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숙종 (肅宗) |
자 명보(明譜). 휘 순(焞). 현종의 외아들. 어머니는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딸인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 비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만기(金萬基)의 딸 인경왕후(仁敬王后), 계비는 영돈녕부사 민유중(閔維重)의 딸 인현왕후(仁顯王后), 제2계비는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의 딸 인원왕후(仁元王后). 1667년(현종 8) 왕세자에 책봉되고, 1674년 즉위하였다. 즉위한 이듬해 대흥산성(大興山城)을 완성하고 용강(龍岡)의 황룡산성(黃龍山城)을 수축하였다. 정치에 관심이 많았으나 당시 예론(禮論)에 치우쳐 논쟁이 분분하였고, 당쟁이 심하여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의 파쟁이 그칠 날이 없었다. 그러나 왕은 숙원(淑媛) 장씨(張氏)를 총애하여 1688년 소의(昭儀)로 승격시켰으며, 이듬해 장씨에게서 출생한 왕자(景宗)의 명호(名號)를 정하고자 하였다. 서인들이 이를 반대하자 송시열(宋時烈) ·김수항(金壽恒) 등을 유배하고 왕자의 명호를 정하였으며, 왕비 인현왕후를 폐위, 희빈(禧嬪)으로 승격된 장씨를 1690년에 왕비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인현왕후 폐위를 후회하던 왕은 폐비복위운동을 꾀하는 서인을 민암(閔耉) 등이 타도하려고 하자 1694년 남인을 추방하고 다시 서인을 등용시켜 폐비를 복위시켰다. 이어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키고, 1701년 무고죄(誣告罪)로 사사(賜死)하였다. 왕의 재위기간은 국내적으로 당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였다. 즉 왕의 치세기간은 조선 중기 이래 계속되어온 붕당정치(朋黨政治)가 절정에 이르면서 한편으로는 그 파행적 운영으로 말미암아 당폐(黨弊)가 심화되고 붕당정치 자체의 파탄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이때의 정국형세를 살펴보면, 왕의 즉위초는 앞서 현종 말년 예론(禮論)에서의 승리로 남인이 득세하고 있었으나 1680년 허견(許堅)의 역모와 관련되어 남인이 실각(庚申大黜陟)하고 서인이 집권하였다. 다시 1689년(숙종 15) 희빈장씨(禧嬪張氏)가 낳은 왕자(후일의 경종)에 대한 세자책봉문제가 빌미가 되어 남인정권이 들어섰다가(己巳換局), 1694년 남옥(濫獄)이 문제되고 폐출되었던 민비(閔妃)를 복위시킴을 계기로 남인이 정계에서 완전히 거세되며, 그대신 이미 노론·소론으로 분열되어 있던 서인이 재집권하는(甲戌換局)연속적인 변화가 있었다. 그뒤에도 노론·소론 사이의 불안한 연정(聯政)형태가 지속되다가 다시 1716년 노론 일색의 정권이 갖추어지면서 소론에 대한 정치적 박해가 나타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잦은 정권교체와 함께 복제(服制)에 있어서 송시열(宋時烈)의 오례문제(誤禮問題)를 둘러싼 고묘논란(告廟論難), 김석주(金錫胄)·김만기·민정중(閔鼎重) 등 외척세력의 권력장악과 정탐정치에 대한 사류(士類)의 공격에서 비롯된 임술삼고변(壬戌三告變)공방, 존명의리(尊明義理)와 북벌론(北伐論)의 허실을 둘러싼 노론·소론 사이의 명분논쟁, 민비의 폐출에서 야기된 왕과 신료(臣僚)들간의 충돌, 그리고 송시열·윤증(尹拯)간의 대립에서 야기된 회니시비(懷尼是非), 왕세자와 왕자(후일의 영조)를 각기 지지하는 소론·노론의 분쟁과 대결 등 사상(史上)에 저명한 정치쟁점으로 인하여 당파간의 정쟁은 전대(前代)에 비할 수 없으리만치 격심하였다. 남인이 청남(淸南)·탁남(濁南)으로, 서인 역시 노론·소론으로, 그리고 노론이 다시 화당(花黨)·낙당(駱黨)·파당(坡黨)으로 분립하는 등 당파내의 이합집산이 무상했으며, 이러는 와중에서 윤휴(尹#휴17)·허적(許積)·이원정(李元楨)·송시열·김수항(金壽恒)· 박태보(朴泰輔) 등 당대의 명사들이 죽음을당하는 화를 입었다. 그러나 대외적인 전쟁이 없어 사회가 점차 안정기로 접어든 때로 선조 말 이후 계속된 대동법(大同法)을 경상도(1677)와 황해도(1707)에 실시하여 평안도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 실시하게 되어 실효를 거두었으며,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계속된 토지사업을 추진하여 강원도(1709)와 삼남지방(1720)에 실시함으로써 서북지역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완결을 보았다. 또 주전(鑄餞)을 본격적으로 실시하여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 중앙관청 및 지방관청 등에 통용하도록 하였다. 특히 폐한지(廢閑地)로 버려둔 압록강 주변의 무창(茂昌) ·자성(慈城)의 2진(鎭)을 개척하여 영토회복운동을 전개하였고, 1712년 함경감사 이선부(李善溥)로 하여금 백두산(白頭山) 정상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우게 하여 국경선을 확정하였으며, 금위영(禁衛營)을 추가로 설치하여 5영체제를 완결하였다. 일본에는 1682년과 1711년 두 차례에 걸쳐 통신사를 파견, 수호를 닦고 왜관무역(倭館貿易)에 있어서 왜은(倭銀-六星銀) 사용의 조례(條例)를 확정지었으며, 특히 막부(幕府)를 통하여 왜인의 울릉도출입금지를 보장받음으로써 울릉도의 귀속문제를 확실히하였다. 그리고 영의정 이유(李濡)의 건의에 의하여 1712년 북한산성을 대대적으로 개축, 남한산성과 함께 서울 수비의 양대거점으로 삼게 하였다. 또 당시 민폐의 제1요인이던 양역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호포제(戶布制)실시를 한때 추진하다가 양반층의 반대로 좌절되자 그대신 1703년 양역이정청(良役釐正廳)을 설치, 양역변통의 방안을 강구하게 하고 이듬해 군포균역절목(軍布均役節目)을 마련함으로써 1필에서 3, 4필까지 심한 차이를 보이는 양정(良丁) 1인의 군포부담을 일률적으로 2필로 균일화하였다. 이와함께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들이 복관되며, 또 노산군(魯山君)을 복위시켜 단종으로 묘호를 올리고,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으로서 폐서인(廢庶人)되었던 강씨(姜氏)를 복위시켜 민회빈(愍懷嬪)으로 하는 등 주로 왕실의 충역관계를 왕권강화의 측면에서 재정립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 300여개소의 서원 사우가 건립되고 131개소가 사액되는 남설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또 재위기간에 《선원록(璿源錄)》 《대명집례(大明集禮)》 등이 간행되었고, 《대전속록(大典續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이 편찬되었다. 능은 명릉(明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西五陵)에 있다 |
제20대 경종
적후 단의왕후 심씨 - 후사 없음
계후 선의왕후 어씨 - 후사없음.
- 경종이 후사가 없는 이유 -
희빈 장씨는 사약을 받으면서 마지막으로 아들 을 보고 싶다고 숙종에게 애원하게 되는데 숙종은 처음에는 이를 거절하다가 결국 인정에 끌려 그녀의 청을 들어주 게 된다. 하지만 막상 세자를 그 자리에 데려다 놓았을 때에 돌발적인 사태가 터지고 말았다. 장씨는 자신의 아들을 보더니 재빠르게 달려와서는 다짜고짜 그의 하초를 움켜쥐고 잡아당겨버렸다. 그 때문에 세자는 그 자리에서 기절을 했고 이 사건 이후 항상 시름시름 앓으며 남성 구실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 경종의 즉위와 소론정권의 부흥 -
경종 즉위 초년에는 여전히 노론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그들은 경종의 건강이 점차 악화되는데다 후사마저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건저(세자를 세우는 일)할 것을 주장한다. 즉 경종이 너무 병약하여 언제 죽을 지 모르니 연잉군을 세제로 삼아 왕위가 흔들리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경종은 소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721년 노론측 주장에 따라 연잉군을 세제에 책봉하였다. 그런데 노론측은 두 달 뒤인 그 해 10월 경종이 병약하여 정사를 주관할 수 없다며 이번에는 연잉군으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해야 한다고 주 장했다. 이는 곧 경종에게 정사에서 손을 떼라는 말이었다. 노론측이 대리청정을 주장하자 소론측이 왕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거세게 반발하였다. 하지만 경종은 와병중이어서 세제청정을 받아들였다가 소론측의 반대로 다시 거둬들였다. 이 후 경종은 세제청정을 명했다가 다시 거둬들이기를 반복한다. 이바람에 노, 소론간에 당쟁만 더욱 격화되었다. 그리고 1721년 12월 경종의 지지를 받은 소론은 과격파인 사직 김 일경을 우두머리로 한 7명이 앞장서서 세제대리청정을 요구한 집의 조성복과 청정 명령을 받들어 행하고자 한 노론 4대신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영중추부사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 등을 '왕권 교체를 기도한 역모자'라고 공격하는 소를 올렸다. 이 상소로 인하여 1716년 병신처분 이래 지속되던 노론의 권력 기반이 무너지고 대신 소론 정권으로 교체되는 환국 이 단행되었다. 이 결과 노론 4대신은 파직되어 김창집은 거제부에, 이이명은 남해현에, 조태채는 진도군에, 이건명 은 나로도에 각각 안치되었고 그 밖의 노론 대신들도 삭직, 문외출송 또는 정배되었다. 그리고 소론파에서 영의정에 조태구, 좌의정에 최규서, 우의정에 최석항 등이 임명됨으로써 소론 정권의 기반을 굳혔다.
- 노론의 타격과 신임사화 -
조정을 장악한 소론은 과격파를 앞세워 노론측 인사에 대한 축출 작업을 더욱 가속화한다. 3개월 뒤인 1722년 3월 소론의 강경론자들이 노론의 과단한 처분을 요구하고 있을 때 남인의 서얼 출신 목호룡은 노론측에서 경종을 시해하 고자 모의했다는 이른바 '삼급수설'(대급수:칼로 살해, 소급수:약으로 살해, 평지수:모해하여 폐출함)을 들어 고변하였다. 이 고변에 따르면 음모 관련자는 정인중, 김용택, 이기지, 이희지, 심상길, 홍의인, 김민택, 백망, 김성행 등이었 는데 이들은 모두 노론 4대신의 아들 또는 조카이거나 아니면 추종자들이었다. 이 고변은 숙종의 죽음 전후에 당시 세자였던 경종을 해치려고 모의하였다는 것인데 이 때에 와서 드러난 것이다. 목호룡은 남인 서얼로서 풍수를 공부하여 지관이 된 사람이다. 정치적 야심을 품고 있던 그는 풍수설을 이용하여 노 론에 접근하여 처음에는 왕세제편(영조)에 섰으나 정국이 소론의 우세로 돌아서자 배반하여 이같은 음모사실을 고변하였다. 이 사건은 노론에 엄청난 타격을 안겨주었다. 목호룡의 고변이 있자 국청이 설치되어 역모 관련자들을 잡아와 처단 하였고 노론 4대신도 다시 한성으로 압송되어 사사되었다. 국청에서 처단된 사람 중에 법에 의해 사형된 사람이 20여 명, 맞아서 죽은 이가 30여 명, 그 밖에 그들의 가족이 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교살된 자가 13명, 유배 114명,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부녀자가 9명, 연좌된 사람이 173명에 달하였다. 반면에 권력을 잡은 소론파에서는 윤선거와 윤증을 복관시키고 남구만, 박세채, 윤징완, 최석정 등을 숙종묘에 배 향하였으며 목호룡에게는 동지중추부사의 직이 제수되고 동성군의 훈작이 수여되었다. 이 대대적인 옥사가 신축년과 임인년에 연이어 일어났다고 해서 '신임사화'라고 한다.
- 경종의 작은 업적 -
서양의 수총기(소화기)를 모방하여 제작했으며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밝힌 내용을 담은 남구만의 '약천집'이 간행되었다.
- 단의왕후 심씨 -
청은부원군 심호의 딸이다. 1696년 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나 경종이 즉위하기 2년 전에 병으로 죽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덕을 갖추어 어린 나이에도 대전, 중전 그리고 병약한 세자를 섬기는 데 손색이 없었 다. 1720년 경종의 즉위하자 왕후에 추봉되었다. 능은 혜릉으로 경기도 양주에 있다.
- 선의왕후 어씨 -
영돈녕부사 어유구의 딸이다. 1718년 세자빈에 책봉되어 가례를 올렸으며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이 후 1724년 경종이 죽자 2년 뒤에 경순왕대비에 올랐다가 1730년 26세를 일기로 죽었다. 그녀는 매사에 조심스럽고 온유하였으며 경종이 병약한 탓에 소생이 없었다. 죽은 후 경종이 묻혀 있는 의릉에 함께 묻혔다.
21대 영조
제21대 영조의 가계도
숙종 - 숙빈 최씨의 차남 : 영잉군(1694-1776)
재위기간 : 1724.8-1776.3(51년 7개월)
부인 : 6명 / 자녀 : 2남 7녀
1부인 정성왕후 서씨 (자식없음)
2부인 정순왕후 김씨 (자식없음)
3부인 정빈 이씨: 진종(효장세자), 화순옹주
4부인 영빈 이씨: 장조(사도세자), 화평옹주, 화완옹주, 화협옹주
5부인 귀인 이씨: 화유옹주
6부인 숙의 문씨(폐): 화령옹주, 화길옹주
아들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진종인 효장세자는 그러나 10세에 죽어 자손이 없었습니다. 단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그의 양자가 되어 즉위함에 따라 진종으로 추존되었습니다.
그래서 2남인 사도세자가 세자로 있다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게 됩니다.
다음은 사도세자의 가계도입니다
혜경궁 혜빈 홍씨
- 의소세손
- 정조(조선 제 22대 왕)
- 청연군주 = 김기성
- 청선군주 = 정재화
순빈 임씨
- 은언군 임
- 은신군 진
경빈 박씨
- 은전군 찬
- 청근군주
사도세자는 한명의 정실과 두번의 후궁에게서 모두 5남 3녀를 두었는데, 적장자 전이 어린 나이에 죽자 둘째 아들 산이 왕세손이 되어 영조의 뒤를 이었습니다.
경빈 박씨는 어떤 이유에선지 사도세자에 의해 목숨을 잃었는데, 정조 즉위 후에 박씨의 아들 은전군 찬이 어미의 복수를 한다고 역모를 하여 사사된 사건도 있었다습니다.
순빈 임씨의 두 아들은 후기 조선의 왕위 계승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첫째 아들 은언군 임의 세번째 아들인 전계군 이광이 바로 조선조 25대 임금 철종의 아버지가 됩니다. 둘째 아들 은신군 진은 자식이 없이 사망했으나, 그가 들인 양자가 인조 3남
인평대군의 7대손인 남연군 구이니 그의 손자가 조선조 26대 임금 고종이며,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입니다.
[출처] 영조의 가계도|작성자 내일왕님
- 임인옥사와 연잉군의 자구책 -
왕과 백성들의 신임을 얻어 입지를 다진 소론은 대리청정에 앞장섰던 노론 4대신을 탄핵하여 귀양을 보내 는 신축옥사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세를 몰아 이듬해에는 남인 목호룡을 매수하여 노론측 일부 인사가 경종의 시 해를 도모했다는 고변을 하게 해 임인옥사를 일으켰다. 임인옥사를 주도한 소론 대신들은 노론 4대신을 포함한 60여 명을 처형시키고 관련자 170여 명을 유배시키거나 치 죄하여 축출시켰다. 이 때 임인옥사의 사건 보고서에 왕세제도 모역에 가담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었다. 전례로 봐서 모역에 가담한 왕자가 살아남은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연잉군 외에는 왕통을 이을 왕자가 전혀 없었 기 때문에 그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 때문에 연잉군은 갖가지 고초를 겪게 된다. 자신이 수족 처럼 부리던 장세상이 소론측 사주를 받은 내관 박상검, 문유도 등의 모함으로 쫓겨나고 소론측 대신들에 의해 경종 을 문안하러 가는 것도 금지당했다. 연잉군은 자신의 지지 기반이던 노론이 신임사화로 대거 축출되고 거기다 신변의 위협마저 느끼게 되자 대비 인원 왕후 김씨를 찾아가 왕세제 자리를 내놓는 것도 불사하겠다며 자신의 결백을 호소했다. 김대비는 평소 노론측 입장에 서서 왕세제를 감싸왔던 터여서 왕세제의 간절한 호소를 담은 언교를 몇 차례 내려 소론측의 전횡을 누그러뜨렸다. 그 덕택으로 연잉군은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 을사처분 -
영조는 소론의 영수 김일경, 남인의 목호룡 등 신임옥사를 일으킨 대신들을 숙청한 다음 1725년에는 김일경이 노론 4대신을 역적으로 몰아 상소할 때 이에 동조한 이진유 등 6명을 귀양보냈다. 그리고 노론측의 소론에 대한 잇따른 논핵에 의거해 영의정 이광좌, 우의정 조태억 등 소론 대신들을 내몰고 민진원, 정호 등의 노론 인사들을 등용하였다. 이것이 '을사처분'이다.
- 정미환국 -
을사처분으로 노론이 정권을 잡게 되자 신임옥사 때 처단된 노론 4대신과 그밖의 관련자들에 대한 신원 문제가 다 시 논의되어 4대신이 복관되고 시호를 받았다. 하지만 노론측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정호, 민진원 등이 임인옥 사에 대한 보복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조는 즉위 초부터 송인명, 조문명 등의 조언을 받아 각 정파 의 인사를 고르게 등용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탕평책을 펴고자 했기 때문에 노론측의 소론에 대한 정치적 보복에 반 대하고 나섰다. 그래서 정호, 민진원 등의 노론들을 대거 파면시키고 초년에 파직했던 이광좌, 조태억을 기용하여 정승으로 삼고 소론을 불러들여 조정에 합류시켰다. 이 사건이 '정미환국'이다.
- 영조의 쌍거호대 -
즉 노론의 홍치중을 영의정으로 삼고 소론의 이태좌를 좌의정으로 삼아 상대하게 하고 이조의 인적 구성에서도 판서에 노론 김재로를 앉히면 참판에 소론 송인명, 참의에 소론 서종옥, 전랑에 노론 신만으로 상대하게 했던 것이다. 영조는 그 뒤 자신의 의도대로 정국을 수습하자 한층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쌍거 호대 방식을 극복하고 유재시용, 즉 인재 중심으로 인사 정책을 펼쳐나갈 수 있었다. 이처럼 탕평책은 초기에는 재능에 관계 없이 탕평론자를 중심으로 노론과 소론만 등용하다가 탕평 정국이 본 궤도 에 오르자 이 정책을 제도적으로 정착시키게 되었다. 영조는 이러한 정국 구도에 따라 노론, 소론, 남인, 소북 등 사색 당파를 고르게 등용하여 탕평 정국을 더욱 확대시켜 나갔다.
- 사도세자 사건 -
1749년 영조는 건강상의 이유로 세자 선으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게 한다. 그런데 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게 되자 남인, 소론, 소북 세력 등은 그를 등에 업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에 노론 세력과 그들에 동조하던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이 세자와 영조 사이를 벌여놓기 위해 이간질을 하였다. 세자에 대한 정순왕후, 숙의 문씨 등의 무고에 따라 영조는 자주 세자를 불러 질책하였으며 이 때문에 세자는 정신 적 압박으로 인해 심한 고통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함부로 궁녀를 죽이거나 왕궁을 몰래 빠져나가는 등 돌발적인 행동들을 하였다. 영조는 더이상 그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시켜서는 안되겠다는 판단을 하기에 이르렀는데 1761년 세 자가 임금도 모르게 관서 지방을 유람하고 돌아온 일이 발생했다. 이 일과 관련하여 세자를 제거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노론측의 윤재겸 등이 세자의 행동이 체통에서 벗어났다는 주 장을 담을 소를 올리자 영조는 세자의 관서 순행에 관여한 자들을 모두 파직시켰다. 그 후 세자에 대한 영조의 불신 은 더욱 격화되었는데 계비 김씨의 아버지 김한구와 그 일파인 홍계희, 윤급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였다. 이때문에 영조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였다. 하지만 세자가 이에 응하지 않자 그를 폐위하여 서인으로 강등시킨 후 뒤주 속에 가두어 굶어죽게 하였다.
- 영조의 업적 -
1725년에 주리를 틀어서 국문하는 압 술형을 폐지했으며 사형을 받지 않고 죽은 자에게 죄를 추죄하여 죽이는 형벌을 금지하였고 1729년에는 사형수에 대 해서는 반드시 초심, 재심, 삼심을 거치게 하는 삼복법을 엄격히 시행하도록 하여 사형에 신중을 기했다. 또한 1774년에는 사가에서 형벌을 가하는 것을 금지시켰으며 판결을 거치지 않고 죽이는 남형과 남성의 포경을 자 르는 경자 등의 가혹한 형벌도 금지시켰다. 그리고 신문고 제도를 부활시켜 백성의 억울한 일을 왕에게 직접 알리게하였다. 영조 시대의 경제 정책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균역법의 시행이었다. 양민들이 국방의 의무를 대신해 나라에 세금으로 내던 포목을 2필에서 1필로 줄이는 것을 골자로 하는 균역법의 시행으로 일반 양민들의 의무인 양역의 불 균형에 따른 백성들의 군역 부담이 크게 감소되었다. 그리고 1725년부터 각 도의 방죽을 수축하여 가뭄 피해에 대비했고 1729년에는 궁궐에 속한 전답과 병영의 둔전에 도 정해진 양 이상을 소비했을 경우 세금을 부담시켰다. 한편 오가작통 및 이정의 법을 엄격히 준수하도록 해 탈세 를 방지했다. 오가작통은 다섯 집을 한 통으로 묶은 마을의 최소 단위를 말하며 이정은 마을의 책임자가 자신이 책 임지고 있는 마을의 사건이나 인적 변화를 관아에 반드시 알릴 의무가 있게 한 제도였다. 이밖에도 영조는 각 도에 보고되지 않은 은결을 면밀히 조사하게 하고 애초에 국가 비축미로 빈농을 구제하기 위해 마련된 환곡이 백성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방도로 전락한 것에 따른 폐단을 방지하는 데에도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1763년에는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조엄이 고구마를 가져옴으로써 흉년이 들었을 때 굶주린 사람들을 위한 구황식량 수급에 획기적인 전환을 꾀할 수 있었다. 이 시기의 사회 정책으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분에 따른 국가에 대한 의무 사항을 더 분명히 한 점이다. 양인들 의 불공평한 양역에 따른 폐단을 개선하기 위해 균역법을 실시하는 한편 천민들에게도 공사천법을 마련해 신분에 맞는 국가에 대한 의무를 부담시켰다. 또한 양인의 숫자를 늘려 양역의 증가를 꾀하였는데 1730년에는 양인 어머니와 천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면 양 인이 되게 하기도 하였다가 이듬해에는 남자는 부모 중 아버지의 신분을 따르게 하고 여자는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 게 하였다. 또한 서얼 차별로 인한 사회적 불만 요인을 해소하기 위해 서얼 출신도 관리로 등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국방 정책을 살펴보면 1725년 화폐 주조를 중지하고 군사 무기를 만들도록 했으며 1729년에는 김만기가 만든 화차 를 고치게 하였고 이듬해에는 수어청에 명하여 조총을 제작하게 했다. 그리고 전라좌수사 전운상이 제조한 해골선을 통영 및 각 도의 수영에 제작 배치하도록 하여 임진왜란 때 맹위를 떨쳤던 해군력을 증강시켰다. 이같은 국방 정책은 변방에도 적용돼 요새 구축을 늘리는 한편 1727년에는 북관군병에게 총을 나누어주고 훈련시켰 으며 1733년에는 평양중성을 구축하게 하였다. 1743년에는 강화도의 외성 개축 작업을 시작하여 이듬해 완료했다. 여러 분야에서 시도된 이같은 변화 이외에도 영조 시대에는 문화적인 성과도 많았다. 영조 자신이 학문을 즐겼기 때문에 스스로 서적을 찬술하기도 하고 인쇄술을 개량하여 많은 서적을 간행하여 민간에 반포시켜 일반 백성이 볼수 있도록 하였다. 1729년에는 '감란록'을 만들고 이듬해 '숙묘보감'을 편찬하였으며 1732년에는 이황의 학문 세계를 담은 '퇴도언행 록'을 간행케 하였다. 그리고 1736년에는 '경국대전'을 보강했으며 여성들을 위해 네 권의 책을 묶은 '여사서'를 언 역하고 1742년에는 '천문도', '오층륜도'를 이듬해에는 균역의 전형인 '양역실총'을 인쇄하여 각 도에 배포했다. 이 회에 '경국대전'을 보수한 뒤 새롭게 제도적으로 바뀐 것들을 반영한 '속대전' 1747년의 '황단의궤' 관리들의 필독서인 '무원록' 1749년에 만들어진 '속병장도설' 1753년에 편찬된 '누주통의' 영조 자신의 왕위 승통의 정통성을 천명하는 1754년의 '천의소감' 1757년의 '삼국기지도', '팔도분도첩', '계주윤음' 등과 1765년의 '해동악장', '여지 도서' 우리 나라 최초의 백과 사전인 1770년의 '동국문헌비고' 등이 있다. 영조 자신이 친히 쓴 글로는 '악학궤범 서문' 자서전인 '어제자성편' 무신들을 위해 쓴 '위장필람' 그리고 '어제경 세문답', '백행원' 등 십여 권의 책이 있다. 한편 이 시기에 재야에서는 실학이 확대되면서 신학문에 조예가 깊었던 영조의 후원을 받아 실학자들의 서적도 편 찬 간행되었다. 1765년 북학파 홍대용의 '연행록'이 편찬되고 1769년에는 실학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유형원의 '반계 수록' 신경준의 '도로고' 등이 편찬되었다.
- 정성왕후 서씨 -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딸이다 1704년 13세의 나이로 숙종의 둘째 아들 연잉군과 가례를 올려 달성군부인에 봉해지고 1721년 경종이 병약하여 후사가 없어 연잉군이 세제로 책봉되자 동시에 세제빈에 봉해졌으며 1724년 영조가 즉위함에 다라 왕비에 봉해졌다. 1740년 혜경이라는 존호가 올려졌으며 1757년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소생은 없으며 능은 홍릉으로 경기도 고양시에 있다.
- 정순왕후 김씨 -
오흥부원군 김한구의 딸이다.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가 죽자 1759년 15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어 66세의 영조와 가례를 올렸다. 그녀는 소생은 없었고 영빈 소생의 사도세자를 미워하여 아버지 김한구의 사주를 받아 모함했으며 나경언이 사도세자의 10가지 비행을 상소하자 그를 서인으로 폐위시켜 뒤주 속에 가두고 굶어죽게 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그 후 조정이 사도세자를 동정하는 시파와 그의 치죄를 당연시했던 벽파로 나누어지자 시파를 미워하고 벽파를 옹호하였다. 정조가 죽고 순조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했으며 이 때에 벽파인 공서파와 결탁하여 시파의 신서파 대 신들을 모함하였고 또한 시파 인사들이 많이 관여했던 천주교에 일대 금압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이가환 등 천주교 신앙의 선구자들이 옥사당하고 정약종 등이 처형되었으며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전 라도 지방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종친 은언군과 그의 부인 및 며느리 등도 같은 이유로 사사시켰다. 그녀는 이렇게 정계의 중심에서 당파와 어울리다가 1805년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죽은 후 영조와 함께 경기 도 구리시에 있는 원릉에 묻혔다.
- 효장세자 -
영조의 맏아들이며 정빈 이씨의 소생이다. 비는 좌의정 조문명의 딸 효순왕후이다. 1724년 경의군에 봉해지고 이듬 해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1728년 10세의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 양자인 정조가 즉위한 후 진종으로 추존되었다. 능은 경기도 파주에 있는 영릉이다.
- 사도세자 -
영조의 둘째 아들이며 영빈 이씨의 소생이다. 이복형인 효장세자가 일찍 죽고 영조의 나이 40세가 넘어서 출생한 탓으로 2세 때 세자에 책봉되고 10때 홍봉한의 딸 혜빈 홍씨와 가례를 올렸다. 그는 3세 때 이미 부왕과 대신들 앞에서 '효경'을 외웠고 7세 때 '동몽선습'을 독파했다. 또한 서예를 좋아해서 수 시로 문자를 쓰고 시를 지어서 대신들에게 나눠줬으며 10세 때 이미 소론측이 주도한 바 있는 신임옥사를 비판했다고 한다. 1749년 15세 때 부왕을 대신하여 서정을 대리하였는데 이 때 그를 싫어하던 노론들과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이 그를 무고하였다. 성격이 과격하고 급하던 영조는 수시로 그를 불러 꾸짖었고 이로 인해 그는 정신 질환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궁녀를 죽이고 여승을 입궁시키거나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관서 지역을 유람하기도 했다. 장인 홍봉한은 그의 병중에 대해 무엇이라고 꼭 꼬집어서 말할 수 없고 병이 아닌 것 같은 병이 수시로 발작한다고 하였다. 이같은 말에 비추어 볼 때 사도세자는 일종의 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던 듯하다. 그의 돌발적인 행동이 계속되자 1762년 계비 김씨의 아버지 김한구와 그 일파인 홍계희, 윤급 등의 사주를 받은 나 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였다. 이에 영조는 분개하여 세자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그를 휘령전으로 불러 자결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그가 부왕의 명을 거부하자 영조는 그를 뒤주에 가둬 8일 만에 굶겨 죽였다. 이 때 그의나이 28세였다. 그가 죽은 뒤 영조는 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의미로 그에게 '사도'라는 시호를 내린다 이 후 그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으로 추존되었다가 다시 장조로 추존되었다. 그의 무덤은 처음에 경기도 양주 배봉산 아래에 있다가 정조 때 수원 화산으로 이전되어 현륭원이라 하였다가 장조 로 추존된 뒤에 융릉으로 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