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물 예찬 / 김상영
고추는 가을을 탄다. 서늘한 기운이 살짝이라도 스치면 늦장을 부린다. 사과는 가을빛이 아쉬워 때깔 내기에 바쁘고, 벼는 이삭 등쌀에 지레 고개를 숙인다. 서리태도 서리가 겁나 서둘러 여무는 데 고추는 투정한다. 얼른 베고 마늘이나 심는 게 수다. 마음이 바빠진 나는 큰 가위를 들고 고랑에 들어앉았다.
고추 수확 수레는 참 잘 만들었다. 장의자처럼 생긴 알루미늄 구조물에 바퀴를 달았다. 따끔한 가을빛을 파라솔로 펼쳐 막고서 나지막이 앉으니 아늑하였다. 가재 뒷걸음치듯 수레를 뒤로 슬슬 밀면서 좌우로 번갈아 가며 가위질했다. 아가리를 한껏 벌려 저를 요절내려 다가들 때 고추 줄기는 얼마나 겁이 났을까.
1,600포기 고추밭이다. 아내와 내가 종일 따야 하는 넓이다. 그 버겁던 고추밭을 두어 시간 만에 결딴냈다. 고추 줄기가 작년 굵기만 못해서다. 인터넷 농사 전문가 말만 믿고 거름보다 비료를 많이 친 탓이다. 그 양반의 확신에 찬 어조에 귀가 솔깃해 파격을 행한 내 잘못이다.
“거름은 늦어도 그전 해 11월까지 뿌리소, 고추 모종 옮겨 심기가 임박해서 넣으면 오히려 해가 미칩니다. 분해가 느리기 때문에 가스가 생겨 생장에 지장을 줄 뿐이오.”
“대신에 300평 한 마지기에 복합 2포, 요소 1포, 용성인비 2포를 허옇게 치소. 내 말대로만 하면 엄청나게 열려요. 그러면 감당을 못해서 고추를 떨어뜨리려 할 텐데, 해조 추출물을 두어 번 뿌리면 까딱없습니다.”
“당신은 귀가 얇아 탈이야.”
자르기가 수월하더란 내 얘기에 아내가 또 트집을 잡는다. 작년보다 이백 근은 적게 땄다고 노래를 부르던 아내였다. 볼멘소리를 쏟아내도 할 말이 없다.
고추 줄기를 자른 지 스무 날이 훌쩍 지났다. 새파랗던 패기는 온데간데없고, 지주대에 비닐 끈으로 묶인 채 후줄근하다. 잎이 말라 거지반 떨어지고, 익을까 말까 어정쩡하던 고추가 붉어졌다. 바닷가 과메기처럼 숙성된 것이다. 곧 비가 들이닥친다고 한다. 아내가 이웃 마늘 심기에 품앗이 가고 없으니 나 홀로 딴다.
고추밭이 온통 벌게서 수량이 많을 성싶더니 한물 때의 반의반도 안 된다. 그래도 꼭지를 젖혀 따고 눌어붙은 잎을 털어낸 고추가 포대기에 소복해져 간다.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던 어느 시의 또 다른 의미가 고추에 있다. 농익은 녀석들은 더욱 고추답고, 설익은 놈들도 새초롬하게 이쁘다. 나박김치에 썰어 넣는다며 푸른 기가 도는 고추도 알뜰히 따라던 아내의 당부가 생생하다. 엄벙덤벙 건너 딸 수 없다. 여자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 생긴단 말이 고추잠자리처럼 뱅뱅 돈다.
마을 사람들이 사과나 복숭아 농사를 주로 하는 요즘이다. 고추 농사는 일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숫제 접거나 텃밭 정도만 짓는다. 그나마 바쁜 농가는 일찌감치 갈아엎기 예사니 귀하다면 귀한 끝물 고추다. 전업농가가 아니어서 한가한 우리 밭은 해마다 인기다. 이웃들이 끝물로 고추지를 담거나 반찬거리로 풋고추조차 살뜰히 따 간다.
고추는 보름 주기로 약을 친다. 첫물에서 한물에 이르기까지 건너뛰면 병이 든다. 벌레가 파먹어 물러진 고추가 출출 흘러내리고, 곰보딱지처럼 탄저가 기승을 부린다. 먹어서 해가 없어야 하고 방제도 필수니 약 기운이 빠질 즈음 고추를 따서 씻는 것으로 타협한다. 약은 일주일이면 분해 소멸하건만 그래도 찝찝한 건 순전히 기분 문제다.
하지만 끝물 고추는 안심해도 좋다. 약 끊은 지 달포나 지났으니 그야말로 친환경이다. 더구나 오지게 숙성되었으니 단맛이 우러날 거다. 붉은 것들을 골라 전기건조기에 말려 깔끔하고 앙증맞다. 아기 볼 마냥 볼그스레하니 김장용으로 적합하겠다. 한물에 밑지지 않을 품세다.
첫물 고추가 좋을 것 같지만, 아닌 듯하다. 말려놓으면 거무스름하게 색이 변하니 희한한 현상이다. 건조기 온도를 적정 보다 낮춰도 매한가진데, 겪어보지 않고선 모를 일이다. 팔기에 뭣하니 형제들에게 나눈다. 벼 농사꾼은 싸라기만 먹는다더니 고추가 그 짝이다. 끝물은 우리 차지가 된다.
물정 모르던 한창 땐 첫물처럼 살았다. 노름판에 붙어 밤을 새운 바람에 아내의 속을 숯검정으로 만들었다. 오토바이 사고를 내서 심장을 벌렁거리게도 했다. 적금을 해약해서 차를 살 때는 아내의 한숨을 짐짓 모른 체했다. 몹쓸 짓을 한 거다.
얼마 전에 바지 단을 몇 개나 줄였다. 바지춤을 추슬러 혁대를 죈들 임시방편에 불과할 뿐 불편해서다. 바지가 늘어날 턱이 없고 보면 아랫도리가 졸아든 게 분명하다. 나잇살이나 잡쉈으니 엄벙덤벙 딛고 살지 마쇼,라고 바지가 말한다. 그러게, 이제 철들 때도 됐다.
객기를 죽이고 차분해지는데 글쓰기만 한 처방이 또 있으랴. 수필 삼매三昧에 빠지는 건 고추 고랑에 앉아 밥때를 잊은 때와 흡사하다. 익은 고추를 가려 따는 건 적확한 낱말을 움켜잡는 거와 진배없다. 대풍을 바라듯 문장이 풍요롭게 완숙되길 소망한다. 문장마다 늘그막을 살아가는 사람의 향기가 끝물처럼 묻어나면 좋겠다. 무딘 필일지라도 맛깔나면 더 좋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