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재 환 뉴스위크 한국판 기자
2002-10-24
북한이 체제의 생존을 건 대담한 도박을 시작했다. 신의주 특구에 이은 두번째 모험이다. 특구계획이 개혁·개방을 통한 생존의 모색이라면 이번에는 사정이 다르다. 전쟁으로까지 치달을 수 있는 치명적인 카드를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북한이 체제의 생존을 건 대담한 도박을 시작했다. 신의주 특구에 이은 두번째 모험이다. 특구계획이 개혁·개방을 통한 생존의 모색이라면 이번에는 사정이 다르다. 전쟁으로까지 치달을 수 있는 치명적인 카드를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북한이 1994년에 이어 두 번째로 꺼내든 ‘핵 카드’는 과연 북한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어 나갈 것인가.
북한의 핵 카드는 반대편 테이블에 앉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마저 놀라게 했다. 10월 2일부터 3일간 북·미협상을 위해 방북했던 대북특사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에게 북한의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이 수년전부터 핵개발 계획을 진행시켜 왔다고 순순히 시인했기 때문이다. 켈리 특사가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우라늄 농축장비를 구입했다는 증거 등을 내놓자 북한은 “우리는 더 강력한 무기들도 더 많이 갖고 있다”고 밝혔다. 북한이 핵개발 문제에 대해서는 시인도 부인도 않는(NCND : Neither Confirm Nor Deny) 정책을 펴왔기 때문에 미국 대표단의 충격은 더욱 컸다고 한다.
북한의 핵개발 추진 사실이 알려지면서 94년 제네바 합의를 토대로 안정을 누렸던 한반도 정세는 급류에 휩싸이고 있다. 그동안 대북 햇볕정책을 펴왔던 김대중 정부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2002년 4월 임동원 외교안보통일특보의 방북이후 비교적 순조롭게 풀려온 남북대화도 궤도수정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10월 29일 북·일 수교회담의 재개를 앞두고 있는 일본은 “북·일 국교정상화는 순탄치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최근 몇년간 북한과의 관계개선에 적극적이었던 유럽연합(EU)도 “경수로 건설·인도적 지원·경제개혁 원조·농업지원 등 북한과의 모든 관계를 재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북한 핵파문으로 그동안 북·미, 남북관계의 기본틀을 형성해온 제네바 기본합의가 폐기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1994년 북·미간에 체결된 제네바 합의는 북한의 핵개발 동결 대가로 북한에 경수로 2기를 제공한다는 것이 골자다. 뉴욕타임스 등 외신은 미국이 제네바 기본합의를 파기하기로 결정했다고 보도했으나 최근 방한한 켈리 차관보는 “아직 미국 정부가 결정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합의는 북한의 핵개발 추진으로 사실상 폐기됐고 미정부 당국도 사실상 ‘사문화’됐다고 밝히고 있다.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은 NBC방송에 출연, “북한측의 시인으로 제네바 합의는 파기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제네바 합의의 파기는 한반도에 심각한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 당장 북한의 핵개발에 대해 규제할 수 있는 국제적 수단이 사라져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제네바 합의는 남북한뿐만 아니라 미국과 유럽 등이 참여하고 있는 국제적 평화 프로세스라는 점에서 파장이 클 수밖에 없다. 합의가 공식파기되면 북한은 영변의 핵시설을 재가동할 수 있는 명분을 얻게 된다. 미국측도 합의의 조건중 하나인 연간 50만t의 중유제공을 중단할 수 있고, 현재 진행중인 경수로 건설사업도 중도 하차할 가능성이 크다.
제네바 합의 파기는 불가피하게 북·미관계의 새로운 틀이 필요함을 뜻한다. 부시 행정부는 집권이후 제네바 합의가 수정돼야 하며 대북문제에서 새로운 틀이 필요하다는 것을 계속 강조해왔다. 당초 2003년까지 완공하기로 했던 경수로 건설이 지연되면서 북한 역시 제네바 합의가 무효화됐다고 밝힌 바 있다. 대북전문가들은 지난 북·미 회담이 제네바 합의 이후의 체제를 모색하기 위한 자리였다고 분석하고 있다. ‘핵카드’는 한반도에 북·미 관계의 새로운 틀이 모색되는 가운데 등장한 돌발변수다.
현재 관심의 초점은 왜 북한이 순순히 핵개발을 시인하고 나섰는가 하는 점에 쏠려 있다. 북한의 공식반응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러나 뉴욕주재 북한 대표부의 고위 관리는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핵 개발 시인은 기정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이 우리에 대한 적대정책을 철회하고 관계를 정상화하면 핵·미사일 등 미국의 우려사안들을 대화를 통해 해결할 것”이라고 밝혔다. 부시정권의 등장이후 가중되고 있는 미국의 대북 압박속에서 ‘체제보장’을 위한 협상카드로 핵개발을 시인한 셈이다.
북한의 핵개발 시인은 다소 모호한 구석이 많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은 “북한이 이미 소수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며 “추가 핵무기 개발도 추진중인 것 같다”고 밝힌 바 있다.
강경파인 그의 말에 따르자면 북한의 핵개발 시인은 이미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이같은 분석에 동의하지 않는 전문가들도 많다. 북한 발언의 숨은 뜻은 앞으로 핵개발을 추진하겠다는 ‘미래형’일 수도 있고, 현재 추진중이라는 ‘진행형’일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북한의 발언을 “농축우라늄을 통한 핵무기 개발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는 “공개적인 회담에서 국제협약을 위반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실토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며 “미국의 일방적인 요구에 대한 일종의 북한식 공갈협박이 아닌가 한다”고 분석했다.
핵개발은 북한으로선 일종의 체제수호를 위한 전략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북한전문가들은 “미국과 적대관계가 유지되고 분단체제가 지속되는 한 핵개발을 추진하려는 게 북한 정권의 의도”라고 분석한다. 북한대표부의 고위관리가 “세계 어느 나라도 생존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데 미국은 우리를 자극하는 발언을 계속해왔다”고 말한 것도 이같은 분석을 뒷받침한다.
미국은 그동안 대북문제에서 ‘先 대량살상무기(WMD) 해소, 後 관계개선’의 입장을 취한 반면, 북한은 동시해결 전략을 취해왔다. 북한은 이같은 일괄타결 전략속에서 체제보장과 경제지원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 했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7·1 경제관리개선 조치이후 북한 내부에서 진행되고 있는 개혁·개방의 속도를 늦출 수 없는 상황에서 북한은 북·미 관계가 경색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양빈 신의주 특구 행정장관의 연행사태로 대중(對中) 관계가 잠시 냉각되기도 했지만 아직 중국은 북한의 전통적인 우방이다. 일본의 경우에도 북·일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이례적으로 일본인 납치에 대해 사과표명을 함으로써 1백억∼2백억달러로 추정되는 경제지원금을 얻어낼 가능성이 높아졌다. 남은 것은 미국과의 관계개선이다. 핵문제는 북한에 대단히 유용한 협상카드다.
이번 핵파문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측은 햇볕정책을 추진해온 김대중 대통령이다. ‘先 교류협력, 後 긴장완화’를 주장해왔던 햇볕론자들의 목소리가 위축되고 ‘先 긴장완화, 後 교류협력’을 주장해왔던 정치세력의 입지가 강화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일각에서는 이번 핵파문에 깔려 있는 미국측의 의도를 주목하기도 한다. 대북화해노선을 걷고 있는 한국과 일본을 견제하고 한국에 대북강경노선의 정부가 탄생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한 미국의 전략이 아닌가 하는 분석이다. 한 북한 전문가는 “미국이 이라크와 북한을 동시에 겨냥하는 것은 초점이 흐려질 수 있다. 이라크 공격이후에 북한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미국의 의도된 전략이 아닌가 한다”고 설명했다.
이번 사태의 해결은 북한의 태도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켈리 특사는 10월 19일 기자회견을 통해 북한측에 “즉각적이고 가시적으로 비밀 핵무기 계획을 중지하라”고 촉구했다. 미국은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포기해야만 협상에 나서겠다는 입장이다. 대북포용정책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동의한다는 입장이다. 북한에 대해 “핵폐기 없이는 어떤 협상도 없다”며 미국측이 ‘先 핵폐기, 後 협상’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북한이 주장하는 선제공격 포기, 체제보장, 평화협정 체결과 대량살상무기 해소 등에 관한 일괄타결은 어려울 전망이다.
남은 문제 중 하나는 북한이 보유하고 있을 핵기술이다. 벨로루시·카자흐스탄·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은 국제제재에 의해 핵무기개발 프로그램을 포기한 바 있다. 북한이 핵기술 확산을 또다른 협상카드로 제시하면서 포괄협상에 나설 가능성도 지적되고 있다. 북한 핵문제에 대한 해법은 10월 26일 멕시코에서 열릴 예정인 APEC 회의에서 이뤄질 한·미·일 정상회담을 통해 제시될 전망이다. 지금 한반도에서는 ‘북한핵파문’으로 소리없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