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5-2편] 생각은 깨어서 꾸는 꿈이다(1:18:21)
(0:25)
< 다른 사람에게서 무엇인가를 원하는 에고는
그것이 물질적인 획득이든, 권력감이든 우월감이든,
자신은 특별하다는 의식이든, 혹은 육체적 심리적 만족감이든
그 욕구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대개 몇 가지 역할을 연기한다.
대체로 사람들은 자신의 역할을 연기한다는 것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들 자신이 그 역할 자체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
그러니까 사람들이 자기 페르소나, 자기의 역할을,
역할을 하려고 하는 자기를 알아채는 것이 어렵다.
왜냐, 이미 동화되어 가지고, 이미 동일시 되어 가지고.
그래서 부처님은 인간 존재의 핵심을 '갈애'(渴愛)라고,
갈애, 사랑을 사랑을 갈구하는 것, 갈애,
갈애라고 파악했어요.
그러니까 모든 고통은 갈애에서 나온다. 갈애(渴愛)에서 나온다.
그리고 갈애는 어디서 나오는가? 무명(無明)에서 나온다.
그러니까 다시 한 번 복습하면 여러분, 무명이라는 말을,
불교 무명을 톨레 용어로 쓰면 '무의식'(無意識)이에요.
'무명'이란 말은 의식하지 못하는 것.
무엇을 의식하지 못하느냐?
자기가 에고의 역할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는 게 무명이다, 이거예요.
그러면 에고는 항상 갈애, 사랑을 갈구한다.
여러분, 참 인간은 비참한 존재에요.
인간의 가장 핵심적인 감정은 갈애에요. 갈애.
(3:29)
<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접촉하는 상황이나 사람들에 따라
열등감과 우월감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당신이 알아야 하고 당신 안에서 관찰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것이다.
누군가에게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느낄 때마다 그것은
당신 안의 에고이다. >
여러분, 대부분 다 마찬가지겠지만 저는 우월감과 열등감을
많이 느끼고 살았어요. 예, 그러니까 그런 거 있잖아요.
남이 잘 되면 좀 배 아픈 거, 그게 친한 사이일수록 더 그래요.
친한 사람이 뭔가가 잘 되면 겉으로는 막 축하해 주고 난리가 나지만
속으로는 또 이렇게 또 그런 감정이 또 있는 거에요.
그것이 언제 나오느냐, 다음에 그 친구가 삐끗할 때
다른 사람하고 이야기할 때 이제 그 친구에 대해서 나오더라고요.
그러니까 제가 다른 장소에서 이런 말씀 드렸는데
여러분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정말 남 얘기 안 하는 사람이 있어요.
(참 정말 그런 거는) 그런데 인과이기 때문에 인생은 인과라서
그분은 복이 많아요. 왜 복이 많은가 하고 생각해 보니까
남 이야기를 안 하기 때문에 그게 복이 되는 거에요.
그런 사람들은 믿음직하지요. 그렇지요? 예.
그러니까 근데 또 문제는 그분이 복이 많으니까 그분을 또 질투하는
사람이 또 많아. 그럴 수 있겠지요?
그런데 그 질투가 그냥 질투면 상관이 없는데 만약에 어떤 법이라고
하는 것이 진리를 깨닫고 이런 문제 있잖아요.
그런 문제에 대해서 잘못 비방을 하면 그 사람이 다치더라고요.
저는 그것도 봤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우월감과 열등감은 모든 사람한테
기본적으로 여기에는 흔들리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자기가 그런 줄을 모른다는 사실, 저도 돌아보면
저 안에서 우월감과 열등감이 났을 때 이것이 잠복되어 있다가 찬스를 만나면
막 상대방을 처음에는 칭찬했다가 또 깎아내리기도 하고 그러니까
이런 식의 남에 대해서 험담하는 거 있잖아요.
그것이 기본 기조에 깔고 깔려 있었는데 그걸 내가 모른 체 살아온 시절이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굉장히 민감해요. 민감해서 가급적이면 안하려고 해요.
그리고 안할 때부터 제가 좋아지더라고요.
아마 제가 지금 인생의 변곡점 같은 걸 느끼거든요.
그러니까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아침에 집에서 나오면 뭔가가 이렇게 누가
길을 쓸어놓은 느낌, 집에서 나올 때, 그 느낌이 좀 누군가가 길을 쓸어 놓은 대로
나는 가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 언젠가부터 생겼는데 지금 돌아보면 이걸
자각한 거 제가, 제가 제 안에 우월감과 열등감을 자각하면서
아, 내가 이렇게 이 감정 때문에 놀아나고 있구나 하는 걸 느끼고
이제 안 따라가기 시작했을 때부터 인생이 피기 시작한다고 느꼈거든요.
(8:21)
< 자신이 자기가 자기를 모른다는 사실을 완전하게 받아들이면,
나의 진짜 나는 내가 지금 모르고 있다 하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실제로 당신은 평화롭고 투명한 상태로 들어가서 생각으로는
결코 달성할 수 없었던 자신이 진정으로 누구인지에 더 가까워진다. >
그러니까 에고는 생각으로 자기를 규정해요.
그런데 이런 근본 질문, '너가 누구냐?' '너의 본질이 무엇인가?'
이런 근본 질문을 받으면 모르겠거든요.
그 모르겠다는 것이 깨달음의 지름길이라는 거예요.
에고는 알아요. 내가 이러 이러한 사람이다. 나는 남자다. 뭐 어떻다,
어떻다, 하고 자기 규정을 하는 것은 에고의 속성이고.
근데 너의 본질이 무엇인가. 그것은 너의 현상이고,
너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는 에고가 꽉 막혀요.
에고가 막혀서 입을 닫을 때 그때가 우리의 본질이
깨어나는 찬스가 거기서 열린다.
그래서 지금 자기가 진정으로 누구인지에 에고가 입을 닫을 때
에고가 모르겠다고 할 때가 자기 자신에 가까워지는 순간이다.
< 생각을 통해 자신을 규정하는 것은 자신을 한계에 가두는 일이다. >
따라서 여러분 이런 대목에서는 보조국사가 가르치는 수심결에
가장 중요한 대목, 단지불회(但知不會) 시즉견성(是卽見性),
시즉견성, '단지'(但知) 다만 안다면, 무엇을? '불회'(不會),
회는 회자는 만날 회자 있잖아요. 만날 회, 불회, 만나서 안다는 뜻이에요, 그 회자가.
만나서 알다, 이 말은 뭐예요? 대상으로, 대상으로 삼아서 아는가.
자기 본질은 대상으로 삼아서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다만 안다면 시즉견성,
이것이 바로 견성이라는 거에요.
이게 보조국사의 수심결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에요.
이 말은 무슨 말이냐면, 자기 의식은 모든 것을 아는 주체에요.
모든 것을 아는 주체인 자기 의식을 대상으로 삼아서 알 수는 없다는 거예요.
저는 이런 말이 왜 중요하냐?
대상으로 삼아서 알려고 하는 것이 에고에요.
지금 우리가 여러분, 본질을 깨닫는 것도 중요하지만
에고를 깨닫는 것도 중요하다고 지금 얘기하잖아요, 그죠?
이게 톨레의 참 좋은 점이에요. 에고를 깨닫는 것이
지름길이, 내가 본질을 알려고 하는 것이 에고다, 이거예요.
그러면 에고에 먹이를 준다. 이 말은 계속 본질을 대상으로 삼아서
알려고 하는 이것을 계속 추구하면 추구하는 동안에는 에고는 잘 살아남아요.
추구하는 것이 에고니까.
근데 이런 말을 듣고 본질을 대상으로 삼아서 알 수가 없다는
이런 말을 듣고 딱 돌이키면, 알 수 없다.
이걸 딱 돌이키면 에고가 힘이 쫙 빠져 버려요.
에고는 항상 대상으로 삼아서 알려고 해요.
그리고 에고는 언제든지 이상을 추구해요, 여러분.
에고는 이상으로서 우리를 속여요.
'이상을 추구해야 해.' 이것이 에고의 메시지예요.
제일 중요한 거예요. 에고가 무엇으로서 살아났는가?
항상 우리 귀에다 대고 이상을 추구해야 해.
요게 에고가 우리를 속이는 가장 기본 메커니즘이에요.
그러면 속으면 어떻게 되는가?
현실을 버리고 이상을 찾아요.
근데 우리 지금 수행자한테는 이상이 뭐에요?
자기 본질을 깨닫는 게 이상이예요.
그러니까 수행자는 자기도 모르게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
이상이 되어서 그걸 하고 있다.
요것을 알아차리는 게 여기에 에고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게 핵심이다.
제가 여러분 오래 전에 참선 처음 시작할 때 저보다 먼저 한 사람이
저한테 충고를 하더라고요.
참선하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에고가 강해진대요
왜 강해지는가? 이게 최고다고 하는 게 있대요.
그러니까 최상승이다, 이것이 경절문이다, 지름길이다,
또 이게 다다, 인간으로 태어나면 이게 다다,
하는 그걸 프라이드 삼아 가지고 그 뒤에 에고가 숨는다는 거예요.
수행자의 그 에고는 내가 지금 하는 수행이 최고라고 하는
그 또 프라이드가 생기는데 그거 조심하라, 그러더라고요. 그 선배가.
그때는 그 말, 좀 처음 할 때는 잘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아니 이게 최고지.
여러분 지금 우리가 혹시라도 참선이 최고라든지, 또 명상은 열등하다든지
또 뭐 염불은 좀 또 열등하다든지 이런 식의 말을 하고 있으면 에고예요.
수행자의 에고에요. 특히 참선하는 사람의 에고는 강해요.
여러분 한 번 여러분 주변에서 참선한다고 하는 사람들 한 번 대화를 해보면
되게 에고들이 강해요. 아휴, 저부터 그러네.
그러니까 요거 굉장히 조심해야 되는 부분들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단지불회(但知不會) 시즉견성(是卽見性),
다만 대상으로 삼아서 이 본질을 알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쉬어진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견성의 가장 지름길이다. 견성의 핵심 길목이다.
견성뿐만이 아니고 여러분, 견성뿐만 아니고 제 느낌에는 제 인생에
제가 살아보니까 제 인생의 물살의 흐름이 바뀔 때가 있었어요.
제 인생에서 이 물살이 바뀔 때가 있었다. 언제 바뀌었느냐?
제가 저도 모르게 이 현실은 불만족이고 이대로 있으면 안 되고
어떤 이상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하고 평생을 살다가
아, 그게 에고구나. 그게 내가 에고에 속아서 그렇게 살아왔구나,
하는 것을 알았을 때 제 인생의 흐름이 바뀌었어요.
제가 여러 갈래로 하이데거 철학의 핵심은 현존의 형이상학입니다.
현존이 형의상학이라는 것은 형이하학은 현실이거든요.
현실은 열등하고 형이상학, 이상이 정말 진정한 가치이기 때문에
항상 형이하학 현실에 안주하면 안되고 항상 인간은 뜻을 세워서,
형이상학 이상의 뜻을 세워서 그걸 추구함으로써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는가, 항상 이상을 세워서 그걸 추구함으로써
자기 존재의 가치로 삼고 존재의 의미로 삼고.
이게 일반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제가 평생 그렇게 교육받았다는
거예요. 제가 그렇게 살았다는 거예요.
근데 그걸 알아차렸을 때 아, 이것 때문에 내가 항상 헐떡였구나.
항상 현실은 불만족스러워하고 존재 불만족을 느끼고 현실에는, 그리고 뭔가
이상을 향하여 항상 이렇게 내가 허덕이면서 살았구나,
하는 걸 알았을 때부터 제가 인생이 바뀌었어요.
다른 말로 하면 그때부터 이상에 속지 않기 시작했어요.
이상에 속지 않으면 현실밖에 없잖아요. 이 책에 톨레가 그러잖아요. 여러분,
이 책의 제일 중요한 대목이라고 '행복의 비결'이라고 톨레가
소개하는 것이 뭐냐면, 원 위드 라이프(one with life), 자기 삶과 하나가 되라.
자기 삶은 현실이에요. 모자라고 부족한 적나라한 이 현실,
이 현실과 하나되는 게 이 현실을 불만족스러워 하고 여기를 박차고 나가서
어디 이상을 구하는 것이 불행의 에고의 속성이고
그게 인간 불행의 가장 가장 근본 원인이에요.
그러니까 톨레가 '행복의 비결'로 제시하는 것은, 행복의 비결은
원, 하나가 된다. 위드, 무엇과 함께? 무엇과? 지금 이 적나라한 현실,
당신의 삶 자체, 삶과 하나 되기, 요게 행복의 비결이라는 거예요.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이지요. 여러분
바이런 케이티(Byron Katie, 미국 작가, 1942년생)의 메시지 기억나세요?
바이런 케이티의 메시지는 뭐냐면 현실이, 적나라한 이 현실이 신이다.
적나라한 현실이 신이다. 근데 인간은 이 현실과 싸운다.
이걸 불만족스러워 하고 이상의 이름으로 현실과 싸우는데,
이상이 사탄이고 현실이 신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탄의 이름으로 신과 싸운다. 되게 예리하지 않아요?
바이런 케이티의 아주 그 자기 체험에서 나오는 메시지거든요.
왜냐 바이런 케이트가 평생 자기 삶과 싸웠거든요.
자기 삶이 불만족스러워서.
그러다가 엄청난 깨우침이 왔는데 깨닫고 보니까 자기가 신과 싸워왔다.
그래서 가장 인생의 밑바닥으로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거죠.
대단한 통찰이예요. 같아요. 톨레의 메시지도 자기의 삶과 하나 되는 것이
행복의 비결, 바이런 케이티의 말은 현실이 신인데
인간은 어리석게도 신과 싸운다. 여러분, 현실밖에 없잖아요.
아, 뭐 대안이 있어야지, 뭐가 있어요? 현실밖에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죽으라고 이것을 거부하고, 싫어하고 수용하지 않아요.
이 현실과 하나되는 게 행복의 비결이다.
이런 말들을 우리가 또 여기서 듣습니다.
(19:51)
< 역할을 연기할 때 당신은 무의식적이다. >
이 말 정말 중요한 이야기에요.
역할을 연기할 때 당신은 무의식적이 된다는 거에요.
무의식이란 말은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요.
여러분 무의식을 요즘 젊은이들 용어로 쓴다면 좀비에요. 좀비.
내가 무의식 상태, 이거 좀비에요.
불교에서는 이것을 영가라고 해요. 영가, 그러니까
내가 지금 내가 에고를 따라 다니고 있는가,
지금 무의식 역할을 연기하면서 에고를 따라다니고 있는 것 자체를
내가 모르는 상태, 그게 살아있는 영가 상태, 살아 있는 영가를
이제 일반 용어로는 좀비라고 하는 거예요.
살아 있어도 유령 같은 느낌.
에고에 따라다니면서 그것을 모르고 있는 상태,
이게 지금 무명이고 무의식이다.
(20:49)
< 역할을 연기하고 있는 자신을 알아차리면
그 알아차림이 당신과 그 역할 사이에 하나의 공간을 만든다. >
그러니까 이렇게 점점 점점 자기의 역할하고 자기의 본성을 떼야 돼요.
지금은 떡이 돼 있어요. 지금은 떡이 되어 있다. 에고와 떡이 되어서 산다.
그러니까 여기에 자꾸 떼어 가지고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공간은 다른 말로 하면 '거리'에요.
언제 거리가 생기는가?
볼 때, 에고를 대상화 해서 볼 때 거리가 생긴다.
그러면 나는 누구인가? 에고가 아니라 에고를 보는 것이 나다, 이거죠.
나는 누구인가? 지금 에고와 떡이 되어 가지고 에고가 나라고 산다.
근데 에고를 보면 에고에 대해서 무의식 상태가 아니라 의식 상태가 되면
알아차리고 있으면, 에고를 알아차리고 있으면 거리가 생긴다. 공간이 생긴다.
그러면 점점 점점 에고와 떨어지게 된다. 그럼 결국에는 '그러면 내가 누구지?'
할 때 에고가 아니라 에고를 보는 그것이 나다, 이거예요.
여러분, 한 번 따라해 보세요.
< 보인다는 사실은 보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보는 것이 나의 본질이다. >
그러니까 여러분, 그 이런 이야기도 가끔 들려드려야 되니까
제가 화두 들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제가 아까 진 화두,
진 화두란 말은 의식이 의식을 의식하는 것, 진화두, 진짜 화두는
의식이 자기가 의식임을 의식하는 것, 이게 진짜 화두예요.
그러면 가 화두는, 임시 화두는, 아직 모를 때는 '이 뭐꼬'지만
진 화두는 '뭐꼬'가 떨어져요. 그래서 진짜 화두는 '이'에요.
'이것' 줄여서 '이'. '이' 하면 의식이 의식을 의식하면서 이것, 할 수 없이
말로 하자면 이것을 줄여 가지고 '이'. 그러니까 '뭐꼬'는 붙지 않아요.
'이' 하면 자각이 돼요, 의식이. 그러면 저 같은 경우는 의식이 자각될 때
어떤 느낌이냐면, 지금 보고 있는 이것이 분명히 나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어요.
지금 보고 있는 이것, 투명하게, 투명하게 텅 비어서 이렇게 보고 있는 이것이
나 자신이라는 것을, 이것이 의식인데, 말로 하자면 의식인데,
지금 보면서 보는 이것이 분명히 자각되고 있어요. 그것이 화두예요.
그러니까 화두의 가장 깊은 의미, 가장 정확한 의미, 화두가 무엇인가.
이렇게 보면서 보는 이것이 자각이 되고 있는 상태,
이것이 '이 뭐꼬'의 '이'예요. 자각이 되니까 '뭐꼬' 할 필요는 없어요.
그러니까 '이' 이것이 지금 자각이 스스로 된다.
그래서 항상 보고 보면서 보는 것이 자각되고 있는 상태에요.
그게 지금 저같은 경우에는 이 스위치에요.
그래서 그 어떤 다른 감각보다도 보면서 보는 이것이 자각이 되고 있어요.
여기에 지금 여기서도 역할 연기할 때는 무의식이지만 제가 스스로
보고 있는 이것이 자각되는 것은 의식이에요.
이렇게 되면 의식 상태가 되면, 안팎으로 환해요. 그래서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가 다 다 파악이 돼요. 그것도 빨리 파악이 돼요.
그리고 내 안에서 생각, 감정이 일어나는 것도 파악이 돼요.
안팎으로 안팎으로 밝게 뚫려 있다. 내가 의식임을 자각하고 있을 때,
의식이 자기가 의식임을 자각하고 있을 때 안팎으로 밝게 뚫려 있다. 이것을
안팎을 내외, 이 바깥 경계와 내 마음 안에서 생각 감정들이 안팎이에요.
안팎. 내외. 명, 밝을 명 자에 뚫릴 철자, 내외 명철,
화두가 제대로 들리면 진 화두가 들리면 내외명철(內外明徹)이 돼요.
딱 깨어있기 때문에 각성이 일어나서 닦여 있기 때문에 밖에서 바늘 하나가
탁 떨어져도 파악하고, 왜냐하면 신경을 딴 데 뺏기지 않고 있어서,
조금의 움직임만 일어나도 딱 바로 딱 알아채고 그리고 내 안에서
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도 바로 알아채요.
내외명철의 상태, 육조단경(六祖壇經)에 나오는 말이거든요.
육조단경에 내외명철, 안과 밖이, 안은 내 마음, 밖은 이 경계 현상,
안과 밖이 명, 밝게 뚫려 있다. 그래서 항상 다 알아차리고 있다.
이게 화두 들었을 때의 상황이거든요.
그러면 소위 말하는, 톨레가 말하는 투명화된 인간 같은 느낌,
투명인간 같은 느낌이에요. 지금 요게 지금 깨어 있는 바라보고 있는
이것이 투명인간 같은 느낌이에요. 텅 비어 있어요.
그러면서 아주 명료하게 깨어서 다 보고 있어.
그러니까 요게 지금 투명인간인데 따라서 그런 자각이 있어요.
이 현상계 안팎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생멸법으로부터 물들지 않는다.
자기가 없다. 벗어났다. 해탈했다. 이런 자각이 있어요.
그러니까 화두 하나를 제대로 든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고,
저의 표현에 의하면 무서운 일이에요.
화두 하나를 제대로 들면 그 자리가 극락정토예요.
그러니까 이게 물들지 않는 느낌이 딱 있어요.
그래서 지금 투명 인간 같이 느껴지는 이 지금 요것이 경에서는
이걸 마니주(摩尼珠)라고 불렀어요. 마니가 인도말로 구슬인데,
한자 주(珠) 자를 붙여 가지고, '옴마니 반메훔' 하잖아요.
옴은 알파고 훔은 오메가고, 알파 오메가 사이에 지금 요 본질이 하나가 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 있는데 이것의 특징이,
하나는 마니, 구슬같이 요게 지금 보는 이것이 투명하게 텅 비어 있으면서
환하게 깨어 가지고 이렇게 쫙 완전히 이 전체가 우주가 이 안에 들어와 있어서
하나의 구슬처럼, 저는 어떤 느낌이냐면 여러분, 둥근 어항 보신 적 있어요?
둥근 어항 같아. 되게 환해, 밝아요. 그리고 이것이 동그란 어떤
어항이라고밖에 표현 못하겠네.
둥근 어항을 볼 때 그 안이 투명하게 보이잖아요.
물고기가 다 보이잖아요.그러니까 어항 같은 느낌이에요.
톨레가 투명인간이라고 표현했고, 일반인들은 그 불교에서는 마니주,
옴마니 할 때 마니, 그리고 반메는 연꽃이에요.
투명한 구슬, 그리고 연꽃, 요게 지금 요 본질이 깨어 있을 때의 느낌이에요.
연꽃은 물들지 않는다는 거, 진흙에, 현상계에서 물들지 않는다는 느낌이고
연꽃은, 그리고 이 마니주는 투명하게 탁 깨어가지고 모든 것이 밝다.
투명하게 밝다. 그런 느낌이 있어요. 그게 지금 옴마니 반메훔,
관세음보살의 육자되는 진언이잖아요.
자, 그게 그런 뜻이라는 거예요.
지금 여기서 내가 지금 여러분 체크가, 따라서 이 순간 내가 내 안팎에서
일어나는 것에 의식적인가, 무식적인가. 체크가 되겠지요.
여러분 근데 평소에는 의식적이라고 있어도 누가 욕하면 누가 바가지 긁으면
순간적으로 훅 올라오지요. 올라오면서 깜깜해지는 거죠. 밝음이 사라지는 거죠.
밝음이 사라지면 무명, 무명의 십이연기(十二緣起)가 펼쳐지는 고통이,
무명(無名), 행(行), 식(識), 해가지고 생로병사의 고통이 펼치고 깨어 있으면,
** 십이연기(十二緣起) :
[불교] 과거에 지은 업(業)에 따라서 현재의 과보(果報)를 받으며, 현재의 업에 따라서
미래의 과보를 받는 열두 인연. 곧 무명(無名),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근(六根),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를 이른다.(Daum 어학사전)
깨어 있으면 무명(無名)이 명(名)으로 변해요.
그러면 명의 연기(緣起)가 펼쳐져요. 명의 연기에는 고통이 없는 거에요.
불생불멸인 거에요. 생로병사가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참 내가 이 순간에 명이냐 무명이냐, 그걸 내가 자각하기.
그러면 내가 무명이라고 하면 무명에서 벗어나는 가장 가장 좋은 길은
형(形), 수(守), 파(破), 리(離), 오늘 이 말 처음 쓰네요.
형(形), 수(守), 파(破), 리(離).
** 형(形), 수(守), 파(破), 리(離) :
불교 용어로 검도에서 수련의 단계를 뜻하는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수(守)는 가르침을 지킨다는 의미로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어 원칙과 기본을
충실하게 익히는 단계를 뜻하고, 파(破)는 원칙과 기본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그 틀을 깨고
개성과 능력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세계를 창조해 가는 단계이다.
그리고 마지막 리(離)는 파(破)의 연속선상이지만 모든 것에 얽매이지 않고
그 수행이 무의식적이면서도 자연스런 단계로 성장해 질적 비약을 이룬 단계를 이르는 말이다.>
(Daum 2021년 1월호 월간 '춤')
형(形), 수(守), 파(破), 리(離), 요걸 내가 실천하기.
여기에 인생의 스위치를 확보한다 하기.
스위치 확보한다는 것은 누르면 불 들어오잖아요?
그러니까 그걸 하나 확보하고 사는 삶은 굉장히 이제 밝음으로 나아갈 수가 있다.
지금까지 무명의 삶을 밝음의 삶으로 바꾸는, 그런 뭔가 방법론을 가지고
있어야 돼요. 여러분 방법론이 없는 사람도 있어요.
그 사람은 상근기(上根器)라고 불러. 그 상근기는 뭐라고 하냐면
닭이 천 마리 모이면 봉황 한 마리가 나온다.
** 상근기 -
근기(根機)는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함.
불가에서는 고수를 상근기, 하수를 하근기라고 부른다.((Daum 블러그)
그런 상근기는 이런 방법 필요 없어요. 그냥 자동으로 돼.
근데 그런 상근기 아닌 사람은 방법론에 있어서 끊임없이 이것을 반복 학습을 해서
익혀 들어가는, 저는 저는 그런 스타일이에요.
저는 상근기는 노땡큐에요. 상근기다 그러면 에고에요, 사실은.
그렇지 않나요? 끝없이 자기를 낮추면서 이 가장 기본 패턴을 익혀서
이걸 잘 일상에서 실천하기. 그걸 가지고 나의 구원의 길로 삼아서
실제로 구원을 받는 길을 간다. 이제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32:04)
< 당신은 상대방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뿐 아니라
(상대방이 누구인가 하는 관념은 인상이에요. 아상 인상할 때 인상)
그리고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도 마음속 이미지,
즉 아상을 가지고 있다. >
우리는 지금 대부분이 아상(我相) 과 인상(人相)을 가지고 산다.
아상은 나에 대한 이미지, 인상은 상대방에 대한 이미지.
< 그래서 당신이 현재 상호 작용하고 있는 사람 앞에서 특히 그렇다.
그러니까 당신 자신이 그 사람과 관계 맺는 것이 전혀 아니다. >
무서운 말이에요.
< 당신이 상대방과 관계 맺는 것이 아니고 실상은 당신이 생각하는
'나는 누구인가'가 당신이 생각하는 '그 사람은 누구인가'와 관계를 맺는 것이다. >
이것을 자각하기가, 이것을 알아차리기가, 이것을 의식하기가,
이거 쉽지 않아요.
요런 기본이 우리 공부의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들떠서 깨달음으로 가지 마시고 사람 하나 만날 때도
나의 아상과 나의 상대방에 대한 인상,
또 상대방은 자기에 대한 아상과 상대에 대한 인상을 가지고
이 4가지 상이 지금 충돌하고 있다.
이걸 자각해 가지고 고요하게 깨어있기. 요게 지금 우리의 수행,
일상에서의 수행이다. 톨레가 그러잖아요. 톨레가 질문하는 사람한테
"당신이 하고 있는 그 수행을 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이 순간에 깨어서 이런 네 가지 상으로부터 자각해서
내가 말려들지 않는 것이 이게 더 중요하다. 그래서
이게 잘 되면 산에 들어가서 몇 개월을 수행할 필요 없다는 거예요.
일상에서 내가 이런 상에 말려들지 않는 걸 내가 하게 되면 산에 들어가서
몇 달씩, 몇 년씩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더 수성한 수행이 된다."
톨레가 그 말 하잖아요. 그러니까 참, 그 말이 진실이예요, 여러분.
그 말이 진실이예요. 자 "정중 공부보다" 따라하세요.
"정중 공부보다 동중 공부가 100배 승하다."
고요한 데서 앉아 있는 공부보다 일상에서 부닥쳐서 거기서
공부하는 것이 100배나 더 힘이 있다. 이해되지요?
그런데 삶은 친절하게도 경계를 만들어 줍니다. 그죠?
삶은 친절하게도 자꾸 경계를 만들어 줘요.
그때마다 수행으로 삼아서 내가 거기서 수행을 해야지, 그거 버리고
어디 뭐 그냥 골방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골방 들어가서 잠시 깨끗하면 뭐해요?
나오면 똑같아요.
그래서 골방에서 만약에 여러분이 어떤 고요함을 느꼈다면 조증이 돼요.
나오면 그것이 울증으로 변해요. 그러니까 수행자의 조울증이 있어요.
수행자가 좋은 경계를 만나 맛보면 그것에 대해서 계속 그걸 집착하기
때문에 나락으로, 더 깊은 데로 떨어져요.
산이 높으면 골짜기도 깊다. 그래서 좋은 경계를 맛보면
일상에서 훨씬 더 우울증이 잘 빠진다. 그걸 놓쳤다 생각하니까.
그때는 좋았는데 왜 지금은 안 되냐. 이것이 수행자의 조울증이에요.
저한테 와서 질문한 사람 중에서 그런 질문 진짜 많이 해요.
어떻게 하면, 그때 염불할 때 깨끗해졌는데 그것이 사라졌는데 사라지니까
미치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걸 다시 할 수 있을까요?
그게 조울증의 주체는 에고예요. 에고가 그런 좋은 경계를 붙잡아 가지고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기 때문에 울증이 오는 거예요.
그런 걸 알아차리기가, 그러니까 여러분, 참 공부가 쉽지 않아요, 그죠?
그래서 조금이라도 뭔가가 이상하다 싶으면 반드시 그 뒤에는 에고가 숨어 있어요.
그 에고를 알아차리는 것이, 그 에고를 의식하는 것이, 일상에서는 무의식 상태로
살고 깨어가지고 의식하는 것리 공부다. 딴 게 아니다. 그래서
(36:51)
< 상대방의 마음도 아마 똑같은 일을 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
똑같은 일이라는 것은
< 그 사람도 아상과 인상이 있기 때문에
에고에 바탕을 둔 두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는 실제로는
각자의 마음이 만들어낸 4개의 개념적 정체성들의 관계인 셈이다. >
이것만 알아도, 요것만 알아도
우리가 훨씬 더 자기를 잘 볼 수 있습니다.
(37:19)
< 그 정체성들도 결국은 허구이다.
그러므로 인간 관계에 많은 갈등이 있다는 것은 그다지 놀라울 일이 아니다.
진실한 관계는 사라지고 얻는 것이다. >
여러분, 아상 인상이 있다 이거예요. 그러면 내가 누구를 만날 때 나의 아상 인상과
상대방의 아상 인상이 서로 관계를 맺는데 에고와 에고가 관계를 맺으니까 좋을~,
처음에는 서로 좋아 죽어. 조금만 지나면 모든 것이 또 다 틀어지죠. 그죠?
그러니까 결혼하기 전에는 에고가 변장한다는 거에요.
결혼하기 전에는 에고가 변장을 해서 아주 친절하고 배려심 깊은 사람처럼
대하는데 딱 결혼하고 나면 본색이 드러나서 모든 에고는 뭐에요?
나는 안 변할테니까 너가 변해서 나에게 맞춰줘, 이거예요.
모든 에고의 메시지 목소리는 똑같아요. 나는 안 변할테니까
너가 변해서 나에게 맞춰 줘. 그리고 신혼부부가 살아가니까,
우리도 해봤잖아요. 그 신혼 때의 신경전도 처음에 기선 제압을 해야 된다는 둥,
참~, 정말 어떻게 살았는지 몰라, 그 세월을.
여러분 결혼하기 전에 이 책 읽어야 돼요. 결혼하기 전에 이 책 읽어야 돼.
정말 이런 것을 모르고 결혼하면요, 그냥 100% 걸려드는 거에요.
안 그래요, 여러분? 예, 그러니까 참 인생은 어려운 거에요.
인생은 고(苦)고, 난(難)이에요, 고난(苦難)이에요. 근데 문제는
고난 덕분에 우리가 공부를 하고 깨어나서 성숙한 인간이 되어서 해탈한다.
결국에는, 해탈한다. 자, 또 지나가겠습니다.
(39:40)
< 불행의 주요 원인은 결코 현실의 상황이 아니라
그 상황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다. >
요 한 줄이 그렇게 중요해요. 자, 불행의 주요 원인은
결코 상황 자체가 아니라 그 상황에 대한 당신의 해석이라는 거에요.
생각이다, 따라붙는 생각이다.
자, 상황 자체는 첫 번째 화살, 따라붙는 생각은 두 번째 화살.
모든 고통은, 첫 번째 화살은 통증이에요.
여러분 첫 번째 화살은 통증이에요. 그냥 한 번 아프고 말아.
두 번째 화살은 번뇌에요.
그러니까 인생의 고는, 우리의 고는 마음의 고고,
마음의 고는 번뇌에서 와요.
두 번째 화살, 여러분 두 번째 화살로 안 끝나는 것도 아시죠?
세 번째 화살, 네 번째 화살, 계속 이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 메시지가 뭔가? 여러분, 여기에서 중요한 게 뭐냐?
생각에 우리가 속고 산다는 거에요.
이게 지금 이 책 전체의 메시지예요, 여러분.
이 책 전체의 메시지에요. 인간은 생각에 속고 산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정말로 현명한 사람, 지혜는 뭐냐?
생각에 속지 않는 게 지혜예요.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과의 갈등에 인간 관계에서 보면
원점들이 있다. 첫 잘못된 매듭,
톨레의 메시지는 뭐냐면 그것이 생각일 뿐이라는 거예요.
그것이 생각일 뿐이다.
근데 정말 놀라운 일은 생각일 뿐인 그것을 철저하게 정말
우리들은 집착해서 못 놓고 있다는 그 사실이에요.
그때 자식과의 관계, 부모와의 관계 다 마찬가지예요.
그때 잘할 걸, 그때 그걸 하지 말 걸, 그런 거 있잖아요, 여러분.
근데 그게 생각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로 무서운 메시지는 우리가 걱정하고 있는
모든 것은 사실은 생각일 뿐이라는 거예요.
심지어 여러분, 어떤 끔찍한 범죄조차도, 끔찍한 범죄조차도
알고 보면 그것도 그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거기서 일어나는
생각이 문제라는 거예요.
하여튼 여러분, 결론은 버킹검입니다.
뭐냐면, 그런 생각에 속으면 생각을 알아차리고
생각의 알아차림 생각으로부터 놓여나지요.
놓여나는 그 공간이 우리의 본질이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결론은 계속 버킹검이에요.
생각 덕분에 생각에 속으면 이걸 모르는데 무의식 상태로 가는데,
생각을 알아차리면 생각으로부터 거리가 생기고
결국에는 생각으로부터 나온다.
그 자리가 극락정토다. 우리의 본질이다.
이게 지금 계속 반복되고 있는 깨달은 사람들의 메시지예요. 모든 게.
그래서 고통의 역할이 있다. 생각과 고통의 역할이 있다.
뭐냐? 역행보살이다.
결국은 우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 끔찍한 고통과 생각이 찾아왔다.
어제 젊은 분들하고 대화를 했는데 젊은 분들이 대화 끝에 한 분이
질문을 하더라고요. 안 태어났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안 태어났으면 정말 좋았죠, 왜 태어났는지 모르겠어요.
이러는 거예요.
왜 태어났는가, 여러분.
고통을 통해서 영원한 자유를 우리가 얻으라고 태어난 거예요.
그래서 고통이 있는 거예요, 인생에는.
고통이 역행보살이다. 보살은 뭐예요? 나를 도와주러 오신 거잖아요.
근데 역행이란 말은 반대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는 거지요.
여러분, 왜 역행보살이 와요?
내가 우쭐해 가지고 잘난 척 하니까. 그렇잖아요?
고통이 없으면 정신 차리겠느냐 이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고통 없으면 정신 차릴까요? 못 차려요.
얼마나 잘났는데~, 그러니까 고통의 역할이 있다.
(46:31)
< 당신은 인간이라는 존재이다.
현상이면서 본질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삶의 완성은 통제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존재 사이의
균형을 찾는 것에 있다. >
자, 인간과 존재 사이의 균형을 중도(中道)라고 불러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색은 인간, 공은 존재, 인간이라는 존재,
색즉시공, 존재이면서 인간인 것 공즉시색 요 사이의 관계,
균형 잡힌 관계, 중도예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
현상에도 치우치지 않고, 본질에도 치우치지 않고,
그러면서 이렇게 동시에 이것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태.
그게 중도이며, 중도를 또 분리해서 다른 말로 연기(緣起)라고 해요.
중도연기(中道緣起), 이게 균형 상태를 말한다는 거에요.
다른 말로 하면
본질은 무심(無心)이고,
본질을 통해서 나온 현상은 평상심(平常心)이에요.
결국에는 우리 공부는 무심과 평상심의 균형,
이걸 살활자재(殺活自在)라고 하죠.
살은 죽을 살(殺)자에, 활은 살릴 활(活)자인데,
살인도(殺人刀) 할인검(活人劍) 그런 말 쓰잖아요.
사람을 죽이는 칼, 사람을 살리는 칼.
그러니까 살 무심, 활 평상심, 살 활자재, 또 은현동시(隱現同時)
은은 숨을 은(隱)자, 본질 무심, 현은 나타날 현(現)자, 현상,
본질과 현상이 동시에, 같이 있는가. 이게 지금 중도의 모습,
요게 지금 삶의 완성은 인간과 존재 사이의 균형을 찾는데 있다.
(48:44)
마지막으로 이제 중요한 부분이 있어서 좀 항상 자기를 현상과
본질이 이 순간 만나고 있는 것으로, 근데 제가 생각하는 중도는
(책상을 친다.)'탁' 소리예요. 그냥 이거 하나예요.
이게 지금 이게(책상 치는 소리) 본질과 현상이 만나서 나오는 거에요.
본질이 없어도 못 나오고 현상이 없어도 못 나와요.
이게 본질과 현상이 조화를 이룬 중도에요.
그러면 소리만 그렇습니까?
지금 피어 있는 꽃, 지나가는 구름 하나, 모든 것이 본질과 현상이
만나서 나오잖아요. 이 세상은 본래 균형 상태에요.
근데 그거를 우리가 생각으로 집착해 가지고 이게 깨지는 거에요.
지금 이 대목도 중요하네요. 지금 여러분 이해되세요?
현상에 치우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본질에 치우치는 것도
아니라는 거에요. 왜냐?
모든 이 사물은 본질과 현상이 만나서 나오고 있는 이거다, 이거에요.
이 소리 하나(책상 치는 소리)에 본질과 현상이 같이 연기되어 가지고
그래서 연기라는 말을 이렇게 중시하는 거죠.
모든 것이 연기 중도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 이미.
거기에 대해서 왈가왈부만 하지 않으면 그 자리가 극락정토로 변한다.
그러니까 지옥과 천당이 같은 장소인데
내 눈이 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면 천당이고, 치우쳐 있으면 (지옥),
치우친다 이 말은 아상도 치우친 거고, 인상도 치우친 거고,
모든 상은 치우친 거잖아요. 집착하고 있는 거잖아요.
한쪽으로 집착하고 있는 것, 그것만 하지 않으면,
그거 하면 지옥이고 그거 하지 않으면 천당이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평소에 깨어서 살기가 그렇게 중요하다.
깨어서 사는 사람은 내딛는 자리마다 천당이다.
그런 사람한테는 제가 아침에 집 나설 때 누가 길을 쓸어놓은 듯한 느낌,
그 느낌이 생기면서 그 다음에는 발을 디딜 때마다 거기서 연꽃이
받쳐주는 느낌, 무게가 사라지고. 딛는 발마다 연꽃이
이렇게 받쳐주고 있는 느낌,
그런게 이제 공부가 깨어있는 사람한테는 그러니까 의식이면,
의식은 무게가 있어요, 없어요?
그러니까 그 의식이 자각되고 있으면 그런 느낌들이 이렇게 있어서
그러면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게 되는 거에요.
그렇게 이제 그런 공부를 우리가 하고 있습니다.
(51:45)
< 당신은 이미 자신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어떻게 '하면'
이라는 말이 적용되지 않는다. >
이 말 알아들었어요? 진짜 구원의 메시지예요.
결국 우리 공부는 뭐냐? 내가 내가 되는 거잖아요. 그렇잖아요?
근데 우리는 이미 나예요. 이미 나예요.
오직 존재하는 일에 힘쓴다.
오직 존재하는 일에 힘쓴다.
이게 지금 톨레의 메시지이기도 해요.
왜냐?
여러분, 우리가 이미 존재하지 않나요?
여러분이 존재하지 않은 적이 있었나요?
그런데 이상하게 인간은 오직 존재하는 일에 힘쓴다.
이게 엄청난 메시지가 있어요. 이거 어려워요.
인간은, 모든 인간은 존재하고 있지요.
그런데 이 존재를 누리지 못하고, 존재를 누리지 못하고 여기를 벗어나서,
그러니까 존재가 우리의 집이에요.
근데 이 집에서 나간다 이거예요. 나가서 탕자가 된다는 거에요.
나가서 '거지 아이'가 된다는 거에요. 왜 나가요?
무언가를 구해서, 찾아서 나간다.
그러면 무언가를 구한다는 말은,
우리 귀에다 대고 에고가 속삭인다, 이 말이에요.
'이대로 있으면 안돼. 무언가를 해야 해.'
그래서 자꾸 우리는 열심히 하려고 해요.
제가 인생의 흐름이 바뀌었다는 말이 그 말이에요. 자꾸 집 나가는,
내가 습관적으로 집을 나가는구나 하는 걸 제가 알았다는 거에요.
그래서 그걸 안 했더니 이제는 집을 안 나가고 있으면
그 자리가 자기 집이야. 거기가 극락정토예요, 사실은.
그러니까 그게 인생의 흐름이 바뀌는 변곡점이에요, 전환점.
마음공부의 전환점. 자기 집에 앉아 있기.
그러려면, 오직 존재하는 일에 힘쓴다 이 말은,
인간은 이미 존재하잖아요. 이미 존재하잖아요.
이걸 자각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존재의 힘은 굉장히 강해져요.
근데 우리는 끊임없이 이미 존재하는 이 사실을 까먹고
밖으로 무언가를 구해서, 그러니까 여기는 허기지고 불만족스럽고
불완전하고, 제가 지난 시간에 고백 드렸잖아요.
제가 젊을 때 제가 존재 불만족을 많이 느꼈다.
그래서 마음공부를 시작했다.
근데 그때 존재 불만족을 느낀 게 에고였어요.
근데 그게 에고인 줄 그때는 꿈에도 몰랐어.
근데 놀랍게도 그 덕분에 이 공부를 하게 돼 가지고 이제 알았어요.
그러니까 에고가 역행 보살이었어.
이렇게 희한한 거예요, 여러분.
그러니까 에고가 알고봤더니 나를 헐떡이게 만들었는데
그 덕분에 이 공부를 했고 결국은 알고 보니까,
아, 그때 내가 존재 불만족을 느낀 것이 바로 그게 에고였구나.
근데 그 덕분에 이 공부를 해가지고 이제는 에고를 알아차리고
에고로부터 자유로워 지금 졌으니까 결국은 에고가 일종의
선생님이었구나. 하는 이제 그런 자각이 지금 있어요.
그런데 하여튼 변곡점이 거기예요.
자기도 모르게 집을 나갔다는 거에요.
그래서 오직 존재하는 일에 힘쓰다, 이 말은
자기 집에서 버티기, 버티기다 이거예요.
이게 수본진심(守本眞心)(본래의 참 마음을 지킴)이야.
형(形), 수(守), 파(破), 리(離)에서 '리'가 자기 집이에요.
자기 집이 확보되는 사람은 그 집에서 버티기가 그게 다시 '형'이 되고,
버티는 게 '수', 지킬 수자 수본진심, 그래서 자기 집에 완전히 확고하게
딱 뿌려 내리면 '파', 이제 그런 더 이상 그렇게 노력 안 해도 저절로
집에서 살게 되고 그러면 '리'는 대자유의 세계가 펼쳐져서
이 세계 전체가 다 자기 집이에요.
이제는 자기 집을 나갈 수가 없는 거에요.
어디를 가도 발에서 연꽃이 피어요.
그런 공부 과정이 있어서 그래서 지금 여러분께 이 대목은
< 당신은 이미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어떻게 '하면' 이라는 말이 적용되지 않는다. >
이게 무위법(無爲法)이에요.
무위법, 또 무위라는 말은 '함'이 없잖아요.
요거는 무루(無漏)와 같아요. 새지 않는다.
샌다는 말은 집 밖으로 나간다 이 말이에요.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그래서 진짜 화두는 어떻게 하느냐가 없다 이거예요.
존재 자체가 화두다, 이거예요.
'어떻게 화두 둡니까?'가 아니라는 거에요.
진짜 화두는 그냥 이게 존재 자체가 화두다.
이미 존재하는데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에요.
자꾸 이걸 두고 뭔가 하려고 해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학원 다녔으니까.
끊임없이 뭔가를 구하러 다닌 습관이 완전히 몸에 쩔어 있는 거죠.
그걸 하지 않는다. 그 자각이 수행의 변곡점이다.
그래서 < 이미 존재하는 자신에게 불필요한 짐을 보태는 것을 중단하기만 하면 된다. >
이게 수행의 변곡점이에요. 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려고 하는
에고를 돌아봐서 내려 놓는 거에요.
뭘 하는 게 아니라 하려고 하는 에고를 돌아봐서 내려놓는다.
(58:12)
< 하지만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나 자신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만약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것에 완전히 편안할 수 있다면
그때 남아 있는 것이 바로 당신이다. >
에고가 알지 못할 때, 에고가 알지 못할 때
단지불회(但知不會), 에고가 알 수 없다는 그 사실을
만약에 안다면 그게 견성이다.
그때 남아 있는 것이
바로 성품이다. 본성이다. 불성이다.
그러니까 에고가 아는 것이 포기되었을 때 단지불회(但知不會),
에고가 본질을 대상으로 알려고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포기했을 때 그때 견성이 일어난다.
그 상태 자체가, 모르고 있는 상태 자체가 바로 당신 자신이다.
본래면목(本來面目)이다.
(59:06)
< 인간의 뒤에 있는 존재 이미 규정된 무엇이 아니라
순수한 가능성의 장이다. >
텅 비어 있어요, 그것은. 순수의식은 텅 비어 있어요.
에고가 알 수는 없다, 본질을. 본질을 에고가 알 수는 없다.
그 사실을 알면 에고가 알려고 하는 모든 노력을 멈춰버린다.
그러면 남는 건 뭐냐. 그게 본래면목, 그게 견성이다 이거예요.
지금 톨레 이야기를 가지고, 좋은 것은 진짜 이 견성,
깨달음의 외통수가 다 나온다는 것은 놀라워요.
한국에서는 선생님한테 물어보면 "알아서 해." 근데 톨레는
지금 아주 자세하게 알아서 해가 아니고 자세하게 일러주는데
이래도 공부 못하면 진짜 바보, 바보축구지.
여러분, 바보 축구할 때 축구가 한로축괴(韓盧逐塊)의
한로축괴라는 말을 축구라고 한다고 말씀 한 번 드렸지요.
한로, 한나라 개는 어리석은 개는 축괴, 흙덩이를 축 쫓아가고,
사자교인(獅子咬人) 사자는 흙덩이를 던진 사람을 문다.
이때 축괴를 경상도에서 발음하기 어려워 가지고 축구,
축구가 됐거든. 바보 축구다.
그러니까 흙덩이를 쫓아간다 이거예요.
사자는 사람을 문다.
(1:01:36)
< 다시 말해서 꿈꾸는 사람이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모르듯이
당신은 자신이 생각들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
아, 이거 날카로운 대목이에요.
꿈꾸는 사람이, 악몽을 꾸는 사람이 이게 꿈이라는 것을 모르듯이
깨어있는 우리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는 이 사실을
모른다는 거에요. 거의 대부분이 생각을 따라가고 있지,
생각에 함몰되어서 따라가고 있지, 이 생각을 볼 줄을 모른다는 거에요.
요게 꿈속에서 있는 사람이 꿈인 줄 모르는 것 같다는 거에요.
그러면 여러분, 꿈속에 사람이 악몽을 꾸는 사람이 이게 꿈인 줄 알면
즉각 그 악몽으로부터 깨어나지요. 그 고통으로부터 깨어나지요.
중요한 대목이에요.
제 말 맞습니까?
악몽을 꾸는 사람이 고통스러운데 악몽이 꿈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그 고통으로부터 즉각 자유로워지지요. 맞아요?
그러면 지금 나를 괴롭히는 그 생각이 생각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그 생각의 내용물로부터 벗어난다. 왜냐? 생각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은 무엇만이 사실이에요? 지금 지금 눈앞에 있는 이거.
우리들이 지금 이렇게 대화 나누고 있는 이것만이 사실이지.
따라서 현실은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이 말도 여러분 음미해 보세요.
현실은 이렇게 감각적으로 열려 있어서 이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잖아요.
현실을 생각할 필요가 없잖아요. 따라서 모든 생각은 사실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꿈에서 꿈이 꿈인 줄 알면 꿈속에 고통에서 벗어나듯이,
살아서 생각 속에서 생각이 생각인 줄 알면 그 생각의 내용물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난다. 이게 정말 중요한 메시지에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결국에는 우리가 수학을 해봤기 때문에 a b)
아, 그러므로 생각이 꿈이구나. 생각은 깨어서 꾸는 꿈이구나.
지금 이해되세요? 지금 눈 감으면 꿈을 꾸고 눈 뜨면 생각을 꾼다.
이걸 음미해 보세요. 아, 내가 그러면 자기가
생각이 나를 끌고 다니고 있다는 걸 자각하면
거기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고 그러면, 알고 보면 여러분,
모든 것이 아까 그랬잖아요.
첫 번째 화살은 맞으면 그만이에요.
따끔하고 끝나요. 지금 제가 제 표현은 통증이에요.
근데 두 번째 화살은 고뇌 번뇌예요. 그게 고통이라는 거에요
심적인 고통. 우리는 지금 심적인 고통으로부터 다 괴로워 하는 거에요.
그 누가 제가 옛날 직장 다닐 때 상관이 "내일 시간 있어?" "예."
"그러면 내일 몇 시에 내 방으로 와." 그때부터 불안해.
가서 무슨 말을 할 지를 모르니까, 근데 가서 막상 들어보면 별거 아니거든요.
근데 그때까지 그 불안한 그 마음은 피할 수가 없잖아요.
근데 그럴 때 이제 생각의 속성이 그렇다는 거죠.
그걸 알아차리는 건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런 말들을 우리가 한 문장이 싹 지나갈 수도 있지만
이걸 좀 깊이 본다면 이런 말이 우리를 깨닫게 해줘요.
자, 이제 오른쪽이 행복의 비밀이고, 행복의 비밀은 아까 말씀 드린 그거예요.
삶과 하나가 되는 거. 원 위드 라이프. 행복의 비밀은 뭐냐?
삶과 하나가 된다. 심리학에서는 삶과 하나가 된다는 걸 뭐라고
표현하냐면 '수용'이라고 불러요. 수용.
있는 그대로의 삶을 수용하는 게 행복의 비결이다.
(1:06:57)
< 만약에 나와 삶, 생명이 둘이라면, 내가 삶과 별도로 존재한다면
나는 모든 사물 모든 존재 모든 사람들과도 별개이다. >
맞지요.
삶은, 생명은 모든 존재 속에 골고루 들어가 있잖아요.
근데 나하고 생명이 따로 따로라면 나하고 남이 다 따로 따로다.
그 말 이해되지요?
그런데 < 그러나 내가 생명의 삶과 별개로 존재할 수 있는가? >
여러분 내가 생명과 별개로 존재할 수 있는가?
< 삶과 분리되어서 존재와 분리되어서 어떤 나가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나의 삶 같은 것은 없으며~ >
여러분, '나'와 '삶'이 따로 따로 있어야 나의 삶이라는 말이
성립을 할 텐데 따로 따로가 아니기 때문에 '나의 삶'이란 말은
성립되지 않는 말이다.
이거 톨레가 이 장의 결론으로 제시하는 거에요.
자, 그래서 그럼 어떻게 되는가.
< 나의 삶 같은 것은 없으며 내가 삶을 소유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삶 그 자체이다. 나와 삶은 하나이다. >
이 말을 깊이 통찰한다면, 깊이 통찰한다면,
이게 이 장의 제목인 불멸의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왜냐 내가 생명이라면 예수님 말씀처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하는 말처럼
내가 생명이라면 생명은 나누어지지 않는 거에요.
여러분, 온 생명과 낱 생명은 완전히 하나예요.
온 생명은 뭐에요? 모든 생명을 더한 거, 온 생명.
그리고 우리 개체 하나 안에 들어있는 건 낱 생명,
근데 생명의 속성은 뭐냐면, 여러분 생명은 현상이 아니예요.
생명의 속성은 본질이에요.
그래서 모든 생명은 그 자체가 무한대에요.
절대에요. 무한대에요.
따라서 여러분 지금 '온'이라는 말 하고 '낱'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들어오세요?
'온'은 전체를 말하고, '낱'은 개체를 말하죠.
근데 전체 무한과 개체 무한이 크기가 같으냐, 다르냐?
무한의 부분은 무한입니까, 유한입니까?
무한의 부분은 무한이거든요.
그러니까 온 생명과 낱 생명이 온 생명도 무한이고 낱 생명도 무한이에요.
이게 불멸의 결정적인 증거라는 거에요.
그럼 나는 누구인가? 휴먼 비잉이다. 개체면서 전체다.
이것이 조화를 이루는 것, 본래 조화를 이루고 있어요.
근데 여기에 우리가 분별해 가지고, 그러니까 선악과를 따먹어 가지고
실락원, 낙원을 잃어버리고 추방됐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추방된 에덴동산으로 돌아가는 것은
선악과를 토하는 거잖아요. 선악과를 토하는 거잖아요.
선악과를 토하는 가장 좋은 길은 자기의 본질을 깨닫는 거예요.
자기의 본질은 현상은 개체이지만 본질은 전체에요.
현상은 유한이지만 본질은 무한이에요.
그래서 유한과 무한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중도다.
요게 불멸의 결정적인 증거라고 지금 톨레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 '나의 본질'은 없어요. 내가 본질이에요.
자, 본질을 불성이라고 하면 '나의 불성' 그런 건 없어요.
내가 불성이에요.
요 말을 곱씹으시면 지금은 아마 여러분의 분별심이
요 말을 분별을 분별로는 이해가 안 되거든요, 지금.
분별은 나는 나고 지금 나는 나고 생명은 생명이지.
이게 분별심인데, 이게 선악과인데 요거는 지금 이 말을 소화를 못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요 단락을 읽었다고 해서 우리가 지금 다 이것을
소화하고 있다고 할 수가 없어요. 이해는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소화는 안 돼요.
저같은 경우는 요런 말들은 화두에요.
'나의 본질'이란 없다. 내가 본질이다.
요것 화두에요. 화두란 말은
이것을 내가 몸에서 체험을 해야 된다 이거예요.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 문제로 환원돼요.
그래서 이 문제를 깊이 깊이 가지고 있으면 어느 순간 아, 하고
이제 깨달음이 온다.
그때부터 나는 본질이 되어 가지고, 나는 본질이라는 것을 안 놓치는가?
이게 이제 진짜 수행, 진짜 화두가 되어서 계속 우리가 이제 깊이 들어가게 되는,
이거 하나로, 그래서 결론은 뭐냐면 여러분,
결론은 화두로 오네요.
초보자건 고수건 화두 하나를 제대로 들어서 모든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
그래서 여러분께 다른 말은 못해도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여러분께서 만약에 진 화두만 둘 줄 안다면, 진 화두만 둘 줄 안다면,
생각으로부터 자유예요.
생각으로부터만 자유가 된다면 그 자리가 극락정토예요.
그러니까 진 화두 둘 줄 아는 이상은 없어, 그냥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이 진짜 화두를 둘 줄 아는가? 그 상태 이상은 없어요.
왜냐? 모든 것이 끊어지고 본질하고 하나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상태야말로 본질하고 하나가 된 상태는, 나는 없잖아요.
그 상태야말로 알 수 없는 거에요.
진정한 의미에서 알 수 없다는 것은 그 상태를 말해요.
본질하고 하나가 되었을 때야말로 진짜로 알 수 없는 거에요.
왜냐? 에고가 없기 때문에. 생각이 없기 때문에.
그게 알 수 없다는 말의 진짜 깊은 의미에요.
달마가 불식(不識)했거든. 불식.
양 무제가 달마가 처음으로 인도에서 중국에 도착했을 때 중국의 왕이,
양나라였고 중국의 나라가, 그리고 양나라의 황제가 무제였어요.
양무제가 달마한테 물었거든요.
"짐 앞에 서 있는 당신은 누구입니까."
짐 앞에 서 있는 당신이 누구입니까.
그때 달마가 뭐라고 했냐면 불식, 알 수 없다 했어요.
이때 알 수 없다는 말은, 본질과 내가 화두가 하나가 된 화두,
진짜 화두, 진짜 화두가 되면 본질하고 딱 하나가 되거든요.
그 상태를 불식이라고 불러. 에고 입장에서는 알 수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지금 불식이라는 말이 달마 가르침의 핵심이에요, 여러분.
달마가 선불교의 초조(初祖)거든. 선종의 초조거든요.
그러니까 달마의 가르침의 핵심은 선불교의 핵심이에요.
결국에는 우리가 누구인가 할 때 진짜 깊은 의미에서는
알 수 없다는 거에요.
근데 그것이 그냥 알 수 없는 게 아니에요.
에고가 알 수 없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거에요.
거기에는 모든 생각이 녹아 있어서, 생각이 끊어져 있어서
알 수 없다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 상태다 이거예요.
그게 화두를 들었을 때의 모습이에요.
그게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깊은 경지에요.
지금 화두 하나를 처음에는 무엇인지 궁금해 가지고
궁금증을 키워가는 게 처음에 가 화두, 임시 화두고
그 자리가 드러나면 그 자리가 하나가 딱 되면 모든 것이 다
끊어져 버리기 때문에 그 끊어진 의식만 남아 있는 상태,
여러분, 순수 의식만 있는 상태, 그 상태는 알 수 없어요.
이게 알 수 없다는 말의 무서운 비밀의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이 화두 하나로, 초심자가 마지막까지 화두 하나로
밀고 나가는, 그래서 지금 모든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서
극락정토에서 살아갈 수 있는 그 방법이 요렇게 딱 모아놨다.
화두를 스위치 삼아서 어려울 때마다 돌이켜서 화두 들기,
요게 지금 선불교의 강종(綱宗)이에요.
모든 가르침의 골자에요.
한 번 이 말난 김에, 재밌는 거는 톨레 이야기 하면서
또 이 선불교 화두를 또 이야기를 하는 게 너무 너무 잘 맞는 거에요.
저는 참 기뻐요. 그런 의미에서.
서양에서 깨달은 사람하고 동양에서 깨달은 사람의 대화가 하나도
걸림이 없이 완벽하게 소통되고 있다는 이 사실이 참 기뻐요.
그래서 톨레 책을 볼 때마다 기뻐요. 어제 잠은 좀 모자라는데 지금 좀 피곤한데
그러나 제가 좀 약간 업된 거 아시죠? 여러분~(하하)
기뻐요. 이 공부는 기뻐요. 톨레를 보면서 얼마나 그 선불교에서 말하는
용어들이 쉽게 풀이 되어 있고, 그리고 잘 소통이 되어 가지고 인간의 본질을
잘 드러내고 있는 그런 기쁨이 있어요.
여러분, 안 그래요?
시공을 초월해서 인간과 인간이 진짜 본질에서 통하는 기쁨,
여러분 그 에너지를 나누기 위해서 오셨지요?
예, 이 에너지 잘 쓰시고 다음에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