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락된 천국의 비밀
말씀/마태복음 13:1-30
요절/마태복음 13:11, 찬송가/235장
말씀의 제목이 ‘허락된 천국의 비밀’입니다. ‘비밀’을 구글에서 검색했더니 이렇게 설명합니다. ‘정보를 일정한 그룹의 사람들 사이에 공유하는 것을 말한다. 되도록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알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숨기어 공개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비밀은 뭔가 있기는 있는데 다는 모른다는 말입니다. 비밀을 알면 누리는 것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폰의 비밀번호를 알아야 폰을 열 수 있고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비밀의 대상이 이런 것이 아니라, ‘천국’입니다. 이 천국은 영생을 말하기도 하지만 그전에 이 땅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그런 천국입니다. 그렇다면 이 ‘천국의 비밀’은 구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내가 신자가 아니라면 관심조차 안 가질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신자로서 똑같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누구는 이 비밀을 알고 구원을 얻고 천국을 누립니다. 그런데 누구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작은 차이가 아닙니다. 이것은 사느냐 죽느냐? 영생이나 심판이냐의 문제입니다. 그럼 어디에서 이런 차이가 올까요? 예수님은 이를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1장, 귀 있는 자는 들으라(1-9)
예수님께서 집에서 나가 배에 앉으셔서 몰려온 사람들에게 비유로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습니다. 그 첫 번째가 오늘 말씀인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비유입니다. 이는 천국은 말씀의 씨를 뿌리는 것에서 시작됨을 말해줍니다. 말씀의 씨를 뿌리지 않으면 천국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씨를 뿌리는 것은 당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흔한 장면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전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렸습니다. 최대한 준비한 밭에 뿌리고자 했는데,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졌습니다. 밭 사이는 길이 있고, 그 길은 사람들이 밟고 다녀서 단단하게 굳어 있습니다. 그러니 씨가 흙에 묻히지 못하고 길가에 그대로 뒹굴었습니다. 이를 눈이 좋은 새가 보고 와서 홀딱 먹어버렸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의 운명은 그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또 다른 씨는 돌밭에 떨어졌습니다. 돌밭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돌밭이 아닙니다. 이곳의 지형은 석회암이 바닥에 넓게 깔려 있고, 그 위에 살짝 흙이 덮여 있는 그런 밭입니다. 이런 곳에 씨가 떨어졌습니다. 그래도 흙이 있어서 곧 싹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해가 돋은 후에 뿌리로부터 수분을 빨아들여서 커야 하는데, 돌 때문에 뿌리를 내리지 못해 말라버림으로 끝이 났습니다. 또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졌습니다. 이를테면 잡초 밭에 떨어진 것입니다. 그래도 씨는 싹도 나고 곧 열매를 기대를 할 정도로 자랐습니다. 그러나 온갖 가시들이 같이 자라면서 기운을 막아 열매를 못 맺고 끝이 났습니다. 또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싹도 잘 나고 뿌리도 쑥쑥 잘 뻗어가며 자랐습니다. 기운을 막을 가시떨기도 없어서 잘 자라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하였습니다. 씨를 뿌린 농부의 수고를 충분히 보상해주고도 받았습니다. 이것은 꼭 농사를 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마치고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단순히 농사 이야기가 아니라, 들을 귀 있는 자만이 들을 수 있는 뭔가 예수님이 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메시지를 들을 수 있는 그 사람만 들으라는 것입니다. 과연 여기에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을까요? 또 누가 그 메시지를 들을 수 있을까요?
2장, 누구에게 천국의 비밀이 허락되는가(10-17)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은 다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제자들이 은밀하게 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제자들 편에서 생각하면 좀 답답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이렇게 많이 모였는데, 이때에 쉽고 단순하고 분명하고 그리고 좀 재밉게 말씀을 전하면, 사람들이 다 은혜 받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알다가도 모를 비유를 말씀하시니, 사람들이 그냥 다 돌아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제자들이 답답해서 예수님께 물은 것입니다. 또 제자들 역시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의 말씀을 잘 몰랐습니다. 사실 우리도 말씀을 들을 때, 주일 메시지가 좀 쉽고 단순하고 여기에다 세상의 재밉는 이야기도 좀 섞어서 전하면 얼마나 좋아? 그런데 왜 저렇게 어렵게 말씀을 전하나? 하는 생각이 들 수가 있습니다. 또 우리에게는 이 말씀이 쉬운가? 어려운가?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런데 쉬울 수도 있지만 어려울 때도 많습니다. 반면 씨뿌리는 자의 비유, 다윗과 골리앗...어린 시절부터 골백번 들은 이야기 하며 다 아는 것으로 여기고 쉽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다 아는 이야기라고 한다면 정말 쉽습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알고 있는 것만 아는 것입니다. 저도 나름 성경을 많이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것 이상 뭔가가 성경 속에 분명히 있는데, 그것이 잡히지 않을 때 힘들고 답답합니다. 더구나 이를 전해야 하니 더 어렵습니다. 사실 성경은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11절을 읽겠습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은 곧 천국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나중에 얻을 영생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바로 지금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와 영생의 감동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 자녀라는 특권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누가 누리는가? ‘너희에게는’ 즉 너희들에게 만큼은 허락되었다고 했습니다. ‘너희’는 누구입니까?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이기 때문에 허락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 예수님께 와서 비유의 뜻을 물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참 쉽네, 뻔한 이야기네, 하고 끝내지 않고 그 이야기 너머에 담긴 메시지를 듣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영어에 ‘Read between the lines.’ 행간을 읽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행간은 행과 행 사이의 공간인데, 글에 직접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으나 저자가 실제로 나타내려는 숨은 뜻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을 읽어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뻔한 비유의 말씀 속에 담겨진 메시지를 듣고자 하는 그 사람에게 천국의 비밀이 열립니다. 성경 어렵지 않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성경보다 쉬운 책도 없습니다. 그냥 이야기, 스토리입니다. 쭉쭉 이야기를 읽으면 됩니다. 아브라함 이야기, 이삭 이야기, 야곱 이야기, 요셉이야기,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그런데 그 이야기 속에 담긴 하나님의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 이것은 만만치 않습니다. 그 비밀을 알아야만 열리게 됩니다. 60대 성공한 여자 사장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디지털이냐? 아날로그냐? 나이가 들어도 디지털을 알면, 굳이 마트에 직접가지 않아도, 스마트폰으로 쿠팡에서 원하는 물건을 살 수 있다고... 이런 작은 차이가 부자를 만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쿠팡이나 코스트코몰에서 원하는 물건을 사려고 해도, 자신의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모르면 못 삽니다. 이처럼 디지털 시대에 비번을 알아야만 원하는 것을 살 수 있는 것처럼, 신앙의 세계도 천국의 비밀을 알아야 구원의 세계, 영생의 세계가 열리게 되고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것을 누립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그저 다 아는 이야기, 뻔한 이야기로 여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제자들처럼 그 속에 담긴 메시지를 듣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아는 이야기인데,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천국을 알게 되며 천국을 제대로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말씀을 뻔한 것으로 여기고 지나가는 사람, 아는 것만 아는 사람은 그것으로 끝나 버리게 됩니다. 이들도 예전에는 말씀으로 은혜를 받았고, 천국의 맛을 살짝 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냥 듣는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이것이면 충분하다고 여기고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된다고 하십니까?이들은 결국 있던 것마저 빼앗기게 됩니다. 비극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보아도 못보고 들어도 못 들어서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가 이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서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왜 말씀을 공부해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는 목적은 단순히 성경지식을 쌓고 교양을 넓혀 고상한 인간이 되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는 말씀을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하나님께로부터 고침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말씀공부를 통해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죄와 죄악 된 습관을 깨닫고 이를 회개함으로써 거듭나서 새 사람으로 변화되기 위함입니다. 인간적인 사람에서 영적으로 사람으로 변화되고, 세속적인 사람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고,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잘못 오해하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한다.”고 하시니 “하나님은 우리가 은혜 받는 것을 싫어하신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의 은혜를 주고자 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소원이 없는 사람,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에게 무작정 막 퍼주는 그런 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는 말씀이 같은 맥락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자 하는 소원이 없으면 들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들어도 모르게 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비밀이 있습니다. 패스워드가 필요합니다. 오직 말씀을 듣고자 하는 그 사람만이 말씀을 듣게 되고, 고침도 받고 천국도 누립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3장, 씨 뿌리는 자의 비유(18-23)
비유에서 씨는 천국 말씀이요, 복음입니다. 뿌려진 씨가 떨어진 곳은 각 사람의 마음 상태를 말합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은 예수님이요, 또 전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각 사람의 마음 상태는 네 가지입니다. 즉 예수님이 보실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네 가지 유형입니다.
먼저 길가는 길가와 같이 딱딱하게 굳어진 마음을 말합니다. 이들은 말씀을 들어도 전혀 반응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복음에 관해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복음이 이 사람에게 가면 다 튕겨져 나옵니다. 그래도 말씀을 들으니 언젠가는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지만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는 길가에 떨어진 씨를 새가 와서 먹어 버리듯이,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 만이 내 것이 됩니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 수포자들(수학 포기 자들)은 수학 시간에 선생님이 아무리 수학 문제를 칠판에 풀어 주어도, “저게 뭐냐?” 하며 관심 없이 지나가면 수학 문제를 못 푸는 것입니다. 왜죠? 원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리를 깨달으면 기초문제는 기본으로 풀고, 응용문제까지도 풀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말씀도 그렇습니다. 말씀을 깨달으면 내 것이 됩니다. 말씀을 깨달으면 그 말씀이 내게서 자라기 시작합니다. 인생의 어려운 문제도 말씀에 기초하여 해석하고, 인내하며 해결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고 그냥 남아 있으면, 언제쯤 깨닫겠지 할 수 있지만, 그냥 흘러가 버립니다. 이는 딱딱한 마음, 자기 생각과 자기 고집으로 굳어진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입니다. 이들은 좋은 땅에 가까이 있어서 때때로 말씀의 씨가 뿌려지는 기회를 얻습니다. 그러나 전혀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말씀이 떨어지는 좋은 기회를 날려 버림으로 천국도 얻지 못하고 끝나 버립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 밭을 가진 자의 비극입니다.
두 번째는 돌밭입니다. 돌밭의 특징은 흙이 얕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음 밭을 가진 사람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는다고 했습니다. 말씀에 대해서 상당히 반응이 빠릅니다. 금방 감동하고 금방 흥분하고, 금방 할렐루야 아멘을 외칩니다. 굉장히 신앙적이고 좋아 보이지만, 가만히 보면 이들은 감정적입니다. 마치 좋으면 마구 사드리는 쇼핑광처럼 즉흥적이고 계산 없이 행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 같지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자기 감정에 취해서 좋아하고 흥분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겉으로는 대단히 영적이고 말씀으로 사랑하는 신앙적인 사람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목자들은 이런 사람을 만나 말씀을 공부하고 나면 흥분합니다. 그동안의 모든 고생을 다 보상 받은 것처럼 기뻐합니다. “목자님, 저 일주일에 세 번씩 성경공부 하고 싶어요. 그리고 어떻게 하면 목자님처럼 성경을 가르치는 목자가 빨리 될 수 있을까요? 또 대학 졸업후, 저도 선교사로 나가고 싶어요.” 그러나 이 사람이 쉽게 흥분했던 얕은 마음의 한계는 곧 드러납니다. 이 사람 안에는 완악하고 고집스러운 어찌보면 길가보다도 더 단단한 암반층과 같은 마음이 쫙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를 만나면 싹 달라집니다. 예수 믿으면 죽는다는 정도의 엄청난 박해도 아닙니다. 조금 어려움만 와도 마음이 확 바뀝니다.
처음의 열정과 흥분은 식어버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버립니다. 이것에 대해, 예수님은 뿌리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뿌리가 무엇이겠습니까? 신앙의 뿌리는 내면의 깊은 의식에서 나오는 참된 신앙고백입니다. 또 죄에 대한 깊은 인식에서 나오는 죄사함의 은혜입니다. 또 하나님을 갈망하는 간절한 마음이요,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주를 따르고자 하는 결단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의 뿌리가 하나라도 있으면, 돌이 있어도 뚫고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런 뿌리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냥 감정적으로만 좋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감정적으로만 좋아만 하다가 그냥 싹이 났던 씨는 곧 말라버립니다. 좋아 보였던 믿음이 시들어 죽는 것은 금방입니다. 말라버린다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으로 끝나고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돌밭의 비극입니다.
세 번째 가시 떨기와 같은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은 한마디로 세상적인 일에 사로잡힌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세상일과 그 일에 대한 염려로 마음이 꽉 차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세상이요, 세상에서의 성공입니다. 주님 안에서의 소망과 기대보다는 세상에서 성공과 자기 영광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럴지라도 가시 떨기에 떨어진 씨가 그런대로 자라는 것처럼 이 사람도 그런대로 신앙생활 하며 자라갈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번듯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니 이제는 신앙적인 열매, 천국의 열매가 당연히 맺힐 것처럼 보입니다.
길가나 돌밭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비교하면 이 사람은 신앙우등생입니다. 미래의 꿈나무요, 소망의 일꾼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지나도 열매가 맺히질 않습니다. 뭔가 마음의 변화가 없고,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늘 그 모습, 그 가치관, 그 삶의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충분히 열매를 맺고, 신앙적인 가치관, 신앙적인 소망, 신앙적인 이야기를 하면 통할 것 같은데, 안 통합니다. 뭔가 대화를 하다보면, 막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사람을 곁에서 보고 있으면 참 안타깝습니다. 뭔가 한 끗만 바꾸면 될 것 같은데, 뭔가 뚫리기만 하면 될 것 같은데, 뭔가 답답한 가운데 그냥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겉모습은 신앙인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번뜻한 신앙인입니다. 이런 사람은 목자를 희망 고문하는 사람입니다. 기대는 잔뜩 같게 하지만, 어제나 오늘이나 큰 변화가 없습니다. 목자의 인내심을 훈련시킵니다. 뭐가 이 사람의 문제일까요? 왜 그럴까? 기도제목이 되고 연구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왜 이러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이 사람은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의 이런 상황을 이해하는 키워드는 ‘말씀이 막혀’입니다. 말씀이 막힌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포도나무를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으려면 열매 맺는데, 방해가 되는 곁가지들을 부지런히 가지치기를 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양분이 분산되지 않고 집중되어야만, 제대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말씀도 제대로 열매를 맺으려면 말씀의 힘이 내 안에서 집중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 말씀의 은혜와 감동이 제대로 힘을 발휘해야 만이 천국의 열매를 얻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일에 마음을 빼앗기다 보면, 이것이 막힙니다. 그래서 말씀의 힘이 여기저기로 분산되어 버립니다. 세상의 일 때문에 말씀의 은혜가 사라지고, 근심과 염려로 말씀이 주는 방향도 잊어버리고, 또 이런 저런 세상재미를 즐기다가 관리하지 않아서 다 사라져 버립니다. 결국 말씀을 듣지만 때론 은혜도 받는 것 같은데, 영적인 힘은 전혀 발휘하지 못해서 열매가 없습니다. 그 열매를 얻으려면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는데, 세상일에 마음을 다 빼앗겨서 그러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희망고문으로 끝이 납니다. 될 것 같은데 안 됩니다. 이 사람이 열매를 맺지 못하고 끝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겉으로는 번듯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 천국을 얻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을 얻었다고 자신은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세상을 버리지 않은 조건에서의 작은 선택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주인이 바뀌지 않는 가운데, 내가 누릴 수 있는 만큼만 누리고자 하는 구원이었습니다. 이게 가능할까요? 죄송하지만 그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6:24)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2:15)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재물, 천국과 세상을 동시에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땅이 곡식을 내려면 반드시 잡초를 제거하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듯이, 천국의 열매를 맺으려면 반드시 그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세상일에 빼앗긴 마음으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돌이켜서 천국을 얻고자 하는 사람만이 천국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 사람이 잠언기자가 말하는 가장 지혜로운 자입니다. 우리가 선택과 집중을 통해 천국의 열매를 맺는 지혜로운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기 때문에, 세상일을 안 할 수 없습니다. 해야 됩니다. 세상을 이기려면 연구도 하고 고민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 마음의 중심을 뺏기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밭과 같은 마음입니다. 23절을 읽겠습니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니라.”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입니다. 좋은 땅과 같은 마음 밭을 가진 사람은 길가와 같이 완악하지 않습니다. 고집스럽게 자기 생각을 주장하며 말씀을 튕겨내지 않습니다. 말씀을 잘 깨닫고 받아들입니다. 또 말씀 때문에 어려움이 닥칠지라도 또 부담이 되더라도, 받은 은혜를 붙잡고 잘 인내하며 견딤으로 신앙의 뿌리를 내립니다. 또 온갖 세상 일이 밀려와서 마음을 분산시킬 때에도 이를 제거하며 마음 밭을 가꿉니다. 결국 이 마음 밭에 떨어진 씨는 백배, 육십 배, 삼십 배라는 놀라운 수확을 거둡니다. 그럼 이런 풍성한 수확을 거두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이는 그가 말씀을 듣고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깨닫다’는 단어가 무려 5번이나 나옵니다. 이는 말씀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줍니다. 그러면 말씀을 깨닫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말씀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아는 것이요, 그렇기 때문에 말씀의 가치와 그 능력을 아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세상 어떤 것보다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고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결국 이 사람은 자신을 지킬 뿐만 아니라 말씀이 주는 은혜의 힘이 이 사람을 통해 나타나게 됩니다. 또한 말씀을 깨닫는 것은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써, 말씀을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론적으로 깨달아 알 수 없고, 말씀에 순종함으로써만이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6: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은 머리로는 도저히 깨달아 알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실생활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순종해 볼 때 체험적으로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 말씀이 내 안에 세력을 얻어 내 안에 역사하는 모든 어두움의 세력을 물리치고, 열매 맺는 생활을 하게 해 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100배, 60배, 30배라는 수확이 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유대인 경제사’라는 책을 보면 중세 시대인 14세기에, 유럽에 페스트가 퍼졌습니다. 그래서 유럽 인구의 1/3이 죽습니다. 종말과 같은 대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이 죽었는데 연구해보니,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세균에 대한 무지입니다. 쥐가 바이러스를 옮긴다는 지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영양실조 때문입니다. 왜 영양실조가 심했는가 또 연구해보니, 그 당시 밭에 뿌린 수확량이, 뿌린 씨에 겨우 3-4배 정도만 수확하여 거둘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가운데 장원 제도라, 귀족이 빼앗아 가고, 사제들이 빼앗아 가고 나면, 농부들은 먹을 것이 없어 기아에 허덕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늘어진 벼이삭을 보면서 100배, 60배, 30배라는 것이 익숙한데, 이것은 그동안 품종계량하고 비료도 주고 병충해 예방약도 뿌려서 얻은 결과이지 보통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100배를 말씀합니다. 또 60배를 말씀합니다. 못해도 30배를 거둔다고 하십니다. 아무리 못해도 보통 수확의 100배를 거두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수확이 되면 대박입니다. 주식에서 10%, 20%만 올라도 대단한 수익이라고 말하는데, 예수님은 100배, 60배, 30배입니다. 이것은 말씀과 복음의 씨가 뿌려진 천국의 수확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만큼 우리의 마음 밭에 뿌려진 말씀, 또 복음은 풍성한 은혜의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농사를 짓는 것보다, 주식보다, 세상의 그 어떤 일보다, 더 크고 놀라운 보상이 바로 내 마음 밭에 뿌려진 말씀에 있고 복음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 마음 밭을 가꾸는 것에 집중할 때, 풍성한 천국의 비밀을 누립니다. 얼마든지 말씀을 통해서만 주의 풍성한 은혜, 그 어디서도 받을 수 없는 하나님의 보상을 받으며 살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뿌려진 씨가 열매를 맺는 것은 네 중의 하나였습니다.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떨기 밭은 씨가 떨어졌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오직 좋은 마음 밭에 떨어진 경우에만 열매를 얻었습니다. 그럼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씨를 뿌릴 때에 좋은 밭에만 뿌리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뿌리고 전도를 할 때에도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사람만 찾아서 뿌리면 되지 않을까요? 그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또 그런 마음 때문에 사실 전도자는 꽤가 생겨 관상쟁이가 됩니다. 이 사람의 마음 밭이 어떨까 자꾸 살피게 되고 또 그러다보면 잘 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 곳에서 실패할지라도 한곳에서 제대로 열매를 맺기만 하면 그 실패를 보상하고도 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사실 실패를 많이 하셨습니다. 열심히 천국복음을 전파하셨지만, 그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습니다. 심지어 예수님 제자 중에 유다와 같은 배반자가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소수의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말씀을 알고자 하고 듣고자 했습니다. 이들은 천국의 비밀을 얻었고, 또 말씀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랐습니다. 세상의 영광을 바라는 마음 때문에 흔들리기도 했지만 결국 회개하고 돌이켜서 예수님이 뿌린 복음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것도 100배, 60배, 30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았습니다. 무엇보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하신 일을 배우고 나가서 복음의 씨를 뿌림으로 이 복음이 계속 열매를 맺고 자라서 전 세계에 퍼졌습니다. 오늘 우리에게까지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도 이 사람의 마음 밭이 어떤 상태인가? 체크하고 관상을 보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그가 듣든지 아니 듣든지 말씀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뿌려진 씨가 하나라도 자라면 열매를 맺습니다. 100배, 60배, 30배의 풍성한 보상을 얻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먼저 좋은 마음 밭이 되어서 말씀을 듣고 깨닫고자 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 안에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내가 열매를 맛 봐야, 그 열매를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타고난 좋은 마음 밭이 있을까요? 말씀을 좀 잘 깨닫고 잘 반응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금방 열매 맺는 것이 아닙니다. 또 처음에는 말씀을 잘 깨닫지 못해도, 계속해서 말씀을 공부하다보면 깨닫는 순간이 옵니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매주 말씀을 차곡차곡 들을 수 있습니다. 이게 참 좋은 기회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너무나 단순하고 우직한 방법입니다. 자칫하면 다 아는 뻔한 이야기를 듣고 또 듣고 또 듣는 것으로 흘러갈 수 있습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마태복음에도 나오고 마가복음에도 나옵니다. 그러다보니 다 안다는 마음으로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아는 것만 아는 것입니다. 다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말씀공부도 안하고, 주일도 그냥 지나가다보면 그냥 한 주일 공치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길가가 되고 싶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남은 말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음이 세상에 가 있게 되면 그냥 흘러가는 것입니다. 자칫 하면 오늘 말씀처럼 열매를 맺지 못하는 그런 마음으로 위기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게 말씀의 씨가 뿌려질 수 있도록 마음의 밭을 준비해야 합니다. 말씀을 그냥 주일에 듣는 것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깨닫고 받아들이고자 기도하고 애써야 합니다. 그리고 내 마음 밭을 부지런히 좋은 마음 밭으로 일구어야 합니다. 마태복음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열매’를 말합니다. 그 열매는 다른 것이 아니라, 구원이요, 천국입니다. 그 열매는 믿습니다! 하는 것으로 그냥 맺혀지지 않는다는 것을 예수님은 오늘 비유에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내 마음 밭을 끊임없이 가꾸기를 바랍니다. 말씀이 내게 주어졌을 때, 소홀히 하지 않고 잘 가꿀 때, 주님이 약속하신 100배, 60배, 30배라는 풍성한 결실이 있음을 믿고, 이 마음 밭을 잘 가꿀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천국의 비밀을 풍성하게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구원의 복음이 희박한 시대입니다. 듣기 좋은 말, 그냥 흘러가기 좋은 말로 흘러갈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만이 나를 살리고, 복음을 주고, 천국을 준다는 분명한 확신 가운데, 내 마음에 말씀을 간직한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