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9월 21일 월요일 공부하실 어문은 성인어난사 1190의 일절로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들은 현재는 이 대난을 당할지라도 후생은 성불하리라.
비유컨대 뜸과 같으니 당시는 아플지라도 후에는 약이 될 것이니 아프면서도 아프지 않느니라.
지난 9월 6일부터 8일간 3일 동안,
사도어서,
쇠는 불에 달구어 두드리면 검으로 되고 현성은 매리함으로써 시험되느니라.
시지시로전 어서,
대난이 오면 강성한 신심은 더욱더 기뻐하느니라.
어의구전,
이 법화경을 수지하는 자는 난을 만난다 라고 알고 수지하느니라.
그러므로 “즉위질득 무상불도”의 성불은 지금 니치렌 등의 동류가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함이 이것이니라
난에 대한 어서를 차례로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더불어 금일의 어서와 관련하여, 난에 대한 중요한 부분을 재정리 하여,
개목초 강의 제 20회의 생사불이의 대공덕의 내용을 추가하여 정리해 보았습니다.
즉, 난을 통하여 종국에 받고자 하는 진실한 공덕이란, 삼세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행복의 궤도를 걷는 것입니다.
금세에 생사를 일관하는 올바른 생명의 대도를 이룩하는 것입니다.
한번 쯤 난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전체적으로 정리해 보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던 중 금일 어문인 성인어난사의 일절을 만나,
추가된 정리본이기에 양이 조금 많은 것에 대한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더불어 금번 정리본이 현재 그리고 미래 난에 맞서 싸우는 동지에게 미약하나마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하겠습니다.
창가학회의 역사와 확신(상)에서 도다 선생님께서는,
형제초의 1087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더욱이 마하지관(摩訶止觀)의 제 5권의 일념삼천은 한층 더 깊이 들어간 법문이니라.
이 법문을 말하면 반드시 마(魔)가 출래(出來)하느니라.
마가 다투어 일어나지 않으면 정법이라고 알지 말지어다.
제 5권에 가로되 행해(行解)를 기위(旣爲) 힘쓰면 삼장사마가 분연히 다투어 일어난다.
내지 따르지 말지며 두려워 말지어다.
이에 따르면 바야흐로 사람으로 하여금 악도(惡道)에 향하게 하고 이를 두려워하면 정법의 수행을 방해 하느니라 등 운운.
이 석(釋)은 니치렌 자신에게 해당될 뿐만 아니라 문가(門家)의 명경(明鏡)이니 삼가 배우고 전하여 미래의 자랑으로 삼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어서에서,
쇠는 불에 달구어 두드리면 검으로 되고 현성(賢聖)은 매리함으로써 시험되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니치렌 대성인 어서강의 2권 사도어서 강의 제5장에서,
대성인께서는 이와 같은 난을 당하여 책망을 듣게 되는 것도 세간의 과실은 조금도 없고 다만 과거의 방법의 중죄를 지금 소멸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시고 계십니다.
숙업은 헤아리기 어렵다고 하시며 쇠는 화염에 넣어 달구어 두드림으로써 검이 되며, 현인과 성인은 매리하여 시험해 보는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마찬가지로 대난을 만나야 비로소 신심도 단련되고 숙업의 타개도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개목초 234에서,
나와 더불어 나의 제자는 제난이 있을지라도 의심이 없으면 자연히 불계에 이르리라.
천의 가호가 없음을 의심하지 말 것이며 현세가 안온하지 않음을 한탄하지 말지어다.
나의 제자에게 조석으로 가르쳐 왔건만 의심을 일으켜서 모두 버렸느리라.
어리석은 자의 버릇이란 약속한 일을 필요한 때에는 잊어버리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서원을 관철해야 할 그 때입니다.
일생성불을 향해 나아갈 때 삼장사마가 다투어 일어나고 삼류강적이 출래하는 것은 경문에서 설하는 대로의 필연입니다.
대성인은 제천의 가호가 없는 점이나 현세가 안온하지 않는 점을 의심하거나 한탄하면 안 된다고 거듭 가르치셨습니다.
왜냐하면 의심과 한탄,
불신과 방법은 신심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의심하는 마음이 없으면, 다시 말해 대성인과 같이 불석신명의 강한 신을 관철하면 어떠한 고난도 이겨내는 힘찬 생명력을 용현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연히 성불의 경애를 열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케다 선생님께서는,
니치렌 대성인 불법의 진수는 신(信), 다시 말해 성불입니다.
그 신은 자신과 만인의 성불을 믿는 깊은 신이라는 점이 핵심입니다.
또 어떤 일이 있어도 끝까지 해내는 지속하는 신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마성에도 지지 않는 강인한 신만이 성불을 결정짓는 것입니다 라고 지도해 주셨습니다.
고난은 인간을 강하게 합니다.
대난은 신심을 단련시킵니다.
난에 도전하여 신심을 단련하면 나의 기심에 불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대난이 덮쳐 와도 사자왕의 마음으로 싸우는 사람은 반드시 부처가 됩니다.
그 싸움의 무기인 신은,
자신과 만인의 불성을 믿는 깊은 신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관철하는 지속의 신이어야 합니다.
어떤 마성도 지지 않는 강인한 신이 성불하게 하는 것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한 신앙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최고의 법을 위해 살며 불석신명으로 투쟁하는 신심에서 생명이 단련되고, 금강불괴의 성불의 경애를 확립할 수 있음을 잊으면 안 됩니다.
어서에는 난이 많이 일어나도 그것을 인내하고 신심을 관철하면 구하지 않아도 자연히 성불의 공덕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를테면 불구자득(구하지 않고 스스로 득했도다)하는 성불입니다.
왜 구하지 않았는데 성불할 수 있는가.
본래 중생의 생명은 묘호렌게쿄의 당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강한 신에 의해 본래 갖추고 있는 묘호렌게쿄의 자재로운 작용이 아무런 방해도 없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생명상에 이 묘호렌게쿄가 자유자재로 작용할 때, 그 생명을 불계의 생명이라고 합니다.
묘법의 무한한 힘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작용하여 인간의 여러 가지 힘으로 발휘됩니다.
예를 들면,
홀로 서는 용기,
인내하는 힘,
고경을 헤쳐나가는 지혜,
남을 생각하는 자비로운 마음,
그와 같은 이른바 부처의 생명으로서 설한 것들이 필요한 때에 적절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묘법의 힘을 인간의 힘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묘법의 힘이 나타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마가 실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근본적인 미혹, 즉 무명이라는 점입니다.
무명은 묘법을 모르는 근본적인 무지(無知)를 말합니다.
또 묘법을 모르기 때문에 생명이 방황하다가 충동적인 어두움에 지배당합니다.
이것이 불행을 초래합니다.
모든 불행과 고뇌의 근본에는 이 무명이 있습니다.
따라서 묘법을 알면 이 무명은 즉각 소멸됩니다.
이것을 비유해서 말하면 묘법이 태양이고 무명은 태양을 가리는 검은 구름과 같습니다.
암운이 걷히면 햇빛이 비추듯 근본적인 미혹을 타파하면 바로 묘법의 힘이 생명에 작용하기 시작하여 각종 공덕과 가치창조 작용이 나타납니다.
그런 형태로 공덕과 가치가 꽃피는 것이 연화(蓮華)의 법입니다.
그래서 중생은 묘법의 당체이고 본래 불계의 생명을 갖추고 있다고 하지만, 불계는 무명의 암운을 걷어 내는 투쟁을 하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습니다.
단순히 형식적으로 제목만 부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르는 사람이 무명을 걷어 내는 투쟁을 해야 합니다.
무명은 마음속에 있는 미혹이므로 이것은 역시 자신의 마음속에서 싸워야 합니다.
그 싸움은 한마디로 말하면 신을 관철하는 것입니다.
부처의 깨달음을 밝힌 법화경을 근간으로, 대성인이 자기 속에서 발견하고 또 그것을 자신이 투쟁하면서 확인하고 실증해 온, 묘호렌게쿄라는 근원법의 작용을 우리 생명에 자유자재로 나타내려면, 대성인과 같은 의미에서 부른다(唱)는 행이 필요합니다.
즉 그 근본에 무명과 투쟁하는 마음인 신이 있어야 합니다.
대성인이 넓히신 제목은 이를테면 투쟁의 제목입니다.
무명은 의심, 불안, 번뇌 등 각종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것을 타파하는 힘은 신 이외에는 없습니다.
무의왈신(無疑曰信: 의심이 없음을 신이라 한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원품의 무명을 대치(對治)하는 이검(利劍)은 신의 일자이니라 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날카로운 검입니다.
마와 투쟁한다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무명과 날카롭게 투쟁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광선유포를 방해하는 마의 세력과 싸웁니다.
이 마와 투쟁하는 것도 근본적으로 말하면 무명과 벌이는 싸움입니다.
또 인생에서 일어나는 여러 곤란과 싸우는 것도 그 본질은 무명과 벌이는 싸움입니다.
묘법에 대한 신으로서,
반드시 성불할 수 있다,
반드시 행복해진다,
반드시 광선유포를 실현한다 라는 일념을 잃으면,
인생의 곤란에도, 광포 도상의 장마에도 지고 맙니다.
중요한 것은 필요한 때에 무명과의 투쟁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강성한 신심을 일으켜야 할 때 반대로 불신을 품고 의심을 일으켜 퇴전해 버린다면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지금이 성불의 때가 아닌가,
이 대안을 돌파하면 영원히 행복을 이룰 수 있다 라는 대성인이 외치는 혼의 울림이 전해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의심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한탄하지 않는다.
이런 강인한 정신을 가진 사람은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려운 난을 만났을 때 무엇을 어떻게 했는가.
여기에 지자로서, 불법자로서 실직적인 본질이 나타납니다.
필요한 때에 투쟁하는 신심에 오직 불계가 빛나는 것을 결코 잊으면 안 됩니다.
불에 달구어 연마하지 않는 검은 없습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케다 선생님께서는 숙명전환론의 중요한 두 가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주셨습니다.
첫째, 고난의 의미가 명확해진다는 점입니다.
고난은 무의미한 괴로움이 아니라 생명의 단련이라는 점입니다.
숙명을 전환할 수 있는 묘법의 힘을 알고 그것을 깊이 믿으면, 고난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즉 고난은 생명을 단련하는 장이며 참된 행복을 확립하는 좋은 기회입니다.
금일의 어금언에서 처럼 쇠는 불에 달구어 두드리면 검이 된다 입니다.
쇠에는 공기나 거품 등 불순물이 있어 그대로 두면 물러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 불순물을 없애기 위해 불에 달구어 두드리는 작업을 반복하면 물건을 자를 수 있는 단단한 검이 되는 것처럼 우리 고난은 이처럼 쇠를 두드리는 것에 해당합니다.
쇠는 우리 생명이고 불순물은 과거세의 무거운 중죄, 숙업입니다.
이 중죄, 숙업이라는 불순물을 없애면 불계의 생명이 나타나는데 이 현상을 예로 든 것입니다.
따라서 신심에 면려하는 속에도 어려움은 나옵니다.
그러나 이 어려움이란 내 생명을 단련해서 참된 행복을 얻기 위한 기회라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와 같은 각오를 갖고 용기 내어 어려움에 맞서는 도전이 중요합니다.
이와 같이 숙명전환론의 중요한 점은 고난의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둘째, 인생의 의미가 크게 달라진다 는 것입니다.
그것을 나타낸 것이 바로 원겸어업의 법리입니다.
원겸어업이란 바람이나 소망을 뜻하는 원이 업을 겸하다라는 뜻입니다.
악세에 태어나 악세의 괴로움을 받아야 하는 원인으로 숙업이 있지만, 이외에도 악세에 태어나는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악세의 사람을 구제하고 싶다는 보살의 바람입니다.
업에 의해 악세에 태어나는 것을 업생, 바람에 의해 태어나는 것을 원생이라고 합니다.
숙업이 아니라 바람에 의해 악세에 태어나도 숙업으로 받는 악세의 괴로움도 겸해서 받는 것이며 원생에 업생을 겸하기 때문에 원겸어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악세를 사는 사람들의 괴로움을 모르면 구제할 수 없기 때문에 임시로 괴로움을 맛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원해서 악세에 태어났지만 숙업으로 받는 괴로움도 겸해서 받는 것입니다.
호법, 법을 끝까지 지키고 숙명전환하는 사람이 악세에서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이 원겸어업의 의의가 있습니다.
즉 숙명전환하기 이전은 과거세의 악업으로 받는 괴로움이었지만 원겸어업의 법리를 알면 본래 인생은 악업의 과보로 괴로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숙명전환하고 인간혁명해서 악세의 사람들을 숙명전환의 길로 이끌기 위한 것이라는 의미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악세의 사람들을 구제하고 싶다는 보살의 바람으로 악세에 태어났으며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자신도 직접 고뇌를 맛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의 전환을 숙명을 사명으로 바꾼다는 알기 쉬운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고뇌도 없다,
괴로움도 없다고 한다면 민중의 마음을 알 리 없습니다.
인생의 쓰라림을 맛본 사람만이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괴로움을 업(業)으로 인식할 뿐이라면 소극적이 됩니다.
그것을 굳이 사명을 위해 떠맡은 고뇌다,
이것을 신심으로 극복하겠다고 내가 서원한 것이다 라고 파악해야 합니다.
원겸어업은 이 일념의 전환을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숙명을 사명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자신이 세운 서원 때문에 받는 괴로움이라면 극복하지 못할 리 없습니다.
어떤 싸움이든 목표는 명쾌해야 합니다.
또 그 목표가 보편타당성을 갖고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합니다.말이 중요합니다.
목소리가 중요합니다.
여기서부터 모든 싸움이 시작됩니다.
전심전력으로 완승을 목표로 한다.
이 일념이야말로 모든 싸움의 요체입니다.
활동도 사람과 만나는 것이 근본입니다.
싸워야 할 때 싸우지 않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는 악보다도 나쁜 존재가 됩니다.
진지한 싸움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단련시킵니다.
이 관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현실에 통찰력을 지닌 사람은 올바른 철학을 확고하게 지닌 사람입니다.
행복 중의 행복은 싸우는 신심에 있다고 배웠습니다.
일체가 인간혁명의 기회입니다.
그렇게 결심하면 돌이 금으로 바뀌게 됩니다.
기와가 보석으로 바뀌게 됩니다.
괴로움이 전부 복운으로 바뀌게 됩니다.
시지시로전어서 1448에서,
대난이 오면 강성한 신심은 더욱더 기뻐하느니라.
법사 공덕품에서는 법화경을 홍교하는 사람에게 즉 청정하고 뛰어난 눈과 귀를 가지고 자신과 사람들을 지키고 이끌 수 있는 공덕이 있다고 설했습니다.
신심으로 연마한 생명에 갖춘 풍부한 힘으로 진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해서 지혜를 발휘하고 괴로움을 이겨내어 복덕을 여는 공덕이 있습니다.
말법에는 법화경 행자가 반드시출래하리라.
여기서 반드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법화경 행자가 출현하지 않으면 부처의 금언이 허망해집니다.
부처의 말씀이 진실인 이상, 반드시 말법에 민중을 구하는 법화경 행자가 출현하지 않을 리 없다 라고 이해하지 않으면 법화경을 이해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니치렌대성인이 법화경 행자의 실천을 관철해서 경문을 증명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음 글월에서는 법화경 행자로서 필요한 조건을 나타내셨습니다.
그 핵심이 대난이 오면 강성한 신심은 더욱더 기뻐하느니라 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대난에도 정면으로 맞서서 승리하고 유연히 극복하는 일이 법화경의 신심입니다.
어서에,
기쁨이 몸에 넘치는(어서 1343쪽),
크게 기쁘구나(어서 237쪽),
더욱더욱 기쁨이 더함이라(어서 203쪽)
대난이 즉 환희라는 말씀을 곳곳에서 하셨습니다.
어떤 대난이 밀어닥쳐도 정법홍통을 끝까지 하며, 눈앞의 한사람이 지닌 고뇌를 제거하고 심전에 행복의 종자를 심는 기쁨보다 더한 것은 없습니다.
법화경은 가장 높고 강하며, 가장 존귀한 인생을 촉구하는 힘을 갖추었습니다.
법화경을 끝까지 수지하고 사는 일이 최고의 행복입니다.
본초에서는 대난에 도전하는 법화경 행자의 경애를 천태대사의 마하지관의 글을 토대로 두 가지 측면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법화경 행자의 경애를 불에, 대난을 장작에 비유하셨습니다.
불에 장작을 지피면 불의 세력은 더욱 성합니다.
이처럼 신심의 불길은 난이 일어나면 더욱더 타오르고, 법화경행자로서 느끼는 자각과 확신도 강성해집니다.
또 하나는 법화경 행자의 경애를 대해로, 대난을 중류 혹은 강물, 모든 강물로 비유하셨습니다.
큰 바다에는 강물이 흘러 들어가도 그것을 되돌려 보내는 일은 없습니다.
반대로 흘러 들어간 물을 받아들여서 바다는 더욱 풍요로워집니다.
대해에 중류가 들어가나 그래도 대해는 강물을 되돌려 보내는 일이 있느뇨라는 이 글월을 배독할 때마다 어떤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대난을 유유히 받아들여 이겨내신 대성인의 광대한 경애가 그리워지고 깊은 감동을 새롭게 합니다.
어쨌든 난이 있기 때문에 신심의 불꽃이 타오른다,
큰 바다와 같은 광대한 경애를 열 수 있다,
그리고 반드시 부처가 된다.
신심이 있으면 대난이 바로 숙명전환을 위한 가장 좋은 기회라고 포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성인은 대난이 없으면 법화경 행자가 아니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법화경에서 설한 대로 대난이 일어나는 이유는 말법의 법화경 행자로서 실천을 바르게 했다는 가장 좋은 증거입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참된 행자이어라 라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대성인 재세 당시에도 법화경을 믿는 사람은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만 자기 공덕을 위해 강의를 듣거나 경문을 베끼기만 했습니다.
어려운 시대에 목숨을 걸고, 미혹에 빠져 괴로워하는 사람을 한사람도 남김없이 반드시 구한다 라는 부처의 진의와 동떨어진 법화경 관이었습니다.
이때 대성인이 사신홍법의 행자로서 대투쟁하여 당시 법화경관을 과감하게 타파하셨습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이 신자(信者)와 행자(行者)를 엄격하게 구분하신 일도 유명합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마(魔)가 일어나는가, 일어나지 않는가에 따라 신자와 행자를 구별할 수 있지 않은가 라고 사자후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공덕만 원하고 삼장사마와 싸우지 않는 자는 단순한 신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갈파하셨습니다.
광선유포를 위해 보살행에 힘쓰고 삼장사마와 투쟁하는 사람이 진실한 행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용기 있는 말,
확신 있는 말 ,
자애하는 말이 상대의 마음을 울리고 생명을 움직이게 합니다.
부처가 말씀하신 진실이므로 일문일구라도 말하는 의의와 사명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단 그 한마디를 말하는 실천에 위대한 공덕이 생깁니다.
우리가 나날이 실천하는 절복도 이와 같습니다.
난해한 법리를 말하고 파절하는 일만이 절복이 아닙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심에 힘쓰면서 자신이 실감한 체험과 기쁨, 확신을 꾸밈없이 그대로 전하면 됩니다.
그것이 진실한 말입니다.
이 신심으로 반드시 행복해집니다.
제목으로 자기를 변혁할 수 있습니다.
기원해서 극복하지 못할 곤란은 없습니다.
상대가 행복하기를 진지하게 원하며 성실하게 말하는 한마디,
넘치는 생명력에서 나오는 확신과 환희의 한마디,
벗의 고뇌를 무너뜨리는 용기와 희망에 찬 한마디,
그런 한마디가 상대 생명의 불성을 불려 일으킵니다.
인생에는 고뇌나 걱정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또 누구도 생사라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깊고 끝없이 이어지는 고뇌를 비유해서 생사의 대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난을 만나는가에 대하여,
특히나 왜 대난을 만나는가에 대하여,
개목초 강의 하권 제 13회에서,
법화경의 행자라면 큰 상위가 있습니다.
우선, 말법에 법화경을 홍통하는 자에게 제천선신의 가호가 반드시 있으며 행자는 현세안온, 후생선처를 이룬다.
둘째 법화경 행자를 박해하는 자는 반드시 현벌을 받는다.
이는 즉, 구횡의 대난을 만난 석존을 보아도,
장목와석의 난을 만난 불경보살을 보아도,
살해당한 목련을 보아도,
제바보살(3세기경 남인도 사람으로 외도를 파절하다 살해당한 인물)을 보아도,
생명을 위협하는 난을 만났을 때 제천선신의 가호가 없다고 해서 법화경 행자가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법화경 행자에게 안온은 대난과 싸워 이기는 경애를 확립할 때에 진정한 안온이 있습니다.
법화경 행자가 난을 극복하고, 정법 홍통을 위한 투쟁을 관철할 때,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에 불계가 용현합니다.
이 법화경 행자의 묘법 홍통을 위한 투쟁은 개인의 숙명전환과 일생성불을 위한 투쟁일 뿐만 아니라 제천선신의 작용을 소생시켜 국토 안온을 도모하는 입정안국을 위한 투쟁이 되는 것입니다.
여설수행초 어서 510에는,
진실한 법화경의 여설수행의 행자의 사제단나로 됨에 있어서는 삼류의 적인은 결정적이라.
그러므로 이 경을 청문하기 시작한 날부터 생각을 정할지어다.
황멸도후의 대난의 삼류가 심할 것이라고.
그런데 나의 제자 등 중에도 이전부터 청문했으면서도 대소의 난이 왔을 때는 새삼스레 놀라고 혼이 빠져서 신심을 져버렸느니라.
미리 전부터 말하지 않았느뇨.
경문을 우선으로 하여 유다원질 황멸도후, 황멸도후라고 조석으로 가르친 것은 이것이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유사시의 신심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여설수행초 강의 제2장 행자가 난을 당하는 이유편에서,
신심은 관념도 아니고 말뿐인 것도 아니다.
오저의 일념이자 엄연한 실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일단 유사시에 두려워하거나 퇴전하는 사람은 흉중에 있는 최고의 보물을 헛되이 던져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대성인의 시대와 같은 난은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일생성불의 순간에는 언제나 마와 엄하게 대결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어의구전 보탑품 20개의 대사 중 제 14 차경난지(此經難持)지사에서,
이 법화경을 수지하는 자는 난을 만나리라고 알고 수지하느니라.
그러므로 즉위질득(卽爲疾得) 무상불도(無上佛道)의 성불은 지금 니치렌 등의 동류가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함이 이것이니라.
묘법연화경 병개결 p. 393 - 394의 통해로,
만약 능히 수지한다면 곧 부처의 몸을 갖는 것이니라.
모든 선남자여 내가 멸한 후에, 누가 능히 이 경을 수지하고 독송하겠느뇨.
지금 부처 앞에서 스스로 맹세의 말을 하라.
이 경은 지니기 어려우니,
만약 잠시라도 지닌다면 나는 곧 기뻐하며 제불 또한 그러하리니,
이와 같은 사람은 제불이 찬탄하는 바이니라.
이것이 곧 용맹이고 이것이 곧 정진이요.
이것이 계를 가지는 것이고 두타를 행하는 자라고 하느니라.
곧 빨리 무상의 불도를 얻게 되느니라.
능히 내세에 이경을 읽고 가지면,
이는 참된 불자로서 좋은 땅에 머물게 되느니라.
즉, 법화경을 수지하는 일의 곤란함을 설하고, 그 공덕을 교시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의의판문초에서는,
이 문을 삼대비법에 배립하고 있습니다.
이경을 갖기 어렵도다에서 무상의 불도를 득했노라 까지가 본문의 본존
능히 내세에 있어서 이 경을 읽고 수지하는 자는 부분이 본문의 제목
이는 참다운 불자, 순선의 지에 주하느니라가 본문의 계단입니다.
어의구전 안락행품 5개의 대사 중 제1 안락행품지사에서,
어의구전에 가로되,
묘호렌게쿄를 안락하게 행하는 일은 말법에 있어서 지금 니치렌 등의 동류의 수행은 묘호렌게쿄를 수행함에 난이 옴을 가지고 안락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안락행품은 적문 14품의 마지막 품으로,
권지품 제 13에서 심행(深行)의 보살이 홍경의 신만을 탄하고 오백 및 팔천의 성문들이 사바를 두려워하여 타토의 홍경을 맹세하는 상태였으므로,
문수보살은 천행초심의 행자가 탁악세에서 안락하게 묘호렌게쿄를 수행하는 방법을 물었으며 석존은 이에 대해 신, 구, 의, 서원의 사안락행을 설하여,
초심의 사람은 이에 따라서 묘호렌게쿄를 홍통하고 수행할 것을 교시합니다.
어의구전 강의 상 5권 p. 278에서,
난이 옴을 가지고 안락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의 금언을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대성인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금세에 부처의 힘을 내고 죽어서 영산에 돌아가, 삼세시방의 불, 보살로부터 칭찬받는 최고의 신자, 인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일념, 신심의 강함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입니다.
대성인의 인생도 박해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난 속에서도 생애, 그 경애는 유유하셨습니다.
우리들도 또한 신심을 열면 일체가 안락으로 되는 것입니다.
난이 있으면 있을수록 그 사람은 성장하고 복운을 빨리 쌓는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또는 안락이란 모든 사람이 안락을 추구하며, 병자는 건강해지기 위해, 가난한 자는 부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없이 괴로움에서 안락으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안락은 상대적인 안락입니다.
진실된 안락은 절대적 안락이며, 절대적 안락은 바로 성불입니다.
어떠한 것에도 침범당하지 않고, 영원히 안락해질 수 있는 경애를 확립하는 일이 바로 최고의 안락인 것입니다.
다시 돌아가 오늘의 어의구전에 대하여,
삼대비법의 어본존을 수지하는 이상은 난을 만나리라고 알고 수지하느니라 라는 말씀에 대하여, 거기에 무상최대의 행복, 즉 즉신성불의 경애를 얻을 수 있다는 불법의 방정식을 엄연하게 설하시고 계십니다.
재세 및 정상에 있어서는 석존은 구횡의 대난을,
천태는 남삼북칠의 공격을,
전교는 육종(六宗)에게 원질 당하였습니다.
그 밖의 예는 말씀드린 것과 같습니다.
하물며 악세말법에 있어서 불법유포를 지향할 때에 난이 다투어 일어나지 않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불법을 위해 몸을 버리는 것은 어떠한 난을 만날지라도 어본존을 호지하여 일생성불의 본회를 완수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사도초 910에서,
돌을 금으로 바꾸고 분을 쌀로 바꾸는 것이니라 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주사친의 삼덕을 구비하신 어본불 니치렌 대성인이 우리에게 자비를 내리시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난을 당하는 것을 보고 전중경수의 불법의 대법칙으로 받아야 할 난을 극복함으로써 성불하는 것입니다.
또한 난을 만날 것을 각오해야만 마(魔)를 막을 수 있기 때문에 엄하게 말씀하시는 것이며 대지비의 금언이라고 삼가 강하게 믿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범부는 중요한 때에 눈앞의 안락을 구하여 신심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어서에서, 받기는 쉽고 가지기는 어렵도다.
그러므로 성불은 가지는데 있으며 이 경을 수지하는 사람은 난을 만난다고 심득해서 갖는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시조깅고전어서[별칭 차경난지어서] 1136 에서,
삼세의 제불의 대상인 남묘호렌게쿄를 염(念)함을 갖는다고 하느니라 라고 말씀하시고,
도키전어서[별칭 지가단면어서] 970에서,
일생을 헛되이 보내고 만세에 후회하는 일 없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한평생 강성하게 신심을 관철하여 각자가 후회 없는 인생을 완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이 경은 갖기 어려우니라.
만약 잠시라도 갖는 자는 나는 즉 환희하노라.
제불도 또한 그러하니라 라는 부분에 대하여,
아즉환희(我則歡喜)의 아(我)란 심왕 다시 말해서 생명 그 자체이며, 제불이란 심수(心數), 다시 말해서 생명의 작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본존을 수지하고 신심에 면려할 때에는 생명의 근본도 생명의 작용도 동시에 환희하는 것입니다.
또 아란 범부를 말하는 것이며 범부 즉 부처이며, 제불이란 삼세시방의 제불입니다.
니치렌 대성인 및 그 문하가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여 환희하면 제불도 또한 환희하는 것입니다.
제목을 부르는 일이 최고의 환희입니다.
우리들이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들의 생명에 위대한 영향을 주는 일이며,
약동하는 생명활동으로 되는 것입니다.
얼굴 빛이 좋아지고 생활상에 공덕이 쏟아지는 것은 그 증거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환희이며 환희 중의 대환희입니다.
경기에서 이겼다,
승진을 했다,
돈이 모였다,
집을 샀다,
병이 낳았다,
장관이 되었다,
이 모두가 기쁨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영원한 기쁨 인 것은 아닙니다.
일시적인 것이며, 상대적인 것으로 결코 영구적이며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그러한 일시적인 환희가,
도리어 장래의 걸림돌이 되고,
불행의 원인으로 된다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항상 경험하는 바와 같습니다.
어본존을 믿고 착실히 제목을 부르는 이외에 본연적인 환희는 없습니다.
이 환희야말로 상주의 것이며, 일체의 환희는 여기에 포함되어 비로소 우리들의 행복의 내용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면 니치렌 대성인은 기뻐해 주시고 다른 일체의 삼세의 제불도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묘법을 부르고 절복을 하며 여러 가지 비난을 받고 간혹 박해를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법화경을 수지하여 받을 때는 심왕, 심수가 동시에 환희하는 것이니라 라는 말은,
표면적으로는 반대하는 것 같지만, 일체중생에게 불성이 있는 이상, 본연적으로는 환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하는 것은 그 불성이 나타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마가 방해하는 현상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들은 기뻐하고 있는 불성에 눈을 돌리지 못하고 표면적인 마의 움직임에 현혹되면 안되는 것입니다.
남묘호렌게쿄는 본래 일체중생이 마음의 오저에서 구하고 있는 것임을 확신하여 드높이 끝까지 제목을 불러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정리해보면,
결국 삼대비법의 어본존이며,
이것을 차경난지라고 알고 수지할 때 일체 중생은 영원한 행복에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불법에는 천심, 승렬이 엄밀히 설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경에 있어서도 삼학(三學)이 분립되어 있습니다.
대성인의 불법에 있어서의 삼학은 계단과 본존과 제목입니다.
이 삼대비법은 갖추어져서 일대비법, 즉 남묘호렌게쿄이며 사의 일념삼천의 당체입니다.
그래서 공덕은 실로 말법 만년에 미칩니다.
보은초 어서 329에서,
니치렌의 자비가 광대하면 남묘호렌게쿄는 만년외, 미래까지도 유포하리라 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신심의 입장에서 삼학을 논한다면 삼대비법의 어본존 이외에 절대로 행복해지는 길은 없습니다.
이 어본존으로 반드시 즉신성불하여,
그 한 번의 제목에 삼세제불의 지혜로 모두 갖추어지게 됩니다.
삼가 신심을 만나게 해준 난,
신심 도상에 겪게 된 난,
도전 중에 받은 난,
신심 수행의 타성 속에 받는 난,
각각의 의미는 다른 것입니다.
그러한 난을 통하여 종국에 받고자 하는 진실한 공덕이란,
삼세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행복의 궤도를 걷는 것입니다.
금세에 생사를 일관하는 올바른 생명의 대도를 이룩하는 것입니다.
싸우지 않으면 영원한 행복을 쌓아 올릴 수 없으며, 피하면 무명 속을 영원히 방황할 뿐입니다.
두려워하면 장마는 더욱 증장합니다.
겁먹으면 악은 생명을 좀 먹습니다.
무명을 초월하고 장마를 타파하려면 투쟁하는 마음의 신심을 불태워야 합니다.
그것이 금세의 변독위약일 뿐만 아니라 삼세에 걸쳐 무명에 이한 유전에서 법성으로 됩니다.
그러므로 투쟁하겠다고 마음을 정할 때 대난은 대락으로 전환됩니다.
진정한 투쟁에는 환희가 있습니다.
꿋꿋이 투쟁한 사람은 생명이 단련되어 큰 경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절대적 행복 경애에 놓여 있으면 모든 투쟁이 중생소유락 그대로 환희 속에 있습니다.
무작의 삼신의 불과를 성취하는 것이 진실한 성불의 공덕입니다.
결론적으로 철저히 투쟁하는 마음 없이 생사불이라는 대락의 대공덕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마성과 투쟁하면서 만난 대난은
금생의 소고에 지나지 않으며,
말법의 때에 적합한 실천을 완수한 영원한 대락이,
법화경 행자가 싸워 얻은 대공덕인 것입니다.
투쟁하는 정신은 공명하여, 홀로 서는 마음을 낳아, 차례로 잇달아 전파해 갑니다.
한 사람, 또 한 사람 투쟁하는 용사가 늘어갈수록 세상 사람들은 개목이 됩니다.
그 한 사람이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깊이 깊이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알기쉽게 알려주셔서 너무감사드립니다~ 준비하실때 얼마나 공부를 하고 정리를하고
올리셨을까요?... 그노고덕분에 편하게 봅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대단하시네요
덕분에
많이많이 배웠습니다
항상노고에진심으로감사드립니다 ~^^~
신심의핵심지도
감사히배독합니다
노고많으십니다
건승을기원드림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