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와 진화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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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은 신이 내리는 도덕적 명령을 따른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들이 만족되어야 한다.
첫째, 신이 존재해야 한다.
둘째, 신이 도덕적이어야 한다.
셋째, 신이 인간에게 도덕적 명령을 내리는 일에 신경을 쓸 정도로 한가해야 한다.
넷째, 신이 내린 도덕적 명령이 성경에 쓰여 있는 내용과 일치해야 한다.
이 네 가지 조건은 별로 만족될 것 같지 않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리처드 도킨스의 『The God Delusion』이 가장
쉽고 재미있으면서도 알차게 다룬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이 네 가지 조건이
아니다. 논의의 편의상 이 네 가지 조건이 모두 만족되었다고 가정하자.
그래도 하나의 조건이 더 필요하다.
다섯째,
인간에게 신의 명령을 따라야 할 동기(motivation)가 있어야 한다. 만약 동기가 없다면 인간은 신에게 게길 수 있다. “왜 내가 당신
말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라고 말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만약 신의 도덕적 명령이
없다면 인간이 도덕적일 수 없다고 본다. 하지만 이런 생각에는 문제가 있다. 여러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보자.
첫째 경우, 인간이 신의 명령을 따르는 동기는 그래야 천국에 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단지 신의 비위를 맞추어서 자신의 이해관계를 추구할 뿐이다. 이것을 도덕적이라고 볼 수 없다. 이것이 도덕적이라면 절대왕정 시절에 왕의 비위를 맞추어서 잘 먹고 잘 살았던 사람들도 도덕적이다. 만약 당시의 왕이 “내 명령은 몽땅 도덕적 명령이다” 라고 선언했다면 말이다.
둘째 경우, 인간에게는 도덕적으로 살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따라서 신의 도덕적
명령을 따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굳이 신이 없더라도 인간은 도덕적으로 살 것이다. 만약 인간이 원래 도덕적이지 않다면 인간은 신의 말을 무시하거나 첫째 경우처럼 자신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신의 비위를 맞출 것이다.
칸트는 동기(motivation)와 감정(emotion)으로부터 도덕성을 해방시키고자
했다. 사람들이 단지 죄책감이라는 괴로운 감정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또는 도덕적 행동을 했을 때 느끼는 기분 좋은 자부심을 느끼기 위해서, 또는 도덕적 행동을
하고자 하는 충동 때문에 도덕적으로 행동했다면 그것은 진정한 도덕성이 아니라고 칸트는 생각했다. 칸트는
이성적인 판단만으로 행동이 결정되는 것을 진짜 도덕이라고 보았다.
나는 위에서 과연 성경 구절이 신의 뜻인가를
문제삼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나는 여기서 칸트의 규칙들(사람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 자신의 윤리 규칙이 보편적 규칙이 될 수 있어야 한다)을 문제삼지 않겠다. 내가 제기하고자 하는 문제는 “설사 칸트가 말하는 규칙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하더라도 왜 우리가 그 규칙을 지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다.
동기와 감정이 없다면 또는 매우 넓은 의미의
동기(motivation)가 없다면 우리는 올바르게 살아야 이유가 없다.
우리의 이성이 “먹지 않으면 굶어 죽는다” 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치자. 그렇다고 우리가 이 결론만으로 무언가를 먹게 되는 것은 아니다. 배고픔도
없고, 먹는 것에서 쾌락을 느끼지도 않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다면 우리는 먹을 이유가 전혀 없다.
우리는 “먹지
않으면 굶어 죽는 것이 맞지. 그렇다고 내가 꼭 먹어야 하나? 그냥
굶어 죽으면 될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도덕적으로 나쁘지. 그렇다고
내가 꼭 살인을 피해야 하나? 그냥 부도덕하게 살면 될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와 칸트는 이런 면에서 비슷하다. 그들은 동기의 문제를 무시하고 있다. 하지만 동물은 동기가 없으면
어떤 행동을 할 수 없다.
여기에서 동기(motivation), 감정(emotion), 감성(sentiment)을 정의하지는 않겠다. 그냥 매우 넓은 의미의 동기와
감성을 동일시하겠다. 물론 문제가 있는 동일시이지만 여기서는 어느 정도 용서될 수 있을 것이다.
서양 철학에서는 대대로 이성과 감성을 대립시키고
인간을 감성으로부터 해방시키려고 했다. 감성은 동물적인, 악한, 자연적인 것으로 여겨졌으며, 이성은 인간적인, 선한, 문화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감성이 없으면
이성이 아무리 올바른 결정을 내려고 그것을 실행할 수 없다.
동물을
충동 역시
사랑 메커니즘, 우정 메커니즘, 고마움 메커니즘,
죄책감 메커니즘, 도덕적 분노 메커니즘 같은 감성이 없다면 인간의 이타성과 도덕성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이타성과 도덕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이다. 이런
면에서 흄은 칸트보다 낫다. 또한 다윈의 불독 토마스 헉슬리는 틀렸다.
프란스 드 발은 토마스 헉슬리, 리처드 도킨스, 조지
윌리엄스 같은 진화론 옹호자들이 칸트와 같은 이분법에 빠졌다고 비판한다. 헉슬리는 자연 선택을 핵심으로 하는 다윈의 진화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조지 윌리엄스는 다르다. 20 세기에 다윈의 진화론이 제대로 적용되도록 하는 데 윌리엄스
만큼 공헌한 사람도 드물다. 또한 진화론의 제대로 된 대중화에 도킨스
만큼 공헌한 사람도 드물다. 그런데 왜 그들이 바보 같이 다윈 이전의 칸트의 오류에 빠진 것일까?
헉슬리, 도킨스, 윌리엄스는 이기적으로 설계된 인간의 본성을 문화를 통해 뛰어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인간은 이기적으로
설계되지 않았으며 이것은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잘 요약하고 있다. 조건만 맞으면 이기적 유전자가 이타적 개체를 만들어낼 수 있다.
나는 도킨스와 칸트가 바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들의 생각에 일리가 있다고 본다.
문제는 그들이 오해의 소지가 많게 표현했거나 스스로 혼란에 빠졌다는 것이다.
프란스 드 발이 일군의 도덕 이론을 박판 이론(Veneer Theory)이라고 부른다. 이 이론에 따르면 진화한
동물로서의 인간에게는 이타성이나 도덕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다. 따라서
그런 것들은 문화에 의해 학습되어야 한다. 즉 흉측한 인간 본성을 문화라는 얇은 판으로 덮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윈의 혁명을 이어받은 20 세기의 진화생물학은 이 이론이 완전히 틀렸음을 보여주었다. 도덕성은
진화의 산물이다. 드 발은 진화한-도덕성 이론을 자연주의적 이론(Naturalist Theory)라고
부른다.
박판 이론은 극단적인 성악설이다. 반면 극단적인 성선설도 있을 수 있다. 이런 성선설에 따르면 우리는
완전하게 도덕적으로 행동하도록 설계되었다. 따라서 내버려둬도 된다. 하지만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세상은 악으로 가득 차 있다.
박판 이론은 악으로 가득 찬 세상이라는
우리의 직관에 매우 호소력이 있다. 박판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악과 맞선 쉬시포스의 노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악한 인간 본성이 중력처럼
작용하여 바위를 아래로 굴러가게 한다. 이 때 문화, 이성, 학습이 쉬시포스가 되어서 바위를 조금이라도 위로 올리려고 한다.
로버트 라이트는 두 이론을 짬뽕하여 그것을
자연주의적 박판 이론(Naturalistic Veneer Theory)이라고 부른다. 라이트는 인간의 도덕성이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 사회에는 악도 만연해 있다. 인간이 타고난 도덕성을
갖추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충분히 도덕적이지는 않은 것이다.
예컨대 인간은 무리끼리 ‘전쟁’을 하면서 진화한 듯하며 그 결과 내집단과 외집단을 차별하도록 진화한 것 같다. 이런 심리적 메커니즘이 인종주의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인간은
위선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조금씩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도덕적 판단을 내린다. 무의식적으로 말이다.
칸트, 헉슬리, 윌리엄스, 도킨스가 인간의 타고난
이제 왜 칸트가 감성을 배제하고자 했으며
그것이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는지가 드러났다. 인간의 도덕적 감성 또는 인간의 무의식적, 자동적 도덕적 판단은 자신에게 약간 유리하도록 왜곡되어 있다. 따라서
만약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도덕 체계를 세우고자 한다면 그 감성을 어느 정도는 배제할 필요가 있다. 물론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감성이 없다면 도덕성도 없다. 따라서 감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도 없다.
우리는 칸트처럼 감성을 완전히 버릴 수
없다. 또한 감성에 완전히 매달릴 수도 없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감성과 이성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것이다. 우리의 도덕적 행동은 진화의 산물인 도덕 메커니즘들(감성들)에 의존한다. 또한
도덕적 판단을 내릴 때 진화의 산물인 무의식적이며 자동적인 도덕적 판단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도덕적 감성과 자동적인 도덕적 판단에는 문제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도덕적 감성, 자동적인 도덕적 판단, 이성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매우 복잡 미묘하다.
칸트는 줄타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과감하게 감성을 완전히 무시하려고 했다. 물론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인간은 도덕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한쪽을 버림으로써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어려운 줄타기를 해야 한다.
첫댓글 오랜만에 글을 읽어보네요^^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