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기의 철학과 불교사상
김 형효(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Ⅰ. 서양근대성의 철학과 소유론의 진리
그리스도교에 의하면, 인간은 신이 금지한 선악과를 먹은 원죄를 범했다고 한다. 그 선악과는 시비분별력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러한 원죄를 저질렀기에 역설적으로 인간은 짐승의 수준을 벗어나서 문명을 이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이 인간을 ‘이성적 동물’로 규정한 이래로 그 정의가 기독교적인 원죄신학의 사유와 결부되면서 더욱 복잡하게 굳어져 갔다. 서양철학적 이성의 개념은 역설적인 두 가지의 뜻을 복잡하게 함의하고 있다. 그 하나는 ‘진/위’를 판단하는 능력인 분별적 이성을 말하고, 이 능력은 기독교적 원죄의 행위와 결부되어 있는데, 이 능력을 순수이성비판의 칸트(Kant)는 축복하였다. 또 다른 하나는 ‘선/악’을 가르는 도덕적 이성의 능력인데, 이 능력은 실천이성비판의 칸트에게 원죄에 대한 깊은 회한의식을 지니게 했다. 이처럼 이성적 인간의 의미는 서양철학사에서 이율배반적인 요인을 지니고 있다. 서양철학이 전통적으로 합리적이라고 부르는 개념의 뜻은 죄우간 분별적 이성과 도덕적 이성을 겸비한 인간을 지시한다. 분별적 이성은 인간의 지성이 자연을 지배하는 능력을 일컫고, 도덕적 이성은 인간의 사회적 지배능력을 가리킨다. 도덕적 이성은 신의 명령을 듣지 않았던 인간의 반항에 대한 회한의식을 품고 있으므로, 인간이 신으로부터 축복을 받는 아들이 되기 위하여 선의지로 세상을 덮어버리겠다는 결의를 담고 있다. 니이체(Nietzsche)는 이런 이성의 철학 ―그것이 분별적이든 도덕적이든― 이 권력의지(Wille zur Macht = will to power)의 산물이라고 촌철살인의 예리함으로 지적했다. 자연을 지배하는 경제기술적 분별의식이 권력의지라는 것은 쉽게 납득이 되나, 선의지에 의한 사회도덕적 이성이 역시 권력의지라는 것은 의심스러워 머리를 갸웃거리게 하리라. 그러나 니이체의 통찰은 예리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정확했다. 그가 통렬히 비판한 서양사의 세 가지 권력의지는 교회와 국가와 사회주의 정당이다. 이 세 가지 권력의지는 이성의 명분으로 서양사회를 지배해온 지배의지와 선의지와 진리의지를 상징한다. 실로 교회와 국가와 사회주의 정당은 다 사회적 본능으로 지배하려한 권력의지의 기구들인데, 겉으로 그런 권력의지가 없는 것처럼 위장한 이성적 진리의지와 선의지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권력의지는 목적론의 사상을 품고 있다. 목적론은 교회와 국가와 사회주의 정당이 부여한 의미가 곧 인민의 의미이므로 그 의미를 목적으로 받들어야 하는 그런 사상을 뜻한다. 로댕(Rodin)의 <생각하는 사나이>의 포즈가 도덕적 선의지의 상징이다. 근육으로 무장된 젊은이의 몸은 지옥 같은 세상을 혁파하려는 선의지를 상징한다. 그 선의지는 사회의 저항을 이겨내야 하므로 근육질의 단단한 몸매를 내세울 수밖에 없겠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나이>는 푸꼬(Foucault)가 비판한 서양 근대정신인 <권력 즉 지식>(le pouvoir-savoir)의 정신을 담고 있다 하겠다. <권력 즉 지식>으로서의 권력의지는 서양근대성의 정신으로서의 소유론을 뜻한다. 서양 근대성의 소유철학은 경제기술적 인간형과 사회도덕적 인간형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비록 서양 근대철학이 존재의 형이상학을 말하고 도덕철학은 전개했다 하여도, 그것은 다 겉으로의 명분일 뿐, 안으로는 소유론의 사상적 맥락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기술경제철학은 인간으로 하여금 편리(便利)의 진리를 소유하게 하였고, 사회도덕철학은 정의(正義)의 진리를 숭상하게 하였다. 편리의 진리는 불편의 반(反)진리와 동거할 수 없었고, 정의의 선은 불의의 악을 용납할 수 없었다. 서양전통철학은 진리와 허위, 선과 악을 이율배반적 성격으로 여겨 양자택일의 선명성 위에 논리를 정립했다. 이것이 변증법이다. 그러나 이 택일적 소유론의 문제점이 근대정신에서 불행히도 간과되어 왔었다. 그 문제점은 낭만주의와 객관주의의 사고방식을 중요시하는 데에 있다. 낭만주의적 사고방식은 소유욕을 주관적 감정으로 미화하는 생리를 말한다. 이 낭만주의의 병은 사회도덕주의적 생각에 술취한 소유욕과 직결된다. 사회를 이상주의적 생각으로 꾸며서, 그 이상의 실현이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낭만적 희망인 것처럼 착각케 하는 병을 말한다. 이른바 마르크시즘의 사회주의는 이상주의인데, 그 이상주의는 인간의 도덕적 소유욕과 다르지 않다. 그 도덕적 소유욕을 아름다운 감정으로 덧칠하여 그것이 인간지배의 소유욕이 아니고, 어떤 존재론적 희망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래서 실현될 수 없는 공상을 위하여 뭇 사람들을 희생시킨다. 또 다른 하나의 문제점은 객관주의적 사고방식이다. 객관주의는 주관적 감정으로 술 취한 소유욕의 허상을 깨게 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그것이 소유주의의 질병을 치유하는 사상이 아니다. 객관주의는 주관적 낭만주의와 이상주의의 감정도 결국 소유주의의 한 변형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객관주의는 누구든지(whoever) 모든 이에게 다 통용되는 언어를 찾는다. 그 언어가 곧 수치다. 객관적 숫자로 표상되지 않는 말은 모두 주관적 낭만이 공상하는 언어로 간주되어, 누구나 다 동의하는 측정 가능한 숫자만을 참으로 받아드린다. 사회주의적 낭만주의가 소유욕이 없는 유토피아를 공상케 하였으나, 그 유토피아가 역설적으로 물질적 소유욕을 억압하는 정신적 도덕지배의 소유욕을 권력의지로 강화시켜 나갔다. 그런데 객관주의는 저 주관적 소유욕을 객관적 수치로 표상할 수 있도록 제도화했다. 그래서 소유의 과다를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객관주의는 소유만이 모든 인간사의 전부인 양 집착케 하여 ‘누구든지’의 인간에서 존재의 요구를 추방시킨 과오를 범했다. 그러나 소유주의의 근대성이 인류사에 이바지한 공로를 무시하면 안 된다. 그것은 인간조건(human condition)의 개선에 크게 기여한 점이다. 인간조건은 인간이 살 수 있는 외적 환경을 말한다. 인간이 습지대에 살기 어렵듯이, 자유와 평등이 무시된 사회에서는 인간이 살아갈 수 없다. 근대성의 소유주의는 인간의 자유를 증진시키고, 불평등의 조건을 개선시켰다는 점에서 이른바 인권(human right)의 향상을 기한 큰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 자유와 평등은 소유론적 차원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에, 자유와 평등이 인간본성(human nature)에 입각한 존재론적 차원으로 승화되지 못했다. 그래서 자유는 더 많은 자유의 소유를 갈구하고, 평등은 더 대등한 소유의 인정을 요구하게 된다. 이런 소유론적 자유와 평등의 확장은 자유가 소유론적 방종의식으로 나아가고, 평등이 소유론적 대등의식과 질투심으로 진행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제 우리는 인간 조건적인 자유와 평등의 소유보다, 인간 본성적인 자유와 평등의 존재방식이 무엇인가 숙고해야 한다. 여기서 불교적인 무애(無碍)의 자유와 원융(圓融)의 평등이 다시 철학적으로 클로즈업된다.
Ⅱ. 전환기에 선 철학적 사유
21세기는 소유론적 사상에서 존재론적 사상에로의 대전환기를 말한다. 근대성의 소유론의 철학과 21세기적인 미래적 사유로서의 존재론적 철학을 간략히 비교해 보자. 근대성의 철학이 비록 존재론적인 개념을 사용했으나, 그것은 하이데거적인 뜻에서의 存在者學 (ontische Wissenschaft = ontical science)의 개념으로서 소유론에 해당하지 엄밀한 의미에서의 존재론적 사유(ontologisches Denken = ontological thinking)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겠다. 소유론적 철학은 하이데거적인 용어로 존재자적인 관심을 나타내는 학문을 말한다. 존재자적인 학문은 존재론적 관심을 탐구하는 사유와 구분된다. 존재자적인 관심은 이른바 명사적 사고방식을 표시하는 학문이다. 명사적 사고방식은 철학이 개별적 명사로 지칭 가능한 것들에 대한 관심을 표시하는 것으로, 개별적 명사가 이른바 존재하는 것(존재자)을 대변한다고 여기는 사고를 뜻한다. ‘하늘/별/구름/사람/나무/동물/자동차…’ 등에 대한 관심은 결국 개별과학의 성과를 촉진시켰다. 여기서 ‘존재한다’라는 동사는 개별명사 뒤에 자연적으로 붙는 부가어처럼 취급된다. 이것이 존재자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존재론적 사유방식은 위의 각 명사들 뒤에 공통적으로 놓이게 되는 ‘존재한다’라는 동사를 더 주목한다. 이 동사는 자동사로서의 공통용어로 쓰이는 의미를 묻는 사유다. 이것이 존재론적 사유의 본질이다. 과거의 존재자학은 이 ‘존재하다’의 동사적 의미를 직접 물었다기 보다, 오히려 각 존재자의 단독적 실체에 더 학문적 관심을 보냈다고 볼 수 있다. 존재자적 사고방식은 개체적 존재자냐, 아니면 개체를 합친 전체적 존재자냐 하는 구분을 더 중시한다. 그래서 개체와 전체의 양적 구분이 중요한 존재자학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존재론적 사유에서 <존재하다>의 동사는 모든 존재자에 대 적용된다. 존재하는 현상은 조그만 微塵의 존재부터 거대한 우주의 존재까지 다 적용되는 共鳴의 현상을 지니고 있으므로, 개체와 전체의 구분에 의미가 없다. ‘一卽一切’와 같은 義湘大師의 法性偈의 한 구절이 대단한 존재론적 의미로 다가온다. 그러므로 존재자학은 존재자가 자기동일성을 지니는 뜻으로 해석되지만, 존재론에서는 모든 존재가 다 서로 ‘상관적 차이’(pertinent difference)로 엮어진 그런 그물망을 형성하게 된다. 자기동일성은 사회적 경쟁의 관계에서 밟히지 않으려는 자기주장의 진원지이지만, 상관적 차이는 자연적 연계관계의 한 그물코에 불과하다. 전환기에 선 철학은 이제 사회철학에서 자연철학으로, 이성철학에서 본능철학으로, 투쟁법의 철학에서 균형법의 철학으로 옮아가는 법을 익혀야 한다. 여기서 니이체(Nietzsche)의 철학이 이토록 더 귀중하게 여겨질 수 없다. 니이체가 말한 超人(Übermensch = overman)의 의미가 여기서 분명히 나타난다. 오랫동안 나는 니이체의 초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죽은 신을 대신한 새로운 초월적 인간 정도로만 짐작했다. 그러나 초인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사회적 이성의 영역에서 자연적 본능의 영역으로 다리를 건너 옮아가는 인간을 의미한다. 니이체의 사유를 해독하기 어렵게 하는 요인이 있다. 그는 사회적 본능과 자연적 본능을 같은 용어(Instinkt = instinct)로 사용했고, 사회적 권력의지와 자연적 힘의 의지를 역시 같은 용어(Wille zur Macht = will to power)로 썼다. 강자의 개념도 사회적 강자와 자연적 강자로 나누어진다. 니이체는 저 두 가지 뜻을 하나의 개념으로 쓰면서도, 그 뜻의 차이를 논리적으로 분석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사회적 이성과 자연적 본능, 소유와 존재가 종이 한 장의 차이처럼 시발에서 미미하지만, 그것이 나중에 엄청난 거리를 띄게 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일 것이다. 니이체에 의하면 그동안 사회(문명)은 이성의 이름으로 진리의지, 도덕의지 등이 명분으로 작용하여 온 사회적 본능의 역사이다. 사회적 본능이란 곧 권력의지를 말한다. 인류의 사회문명은 교회, 국가, 사회주의 정당 등이 지배계급이 되어서 자기들의 권력의지를 정당화하기 위한 소유론적 철학의 터전이었다. 사회적 본능은 사실상 지배층의 권력의지를 정당화 해주기 위한 진리의지와 도덕의지에 다름 아니다. 진리의지와 도덕의지는 늘 이성의 이름으로 작용하여 왔었다. 이제 그 위선의 벽을 깨뜨리는 초인이 등장했다. 그가 바로 니이체이다. 과거 존재자학을 지배해 온 본능의 욕망은 곧 탐욕이다. 강자는 탐욕의지가 강한 자를 말한다. 이 탐욕의지는 프랑스의 해체철학자 바따이유(Batille)의 표현을 빌리면 ‘제한경제’(l'économie restreinte = restricted economy)를 실시하는 ‘지배권’(la maîtrise = mastership)에 다름 아니다. 제한경제란 시장경제처럼 자기의 이익을 사량하여 늘 그 측면애서 경제행위를 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지배권이란 사회문명을 도덕적으로 정신적으로 지배하려는 권력의지를 반영한다. 그러나 자연적 본능인 힘의 의지는 소유하기 위한 제한경제를 실시하지 않고 가급적 더 많이 보시하고 더 많이 주려는 ‘일반경제’(l'économie générale = general economy)를 뜻한다. 태양, 비, 바람 등은 다 많이 자신을 주면서 다른 것들에게 생명의 에너지를 공급해 주는 넘쳐흐르는 힘의 폭발을 뜻한다. 이것이 일반경제이고 ‘비경제적 경제행위’(l'économie anéconomique = noneconomic economy)와 유사하다. 이 일반경제의 의미는 사회를 권력의지로 지배하고자 하는 탐욕의 소유가 아니라, 다 많은 힘을 아낌없이 제공하여 존재를 보시하려는 ‘지상권’(la souveraineté = sovereignty)과 같다고 바따이유가 보았다. 지상권은 그 이상의 것이 존재할 수 없는 무상의 권리를 말한다. 태양과 달, 물과 바람과 흙 등은 무상의 지상권을 가지고 타자를 존재케 하는 힘을 준다. 이것이 자연적 힘의 의지(will to power)로서 사회적 권력의지(will to power)와 다른 점이다. 주려는 자연적 강자의 힘은 소유하기 위한 인간사회의 본능이 아니다. 사자 중의 최고 강자의 사자는 씨를 뿌릴 지상의 권리를 향유한다. 최고 강자의 반열에 오른 사자는 자기에게 도전하지 않는 한에서 다른 사자들에게 먹을 권리를 용인해주지만, 씨는 혼자서 뿌린다. 그러나 인간처럼 소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연의 생존을 위하여 강한 씨를 뿌리면서 자기 것을 거두지 않는다. 일단 성장하면, 모든 새끼가 다 뿔뿔이 흩어져서 또 생존할 뿐이다. 이것을 데리다(Derrida)는 散種 (la dissémination = dissemination)이라 불렀다. 산종은 소유가 아니다. 다만 강한 자를 흩뿌릴 뿐이다. 老子가 道德經 81장에 기술한 ‘聖人不積하고 旣以爲人하니 己愈有하고, 旣以與人하니 己愈多하다’(성인은 소유하지 않고, 이미 타인들을 위하므로 자기는 더욱 존재하고, 이미 타인들과 함께 하니 자기는 더욱 많아진다)는 구절이 곧 초인의 경지를 말하겠다.
Ⅲ. 사회적 본능과 자연적 본능
그러므로 사회적 본능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으로서 투쟁과 일방적 승리의 법을 구가하고, 자연적 본능은 상생과 상극의 균형법으로서 ‘生/滅, 利/害, 强/弱, 陰/陽’의 상관적 차이를 근원적 사실의 법칙으로 읽는다. 이것을 우리는 이중긍정이라 부른다. 이중긍정이라 하여서 이원론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이미 華嚴學의 개조인 杜順大師나 法藏賢首大師가 잘 밝혔듯이 ‘生은 滅之生이고 滅은 生之滅’인 만큼 生과 滅은 각각 반대의 것으로부터 뫼비우스(Moebius)의 띠처럼 한 번 뒤집혀진 새끼꼬기를 단행한 것으로 읽어야 한다. ‘利/害’와 ‘强/弱’과 ‘陰/陽’도 다 상대방과의 상관성을 유지하는 依他起性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生/滅’은 각각 타자의 흔적으로 생긴 작용과 반작용에 불과하므로, 자기의 고유한 自家性을 지닐 수 없다. 각자는 다 타자의 흔적으로 설치된 임시적 존재양식을 지닌다. 이래서 ‘생/멸’도 그 자체 자기 고유성이 없으므로 龍樹(Nagarjuna)보살의 해석처럼 空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다. 空은 非生非滅의 이중부정과 같다. 자연의 본능의 존재방식을 色으로 보면, 그것은 이중긍정인 ‘生/滅’과 ‘利/害’와 ‘强/弱’과 ‘陰/陽’이고, 空으로 보면, 그것은 이중부정인 ‘非生非滅’, ‘非强非弱’, ‘非利非害’, ‘非陰非陽’이라고 읽지 않을 수 없다. 저 자연의 본능을 불교적으로 보면, 그것은 바로 자연의 如法한 佛性이다. 이처럼 자연의 道는 이중긍정과 이중부정의 두 갈래의 법으로 짜여져 있다. 이중긍정은 緣起法으로, 이중부정은 空性法으로 명명되어도 괜찮겠다. 자연의 道에서 자기 것이라고는 없다. 자연의 일체는 타자로부터 다 빌려 온 것이다. 한 그루의 나무의 존재도 스스로 자가성으로 지녀 온 것이 아니라, 태양과 물과 바람과 흙으로부터 다 빌려 온 것들이 응집된 것이라 읽어야 하겠다. 일체의 존재는 자연에서 다 假有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자연의 일체가 존재론적으로 假有라는 것은 현상적 명명이고, 본질의 명명에서 그것은 다 空性이라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자연의 세계에서 自我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자아의 개념은 철두철미 사회적 산물이다. 사회는 각자의 의식에게 억압과 불평등을 느끼게 한 까닭에 자의식을 일깨우고 있다. 사회는 자연과 달라서 각자로 하여금 인간들 사이에 억압과 불평등의 차별을 수놓고 있다. 그런 억압과 불평등의 차별이 자의식의 강도를 더욱 예리하게 만들어 놓는다. 사회적 강자의 지배의지와 권력의지가 결국 사회적 부자유와 불평등의 골을 만드는 셈이다. 그러나 사회적 억압과 불평등은 이미 앞에서 거론되었듯이 소유론적 개념이다. 불교적 자유와 평등의 의미는 자의식이 느끼는 그런 소유론적 차원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의 道가 이중부정적인 空性의 무애한 자유와 이중긍정적인 현상의 상관적 차이의 존재방식에 의한 원융한 평등을 이루고 있음을 알린다. 그러므로 불교적 자유와 평등은 자연의 존재방식처럼 존재론적 차원의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제 전환기의 철학은 소유론적 자유와 평등의식에서 존재론적 자유와 평등으로 옮겨져야 한다. 자의식은 사회적 본능의 소산이고, 연기법과 공성법은 자연적 본능의 생리이다. 이제 사회적 본능과 자연적 본능을 비교하련다. 사회적 본능은 자아중심적이고, 경쟁적이며, 대립적인 관계에서 억압과 불평등을 조장하므로, 필연적으로 사회생활에서 ‘지배/종속’의 이율배반적 택일의 가치가 제기된다. 부르주아적 지배권이 싫어서 프롤레따리아의 혁명을 일으킨 그 사회적 세력들이 자기들끼리의 권력의지를 재편한 다음에 그 내부에서 다시 지배적인 프롤레따리아와 종속적인 프롤레따리아로 양분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도덕적 선의지의 부재가 아니라, 사회적인 것의 본능이 본디 그러하기에 생긴 현상이겠다. 이제 인류는 사회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으로 대치되지 않고서는 결코 억압과 불평등이 없는 무애하고 원융한 존재론적 삶의 양식을 구가한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아야 하겠다. 자연적 본능은 自他가 상호 교감적이고, 교차적인 교류의 차원임을 알린다. 그러므로 자연적 본능은 소유를 위한 경쟁적인 상호관계를 不二的인 존재방식의 상호관계로 전향시키며, 대립적 모순투쟁의 관계를 상관적 차이의 엮기로서 치환시킨다. 그리고 지배와 종속의 양자택일적 이분법을 버리고, 상생과 상극의 이중적 관계로서 자연의 본능은 나타난다. 이 자연의 본능이 佛性이고, 에카르트(Eckhart)가 말한 神性(Gottheit = Godhead)과 그리스도性(Christlichkeit = Christness)이고, 양명학이 말하는 良知이다. 이 佛性과 神性과 良知가 다 자발적이고 무위적인 자연의 자기 嗜好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불성을 나타내는 길은 자연의 본능을 자발적으로 펼치는 것밖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사회적 본능의 차원에서 보면, 인간의 사회적 감정의 소용돌이는 다 번뇌망상이다. 그 본능의 충동에 의하여 인간은 사회적으로 끄달리고 울렁거린다. 그러나 그 본능의 울렁거림과 끄달림을 자연적 본능으로 치환시키면, 그것이 불성의 다양한 표현이 된다. 파도의 출현을 사회적으로 보면, 그것은 크고 작은 번뇌망상이지만, 그것을 자연적 차원에서 보면, 모든 마음의 파도는 다 비로자나불의 무한한 힘이 스스로 빚어내는 금빛 찬란한 언어의 표현이 아니겠는가? 자연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물은 다 바람과 인력의 작용에 의하여 波浪을 일으키게 되어 있다. 波浪은 자연적 현상이다. 사회적 차원에서 생긴 중생의 다양한 번뇌망상은 자연적 차원에서 보면 불성의 다양한 啓示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자연적 본능의 입장에서 각자가 타고난 개성적 一音은 곧 여래광명의 圓音의 한 특수한 別音에 불과한 것이 된다. 각자가 다 타고난 자연적 본능의 자발적 長技를 살려 자연의 차이처럼 그렇게 엮어내면, 거기에 바로 佛國土가 현시되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꼭 廓徹大悟의 아득하고 먼 究極處에 이르기 위하여 고행하는 難行의 길을 택해야 할 까닭이 무엇인가? 나는 한국불교가 너무 극단적 두 길을 추상적으로 벌려 놓았다고 여긴다. 하나는 엄청난 고행의 길을 가기 위해 용맹정진하는 수행자의 길이요, 또 다른 하나는 세속의 범부도 잘 하지 않는 탐욕의 길에서 정신을 잃어버린 삭발자의 행태이다. 탐욕의 길에 빠진 삭발자의 경우는 용맹정진의 고행이 너무 어려워서 결과적으로 포기상태에서 정반대로 떠내려간 업이 아닌가 하고 나는 물어본다. 불교의 수행이 너무 고행에 가까운 難行이어서는 안 된다. 이미 부처님이 중도를 설파하시지 않았던가! 지나친 난행은 일상적 불자들이 따라 하기가 힘들다. 하이데거(Heidegger)가 인생의 본래성(Eigentlichkeit = authenticity)을 회복하기 위한 철학사상이 일상적 평균성(alltägliche Durchschnittlichkeit = everydays average)의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을 나는 매우 중요시한다. 대승불교는 일상적 평균성의 차원에서 전개되는 마음의 전환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한국불교가 대승이라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에게 대승의 정신을 생활케 하는 길을 알려주는지 의심스럽다. 대승사상은 일상인의 평균성에서 불교가 출발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상인은 상인의 직업에서, 기술자는 기술자의 직업생활에서, 기업인은 기업인의 현장에서, 군인은 군인의 군복 속에서 사회적 본능이 숨고 자연적 본능이 일어나도록 해야 하겠다. 이것이 직업정신이고, 이 직업정신이 바로 대승정신의 전개가 아닌가? 상인은 돈을 버는데, 모든 신경을 다 쓴다. 그런 상인에게 ‘뜰 앞의 잣나무’와 같은 화두는 너무 아득하지 않는가? 오히려 참선에 들어가고자 하는 상인의 화두는 ‘왜 나는 돈을 못 버는가?’ 또는 ‘어떻게 나는 돈을 벌 수 있는가?’하는 것이 상인의 화두로 적합하지 않겠는가? 각자의 마음에 절실한 것이 아니면, 화두는 잡히지 않는다. 직업정신을 귀하게 여기자. 나는 한국불교가 사회적 본능을 자연적 본능으로 마음의 본능을 바꾸는 일을 일으켜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을 시행하는 것이 수행이겠다. 모든 수행은 自利的인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參禪이나 經典공부나 念佛이나 寫經이나 다라니 暗誦 등 그 수행의 방편이 다양하다. 방편바라밀이 매우 중요하다. 수행은 사회적 본능을 자연적 본능으로 바꾸는 과정을 말한다. 수행공부는 각자가 타고난 자연적 如意珠를 바깥에서 탈취해 오는 것이 아니라, 자가 안에서 그 여의주를 꽃피우는 것에 해당하겠다. 자기가 스스로 여의주를 입에 물고 일을 하니, 그 일은 곧 利他行을 가져오는 결과를 빚는다. 대승불교사상은 거리의 모든 이가 작은 부처로, 그 부처가 가정생활과 직장생활에서 자리이타행을 실시하는 작은 부처가 되도록 길을 인도하는 사상이겠다. 작은 부처는 니이체가 말한 超人의 철학과 다르지 않다. 이미 앞에서 거론했듯이, 그 동안 사람들은 초인을 많이 말했으나, 정작 그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초인은 신이 죽은 다음에 擬似神처럼 인간이 神의 입장으로 초극하는 그런 모호한 의미가 아니고, 사회적 본능의 명분으로서의 사회적 이성의 권력의지에서부터 자연적 본능의 자발적인 힘의 의지에로 인간됨의 자리를 옮기는 것을 가리킨다. 즉 초인은 사회적 인간에서 자연적 인간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을 말한다. 사회적 인간은 격정적이다. 격정적인 인간을 더욱 격정적으로 만드는 것이 정치적 종교적 권력의지다. 작은 부처되기의 길은 격정적 감정을 진정시켜, 더 많은 福樂의 이익을 주위에 보시하려는 생활인의 마음혁명과 다르지 않겠다. 마음혁명, 이것은 전환기의 21세기에 불교학이 진실로 철학적으로 사유해야 할 주제일 것이다.
주제어 철학의 전환(shift of philosophy), 근대성(modernity), 니이체(Nietzsche), 권력의지(will to power), 초인(Übermensch), 사회적 본능(social instinct), 자연적 본능(natural instinct) Philosophy at Turning Point and the Buddhist Thoughts
Kim, Hyung-hyo
Nietzsche pointed out that the traditional rationalism of the Western philosophy was a product of the "will to power." The spirit of "le pouvoir-savoir" (power-knowledge), that Foulcaut specified and criticized as the basis of the modernity, stems from it. The will to power in the form of "le pouvoir-savoir" refers to the "philosophy of possession" that is the very basis of modernity. Romanticism objectivism are also variations of the "philosophy of possession." The philosophy of possession, or modernity, has made great contributions to the enhancement of human conditions, especially in terms of freedom and equality. The ideals of freedom and equality, however, failed to be enhanced on the ontological dimension, for they were merely taken as meaning expansion of possession. The 21st century requires a shift from the philosophy of possession to ontological thinking, in other words, from philosophy of society to that of nature, from philosophy of reason to that of instinct. Nietzsche's concept of Übermensch is insightful in this regard, since it refers to the shift from social reason (or instinct) to natural instinct. Social reason has worked for hypocritical justification of the ontical will to power or selfish greed of rulers who monopolize, in Batille's words, "mastership" and establish "restricted economy." The will to power as natural instinct, on the other hand, goes for "general economy" or "non-economic economy" on the basis of "sovereignty," not "mastership," as we can see in how nature works. Buddhist doctrines, including those of "dependent origination" and "emptiness," are full of the insights into the dimension of natural instincts. They teach us to overcome social instincts, that lead to master/slave dichotomy, and go for natural instincts that seek for symbios of all individuals. Buddhism, therefore, has much to contribute to articulation of a new philosophy required in the 21st century, that is, the philosophy of human ontology or natural instincts. Korean Buddhism needs to establish, or recover, the appropriate ideal of Buddhist "practice" in order to be the agent of the new philosophy. Buddhist practice is all about shifting one's social instincts to natural ones. Each practitioner should cultivate oneself so as to live in accordance with his/her Buddhahood (= natural instincts), and then altruistic or symbiotic mode of life will be naturally accomplished. It may be called the life of a "little Buddha," which is not different from what Nietzsche envisioned when he talked about Übermensch.
|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