮水)를 여행하고 회계산(會稽山)에 올라 우왕(禹王)의 동굴 유적을 찾았으며 절강성(浙江省)과 구의산(九嶷山) 등을 둘러보았다. 그 뒤 제나라와 노나라에서 공부하면서 공자의 유풍(儒風)도 관찰한 후 양과 초를 통과해 고향으로 돌아오는 과정에 파·설·팽성에서 곤란을 겪었다고 한다.
<사마천 동상>
주차장에서 내리면 바로 사마천 사당 입구로 멀리서도 사마천의 조각상이 보인다. 길 양쪽에는 태사공자서 즉 사기(史記)의 주인공이 진열돼 있다. 오제(五帝)본기에 등장하는 황제(黃帝)ㆍ전욱(顓頊)ㆍ제곡(帝嚳)ㆍ요(堯)ㆍ순(舜)이 나란히 있다. 사기는 본기(本紀)ㆍ표(表)ㆍ서(書)ㆍ세가(世家)ㆍ열전(列傳)으로 구분해 총 130편으로 구성되며, 52만 자가 넘는다. 잃어버린 부분은 다른 책을 참고했고 후학들이 보강하기도 했다고 한다.
<오제(五帝)상 - 황제(黃帝)ㆍ전욱(顓頊)ㆍ제곡(帝嚳)ㆍ요(堯)ㆍ순(舜)>
바로 옆의 오제본기(五帝本紀)에 대한 설명문이 새겨진 동판에는 ‘탁록지야금살치우(涿鹿之野禽殺蚩尤)’라는 명문(銘文)이 눈에 띈다. 이는 ‘탁록전투에서 치우가 황제에게 사로잡혀 죽였다’는 뜻이다. 과연 치우천왕(蚩尤天王)이 탁록전투에서 황제에게 금살(禽殺)당했을까? 이 글을 보는 순간 사성(史聖)으로 추앙받는 사마천(司馬遷)에 대한 의구심이 홍수처럼 밀려온다. 아무튼 최초로 역사를 정리하고 기록했다는 면에서만 관찰하기로 한다.
<오제본기 동판>
<탁록지야금살치우(涿鹿之野禽殺蚩尤)>
이렇게 일부 왜곡이 의심스럽기도 한 내용도 있지만, 지금까지는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명품 저서로 많이 읽힌다. 인물을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하는 기전체, 시대와 지역을 넘나들며 역사적 줄거리를 서술하는 통사의 효시(嚆矢)가 되었다. 청나라 건륭제(乾隆帝) 때 정한 중국의 정사(正史)인 이십사사(二十四史) 중 첫 번째로 평가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사당으로 들어가는 패방(牌坊)에는 ‘文史聖域(문사성역)’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사당입구 패방(문사성역)>
조각은 대우치수(大禹治水)에서 하(夏)ㆍ은(殷)ㆍ주(周)로 이어지다가 천년을 훌쩍 뛰어넘어 진시황에 까지 도달한다. 길 반대쪽 조각을 보려면 다시 입구까지 다녀와야 한다. 이 넓은 사당광장(祠堂廣場)은 오로지 사마천을 위한 공간 같다. 사마천 조각상 뒤쪽의 낮은 산에 사당과 무덤이 있다. 그 곳을 가려면 지수교를 건너야 한다.
<사당광장>
<대우치수 조각>
지수교(芝秀橋)는 일명 지양교(芝陽橋)라고도 부르며, 한무제(漢武帝)가 이곳에서 영지를 채취하여 이름을 지수로 바꾸었다. <한성현지(韓城縣誌)>에 의하면 지수교는 옛 한성의 교통 요충지로 명륭경(明隆慶) 연간에 처음 건설되었으며, 수몰로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다리는 돌 아치형으로 5공, 길이는 110m, 너비는 5.2m이다. 양측에 돌난간과 망주(望柱)를 설치하였다.
<지수교 표지>
‘漢太史司馬祠(한태사사마사)’라 쓰여진 내삼문을 통과하면 사당 입구에는 옹정황제 9대손 만주족으로 서예가이자 화가, 홍루몽 연구가로 유명한 계공(启功)이 쓴 ‘한태사사마천사묘(汉太史司马迁祠墓)’라고 중국 간자체로 쓰여 있다. 사마천은 젊은 시절 낭중(郎中) 벼슬을 받았고 아버지 사마염이 죽은 후 문서를 관리하는 관직인 태사령을 이어받는다. 궁형(宮刑) 이후 복권돼 고위 관직인 중서령에 오른다. 사마천은 사기 전체에 ‘태사공왈(太史公曰)’이라 적었다. 아버지 사마염과 사마천의 공저라는 의미 같다.
<한태사사마천사묘(汉太史司马迁祠墓)>
다시 길을 따라 올라가 고산앙지(高山仰止)라 쓴 나무 패방을 바라본다. ‘덕망이 높은 사람을 우러러본다’는 뜻으로 공자를 향한 사마천의 마음이 찬미로 부활했다. 패방(牌坊)을 지나면 선명한 백지에 날렵한 필지로 쓴 사필소세라 쓴 편액과 만난다. 史筆昭世(사필소세)는 ‘역사는 붓으로 세상을 소상하게 밝힌다’는 뜻 같다. 이 문을 지나 천천히 지고무상(至高無上)을 상징하는 아흔아홉 계단을 오른다.
<고산앙지(高山仰止)>
<史筆昭世(사필소세)>
열전 마지막 제70권은 사마천의 자전적 기록인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다. 경목하산지양(耕牧河山之陽) 즉, 사마천은 10세부터 고문(古文)을 읽으며 경작과 목축을 하며 자랐다고 적었다. 주경야독으로 독서와 노동을 병행한 것이다. 그래서 하산지양(河山之陽)은 어떤 수사보다 더 의미가 더 크다. 무채색 벽돌로 쌓은 문과 잘 어울린다. 계단을 몇 개 오르니 사당 입구다. 태사사(太史祠)는 1886년 청나라 때 한청 현령이 쓴 글씨다.
<하산지양(河山之陽)>
헌전(獻殿)에는 향불이 피어 있고 기념 비석이 촘촘하게 자리 잡았다. 이어 영원한 안식처를 의미하는 침궁(寢宮)으로 연결된다. 침전 입구에는 파란 바탕에 금색으로 쓴 ‘사성천추(史聖千龝)’란 글씨가 특유의 기품이 드러난다. 천추에 길이 남을 역사가라는 극찬으로 중국서예가협회의 원로가 썼다고 전한다. ‘추(龝)’자는 가을 추(秋)자의 이체자(異體字)이다.
<침궁(史聖千龝, 사성천추)>
사당 뒤에 무덤이 있다. 사마천의 사망 시기는 다소 애매하다. 죽은 후에 바로 무덤을 쓰지 못한 사정이 있을 듯하다. 일가족이 도피 후 고향 부근에 몰래 신위를 봉공하고 의관총을 꾸몄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마천의 후손들이 한성시 서촌(徐村)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데, 그들의 성(姓)은 사마(司馬)가 아니라 ‘동(同)’과 ‘풍(馮)’이란 성을 쓰고 있다.
<사마천 영정>
후손들에 의하면 사기(史記)를 완성한 사마천이 또다시 무제(武帝)의 심기를 건드려 화를 당했고, 이러한 화를 피해 떠났던 후예들이 다시 돌아와서 원래 성에서 ‘사’와 ‘마’를 분리해서 사(司)자 앞에 한 획을 그어 ‘동(同)’자를 만들었고, 마(馬)자 앞에 두이 자를 붙여 ‘풍(馮)자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한나라가 멸망한 후 사마(司馬) 씨가 건국한 서진(西晋) 시대에서야 묘가 만들어졌다. 그후 원나라 쿠빌라이 때에 보수하여 높이 약 3m, 둘레 18m 무덤이 마치 몽골의 게르처럼 생겼다.
<사마천 묘비>
사마천은 친구 임안에게 보낸 편지 ‘보임안서(報任安書)’에 사기를 집필한 심정을 토로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지만(人固有一死, 인고유일사)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或重于泰山, 혹중우태산)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或輕于鴻毛, 혹경우홍모) 죽음을 사용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用之所趨異也,용지소추이야)” 결연한 의지와 심오한 사상이 기록됐다. 1,700년 이상을 산 측백나무가 사마천 묘 위에서 왕관처럼 펄럭이고 있다.
<사마천의 묘>
사당을 나오는 길에 다시 사마천 동상 앞으로 돌아 나온다. 나오는 길에는 본기를 펼친 듯 항우와 유방, 여태후, 한문제, 한경제, 한무제 조각상으로 이어진다. 진시황 사후 초나라와 한나라의 패권 전쟁인 초한지(楚漢誌)가 떠오른다. 한무제 조각상에는 구석에서 집필에 몰두하는 사마천도 보인다. 유방(劉邦)을 도운 공신 장량, 사지가 절단돼 죽은 척부인, 흉노족과 싸운 곽거병, 유학자 동중서도 함께한다.
<항우(서초패왕) 조각>
다음 행선지인 한성고성(韓城古城)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곱씹어 본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사실(史實)은 사실(事實)대로 기록되어야 하는데 최근에 자행한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과 중첩되어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없는 역사도 사실인 양 만들어 가는 중국의 행태를 볼 때, 아마 그 버릇이 사마천의 사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는지…? 물론 당시에 사마천도 철권통치를 한 한무제(漢武帝)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한무제 조각상>
<여태후(呂太后) 조각>
첫댓글 좋은글 올려주심에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