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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비화] 무산철산과 청자오리형연적
글 : 제이풍수사
글 게시일 : 2023. 8. 30.
청자오리형연적[靑磁鴨形硯滴]
오리가 목을 길게 뺀 형태의 연적으로 희귀하다. 연평도에서 출토되어 다나까가 소장하다 선우인순에게 1,600원에 팔았는데, 그 친구가 이희섭의 꾀임에 넘어가 이희섭에게 팔았다. 이희섭은 마와자끼에게 2만원에 팔았으나, 해방 후에 이희섭이 다시 샀다. 그 후 청자연적은 손재형을 거쳐 이병철이 입수하고 지금은 호암미술관을 거쳐 리움에 소장되어 있다.
청자오리형연적(靑磁鴨形硯滴), 이 희대의 명품은 연평도에서 출토되어 해주의 동(東)중학교 서무 주임이던 다나카(田中)가 처음으로 소장하였다. 그러나 연적을 좋아했던 선우인순(鮮于仁筍)이 1934년경 그 때 돈으로 1천6백 원(圓)이란 거금을 주고 이 연적을 샀다.
언제 자네에게 팔아 달라고 했어
문명상회(文明商會), 서울 시청에서 동쪽으로 상당히 큰 이층 건물이 있었는데, 주인은 세계의 거상인 이희섭(李禧燮)이었다. 안채는 살림집으로 썼고, 바깥채는 고미술품을 파는 문명상회가 들어서 있었다.
“어서 오세요.”
이희섭이 무료한 한 낮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어떤 낯선 남자가 가게문을 열고 들어 왔다. 이희섭은 얼굴에 온화한 빛을 띠며 손님을 맞이하였다.
“그냥 들려 봤어요.”
손님은 가게 안을 두리번거리며 둘러보았다. 진열장에는 중국 동기(銅器)를 비롯하여 청자와 백자가 진열되고, 안에는 몇 점의 고서화도 걸려 있었다. 이희섭은 금속에는 밝지 못했으나 도자기 감식안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눈이 밝았다. 따라서 진열된 도자기는 대부분 섬광이 번뜩이는 일급품이고, 손님의 눈길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이 물건은 어떤 것이죠?”
손님은 손에 든 가방에서 오동상자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감정요? 어디 봅시다.”
상자 뚜껑이 열리고 나온 물건이 바로 청자오리형연적이다. 때깔도 좋고 또 오리가 목을 길게 뺀 귀한 물건이다. 물건을 보자, 이희섭의 눈에서 광채가 일었다.
“대단한 명품입니다. 그런데, 이게 손님 물건입니까?”
“아니오. 이 물건은 구주(九洲)대학을 나오고, 지금은 해주 도청에서 고관으로 근무하는 선우인순의 것입니다.”
“선우인순 씨요. 그렇습니까. 나도 잘 아는 분입니다. 정말 감식안이 높으십니다.”
이희섭은 장사라면 하늘이 낸 사람이다. 그 말에 손님은 마음이 들떠 버렸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오리 연적을 출세시켜 주고 싶어졌다. 그가 연적을 서울로 가지고 오게 된 사연은 이렇다.
선우인순이 다나카에게서 오리연적을 입수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이다. 하루는 친한 친구에게 보여주었더니 그 친구는 대뜸 귀한 물건이니 몇 일만 감상한 뒤 돌려주겠다고 하였다. 마음이 착했던 선우인순은 그 말을 믿고서 냉큼 내 주었다. 그 친구가 바로 지금의 손님으로 연적을 들고 문명상회에 나타난 것이다.
“저에게 넘기시지요.”
이희섭이 상황을 판단하며 한마디 던졌다.
“안됩니다. 그냥 보고 다시 전해 주겠다고 가져온 것입니다. 그 친구가 몹시 자랑하기에 좀 보고 준다고 했더니 펄쩍 뛰었습니다. 그래도 내가 하도 조르니까 좀 빌려준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지금 이런 연적은 시중에 상당히 많이 나와 있습니다. 제가 값을 잘 쳐서 줄 테니 다른 것을 사 가지고 가면 그 분도 좋아할 겁니다. 대포 값도 생길 것이고요?”
그러자 그 손님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반문하였다.
“얼마나 주겠습니까?”
“1천 6백 원.”
“와! 이 연적이 기와집 한 채 값입니까? 그렇게 비쌉니까?”
“아닙니다. 본래 시중 가격은 1천 원 정도면 살 수 있지요. 저 또한 청자는 많이 가지고 있으나 오리연적은 없습니다. 꼭 소장하고 싶어서 후히 쳐 드리는 겁니다.”
“그렇습니까. 고맙습니다.”
그 친구는 선우인순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거상 이희섭의 꾐에 넘어가 오리연적을 그 자리에서 팔았다. 돈을 받아 든 그가 해주로 가 자초지정을 이야기했을 때, 선우인순은 기절초풍을 했다.
“뭐라고! 청자연적을 팔았다고?”
“그래, 이 친구야. 그것도 1천 6백 원이야. 큰 기와집이 한 채야. 어때?”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어? 내 언제 자네에게 팔아 달라고 했어?”
선우인순이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쳤다. 그 사람은 의아한 생각이 들어 되물었다.
“왜? 값이 적은가?”
“무슨 소리야. 그 물건은 내가 다나카에게 1천 6백 원을 주고 산 것이며, 또 내가 얼마나 아끼는 물건인지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물론 알고 있지. 하지만 이 사장 얘기로는 이런 물건은 얼마든지 있다고 했어. 하지만 그가 오리연적을 가지고 싶어서 비싸게 쳐 준 것이래.”
“뭐야! 그 장사꾼에게 팔았단 말이야?”
“왜?”
“그 사람은 우리 유물을 모조리 군산에 있는 왜놈에게 팔아먹는 작자야.”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아?”
“잔말 말고 돈을 내놓게. 내가 서울로 가겠네.”
아닌 밤중에 벼락을 받은 선우인순은 부랴부랴 서울로 달려가 문명상회를 찾아갔다. 그러나 이미 그 물건은 군산으로 떠난 후였다. 우연히 문명상회에 들린 미야자키의 눈에 그 물건이 띄었던 것이다. 눈이 뒤집힌 그는 가격도 묻지 않고 가져갔고, 며칠 후 2만 원이란 거금을 이희섭에게 보내 왔다. 선우인순은 모든 것을 체념한 채 가게문을 열고 나왔다. 어깨는 유달리 지쳐 보였고, 발걸음은 비틀거렸다.
돈에 눈이 먼 자의 최후
미와자키(宮崎), 군산에 살던 일본인으로 삼남(三南) 제일의 대지주로 군림하며, 가난한 농민을 수탈해 부를 쌓은 일본인이다. 그리고는 그 부를 밑천으로 불상과 청자를 마음껏 수집해 즐겼다. 그는 주로 이희섭을 통해 골동품을 수집했고, 돈벌이에 급급한 이희섭은 일급품의 고려청자만 있으면 밤을 새워 가며 군산으로 달려갔다.
돈에 눈이 먼 이희섭은 민족적 양심도 저버린 채 더 큰 일을 저질렀다. 미와자키와 손을 잡고 우리의 고미술품을 일본에 팔아 부자가 될 꿈을 꾸었다. 일본의 골동 가격은 한국보다는 서너 배나 높았기 때문이다. 이 천인공노할 사건은 1941년에 일어났다.
이희섭은 먼저 조선 총독부 고관과 연결하여 동경 한복판, 경교구(京橋區) 고도옥(高島屋)백화점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까지 뒤를 보아준 이 전시회는 일본 내 고관들도 적극 협조하였다.
드디어 전시회가 열렸다. 밖에는 고태가 자르르 흐르는 석탑과 석등이 진열되고, 현수막도 크게 나붙었다. 출품작은 도록에 게재된 것만도 2천6백 점에 이르고 실제로는 3천 점을 육박하였다. 출품작은 양뿐만 아니라 질에 있어서도 눈이 번쩍 띄는 일품, 가품, 명품들이었다. 낙랑 시대에서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2천 년에 이르는 우리 조상의 예술 혼이 총 망라되었다. 금속 유물, 불상, 고려청자, 조선백자, 목공예품, 석물 등등. 특히 이희섭은 자기가 수장했던 도자기 이외에도 미야자키의 수집품 중에서 청자투각쌍사자두침(靑磁透刻雙獅子頭枕)과 청자진사목단문병도 빌려서 출품했다. 또 30만 원을 매겼던 삼국 시대 도금불상, 10만 원을 매겼던 낙랑도금풍령, 1,200년 된 거대한 신라대귀부비도 출품작에 포함시켰다. 당시 서울 시내 20칸짜리 기와집 한 채가 약 4천 원 정도 했으니, 지금 물가와 비교해도 그 가격이 엄청났음을 알 수 있다.
전시회는 대성황으로 경매도 대단했다. 출품작 대부분이 일본인에게 팔려 나갔다. 전시회가 끝나자, 이희섭은 일약 한국에서 몇째 가는 최고의 갑부가 되었고, 전시회를 준비하며 빌린 돈까지 깨끗이 갚았다. 현재 보물 제789호인 청자투각쌍사자두침은 전시회에서 5만 원까지 시세가 오갔다.
사람의 욕심은 돈을 벌면 더 많이 벌기를 원한다. 이희섭은 더 큰돈을 벌기 위해 고미술품에서 손을 떼고 광산업에 손을 댔다. 무려 13억 톤의 자철광(磁鐵鑛)이 매장된 함북의 무산철산(茂山鐵山)을 인수한 것이다. 세상에 말 잘하는 사람을 약장수라 하지만, 광산 브로커에 비하며 소위 공자 앞에서 문자 쓰기이다.
“이 사장님! 이곳은 틀림없습니다. 산을 덮고 있는 흙이 온통 붉을 지경입니다. 무산 읍내에서 동쪽을 보면 성천수가 흐르고, 그 건너편 창렬동에 솟은 높은 산입니다. 이 5만 분의 1 지도를 보시면 이 지대는 준편마암이 배태된 지역입니다. 틀림없습니다. 또한 무산과 고무 산간에 이미 무산선이 개통되어 있어서 철도로 청진과 성진까지 싣고 갈 수 있습니다. 그곳에 제철 공장이 있으니 제격입니다. 또 무산은 우리나라 제일의 목재 생산지입니다. 갱목이나 철도를 가설하는데 필요한 나무를 손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특히 무산 철산은 1935년에 이미 채광되어 무산읍은 평양 저리 가라고 번창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채광 설비를 가지고는 어림도 없습니다. 사장님 같은 대 사업가가 손을 대면 일약 세계 최대의 철산이 될 것입니다. 하, 하.”
“나도 앞으로의 사업은 광산이 유망하고, 특히 금광보다는 철광이 더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지.”
이희섭은 가지고 있는 수백만 원이면 충분하리라 생각하고 거간꾼의 말만 믿고는 무산철산을 인수하였다. 그러나 철광은 고미술품과는 다르다. 일본말이나 잘하고 고관들과 친분이 좋다 하여 철이 쏟아져 나오지 않는다. 철강업이 빛을 보기 위해서는 마치 씨앗을 뿌리고 기다리듯이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붓고 기다려야 한다. 캐는 비용은 물론 철도와 도로를 놓아야 하고, 사택도 마련해야 하고, 철을 캐기 위한 장비도 구입해야 하니 엄청난 자금이 소요된다. 광산업은 일종의 도박으로 성공하면 일약 거부가 되지만, 실패하면 패가망신하기 일쑤이다.
이희섭은 식산은행(殖産銀行)을 주거래 은행으로 하고 자금을 융통해 썼다. 그런데 자금의 헤프기가 마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무한정 들어갔다. 결국은 가지고 있던 부동산도 모두 담보로 잡히고 거지꼴이 되었다. 그래도 철은 쏟아지지 않았다.
“사장님, 어떡하시겠어요? 벌써 얼마나 돈을 드렸는데요?”
“영업 과장, 무산철산은 정말 틀림없는 곳이네.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자그마치 13억 톤이라는 자철광이 매장되어 있어.”
식산은행이 상환을 독촉하자, 이희섭은 초조한 빛을 띠며 변명을 해댔다. 그러자 영업 과장이 짜증을 냈다. 예전 같으면 면전에도 얼씬거리지 못할 하급 간부가 형편이 어려워지자 불손한 행동도 서슴지 않는 것이다.
“사장님, 왜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대출이 어렵겠습니다. 저희 은행도 자금 사정이 매우 어렵습니다. 아시겠어요?”
“뭐요! 그러면 나더러 어떡하란 말이요. 지금 물러나면 나는 끝장이요. 끝장!”
새파란 젊은 놈이 이희섭의 목을 조였다 놓았다 했다. 미치도록 후회가 되었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철광에만 손을 대지 않았어도 갑부로 떵떵거리며 살수가 있었다. 생각만 해도 이가 갈렸다. 그 때, 하늘이 또 무너졌다.
8․15 해방.
북한 땅에 소련군이 진주하자, 무산은 하루아침에 드나들기 어려운 곳이 되어 버렸다. 사태가 이쯤 되자, 그 때까지 참아 왔던 인부와 청부업자들도 문명상회에 몰려 와 인건비며 밀린 자재 값을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세계적 거상에서 하루아침에 빚쟁이로 몰락하고, 이희섭은 피신을 다니는 고달픈 신세가 되었다. 그 때 또다시 그에게 한 가닥 희망이 비치는 사건이 일어났다. 군산의 미와자키가 사람을 보내 왔다. 이희섭은 또 다시 고미술품에 눈을 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생각했다.
“미와자키가 가지고 있던 일급 고려자기를 헐값에 사장님께 넘기겠답니다.”
“뭐요! 그래서요?”
숨도 한 번 제대로 쉴 수 없던 이희섭이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번쩍 깨었다.
“미군정 때문에 방대한 소장품을 도저히 일본으로 가져가지 못할 것으로 판단한 것 같습니다.”
옛날 생각이 났다. 판로는 얼마든지 있겠다 싶었다. 그 동안 광산 때문에 진 빚과 수모를 한 순간에 갚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알겠소. 내 곧 돈을 마련하여 가지요.”
그는 하늘이 준 기회라고 여기고 허겁지겁 군산으로 내려갔다.
“오랜만이요. 안녕하셨어요?”
미와자키가 반갑게 손을 잡았다. 물건들을 처분할 고심에 싸여 있던 미와자키 역시 이희섭을 하늘이 보내 준 은인이라고 생각했다.
“안녕이 다 뭡니까! 요즘 그 놈의 광산 때문에 혼쭐이 나고 있습니다. 잘못 생각한 것 같아요. 몇 백만 원만 투자하면 금세 철이 펑펑 쏟아져 나올 줄 알았는데, 그 놈의 광산은 몇 천만 원을 먹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아요.”
“이해합니다. 광산은 천운이 맞아야 해요.”
이제는 세상이 바뀌었다. 대지주 미와자키는 패전국의 포로다. 가지고 있던 것은 한 점도 일본으로 옮길 수 없는 처지이다. 그렇지만 이희섭은 그런 사실을 간과했다. 자기에게서 산 물건을 다시 파는 꼴인데도 그것을 몰랐다.
“아니, 이것은 청자오리형연적이 아닙니까?”
“그렇소. 일전에 이 상이 나에게 넘긴 물건이오. 어찌나 좋던지 남에게 넘기지 않고 가지고 있었소.”
이희섭은 민족적 아픔도 울분도 느끼지 못하는 장사꾼이었다. 오히려 일본을 이용하여 최고의 갑부가 될 수 있었던 그였다. 일본 패망 때문에 자기가 궁지에 몰린 것이 더 분했다.
그 날, 이희섭은 신라 불상 5점과 청자쌍사자투각두침을 위시하여 40여 점의 도자기를 일부는 현금을 주고, 일부는 어음을 끊어주고 가져왔다. 어음 금액만 자그마치 60만 원이었다. 이희섭은 금속유물에는 밝지 못했다. 그러나 고려청자는 대부분 때깔이 번뜩이는 일품이어서 미와자키가 얼마나 이 땅의 고미술품에 탐닉했는 가를 알 수 있다.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이희섭은 비록 무산철산으로 전 재산을 탕진했지만, 고미술품만 잘 성사되면 재기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48년 들어서 남북의 왕래가 완전히 단절되자, 무산철산의 권리는 휴지 조각이 되고 말았다. 그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6․25가 터지고 3일 만에 인민군이 서울로 들어오자, 그는 미처 피난도 가지 못한 채 서린동에 있던 소실 집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임금을 받지 못한 인부들이 그를 신고해 인민군에게 붙들었다. 인민군은 이희섭을 악덕 자본주로 몰아, 곧 국립도서관에 있던 인민군 정치 보위대로 끌려갔다. 그 동안에도 그는 광산에 미련이 버리지 못하고 일본인이 경영했던 중천광업을 인수하려던 중이었다. 그러나 무자비한 인민군의 총알은 그의 실낱같은 희망마저도 무참하게 불태워 버렸다.
이 청자오리형연적은 자금이 어려워진 이희섭이 손재형에게 팔았고, 손재형은 세한도에서 다루었던 우여곡절을 겪으며 이 연적을 다시 청자쌍사자두침과 함께 이병철에게 양도해 지금은 호암미술관을 거쳐 리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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