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호 당신은 에복을 입으셨읍니까? 1.어두운 감정에서 벗어나는 길 The Pathway to the Health & Happiness 에서 발췌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로마서 12:21. 어떤 것도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짜증스럽거나 성가시게 만들도록 허용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감정의 종이 되어, 고귀한 인생을 슬픔과 분노로 물들이고 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가 가장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감정이다. 감정이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경우, 그것은 우리의 인생 전체를 형편없이 망가뜨릴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의 감정이 너무나 적고 사소한 일에 상처를 받는 모습을 보면서, 세상은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에 대해서 실망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신의 자존심과 감정과 평판과 명예를 수호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유일한 목적은 자신의 성품에 풍성한 열매를 맺고, 나아가서는 다른 영혼들에게도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도와줌으로써, 그들을 하늘 본향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아무리 아픈 말을 하거나 멸시하는 눈짓을 준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성령과 교통하는 일을 막게 해서는 안된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벧전 2:20. 그러므로 복수하지 말라. 그대의 머리 속에 있는 모든 잘못된 감정의 원인들을 제거해 버려라. 성경에 기록된 원칙과 진리를 희생하지 않는한, 그대의 모든 힘을 다하여 양보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화목을 유지하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 5:23. 어떤 사람이 그대에게 성급하게 화를 낼 경우 그대는 어떠한 정신으로 반응하는가? “유순한 말은 분노를 쉬게” 한다는 교훈을 기억하라(잠 15:1). 많은 경우에 있어서, 침묵은 놀라운 힘이 된다. 분노의 신에게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에게 말 대답을 할 경우, 그것은 오히려 분노를 자극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부드럽고 오래 참는 정신으로 침묵을 지키면, 상대방을 지배하고 있던 분노의 신은 수치를 감추기 위해서 얼굴을 가린채 사라져 버린다. 그대의 폐부를 찌르는 듯한 비난의 말들이 폭풍우같이 쏟아질 때, 그대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머물러 있게 하라. 그대의 마음과 정신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되새기면서 폭풍우를 뚫고 전진하라. 그대가 무시를 당했을 경우, 상대방에게 날카로운 눈길을 보내는 대신에,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약속을 조용히 암송하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리로다” 시 37:5. 많은 경우에 우리는 동정과 도움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대신에, 우리와 같은 연약한 인간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신뢰하는 친구와 가족과 형제들에게 커다란 실망을 당하도록 허용하신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우리가 육신을 무기로 삼아서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마음 속에 사무쳐 있지만, 차마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아신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어둡고 이해할 수 없을 때일지라도,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고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를 기억하라(요 13:7).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는 우리를 반대하는 흑암의 세력을 만나게 된다. 우리의 타고난 성질을 자극하여 분노하게 만드는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기회이다. 화를 낼 수 밖에 없는 상황, 짜증을 낼 수 밖에 없는 상황, 돈에 대한 욕심을 낼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인내하고, 온유하며, 이기심을 버리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과 천사들은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게 된다. 시련의 순간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더욱 더 분명하게 나타낼 수 있는 기회이다. 시련의 순간마다 그리스도를 더욱 더 가까이 모셔 들여라. 그리스도의 능력을 통하여 시련과 시험에 승리할 때마다 우리의 믿음과 성품은 보다 큰 환란을 위해서 준비되어 간다. 각 사람에게는 자신이 개인적으로 싸워야 할 싸움이 있다. 왜냐하면 서로가 다른 약점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서로가 처한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이다. 성령의 세밀한 음성에 우리의 감정과 의지를 굴복시키는 것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5. 인생의 전 기간에 걸쳐서 일어나는 이 지루한 전쟁에서 결코 물러나지 말라. 우리가 이 투쟁에서 뒤로 물러난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위해서 해주실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감정과의 전쟁은 오직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을 통해서만 승리할 수 있다. 우리 스스로에게는 감정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힘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우리가 하나님과의 협력을 통해서 죗된 감정과 싸워서 이길 때, 우리는 하늘이 주는 평화와 포근함을 맛보게 될 것이다. 잘못된 감정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최고의 비결은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시련과 곤란과 비애와 슬픔에 대한 기록을 마음 속에 보관해 둘 필요가 없다. 모든 것들은 하늘에 있는 기록책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의 억울함과 괴로움과 쓰라림에 대한 모든 원인과 결과가 하늘 기록책에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 날에 모든 것은 그대로 드러나고 갚아질 것이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은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눅 12:2. 최후의 날에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지금 그대가 직접 하려고 애씀으로써, 그대의 아까운 인생을 분노와 보복으로 낭비하지 말라. 우리가 불쾌한 것들에 골몰해 할 때마다, 우리의 마음 속에 있던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유쾌한 생각들이 사라지게 된다. 만일 그대가 우울한 감정에 휩싸여 있거든, 그대의 감정을 이야기 하지 말라. 그대와 대화하는 사람의 생애 속에 또 하나의 그늘을 만들어 놓지 말라.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쓰라린 감정은 전염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대가 불평을 털어 놓으면, 그 말을 듣는 사람의 마음 속에도 그대와 유사한 불만이 꿈틀거리게 된다. 부정적이고 냉랭하고 음산한 신앙은 결코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끌 수 없다. 그러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사단이 펼쳐 놓은 그물에 너무나 쉽게 걸려 든다. 그러므로 그대의 실망과 불만을 말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이야기 하라. 그대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하여 그대의 마음과 감정을 변화시킬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하늘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다. 어두운 상상을 통하여 마음 속에 있는 불만을 키워나가는 대신에, 거룩한 상상을 통해서 하늘의 능력을 붙잡아라. 그대의 생각을 그대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대신에, 그대를 지금까지 인도해 오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집중시키라. 그대의 믿음이 시련을 견디고, 유혹을 저항하며, 실망을 극복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대가 가진 믿음은 추측이나 망상에 불과한 가치없는 것이다. 그대가 자신의 믿음을 통해서 죄로부터 구원받지 못한다면, 그대의 믿음은 무슨 가치가 있는가? 주님과 그분의 진리에 마음을 완전히 바쳐라.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께 마음을 온전히 바친 사람들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신다. 주님께서는 밧모섬에 귀양살이 간 요한, 사자굴에 들어갔던 다니엘, 애굽으로 팔려갔던 요셉과 같은 사람들 곁에 항상 함께 계셨다. 그분께 마음을 바친 단 한명의 영혼도 결코 좌절의 늪 속에 버려짐을 당하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단 한순간도 그대를 잊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그대 혼자만을 위해서라도 갈보리의 십자가를 지셨을 것이다. 단 한명의 영혼의 가치를 인정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아는 그대가 어찌 외롭다는 말을 할 수 있는가? 그대의 뒤에 서서, 그대가 하는 모든 일과 사업에 상관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을 모시고 있는 그대가 어찌 괴롭다는 말을 할 수 있는가? 그대 곁에 계신 그분의 임재를 확신하라. 확신을 가지고 그분의 사랑 안에 그대 자신의 모습을 감추라. 그대가 그리스도의 임재를 모시고 있다는 확신은 그대의 생각을 좀더 깊게 만들 것이며, 그대의 마음 속에 조용한 기쁨을 자아낼 것이다. 지상에 살았던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임재하심 없이 만족과 평화와 사랑을 소유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젖어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대의 마음과 정신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젖어 있다면, 그대에게 다가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 곁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허락을 통해서 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주님의 허락이 없으면, 어떤 것도 그대를 건드릴 수 없다. 그대의 고생과 슬픔, 시련과 시험, 핍박과 가난, 이 모든 것들은 주님 안에서 합력하여 그대에게 선을 이루어 놓는 도구들이다. “사람들로 우리 머리 위로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시편 66:12. 우리에게 닥쳐오는 “불과 물”같은 경험과 환경들은 그대에게 유익한 것들을 가르쳐 주는 하나님의 사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대 속에 일어나는 감정을 동정하면서, 불만과 외로움과 이기심에 압도된 생애를 사는 대신에, 그대의 눈을 들어서 하늘을 보라. 온 하늘은 그대가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하늘을 향하여 손을 뻗는 순간을 고대하고 있다. 2.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Our Firm Foundation 에서 발췌 친구야, 벌써 가을이 되어 가는구나. 이곳 시골에 살고 있는 나는, 곧 다가올 겨울을 대비하기 위한 준비를 하느라고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단다. 친구야, 너는 아직도 지나간 과거에 네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에 대하여 정직하고 신실한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니? 지나간 시절에 범했던 수치스럽고 치졸한 죄들이 너의 영혼을 지금도 아프게 하고 있니? 만일 그렇다면, 주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바라보아야 한단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분의 피는 너의 죄와 죄책감을 깨끗하게 씻어주기에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단다. 자신의 죄 때문에 고통 당하는 친구에게 친구야, 과거에 우리가 도덕적으로 무력했던 경험들, 나쁜 습관과 성질을 이기지 못해서 여러번 쓰러졌던 경험들, 하나님 앞에 드렸던 엄숙한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지 못했던 경험들, 그리고 주님의 진리를 비겁하게 거절했던 경험들은 종종 우리를 낙망시켜서 우리의 믿음과 신앙을 의심과 불신의 늪으로 끌고 가려고 한단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서 더 이상 실망할 필요가 없단다. 과거에 행했던 부끄러운 죄악들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렸던 정직한 고백과 진실한 회개의 기도와 함께 바다 보다 깊은 곳에 이미 수장되어 버렸단다. 구세주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의 죄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눈같이 희게” 되었단다. 비록 너와 나를 아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아직도 과거에 우리가 범했던 죄와 수치를 기억하면서 조롱하고 비웃는다고 할지라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보시고 당신의 깊은 품으로 “가치있는” 우리를 안으신단다. 실망과 낙담만을 가져오는 우리 자신의 감정과 느낌을 떨쳐버리고, 우리의 목적과 계획과 생애 전체를 하나님께 맡김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께서 우리의 사상과 계획과 정서를 지배하실 수 있도록 하자. 가장 지치고, 어둡고, 낙망되고, 슬프고, 괴로울 때야말로, 우리가 믿음의 손을 뻗어서 그분의 강하신 팔을 붙잡아야 할 순간이란다.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있는 힘을 다해서 그리스도의 피묻은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할 때란다. 그분의 용서하심과 사랑은 우리의 마음 속에 평화와 조용한 확신을 부식시키기에 충분한 능력이 있단다. 교회 안에서 고통 당하는 친구에게 친구야, 너는 항상 교회에서 판을 치고 있는 위선과 이기심과 파렴치함 때문에 당하게 되는 고통을 내게 호소했지. 친구야, 너는 돈많은 장로님과 세속적인 집사님들이 세상에서 얻은 명예와 평판을 교회 안까지 가지고 들어와서 세도를 행사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사업을 그들의 이기적인 재치와 수학적인 판단으로 끌고 가는 것을 보면서 내게 한탄했지. 그러나 친구야, 교회는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곳이며, 나처럼 부족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니 어찌 그러한 연약함이 없을 수 있겠니? 인간이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교회 안을 배회할 때, 그들은 그러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단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최선의 행동이요, 계획이요, 판단이기 때문이란다. 친구야, 교회 안에서 거들먹거리는 가라지를 보면서 실망하지 말아라. 또한 알곡처럼 보이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위로를 받으려고 하지도 말아라. 그들은 모두 연약하고, 언제든지 변하기 쉬운 존재들이란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성품과 희생적인 생애를 우리 자신의 생애와 비교해 봄으로써, 위선과 이기심의 가면을 벗어 버리도록 하자. 친구야, 우리가 언제까지 동료 인간들의 연약함을 보면서, 회의와 불신의 늪으로 찾아 가겠니? 진리와 재림을 사모하는 친구에게 친구야, 마지막 시대에 하늘을 위하여 준비하는 자들은 진리 때문에 당하는 고난과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란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에 순종하기를 원하며, 거룩한 생애를 살기 소원하고, 하늘 진주문을 들어가기를 갈망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루 하루를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진리에 순종하는 거룩한 생애를 살기로 선택할 때, 그 댓가로 고난과 희생을 감수해야 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란다. 그들은 두려워서 순종하기를 거절하며, 그것이 두려워서 하늘을 포기한단다. 친구야, 그들은 순종의 입구에서 서성거리고, 두리번거리지만, 결코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기로 선택하지는 않는단다. 그 결과로 성령께서 주시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만, 돈과 명예와 사치를 얻거나 유지하기 위해서 성령의 음성을 외면한단다. 그들은 순종의 뒤에 따라올 수 있는 희생을 너무나 두려워 하기 때문에, 순종의 결과로 찾아오는 하늘의 평화와 구원의 확신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지 못한단다. 친구야, “주를 향하여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한단다(요일 3:3).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마다 세상과 세속을 무가치한 것으로 던져버리고, 진리 앞으로 더욱 더 가깝게 나간단다. 재물과 명예와 인기와 평판과 같은 것들이 무가치하고 순간적인 것들로 보일 때까지,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기쁨과 평화를 이해할 수 없단다. 친구야, 우리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재 강림에 대한 소망이 식어질 때, 우리는 뜨뜻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인이 될 수 밖에 없단다. 곧 오시는 주님의 재림을 선포하는 생활을 살지 않을 때, 너와 나는 육체적 본능이 요구하는 정욕과 탐욕에 굴복하여 살아가는 비참한 종살이를 살게 될거야. 그 때, 사단은 우리 곁에 와서, “너는 불쌍한 위선자야!” 라고 속삭임으로써, 우리를 깊은 절망의 절벽 아래로 떨어뜨릴거야. 친구야, 예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우리의 두 발이 지구의 표면에서 떨어져서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할 때,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지나간 생애 동안에 하늘을 사모하며 진리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았었다는 사실이 증명될거야. 그 때까지는 인내와 봉사와 희생의 잔들을 마시면서, 좁은 길을 걸어야 한단다. 그러나 우리는 장차 하늘 진주문을 손으로 만지고, 영원한 생명수로 목을 축이면서, 과거에 세상에서 드렸던 우리의 희생과 헌신에 대해서 부끄럽게 생각하게 될 것이며, 너무나 과분하게 주어진 보상에 대해서 영원토록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이란다. 실제적인 승리를 갈망하는 친구에게 친구야,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로 온전히 돌아가는데에는 때때로 특별한 노력과 투쟁이 요구된단다. 매일의 생활에서, 우리 앞에 나타나는 십자가를 지지 않고, 어떻게 더욱 더 높고 고상한 신앙을 유지할 수 있겠니? 많은 사람들이 장래의 어느날에 기적같이 자신의 신앙이 변화되어서 구원받게 될 것을 희망하지만, 하나님의 기적은 그러한 방법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당신의 역사에 있어서, 우리의 협력과 동의 없이는 구원하시는 기적을 결코 베풀 수 없단다. 죄를 버리고, 악에서 돌아서는 일은 우리 자신이 결정해야 할 의무란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유지하고 향상시키는 일에 있어서, 우리가 해야 할 몫이 있으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몫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인간의 양심 속에 호소하실 때, 인간은 자신의 영혼 속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자신의 뜻과 계획을 굴복하기로 선택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의 사업에 협조해야 한단다. 그리스도인의 승리는 매우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단다. 배를 타고 가서 전도하고, 비행기를 타고 가서 영혼을 구원하는 “큰 사업”에 대해서는 많은 열심을 내는 사람이 아주 “적고 낮은 일” 에 대해서는 부주의한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친구야, 너는 금년에 얼마나 “큰 사업”을 주님을 위하여 계획하였니? 네가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위대한 일을 하고 싶거든, 먼저 “지극히 적은 일”에 충성하는 법을 배워야 한단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누가복음 16:10. 우리의 인생을 성공으로 이끄는 비결은 세상에서 “작은 일”이라고 칭하는 것들을 신실하게 실천하는데 있단다. 조그마한 자선, 적은 극기와 인내, 사람의 마음에 신선한 꽃이 피어나게 만드는 친절한 말 한마디, 작고 사소한 죄를 경계하는 것,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 교회가 가지고 있는 참된 신앙의 기초란다. 일상 생활에서 친절하고 예의 있으며, 가정 안에서 관대하고 오래 참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위대한 복음 사업을 위해서 가장 잘 준비된 사람이란다. 가정에서 시작되어야 할 그리스도인의 신앙 한 방울의 비가 땅을 적셔서 다음 빗방울의 자리를 예비해 주는 것처럼, 한가지의 작은 선한 생각이 다음에 이어질 선한 행위의 길을 예비한단다. 그러므로 친구야, 가장 작은 일에서 정직하게 행하고, 날마다 유쾌한 말과 환한 미소를 인생의 길 위에 뿌리면서 살아가자. 칭찬이나 이익을 생각치 말고, 오직 하나님의 진리와 원칙에 의거해서 작은 일들을 하나씩 해결하도록 하자. 친구야,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큰 위선이 무엇인지 아니? 그것은 가정에서 읽지 않는 성경을 교회에서 크게 읽는 것이며, 가정에서 나눠주지 않는 미소를 교회에서 마구 흘리며 다니는 것이고, 가정에서 보여주지 않는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교회의 모든 사람들에게 과시하는 것이지. 가정에서는 자기 멋대로 하고, 고집세며, 무뚝뚝하고, 냉정하고, 교만하면서도, 교회에서는 가장 젊잖고 유머있으며 관대한 그리스도인으로 행세하기가 얼마나 쉬운가! 친구야 율법의 완성은 사랑인데, 그 사랑이 가정 먼저 실행되어야 할 곳은 가정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리스도인에게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 분명히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성품과 생애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다음과 같은 말씀은 너와 내가 부족한 면을 지적해 주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니? “’나는 하나님을 믿으며 계명을 지킵니다’ 라고 그대가 말할런지 모른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그대는 자신의 가정과 가족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계명이 요구하는 원칙들을 잘 이행하고 있는가? 만일 그대가 가족들에게 무례하거나, 불친절한 말을 하거나, 무례하게 대한다면, 그대가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지라도, 그대는 그분의 사랑의 계명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다른 사람에게 아무리 사랑과 계명을 강조하는 설교를 한다고 할지라도, 그대의 가정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계명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율법을 범하는 자이다.” Maranatha. 친구야,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 우리가 어떻게 감사함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비이기적인 생애를 살 수 있을까?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육체는 하나님의 진리를 거절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단다. 어떻게 우리가 거룩한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늘을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셨던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사랑과 봉사의 생애를 명상하는 사람마다, 자신이 한 모든 선한 행위를 부끄럽게 여기게 되며, 오히려 자신의 게으름과 이기심을 채찍질하게 되고, 그분의 아름다운 성품과 생애가 자신의 삶 속에서 재현되기를 소원하게 될 것이다. 친구야, 끝으로 너와 나를 위한 특별한 글을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그리스도의 진리와 성령의 감동하심이 너의 생애 속에 깊이 깊이 새겨지기를 기도하마. “교회와는 연합하였지만, 그리스도와는 연합하지 않는 자들이 교회 안에 너무나 많이 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베드로가 자신의 모든 애정이 담겨져 있던 그물을 버리고 따라갔듯이, 주님을 따라야 한다. 때로는 세상에 속한 옛 친구와의 우정도 끊어야 하며, 일생의 포부와 계획을 포기해야 하고, 세상에 남아 있는 소망도 버려야 한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길은 교만한 어깨를 펴고, 자신만만하게 팔을 흔들면서 걷기에는 너무나 좁고 험한 길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베드로에게 그물을 버리도록 요구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피로 얼룩진 은혜가 오늘도 그대와 나에게 세상과 자아를 버릴 것을 요구하고 있다. 오늘, 그대와 내가 하는 말, 행동, 계획, 그리고 생각은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과 죽음을 반사하고 있는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치루어졌다는 진리가 그대와 나의 마음에 새겨진다면, 우리의 말과 행동은 전혀 새로운 것으로 변화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바라볼 때에 변화되는 우리의 생애와 품성.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그대는 지금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에 거하고 있는가?” God Taught Love 친구야,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성품과 생애의 모본이 우리를 붙잡고 있는 모든 인간적인 사상과 철학을 송두리채 뿌리 뽑을 때까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자. 안녕! 시골에서 친구가 3.우울증을 극복하는 5가지 비결 다니타 레이트, 건강 교육가 우울증은 정신 건강에 매우 치명적인 문제를 야기시킨다. 이것은 계층이나 문화적인 영역이나 나이를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질병이다. 심지어는 가장 활달하고 밝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야 할 청소년층에서도 만성적인 우울증이 빠른 속도로 증가되고 있다. 우울증은 마음이 계속적인 침울함과 슬픈 상태에 빠져 있는 상태를 말하는데, 그것이 미치는 영향은 정신 뿐만 아니라 신체에도 미친다. 만성적인 우울증에 빠지면, 저항력이 떨어지게 되며, 당뇨병, 비만과 같은 합병증으로 고통당하게 된다.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은 평범한 감기와 독감에 쉽게 걸리며, 병이나 사고로 인한 부상으로부터 회복되는데에도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애 가운데 단기간의 우울증에 걸렸던 경험이 적어도 한번 이상씩은 있다. 배우자의 죽음, 이혼 또는 가정이나 직장에서 받게 되는 지속적인 스트레스는 장기간의 우울증을 일으킬 수 있는 잠재적인 요소들이다. 우울증을 일으키는 요소들은 다양하지만,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 자신이 정신적으로 선택한 결과 때문에 발병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우울증으로 인하여 고생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 나의 남편은 좀처럼 의기 소침해지지 않는데, 그가 의기 소침해 질 경우에는 길어야 하루 밖에 되지 않는 단기간 내에 문제가 해결된다. 그의 성격은 매우 낙천적이다. 그와 반면에 나의 성격은 내성적이고 회의적이다. 나는 과거 여러 해동안 염려와 낙담과 투쟁하였는데, 그러한 생활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지난 몇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나를 점차적으로 당신을 깊이 신뢰하는 관계 속으로 인도해 주셨다.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그분께서는 어떻게 하면 부정적인 감정들을 극복 할 수 있는지를 내게 보여 주셨다. 나는 내가 경험한 이 성공적인 비결들을 독자들과 나누기를 원한다. 첫 번째, 사물을 보는 그대의 시각이 긍정적으로 변화 되어야 한다 버마에서 있었던 일을 통하여 이 문제를 생각해 보자. 하루종일 세찬 비가 내린 어느 저녁이었다. 어떤 두 사람이 밤하늘에 떠있는 무지개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버마의 원주민인 정부 관리는 그 희귀한 현상을 보면서 두려워 떨고 있었다. 그는 “내가 보기에는 이것이 하나의 나쁜 징조 인것 같습니다. 나는 결코 무지개가 밤에 뜨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선교사는, “제가 보기에, 이것은 매우 좋은 징조 입니다. 이것은 저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켜 줍니다. 나는 홍수와 폭풍우, 그리고 미신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우리의 성경 학교를 세우는 일이 잘 이루어 질 것을 확신합니다.” 이 두 사람의 대화에서, 우리는 두가지의 대조적인 시각을 볼 수 있다; 하나는 긍정적인 시각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인 시각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긍정적인 생각들을 선택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의 정신 속에서 떠오르는 모든 감정과 욕구는 이성과 양심의 지배 하에 있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어떤 부정적인 생각에 잠겨 있다면, 즉시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함으로써, 생각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어야 한다. 성경은 우리의 생각이 지배되어야 할 분명한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 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빌립보서 4:4,6-8. 어떤 일이 우리에게 닥치든지 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최선의 계획하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함으로써, 그분을 더욱 더 깊이 신뢰하고 기뻐해야 한다. 어떤 어려운 일에 관하여 걱정하는 대신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 가운데 쉬어야 하며, 진실하고 고상하며 정결하고 사랑스러우며 덕이 있고 칭찬할 만한 것들을 생각해야 한다. 진정한 마음의 평화는 오직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혹시 자신의 마음 속에 어떤 죄가 있는가를 명상하면서, 우울증의 내적 원인을 찾은 다음,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을 해결하라. 두 번째, 다른 사람들을 도우라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한 두번째 해결책은, 계속해서 바쁘게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돕고 용기를 주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과 친교를 도모하라. 단순히 봉사를 받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봉사를 하는 사람으로서 교회에 참석하라. 만일 그대의 생각이 자기 희생적인 봉사와 친교로 가득차 있다면 우울증으로 고심하는 기간은 줄어들 것이다. 선행은 그것을 베푸는 사람과 도움을 받은 사람 양쪽 모두에게 축복과 유익이 된다. 자신 앞에 주어진 작은 의무를 잘 수행하고, 자신의 적은 노력과 희생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었을 때, 정신과 마음은 풍요로운 만족감으로 인하여 자유롭고 행복해지며, 그렇게 변화된 마음에서 퍼져나오는 고상한 감화력은 주변 사람들에게 놀라운 생명력을 나누어 주게 된다. 근처에 있는 양로원을 방문해 보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얼마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될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세 번째, 매일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라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한 또 다른 해결책은 매일 운동을 하는 것이다. 운동을 많이 하되, 지칠 정도로 해야 할 필요는 없다. 운동을 통하여 심장 박동수와 호흡률이 높아져야 하지만, 운동을 하면서 이야기 할 수 있을 정도로 해야 한다. 자신이 여유있게 할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유형의 운동을 선택하라. 걷는 운동 또는 정원이나 채소밭을 가꾸는 것은 매우 좋은 운동이 된다. 가능하면 옥외에서 운동을 하는 것이 좋다. 적어도 매일 30분씩 운동하라. 운동은 특정한 홀몬을 증가 시켜주기 때문에, 우울증을 해소 하는데 도움을 준다. 운동할 때에 분비되는 홀몬은 사람에게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오른쪽 뇌에 영향을 미친다. 또한 운동은 혈액 순환을 증가 시키고, 뇌에 공급되는 산소의 양을 증가시킨다. 규칙적으로 매일 운동을 하면, 산소를 활용하는 뇌의 역량이 점차적으로 증가된다. 날마다 하는 규칙적인 운동은 근육 세포로 하여금 힘을 소모하도록 만드는데, 이것은 미토콘드리아 (mitochondria) 라고 불리우는 힘의 공급처를 증가하게 한다. 미토콘드리아는 산소를 소모하여 힘을 만들어 낸다. 산소를 많이 소모하면 할 수록 인체는 더 많은 힘과 더 건강한 정신을 소유할 수 있게 된다. 규칙적인 운동은 점차적으로 신체의 힘과 에너지를 증가시켜 준다. 네 번째, 자극제를 피하라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한 네번째 비결은 각종 자극제들을 피하는 것이다. 커피, 콜라를 포함하여 모든 종류의 카페인을 피하라. 카페인은 처음에는 인체를 흥분시키지만, 그것이 주는 최고의 흥분이 지나가면, 신체가 인위적으로 혹사 되었기 때문에 정상보다 낮은 슬럼프에 빠지는 반응을 나타내게 되는데, 이것이 우울증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담배에 함유되어 있는 니코틴 역시 카페인과 같은 영향을 몸에 미친다. 다섯 번째, 창조주와 가까이 교제하는 관계를 유지하라 . 죄책감, 걱정, 의심, 이러한 모든 것들은 우리의 마음을 쇠약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참된 평화와 행복과 생명의 근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의 사랑안에 거하면,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을 갖게 된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을 따른다고 공언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우울증과 절망으로 갈등하고 있는가? 왜냐하면 교회에 다니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모든 걱정과 염려를 맡기는 법을 배우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성경은 죄는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 시키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과 행동으로 하나님의 뜻 안에 거하지 않을 때, 우리는 무엇인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들을 빨리 시정해야 겠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러한 경우에,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영께서 주시는 암시들을 듣지 않은채 우리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고집한다면, 그 결과, 죄책감과 걱정과 염려가 우리의 마음을 채우게 되며, 평화와 기쁨과 행복은 사라지게 된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아무 것도 거리끼는 것이 없을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신다는 확신과 평화 속에서 살 수 있다. 그리스도인만이 가질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이야말로 우울증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도구이다. 우울증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천연 치료법 1. 세이지(sage), 캣닙, 알파파 차를 아침과 저녁으로 마시면 도움을 얻을 수 있다. 2.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하고, 간식을 하지 않는 식생활을 해야 한다. 모든 생활이 정해진 시간에 이루어져야 한다. 일찍 잠자리에 들되 9시간 이상 수면을 취하지 말 것. 3. 일광욕은 우울증 치료에 많은 유익을 준다. 밤에만 분비되는 멜라토닌이 과다하게 분비될 경우, 우울증이 유발될 수 있다. 햇빛은 멜라토닌의 분비를 억제해 준다. 4. 음식물로 인한 알러지 때문에 우울증에 빠지는 환자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알러지성 식품: 우유, 콜라, 쵸코렛, 커피, 차, 코코아, 설탕, 소세지, 캔디, 통조림, 계란, 등등). 정제된 식품(흰쌀, 흰밀가루, 흰설탕)을 식단에서 제거할 경우, 유익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5. 우울증을 일으키는 부작용을 가지고 있는 의약품이 약 300 종류를 넘는다. 약품을 정기적으로 장기간 복용할 경우, 우울증에 빠질 확률이 매우 높다. 6. 저혈당은 우울증을 초래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경우에는 규칙적인 운동과 하루에 2식을 채식으로 함으로써, 많은 효과를 볼 수 있다. 7. 체중을 짧은 기간 내에 지나치게 심하게 조절하는 사람들의 경우, 우울증으로 고통당할 수 있다. 8. 설탕의 섭취량을 최소한으로 제한할 것. 비타민 B는 정신 건강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데, 설탕의 대사작용 동안에 비타민 B가 소모되어 버린다. 4.바구니 안에 담겨진 천연 치료제 Emphasis in Your Health 퍼플 콘 꽃 또는 마리골드 꽃(Purple Cone, Calendula, Marigold) : 염증이나 상처의 치료에 좋은 효과를 나타내는데, 꽃들을 짓이겨서 폴티스(찜질용 반죽)를 만들어 환부에 붙인다. 백선(ringworm) : 퍼플 콘이나 마리골드 꽃의 줄기와 잎에서 나온 추출물은 3~4일 이내에 백선이라고 불리우는 피부병을 제거해 버릴 수 있다. 약초 추출물(extract)을 만드는 방법 추출물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약초를 알콜이나 식초에 담구어 두는데, 이 때 최고 3주를 넘지 않도록 한다. 매일 한번씩, 알콜이나 식초에 담구어진 재료를 조금씩 흔들어 준다. 추출된 용액인 액체를 깨끗한 병에 따로 분리시켜서 보관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에 사용한다. 무좀이나 발톱에 번식하는 곰팡이균(fungus nail) : 퍼플 콘(일명, 카렌듀라)과 몰약(myrrh)이 발톱에 기생하는 곰팡이류와 무좀에 가장 효과적인 치료를 가져오는 것으로 알려졌다. 어두운 색깔의 병에 퍼플콘과 몰약을 동등한 비율로 혼합하여 식초에 담그어 두면 약초로부터 유용한 성분이 추출되어 나온다. 하루에 2~4번씩, 칼로 곰팡이균이 번식하고 있는 발톱 부위를 얇게 긁어낸 다음에, 추출물을 골고루 발라 준다. 무좀인 경우에는 발을 깨끗하게 씻어서 말린 후, 약초의 추출물을 잘 발라 준다. -------------------------------------------------------------------------------- 겨자 두통과 부비동 충혈(sinus congestion) : 1갤론의 뜨거운 물에 1티스푼의 겨자가루를 풀어 넣은 다음, 그 물에 두 발을 20분 이상 담그는 발 목욕(hot foot bath)을 하는데, 이 때에 얼음 주머니나 찬물수건을 머리에 대줌으로써 머리의 온도를 낮추어 준다(발목욕을 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살아남는 이들 제16호 10페이지에서 자세히 다루었음). ------------------------------------------------------------------------------ 마늘 차 천식 : 천식의 증세가 나타나려고 할 때, 다음과 같은 두가지의 조치를 긴급하게 취하면 도움을 얻을 수 있다. 1. 엄지 손가락과 집게 손가락을 사용해서 작은 구멍을 만들어서 입에 댄 다음에, 입으로 힘껏 바람을 불어댄다. 이 때, 얼굴이 빨갛게 될 정도로 매우 힘껏 불어야 한다. 2. 한 컵의 끓는 물에 마늘 한조각을 반으로 잘라서 넣은 다음, 몇 초 동안 기다렸다가 얼음 조각을 넣어서 “마늘 차”의 온도를 미지근하게 낮추어 반잔만 마신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마실 때에 토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에 토하는 것은 오히려 작은 기관지들을 원활하게 열어주는 도움을 준다. 마늘 차의 맛이 너무 강해서 계속해서 토하게 되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으므로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맛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나머지 반잔의 “마늘 차”에 약간의 소금을 치고, 향기가 좋은 약초를 넣어서 만들어서 마셔도 된다. -------------------------------------------------------------------------------- 질경이(Plantain) 피부병 : 질경이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식물이다. 질경이를 폴티스(찜질용 반죽이나 팩)로 만들어서 사용하면 모든 종류의 피부병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통증, 그리고 독충이나 뱀에 물린 경우 : 일반적으로 질경이는 통증을 완화시키는 용도로 사용되는 치료제인데, 독충이나 뱀에게 물린 경우, 그리고 포이즌 아이비(옻)나 오우크와 같이 독성 식물에 오염되었을 때에도 사용할 수 있다. 위급한 경우에는 우선, 신선한 질경이 잎 1~2장을 따서 짓이기거나 입으로 씹어서 약간의 즙이 잎에서 나왔을 때, 그것을 환부에 직접 붙힌다. 얼마 동안의 시간이 지나면, 다시 신선한 잎을 따서 짓이겨 환부에 붙히는 과정을 반복한다.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질경이 잎을 블랜더로 간 다음, 그것을 찜질 팩으로 만들어서 사용해도 된다. -------------------------------------------------------------------------------- 감자 벌에 쏘인 경우, 눈 다래끼, 부스럼 : 감자를 얇게 자거나 갈아서 찜질용 팩(폴티스)을 만들어서 환부에 부치고, 하루에 2~3번 팩을 교체시켜 준다. -------------------------------------------------------------------------------- 빨간 고추(Red pepper, Cayenne) 대상 포진(shingles) : 피부의 환부에 생긴 물집이 마른 후에도 여전히 통증을 느끼게 된다. 대상 포진에는 빨간 고추의 추출물(extract)이 가장 효과적이다. 2~3 온스의 상처 소독용 알콜(rubbing alcohol)에 고추가루 2~3 티스푼을 넣어서 고추의 추출물을 만든다(앞에서 이미 소개한 추출물 만드는 방법을 참조할 것). 5~10일 동안 추출물을 환부에 발라주면, 어느 정도의 차도를 느끼기 시작하게 된다. 만일 추출물을 발랐을 경우, 환부에 과도한 통증을 느끼면, 바셀린이나 기름을 환부에 바른 다음에 추출물과 함께 잘 닦아 내면 된다. 빨간 고추의 추출물은 고열로 인하여 입술이나 코에 생긴 물집이나 관절염 때문에 느끼는 통증을 완화시키는데 매우 효과적이다. ------------------------------------------------------------------------------ 세이지(Sage, 약용이나 요리용으로 사용되는 식물) 위경련 : 위장의 경련을 멈추게 하는데 효과적이다. 끓인 물에 세이지를 넣고서 약용 성분을 우려낸 다음, 필요할 때마다 마신다. 방광염 : 끓인 물에 세이지를 넣고서 약용 성분을 우려낸 다음, 한 시간에 세번(한 컵씩) 마시면 된다. 증세를 느끼기 시작할 때마다 첫 20분 이내에 마시면 증세가 악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 참기름 발진(Rash) : 5cm x 5cm 크기의 거즈(gause)나 면조각을 참기름에 적신 다음, 둥굴게 말아서 발진 부위에 부치고 잠을 자면, 밤 시간 동안에 발진 부위가 건조하게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밀눈 기름(wheat germ oil)도 발진에 효과적이다. -------------------------------------------------------------------------------- 식초 발목이나 손목을 삐었을 경우 : 먼저, 발을 진한 소금물에 한 동안 담근 후에, 식초에 적신 타월을 환부에 갖다 댄다. 무좀 : 무좀을 예방하거나 치료하는 수단으로써, 식초를 사용할 수 있다. 아침과 저녁으로 뜨겁게 가열한 식초에 무좀 부위를 담금으로써, 좋은 효과를 볼 수 있다. ------------------------------------------------------------------------------- 심장병? 포도를 먹어야 할까요? 아스피린을 먹어야 할까요? 에가타 뜨레쉬 의사 1997년 4월 7일자, Associated press release 지에 의하면 당신의 혈액이 응고되는 것을 예방하는 역할을 하는 아스피린 보다 더 강력한 물질이 보라빛의 포도즙에 함유되어 있음이 발견되었다. 반응혈 효과(Anti-clotting effects)를 알아보기 위해서, 존 D. 폴츠 박사의 지도 아래 위스칸슨 의과 대학의 연구원들은 포도즙,오랜지 즙, 그레잎프룻 즙(자몽 즙), 그리고 아스피린을 비교 실험하였다. 백포도즙에도 여러가지 유익한 성분이 함유되어 있지만, 보라색 빛깔의 포도즙에 함유되어 있는 반응혈 물질이 백포도즙에 포함 되어 있는 물질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보라빛 포도즙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유익은, 심장벽과 동맥에 있는 지방 침착물에 붙어서 피의 공급을 막는 작은 응혈들을 예방할 수 있는 것이다. 여러가지의 다른 식물에서 발견되는 플레보노이드류가 갖고 있는 응혈 예방 능력을 실용화하기 위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지금까지 약 4,000 여종의 플레보노이드류가 식물에서 발견되었다. 17명의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실험하였는데 보라색 빛깔의 포도즙이 혈소판의 활동을 약 75% 저하시킨 반면, 아스피린이나 레드 와인은 약 45%로 밖에 감소시키지 못했다. 폴츠 박사는 자신이 발견한 연구 자료들을 1997년 4월에 캘리포니아에 있는 아나하임에서 있었던 미국 대학 심장학 협의회(the conference of the American College of Cardiology)에서 발표하였다. 자몽 즙과 오렌지 즙 양쪽 모두 플라보노이드류를 함유하고 있으나 보라색 포도 즙이 함유하고 있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포도즙은 혈액이 응고되지 않도록 보호해 준다. 폴츠 박사는 아스피린의 복용을 중단하고 포도즙을 마시도록 권하지 않았지만, 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자신있게 권하고 있다. 아침 식사 때에 5온스의 포도즙을 마시고, 신선한 채소를 풍성하게 섭취하고, 과일, 1 온스 정도의 너트류, 통밀 빵과 현미쌀, 곡류와 씨앗류를 포함한 철저한 채식 생활을 하라. 이러한 식생활과 함께, 옥외에서 매일 운동을 하고, 햇빛을 쬐이고, 실내의 공기를 신선하게 유통시키며, 충분한 수면을 취하고, 이따금씩 낮에 취하는 휴식이나 낮잠(그러나 식사 직후에는 피할 것)을 즐기는 생활은, 혈소판이 끈적끈적 거리게 되는 현상을 막아주며, 심장마비를 예방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계획 임에 틀림없다. 또한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모든 스트레스와 염려로부터 해방되는 영적 치료를 함께 진행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은혜를 받아드려야 한다. -------------------------------------------------------------------------------- 심장의 건강을 유지시키는 최선의 계획 1. 아침 식사 시에 5온스의 보라빛 포도즙을 마실 것 2. 철저한 채식 생활 3. 매일 옥외에서 운동을 할 것 4. 적당한 일광욕 5. 실내의 공기를 항상 신선하게 유지할 것 6. 적당한 수면 7. 필요할 때마다 취하는 휴식과 낮잠 8.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모든 염려와 근심으로부터의 해방 5.요즘 운동하십니까? Bernell E. Baldwin 의사 수많은 현대인들의 몸이 “닳아서 망가지기 보다는 녹이 슬어서 고장” 나고 있다. 생명의 유지를 위해서, 운동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필수 조건이다. 운동은 신체적인 면 뿐만 아니라, 영적인 면에도 깊은 영향을 미친다. 신체는 근육에 힘을 얻고, 뼈를 강건하게 하며, 혈액 순환을 원활하고, 정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운동을 필요로 한다. 운동은 질병을 예방하고, 질병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환자가 아프다고 해서 하루 종일 방안에 누워 있도록 하는 것은 가장 잘못된 치료 방법 중의 하나이다. 운동을 하면 몸을 많이 사용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몸이라는 기계가 고장날 수 있으므로,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이 최선의 회복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지나친 운동은 몸에 오히려 해를 가져올 수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몸을 너무 많이 움직여서 병들기 보다는 너무나 몸을 움직이지 않아서 녹슬어 가고 있다. 날마다 운동하는 습관은 날마다 음식을 섭취하고 물을 마시는 습관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건강 원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운동과 근육 일반적으로 몸무게의 약 40% 정도는 근육의 무게이다. 규칙적인 운동은 근육의 힘과 기능과 유연성, 그리고 인내력을 향상시켜 준다. 근육 세포 속에는 미토콘드리아라고 불리워지는 매우 놀라운 변환 장치가 있는데, 그 곳에서 식품의 에너지가 신체의 에너지로 변환된다. 운동은 미토콘드리아에 놀라운 기적을 생기게 한다. 규칙적이고 효과적인 운동은 미토콘드리아의 수와 질을 향상시키기 때문에,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은 책상에 앉아서 생활하는 사람보다 더 많은 에너지와 힘을 소유하게 된다. 단지 이틀 동안, 아무런 운동없이 침대에 누워 있기만 하여도 근육의 힘은 저하된다. 근육에 녹이 생기지 않도록 규칙적으로 운동하라! 운동과 순환 팔다리의 근육은 매 발걸음을 걸을 때마다 혈관을 조여 주는 펌프 작용을 함으로써, 매 발걸음마다 2온스의 혈액을 심장으로 올려 보내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와 같이 근육은 운동을 할 때마다 주변을 지나는 혈관들을 부드럽게 “마사지” 해 줌으로써, 혈액의 순환에 매우 유익한 도움을 준다. 혈액의 순환을 위해서 필요한 전체 일량 중에서 약 1/3 정도는, 운동을 할 때에 근육이 혈관을 펌푸질해 줌으로써 이루어 진다. 운동과 혈액 운동은 혈액의 순환을 증진시킬 뿐만 아니라, 혈액 자체의 질을 크게 향상시킨다. 인체의 순환기는 대도시의 도로망과 같다. 도로에 주요 간선 도로가 있고, 좁은 도로, 그리고 각 가정으로 연결된 골목길이 있는 것처럼, 인체의 혈액 순환기도 매우 정교하고 효과적인 도로망을 가지고 있다. 대체적으로, 혈액은 매우 빠른 속도로 인체 속에 설계된 정교한 도로망 사이를 순환한다. 큰 혈관에서는 혈액이 매우 빠른 속도로 움직이지만, 매우 복잡하고 미세한 혈관 속에서는 그 속도는 매우 낮아 진다. 혈액이 흐르는 속도가 낮아지면, 혈액이 생기를 잃고 끈적 끈적하게 되는데, 심한 경우에는 조그만 덩어리로 응혈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운동이나 육체 노동을 하면, 인체 내의 근육과 혈관이 그 활력을 되찾게 되며, 그 결과 혈액의 흐름이 거의 정체되어 있던 부분도 압력을 받아서 다시 활력을 찾아서 폐로 돌아가 새로운 활력소를 받은 다음, 순환을 계속하게 된다. 혈액 세포들은 간과 지라를 통과하면서, 혈액 속에 있던 독소들이 깨끗하게 정화된다. 운동을 하지 않는 생활을 살거나, 동물성 지방이 많은 음식물을 섭취하는 사람의 혈액은 끈적 끈적해져서 응혈되는 성향을 나타내게 된다. 채식으로 구성된 식이 요법과 함께 운동을 병행하면, 깨끗하고 활력있는 혈액을 소유할 수 있다. 적당한 운동은 혈액의 흐름을 활력있게 해주고, 끈적거리거나 응혈되는 현상을 막아준다. 운동과 심장 운동이 심장에 가져오는 유익은 너무나 놀랍다. 규칙적인 운동 습관을 통하여, 심장의 평균 박동수를 낮출 수 있는데, 운동으로 단련된 심장은 동일한 박동수 하에서도 매우 효과적인 펌푸작용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산소 공급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심장이 하루 동안에 하는 전체 일량이 감소되어서, 심장이 갖는 부담이 줄어 들게 된다. 단순히, 걷는 운동 습관을 통해서도 박동수를 1분에 5회 정도 줄일 수 있다. 운동으로 단련된 심장은 심장마비율이 현저하게 저하된다. 운동은 헤모글로빈의 숫자를 증가시키고, 혈관이 운반할 수 있는 산소량을 증가시켜 준다. 또한 혈관의 크기가 증가되어서, 전체 혈액의 흐름양이 증가되는 유익을 가져 온다. 운동과 신경 시스템 활발한 신체 운동은 두뇌의 회전을 매우 크게 향상 시켜 준다. 신체의 모든 기능을 지시하는 두뇌의 역량이 운동을 통하여 활성화 된다. 신체 운동은 의지력을 향상시키며, 인격이 균형지게 발전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운동은 두뇌와 신경세포들을 전기 에너지로 충전시켜서, 매우 예리한 정신력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 준다. 운동과 체중 조절 섭취한 음식의 칼로리보다 인체가 사용한 칼로리가 적을 경우, 지방의 형태로 체내에 저장된다. 그러므로 체중을 감량하기 위해서는, 운동을 통하여 체내에 축적된 지방을 소모해야 한다. 1파운드(약 450그램)의 지방을 체내에서 태워버리기 위해서는, 6시간의 조깅 또는 10시간의 속보 운동을 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가장 확실한 체중 조절법은 야채와 곡물로 된 채식 생활을 하면서, 날마다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는 것이다. 운동이 가져다 주는 기타 유익들 1. 운동은 소화를 촉진시키며, 내장의 활동을 증진시켜서, 개스의 발생과 변비를 예방한다. 2. 운동은 뼈로부터 칼슘과 인이 누실되는 것을 막아줌으로써, 골다공증을 예방할 수 있다. 3. 콜레스테롤을 낮추어 주고, 혈액 속에 있는 지방을 낮추어 준다. 4. 노화 속도를 늦추어 준다. 5. 깊고 치료를 가져오는 수면을 가져다 준다. 6. 지나치지 않는 적당한 운동은 간의 활기를 찾아 준다. 7. 스트레스 홀몬의 분비가 감소된다. 8. 관절염을 예방할 수 있다. 9. 유쾌한 정신이 샘솟게 되고, 우울한 마음이 사라지게 된다. 어떤 운동이 가장 좋은가? 뛰는 운동보다는 빠른 속도로 걷는 운동이 좋으며, 단순하게 걷는 운동보다는 밭에서 채소를 가꾸고 그 열매를 거두는 유용한 노동을 함으로써,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서, 천연계에서 활기차게 걷거나 노동을 하는 것이야말로 건강과 치료를 위한 최고의 운동법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운동을 통하여 그대의 행복을 새롭게 가꾸어 갈 수 있다. 운동은 그대의 근육에 힘을 줄 뿐만 아니라, 마음과 정신에 헤아릴 수 없는 축복을 가져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운동과 유용한 육체 노동을 함으로써, 건강을 유지하도록 창조하셨다. 건강은 비싼 보약이나 약장 속에 감추어져 있지 않다. 그것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인간의 세포와 신체 속에 새겨 놓으신 생명의 법칙에 순종하는 생활 습관을 가진 사람들 모두가 만끽할 수 있는 하나님의 축복이다. 6.노아 방주 이야기를 정말 믿습니까? 피터 재크 방주가)아라랏산에 머물렀으며, 물이 점점 감하여 ...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 창세기 8:4,5 터어키와 구 소련의 국경이 만나는 지역에 있는 아라랏산 정상 근처에는 몇몇 과학자들에 의해서 노아 방주의 잔해라고 확인된 잔해물들이 뭍혀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노아 방주를 찾으려고 탐험을 하였다. 과학자들, 빙하 학자들, 극지대 탐험 전문가들, 그리고 몇몇 교단의 종교 지도자들이 이러한 탐험에 참가하여 왔다. 그러나 반면에 그들의 이러한 탐험을 완전히 비웃는 사람들도 있다. 노아 방주의 탐험과 발견에 관한 이야기는 과연 진실이며,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아라랏산 꼭대기에서 배 모양의 물체가 발견 되었다는 보고는 과거 1856년에 있었는데, 3명의 과학자들이 그것을 보았다고 증언하였다. 그 후, 1883년, 1915년, 1936년, 1955년, 1960년, 1966년에도 방주를 목격하였다는 보고가 잇달았다. 노아 방주가 발견된 “아라랏” 산의 이름에는 “저주를 제거함”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는데, 이 이름은 노아 홍수가 주는 경고와 교훈을 후세의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붙혀졌다고 생각된다. 그 당시, 최초이자 사상 최대의 홍수를 경험하였던 노아의 가족들은 자신들의 후손들이 아라랏산의 이름을 말할 때마다 엄숙한 교훈을 되새기게 되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아라랏산의 터어키식 이름은 “아그리 다하”인데, 그 뜻은 “고통의 산”이다. 이 뜻 역시 홍수가 가져 온 재난에 대한 함축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라랏산 지역에 사는 아르미니아족과 쿠르드족 사이에서 오래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도 노아 방주가 아라랏산 기슭에 안착했다는 사실을 믿는데 도움을 준다. “아르미니아족의 ...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들의 조상은 노아의 손자요 야벳의 아들인 고멜이다.” Violet M. Comming, Noah?Ark, p. 47. 서기 300년경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아르미니아족과 7세기경에 모슬렘으로 개종한 매우 자존심이 강한 쿠르드족 모두 아라랏이나 노아 방주에 대한 고대 전설을 가지고 있다. 아라랏산에서 발견된 슈멜인의 쐐기문자 역시 홍수에 관한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노아 방주를 찾기 위해서 수백만불을 소비한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가장 성공적인 탐험은 프랑스의 폐허 전문 탐험가인 페르나드 나바라에 의해서 1952년~1955년 사이에 이루어졌는데, 그는 아라랏산을 세번 등반하여 실제로 배모양의 커다란 물체가 얼음에 박혀 있는 사실을 보았다고 보고하였다. 그의 세번째 등반 때에는 그 오래된 물체에서 얼마간의 재목을 떼어 가지고 돌아왔는데, 나바라는 아라랏산에서 얼음에 박혀 있는 배를 발견한 네번째 사람이다. 그가 가지고 돌아 온 재목은 단단한 재질을 가지고 있으며, 손연장으로 다듬은 흔적이 남아 있었고, 역청을 바른 것이었다. 그 재목을 탄소 연대 측정법으로 측정한 결과 그 재목의 역사는 약 5천년 정도되는 것으로 판명 되었는데, 이 모든 이야기들이 성경에 기록된 노아 방주의 이야기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지금은 아라랏산 지역의 국경 분쟁과 정치적 긴장 때문에 더 이상의 탐험은 불가능한 상태에 있다. 터어키 정부는 노아 방주를 탐사하는 어떤 탐험도 허락하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많은 증거들이 노아 방주의 존재를 외치고 있지만, 아직 결정적인 결론을 내리기에는 좀더 치밀한 탐험 조사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노아 방주는 과거에도 없었으며, 지금도 없다고 말하기에는 지금까지 나온 증거물들이 너무나 분명하다. 노아 방주 이야기가 현대인들에게도 중요한 이유 지금으로부터 약 5000년 전에 있었다는 세계적인 홍수가 20세기말에 사는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문제인가? 성경이 말하고 있는 노아 방주의 실재에 대한 믿음이 오늘날에 사는 우리에게도 중요한가? 사도 베드로는 마지막 시대에 공격을 받게 될 성경의 교훈들을 말하면서, 노아 홍수를 한 예로 들고 있다.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은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벧후 3:3~6 베드로는 말세에 공격을 받게 될 성경에 나오는 세가지 큰 사건을 말하면서, 창조와 홍수와 그리스도의 강림을 서로 연결시키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과거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은 성경이 말하는 미래에 관한 예언도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과거에 대한 믿음은 우리의 믿음을 미래에 대한 더 큰 믿음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과거로부터 세상 역사를 주관하여 오셨다는 믿음이 부족한 사람은, 곧 다가올 마지막 시대의 환란들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믿음도 가질 수 없다. 세계적으로 산재해 있는 노아 홍수의 엄청난 증거들 만일 노아 홍수가 세계적인 대홍수였다면, 아라랏산 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 강력한 증거들이 남아 있어야만 한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 홍수의 의미와 교훈이 그토록 중요할진대, 하나님께서 홍수에 관한 증거들을 말세까지 보존해 오시지 않았겠는가! 이제 세계적으로 존재해 있는 증거들을 하나씩 살펴 보기로 하자; 1. 바위가 말하는 증거들 “홍수 기록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실제적으로 바위들 속에 남겨진 증거들 때문에 전반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지구의 지하에 존재하는 화석과 퇴적암층은 유동하는 물에 의해서 퇴적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Henry M. Morris ph,D. 성경의 창세기는 노아 홍수가 하늘에서 퍼부어진 물에 의해서만 생긴 것이 아니라, 대대적인 지각 변동과 함께 지하수가 터져 나왔다는 사실도 지적하고 있다. “노아가 육백세가 되던 해 ...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창 7:11,12. 퇴적암은 지구의 모든 대륙에서 발견되는데, 이것은 노아 홍수가 세계적이었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퇴적암은 노아 방주가 안착된 아라랏산을 포함하여 거의 모든 산맥의 꼭대기에서 발견된다. “퇴적암의 매우 특이한 특징 중의 하나는 교차성 하상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교차성 하상은 물의 흐름이 급격하게 변하는 상태에서만 생성될 수 있다. 일정한 각도를 유지하면서 쌓인 퇴적암의 한 층 위에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진 각도를 이루면서 쌓이는 층을 가지고 있는 교차성 퇴적암은, 오직 노아 홍수와 같이 하늘과 땅에서 급격하게 쏟아지는 물의 흐름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오늘날에도 강이 범람하는 큰 홍수가 종종 있지만, 어떤 곳에도 교차성 하상이 형성되는 퇴적암층이 생기지는 않는다. 퇴적암 층 전체가 모두 동일한 각도를 이루고 있을 뿐이며, 한 층과 다음 층의 각도가 서로 어긋나는 교차성 하상의 형성은 어느 곳에서도 일어나지 않는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지층이 퇴적되었다는 설명이 과학적인 것처럼, 세계적인 홍수에 의하여 급격하게 형성되었다는 퇴적암층에 대한 설명 역시 과학적이다. 노아 홍수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퇴적암층들이 세계 도처에 너무나 많이 있다.” Genesis And Science, Harold W. Clark 2. 화석이 말하는 증거들 여러가지 종류의 화석을 동일한 원칙에 기초해서 설명하기는 곤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기적 퇴적물인 “표준 화석”은 지질학적 연대를 계산하는 기초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것이 진화론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동물이나 식물이 화석화 되는 과정에는 반드시 갑작스런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화석이 형성되는 과정에 산소가 존재해서는 안된다. 만약 산소가 존재한다면, 시체는 썩어버릴 것인데, 이러한 경우에는 화석 상태로 보존될 수 없다. 화석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동식물의 시체가 매장되는 조건이 맞아야 한다. 그러므로 세계 도처에서 화석이 발견된다는 사실은 과거에 세계적으로 급격한 변화와 매몰 사건이 있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방대한 양의 화석이 지구의 지하에 묻히게 되었을까? 오늘날 현대 과학자들은 물고기의 화석을 실험적으로 만들어 내기 위해서 시도하고 있다. 그들은 죽은 물고기를 철사로 만든 망에 넣어서 호수의 바닥에 떨어 뜨렸다. 일주일이 지나지 못해서 죽은 물고기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고기가 죽으면 그 몸은 수면에 뜨거나 바닥에 가라앉게 되며,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다른 물고기의 먹이가 되고 만다. 그러나 퇴적암의 화석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물고기 화석은 모든 뼈가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Velikovsky Earth In Upheaval, p. 222. 완전히 서로 다른 지역과 서로 다른 기후대에 살고 있던 동물들과 곤충의 화석이 한 곳에 묻혀 있는 대규모의 화석군의 발견은 세계적인 홍수가 과거에 있었다는 성경의 기록을 더욱 확실하게 뒷받침 해준다. 세계적으로 동시에 어떤 크고 격렬한 천연적인 이변을 통하여, 서로 상이한 생물들이 무더기로 한 곳에 파묻혀 졌어야만, 이러한 화석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 노아 홍수를 제외한 어떤 과학적 논리도 이러한 화석들의 생성 원인을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진화론자들은 엄청난 양의 생물의 시체들이 동시에 일정한 화석층에 떨어지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그러한 일들이 생기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한다. 오직 성경만이 엄청난 양의 화석군이 특정 지층에서 발견되는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다. 홍수로 인하여 남겨진 증거들은 진화론자들의 입을 철저하게 막아준다. 베드로는 말세에 창조와 노아 홍수에 대한 믿음이 심하게 흔들릴 것을 예언하였다.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은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벧후 3:3~6 얼음 속에 남아 있는 증거들 시베리아의 빙하지역에서 발견된 맘모스는 성경이 말하는 노아 홍수를 증명하는 또하나의 증거이다. 오늘날의 동물보다 2~3배가 큰 거대한 동물이 어떻게 갑작스런 죽음을 당하게 되었을까? 시베리아나 알라스카에서는 많은 동물들이 얼음 속에서 잘 보존된 상태로 발견되고 있다. 맘모스 외에도 코뿔소, 곰, 말 이외에 다른 포유류도 발견된다. 근육과 털이 원상태 그대로 잘 보존되었다. 어떤 것들은 심하게 상한 상태로 발견되지만, 발견된 맘모스 중에서 많은 것들은 그들의 입에 아직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을 물고 선채로 동결되었다. 맘모스와 같은 동물들이 얼음 속에서 발견되는 지역은 대부분 빙하지대이다. 그러나 시베리아와 같은 극한성 기후의 지역이 과거의 한 때에는 식물들과 동물들이 풍요롭게 자라는 아열대성 기후의 지역이었다는 사실이 시베리아의 얼음 속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생물들에서 입증된다. 야생 동물 학자인 아이반 티 샌더슨 씨는 빙하 속에서 발견한 동물들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어쨋든 가장 큰 수수께끼는 언제, 어떻게, 그리고 왜 이렇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물들이 죽임을 당해 이러한 모습으로 얼음에 파묻혀 동결되었는가이다.” Riddle of Fronzen Giants. 오직 성경의 창세기 만이 가장 큰 수수께끼에 대한 답을 제공할 수 있다. 홍수 이전에는 지구 전체가 따뜻한 기후를 가지고 있었는데, 홍수가 생기고 하늘에서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지면서 지구 전체의 기후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동물들이 따뜻한 아열대 기후에서 풀을 뜯고 있을 때, 갑작스런 재난과 함께 지구의 따뜻한 여름은 끝나고 다시는 풀리지 않는 겨울밤과 같은 한파가 갑자기 이르러 왔다는 증거가 빙하지대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J.K. Charlesworth The Quartenary Era Vol. 2, p. 650. 지구의 생물들을 갑작스럽게 덮친 재난이 매우 광범위하게 일어났으며, 그 재난과 함께 기후에 엄청난 변화가 생김으로써, 동물들이 풀들을 입에 물고 있는 형태로 얼음 속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시베리아와 알라스카의 얼음 속에서 발견되는 동물들의 잘 보존된 시체의 모습들은 성경의 창세기를 통해서만이 설명될 수 있는 장면들이다. 진화론으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문제를 성경은 매우 단순하고도 쉽게 설명하고 있다. 4. 석탄의 말하는 증거들 석탄은 오래 전에 거대한 삼림이 파묻혀서 압축된 결과로 생긴 생물의 무덤이다. 지하 깊은 곳에서 발견되는 엄청난 규모의 석탄광은 과거에 엄청난 규모의 삼림과 식물이 갑작스럽게 매몰 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갑작스런 격류에 휩쓸려 흙과 모래에 의해서 삼림과 함께 그 속에 있던 동물들이 파묻혀졌다. 석탄광을 조사해 보면, 나무들이 빽빽하게 매몰되어 있는 구조와 모습이 원상태 그대로 보존된 모습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석탄의 매장량에 대해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그 매장량이 세계적으로 매우 엄청난 양이 산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약 7조톤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 2배 이상이 될지도 모른다.” Energy Sources, p. 53. 석탄은 지구 전체의 지질층에서 발견된다. 석탄광은 여러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층 사이에는 다른 물질들이 끼여 있으며, 각 층의 두께는 수 인치에서 수 피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석탄층 사이에 끼여 있는 비석탄층은 식물들이 자랄 수 있는 성질의 토양이 아니다. “석탄층은 퇴적층인데, 석탄층 사이에 끼인 비석탄층들은 물에 의하여 생긴 퇴적층이다. 그러므로 구조적으로 보아서, 석탄층은 물에 의하여 운반된 것들이 퇴적되어 생성되었다는 결론에 달하게 된다. 석탄층의 놀라운 두께나 거대한 석탄광이 일정 지역에서 발견되는 이유는 소용돌이의 급류가 거대한 양의 유기물들을 운반하여 퇴적시켰음을 증거한다.” The Genesis Flood. 진화론자들은 석탄층을 과거에 묻힌 늪이나 토탄 늪에 의해서 형성된 것으로 설명하지만, 그렇게 큰 석탄층을 형성하기에 충분한 토탄 늪이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수백평방 마일의 넓이의 크기로 깔려 있는 석탄층의 장엄한 모습은 진화론의 허상을 단번에 드러낸다. 1피트의 석탄층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10피트 이상의 식물더미가 쌓여야 하는데, 세계 도처에 존재하는 엄청난 규모의 석탄층들을 볼 때, 노아 홍수 이외의 어떤 사건이나 현상도 그러한 석탄층들의 형성을 설명할 수 없다. 남극에서 발견되는 26피트(약 8미터) 두께의 석탄층은 한 때 그곳에 울창한 삼림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석탄이 가지고 있는 섬유질 구조는 노아 홍수 이전에 남극의 기후가 아열대성이었음을 말해준다. 석탄층은 일년 내내 얼음으로 덮혀 있는 그리인랜드에서도 발견되는데, 이것 역시 그 지역도 한 때는 수목이 울창한 삼림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세계적인 홍수와 함께 급격하게 변화된 기후는 극지방의 물을 빙결 시킴으로써, 홍수로 인하여 지구 표면 위에 범람하고 있는 물의 총 부피를 크게 수축시켰다. 그러므로 만일 극지방에 있는 얼음이 갑자기 녹는다면, 온 세계의 대륙과 섬들이 다시 물로 덮이게 될 것이라는 수학적 계산이 가능한 것이다. 성경은 노아 홍수 때에 쏟아진 물의 원천을 하늘과 땅 속으로 설명하고 있다.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 졌더라.” 창 7:10. 대륙의 이동, 공룡들의 멸종, 엄청난 양의 화석들은 모두 노아 홍수 때에 생긴 대재난과 지표면의 대변화를 입증하는 증거들이다. 성경의 기록 외에도 세계 도처에 있는 30여 민족의 고대 설화 속에서도 노아 홍수에 관한 이야기를 볼 수있다. 이집트, 멕시코, 북아메리카 인디언, 중국, 아프리카, 희랍, 인도, 그리고 바벨론 등과 같은 지역에는 지금까지 대홍수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마지막 시대의 복음 마지막 시대인 오늘날, 세상의 회의론자들과 진화론자들이 과학을 통하여 성경에 대한 의문을 일으키고 있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께서도 여러가지 증거물들과 발견들을 통하여 성경의 신뢰성을 높이 들어 올리고 계신다. 오늘날 발견되고 있는 노아 홍수에 대한 증거들은 진화론자들이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도전과 질문을 제시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존재와 성경의 기록을 실제적인 사실로 입증해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창조와 심판에 대한 기별을 함께 연결해서 보내시고 계신다. “또 보니 다른 천사가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들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14:6~7. 마지막 시대에 온 세상에 전할 영원한 복음 속에는 창조와 심판에 대한 기별이 포함되어 있다. 마지막 시대에 전파되어야 하는 복음은 온 세상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재 강림을 위해서 준비시킬 수 있는 복음이어야 한다. 어떻게 믿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을 올바로 경배하는 것이며, 마지막 심판을 위해서 자신과 가정을 준비시키는 것인가를 정확하게 알려 주는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고 그분께만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을 것이며, 그분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믿는 사람은 그분의 진리와 율법을 높이 존중하는 삶을 살게 된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다고 말하면서, 그분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는 신앙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그의 믿음은 헛된 감정과 잘못된 가르침 위에 기초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를 부인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애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지 못할 것이며, 자신이 우연히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덧없이 사라진다고 믿게 된다. 그러한 사람의 인생은 참된 행복과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을 수 없으며, 의미도 없기 때문에 살아있는 동안 세속적이고 탐욕적이며 정욕적인 생활을 살아가게 된다. 창조에 대한 믿음은 그리스도인 신앙의 기초이다. 하나님의 창조를 인정하는 사람만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게 된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의 권위를 어떤 사람의 말이나 세상 학문의 지식보다 높은 위치에 두는 사람은 자신의 생활과 습관과 말과 계획과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게 될 것이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물로서 세상을 멸하셨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이 세상이 불로서 다시 한번 멸망당하게 될 것이라는 성경 말씀도 믿게 될 것이다.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해서 간수하신 바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니” 벧후 3:6,7. 노아 홍수 사건은 마지막 시대에 사는 우리 모두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천년 전에 지구에 오셔서 인류를 위해서 생명을 버리셨던 예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실 날이 매우 가깝다. 과거에 노아 홍수을 위해서 준비하였던 사람들만이 구원을 받았던 것처럼, 마지막 때에도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해서 준비하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인자의 때는 노아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경고하시면서, “인자의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묻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을까? 그리스도의 재 강림을 위해서 자신의 마음과 생활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바친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나 적은 현실을 보면서, 깊은 염려와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홍수가 온다는 기별을 들었던 많은 사람들이 홍수를 위해서 준비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경고를 듣고 있는 마지막 시대의 사람들이 지구 역사의 마지막 대 사건을 위해서 준비하지 않고 있다! 7.예수께서 비유와 상징으로 말씀하신 이유 왜 예수께서는 비유를 사용하여 복음을 설명하셨을까? 왜 선지자와 사도들은 수많은 상징어들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예언을 기록하였을까?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비유와 상징적 표현들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좀더 쉽고 단도직입적으로 성경이 기록되었으면 좋았을텐데 라는 말을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 역시 우리와 동일한 생각을 하였던 것같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마태복음 13:10. 이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보이는 것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 복음은 하늘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것은 사람이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비유를 들어서 감추인 하늘의 사물을 설명하셨던 것이다. 2. 사람들의 마음에 질문을 일으키기 위해서 :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읽고 듣는 자들의 주의와 관심을 끌고자 하셨다. 예수께서는 각 사람의 마음에 들어 갈 통로를 찾고 계셨다. 먼저,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다음에, 그들의 마음 속에 비유의 참된 의미에 대한 의문을 일으키셨다. 청중 중에 진정으로 진리를 알고자 하는 자들만이 비유의 진정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 노력하도록 비유를 사용하셨다. 사람들은 비유로 설명하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후에, 비유로 사용한 실물들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회상하게 되었고, 좀더 밝은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성령께서는 마음 문을 열어 놓은 사람들에게 역사하여 주님의 교훈을 더욱 더 명확하게 새겨주셨다. 오묘하던 것이 분명하게 나타났고, 이해하기가 곤란하던 것이 명백하게 되었다. 3. 불필요한 방해를 피하기 위해서 :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 중에는 제사장, 랍비, 서기관, 관원, 세상을 사랑하는 자, 완악한 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항상 예수님으로부터 책잡을 조건을 찾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날마다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면서 그분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가운데 문제를 삼을 만한 것들을 찾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비유로서 그들의 외식과 악행을 책망하셨다. 비유의 말씀으로써 골수를 쪼개는듯한 진리를 싸셨으니, 이는 만약 있는 그대로 그들을 공박할 경우, 그들의 마음이 더욱 완악해져서 그리스도의 사업을 더욱 더 적극적으로 방해하였을 것이다. 4. 진리를 각각 다른 시대를 통하여 각각 다른 사람들에게 선별적으로 전할 수 있기 위해서 : 진리는 각기 다른 시대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이면서도, (성령의 감동하심에 대해서 마음을 여는 사람들에게만) 선별적으로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진리와 예언을 소개하시면서, 비유와 상징을 사용할 수 밖에 없으셨다. 예수께서는 1) 그 시대에 적합한 진리의 국면만 드러내시며, 2) 진리를 그 내용에 합당한 사람들에게만 드러내시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진리는 하나님께 마음을 온전히 바친 주의 종들의 마음에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써, 그 의미가 밝혀지고, 그들에 의해서 계속 전수된다. 5. 진리와 진리를 전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 예언의 경우, 그 의미가 어떤 개인이나 국가의 운명을 직접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기별이나 진리가 모든 시대에 걸쳐서 안전하게 전수될 수 있도록 특별한 보안 조치가 요구되었다.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이 상징과 표상을 사용하여 기록되지 않았다면, 오늘날까지 두 예언서가 보존될 수 없었을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진리를 깊이 연구하고, 진리대로 살기 위해서 온 생애를 바치는 사람들에게만 예언의 의미가 밝히 이해되어서,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위기와 환란을 위해서 준비할 수 있도록 섭리하셨다. 8.당신은 알곡입니까? 가라지입니까? Living the Life of the Lifegiver 에서 발췌 마태복음 13장에는 교회 안에 존재하는 두무리에 대한 비유의 말씀이 나온다. 한 무리는 알곡이고, 다른 한 무리는 가라지이다. 어떤 사람이 알곡이고 어떤 사람이 가라지일까? 먼저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와 그 비유를 직접 설명하시는 그리스도의 해석을 살펴보자. 비유 :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 “ 마태복음 13장 24~26절. 해석 : “좋은 씨를 뿌리는 자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마태복음 13장 37~40절. 알곡과 가라지의 차이 이 비유는 교회를 통하여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업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분께서는 사람을 구원하실 때 당신의 말씀인 진리를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하늘로 이끌고 계신다.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그것을 통해서 곡식을 여물게 하여 당신께서 바라시는 열매를 맺도록 역사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밭은 세상이요”라고 말씀하셨는데, “밭”의 진정한 의미는 세상에 있는 “교회”를 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리의 씨앗은 교회를 통해서 세상에 뿌려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밭에 좋은 씨만을 뿌리셨지만, 밭으로 표현된 교회 안에는 가라지도 함께 자라난다. 그리스도께서는 가라지가 나오는 씨를 절대로 뿌리지 않으신다. 가라지는 언제나 사단이 뿌린 씨에서만 나오게 된다.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알곡은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에 의해서 그 성품에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자들을 뜻하며, 가라지는 오류와 거짓 가르침에 의해서 성품이 변화함 받지 못하고 사단의 속성과 특성을 나타내는 자들을 말한다. 하나님의 진리를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받아들이는 자는 반드시 성품과 생애에 놀라운 변화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구원에 관한 성경의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거나, 사단이 교회 안에 뿌려 놓은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들였을 경우에는 그 성품에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오늘날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진정한 변화의 기쁨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를 두가지로 압축할 수 있는데, 첫째는 그들이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고 있지만,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기 때문이며, 둘째는 그들이 잘못된 가르침에 오도되어서 구원에 관한 진리를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옛날 이스라엘 시대에는 어떤 사람이 원수를 갚기 위한 방법으로서 상대방의 밭에 잡초의 씨를 뿌려 놓았다. 잡초씨를 뿌릴 때에는 아무 씨나 뿌리는 것이 아니라, 밭에 심어 놓은 곡식과 비슷한 모양으로 자라나는 잡초씨를 뿌려놓음으로써, 싹이 난 후 한동안 곡식과 잡초를 정확하게 구별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잡초는 곡식과 함께 어울려서 자라나서 밭의 주인에게 막대한 손해를 끼치게 된다. 이와 같이 사단도 그의 악한 씨를 천국의 아들들인 “좋은 곡식”이 자라는 밭에 뿌려 놓음으로써,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을 방해하고자 결정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사단은 자기가 몰래 뿌려 놓은 씨에서 나오는 가라지들을 지적하면서 그 원인과 책임을 그리스도께로 돌리고 있다. 가라지들도 매 주말마다 교회에 나오고 그리스도를 믿노라고 공언하기 때문에 겉으로는 알곡과 별다른 차이점을 볼 수 없지만, 가라지들은 세상을 사랑하고, 진리에 순종하기를 싫어하며, 이기적인 삶을 살아감으로써, 자신의 진짜 모습을 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내게 된다. 사단은 교회 안에 뿌려 놓은 수많은 가라지들을 통해서, 영혼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진리의 능력을 감추어 버리며, 그리스도 교회를 세속적으로 만들고, 목회 사업을 하나의 장사 수단으로 만듦으로써, 하나님의 교회와 진리를 세상에서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참된 종들은 교회 안에 참 신자들과 거짓 신자들이 함께 섞여 있는 모습을 보면서 깊은 탄식을 하게 된다. 아직 어린 곡식들이 주변의 가라지들 때문에 고통당하고 혼돈하는 모습을 보면서 깊은 슬픔을 느끼게 된다. 그들은 교회를 깨끗하고 정결하게 만들기 위해서 부흥과 개혁을 일으키려고 하지만, 교회 안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가라지들의 방해와 비웃음으로 인하여 저지받게 된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주인의 종들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라고 질문하자, 자비로운 주인은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고 대답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사람의 품성과 동기를 판단하는 일을 맡기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부족한 성정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이 일을 우리에게 맡기지 않으셨다. 우리의 생각에 거짓 그리스도인으로 보이는 자들을 교회에게 끊어버리려고 하다가는 반드시 실수하게 된다. 왜냐하면 알곡과 가라지는 그 겉모습이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가라지와 알곡은 세상 끝에 가서야 천사들에 의해서 정확하게 나누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참된 종들은 사람의 동기와 성품을 판단하는 대신에, 사단이 교회 안에 뿌려 놓은 거짓 가르침과 오류들을 뽑아버림으로써, “좋은 씨”에서 올라온 알곡들에게 올바른 영적 양분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진리로 저희를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이다” 라는 말씀을 잊지 말라(요17:17). 오직 진리만이 영혼을 변화시킬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진리와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만 당신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거룩하게 변화시키실 수 있다. 이와 반면에, 사단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시키고, 거짓 가르침을 퍼트림으로써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진리의 변화시키는 능력과 접촉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있다. 태초이래로 사단의 유일한 공격 목표는 언제나 하나님의 진리였다. 가라지의 최후의 운명 가라지는 그 잎이 푸른 동안에는 곡식과 아주 흡사하다. 그러나 밭의 곡식이 익어서 누렇게 되면, 곡식들은 열매가 충실하게 익어서 고개를 숙인 모습을 나타내지만, 가라지들은 아무런 쓸모없는 잡초의 모습을 통하여 자신의 정체를 분명하게 드러내게 된다. 지금은 경건의 모양을 그럴듯하게 흉내내는 가라지들이 참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섞여 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을 기만하고 속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끝인 추수 때가 되면, 선한 자와 악한 자 사이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그 때에는 교회 안에 있었지만, 그리스도와 진정으로 연합하지 않았던 자들이 밝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심판의 때에 주님께서는 알곡을 거두어 하늘 곡간에 거두어 들이실 것이며, 가라지는 한데 묶어서 불에 태우실 것이다. 알곡과 가라지가 지금은 거룩한 교회 안에 섞여 있는 상태로 자라나고 있지만, 종말에는 그것들을 분리할 수 있는 한 손이 모든 자들에게 각자의 정확한 위치를 정하여 줄 것이다. 진리의 빛을 가진 종들과 거짓된 가르침을 가르쳤던 목자들을 나누실 것이며, 백성들에게 경고의 기별을 전했던 충실한 종들과 백성들이 깊은 잠에 취하도록 경고의 나팔을 불지 않은 불성실한 파수꾼들을 정확하게 갈라내실 것이다. 또한 자신이 알고 있는 빛과 진리대로 순종의 생애를 산 양떼들과 하나님의 뜻과 진리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구차한 핑계를 대면서 그것을 거절한 이리떼들을 정확하게 구별하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천사들에 의해서 세상 끝에 단으로 묶여져서 불에 던져질 사람들의 정체를 이렇게 설명하셨다. “인자가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태복음 13:41,42. 그리스도께서는 풀부불에 던지우는 자들에 대해서 설명하시면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 이라고 그들의 정체를 밝히셨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공언하고 주말하다 교회에 다니는 종교인이었지만, 하나님의 율법과 일치하는 거룩한 품성과 생애를 살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때서야 비로서 자신들이 사단이 심어 놓은 거짓 가르침과 거짓 목자들에게 기만당했음을 깨닫고 풀무불 속에서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므로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법이 폐하여졌다고 말함으로써, “불법”을 조장하는 거짓 목자들을 조심하라! 가라지를 허용하시는 그리스도의 인내와 사랑 교회 안에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세상이 그리스도 교회를 가리키며 손가락질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신자들은 그런 거짓 형제들로 인하여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사도 시대의 초대 교회에도 거짓 형제들이 있었지 않은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이들도 열두 제자들과 함께 그리스도를 추종하여 다녔다. 요술장이 시몬과 같은 사람도 침례를 받고 자신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공언하였다. 바울을 버리고 진리에 등을 돌린 데마도 한 때는 충성스런 신자로 헤아림을 받았다. 심지어는 가롯 유다와 같은 사람은 사도 가운데 하나로 끼였다. 우리의 구세주께서는 한 영혼이라도 잃어버리기를 원치 않으신다. 예수께서 마지막 순간까지 인내하면서 가롯 유다를 붙드셨던 자애로운 모습은, 그분께서 패역하고 이기적인 인류에 대해서 얼마나 오래동안 참고 계신가를 보여준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참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거짓 형제들에 대해서 참으라고 부탁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교회 안에 거짓 그리스도인들(가라지)이 남아 있도록 허락하심으로써, 그들에게 당신의 진리와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끝까지 주고자 하신다. 그분의 그러한 모습을 통하여, 우리는 다시 한번 그분의 깊은 사랑과 자비를 보게 된다.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대신에, 스스로의 부족을 깊이 느끼면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라는 그리스도의 교훈을 배워야 한다.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오류와 죄에 빠진 형제들을 그리스도와 같은 정신으로 깊이 동정하고 사랑해야 하지만, 그들과 연합하여 오류와 죄에 참여해서는 않된다. 죄인을 사랑하는 것과 죄를 사랑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죄인을 끝까지 사랑하지만, 죄와 오류와 세속에 대해서는 끝까지 저항하면서, 하나님의 진리 위에 서있는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동일한 조건과 환경 속에서 성장해 가는 두 무리 하나님께서는 알곡과 마찬가지로 가라지에게도 같은 밭(교회)에서 같은 햇빛(성경 말씀)과 같은 비(성령)를 받으면서 자랄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신다. 그러나 추수할 시기가 되면,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않는 자를 분명히 분별” 하신다(말 3:18). 그리스도께서 친히, 누가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 살기에 합당한지를 결정하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각 사람을 그 성품과 생애에 따라서 심판하실 것이다. 단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공언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저울대 위에서 아무런 무게도 더하지 못할 것이다.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곧 성품이다. 교회라는 밭에 뿌려졌다고 해서 모든 것이 알곡은 아니다. 주말마다 교회에 나간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통하여 거룩하게 변화된 성품을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가라지가 알곡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세상 끝까지 두 무리가 함께 어울려서 자라나게 될 것이다. 동일한 조건과 환경 하에서 한 무리는 곡식으로 여물어서 추수 때를 기다리게 되며, 다른 한 무리는 가라지의 모습과 본성을 그대로 고집하면서 불에 태워지기 위해서 단으로 묶여지게 될 것이다. 그대는 혹시 “불법을 행하는 자”들 가운데 속하지 않았는가? 그대는 혹시 희생과 고난을 회피하기 위해서, 진리를 의도적으로 거절하거나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함으로써, 가라지가 되기를 고집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직도 그대를 위한 은혜의 시간이 마쳐지지 않은 지금, “좋은 씨”만을 뿌리시는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라. 그대를 완전히 변화시킬 수 있는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 그대의 마음을 낮추고, 그대 양심 속에 조용히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인도에 자신의 생애를 맡겨라. 9.당신은 열매를 맺는 무화과나무입니까? Living the Life of the Lifegiver 에서 발췌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그분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사람의 생명을 멸하려 함이 아니요 구원하려 함이라” 고 말씀하셨으며,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종종 그분의 은혜의 사명과 심판에 대한 경고를 연결시켜서 말씀하셨는데, 누가복음 13:6~9에 나오는 무화과 나무의 비유에서도, 당신의 사명을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과 연결시켜서 설명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에 대해서 경고하셨지만, 그들은 그 놀라운 사건에 대해서 너무나 무지하였으며, 무관심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업과 관련된 날씨와 하늘의 상태는 잘 식별하였지만, 주님의 임하심을 명백히 가르쳐 주는 때의 징조에 대해서는 전혀 분별하지 못하였다. 그 당시의 유대 사람들처럼,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자신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있기 때문에 심판받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성경에 기록된 심판에 관한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시켜서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제 무화과 나무의 비유는 심판에 관한 비유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과 우리의 구원을 취급하시는 그분의 방법에 대한 교훈이 포도원과 무화과 나무의 비유에 잘 표현되어 있다. 무화과 나무의 비유 :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 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 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누가복음 13:6~9 이 비유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말씀하고자 하는 바를 오해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이사야 5:7. 예수께서는 그 당시의 유대 백성들을 주의 포도원 안에 있는 무화과 나무로 비유하셨는데, 여기서 포도원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보호와 축복의 울타리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에 이미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당신의 목적과 기대를 표명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의 진리를 맡김으로써, 진리를 통하여 그들의 성품과 생애가 변화되어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진리가 온 세상에 전파되고 증거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기대와 소원을 저버렸다.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도다.” 이사야 5:1,2.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어 열매를 찾았으나 얻지 못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포도원 안에서 살면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대신에 오히려 “땅만 버리”게 만들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여 온 세상에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셨지만, 그들은 오히려 세상에 저주가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열매를 맺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의 종교는 마른 사막과 같았으며, 형식적인 경건의 모양만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전파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없었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는 장해물이 되었다. 그들의 종교는 영혼들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는 대신에 멸망으로 인도하였다. 비유의 말씀에서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포도원지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주인과 포도원지기에게 가장 기쁜 일은 포도원 나무에 열매가 풍성하게 열리는 것이다. 그러나 나무가 아무런 열매를 맺지 않자, 주인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를 찍어버리라고 포도원지기에게 명령했다. 주인의 명령을 들은 포도원지기의 대답을 주의 깊게 살펴보자.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그 역시 “찍어버리라”는 주인의 의견에 동의하였지만, 마지막으로 한번의 기회를 더 달라고 탄원했다. 과수원 안에 있는 나무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다시 한번 최선을 다하여 보살피겠다는 과수원지기의 말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실과 사랑을 엿보게 된다. 과수원지기는 그처럼 희망이 없어 보이는 나무일지라도 가꾸기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나무에 더욱 많은 손질을 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포도원 주인과 포도원 지기는 그 무화과 나무에 대해서 동일한 관심을 가졌다. 이와 같이 하늘 아버지와 아들은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에 대하여 동일한 사랑을 나타내셨다. 비유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 청중들에게 다시 한번 더 기회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들이 주인과 과수원지기의 수고에 부응하는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비유에서 과수원지기가 한해를 더 일한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채 이야기를 마치셨는데, 그 이유는 그 비유의 결론은 당시에 비유를 들고 있던 그 세대에 달렸기 때문이었다. 즉, 그들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라”는 최종 경고는 받았다. 다시 번복될 수 없는 마지막 경고를 받아들이거나 거절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들 자신에게 달려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그분의 제자들을 끝까지 핍박함으로써, 자신들에게 베풀어진 마지막 은혜의 시간을 스스로 종결시켰다. 하나님의 마지막 경고는 그들의 운명을 결정케하는 최종 기회인 동시에, 마지막까지 기회를 주시며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라”는 경고는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적용된다. 혹시, 그대들은 주의 포도원에서 땅만 못쓰게 만들고 있는 열매없는 나무가 아닌가? 그대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최후의 선고가 내려질 시간이 곧 이르러 올 것이다. 그대들은 지금까지 얼마 동안이나 하나님의 은혜의 포도원 안에서 살아왔는가? 지금, 주님께서는 당신의 수고와 노고에 부응하는 사랑과 충성의 열매가 그대 속에서 맺히기를 고대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포도원에 심어져서, 포도원지기의 세심한 보살핌을 받아 온 그대의 특권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아는가? 은혜의 복음이 몇번이나 그대의 마음을 감동시켰는가! 혹시 그대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가졌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일원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와 살아있는 관계가 결핍되어 있지는 않는가? 그리스도께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수가 그대의 영혼을 흠뻑 적셔주고 있는가? 그대들이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나누어 받고 있다는 유일하고도 강력한 증거인 “성령의 열매”가 그대의 성품과 생애 가운데 나타나고 있는가? 그대에게 “찍어버리라”는 최종 선언이 내려지기 전에, 하나님의 은혜 하에서 그대가 마땅히 맺어야 할 열매를 맺으라. 열매 맺지 않는 나무에게도 비와 햇빛과 과수원지기의 보살핌이 공평하게 나누어 진다. 열매 맺지 않는 나무도 과수원의 땅으로부터 충분한 양분을 공급받고 있다. 그러나 그 나무는 열매를 맺는 대신에 아무런 쓸모없는 잎들만 무성하게 생산해 내었다. 열매 맺지 않는 나무의 가지는 무성한 잎들로 땅을 어둡게 하기 때문에, 주변에 있는 나무들과 식물들이 성장하고 열매 맺는 일에 부담과 장애를 가져다 준다. 혹시, 그대는 하나님의 포도원에 장애와 부담을 주는 존재가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크신 자비로서 아직 그대를 찍어버리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그대를 냉정한 눈으로 보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그대를 무관심하게 대하시거나, 그대가 그대로 멸망당하도록 내버려두지도 않으신다. 긍휼이 많으신 구세주께서는 그대를 위하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겠다고 과수원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대언하여 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추가로 베풀어진 기간 동안에 얼마나 희생적인 사랑과 수고로 마지막 노력을 기울이셨는가? 그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는 말씀으로 그들을 변호해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복음은 먼저 예루살렘에서 전파되었다. 거기서 오순절 성령이 퍼부어졌고, 거기서 놀라운 성령의 권능이 펼쳐졌으며, 거기서 스데반이 “천사와 같은” 얼굴로 주님을 증거한 후에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사도행전 6:15). 하늘이 줄 수 있는 모든 기회가 그들에게 베풀어졌다. 그리스도께서는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고 말씀하신다(이사야 5:4). 그러므로 포도원지기인 주님께서는 오늘도 다음과 같은 수고를 그대를 위하여 더하시고 계신다. “나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상해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이사야 27:3. 그러나 다음과 같은 포도원지기의 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성령의 역사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완고하여져서 마침내는 성령의 감화에 대한 감수성이 사라지게 되는데, 바로 그러한 순간에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라는 최후 선고를 받게 된다. 오늘도 주께서는 그대를 부르신다. 최후의 순간까지 성실을 다하시는 포도원지기의 보살핌과 수고에 대한 보답으로써, 풍성한 열매를 그대의 품성과 생애에 맺어야 되지 않겠는가? 우리는 열매 맺는 나무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겉모양은 그럴듯한데 속은 텅 비어 있는 쭉정이가 되지 말아야 한다. 나의 영혼 속에서 알곡이 충실히 영글어 가고 있는지 살펴 보도록 하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꼴지워져 가고 있는지를 깊이 헤아려 보도록 하자. 10.당신은 예복을 입었습니까? Living the Life of the Lifegiver 에서 발췌 마태복음 22장 1~14절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놀라운 말씀을 비유를 사용하여 설교하셨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당신의 복음을 끝까지 거절함으로써, 그들에게 주어진 은혜의 시간이 마쳐질 것과, 복음이 모든 이방인들에게 전파될 것을 말씀하셨다. 이 비유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하면서 그들에게 주어진 은혜의 시간이 마쳐지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에 대한 은혜의 시간이 마쳐진 후 복음이 이방인들과 세상에 전파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초청하신 잔치에는 참석하였지만, 마땅히 입어야 할 예복을 입지 않은 이유 때문에 쫓겨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서, 예복의 의미와 그 중요성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 두개의 비유를 통해서, 임금은 세번에 걸쳐서 손님들을 잔치에 초청하는데, 그 때마다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임금의 초청을 거절하거나 무시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이 초림하셨던 시대부터 세상 끝에 있을 재림 때까지 세번에 걸쳐서 복음의 초청장을 인류에게 보내고 계신다. 세번째 초청을 마치신 다음에는 초청에 응하여 온 손님들이 예복을 제대로 입고 왔는지를 검사하는 심판의 장면이 나오면서 이 비유는 끝난다. 첫 번째 초청장은, 예수께서 3년 반 동안 지상에서 복음을 전하시던 기간 동안에 보내어졌고, 두 번째 초청장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후, A.D. 34년에 스데반이 그리스도 교회의 첫번째 순교자가 됨으로써, 이스라엘을 위한 은혜의 시간이 마쳐지고,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기 시작할 때까지 보내어졌으며, ** (이스라엘을 위한 은혜의 기간에 대한 예언은 살아남는 이들 제9호, 25페이지를 참조할 것) 세 번째 초청장은, 지금 보내어 지고 있는 초청장으로서, 스데반의 순교와 함께 이방인들을 향하여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 때부터 세상을 위한 은혜의 시간이 마쳐지는 순간까지 보내어 지는 초청장을 말한다. 이제, 세번에 걸쳐서 전파되는 하나님의 초청과 마지막 심판의 장면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첫 번째 초청 :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싫어 하거늘.” 마태복음 22:1~3. 혼인 잔치의 초대장을 보낸 발송인은 임금이었다. 그러므로 초청을 받은 사람은 당연히 그것을 큰 특권으로 여기면서 감사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왕의 초청에 무관심하였으며 가치없는 것으로 여겼다. 잔치에 참석하라는 첫번째 초청의 기별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제자들을 통해서 전달되었지만, 유대인들은 그 복음 잔치에 참석하기를 “싫어 하”였다(3절).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과 칠십인을 보내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임하였으므로 회개하라는 기별을 전하였지만, 그 초청은 그들의 관심을 이끌지 못하였고, 청함을 받았던 자들은 잔치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임금은 다시 종을 보내어 두번째 초청장을 보내게 되었다. 두 번째 초청 : “다시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찐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마태복음 22:4~7 임금이 두번째 초청장을 보낼 때에는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는 완벽한 준비를 갖추어 놓았다.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찐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4절. 임금이 두번째로 보낸 이 기별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무참하게 죽음으로써,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희생을 보여주신 후에 보낸 초청의 기별이었다.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구원을 위한 모든 준비가 갖추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과 그들의 종교지도자들은 끝내 거절하고 말았다. 오순절에 내려진 놀라운 성령의 권능이 기별을 전하는 종들에게 충만하게 함께 하였지만, 두번째 초청장도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백성들로부터 무시당하고 말았다.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5절 그들은 초청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초청장을 전하는 종들을 크게 핍박하였다.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6절. 수많은 종들이 옥에 갖히고 스데반과 야고보와 같은 주의 종들 중 몇 사람은 순교를 당하였다. 이리하여 유대민족은 하나님의 은혜의 초청장을 완전히 거절하였다. 그들이 복음의 초청장을 끝까지 거절한 결과로 어떠한 비극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비유 가운데 예언되어 있다.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7절. 복음의 초청을 거절한 유대인들에 대한 형벌은 예루살렘이 멸망당하면서 온 유대민족들이 세계 도처로 흩어지는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다. 예루살렘성의 멸망에 대한 예언은 다니엘 9:26~27에도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는 사건으로 묘사되어 있다. 서기 70년, 로마제국의 군대에 의해서, 성전은 불타서 잿더미가 되었으며, 110만명 이상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성 안에 포위된채 굶주리고 불타서 죽는 참혹한 최후를 맞이하였던 사실을 역사는 증언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당신의 진리와 복음을 끝까지 거절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한 보호의 손길을 거두어 들일 수 밖에 없다. 세 번째 초청 :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마태복음 22:8~10 두번에 걸쳐서 보낸 초청장이 특별하게 선택된 유대 백성들로부터 거절당하자, 임금은 마지막으로 이방인들을 향하여 세번째 복음의 초청장을 보낸다. 임금은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고 종들에게 명하였다(8절). 그리하여 임금의 종들은 온 세상으로 흩어져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왔다(10절). 세번째 초청장을 받고 찾아 온 사람들의 특징은 그들 속에 “악한 자와 선한 자”가 함께 섞여 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섞인 무리이다. 악한 자들은 이기적인 혜택을 얻기 위해서 왕이 초대하는 잔치에 참석하였다. 그들은 왕이 혼인 잔치를 베풀기 위해서 어떠한 희생과 수고를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으며,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주어질 보상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었다. 잔치를 찾아 온 악한 자들의 목적과 동기는 순결하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임금에 대한 감사와 사랑과 충성의 정신이 심각하게 결핍되어 있었다. 심판 :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 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으니라.” 마태복음 22:11~14 고대 시대에는 왕이 잔치를 위해서 사람들을 초청할 때, 그 자리에 참석할 때에 반드시 입고 와야 하는 예복을 함께 보내는 것이 통례였다. 이 비유에서도, 임금은 손님들에게 예복을 선물로 주었다. 손님들은 왕이 보내어준 예복을 입고 옴으로써, 왕이 자신을 초청해 준 것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표시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 중에 한 사람은 임금이 보내준 예복을 입는 대신에 자신이 원하는 옷을 입고서 참석하였다. 그는 잔치의 참석을 위해, 임금이 요구하는 준비를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 왕이 엄청난 값을 치루고 준비해둔 예복을 입는 일을 소훌히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친구야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 왔느냐?” 라는 임금의 질문에 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임금은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는 최종 선언을 내렸다. 임금이 잔치에 참석한 손님을 심사하는 일은 심판을 표상한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복음 잔치에 참석한 손님들은 하나님을 섬기노라고 공언하는 자들, 주말마다 교회에 나가서 예배드리는 자들을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모두 다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는 아니다. 영생이라는 최후의 보상을 나누어 주기 전에 먼저 누가 의인의 유업을 차지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를 결정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이미 결정된 심사 결과대로 상벌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속히 오리니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니.” 요한계시록 22:12.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각 사람에게 그의 행위를 따라서 상과 벌을 받게 된다. 예수를 따른다고 공언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성품과 생애와 행위를 심판받게 되며, 그 결과에 따라서 영원한 운명이 결정된다. 예복의 의미 이제, 이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인 “예복”에 대한 공부를 해보자. 우리는 마지막 심판에서 “예복”을 입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왜냐하면 잔치에 참석하였지만,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어둠 속으로 쫓겨나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복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예복은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순결한 품성을 표상한다. 요한계시록 19장에는, 하늘 왕의 아들인 그리스도께서 신부로 표상된 교회와 혼인 예식을 올리는 장면이 나온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그분께 영광을 돌리세. 이는 어린 양의 혼인식이 다가왔고 그 아내도 자신을 예비하였음이라. 이제 그에게 허락하사 정결하고 흰 세마포를 입게 하셨으니 이는 성도들의 의라.” 요한계시록 19:7,8 (킹제임스 영어 성경역). 이제 “예복”이 상징하는 바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마태복음 22장에는 그리스도인들이 혼인예식에 참석한 손님들로 비유되었지만, 요한계시록 19장에서는 순결한 교회를 상징하는 신부로 표현되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혼인식에 참석한 손님들이 입고 있는 “예복”은, 요한계시록 19장에 나오는 신부가 입고 있는 “흰 세마포”와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예복=흰세마포). 그렇다면 예복 곧 흰세마포는 무엇인가? “흰 세마포를 입게 하셨으니 이는 성도들의 의라” 요한계시록 19:8. 성경은 흰 세마포를 성도들의 의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시대에 세번째 초청을 받고 하늘 왕의 혼인잔치에 참석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복”을 입고 참석해야만 하는데, 그것은 바로 “성도들의 의”의 옷을 입고 참석해야 할 것을 뜻한다. (예복=흰세마포=성도들의 의) 성도들의 의(righteousness, 의로움)란 무엇인가? 순결한 흰세마포는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입혀 주셨던 옷이다. 그 옷을 입은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애정과 충성을 하나님께 바치는 생애를 살았다. 만일 그들이 계속해서 하나님께 신실한 삶을 살았다면, 그들이 입었던 의의 세마포는 언제까지나 그들을 둘러쌌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범죄하자, 그들과 하나님과의 연결은 끊어지게 되었고, 저희를 둘러쌌던 빛의 옷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무화과 잎사귀를 엮어서 몸을 가리움으로 하늘의 옷을 대신하려고 하였다. 바로 이것이 의의 옷을 입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수치를 가리우기 위해서 사용하는 수단이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입고 있지 않는 의의 옷을 스스로 만들어 내기 위해서, 선한 행위나 자선으로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가리우려고 한다.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자신들의 공로나 행위에 의존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자 애를 쓰고 있다. 그러나 어떤 것도 “성도들의 의”를 대신할 수 없다.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의 혼인잔치에 참석하여 천사들과 함께 참석할 사람은 무화과 나무의 잎이나 자신이 스스로 만든 옷을 입을 수 없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다고 말했던 것이다(이사야 64:6). 그리스도께서 친히 준비하여 주시는 예복만이 우리로 하여금 하늘 왕인 하나님 앞에 서기에 합당하게 만들어 준다. 그런데, 이 예복은 진실로 회개하고 참된 믿음을 가진 자에게만 입혀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역사의 마지막 교회로 표상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보내는 기별에서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권고하셨던 것이다(살아남는 이들 제14호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의 의를 세우려고 노력하는 대신에, 그리스도의 의를 옷입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체를 쓰신 상태에서 모든 율법에 일치하는 의로운 생애를 사셨다. 그분께서 이 땅에 사시면서 모든 계명을 지키는 순결한 삶과 죽음을 통하여 이룩해 놓으신 그리스도의 의를 나누어 받아야 한다. 오직 그것만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입는 성도들이 될 수 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의를 입는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자신을 그리스도께 온전히 바칠 때,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연합되고, 우리의 뜻은 그의 뜻에 굴복되며, 우리의 정신은 그의 정신과 하나가 되고, 우리의 생각은 그에게 사로 잡히게 되어 드디어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율법에 일치하는 삶을 살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는 말로서, 경건의 비밀을 설명하였던 것이다(빌립보서 2:5). 마음 속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자들만이 성품과 생애가 변화된 삶을 살므로서, 율법의 높은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게 된다. 의(righteousness, 의로움)란 무엇인가? 의에 대한 성경적 정의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의와 반대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죄이다. 그런데 죄는 무엇인가? 성경은 죄에 대한 가장 명백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요한일서 3:4. 죄가 법을 범하는 것이므로, 의는 법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고 말하였던 것이다(롬 6:18). 물론,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순종이란, 바리새인이 하는 것과 같은 외식적 순종이 아니라, 순결한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선한 성품은 하나님의 법과 진리에 순종하는 선한 행위로 나타날 것이고, 악한 성품은 율법을 범하고 진리를 거절하는 악한 행실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재강림하실 때에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줄 것이라는 말씀이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계22:12). 우리가 오직 예수의 이름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믿는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받아들임으로써 죄에서 해방되고, 그분의 마음을 우리의 마음 속에 품음으로써, 변화된 성품을 가지고 거룩한 생애를 살지 않는한, 구원과 영생은 보장될 수 없다. 사도 요한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고 말했다(요일 3:24).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순결한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된다. 그러나 사단은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 안에 다음과 같은 두가지 거짓 복음을 뿌려 놓았다; 1.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율법이 폐하여졌다” : 사단의 이러한 거짓말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는 그리스도의 선언에 의해서 그 모순이 드러난다(마 5:17).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목숨을 버리신 것은 사람이 율법을 범한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이었다. 만약 율법을 폐하거나 변경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구태어 십자가에서 죽으실 필요가 없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었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제자들에게 당신의 모본을 따르도록 명하셨다(요 15:10). 2. “인간은 결코 거룩한 율법을 지킬 수 없다” : 대개 이러한 사단의 주장은 참된 거듭남의 경험을 체험하지 못한 목사들과 교인들에 의해서 지지받고 있다. 사실상,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도무지 거룩한 율법을 지킬 수 없다. 그러나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 속에 받아들이는 참된 거듭남을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지게 된다.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을 받아들인다는 말 속에는 그리스도와 같은 생애를 살 수 있는 능력을 받아들인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복음 1:12. 여기에 나오는 권세는 우리 속에 있는 권세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세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권능을 통하여 마음이 새롭게 창조함 받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죄를 정복하는 생애를 살게 된다. 예복을 입은 사람들의 수 :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으니라” 마태복음 22:14. 우리는 이 비유의 마지막 절에서 가장 두렵고 슬픈 말씀을 대하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임금의 초청을 받아서 혼인잔치에 참석하였지만, 오직 적은 숫자의 사람들만이 잔치에 끝까지 남아 있도록 허락되었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손님들이 예복을 입지 않은채 잔치에 참석하였기 때문이다. 예복을 입지 않고 참석한 사람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무성히 자라나고 있는 가라지들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는 많은 사람들이 단지 인간적인 도덕가에 불과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성품과 생애를 세상에 올바르게 나타내지 못하며, 자신의 생애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듣기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 자들이다. 그들의 생애는 세상 사람들의 생애와 별다른 차이점을 나타내지 못한다. 세상이 그리스도 교회가 높이는 율법을 보고서 교회로 돌아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율법을 무시함으로써 세상으로 기울어 지고 있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의 공로를 힘입어 구원받기를 갈망하지만,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생애를 따라가려고는 하지 않는다. 영생의 면류관은 바라보지만, 좁은 길 위에 놓여져 있는 십자가는 싫어한다. 비유 가운데 임금이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 왔느냐?” 라는 물음에 그 사람이 “유구무언”이었던 것처럼, 마지막 큰 심판날에도 의의 옷을 입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런 핑계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이런 저런 핑계로 진리와 율법을 거절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지만, 그 날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현대 교회에게는 놀라운 빛이 주어져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구약 성경만이 주어졌지만, 우리들에게는 구약과 신약이라는 놀라운 빛이 주어져 있다. 영생을 위하여 준비할 수 있는 은혜의 시간은 두번 반복되지 않는다. 세상 끝이 마쳐지려는 이 때, 예복을 입고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라는 하나님의 마지막 초청이 우리 모두에게 들려지고 있다. 누가 그 부르심에 온 마음을 다하여 응할 것인가? 조심하라.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는 경고의 말씀을 유의하라. “보라, 내가 도둑같이 오리니,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요한계시록 16장 15절 11.교회 안에 있는 가라지들 예수께서는 천국이 가까이 임하였다고 가르치고 설교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분명하게 보여 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그러나 주께서 가르치고 싶으신 모든 것들을 인간의 언어로 묘사하고 설명해 주시기에는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거듭 거듭 비유를 통하여서 하늘과 구원에 대한 진리들을 가르치셨던 것이다. 예수께서 천국에 대하여 설명하시기 위하여 사용하신 비유 중에 가라지에 대한 비유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중대한 깨달음을 주고 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타나는 가라지의 비유는 하나님께서 당신이 교회 안에 있는 교인들을 앞으로 어떻게 심판하실 것인지에 대하여 명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하나님의 심판 한참 곡식이 밭에서 잘 자라서 추수할 때가 가까웠던 어느날 일꾼들이 밭에 함께 자라고 있는 많은 가라지들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놀란 태도로 주인에게 이렇게 물었다. “주인님! 우리가 좋은 씨만 심었는데 저런 가라지들이 도대체 어디에서 왔습니까?” 그때 주인은 원수가 몰래 와서 나쁜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고 설명하여 주었다. 그 종들이 잘 때에 원수가 몰래 와서 그들이 자는 사이에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때에 종들은 당장 밭에 들어가서 그 가라지들을 다 뽑아 버리자고 제안하였다. 현명한 주인은 그들을 만류하면서 잘못하면 알곡도 같이 뽑을 우려성이 있으니 추수 때까지 내버려 두라고 지시하였고, 가라지를 골라내는 일은 종들이 하는 일이 아니라 주인이 직접 추수꾼들을 시켜서 할 일이라는 사실을 설명하여 주고 있다. 가라지는 자랄 때에 그 뿌리가 땅 밑에서 알곡들과 함께 어울려 엉켜져 있기 때문에 잘못 가라지를 뽑으려고 하다가는 알곡까지 뽑혀 나올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뽑아서 불태우는 시기는 알곡을 추수하는 시기인 것이다. 곡식들이 다 익어서 추수하여 창고에 들일 수 있는 때가 되면, 알곡과 가라지를 다 함께 뽑아내어 추수 마당에 놓고 진짜 참 곡식들과 가라지를 갈라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가라지들을 밭에 그냥 놓아둠으로써, 알곡들의 양분을 빼앗아 먹도록 내어 버려두는 결과를 초래하지만, 진짜 알곡과 가라지를 갈라내어 심판하는 일은 마지막 추수 때인 세상 끝에 가서 하실 것이라는 사실이, 예수께서 가르치신 심판의 모습이었다. 인간들에게 누가 가라지며 누가 알곡인가를 판단하며 그 마음속의 동기들을 심판하도록 맡기신다면, 교회 안에 얼마나 어려운 일들이 많이 생기겠는가?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가라지는 밭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직접 골라내어 심판하실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그런데 한가지 우리가 이 비유에서 주목해야 할 흥미있는 교훈은 추수 때에 가라지를 먼저 골라내어 불태우기 위하여 단으로 묶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참고 견디는 의인들을 위하여 회개치 않은 죄인들의 본성을 먼저 드러내어 밝혀 주실 것이라는 힌트가 그 속에 들어 있다. 예수께서 밝히신 가라지의 정체 듣고 있던 무리들이 다 간 후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가라지의 비유의 뜻이 무엇이냐고 조용히 물었다. 그때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이 밭에 좋은 씨를 뿌린 주인으로 상징된 것이요, 밭은 세상이요, 참 하나님의 아들들과 마귀의 자녀들을 세상 끝인 마지막에 가서 천사들을 시켜서 나누게 할 것이라고 설명하여 주셨다. 그 천사들은 예수님의 명령을 받고 나아가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다시 말해서 가라지들을 골라내어 지옥 불에 태워 멸망시키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비유에서 예수께서는 가라지로 표상된 가짜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며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는 불법을 행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석해 주신 사실을 보게 된다. 교회 안에는 순수한 그리스도인들만 있어야 하는 것이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요 또한 원칙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와 거리가 먼 상태에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진리와 원칙들을 따라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성경의 원칙보다는 자기가 원하는 바대로 세속적으로 살아가면서 여전히 자기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공언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마귀는 이러한 자기의 부하들을 교회 안으로 많이 들여보내어 자기가 원하는 일들을 이루려고 비밀리에 역사하고 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올바로 보지 못하도록 막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시에 적국의 나라에서 몰래 스파이들을 파견하여 우리 내부로 침투시켜 안에서 교란 작전을 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려고 애쓰는 것처럼, 마귀는 자기의 편에 속한 자들을 교회 속으로 들여와 꽤 인정받는 자들로 만들어 놓은 후 내부에서부터 혼돈시키고 문제를 일으키며 뒤엎어 놓으려고 사력을 다하여 싸우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는 형식적인 사람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원하는 정욕대로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와 계명대로 순종하여 사는 것이라고 성경은 거듭 강조해 주고 있다. 알곡이 되는 비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잘못된 교인들을 보면서, 믿는 사람들도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나을 것이 없으며 심지어는 더 악하다고 고소하고 있는 현실을 보게 된다. 그러나 가라지의 비유는 예수께서는 이러한 일에 책임이 없으시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은 마귀의 역사이다.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Lolium-룰리움”이라고 불리는 밀과 아주 흡사하게 생긴 가라지가 있는데, 예수께서는 바로 이것을 가지고 비유를 들어 설명을 하신 것이었다. 룰리움은 밀과 너무나 비슷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 차이를 발견하기가 어렵고, 곡식들이 영글어 알곡이 되어 추수하게 될 때에 가서야 알맹이가 없는 쭉정이의 본성을 드러낸다. 가라지는 자기가 그러하지 않으면서 그러한 척하는 외식주의 자들을 가리킨다. 이 가라지의 비유는 형식적으로만 믿는 외식주의자들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겉으로 볼 때 그리스도인처럼 보인다. 또한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순수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 아니다. 진리를 머리로만 믿지 마음으로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가라지들은 심지어 교회 안에서 존경을 받는 사람들로 군림할 수도 있다. 그들의 외향과 행동이 알곡과 많이 닮았고 좋아 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착하고 예모있는 좋은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가라지는 알곡과 너무나 비슷하다. 그러나 그 속에 정작 있어야 할 알맹이가 없다. 곡식이 존재하는 이유는 다른 이들에게 먹을 양식을 열매맺어주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낱알 속에 있어야 할 밀이나 쌀이 없고 텅 비어 있다면 그 가라지는 남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창조해 주신 목적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을 위하여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가라지의 생애이다. 그런데 왜, 자기가 그러하지 않으면서도 그러한 척 하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자기가 모든 생활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좋고 멋있게 보이기 위하여 산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하여 산다. 그들은 이기를 얻고 칭찬을 얻기 위하여 과장을 한다. 없어도 있는 것처럼 꾸미며, 몰라도 더 아는 척하고, 더 많은 학위들로 치장을 하며, 허세를 부려서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받아 내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은 몹시 불안하다. 왜 그럴까? 가라지는 알맹이가 없기 때문이다. 정작 지니고 있어야 할 알맹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이다. 거듭남으로 시작되는 마음속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이다. 죄를 버리고 변화된 아름다운 모습이다. 이것으 사람이 인공적으로 만들어 낼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열매는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여 매일 비를 먹고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토양의 양분들을 빨아 먹어야 가능한 것이다. 고아들이 부모님의 사랑과 용납함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한 것처럼 가라지들은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가 없기 때문에 생기는 불안함을 인간적인 것들로 가리우려고 무진히 애를 쓰게 된다. 그러한 자들에게는 참된 평화가 없는 것이다. 알곡이 되려먼 처음부터 좋은 씨로 태어나야 한다. 그것은 창조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마음이 새롭게 되어 거듭나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 밀은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는다. 남에게 양식이 되는 빵을 만들어 주는 밀가루가 되기 위하여 산다. 그의 삶은 희생적이다. 그의 삶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사는 것이다. 자기의 착한 행실과 아름다운 품성을 보면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사는 것이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5:16)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가 주는 교훈 사도행전 5장을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가 나온다. 성령에 충만했던 초대교회 교인들은 자기들의 소유와 땅들을 다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놓았다. 그들은 집에서 쫓겨났고 유대인 외당에서 출교를 당하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과 같이 어렵게 된 형제자매들과 외로운 고아들과 과부들을 돕기 위하여 놀라운 사랑의 희생과 헌신을 복음사업에 바쳤다. 그들은 자기들의 것을 자기들의 것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유무상통하였다. 그때 다소간 감동을 받았었지만 이기적인 마음을 그대로 품고 있었던 아나니아와 삽미라도 자기들의 소유와 땅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놓았다. 그러나 그 두 부부는 재물을 판 돈의 반은 몰래 감추어 놓고 절반만 가져왔던 것이다.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것이 전부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그 때 그 부부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었다. 어떤 의미에서 참으로 이상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자기들의 전 재산의 반이나 교회에 바쳐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려 하였다. 그 당시 유대나라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자기들만을 위하여 살고 있을 때, 그들은 적어도 대다수의 사람들로부터 핍박받는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며, 또한 남들을 위하여 재산의 반을 바친 좋은 사람들이었지 않는가?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있었다. 그들은 남들처럼 전 재산을 바친 훌륭한 사람들이라는 칭찬과 평판을 누리고 싶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전 재산을 바치라고 강요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들의 자원하는 결정이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기들이 그렇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인정을 받기를 바랬다. 그리고 그런 척하며 겉으로 나타내어 성령을 속이는 거짓말을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부분적으로 바치면서 다 바쳤다는 인정과 칭찬과 존경을 받기를 원하였다. 그것이 바로 가라지의 성격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막 태동하는 기독교회에 큰 교훈과 경고를 주실 필요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순결하게 유지하시기 위하여 그 두 부부를 심판하셨고 그 사실은 온 교회 교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하심으로 신자들에게 두려움을 갖도록 섭리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한다. 속과 겉이 같은, 변화된 자들이 되어야 한다. 가라지의 특성은 예수님의 품성이 그 속에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맺어야 하는 열매인 예수의 모습이 그 속에 없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제 곧 재 강림하실 것이다. 그 전에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알곡과 가라지를 갈라내시는 일을 행사하실 것이다. 이 세상에 위기와 환난이 닥치면 가라지들은 진리와 함께 서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삶으로 당하게 될 시련들과 핍박들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참된 신자들과 가라지들은 자연스럽게 분리될 것이다. 그 일은 하나님께서 직접 행하실 것이다. 기도하자!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도록 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이토록 오래 참고 계시지 않는가! 오늘도 예수께서 우리 마음속에서 사시도록 하자! 그래서 알곡이 될 수 있도록! 12.포기하지 마시오! 일이 힘들 때, 가는 길이 오르막이라 억장이 막혀서 한숨 짓는 고비 길에서 쉬어 가려면 쉬어 가시오. 그러나 포기하지는 마시오! 염려로 짓눌리고 실수들이 영혼을 압도할 때, 후회와 패배로 지쳐 쓰러질 것 같은 후미 길에서 쉬어 가려면 쉬어 가시오. 그러나 포기하지는 마시오! 의심이 구름들이 몰려와 의혹의 그림자들을 던질 때, 목적지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일을지 모르니, 쉬어 가려면 쉬어 가시오. 그러나 포기하지는 마시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는 사람들, 인생의 불행이 하나님께는 기회이니 쉬어 가려면 쉬어 가시오. 그러나 포기하지는 마시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것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립보서 1:6) ………………………………………………………………………………… 하나님의 진리가 그대에게 너무나 많은 것들을 요구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진리는 베드로에게 그물을 버리라고 요구했으며, 삭개오에게는 빼앗은 것들을 여러 배로 돌려주라고 요구했어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값비싸다고 불평하지 마세요. 그대가 하나님의 은혜 속에 스며들어 있는 그리스도의 피를 볼 수 있다면 진리를 위해서 그대가 지불해야 하는 대가가 결코 비싸다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