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공간 황순원 소설의 생태 비평적 연구
-「목넘이 마을의 개」와 「이리도」를 중심으로
김종성(소설가, 전 고려대 문화창의학부 교수)
Ⅰ. 서론
미국의 생물학자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이 지은 『침묵의 봄(Silent Spring)』(1962)의 출간은 사람들이 환경오염(environmental pollution)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계기가 되게 했고, 환경보존(environmental preservation)의 중요성을 깨닫게 했다. 산성비, 오존층 파괴, 기후 변화(Climate Change), 감염병 대유행(pandemic) 등의 전 지구적 문제가 발생하자, 사람들은 생태학(ecology)과 생태계(ecosystem), 환경문제(environmental problem)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독일의 생물학자 헤켈(E. M. Haeckel)은 “생태학은 유기적 환경과 무기적 환경에 대한 동물의 총체적인 관계를 취급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1935년 영국의 생물학자 탠슬리(Authur G. Tansley)가 처음으로 사용한 생태계란 용어는 “생물이 물과 공기 그리고 토양을 근거로 영양분을 섭취하고 물리적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생명 유지체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생태계(ecosystem)는 개체군(population), 생물군집(community), 서식처(habitat), 환경(environment) 등 모든 생명체와 그 생명체들이 살아가는 무기 환경을 포함한다.
생태학자들이 생물의 자연환경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생물학의 한 분야에서 진일보하여 인간을 포함한 생물권과 지구 환경과의 상호관계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오늘날 생태학을 언급하지 않고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또한 생태학은 환경문제의 본격적인 해결을 모색하면서 논의의 폭을 넓혀온 결과 사회과학과 인문과학의 성격까지 포괄하는 종합 학문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린 화이트 2세(Lynn White Jr)는 「생태 위기의 역사적 근원(The historical roots of our eclogic crisis」에서 인간과 자연 사이의 구분을 초래한 중세 기독교 사상이 생태 위기(eclogic crisis)의 역사적 근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역사적으로 중세 기독교가 자연을 지배하는 분명한 경향을 지니게 되었으며, 자연은 인간에게 봉사하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존재의 근거도 갖고 있지 않다는 기독교적인 도그마(dogma)를 버리기 전까지는 생태 위기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의 환경위기(environmental crisis)가 과학과 기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환경위기에 대한 본질적 대책이 아니라고 주장한 린 화이트 2세의 「생태 위기의 역사적 근원」은 근본 생태론(deep ecology, 심층생태론)의 등장에 많은 자극을 주었다.
근본 생태론이라는 용어는 1973년 아느 네스(Arne Dekke Eide Næss)가 「피층 생태운동과 장기적인 심층 생태운동(「The Shallow and the Deep, Long-Range Ecology Movement. A summary」)을 발표하면서 쓰이게 되었다. 근본 생태론의 공식적인 기원이 되는 문건인 이 논문에서 표층 생태론(shallow ecology) 대 근본 생태론(deep ecology)이란 용어로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 대 생태중심주의(ecocentrism)라는 담론을 끌어낸 아느 네스의 근본 생태론을 계승하고 확대, 심화시킨 드볼(Bill Devall)과 세션즈(George Sessions), 카프라(Fritjof Cafra), 스나이더(Gary Snyder), 짐머만(M. Zimmerman), 폭스(W. Fox), 드렝슨(A. Drengson) 등 근본 생태론자들의 입장을 단순하게 이해하자면, 그것은 근대의 과학적 세계관과 인간중심주의에서 비롯된 인간의 교만과 이에 따른 환경위기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다. 오늘날의 환경위기와 현대인의 자아 및 정체성 상실에 주목하고, 이것을 현대 문명의 쇠퇴 증후로 파악하는 근본 생태론자들은 인간은 자연 일부분일 뿐인데도 인간은 자연과 인간이 유리된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근본 생태론과 더불어 환경생태 담론의 중요한 축의 하나인 사회생태론(social ecology)은 환경문제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타인에 대한 인간의 지배 결과라고 보면서 환경위기의 원인을 일정한 사회구조(social structure)로서 특권계급(privileged ranks)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위계 구조(hierachy)에서 찾는다. 위계 구조를 제도화된 사회적 관계로 보는 머레이 북친(Murry Bookchin)은 환경문제는 사회문제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사회적 비판과 사회적 변혁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린 생태주의만이, 자연 그리고 인류에게 유익한 방식으로 사회를 변혁하는 수단을 제공할 수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준다.“고 했다. 또한 그는 “오늘날 우리는 디케(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정의의 여신상), 신, 성령, 또는 엘랑비탈(생명의 활동)이 아닌 자연이 우리에게 스스로 그 자체의 언어를 윤리적으로 드러내 보이도록 하는 가능성에 직면해 있다(Today, we are faced with the possibillity of permitting nature⎯ not Dike, Justittia, God, Spirit, or an élan vital⎯ to open itself to us ethically on its terms)”고 주장했다. 인간의 무자비한 자연 지배를 초래한 사회구조적인 요인을 찾아 개혁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입장을 견지하며 역사의 진보를 이루어낼 인간의 잠재력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그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자연을 지배해야겠다는 관념은 다름 아닌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는 점을 중요시해야 한다. 인간사회의 지배구조는 자연계를 위계적인 연속체로 연결해 주목하게 했다. 이러한 자연관은 역동적인 진화의 관점⎯생명체가 주관성과 유연성이 점점 더 확대되는 방향으로 발전한다는 관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정적인 자연관이다.
We must emphasize here that the idea of dominating nature has its primary
source in the domination of human by human and in the structuring of the natural world into a hierarchical chain of being (a static conception, incidentally,
that has no relationship to the dynamic evolution of life into increasingly advanced forms of subjectivity and flexibility).
머레이 북친은 근본 생태론자들이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는 것에 대해 자연 지배와 약탈에 책임이 있는 사람은 전체 인간이 아니라 가부장제 속의 남성이나 자본주의 체제의 자본가 등 특수한 집단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라고 반박한다. 그는 인간의 간섭이 최대한 배제된 자연 지대인 원생 지대의 지정과 확대를 중요하게 여기는 근본 생태론자들에 대해 야생의 자연과 야생 생물만을 신비화하고, 인간을 단순히 하나의 동물 종으로 격하시키며, 인간과 자연의 관계만을 중시하고 인간과 사회와의 관계를 경시한다고 비판한다. 머레이 북친의 눈으로 보면, 여성운동· 빈민운동 ·민중운동 등 사회경제적 정의와 평등을 향한 실천들과 거리를 두고 오직 생태운동에만 관심을 두는 근본 생태론은 ‘원생 지대 숭배교’라고 할 수 있다.
머레이 북친은 사회적 비판과 사회적 변화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린 생태주의만이, 자연 그리고 인류에게 유익한 방식으로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환경생태 담론이 문학 연구 방법으로 주목을 받는 담론을 형성하는 데 이정표 역할을 한 책이 쉐를 글로페티(Cheryll Glotfelty)와 해롤드 프롬(Harold Fromm)이 공편한 『생태비평 독본(The Ecocriticsm Reader: landmarks in literary ecology)』(the Univresity of Georgia Press, 1996)이다. 쉐를 글로페티는 「서론: 환경위기 시대의 문학 연구(Introduction Studies in an Age of Environmental Crisis)」에서 “생태비평이란 무엇인가. 간단히 정의하자면, 생태비평은 문학과 자연환경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이다(What then is ecocriticsm? Simply put, ecocriticsm is the study of the relation beetween literature and the physical environment)”라고 정의를 내렸다. 그리고 그는 생태비평(ecocriticism)의 특징으로 “…생태비평은 문학 연구에 있어서 지구 중심적 관점을 취한다(…ecocriticsm takes an earth- centered approach to litrerary studies)”라고 말했다. 환경위기에 직면하여 독자에게 생태 의식(ecological consciousness)을 고취해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반인간중심주의(antianthropocentrism) 관점에서 보도록 끌어낸 쉐를 글로페티와 글렌 러브(Glen Love)의 생태주의(Ecologism)는 우리나라의 생태비평 연구에 영향을 끼쳤다. 1990년대부터 생태비평의 생태 중심적 자연관을 수용하여 인간중심주의를 부정하는 근본 생태론을 담론의 근거로 삼아 생태비평론을 펴는 우리나라 연구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후, 우리나라의 학계는 생태 중심적 자연관에 경도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 미국의 학계에서는 생태비평의 일방적인 생태 중심적 자연관에의 경도에 대한 비판이 나타났다.
2000년대에 들어서 이와 같은 생태비평의 생태 중심적 자연관에의 경도에 대해 내부로부터 본격적인 자성의 목소리와 외부로부터의 비판이 제기된다. 자성과 비판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생태비평이 심층 생태론적 자연관을 가장 중요한 비평적 판단 근거로 삼아 옴으로써 정작 우리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인간 사회의 제반 환경문제 환경파괴와 사회문제의 연관성에 눈감아 왔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생태비평의 새로운 경향은 환경정의의 관점에서 자연과 여성, 빈부·인종과 자연환경의 연관성, 세계와 환경, 지구온난화 같은 다양한 사회·문화적 이슈를 반영하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신두호는 「갈색 풍경의 생태학: 도시자연문학의 등장」에서 ‘녹색의 문학’에서 ‘갈색의 문학’으로 이동해 미국 문학계에 도시자연문학이 등장하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근본 생태론적 자연관에서 벗어나 자연과 여성, 빈부·인종과 자연환경의 연관성, 세계와 환경, 지구온난화 같은 다양한 사회·문화적 이슈를 반영하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로렌스 뷰얼(Lawrence Buell)은 『위기에 처한 세계를 위한 문학(Writing for Endangered Work)』(2001)에서 생태비평이 근본 생태론적 관점에서 사회생태론적 관점으로 이동해야 할 당위성을 강조했다. 그는 사회생태론적인 관점에서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리처드 라이트(Richard Wright), 시어도어 드라이저(Theodore Dreiser)의 작품을 중심으로 19·20세기 영국 및 미국의 도시 환경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그리고 그는 『환경비평의 미래(The Future of Environmental Criticism)』(2005)에서 ‘생태비평(ecocriticism)’이란 용어를 ‘환경비평(environmental criticism)’으로 대체하자고 주장했다. 문학 연구에서 환경으로의 관심 이동은 방법론이나 패러다임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이슈에 의해 주도되었기 때문에 ‘환경비평’이 ‘생태비평’보다 적합한 용어라는 것이다.
1990년 이후 전개된 우리나라 소설의 생태 비평적 연구에 나타난 문제점은 생태 중심적 자연관에 경도되어 있는 근본 생태론적 관점 중심으로 소설을 연구한다는 것과 정전소설(正典小說)에 대한 생태 비평적 연구가 미약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학계의 상태에서 이승준이 『한국현대소설과 생태학』(작가, 2008)에서 근본 생태론적 관점으로 황순원·홍성원·이청준·이문구의 소설을, 김종성이 『한국 환경생태소설연구』(서정시학, 2012)에서 사회생태론적 관점으로 김원일·조세희· 한승원의 소설을, 곽경숙이 『한국현대소설의 생태 비평적 연구』(역락, 2013)에서 근본 생태론적 관점으로 김동리·오영수·황순원의 소설 등 우리나라의 정전소설을 각각 연구한 것이 논의의 대상이 될 만한 선행 연구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이 글에서 해방공간(1945년∼1950년)의 황순원 소설을 생태 비평적 관점으로 「목넘이 마을의 개」(『개벽』, 1948. 2·3합호)와 「이리도」(『백민』,1950.2)를 중심으로 논의해보고자 한다.
Ⅱ. 일제 전시 체제 시기의 생명과 해방공간의 생명
1. ‘목넘이 마을의 개’의 생명과 억압의 위계 구조
‘조선 공업화’ 정책에서 ‘병참 기지화’ 정책으로 전환한 일본제국주의는 1937년 중일전쟁 도발, 1938년 국가총동원법 통과를 계기로 국가총동원 체제와 한민족 말살 정책을 한층 더 강화했다. 그리고 일본제국주의는 징병제의 시행(1943)과 학병제의 시행(1944) 등으로 한국의 젊은이들을 전쟁터에 끌고 가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또한 일본제국주의는 그 사전 정지 작업의 하나로 창씨제도의 실시(1940), 국민 총력 조선 연맹 결성(1940) 등을 펼쳐, 한국인의 반일 감정을 무마하고 한국인의 황민화(皇民化)를 위해 한국인과 일본인은 역사적으로 한 민족임을 내세우는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을 펼쳐 한국인들로 하여금 ‘대동아공영권’의 추진력이 될 것을 요구했다. “1940년 10월 소위 고도국방국가 건설의 완성이란 기치 아래 국민 총력운동을 성립시켰던” 한국의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이 전쟁 수행을 위해 동원되는 만큼, 사회 전반을 전체주의 이념으로 규제했던” 일본제국주의는 미곡 공출을 전개해 한국의 농가경제를 파탄시켰다.
1945년 8·15광복 후 북위 3·8도선 이남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이데올로기의 갈등으로 문학 예술계가 좌익과 우익 진영으로 갈라져 대립하였다. 해방공간에 황순원이 발표한 소설 가운데 일본제국주의 식민 지배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일제 식민지 치하의 삶이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비판적으로 묘사한 소설로 「술」(『신천지』, 1947. 2)·「황소들」(『목넘이 마을의 개』, 육문사, 1948. 12)·「목넘이 마을의 개」(『개벽』 1948, 2·3 합호』) 등이 있다.
해방공간에 북한 평양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여 일본인 나카무라가 경영하던 적산 양조장의 경영권을 둘러싸고 한국인들끼리 대립하는 양상을 비판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술」은 “일제 잔재 세력을 청산하여 진정한 민족적 해방을 달성하는 작업이 정치적인 문제일뿐더러 사회·경제적인 문제요, 또한 개인들의 의식 내부의 문제이고 함을 깊이 있게 추구한다.” 현재형 서술을 통해 해방 직후의 시대상을 핍진하게 묘사하고 있는 「황소들」은 광 속에 쌀가마니를 가뜩 들이쌓아놓고 몰래 일본이나 다른 데로 팔아먹는 악덕 지주와 선량한 농민들을 괴롭히는 정치 권력에 대한 농민들의 분노와 반항의 정신을 주제화하고 있다. 염무웅은 「황소들」이 “우리 신문학사상 가장 진지한 업적으로 평가되어야 할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일본제국주의의 수탈을 피해 만주의 서북간도로 이주하는 유랑민이 버리고 간 암캐 신둥이의 이야기를 그린 「목넘이 마을의 개」는 “완고하다 할 만큼 변하지 않은 작가이면서, 동시에 꾸준히 변하여 온 작가”인 황순원이 해방공간에 발표한 단편소설이지만 시간적 배경은 일본제국주의 강점기의 전시 체제 시기이고, 공간적 배경은 평안도 어느 산간 목넘이 마을이다. 김종회는 “혼탁한 세상 속에서 따뜻한 시각으로 생명의 외경스러움을 응대하는 작가의 태도를 반영하고 있는” 「목넘이 마을의 개」는 “다른 작품들과 달리 그 서술 시점이 더 효율적인 것은 주로 ‘신둥이’라는 흰색 개의 생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는 데 있다.”고 말하면서 환경 조건을 넘어서는 생명력을 가진 신둥이를 비롯한 여러 빛깔의 개들이 작가의 주된 관심 대상이며, 목넘이 마을에서 개들끼리 또는 인간과의 관계를 통하여 생존, 번식, 화해와 같은 개념들을 구체적으로 실증해 보인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김윤식은 “작품 「목넘이 마을의 개」는 원시적(原始的) 생명(生命)의 강인성(强靭性)과 한민족(韓民族)의 생명력(生命力)을 동시에 표현한 문학적 사상성(思想性)으로 규정될 수가 있다. 그 생명력(生命力)은 자체 내의 어떤 모랄을 전제로 했을 때만 가능한 것임을 이 작품은 매우 뜨겁게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간난이 할아버지로 표상되는 생명(生命)에의 외경감(畏敬感)이다.”라고 말하면서 「목넘이 마을의 개」가 생명에 대한 외경심과 한민족의 강인한 생명력을 주제화하고 있다고 보았다. 한편 이승준은 「목넘이 마을의 개」에 대해 “목넘이 마을을 처량하게 떠도는 신둥이의 모습을 절제된 문체로 치밀하게 그림으로써 작고 연약한 것에 대한 연민을 더 선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잘 드러내 준다.”고 평가했다. 근본 생태론적 관점에서 「목넘이 마을의 개」를 분석한 이승준의 연구는 기왕의 연구보다 진일보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황순원의 동물을 소재로 한 소설들이 ‘생명의 소중함’을 드러내 주고 있다고 보는 것은 새로운 견해는 아니다. 그런데도, 이승준의 견해가 기왕의 연구보다 진일보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목넘이 마을의 개」를 ‘녹색 소설’이라고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
「목넘이 마을의 개」의 시간적 배경은 일제 강점기의 전시 체제 시기이다. 일제 강점기의 전시 체제 시기에 신둥이라는 개가 수많은 고난을 이기고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가는 이야기를 그린 「목넘이 마을의 개」는 북한의 고향마을에서 들었다는 식으로 전개되고 있지만 1948년 3월 『개벽』에 발표한 작품이다. 어느 날, 서북간도로 가는 유랑민들이 거쳐 가는 평안도의 목넘이 마을에 누런 황토물이 들고 뼈만 앙상한 신둥이(흰둥이)가 흘러 들어온다. 오랜 굶주림에 지친 신둥이는 먹을 것을 구하려 간난이네 집 옆 방앗간에 머물면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쌀겨를 핥고, 동네 개들의 구유에 남은 밥으로 간신히 기운을 차린다. 간난이네 집에 들어갔다가 누렁이에 들켜 겁을 먹고 도망치듯 달아난 신둥이는 살아남으려고, 생명을 경시하는 인물들인 동장네 형제의 방앗간으로 들어가 겨를 핥아먹는다. 그러다 큰 동장네 검둥이와 작은 동장네 바둑이를 만나 그들이 먹다 남긴 구유통 속의 밥알을 얻어먹으며 겨우 목숨을 이어간다. 큰 동장이 길을 가다 신둥이 눈에 파란빛이 감도는 걸 보고는 미친개라고 생각하고 고함을 지른다. 급기야 신둥이는 미친개로 몰려 동네에서 내쫓기는 신세가 된다. 이후 신둥이는 아주 조심하여 방앗간을 드나들어 붙잡히지는 않는다. 간난이 할아버지가 방앗간에서 겨를 핥아먹는 신둥이를 보고는 몽둥이를 숨기고 노려보지만, 미친개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여름이 되자, 신둥이는 검둥이와 바둑이, 그리고 누렁이와 뒷산에서 각각 짝짓기를 한다. 동장네 형제는 검둥이와 바둑이가 미친개와 함께 뒷산에서 어울려 미친병이 옮았다는 이유로 이 개들을 때려잡아 먹는다. 그러나 누렁이는 간난이 할아버지가 의심하지 않고, 입을 다물어 살 수 있게 된다. 작은 동장이 새끼를 밴 미친개(신둥이)를 때려잡으라고 들추기는 바람에 동네 사람들은 몽둥이를 들고 미친개를 사냥하러 밤에 방앗간으로 향한다. “몽둥이를 들고 포위망을 만들어 ‘신둥이’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죄어드는’ 사람들의 모습은, 비인간 세계와의 관계를 철저히 차단하려는 포악한 인간의 모습을 상징한다.” 어둠 속에 움직이던 개의 ‘파란 눈빛’이 불을 켠다. 새끼 밴 것을 차마 어떻게 때려잡을 수 있냐며 간난이 할아버지는 망설인다. '때려라!' 하는 소리가 들리자, 신둥이는 달아나려고 안간힘을 쓴다. 신둥이는 생명을 중시하는 인물인 간난이 할아버지의 가랑이 사이로 재빨리 새어 나간다. “앞서 애매하게 죽은 검둥이, 바둑이의 애처로운 죽음을 떠올리면서 간난이 할아버지는 인간의 본원적 속성인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어 신둥이를 도망가게 해준” 것이었다.
머레이 북친은 『자유의 생태학(The Ecology of Freedom: The Emergence and Dissolution of Hierarchy)에서 위계 구조(hierachy)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위계 구조(hierachy)]는 제도화된 관계(institutionalized relationships)이다. 즉 글자 그대로 인간이 제도화하거나 만든 것이지만, 인간의 본능에 의해 생겨난 것은 아니다. 또한 특이질의 개인 때문에 명확히 하게 된 것도 아니다. 부연하면 위계 구조는 의심할 여지 없이 사회구조(social structure) 속에 위압적인 특권계급(privileged ranks)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정한 공동체(given community) 안에는 지배자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위계 구조는 그러한 개인적 특질(the idiosyncratic individuals)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위계 구조는 개인들 간의 관계 또는 개인의 타고난 행동양식(patterns of behavior)을 넘어선 다른 사회적 논리(social logic)를 포함한다.
[Hierachy] must be viewed as institutionalized relationships, relationships that living beings literally institute or create but which are neither ruthlessly fixed by instinct on the one hand nor idiosyncratic on the other. By this, I mean that they must comprise a clearly social structure of coercive and privileged ranks that exist
apart from the idiosyncratic individuals who seem to be dominant within a given
community, a hierarchy that is guided by a social logic that goes beyond individual interactions or inborn patterns of behavior.
한편 황순원이 「목넘이 마을의 개」를 발표한 시기는 해방공간이다. 1946년 9월 조선공산당의 영향을 받은 철도노동자의 파업에서 시작한 9월 총파업을 진압하는 미군정 경찰에 대항하면서 시작한 ‘대구 10·1사건’은 1946년 10월 대구에서부터 시작하여 경상북도, 경상남도, 전라남도, 전라북도, 충청남도, 충청북도, 제주도 등 전국으로 확산하였다. 그 뒤 11월 중순 들어 미군과 경찰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 결과 우익세력이 정치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좌익 세력은 위축되어 남조선 노동당(남로당)을 결성했다. ‘대구 10·1사건’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우익세력과의 대결에서 밀려나 무장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산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1947년 5월에 개최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 미국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결정했고, 1947년 11월 유엔(UN)은 인구비례에 따른 남북한 총선거를 결정했다. 1948년 2월 유엔 소총회는 한반도에서 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거 시행을 결정했다. 남한만의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을 이승만과 한민당을 중심으로 한 우익세력은 찬성하고, 김구의 한독당을 비롯하여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 남로당, 근로인민당 등은 반대했다. 주로 좌익 세력들과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1945년 11월 결성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과 남조선노동당은 단선·단정반대, 미소 양국 군대 철수 등을 요구하며 ‘2.7투쟁’을 전개했다. 남조선노동당의 활동이 미군정에 의해 비합법적인 것으로 간주되면서 남조선노동당은 무장투쟁 전술을 채택했다. 남조선노동당의 무장부대로서 야산대(野山隊)가 본격적으로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38소총, 장도, 칼 또는 군경으로부터 탈취한 무기로 무장하였던 야산대는 당의 무장부대로서 당조직 체계에 따라 조직되었다. 야산대는 이후 빨치산(partizan)으로 변해갔다. 이승만 정부의 군경 토벌대는 토벌 작전 중 야산대 활동을 했거나 야산대에 협조한 주민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마을 주민들을 구타하고 고문을 가했다.
일제 강점기의 전시 체제 시기의 위계 구조가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해방공간에서도 사라지지 않았다고 진단한 황순원은 「목넘이 마을의 개」에서 본래의 뜻은 감추고 작품에 묘사된 것 이상의 현실에 대한 인식을 미루어 살피게 하는 기법을 구사하고 있다. 이것에 대해 서재원은 “이야기의 본질적인 특성인 구술성과 공동체적 특징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목넘이 마을의 개」에서 “이야기를 통한 알레고리는 현실에 대한 인식을 숨기는 동시에 드러내는 이중적인 의도를 반영하는 방법이다.”라고 진술하고 있다.
동장네 형제가 비스듬한 언덕까지 이르렀을 때 신둥이는 벌써 조각뙈기 밭 새를 질러 달아나고 있었는데, 마침 늦도록 밭에 남아 있던 김 선달이 동장네 형제의 미친개 잡으라는 고함소리를 듣고 두리번거리던 참이라, 이놈의 개새끼가 미친개로구나 하고 삽을 들고 신둥이의 뒤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동장네 형제는 게서 더 신둥이의 뒤를 쫓을 염은 않고, 두 형제가 서로 번갈아 미친가이 잡아라 소리만 질렀다. 그것은 마치 자기네의 목소리를 듣고 김 선달이 한층 더 기운을 내어 쫓아가 그 삽날로 미친개의 허리 중동을 내리찍도록 하라는 듯한, 그리고 자기네의 목소리를 듣고 어서 저쪽 서산 밑 사람들도 뭐든 들고나와 미친개를 때려잡으라는 듯한 그런 부르짖음이었다. 이 부르짖음은 신둥이가 서쪽 산 밑 오막살이 새로 사라져 뵈지 않게 되고, 사이를 두어 김 선달의 그 특징 있는, 뜀질할 때의 윗몸을 뒤로 젖힌 뒷모양이 뵈지 않게 된 뒤에도 그냥 몇 번 계속되었다.
큰 동장이 걸어오면서 “틈새를 낸 놈이 누구야?”하고 결 난 소리로 말하는 대목을 통해 목넘이 마을 사람들과 동장 형제 사이에 억압이라는 위계 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미친개와 어울렸다는 죄목으로 검둥이와 바둑이를 때려잡아 먹고, 신둥이를 미친개로 몰아 죽이려는 동장 형제의 행동을 통해 자연(개)과 인간(동장 형제) 사이에 생명을 앗아가는 위계 구조가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황순원은 「목넘이 마을의 개」에서 신둥이의 이야기를 통해 해방공간에 굶주림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하루하루 고통스럽게 삶을 영위해 가는 남한 사람들과 남한의 사회구조(social structure) 속에 존재하는 위압적인 특권계급(privileged ranks)이 ‘미친개(빨갱이)’라는 죄목으로 사람을 죽이거나 상처를 입히는 일이 일상처럼 행해지는 남한 현실의 위계 구조를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48년에 처음 나왔던 『목넘이 마을의 개』는 8·15 이후에 쓰인 단편을 모은 것으로 당대 사회 현실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작가의 단편집 중 그 직접성이 가장 두드러진 책”으로 「술」· 「황소들」· 「목넘이 마을의 개」 등 모두 7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문학과지성사에서 발행한 『목넘이 마을의 개/곡예사 황순원전집 2』(2013)에는 황순원이 1948년 3월 『개벽』 2·3 합호(合號)에 발표한 「목넘이 마을의 개」의 다음 내용이 삭제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그제 저녁때 일이었다. 거리에서 돌아오는 길에 세종로 네거리 비각 앞을 지나다 거기 길가에 앉았는 한 늙은이에게 눈이 간 것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아직 아침저녁으로 꽤 찬 땐데 저물어가는 거리를 내다보며 웅크리고 떨고 앉았는 늙은이의 모양은 한층 추운 것이었다. 뒤에 지게가 하나 놓여 있었다. 지게꾼인 것이었다. 그런데 보통 지게꾼이 아닌 것이었다. 지게가 비어 있는 게 아니라 짐이 있는 것이었다. 열 살 안팎의 사내아이가 올려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겟다리에는 웬 흰 개 한 마리가 매여져 있는 것이었다. 이 개도 떨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자 나는 웬일인지 이들을 어디선가 한번 본 듯한 느낌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참으로 그런 이상한 일이었다. ……하다가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간난이할아버지의 모양이 떠오른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의 늙은이는 또 간난이 할아버지와 왜 그리 틀림이 심한 것일까. 텁석부리 수염만 해도 간난이할아버지의 것에 비겨 윤기라곤 통 없다. 그 속에 미소라곤 영 지어질 것 같지 않다. 그 밖에 체격의 차이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그리고 지게 위의 사내애는 옛날의 어린 간난이에게 비겨도 약골 그것인 것이다. 아니 오늘의 사내애는 무슨 골병에 든 건 아닐까. 꼭 그런 것 같다. 그래 애 할아버지인 늙은이가 애 병을 뵈러 지게에 지고 온 것만 같다. 신둥이는 그것을 팔아 약값에라도 보태려고 데리고 온 것이라고. 그래 그것이 팔리지 않아 지금 저러고들 있는 것이라고.
『개벽』(1948.3)에 발표된 「목넘이 마을의 개」를 논하면서 김윤식은 “특히 작가가 ‘신둥이는 그것을 팔아 약값에라도 보태려고……’에서 보듯 아주 ‘웬 흰 개 한 마리’ 그것도 ‘흰 개’를 ‘신둥이’라고 표기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라면서 “원시적(原始的) 생명력(生命力)의 측면은 본질적(本質的) 측면이며, 민족적(民族的) 의미 부여는 시대적 해석이다.”라고 분석했다. 그리고 그는 해방공간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대적 의미는 세월이 흘러갈수록 엷어져 의미를 잃어버리는 상황에 부닥치기 쉽다고 진단하면서 “이 점은 「이리도」를 후에 선집(選集) 속에 넣을 때 사족 부분(部分)을 작가 자신이 제거한 사실에서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목넘이 마을의 개」의 사족 부분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개벽』(1948.3)에 발표된 「목넘이 마을의 개」에서 작가가 삭제한 부분을 사족(蛇足) 부분이라고 말한 김윤식은 간난이 할아버지로 표상되는 생명(生命)에의 외경감(畏敬感)이 해방공간(解放空間)에서 종로 비각 앞 길가와 대조를 이룰 때 그것의 무화(無化)가 선명하게 드러난다면서 간난이 할아버지, 간난이, 신둥이에서 병든 애와 그 약값에 희생될 흰 개의 거리가 해방(解放)의 타율성(他律性)과 직접 연결되고 있다는 독법(讀法)의 도입 없이는 「목넘이 마을의 개」의 의미는 절반으로 줄어들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이 작품은 발표 당시와 달리 여러 차례 개작을 통하여 결말 부분이 삭제되었는데 간난이 할아버지를 통하여 해방되었어도 민초들의 삶은 전혀 나아진 것이 없다는 직접적인 표현들이 잘려 나갔다.
문학과지성사에서 간행한 『목넘이 마을의 개/곡예사 황순원전집 2』(2013)에 실려 있는 개작된 「목넘이 마을의 개」의 대단원 부분은 다음과 같다.
이런 이야기 끝에, 간난이 할아버지는 지금 자기네 집에 기르는 개가 그 신둥이의 증손녀라는 말과 원체 종자가 좋아서 지금 목넘이마을에서 기르는 개란 개는 거의 다 이 신둥이의 증손이 아니면 고손이라고 했다. 크고 작은 동장네 두 집에서까지도 요새 자기네 개가 낳은 신둥이개의 고손자를 얻어 갔다는 말도 했다. 이런 말을 하는 간난이할아버지는 이제는 아주 흰서릿발이 된 텁석부리 속에서 미소를 띄우는 것이었다.
내가, 그 신둥이 개는 그 뒤에 어떻게 됐느냐고 물었더니, 간난이할아버지는 금세 미소를 거두며, 그 해 첫겨울 어느 사냥꾼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사실 그 후로는 통 보지를 못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공연한 것을 물어 보았구나 했다.
「목넘이 마을의 개」가 쓰인 시기는 해방공간이었다. 해방공간은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 남한 단독정부 반대 투쟁, 대구 10·1사건, 2.7투쟁, 제주 4·3사건, 여수·순천 10·19사건, 야산대 활동 등으로 인한 갈등과 투쟁으로 많은 사람이 생명을 참혹하게 잃어버리던 시기였다. 당대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목넘이 마을의 개」에서 작가는 알레고리 기법으로 그 자신의 현실 의식을 묘사하고 있다. 「목넘이 마을의 개」를 ‘환경생태소설’이라고 자리매김할 수 있는 실마리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2. 「이리도」의 생명과 국가 폭력의 위계 구조
대단원의 대사인 “이리도, 그러면 이리까지도?”에서 제목을 따온 「이리도」가 발표된 1950년대는 조선총독부가 한국을 통치하던 시대도 아니었고, 권총을 쏘아대는 일본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시대도 아니었다. 해방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일제 강점기의 전시 체제 시기의 삶이 계속 이어지는 해방공간은 여전히 총소리가 들려오고 붉은 피가 흘러내리는 시대였다. 1948년 4월 3일 단선(單選)·단정(單政)을 반대하는 남로당 세력과 민중들의 봉기가 제주도에서 일어났다. 이들은 미군 즉시 철수, 단독선거 반대, 투옥 중인 애국자 석방 등을 요구하며 무장 유격대를 조직하고 한라산을 근거지로 하여 군경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미군정은 4월 3일에 일어난 남로당 세력과 민중들의 봉기가 제주도 전 지역으로 확산하자, 군경과 우익단체를 동원하여 탄압하였고, 그 과정에서 수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선거가 시행되었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한편 1948년 8월 25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시행되었고,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승만 정권에게 가장 크게 도전한 것은 일부 지역에서 남한 체제 자체를 부정하면서 민중들이 일으켰던 유격 투쟁이었다. 남로당이 남한 단독정권 수립 반대 투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나타난 무장 투쟁은 ‘여순봉기’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남로당과 지역 주민은 지리산유격전구 ·오대산유격전구· 호남유격전구· 태백산유격전구 ·영남유격전구 ·제주도유격전구를 만들었다. 그러나 빨치산들의 투쟁은 겨울철을 이용한 국군의 토벌 작전으로 1950년에 이르러서는 산발적이고 부분적인 저항으로 제한되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전라남도 여수·순천 등 6개 군을 점거한 ‘여수·순천 10·19사건’(‘여순봉기’)이 일어났다. 이승만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한 뒤, 대규모 진압군을 파견하여 여수·순천 지역 탈환에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상당한 인명·재산피해가 발생하였다. 남한 각 지역에 조직되어 있던 야산대는 ‘여수·순천 10·19사건’ 때 진압을 피해 산으로 숨어들었던 군인들이 합류해 더욱 조직적인 무장유격대(빨치산)로 성장하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지만, 해방공간인 1950년에 발표된 「이리도」는 「목넘이 마을의 개」와 마찬가지로 화자가 중학 시절에 들은 이야기를 전하는 액자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바깥 이야기(Rhmen)’와 ‘안 이야기(Binnenerzählung)’로 구성되어 있으면서 ‘안 이야기’가 끝이 남과 함께 작품이 끝이 나고 있는 「이리도」의 ‘바깥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중학 이년에서 삼년에 걸친 한 일년 동안 나는 학교에서 돌아와서는 대개 그때 한 반 동무로 이웃에 온 만수라는 애네 집에서 살다시피 한 일이 있다. 이웃이었으니 필시 이 애도 우리 집을 찾아왔을 것인데, 지금 내 기억으로는 암만해도 내편에서만 그 애네 집에 찾아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어쩐 까닭일까. ……(중략)…… 내가 우리의 한칸방에서 이분[필자 주: 만수외삼촌]을 처음 대한 것은 어느 추운 겨울날 밤이었다. 처음이라고 하지만 나는 이분을 꼭 두 번 그것도 둘째 번은 만수 어머니의 장례 때 만수 아버지 곁에 고개 숙이고 있는 것을 본 것뿐이니 이 한칸방에서 이분을 대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며 마지막인 셈이다.
곧 이분은 우릴 상대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중략)…… 그런데 만수외삼촌이 한 여러 가지 이야기 중에서도 우리로 하여금 우리들의 방문을 열고 벽에다 새로 큰 들창까지를 뚫어 보다 넓고 새로운 세계로 통하게 한 이야기는 홍안령 저쪽 이야기다.
화자인 ‘나’는 중학 시절 한 일 년 동안 학교에서 돌아오면 같은 반 동무인 만수네 집에 놀러가 놀았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중에서도 특히 ‘나’를 넓은 세계로 통하게 한 것은 만수 외삼촌이 들려준 이야기였다. 그것은 만수 외삼촌이 흥안령 산속 몽골인의 집에 일본인과 함께 하룻밤 묵게 되었을 때 겪게 된 이리와 일본군에 관한 이야기이다.
만수 외삼촌이 몽골 땅에 갔을 때 묵을 곳이 없어 어떤 집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다. 때마침 일본인이 찾아들자, 몽골 주인이 술과 양고기 안주를 대접한다. 몽골 주인과 함께 세상 이야기를 나누던 중 문 밖에 있는 개 두 마리가 마구 짖어대는 소리를 들었다. 몽골 주인은 이리 떼가 나타난 것이라고 말한다. 그때 일본인이 권총을 뽑아 들고 벌떡 일어서자, 놀란 몽골 주인이 말린다. 직접 총격을 받은 이리 떼는 한번 피를 본 뒤에는, 그것이 자기네의 피건 어떤 다른 것의 피건 한번 보고 냄새를 맡은 뒤에는 달아나기는커녕 되레 미친 듯이 달려든다는 속성을 국경선을 지키는 군인 셋의 죽음을 예로 들어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일본인은 권총을 빼들고 “대일본 제국 신민의 솜씨를 보여 주겠다”며 몽골 주인의 만류를 뿌리치고 이리 떼를 향해 밖으로 나간다. 만수 외삼촌과 몽골 주인은 어서 돌아오라고 외쳐댔지만 잠시 후 몇 발의 총성이 울리고 잠잠해졌다.
만수 외삼촌이 눈을 떴을 때에는 벌써 날이 환히 밝았을 때였다. 늦었구나 하고 일어나는데 집주인은 벌써부터 만수 외삼촌이 잠 깨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이 눈앞에 무엇인가를 내뵈는 것이었다. 권총이었다. 묻지 않아도 어제 그 객이 가졌던 권총이었다. 정말 죽었구나 하는 실감이 그제야 만수 외삼촌의 가슴에 와 안겨졌다. 주인은, 이것 하나가 떨어져 있을 뿐 그 근처에는 머리칼 한 오라기 헝겊 한 조각 남겨져 있지 않더라고 했다. 만수 외삼촌은 순간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전율과 함께 뒤이어 그 짐승을 향한 어떤 증오감과 분노를 금할 길이 없었다.
주인은 그냥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권총을 만수 외삼촌 앞에 내민 채 자세히 보라고 했다. 권총에는 검붉은 피가 말라 있었다.
주인은 다시 여기에 난 것이 무슨 자린지 아느냐고 했다. 눈여겨보니 거기에는 본시 그랬을 리 없는 자국이 세로가로 무수히 나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무슨 줄 같은 것으로 함부로 긁어 놓은 것 같은 자국이.
주인은 만수 외삼촌의 눈앞에서 권총을 한번 뒤집었다. 거기에도 같은 자국이 수없이 나 있었다.
이게 뭐냐고, 만수 외삼촌이 권총에서 눈을 들자 주인이 사뭇 침통한 어조로, 이게 바로 이리의 이빨 자국이요, 했다. 등골이 오싹했다.
이리의 이빨 자국? 음, 이게 바로 이리의 이빨 자국이라?
다음은 주인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좋았다. 이리도, 그럼 이리까지도?
개작된 「이리도」의 대단원 부분이다. 개작된 「이리도」는 액자소설(Rhmenerzählung) 중에서도 열린 액자소설(offen Rhmenerzählung)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열린 액자소설은 “바깥 이야기에 연이어 안 이야기가 서술된 다음, 다시 바깥 이야기로 돌아가지 않고 끝나버리는 소설”을 말한다.
김윤식은 남북이 분단(分斷)되고,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신탁통치 반대, 신탁통치 찬성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대적 의미는 세월이 갈수록 엷어져 의미 상실에 봉착하기 쉽다.”라고 지적했다. 이어서 이 점은 “「이리도」를 후에 선집(選集) 속에 넣을 때 사족 부분(部分)을 작가 자신이 제거한 사실에서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작가가 삭제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이로부터 어연간 이십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던가? 강산 아닌 내경우야 일러 무삼하리요. 지난날 평양의 우리들의 한간방이 지금은 서울에서의 뜨내기 생활로, 하모니카 대신에 담배가, 한창 소년기의 아련한 꿈과 그칠줄 모르던 정열이랄까 정력에 비겨 이건 또 장년기 가까운 그러나 장년기 가까운 나이답지 않은 불안과 우울, 그리고 벽에는 그 망망한 바다의 원색 사진 대신 맏놈이 사다 붙인 한 장의 초라한 세계지도.
그날도 하루의 피로를 담배 연기에 의탁하며, 무심코 벽에 붙은 세계 지도에 눈을 주고 있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나는 가슴 떨림을 느꼈다. 지도 속에서 무수한 총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그리고 그 총소리에 따라 수탄 피가 흐르는 것도 보이는 것이었다. 그래 이래도 좋은가, 이래도 좋은가. 그게 무엇의 피, 짐승의 피건 누구의 피건.
위의 인용문은 문학과지성사에서 간행한 『목넘이 마을의 개/곡예사 황순원전집 2』(2013)에 수록된 「이리도」에는 삭제되고 없는 내용이다. 어문각에서 간행한 『신한국문학전집 14· 황순원 선집』(1978)에 수록된 「이리도」에도 삭제되고 없는 내용이다. 아무리 늦게 잡아도 「이리도」(『백민』, 1950.2)가 1978년 이전에 문학과지성사에서 간행한 『목넘이 마을의 개/곡예사 황순원전집 2』(2013)에 수록된 내용과 같은 내용으로 개작되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가져왔다고 보는 머레이 북친은 국가는 사회적 강제의 전문적 시스템이라고 주장한다.
최소한 국가는 사회적 강제(social corcion)의 전문적 시스템이지, 대중과 많은 정치 이론가들에 의해 여전히 단순하게 간주되고 있듯이, 단순한 사회 관리(social administration)의 시스템이 아니다. ‘전문적(professional)’이라는 말은 ‘강제(coercion)’라는 말만큼이나 강조되어야 한다.
Minimally, the State is a professional system of social corcion⎯ not merely a system of social administration as it is still naïvely regarded by the public and by many political theorists. The word “professional” should be emphasized as much as the word ‘coercion.’
황순원이 「이리도」를 집필하던 시기의 이승만 정부는 국가의 권력을 국민에게 휘둘렀다. ‘여수·순천 10·19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부는 1948년 12월 1일 반국가단체의 활동을 규제하기 위해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였고, 1949년 6월 좌익 전향자를 보호하고 지도한다는 명분으로 ‘국민보도연맹’을 조직했다. 국민보도연맹의 조직을 주도한 것은 검찰과 경찰 등 좌익 관련 수사기관 간부들이었다. 구체적인 가입 대상자는 국가보안법 관련자와 남로당원을 비롯해 노동조합전국평의회·인민위원회·민주주의민족전선·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 등 남로당 외곽 단체 구성원들이었다. 그러나 국민보도연맹의 조직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이승만 정부는 국민보도연맹 의무가입 대상을 광범위하게 규정하였다. 자의적인 규정에 따라 좌익과 관련이 없는 국민과 문화예술인들을 임의로 가입시켰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는 1950년 6월 말부터 9월경까지 국민보도연맹원들을 곧바로 소집·구금하였다. 6·25전쟁의 실제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후퇴하면서 군과 경찰이 수만 명 이상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을 집단 학살했다.
해방공간의 남한 사회의 모습을 깊이 있게 묘사한 황순원은 「이리도」에서 알레고리 기법을 구사해 한국인의 생명을 위협하던 일본제국주의의 통치 행태가 해방공간에서도 여전히 자행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리도」의 개작에 대해 서재원이 “개작은 작품의 주제와 작가 의식에까지 그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황순원의 개작은 현실에 대한 비판의 약화로 드러났다.”라고 평가한 것처럼 개작된 「이리도」가 현실에 대한 비판의 약화를 불러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황순원이 「목넘이 마을의 개」와 「이리도」를 창작하던 해방공간은 반공 이데올로기가 작가들을 억누르던 시기였다. 북한에서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온 황순원은 과거도 없고 현재도 없는 ‘역사부재(歷史不在)의 문학’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과거도 있고 현재도 있는 ‘역사유재(歷史有在)의 문학’을 추구했다. 황순원이 「목넘이 마을의 개」와 「이리도」를 비롯하여 『카인의 후예』 같은 소설을 개작한 것은 이승만 정부 시대와 박정희 정부 시대를 살아가면서 반공 이데올로기와 개발독재 이데올로기를 의식하여 자기 검열을 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개작된 「이리도」는 ‘바깥 이야기’와 ‘안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으면서 ‘안 이야기’가 끝나는 것과 함께 작품이 끝나고 있다. 이승준은 “이러한 구성은 서사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안 이야기에 거리감을 둠으로써 신비감을 부여하는 효과를 지닌다. 이 소설은 이러한 신비로운 분위기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인상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자연과 문명의 대립을 매우 선명하면서도 냉정하게 드러낸다.”라고 평가했다. 근본 생태론적 관점에서 보면 이승준의 해석도 나름 타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으나, 「이리도」가 알레고리 기법을 구사한 액자소설이라는 점을 유의해 작품을 해석할 필요가 있다. 권총만으로 이리 떼를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한 일본인이 이리떼를 공격하다가 이리떼의 공격을 받고 죽임을 당한다는 ‘안 이야기’의 서사구조는 ‘안 이야기’에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바깥 이야기’로 나와 해방공간의 ‘제주 4.3사건’, ‘여수·순천 10·19사건’, ‘국민보도연맹원 사건’ 등을 거치면서 수많은 국민이 국가로부터 폭력을 당해 피를 흘린 고난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일본인이 이리떼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 권총은 일본제국주의가 한국을 강제로 합병한 침략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는 동시에 해방공간에 국가가 국민에게 폭력을 행사한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인의 권총에 새겨진 ‘이리의 이빨 자국’은 일본제국주의 침략자의 폭력에 대한 한국인의 저항의 상징인 동시에 해방공간에 자행된 국가 폭력에 대한 한국인의 저항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리도, 그러면 이리까지도?”라는 구절은 동물인 이리마저도 생명의 위협 앞에서 인간에게 저항하는 이리를 묘사한 것이다. 이러한 묘사를 통해 국민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국가는 국민의 저항을 받을 것이라는 시사를 던져주고 있다. 「이리도」는 단순히 흥안령 저쪽에 사는 이리의 생명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해방공간에 한반도 남쪽에서 국가의 폭력을 견디며 살아간 한국인의 생명을 이야기하고 있는 소설이다.
Ⅲ. 결론
1990년 이후 전개된 우리나라 소설의 생태 비평적 연구에 나타난 문제점은 생태 중심적 자연 관에 경도되어 있는 근본 생태론적 관점 중심으로 소설을 연구한다는 것과 정전소설에 대한 생태 비평적 연구가 미약하다는 것이다.
근본생태론의 관점에서 황순원의 동물소설을 연구한 사례는 여러 편 있으나, 사회생태론 관점에서 황순원의 소설을 연구한 사례는 드문 듯하다. 필자는 이 글에서 해방공간의 황순원 소설을 사회생태론적 관점으로 「목넘이 마을의 개」(『개벽』, 1948. 2·3합호)와 「이리도」(『백민』,1950.2)를 중심으로 논의해보고자 했다.
일제 강점기의 전시 체제 시기의 국가 폭력이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해방공간에서도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고 진단한 작가가 「목넘이 마을의 개」에서 본래의 뜻은 감추고 작품에 묘사된 것 이상의 현실에 대한 인식을 미루어 살피게 하는 기법을 구사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의 전시 체제 시기를 시간적 배경으로 한 「목넘이 마을의 개」는 일제 강점기의 전시 체제 시기의 국가 폭력이라는 위계 구조 속에 서북간도로 이주하는 유랑민이 버리고 간 신둥이라는 개가 수많은 고난을 이기고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가는 이야기를 서사구조로 하고 있다.
「목넘이 마을의 개」가 쓰인 시기는 해방공간이다. 해방공간은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 남한 단독정부 반대 투쟁, 대구 10·1사건, 2.7투쟁, 제주 4·3사건, 여수·순천 10·19사건, 야산대 활동 등으로 인한 갈등과 투쟁으로 많은 사람이 생명을 참혹하게 잃어버렸던 시기였다. 당대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목넘이 마을의 개」에서 황순원은 알레고리 기법으로 그 자신의 현실 의식을 묘사하고 있다. 「목넘이 마을의 개」를 ‘환경생태소설’이라고 자리매김할 수 있는 실마리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술」·「황소들」·「목넘이 마을의 개」 등의 작품에서 해방공간의 모습을 깊이 있게 묘사한 황순원은 「이리도」에서 알레고리 기법을 구사해 한국인의 생명을 위협하던 일본제국주의의 통치 행태가 해방공간에서도 여전히 자행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가져왔다고 보는 머레이 북친은 국가는 사회적 강제의 전문적 시스템이라고 주장한다. 황순원이 「이리도」를 집필하던 시기의 이승만 정부는 국가 권력을 국민에게 마구 휘둘렀다. ‘여수·순천 10·19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부는 1948년 12월 1일 반국가단체의 활동을 규제하기 위해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였고, 1949년 6월 좌익 전향자를 보호하고 지도한다는 명분으로 ‘국민보도연맹’을 조직했다.
「이리도」를 분석할 때 「이리도」가 알레고리 기법을 구사한 액자소설이라는 점을 유의해 작품을 해석할 필요가 있다. 권총만으로 이리 떼를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한 일본인이 이리떼를 공격하다가 이리떼의 공격을 받고 죽임을 당한다는 ‘안 이야기’의 서사구조는 ‘안 이야기’에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바깥 이야기’로 나와 해방공간의 ‘제주 4.3사건’, ‘여수·순천 10·19사건’, ‘국민보도연맹원 사건’ 등을 거치면서 많은 국민이 국가로부터 폭력을 당해 피를 흘린 고난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일본인이 이리떼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 권총은 일제가 한국을 강제로 합병한 침략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는 동시에 해방공간에 국가가 국민에게 폭력을 행사한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인의 권총에 새겨진 ‘이리의 이빨 자국’은 일본 침략자의 폭력에 대한 한국인의 저항의 상징인 동시에 해방공간에 자행된 국가 폭력에 대한 한국인의 저항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리도, 그러면 이리까지도?”라는 구절은 동물인 이리마저도 생명의 위협 앞에서 인간에게 저항하는 이리를 묘사한 것이다. 이러한 묘사를 통해 국민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국가는 국민의 저항을 받을 것이라는 시사를 던져주고 있다. 「이리도」는 단순히 흥안령 저쪽에 사는 이리의 생명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해방공간에 한반도 남쪽에서 국가의 폭력을 견디며 살아가는 한국인의 생명을 이야기하고 있는 소설이다.
* 2021년 제18회 황순원문학제/ 황순원문학 학술세미나 주제 발표Ⅰ
김종성|1986년 《동서문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검은 땅 비탈 위」가 당선되어 등단함. 2004년 고려대학교에서 「한국 현대소설의 생태의식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음. 2006년 제9회 경희문학상 소설 부문 수상. 소설집으로 『마을』 『탄(炭)』, 『연리지가 있는 풍경』, 『말 없는 놀이꾼들』, 『금지된 문』 등이 있고, 학술서로 『한국 환경생태소설 연구』, 『글쓰기와 서사의 방법』, 『글쓰기의 원리와 방법』, 『한국어 어휘와 표현 Ⅰ·Ⅱ·Ⅲ·Ⅳ』, 역사서로 『김수로왕: 금관가야의 역사와 문화』 등을 출간함. 전 고려대 문화창의학부 교수. 《용인문학》 편집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