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9일(주)
* 시작 기도
주님...
주 앞에서 늘 바르게 서지 못하고 항상 흔들리고 넘어지는 자입니다.
주님께서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우리에게 주셨건만 우리는 어찌하여 이렇게 수시로 흔들리고 넘어지는지요?
오늘은 주의 날 공동체로 모여 함께 예배하는 주일입니다.
모이는 주의 백성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시고 가난한 심령으로 주를 예배하게 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내가 지은 죄를 낱낱이 다 고하여 회개하기를 원하오나 미처 생각하지 못한 죄들까지 주의 보혈로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이 시간 가난한 심령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이 부족하고 연약한 자를 불쌍히 여기사 주님의 강함을 나타내소서.
입술이 둔하고 혀가 뻣뻣하여 말에 졸한 이 종을 주의 영으로 붙잡아 주시고 주의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할 수 있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행 9:1-9
제목 : 보지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3일의 무덤.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 나의 묵상
빌립을 비롯한 주의 제자들이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다녔다.
그 때 사울은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살기가 등등하여 그들을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오려고 대제사장에게서 허가서를 받았다.
사울은 그 일을 수행하고자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하늘로부터 아주 강한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다.
그 빛이 너무 강렬하여 그는 땅에 엎드러지고 말았다.
그렇게 엎드러져 있을 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는 소리가 들렸다.
이에 사울은 ‘주여,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다.
그 빛으로부터 음성이 들렸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면 네가 행할 일을 가르칠 사람이 올 것’이라고 하였다.
사울과 함께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들었을 뿐 아무 것도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유구무언이었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지만 소경이 되어 볼 수가 없었다.
이에 사람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 시내로 들어갔다.
그는 그렇게 3일 동안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로 지냈다.
사울이라 불리는 바울은 율법에 흠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유대인이었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의 무리인 교회를 박해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신 21:23b)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그의 눈에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을 잡기 위하여 박해를 피해 도망을 간 그리스도인들을 다메섹까지 쫓아간 것이다.
바울이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일은 그의 생각에는 하나님을 위한 일이었다.
그런 일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요 16:2-3)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바울은 이런 박해를 하나님을 잘 섬기는 일로 생각하고 열심히 감당하였다.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하는 것은 정작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신 것이다.
사울 일행이 다메섹 가까이 갔을, 정오 무렵 갑자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사울 일행을 둘러 비쳤다.
이로 인하여 사울이 땅에 엎드러졌다.
그 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는 소리가 들렸다.
이에 사울이 주여, 누구시냐고 묻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는 대답이 들렸다.
그리고 그 음성이 이어졌다.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알려줄 자가 올 것이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지만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사람의 손에 이끌려 시내로 들어가 3일 동안 보지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였다.
유대교는 하나님을 잘 믿어서 땅 곧 만물 안에서 잘 되는 복을 받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그로 인하여 다윗 시대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한다.
심지어 믿음조차 눈에 보이는 것이 잘 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잘 섬기고 믿음이 좋아서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런데 땅에 속한 종교인 유대교 신자 바울이 하늘의 빛을 보았다.
이는 땅에서 난 자가 창세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광의 빛을 본 것에 다름 아니다.
물론 이러한 외적인 체험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적인 변화이다.
이를 가리켜 생명의 변화라 한다.
바울은 이런 내적인 회심의 본질을 일컬어서 복음이 계시되었다고 증언한다(갈 1:11-17).
바울은 예수를 육신으로 알았을 때는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의 핍박자였다.
다시 말하면 현세적 메시야를 바라는 유대교 신자의 눈으로 볼 때, 예수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은 선동자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다메섹 사건을 통하여 육신으로 알았던 예수를 계시로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다.
(고후 5:16-17)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처럼 예수를 육신으로 알 때, 바울은 그의 핍박자였으나 예수를 영으로 알게 되자, 그의 사도가 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
다메섹은 그리스도인들의 육신적 무덤이 될 뻔한 곳이었다.
왜냐하면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빛으로 오신 예수를 영으로 만나자 다메섹은 그리스도인의 무덤이 아니라 바울 자신의 무덤이 되었다.
물론 이 무덤은 그의 육신의 무덤이 아니라 그의 옛 사람의 무덤이요 죽은 영의 무덤이다.
그가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며 마시지도 못한 3일의 무덤은 예수 그리스도의 3일의 무덤과 연합한 자리인 것이다.
그 자리는 지금까지 그가 보았고 먹었으며 마셨던 유대교의 신앙을 끊는 십자가의 자리이다.
또한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 곧 하나님을 능멸했던 자신의 패악을 끊어서 묻는 자기부인의 자리요 무덤의 자리이다.
우리 주님은 친히 당신이 생명의 양식이요 참된 음료라고 하셨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가 아니라, 썩을 양식만을 먹고 마셨던 것을 끊어서 장사지내는 무덤의 자리로 삼은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됨에 연합하여 생명을 얻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났다.
애벌레가 고치라는 무덤을 통과하여 나비가 되듯이 바울에게 있어서 다메섹에서의 3일의 무덤은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새 생명의 자리요 영생의 자리였다.
나는 물론 이런 극적인 회심의 경험을 하지는 못했다.
그런 나는 목사가 되어서도 영생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나 죽어서 가는 천국쯤으로 알던 자였다.
이렇게 복음을 알지 못하던 나는 언제나 넘어지고 자빠지며 믿음이 하염없이 흔들리는 사고뭉치였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런 나를 그냥 그렇게 놔두지 않으셨다.
복음을 알지 못하고 얼마나 헤맸을까, 그런 나를 주님께서는 복음으로 초청하셨다.
그리고 이 복음을 듣게 하셨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적 사명을 감당하게 하신 것이다.
그 일을 통하여 외적인 경험은 아닐지라도 생명이 바뀌는 내적 변화를 경험하게 하셨다.
나는 목사가 되어서도 생명의 의미를 바르게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전히 아담의 생명으로 살던 자였음을 고백한다.
그런 나를 주님께서는 강권적으로 복음을 듣고 깨닫게 하셔서 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셨다.
이 새 생명이 바로 아담의 생명에서 아들의 생명으로 바뀐 것이다.
나는 이 사건을 통하여 나의 옛 사람은 죽고 새 생명으로 태어나는 3일의 표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에 연합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은 나만의 무덤은 그 무덤이 아무리 화려할지라도 생명으로 나올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무덤만이 새 생명으로 나올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무덤이 될 뻔한 다메섹이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한 바울의 무덤으로 바뀐 것은 한 사람을 천하보다 귀하게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행동하심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땅에서 태어나 땅 위를 기어다니던 애벌레가 고치라는 무덤을 통과하고서야 푸르른 창공을 훨훨 날아다니는 참 자유를 누립니다.
아담의 생명으로 태어나 아담의 생명으로 살다가 아담의 생명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자야말로 가장 비참한 인생임을 고백합니다.
그 인생은 식물이나 동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저 단순한 생명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수많은 종교인들은 자기가 믿는 신이 되며 또한 그 신의 경지에 오르고자 가히 상상할 수 없는 도를 닦기도 하고 선을 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쌓은 선으로 오히려 그들이 죽는다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것이 복음인데 말입니다.
아담이 저지른 죄가 바로 그 ‘하나님처럼’의 죄가 아니었던가요?
나 또한 그 아담의 죄 곧 하나님처럼 되려는 나의 의를 끊임없이 드러내서 자기주장의지로 회복될 수 없는 죄인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것은 많은 경우 죄라기보다 애교쯤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처럼 되려는 자기 의는 죄 중에서 가장 악한 죄인만큼 마땅히 죽어야 할 자이지요.
나야말로 그런 자였습니다.
그런 나를 주님의 은혜로, 창세전 언약에 근거하여 오늘도 아들의 생명으로 나아가오니 이런 나를 주의 오른손으로 꼭 붙잡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