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 2022년 1월 19일 날씨: 눈/-7.7~-2.7도
★참석자(8명): 이정 강영구, 운암 김종철, 박평순, 소종섭 대장, 보리송 송명수,
정상범 회장, 백사 조운제, 후묵 채희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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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4 상일역 8번출구 출발
10:15 들머리
10:30 둔덕 인증샷(눈 많이내림)
10:35~43 팔각정자(간식)
10:49 숲길교
11:05 정자
11:11 동아아파트사거리
11:16 호일농원 입구(멋진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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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7~46 일자산기우회 움막(간식)
12:20 체력단련장
12:23 일자산 이집 훈교비
12:34 둔굴(전망대)
12:47 대순진리회서부회관 뒤
13:02 서하남IC입구교차로
13:12 무봉리순대집(장사 접은)
13:22 방구리순대집
http://rblr.co/0bg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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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산 기우회
소회장은 조경집경내를 지나 등로가 아닌 길없는 숲으로 안내한다. 역시 이정은 의아한 표정. 눈도 계속 쌓이고 해서 올라가는데 미끄러질까 불안하다. 능선에 오르니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 허름한 비닐집이 나온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 바둑을 두는 곳이란다.
이 집은 무허가로 원래 사람이 살았는데 쫓아내고 나서 방치했던 모양이다. 동네사람들이 바둑판을 가져와 두게 된 것이다. 그런데 지자체에서 철거하겠다고 하니까 100여명이 연판장을 돌리며 이것 철거하면 그에 대한 불이익은 알아서 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더니 표떨어지는 소리 때문에 그냥 놔둔거란다. 보이는 바둑판만 6개. 걸려있는 공지문에는 연회비 5만원, 대전후 바둑알, 커피봉지 떨어진 것 주워놓으란다. 오늘은 추워서 아직 나오진 않은 모양이다. 11:35분
또한번의 간식시간
비닐속으로 들어갔더니 의자도 있고 탁자도 있다. 배낭과 모자의 눈을 털고 앉았다. 정대장이 작은 꿀호떡, 평순교장이 큰 꿀호떡, 명수교장은 모찌(찹싹떡)를 내놓는다. 다들 맛이 있다. 남는 거 세일하느라 정회장과 평순교장이 내민다.
눈을 맞은 카메라가 맛이 갔다. 작동이 잘 안된다. 아예 배낭에 집어넣었다.
소 회장은 움막 반대편으로 안내한다. 역시 길 없는 길같다. 드디어 사람들이 다니는 등로가나온다. 이정이 안심을 한다. 개인땅인지 오른쪽으로 철조망이 계속 쳐져있다. 대모산, 구룡산 능선같다. 이정은 동쪽에도 조금 내려가면 철조망이 쳐져 있다고 말한다.
짤린 나무위와 통나무벤치에 소복하게 쌓여있는 하얀 눈. 포근하면서도 마음과 몸의 찌거기를 씻어내주는 것 같이 기분이 좋다.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빠르다. 탐방로라서 죽 따라가면 된다.
눈내리는데 좌측통행 불만
한 젊은 여성이 우측통행을 모르냐고 낮은목소리로 한마디 하는게 들린다. 눈내리는 날 탐방객도 많지 않은 평일 트레킹로에서 나올만한 얘기는 아닌 것 같다.
운암이 홀로서 서 있다. 길가 판에 쓰인 <눈부신 날> 시를 읽고 있는 것이다. 마눌님에 대한 색각을 고쳐먹어야겠단다.
눈부신 날/이수동
나는 그동안 그대가
여인인 줄만 알고
살았는데
꽃이었구나
눈부신 꽃이었구나
해맞이 동산에 이집의 훈교비
일자산(一字山)안내판이 있는 해맞이동산. 여러번 다닌터라 별로 관심이 없이 지나간다. 필자와 정회장은 사진 한 장. 강동구와 하남시의 경계인 낮은 야산(134m). 고려말 문신 둔촌(遁村) 이집(李集, 1327~87)이 잠시 신돈을 피해 은둔한 암굴이 있고 그의 주옥같은 훈교비(訓敎碑)가 서있다.
둔촌의 훈교비는 명문
일자산 해맞이동산에 서 있는 훈교비를 보면 이집의 독서와 재산상속에 대한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특히 650여년 전 들려준 두편의 훈교시가 스마트폰 시대를 살면서 독서가 멀어지고 부동산에 대한 집착이 강한 많은 현대인들에게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정훈(庭訓)임을 말해준다.
讀書可以 悅親心(독서가이 열친심)
勉爾孜孜 惜寸陰(면이자자 석촌음)
老矣無能 徒自悔(노의무능 도자회)
頭邊歲月 苦駸駸(두변세월 고침침)
독서는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하느니
시간을 아껴서 부지런히 공부하여라
늙어서 무능하면 공연한 후회만 하느니
머리맡 세월은 멈추지 않고 화살 같네.
遺子滿彎金(유자만영금)
不如敎一經(불여교일경)
此言雖惔薄(차언수담박)
爲爾告丁寧(위이고정녕)
자손 앞에 금을 광주리로 준다하나
경서 한 권 가르침만 못하느니
이 말은 비록, 쉬운 말이나
너희들을 위하여 간곡히 일러두네
둔촌과 신돈
둔촌은 일화도 많고 형제와 후손들이 번성해 광주(廣州)이씨의 키맨으로 되어있다. 조선 왕가였던 전주이씨, 두 번째로 큰 경주이씨, 세 번째 성주이씨 다음으로 큰 이씨 가문이다. 1347년 약관의 나이에 문과에 급제한 이원령(元齡)은 개경 관직에 있었다. 그러나 1368년(공민왕 17년) 왕의 측근 신돈(辛旽)에 반기를 들다 미움을 받아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그래서 병든 부친을 업고 경북 영천으로 피신하려고 이곳을 지나다가 석굴이 있어 잠시 숨어지내게 되었다. 그게 바로 둔굴이고 후에 호[遁村]로 썼으며 지금 이곳 대단위 아파트단지인 둔촌동의 이름으로 되살아났다. 둔촌1동은 머지 않아 재건축되면 국내 역대 최다단지로 지상 35층 85개 동, 총 1만2032가구가 들어선다.
둔촌집터 표석은 9호선 둔촌오류역 2번출구에 나오면 바로 보인다. 둔골, 밖둔굴, 안둔굴, 굴바위 등의 지명이 남아있다.
관포지교의 이집과 최원도
효성이 지극한 이집은 부친을 업고 고시 동기생으로 역시 신돈으로부터 화를 면하기 위해 영천 고향으로 낙향한 최원도(崔元道)의 집으로 피난길을 떠난다. 최원도는 주위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문전박대하고 저녁에 다시 불러 벽장에 이집과 그의 부친을 숨겨두고 거두웠다는 관포지교(管鮑之交)와 같은 아름다운 우정의 얘기가 내려온다.
부친 이당(李唐)은 영천에서 1년도 채 안돼 사망하고 인근에 무덤을 썼으며 지금도 최원도 가문과 함께 음력 10월 10일 합동 제를 지내준다고 한다. 숨어 산 4년만인 1371년 신돈이 주살되자 이집은 개경으로 올라와 벼슬을 하지만 곧 사직하고 이름과 호를 집(集)과 둔촌(遁村)으로 바꾸고 여주 천녕현(川寧縣)에서 자연과 벗삼아 시와 학문을 하며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수재 가문
특히 이집은 5형제중 두 번째로 모두 고려말기 과거에 합격한 수재 집안. 둔촌도 아들셋(지직, 지강, 지유)을 두었는데 이들 셋도 고려말 모두 과거에 급제했으며, 큰아들 이지직의 아들 3형제와 8명의 손자가 연이어 과거에 급제함으로써 그의 가문이 조선전기까지 얼마나 대단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성남 하대원동에 이집묘역
성남시 하대원동에 있는 이집묘역에는 둔촌을 위시하여 그의 후손들이 자리잡고 있다. 광주이씨 중시조인 이당묘는 영천에 있다. 1998년 성남시의 재정지원으로 하대원동 둔촌 이집묘역 아래 재실과 고옥을 복원한 사당 <추모재>를 건립하고 이집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한음 이덕형은 이집 8대손
임진왜란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명군을 끌어들인 한음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은 영의정을 지낸 명재상으로 이집의 8대손이며 경주김씨 백사 이항복(李恒福, 1556~1618)과는 ‘오성과 한음’이라는 아름다운 우정의 얘기를 만들어내 선조 이집과 최원도를 연상하게 한다.
현대에 들어서도 유명인 많아
광주이씨는 현대에도 많은 인물을 배출하고 있다. 이윤재 국어학자, 한국 최초의 여성변호사 이태영여사, 정치깡패 이정재, 전 국회의원으로 이중재와 그의 아들 이종구, 이경재 전 국회의원, 탈렌트 이순재, 물리학자 이휘소, 이수성 전 국무총리, 이용훈 전 대법원장, 이명재 전 검찰총장과 그의 동생 이정재 전 금융감독위원장, 이용근 전 금융감독위원장, 이택수 전 경찰청장, 이용호 국회의원, 이상옥 전 외교부장관, 이승엽 야구선수, 이준석 국민의힘당 대표, 이윤석 개그맨, 걸그룹 멤버 이효리 등등...
구암서원(龜巖書院)터도 방문해볼만
강동구 암사동(광주 암사 강상) 구리암사대교 동쪽 언덕에 구암서원(龜巖書院)터가 있다. 1669년 둔촌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이집을 추모하기 위해 서원을 세웠고 숙종은 1697년 구암서원이라는 사액을 내렸으나 1870년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어없애 터만 남아 무심한 한강을 내려다보고 있다.
가족공원 일자산
일자산 능선 서쪽자락에는 공동묘지도 있다. 서쪽 강동구쪽에는 일자산 허브천문공원, 해맞이 공원, 강동그린웨이 가족캠핑장이 있어 인근 주민들이 휴식공간이자 가족공원노릇을 하고 있다.
다시 부지런히 쫓아갔다. 철조망에는 함평이씨 함성군파종회가우측으로 가라고 알림표지판을 걸어놓았다. 소회장은 왼쪽으로 안내하다 길이 제대로 없고 눈도 쌓이고 있어 다시 나와 안내판대로 방향을 바꾸었다. 아무래도 경사가 심해 명수교장으로부터 스틱하나를 빌려 짚었다.
오른쪽은 웅장한 한옥 대순진리회 서부회관, 왼쪽 멀리에는 함평이씨 함성군파조 사우(정충사)가 말끔하게 보인다. 2020년 5월 세운 것. 소 회장은 그 옆구리로 내려오고 싶었었던 모양이었다. 12:45
문닫은 무봉일순대국집
이제는 밥집으로 향해간다. 소회장은 자주 가는 순대국집으로 안내하겠단다. 서하남IC입구교차로에서 남쪽으로 횡단해 올림픽기자촌아파트 중심에서 성내천과 만나는 감이천을 가로질러 무봉리순대국집까지 왔다. 내심 이 밥집인가 했는데 플래카드 글이 수상하다. “그동안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그만두었다는 얘기다. 이름도 멋진데... 코로나를 넘지못한 것인가, 서비스정신과 경쟁력을 상실한 것인가?
부대찌개 식자재 대주는 회사
소회장은 도로건너에는 인도도 넓은데 이쪽 눈쌓인 좁은 인도를 따라 계속 앞서 간다. 그러더니 왼쪽 주택가로 들어간다. 한참 들어가더니 헷갈리는 모양이다. 멈칫한다. 이번에는 창고가 나온다. ‘부대찌개 재료, 식자재 일절’ 우리가 많이 먹는 부대찌개 식재료도 도소매로 취급하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상일동 동아아파트앞 교차로에서는 식자재도매상 건물에 국내 요리사가 200만명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는데 이곳에서는 부대찌개도 공급하는 회사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이어서 커브를 돌아나서니 대로가 나오고 바로 순대국집이 나온다. 소회장이 자주 오는 밥집.이름도 야릇한 <방구리토종순대국>. 재빨리 들어가 모자, 배낭에 쌓인 눈을 털었다. 손님들이 큰 홀을 많이 메꾸었지만 창가로 자리를 비워두고있었다. 옛날에는 상호가 무봉리 순대집이었다가 바뀐거라고 하니까 운암이 수긍. 그런데 2006년 1년 음식점 허가를 받은 곳.
토종순대모둠(15,000원)를 먼저 주문한다. 실가는데 바늘마냥 막걸리도 당연히 따라나온다. 1시도 한참 넘었서까지 눈길을 걸었으니 배도 출출하다. 순대와 막걸리는 천상연분. 다 같이 ‘건강을 위하여!’ 평순은 임플란트 때문에 마시면 안된단다. 인내심 테스트장이다. 운암, 정회장의 잔은 유심히 봐아한다. 비어있으면 혼난다. 순대도 막걸리도 정신없이 들어간다. 그러고도 순대국(8,000원)을 한 그릇씩 주문해놓은 것이다. 물릴수도 없다. 그런데 다들 뚝딱 해치운다. 배터짐 경고 발령. 소회장이 스폰. 감사.
눈 맞으며 걷는 산길 트레킹... 뒤풀이 순대 및 순대국 아주 굿. 참여한 모두에게 감사!!! 홀로서 3호선 오금역 찾아가라고 홀로 떨어뜨려.... 어떻게 멀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