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이, 5 덕수궁
덕수궁가기 전에 아들이 사다준 유홍준의 문화유산답사기 서울편 2를 읽었다. 가장 궁금한 대한제국의 멸망 사연을 알고 싶은 것이었는데, 그 중심에 덕수궁이란 건물과 고종의 생애가 담겨있었다. 필자에 의하면 조선왕조가 이어오면서 명나라는 숭배하고 무서워했지만, 일본이란 섬나라는 노략질이나 하는 조무래기정도로 얕잡아본 것이라 일본에게 당했다는 내용이다. 학자들마다 달리 생각하는 것이겠지만, 수십 년 전에 읽은 역사책에 의하면 고려시대 팔만대장경으로 국력이 낭비되었는데, 이 무렵 일본은 소총을 개발하고 대륙침략의 꿈을 키웠다는 내용이다.
10시 반에 시청역 2번 출구에서 이종환국장과의 만남을 시작으로 대한문으로 입장을 하니 마침 근위병들의 교대시간이다. 50년 전 조카와 함께 이곳을 찾은 적이 있는데 전혀 기억이 없다. 중화전, 석조전, 돌아서 함녕전 앞뜰에서 기념사진을 박았다. 이곳 함녕전은 명성황후가 승화한 뒤 고종의 침실로 쓰이든 곳인데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덕수궁안내문과 유홍준의 답사기에 나타난 이곳의 역사는 파란만장하다. 덕수궁이 처음 궁궐로 사용된 것은 임진왜란 때 피난 갔다 돌아온 선조가 머물 궁전이 마땅치 않아 월산대군과 그의 후손이 살든 저택을 행궁으로 삼으면서 부터이다. 이곳이 경운궁이고 덕수궁의 옛 이름이다. 조선말기 러시아공관에 있든 고종이 이곳으로 오면서 궁궐의 이름이 붙었다.
조선 말기 정국은 몹시 혼란스러웠다. 개화이후 물밀 듯 들어온 서구 열강들의 조선에 대한 이권다툼이 치열했기 때문이다.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서 돌아와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새로 환구단을 지어 하늘에 제사를 지낸 뒤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대한제국선포는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대외에 분명히 밝혀 정국을 주도해 나가고자 한 고종의 선택이자 강력한 의지였다. 이 무렵 헤이그에 파견한 밀사 3인의 정체가 일본에 의하여 밝혀지면서 고종의 의지와 시도는 일제에 의하여 좌절되고 왕위에서 물러나는 시련을 격었다.
덕수궁(德壽宮)이란 이름은 순종이 아버지 고종의 만수무강을 위하여 지은 것인데 그대로 궁의 이름이 된 것이다. 고종은 승하할 때까지 이곳에서 지냈으며, 덕수궁은 고종 승하 후 빠르게 해체, 축소되었다. 개화 이후 서구 열강의 외교관이나 선교사들이 정동 일대로 모여들면서 덕수궁도 빠른 속도로 근대 문물을 받아들였다. 덕수궁과 주변의 정동에는 지금도 개화 이후 외국선교사들에 의해 건립된 교회와 학교, 외국공관의 자취가 뚜렷이 남아 있다. 나와 이국장 일행은 친구 한우현전무의 흔적을 찾으려고 그가 근무했든 사무실 근처를 헤매다가 카토릭회관에서 통밀 쌀 3㎏을 구매하였다.
덕수궁의 대표적인 건물 하나를 소개하려한다.
석조전은 누가 뭐라 해도 덕수궁의 상징이다. 더 정확히는 대한제국의 상징적 건물이다. 묘하게도 대한제국을 선포한 1897년 구상되어 일제에게 나라를 강탈당한 1910년 준공되었으니 제국과 운명을 같이 한 셈이다. 이 건물은 영국인 브라운이 건립안을 내어 놓았고 영국인 건축가 하딩이 설계를 하였다. 정면 54미터 너비 31미터의 장대한 3층 석조건물인 석조전은 그리스 신전처럼 생긴 것이다.
전통 궁궐과 달리 황제의 침실과 집무실, 외국사신을 영접하는 응접실이 한 건물에 있는 서양식 궁전으로 지층은 시종들의 대기 공간, 1층은 황제의 접견실, 2층은 침실과 응접실로 구성되었다. 이처럼 공을 들인 건물이지만 고종 자신은 한 번도 사용하지 못하고 일제에 의하여 꼭두각시 태상왕이 된 것이다.
유홍준님은 글 말미에 “대한제국은 결코 맥없이 쓰러진 나라가 아니었다. 비록 일제의 강압에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외세에서 독립된 근대국가로 나가고자 안간힘을 썻던 그 몸부림을 이 석조전이 증언하고 있다.”
답사기 덕분에 근처 맛 집이라는 남도식당의 추어탕 집을 찾게 되었는데, 촌놈 행세를 하고 말았다. 메뉴라곤 추어탕 하나뿐이다. 11시 반경인데 빈자리가 없어 겨우 모퉁이에 기대서 한 그릇 1만으로 점심을 때웠다.
2017 11 22일 다녀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