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둘레길 16코스 여정.
지리대간이 마냥 얽히고 설켜 엮어 놓은 어느 고갯마루,
세상의 모든 피곤과 무게를 두 다리로 지탱하며 길을 걷는다.
능선을 넘고 고개를 넘고 그렇게 산길 삼십리를 걷고 또 걷는다.
하늘엔 불볕 뙤약이 내리 쬐고 길에서는 지구 중력이 극대치로 발목을 잡는다.
미쳤지.
이 좋은 날 무슨 벼슬을 하겠다고 이 산길을 달려와 이 고생을 하고 있을까.
푸념과 체념을 개념없이 내뱉으며 이 망할 놈의 길이 끝나길 빌고 또 빌어본다.
그렇게 하여
그 망할 놈의 길은 나그네의 모든 진액을 남김없이 절멸시킨 채
흡사 임종같은 절망의 벼랑에서 까마득히 끝나고
급기 반가운 간판 하나를 만난다.
전라남도 구례군 오미리 한옥 마을의 동구밖에서 발견한
까페란다,
게스트하우스란다,
게다가 주막이란다.
다양한 명찰을 내걸고 있는 넌 도대체 정체가 뭐니?
카페는 커피(coffee)이다.
프랑스에서는 '카페'를 외치면 우유향을 풍기며 카페오레가 달려온다.
이탈리아에서는 '카페'를 부르면 끈적끈적한 에스프레소가
가소로운 다미타세잔에 담겨오거나,
흑백으로 버무린 카푸치노가 손님의 허락도 없이 테이블에 나타나고,
오스트리아에서는 생크림을 뒤집어 쓴 비엔나 커피가
역시 손님의 의사에 관계없이 오르는데...
여기서는 카페에다 게스트 하우스 주막까지?
여기서 주인을 부르면 누가 어떤 모습으로 달려나올까...
한옥 마을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니
카페보다는 주막이다.
그런데 주막집 앞에 내 걸린 메뉴판엔 차 종류만 잔뜩~
그렇다면 카페가 맞는데...
나눔과 소통의 쉼터라는 현판이 특별히 마음에 든다.
나눔과 소통에 전혀 길들여지지 않은 우리나라 위정자들에게
설령 시간이 나지 않더라도 억지로라도 한번 다녀가라고 권하고 싶은 곳.
전통적인 주막분위기일 것이라 생각하고 들어갔는데,
실내는 고풍스러움에 세련미를 살짝 더했다.
일단 창이 넓다.
안팎으로 감출게 없다는 말이다.
의자들이 대부분 딱딱한 하드셀이다.
주구장창 너무 오래 앉아 있으면 영업방해라는 말이다.
솟대가 곳곳에 앉았다.
신성한 곳이니 시끄럽게 하면 내쫓겠다는 의미이다.
넓은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그 자체로 커다란 하나의 액자 같은 느낌.
유명 작가에게 돈 한푼 안 들이고 특대호 작품 하나 걸었다.
시간 맞춰 채도도 명도도 알아서 바꿔주는 광센서 작품으로...
실내의 한 면에는 최고급 벽지대신
작정하고 책으로 만리장성을 돌렸다.
유전자 잘 못 받아 키작은 불쌍한 민초들을 위하여 사다리도 비치했다.
몇권쯤 되냐고 여쭸더니 아저씨의 장서인지라 아주머니는 모르시겠단다.
내외간에 구분과 질서가 명확하다는 부부유별의 현장!
유권자는 선거에서 자신의 수준에 맞는 위정자를 골라 뽑기 마련이고,
독자는 자신의 수준에 맞는 책만 골라 소장하기 마련인데...
내 눈에 띄는 책도 꼭 이런 책이다.
첫장을 펼치자 낙관처럼 찍혀 있는 이 집의 이름 넉자
산에사네.
좋은 데 사시네~
그래서 나그네는 많이 부럽다네~
막걸리 좋아하고, 산 좋아하고, 책 좋아하는 사람은
예외없이 여행도 좋아하는 법.
조만간 내가 떠나야할 곳,
우리 민족의 시원(始原) 바이칼도 눈에 띈 김에 꺼내 들었다.
실내 분위기 파악은 대충 끝났고
우리가 여기 온 것은 분위기 찾아온 것은 아니었으니,
피폐해진 육신 되살리고
쇠잔해진 몸의 진액을 보충하기 위한 간절함으로 온 것인데...
한가지 걱정이 있었으니,
도저히 궁민주(窮民酒)인 막걸리를 팔 것 같은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
심지어 파전이나 두부 김치 같은 내장을 채울 수 있는
안주가 나올 것 같은 분위기는 더더욱 아니라는 점이다.
접시는 있으나 조리대는 따로 없는 집이라는 걸
재빠른 스캔으로 파악했는데...
그래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여기 막걸리 있나요?"
그랬더니 주인 아주머니의 명쾌한 대답!
"당연히 있지요!"
이렇게 기쁜 일이...
그래서 이번에는 자신있게 다시 물었다.
"안주는 뭐가 돼요?"
그랬더니
"별도의 안주는 없고, 기본 안주만 덤으로 나갑니다."
는 대답이 돌아왔다.
끽소리 말고 주는대로 먹으라는 것.
그래서 끽소리 않고 눈만 꿈뻑이며 조용히 기다렸는데...
잠시 후 등장한 막걸리는
남원 운봉장에서 만났던 바로 그 정담 막걸리.
구례에 왔으니 구례 지역 막걸리를 먹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 지역 양조장은 문을 닫은지 꽤 됐단다.
그래서 옆동네인 남원에서 막걸리를 공수해 온다는 주인 아주머니의 얘기.
여기서도 우리네 전통주 시장의 암담한 현실을 만난다.
끽소리 말고 주인님께서 주는대로 먹어야되는
독재성 농후한 안주.
그 메뉴 중의 하나는 남해산 건어물, 멸치이다.
그리고 멸치의 환상적 옆지기인 태양초 고추장!
아주머니가 직접 담궜다는 고추장 맛이 기가 막혔는데,
고추장에 멸치 꼬리를 톡 찍어 먹으니,
멸치가 어찌나 감칠맛이 나던지...
술이 술술 들어간다.
그리고 적당히 숙성된 우리 고유향의 김치까지...
이걸 다져넣어 김치전을 만들면 막걸리 반 말도 더 먹을텐데...
여기다 돼지고기 송송 썰어넣고 김치찌개를 끓이면 한 말도 더 먹을텐데...
주막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온 집이
너무 고상한 분위기라 놀랐고,
막걸리 파는 집에 안주를 안 판다고 해서 서운했지만,
그래서 더욱 쾌적한 분위기에서 즐길 수 있었던 막걸리 한잔의 여유.
막걸리를 전혀 팔지 않을 것 같은...
막걸리를 팔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 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반의 막걸리를 마실 수 있는 곳.
분위기로만 먹다가 안주가 아쉬워 다시 물었다.
"손님이 밖에서 안주 장만해와서 막걸리만 주문해 먹어도 되나요?"
돌아온 아주머니의 대답은,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그래, 이게 나눔이고 이게 소통이구나.
이렇게 쉬운 걸.
열린 가게, 열린 마음.
그게 주막이면 어떻고 카페면 또 어떤까.
그 속에 있는 사람이 주모면 어떻고 카페지기면 또 어떻다는 말인가.
커피를 마시고 전통차를 마시면서 카페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카페라 부르고
막걸리를 떠다놓고 주모의 구수한 입담에 빠진 사람들은 주막이라고 부르면 되는 것을...
어짜피 여기는 분위기로 마시고
너와 나의 느낌으로 즐기는 곳!
가만히 보니 주인아주머니는 이 지역 정보통이시다.
숙소를 문의해오는 이들에게 친절히 숙소도 안내해주시고,
숙소 잡기가 어렵다고 하면
아는 인맥을 총동원해 알아봐주시고.
주변에서는 노을 언니로 불리신다는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두 부부가 일본 유학파 출신이라는 내공을 감추고
십수년 동안 일본식이 아닌 우리식으로 흙만 파고 계신단다.
그래서 저도 하나 주세요~! 하고 받아든 산에 사네 사장님의 명함!
다음에 또 이곳에 올 일이 있으면,
이곳 사장님네 게스트하우스에서도 한번 쯤 묵어보고 싶다.
밀도 쌀도 아닌 특별히 보리를 좋아하면서도
보리가 살 수 없는 특정된 '그 산'에 사신다는,
개성과 특별함으로 중무장하시고 격렬하게 귀농 생활을 하고 계시는 주모님.
다음에 우리 다시 만나면 보리밭에서 맥주 파티 한판 어때요?
대문 밖을 나서면 여전히 가슴 떨림이 남아 있어서 행복하고
길 위에 서면 아직도 두 다리가 떨리지 않아서 또 행복하다.
무엇을 주입해도 왕성하게 소화시키는
나의 내부가 아름답고
어떤 색깔을 덧씌워놓아도 하늘 밑에만 세워두면 모든 게 찬란한
나의 외양도 아름답다.
길 끝에서 만난 막걸리 한 병의 풍성함,
그 길 섶에서 만난 그들이 사는 공간,
그렇게 만난 인연들도 이 여름을 적셔준 소중한 아름다움이었다.
첫댓글 역시 김작가님은 막걸리 매니아시군요 막걸리하나로 재밌는 말씀을 잘하시네요 사진을보니 막걸리가땡기네요..
네, 막걸리를 느무 느무 사랑한답니다~^^
푸념과 체념과 개념이 늘어진 망할 놈의 길...
상념과 단념이 어우러진 날로 기념되었을 듯...
캬~ 역시 해리슨님은 언어를 가지고 노시는 듯 합니다.
'념'자 돌림 5형제를 제대로 불러내셨군요!! ㅎㅎㅎ
@김작가 아하~ 그러고보니 숨어있는 막내가 하나 더 있었군요.
념자 돌림 6형제!!! 와우~
남은 념자가 뭐가 있을지 괜히 고민해보게 되는 아침입니다.
오호, 당장 가고 싶어집니다.
모든 거 다 던지고 '자유로운 고난의 길'로 달려가고 싶습니다.
사진과 글로 가장의 심사에 풍선을 불어넣었으니....
가고 싶으면 가면 되는...아주 쉬운 논리인데...
가장이라 힘드시려나요?
그래도 가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철없는 간섭이려나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