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쌓은 커리어
차한비
욕실 벽에 붙인 고리가 시원찮았다. 끈끈이의 접착력이 약해졌는지 수건을 자꾸 떨어뜨리고 자기도 밑으로 고꾸라졌다. 평소에도 고리와 소통했던 사람인 양 속으로 호통을 쳤다. ‘야, 수건 한 장이 무거우면 얼마나 무겁다고. 고리면 고리답게 감당을 좀 해봐라!’ 그렇게 갖가지 핑계를 대며 젖은 수건으로 젖은 몸을 닦는 바보 같은 짓을 며칠간 반복했다. 생활용품 매장을 찾아간 것은 입 밖으로 괴성을 내지른 다음이었다. 그 무렵 부엌 싱크대 서랍에 매달아 놓은 고리까지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는데, 설거지하다가 바닥에 떨어진 고리를 밟고 말았던 것이다. 비눗물 묻은 손으로 발을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적어도 일 분쯤 고리를 노려보며 씩씩댔고 삼십 분 후에는 가게 문 앞에서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나는 최고의 고리를 찾아낼 작정이었다. 강하고, 끈기 있고, 영특하고, 상냥하고, 훌륭하고, 아무튼 다 잘하고 좋은 고리. 가장 센 고리.
매대에 가지런히 진열된 다용도 후크를 바라보며 정말 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기와 모양, 색이 달라도 쓰임은 같다. 욕실에든 부엌에든 붙이면 되고 수건이든 행주든 걸면 된다. 옷을 걸면 옷걸이라고 부르고 모자를 걸면 모자걸이라고 칭한다. 내가 그렇다. 어딘가에 거푸 붙고 뭔가를 계속 걸어서 때마다 새 직함을 얻는다. 기자였다가 평론가도 되고, 심사위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가 수강생 명단을 펼쳐 출석을 부른다. 인터뷰를 명목으로 누군가와 내밀한 대화를 나누는가 하면, 무대에 올라가서 마이크 잡고 사회를 보기도 한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식이다. 어느 날엔 다용도 후크로 기능하는 나의 유연성을 칭찬한다. “뭐든 다 할 수 있어!” 하지만 실은 능력을 의심하고 부족한 전문성을 비난하는 데에 훨씬 많은 시간을 쓴다.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어!”
내가 대체 뭘 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다는 넋두리는 오래된 습관이다. 회사에 다닐 때도, 영화 일을 시작하고 나서도,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면서도, 프리랜서가 된 다음에도 그 말을 입가에 달고 다녔다. 직업이 뭐냐는 질문만큼 난처한 것도 없었다. ‘그냥 이것저것 하는 사람’은 적절하지도, 분명하지도 않은 대답이었다. 그건 무례함으로 읽혀 상대를 언짢게 만들거나 혹은 또 다른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딱 떨어지는 답을 원했다. 나도 우물쭈물하며 입술을 잘근거리는 대신에, 모서리 반듯하게 깎은 명함을 꺼내 떡하니 내밀고 싶었다. 돌고 도는 고민에서 잠시나마 풀려난 것은 뜻밖에도 스페인어 덕분이었다.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질문을 받자 간결한 답이 튀어나왔다.
“En qué trabajas?” 당신은 어떤 일을 합니까?
“Soy periodista de cine.” 저는 영화 기자입니다.
일이 없어도 너무 없던 어느 겨울이었다. <로마>(알폰소 쿠아론, 2018)를 보다가 시작한 지 십 분도 안 돼서 울음을 터뜨렸다. 독재 정부에 대항하여 민주화 운동의 바람이 거세게 불던 1970년대 초 멕시코, 클레오(얄리차 아파리시오)는 한 중산층 가족의 가정부로 일하며 네 아이를 돌본다. 화창한 오후, 그녀가 옥상에서 빨래하는 동안 주인댁 형제가 작은 다툼을 벌인다. 형들이 같이 안 놀겠다며 떠나자 혼자 남은 막내 페페는 그 자리에 드러눕는다. 걱정됐는지 클레오가 슬그머니 곁으로 다가가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소년은 죽었다고 답한다. 자신은 죽어서 말도 못 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그러자 클레오는 맞은편에 가만히 따라 눕는다. 어리둥절해진 페페는 클레오의 질문을 연신 되풀이한다. “뭐 하는 거야? 얘기해줘.” 클레오는 페페의 답을 따라 한다. “말할 수 없어. 나도 죽었거든.” 눈을 감고 누워 있던 클레오가 나지막이 한마디를 덧붙인다. “페페, 죽어 있는 것도 괜찮다.”
그 대사가 귓가에 맴돌아서 원어 자막을 확인했다. 실제 대사는 “Me gusta estar muerta”로, 직역하면 “난 죽어 있기를 좋아해”였다. 메 구스따 에스따르 무에르따. 소리 나는 대로 문장을 입안에서 굴려 보다가 집 근처 스페인어 학원에 등록했다. 수강생은 열 명 남짓했고 문법과 회화 강의가 반씩 이뤄졌다. 수업 막바지에 다다르면 선생은 학생들이 당일 학습한 단어와 예문을 써먹을 수 있도록 단순한 질문을 건넸다. 이름, 국적, 나이에 이어 그날은 직업이었다. 누구는 대학생이었고 또 누구는 간호사였다. 애초 가진 언어가 미천하기에 우리가 내뱉는 문장은 극도로 단순해졌다. 나라고 다르지 않았다. 한국어를 사용했다면 돌려 말하거나 부연 설명이 석 줄쯤 이어졌을 텐데 스페인어로는 그럴 수가 없었다. 몇 초간 망설인 끝에 영화 기자라는 명료한 답을 내놓았다. 소속된 매체가 없는데 나를 기자라고 해도 되나? 기자의 업무 중에 아주 일부만 소화하는데도? 여전히 의문은 피어났지만 교과서에 적힌 단어는 한정적이었고, 내게 그나마 어울리는 단어는 그거였다.
맡은 일의 종류가 늘어나도 결국 공통 키워드는 영화이고,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일은 글쓰기다. 어쩌다 영화 글을 쓰게 됐냐는 질문을 받으면 농담처럼 “영화제 자원활동가 출신”이라고 답한다. 영 틀린 말은 아니다. 영화와 글쓰기를 전문적으로 배운 적은 없다. 관련한 정규 교육기관에 진학하지 않았고, 대학에서는 역사와 미술사, 여성학 수업으로 학점을 채웠다. 물론 밑천을 마련해준 곳이야 있다. 수유너머, 문지문화원 사이, 자유인문캠프, 다중지성의 정원, 미디액트 등 학교 밖 기관과 학문 공동체, 세미나를 기웃거렸다. 이름마저 생소한 책과 영화를 마주하며 신이 났다. 특히 영화는 순식간에 내가 사는 풍경을 바꿔 놓았다. 몰랐던, 혹은 몰라도 됐기에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이야기와 이미지가 와르르 쏟아졌다. 어느 날엔 발밑이 다 꺼지는 듯했는데 어떤 영화는 머리 위에 지붕을 둘러 주기도 했다.
자극과 위안을 골고루 얻으며 배움을 만끽했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세계를 탐험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진로 결정을 미루고 또 미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 영화제를 통해 ‘영화 일’을 처음 경험했다. 2014년 초여름,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아직 신촌에서 열리던 시절. 자원활동가 모집 공고는 그해 봄에 나왔다. 매일 뉴스로 세월호 참사를 지켜보며 어쩔 줄 모르는 상태였고, 1년간의 계약직을 마치고 나서 어영부영 백수가 된 참이기도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저 마음 붙일 곳이 필요했던 것 같은데 자원활동가 명찰을 걸고 돌아다니는 시간은 예상보다 즐거웠다. 그전까지 헌팅의 메카 정도로 여겼던 아트레온 극장에 출석 도장을 찍으며 추억이 쌓였고, 행사 스케치에 나섰다가 피리 부는 사나이 뒤를 쫓는 아이마냥 야마가타 트윅스터의 꽁무니를 따라서 신촌 기차역을 누볐다. 영화가 끝나면 노트북과 메모장을 챙겨 구석에 틀어박혔다. 방금 보고 들은 것을 곱씹고 기록하며 새하얀 화면을 채우는 일이 왠지 마음에 들었다.
영화감독과 얼굴 맞대고 대화를 나눈 것도 그때가 처음이다. 데뷔작 <반짝이는 박수 소리>(2015)를 만든 이길보라 감독이 나의 첫 번째 인터뷰이였다. 당시 감독이 재학 중인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만났다. 나무가 푸르게 우거진 장소에 들어서자 상쾌함과 긴장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영화제 폐막 후 자원활동가 후기에 이렇게 썼다. “남아도는 시간을 앞세워 데일리 팀에 들어오긴 했는데, 막상 인터뷰가 다가오자 겁이 났습니다. 첫 인터뷰는 지난해 옥랑문화상을 수상한 다큐멘터리 <반짝이는 박수 소리>의 이길보라 감독이었어요. 질문지를 들고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마침 계단에서 올라오던 감독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활짝 웃으며 “안녕하세요!” 하고 먼저 인사를 건네더군요.” 떨림을 감추려고 애썼던 기억이 난다. 인터뷰를 이미 수십 번은 해본 사람처럼 능숙해 보였으면, 상대가 속내를 털어놓고 싶을 정도로 멋지고 믿을 만해 보였으면 했다.
인터뷰는 생각보다 복잡한 행위였다. 질의응답이라는 단순한 구조 속에 동경, 질투, 응원, 공감, 의심 등이 은밀하게 오갔다. 그러니까 인터뷰를 하면 인터뷰이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나보다 그들을 더 좋아했다. 부끄러운 탓에 영화제 후기를 한동안 찾아보지 않다가 최근에 다시 읽고 놀랐다. “기사에서 제 이름 세 글자를 찾는 재미도 쏠쏠했지만, 지난주에 만난 감독과 어제 만난 배우가 했던 말들이 또박또박 쓰여 있는 걸 보는 기쁨은 더 컸습니다.” 자그마치 십 년 전에 했던 말인데, 뚜렷한 목표도 목적도 없이 얼렁뚱땅 흘러가는 대로 왔다고 여겼는데. 우습게도 지금 나는 십 년 전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다용도 후크를 보며 나 같다고 생각한 데엔 비관과 자조만 넘실대지는 않는다. 애매모호한 위치가 싫지만 크기와 모양, 색을 바꾸며 고리가 되는 일은 남모를 만족 또한 분명히 안긴다.
아무튼 다 잘하고 좋은 고리. 가장 센 고리. 여기서 십 년이 더 흐른다 해도 어쩌면 그것이 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수시로 접착력이 약해지거나 교체할 시기를 늦추다가 괴로움을 자처할지도. 다만, 떨어질지언정 붙어야 할 때는 잘 붙고 싶다. 어떤 귀와 코에 걸리는지 살피며 내 용도를 알아차리면 좋겠다. 영화를 보고, 대화를 나누고, 글을 쓰는 과정은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고리를 만들어 서로에게 거는 일 아닐까. 페페와 클레오가 그러했듯 뭉근한 죽음을 공유하며 연결되는 경험 아닐까. 내 일과 직함에 겁이 날 때면 관객의 자리로 돌아간다. 모든 것이 시작된 장소, 극장으로 가서 스크린을 보호하듯 눈앞에 진을 친 어깨들을 바라본다. 자발적으로 갇혀 침묵을 지키는 외로운 사람들. 어둠 속에서 빛을 보려 하는 고집 센 사람들. 몇 번을 실망해도 다시 기대하는 욕심 많은 사람들. 끝내 익명으로 남는 낯선 사람들. 영화에 기꺼이 마음을 내어주는 듯하지만 다들 그때뿐이다. 아무리 길어봤자 영원한 영화는 없고, 불이 켜지면 관객은 가차 없이 밀실을 벗어나 흩어진다. 유령처럼 자취를 감추는 이들 틈에서 나는 중력에 버틸 힘을 되찾는다. 영화든 사람이든 조금은 붙잡고 싶어져서, 내게 당신을 걸어두고 함께 죽어 보자고 청한다. 잠시 죽어 있는 것도 괜찮다고 느낄 만한, 기댈 만한 고리가 되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