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아 동국대 조교수의 학력 위조 파문으로 어엿한 학력 없이는 대접받기 힘든 '간판' 중시 풍토가 도마에 올랐다. 어느 대학, 어느 과를 나왔다는 '학력(學歷)'만 내걸고 정작 '학력(學力)'을 키우기는 등한시하는 교수와 강사 등 이른바 전문가 집단에 대한 반성론이다.
실제 신 교수를 포함해 그동안 가짜 학력 파문에 휩싸인 사람들의 공통점은 '가짜'를 뛰어넘을 만큼 실력이 출중했다는 것. 학력을 눈속임한 가짜 박사들이 진짜보다 더 유능한 '패러독스(Paradoxㆍ모순)'다. 학력 위조는 분명히 사회 신뢰성을 갉아먹는 범죄다. 또 가짜 박사들은 거짓으로 내세운 학력을 숨길 목적으로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번듯한 '진짜' 졸업장만 내밀면 실력이 없어도 대접하고, 졸업장이 없으면 무조건 실력을 인정하지 않는 후진적 사회 분위기는 반드시 달라져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 실력 있는 '가짜'
= 허위 학ㆍ석사 학위로 7년 동안 라디오 영어강의를 진행해온 이지영 씨의 강의 실력과 극성 수준의 노력은 이미 학원가에 정평이 나 있다.
이씨가 4년(1996~2000년) 동안 강의했던 어학원의 이익훈 원장은 "수업 준비에만 미친 듯이 몰두하는 이씨를 보고 다른 강사들에게 수시로 '스타강사가 되고 싶으면 이지영만 닮아라'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말했다. 한 달 수강 후 평가가 좋아 계속 이어서 듣는 재수강률만 봐도 당시 이씨는 70%가 넘어 다른 강사(20% 수준)를 압도했다는 것이다.
신정아 씨를 만나 본 이들도 대부분 그의 뛰어난 어학 실력, 언변과 사교술을 특징으로 꼽았다. 미술계의 A씨는 "차분하고 침착한 어조로 자기 주장을 개진하는 그의 모습은 '박사보다 더 박사 같다'고 느낄 만했다"고 전했다. 실제 교수로서 강의를 함에 있어 그에 대한 평가 역시 긍정적인 여론이 상당 부분 있다.
대학 1년생 때 신 교수에게서 교양과목을 수강했다는 한 학생은 자신의 인터넷 블로그에 "강의 내용도 대부분 알차고 재미있게 전개하는 편이어서 나이 많고 고지식한 교수들의 수업에 비해 훨씬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일정 측면에서는 '가짜 교수' 신씨의 실력을 방증하는 셈이다.
◆ 실력 없는 '진짜'
= 서울의 한 대학 A교수는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강의실보다 특강 등 바깥 일에 얼굴을 더 빈번히 드러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A교수가 있는 학과에 다니는 황 모씨는 "올해 1학기 초 A교수가 갑자기 개인 사정을 핑계로 강의를 취소해 담당교수가 변경됐다"며 "그러나 A교수가 학교 강의보다 기업체 특강 등으로 '가욋돈' 버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화가 났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번듯한 해외 박사 출신이지만 수업 준비가 부실해 학생들의 불만이 적지 않은 교수도 많다.
서울 명문 B대학 소속 한 대학원의 이 모씨(간호학)는 "600만원이 넘는 한 학기 학비가 아까울 뿐"이라고 하소연했다.
이 대학원 C교수는 명문 D대학에서 석ㆍ박사학위를 따고 미국 존스홉킨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화려한 '학력 간판'을 자랑한다.
그러나 이씨는 "저서를 교재로 쓴다고 구입했더니 심지어 50~60년대 통계자료도 수두룩했다"며 "8년 전 자료로 수업하는 것은 불만거리도 못된다"고 푸념했다.
서울 한 사립 E대학에 다니는 김 모씨는 "회계학 강의에 어떻게 숫자가 하나도 언급되지 않을 수 있느냐"며 "미국 학위만으로 실력을 치장하려고 하는데 차라리 회계학원을 다니는 게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 왜 '진짜 같은 가짜' 등장했나
= '진짜 못지않은 가짜'들이 사회를 속이며 만연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한국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학벌중시주의'와 이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사회계층화'에 기인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홍두승 서울대 교수는 "출중한 실력을 갖추고 있어도 이와는 별개로 학력 등 간판에 의해 사회적 성공이 좌우되는 풍토와 개인적인 절망감, 도덕적 해이 등 모든 것이 조합돼 '진짜 같은 가짜'를 만들어 내고 있다"고 말했다.
또 졸업장만 있지 정작 실력은 형편 없는 지식인층이 늘어나면서 실력을 갖춘 '가짜'가 충분히 통할 수 있도록 변질돼가고 있는 구조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TV 영어강사로 일하는 김 모씨(28)는 "일부 강사를 보면 학벌만 그럴 듯하지 간단한 문장 하나 매끄럽게 읽지 못하는 사람도 수두룩한 게 현실"이라며 "상황이 이러니 능력만 갖췄다면 학벌은 얼마든지 조작해도 검증은커녕 오히려 대접받기 쉬운 분위기"라고 말했다.
정신병리학자들은 신정아 씨처럼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진짜 같은 가짜'를 일컬어 '리플리 효과 환자'라 부르고 있다. 영화 '태양은 가득히'의 주인공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신씨가 "학력을 증명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다"는 새빨간 거짓말을 한 것처럼 자신이 바라는 세계만을 진짜라고 믿고, 자신이 발을 딛고 사는 현실을 오히려 허구라고 믿는 것을 '리플리 병' 혹은'리플리 효과'라고 부른다.
영화 주인공 리플리처럼 지적능력을 갖추고 노력을 해도 신분의 벽과 경제능력 차이를 뛰어넘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의 콤플렉스와 현실을 바꾸기 위해 거짓말을 계속해서 하게 되고 그 거짓말이 자신의 정체성으로 변모해 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