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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지 집성촌 종가 스크랩 상계를 잇고 하계를 열다 - 동암 이영도|眞城李氏 역사방
이장희 추천 0 조회 46 16.02.29 17:2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시무나무(東承) | 조회 120 |추천 0 |2009.01.08. 07:29 http://cafe.daum.net/jinsunglee/2ycG/286 

 

상계를 잇고 하계를 열다 - 동암 이영도 (p115 ~ 137)


1. 어린 손자

 1567년 6월 조선조 13대 임금 명종이 승하하였다. 명종의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왕실에서는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을 후사로 삼아 왕통을 계승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하성군은 16세의 어린 나이로 조선조의 14대 임금에 즉위하였다. 그가 바로 선조이다. 나이 어린 임금 자신은 물론이려니와 왕실과 조정에서도 국가의 안녕과 민생의 안정을 위해서 무엇보다도 선현의 자문이 절실하였다. 국가의 장래를 위하여 올바르게 자문해 줄 선현으로 가장 적합하다고 조정 안과 밖에서 두루 인정된 분은 선생이었다.

 당시 퇴계 선생은 1559년에 이미 관직을 사임하고 낙향하여 향리에서 제자들과 강학하며 당신의 학문을 심화시키고 정리하는 데에 온 힘을 쏟고 있었다. 그러다가 선왕 명종 승하 한 해 전인 1566년에 선왕의 간곡한 부름에 나아갔으나 병을 얻어 사퇴하고 귀향하였다. 그러자 선왕은 유신들과 화공들을 도산으로 내려 보내 「도산기陶山記」를 적고 도산 풍경을 그림으로 그려 오게 하여 병풍으로 거처하는 곳에 펼쳐놓게 하였다. 1567년 6월 거듭된 부름에 다시 나아갔으나 곧바로 선왕 명종이 승하하였다.

 퇴계 선생은 1567년 선조 즉위 후 예조판서를 제수 받았으나 8월에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예안으로 돌아왔다. 다음 해 1568년 6월 임금의 부름을 어기지 못해 상경하여 홍문관, 예문관의 대제학에 겸임되었다. 대제학 재임 중에 당시의 급무와 임금의 통치 자세를 논한 유명한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지어 올리고, 이어 그 해 12월에 어린 새 임금을 위해 유교적 성왕이 되기 위해 익혀야 할 학문 내용을 『성학십도聖學十圖』라는 열 장의 그림으로 그려 올렸다. 그것은 바로 유교의 이상이자 선생의 학문적 정화이기도 하였다.

 그 다음 해 선생은 신병으로 거듭 내려진 벼슬을 사양하고 귀향하였다. 영광스러운 일이기는 하나 이미 노년에 들었고, 벼슬살이의 괴로움을 익히 알고있는 선생에게 거듭되는 나라의 부름과 그 부름을 따르지 못하고 사퇴하는 일은 참으로 난감하면서 번거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번거로움 속에서도 선생에게 풋풋한 재미를 드리는 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어린 손자의 공부하는 모습이었다.

 퇴계 선생의 가서家書동안 이 어린 손자와 관련된 내용은 1567년에서 1569년에 걸치는 기간 동안 아들 첨정공 준寯(1523~1583)에게 보낸 편지 속에 들어 있다.『동암선생유고東巖先生遺稿』에는 그 가서 중 동암과 관련된 내용 일부만 실려 있다. 퇴계 선생은 그 편지에서, “아경의 독서습자가 이와 같으니 쓸 만하다”(1567년 5월 7일), “아경이 중용을 읽은 지가 여러 날이 되었다”(9월 1일), “아경이 독서를 폐하지 않는다”(1568년 3월 15일), “아경이 중용 21장을 읽었다”(5월 8일), “아경이 지금은 가르치는 말을 잘 이해하고 알아 듣는다”(1569년 6월 26일)라 하였다. 이 편지의 내용들은 퇴계 선생이 얼마나 이 손자의 공부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를 알려 준다.

 사실 이 손자는 퇴계 선생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손자는 퇴계 선생이 서울에서의 번거로운 벼슬살이를 거두고 만년의 학문적 심화와 강학, 심신의 평안을 위해 귀향하던 해인 1559년에 태어났던 것이다. 그래서 손자의 탄생은 당신에게 더욱 기쁜 일이었고, 이에 아명을 아경阿慶 (기쁘고 경사스럽다)이라고 지어 주었다. 제자들과 강학하고 고요히 사색하며 당신의 학문을 정리해 가던 의미있고 기꺼운 순간들은 늘 이 손자의 성장과 함께 하고 있었다.

 이 손자는 『중용中庸』21장을 9세 때 읽었다. 『중용』21장은 “성실한 하늘의 도리를 말미암아 인간의 도리를 실천하여 성실한 하늘의 도리에 이르는 것”(自誠明謂之性 自明誠謂之敎 誠則明矣 明則誠矣)을 설명한 심오한 의미를 지닌 글이다. 물론 어린 손자가 이 장을 읽으면서 처음부터 그 깊은 뜻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아마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 해 퇴계 선생은 이 손자가 당신의 말씀을 잘 이해하고 알아듣는다고 편지를 보냈다. 어린 손자가 일찍 도리를 깨쳐 가는 모습을 보고 매우 기뻐한 것이다. ‘어떤 이에게 준 편지’(與人書)에서는 “요즘 오직 한 어린 손자를 데리고 도산에 있다”고 하기도 하였다. 퇴계 선생은 이 손자가 당신의 말씀을 잘 알아듣는다고 생각한 후부터는 이 손자를 잠시도 떼어놓지 아니하고 산책할 때도 늘 이 손자를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당시 나라 안 최고의 대학자인 조부의 산책에 귀엽고 총명한 어린 손자가 따라 다니는 정경을 생각해 보라. 산책 길, 산은 우뚝 솟아 아름답고 계상의 물은 굽이치며 맑게 흘러간다. 조부 퇴계 선생은 성실한 하늘의 도리를 성실하게 받아들인다. 어린 손자는 할아버지의 말씀 한마디, 몸짓 하나하나에서 성실하게 사람의 도리를 깨친다. 자못 아름답지 아니한가? 이 어린 손자가 바로 동암 이영도이다.


2. 가문의 파수꾼

 이영도의 자는 처음에는 희점希點이었다가 뒤에 성여聖與라 고쳤다. 호는 동암東巖이다. 퇴계 선생의 맏아들인 아버지 군기시 첨정 준寯과 어머니 봉화 금씨 사이의 셋째 아들로 명종 14년(1559)9월 11일에 태어났다. 맏형 안도安道와는 18세 차요, 둘째 형 순도純道와는 5살 차였다.

 동암은 스스로 지은 호이다. 살던 곳 동쪽 산비탈에 동암이라는 큰 바위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바위가 웅장하고 우뚝하였다. 동암이라는 호는 그 뿌리 깊어 흔들리지 않는 웅장함과 우뚝하니 서 있는 그 기상을 본받아 지은 것이라 한다. 동암은 퇴계 선생 산소 바로 아랫자락에 있는데, 길이 나는 바람에 지금은 거의 묻혀 버려 본래의 모습이 어떤지 짐작하기 어렵다. 하계에서 자란 이동석씨 말에 의하면 길에 묻히기 전에 그 바위는 대단히 큰 바위였다고 한다. 퇴계 선생도 동암 곁에 양진암養眞庵을 짓던 해인 1546년에 ‘동암에서 뜻을 말하다’(東巖言志)라는 두 편의 시를 남겼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新卜東偏巨麓頭 동편이라 큰 기슭에 새 터를 가렸더니

縱橫巖石總成幽 암석이 가로 세로 모두가 그윽하네

煙雲杳露山間老 구름 연기 아득 아득 산 사이서 늙었는데

溪間彎環野際流 시냇물은 돌고 돌아 들녘으로 흘러가네

萬卷生涯欣有托 만권 서적 이 생활 의탁 있어 반가워라

一犁心事歎猶求 농사짓는 심사도 욕망 생겨 한탄일세

丁寧莫向詩僧道 행여나 시승詩僧에겐 이런 말 하지 마소

不是眞休是病休 참다운 휴식인가 병으로 휴식이지 


 앞 절에서 소개한대로 이영도는 아이 때부터 타고난 품성이 순후하고 재질이 뛰어나서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가르침과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 이외에도 조부와 그에 관련된 몇 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퇴계 선생이 돌아가시던 해인 1570년 여름 이영도는 아버지 첨정공의 임지인 봉성에 가서 지내다가 우연히 병이 들어 여러 달 심하게 고생을 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퇴계 선생은 직접 약을 지어주고 복용 방법까지 세세하게 알려 주었다. 할아버지의 지극한 손자 사랑 덕이었는지 병은 곧 나았다고 전한다. 또 1561년에 맏형 몽제 이안도의 사마시 합격을 축하하는 문희연文喜宴 석상에서는 퇴계 선생이 세 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손자를 가리키며, “나의 후세를 끊임없이 이어갈 사람은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라 하였다고 전한다. 선생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훗날 이 손자가 당신 가문의 종통을 이어갈 일을 미리 내다본 일이었을까, 아니면 숙부 송재공이 어린 시절의 당신에게 “이 아이는 커서 반드시 우리 가문을 지켜 나가고 빛낼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했던 것일까? 뒤에 이 손자는 당신이 했던 것처럼 고단한 삶 가운데서도 가문의 파수꾼 역할을 잘 감당해 냈다.

 1570년 조부 퇴계 선생이 돌아가셨다.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은 손자였던 이영도이니만큼 그 슬픔도 아주 진했을 것이다. 그래서 마치 어린아이가 젖을 잃은 듯 통곡하며 조부를 그리워하였다고 한다. 그는 다음 해에는 어머니 금씨 부인을 여의었다. 금씨 부인은 유언으로 “내가 죽거든 아버님 묘 아래에 묻어서 돌아가신 아버님을 영원히 받들 수 있게 해 달라”고 해서 퇴계 선생의 묘 아래에 묻혔다. 죽어서라도 시아버지를 모시겠다는 그 처절한 소원대로 영원히 시묘를 하게 된 것이다.

 이영도는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당시 불과 열서너 살이었으나 그 곡읍하는 슬픔과 거상하는 절차가 어른과 꼭 같았다고 한다. 몸에 밴 가풍은 이처럼 넉넉하였다. 또 1583년에 부친 첨정공이 의성현령으로 있다가 관아에서 별세하였으며, 장사를 마친 후 두 분 형님인 안도와 순도가 모두 상중에 돌아갔다. 결국 이영도 홀로 외롭게 상청을 지키며 여묘살이를 하였는데 지나친 슬픔으로 몸을 거의 보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 즈음 퇴계 선생의 문인이기도 한 호봉壺峯 송언신宋言愼(1542~1612)이 재난을 살피는 어사(災傷敬差官)로 경상도 일원을 순방하던 중 옛 스승을 추모하여 도산에 들렀다. 그는 이때 스승의 아들 첨정공의 여막에 들러 조문을 하고 갔다. 그 후 임금 선조에게 복명하는 과정에서 임금이 남도의 상황 중 아뢸 일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제가 남도 일원의 재난을 점검하는 도중 예안에 들렀는데 선현 퇴계 선생의 아들 준이 돌아가고 준의 아들 둘이 또 슬퍼하다 돌아갔는데 오직 그 막내아들 영도가 산골자기에서 여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숨이 넘어갈 듯하여 차마 볼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라고 보고하였다. 이 말을 들은 선조는 이영도가 복을 마치면 차례를 기다리지 말고 벼슬을 시키라는 특명을 내리었다. 그에 따라 이영도는 1585년 군자감 참봉을 시작으로 1630년 원주목사에 이르기까지 50여 년 동안 여러 벼슬을 거친다. 그는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나라와 민생을 우국의 충정과 우민의 충심으로 맡은 자리마다 전념하여 큰 성과를 이루는 한편, 두 형이 돌아간 후 고단하기만 한 가문의 파수꾼이 되어 가문을 지키고 가문의 일들을 잘 꾸려 갔다.

 이는 단순히 그의 재주 있고 발랄한 자질과 넉넉한 기량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조부 퇴계 선생의 지극한 사랑과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기 때문이었다. 어려서부터 귀에 젖고 눈에 익은 것 하나하나가 훌륭한 덕과 지극한 가르침이 아닌 것이 없었으므로 그것을 이어받아 이룬 것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비록 아직 어린 나이에 조부 퇴계 선생을 여의었지만 그 후에도 조부 생전에 듣고 본 바를 마음에 또렷하게 기억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삼아 행동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을 대하는데 있어서는 어진 마음과 배려하는 태도를 이루어 늘 봄 같이 따스한 기운이 감돌도록 하였다. 가문의 일이거나 나라의 일이거나 그가 행동하고 이루어 낸 것은 모두 조부가 생전에 이룬 일들을 본받은 것이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영도는 참으로 대현의 손자임에 합당하다고 일컬었다.

 그에게 주어진 가장 큰 짐은 가문을 수호하고 종통을 이어가는 일이었다. 맏형 몽제 이안도는 딸만 셋을 두고 아들이 없었다. 봉사손이 끊어진 것이다. 조부 퇴계 선생의 문하 여러분, 월천 조목, 고봉 기대승, 학봉 김성일, 추연 우성전 등이 맏형과 둘째 형이 일찍 별세하고 아들이 없으니 이영도가 당연히 주손이 되어 종사를 잇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형이 죽으면 아우에게 미친다”(兄亡弟及)는 말이 세상에 통용하는 예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맏형의 대가 끊어지는 것을 못내 슬퍼하였다. 그래서 자기가 30여 년이나 제사를 대신 지냈다. 벼슬살이 하면서 제수를 장만해서는 반드시 맏형수에게 보냈으며, 둘째 아들 억이 장성하기를 기다려 후사를 잇도록 해서 가문을 수호하고 종통을 보존하였던 것이다. 이는 퇴계가 고봉에게 답한 편지 글에서 “작은 아들이 형을 위해서 후사를 세우는 것이 올바른 도리인 줄을 모르고 스스로 후사가 되려고 하여 마침내는 좋지 않게 끝맺는 경우가 많으니 더욱 한탄스러운 일입니다”고 한 내용을 생각해 보아도 참으로 올바르고 올바른 일이었다.

 권오봉의 『퇴계선생일대기』(부제: 가을하늘 밝은 달처럼)는 후사를 이은 일에 얽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싣고 있다.


퇴계의 손부 권씨 부인은 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만 셋을 두었다.········· 부인은 자신이 박복하여 아들이 없음을 천명으로 여기고 혼자 시동생 영도의 보호를 받으며 살았다. 임진왜란 때는 청량산 생리골과 도곡 등지로 피난을 해 고생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온갖 정성을 다하여 혼자 힘으로 시조부의 유품과 서적을 보존하였다. 훗날 조카 억?(영도의 둘째 아들)이 장성하자 후사로 맞아들였다. 장가를 보내고 새 며느리가 입문한 이튿날 아들 내외에게 시조부의 유품과 가법을 전하고 열쇠를 맡긴 후 목욕재계하여 소복으로 몸을 정돈한 후 자결하였다. 양자의 수명장수와 시조부의 유품을 영원히 전하기를 빌고 스스로를 마친 것이다. 사돈인 부용당芙蓉堂 성안의成安義(1561~1629)의 장계에 의하여 열녀정려가 초상 중에 내려졌고, 부인의 시신은 그 열녀문으로 나와 발인하였다.


 이영도는 종가에 후사가 이어지지 않은 관계로 제사를 맡아 지내기는 했지만, 가법에 작은 아들로서 벼슬살이하는 사람이 묘실 자체를 모시고 가지는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 이유로 해서 가까운 고을의 원이 되었을 때는 방백에게 청해서 초하루와 보름에 반드시 종가에 와서 사당에 참알參謁하였고, 일찍이 딴 연고로 거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종통이 이어진 뒤에도 거처하는 집에서 사우까지 거의 몇 마장이나 되는 적지 않은 거리이건만 제사와 단오, 추석, 중양절, 동지에 지내는 차례에 반드시 참여하였다. 큰 비가 내려도, 심한 바람이 불어도, 지독한 더위와 추위에도 그것을 무릅썼고, 나이 들어 힘과 기운이 이미 쇠한 뒤에도 자제들이 말려도 듣지 않고 참사를 거르지 않았다.

 내우외환에 시달리는 나라에서 버거운 벼슬살이를 하며 민생과 국사를 맡아 힘을 다하는 한편으로 홀로된 맏형수를 보호하며 가문을 꾸리고 지켜 가야 하는 무거운 짐을 진 이영도의 고심은 『동암유고』에 실려 있는 많지 않은 그의 편지글에 조각조각 배어 남아 있다. 편지글이 많지 않은 것은 아마도 뒷날 흩어져 없어졌기 때문이리라. 그 글의 반절 이상이 벼슬하는 임소에서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 편지의 내용은 주로 집안일이었다. 친인척의 혼사, 상사, 병, 특히 시제·기제 등의 제사, 묘소를 단장하는 일에 관한 부탁과 가르침이 많다. 제물을 보낸다는 내용도 적지 않은데, 차례나 제사에 보낸 제물의 내용을 참고삼아 적어보면, 전화煎花, 점미粘米, 병미餠米, 목미木米, 짐유眞油, 생육生肉, 대구大口, 황어黃魚, 홍시紅?, 제주祭酒 등의 물목이 보인다.

 그 편지 글들을 다른 측면에서 살펴보면 이영도는 세세하면서도 다정한 사람이었던 듯하다. 편지글에 많이 보이는 표현으로 ‘매우 기쁘다 매우 기쁘다(深喜深喜), 매우 걱정된다 매우 걱정된다(深慮深慮), 다행이다 다행이다(慮慮,慮慮), 말로 다할 수 없다 말로 다할 수 없다(不可說不可說)’ 등이 있는데 같은 용어를 두 번씩 사용하여 다정하면서도 긴장된 감정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한편 이영도는 조부 퇴계 선생이 남기신 뜻을 받들기 위한 여러 가지 일들을 행하였다. 그는 조부가 남기신 글씨와 묵첩은 비록 한 조각 자잘한 것이라도 반드시 보배로이 잘 싸서 간직하여 조금이라도 손상 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그 는 또 조부의 문집과 연보를 발간하는 일에도 힘을 썼다. 퇴계 선생의 문집을 발간하던 때(1600) 그는 비록 경주에 머물고 있었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그 일의 진행 과정을 스스로 주선하고 감당하였다. 조부의 연보는 맏형 이안도가 초록한 것이 있었으나 일이 오래도록 지지부진하고 진행되지 않았다. 그는 이를 안타까이 여겨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1555~1593)에게 교감 수정을 부탁했다. 그런데 이 일은 이미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끝이 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내숙內叔인 면진재勉進齋 금응훈琴應壎(1526~1586)에게 부탁하여 서애西崖 유성룡柳成龍(1542~1607)을 만나 함께 편집하여 완성하게 하고 그것을 판각하였다. 이처럼 전해 내려온 가문의 법도를 유지하고 가문을 수호하는 일을 70여 년을 하루 같이 하였다. 그리하여 자신의 선조가 남긴 일들이 완전해 지고 그 법도가 더욱 확장되도록 하였다.

 한편 그는 “흩어지고 영락한 종족을 잘 포섭하고 관장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 근본을 잊지 않게 하려면 모름지기 계보를 밝혀야 한다. 이 일은 모든 집안에서 소흘히 해서는 안 된다”라는 옛 현인의 말에 따라 자신의 재산을 많이 들어내어 족보를 발간하였다. 이는 조부 퇴계 선생의 유지를 받드는 일이기도 하였다. 조부께서 족보의 초본을 손수 베끼시고 범례 등을 만드셨던 것이다. 그는 족보의 모든 내용을 한결같이 조부 퇴계 선생의 초본에 의거하고 거기에 종족 여러 분들을 널리 방문하여 하나하나 세세하게 다듬어 완벽한 족보를 이루어 냈다. 나아가 그는 족보를 판각한 뒤에 그 책판을 도산서원에 갈무리하여 영구히 지켜 가기를 도모하였다. 백암柏巖 김륵金?(1540~1616)이 그 사실을 서문에 써서 찬미 하였다고 한다. 퇴계 선생의 지문誌文 또한 당초에 한두 번 논의된 것이 아니었으나 가문의 환란과 나라 상황의 어려움으로 한참 동안 새기지 못하고 있었다. 이영도는 벼슬을 쉬고 귀향하여 집에 있으면서 선생 문하의 여러 분들과 깊이 논의한 뒤에 지문을 새겨 산소의 남쪽에 묻었다. 1596년 윤 8월 14일의 일이었다.

 이영도가 행한 여러 가지 가문의 일을 보면 그가 가학에 깊고, 선조부터 이어져온 예의 가르침에 근실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세상의 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본받아 모범을 삼았다. 특히 그로인하여 끊어진 종통을 잇고 종가를 소중히 여기는 의리가 비로소 밝아졌다고 한다. 행한 일이 세상의 법도가 된 것이다.

 그가 조부의 유지를 받든 일은 가문의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조부가 그랬던 것처럼 선현을 높여 받드는 일에도 힘을 썼다. 영천(영주)군수로 있을 때는 조부가 원규를 정한 이산서원伊山書院이 잘 유지되어 그 원규대로 강학이 이루어지도록 여러모로 힘을 쓰고 확장하였다. 1614년 겨울 귀향해서는 도산의 사당을 배알하였다. 그때는 그가 관직을 벗어난 때였다. 그러나 그는 도산서원의 토지와 수확을 늘리는 등 서원의 규모를 확장하는 데 더욱 힘을 써서 배우는 사람들로 하여금 학업에 열중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사림이 그를 더욱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3. 나라 걱정 백성 걱정의 벼슬살이

 이영도는 송언신의 복명에 따른 선조의 특명으로 1585년 9월 복제를 마치자 군자감 참봉을 제수 받았다. 당초에는 좀 나은 자리를 제수하려 하였으나 이조에서 마땅한 자리가 없다고 아뢰어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 후 집경전 참봉, 소격서 참봉을 거쳐서 1589년 제용감봉사로 승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휴가로 고향에 와 있었던 그는 임금을 모시기 위해 조정으로 돌아갔다. 도중에 충주에 지나다가 신립이 탄금대에 포진하는 것을 보고 진중에 들어가, “조령은 천험의 지형이다. 한 사람이 만 사람을 막을 수 있는 곳인데 어찌 들판에서 적을 맞이하려 하는가. 이는 실패할 전술이니 조령으로 군대를 옮기든지 아니면 일부 병력이라도 보내서 지키라”고 권유하였다. 신립은 듣지 않았고, 결국 며칠 후 패전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고 신립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다고 한다.

 조정에 돌아간 후 조정에서는 임금의 파천을 결정했다. 임금의 대가가 서쪽으로 파천하는데 이영도 또한 호종하였다. 파천 도중에 파주에서 임금이 도보로 따라오는 자를 가엾게 여겨 시종 외에 도보로 오는 자는 따르지 말도록 명하자 이영도는 남쪽으로 돌아와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1592년 6월 초 자신의 집에서 배용길, 김용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였다. 그들은 김해를 대장으로 삼고 배용길(1556~1609)을 부장으로 삼았으며, 이영도는 이 안동 의병진에 참모 및 군량도총軍糧都摠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제독 고응척(1531~1605)과 더불어 「선천도先天圖」를 연구하여 군진을 치는 방안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1593년 이영도는 연원도連原道 찰방察訪이 되었다. 당시 충주에 목사가 결원이어서 그가 겸임하였는데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고 한다. 방백이 나라에 그 사실을 보고하여 충주판관으로 승진하였으나 연원역의 관할은 그대로 했다. 충주가 다시 병화를 겪고, 기근이 겹쳐들어 구제할 방책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계획을 치밀하게 세워서 백성들의 고단한 어려움을 효과적으로 구제하였다. 제천 등 가까운 이웃 고을에서 곡식을 배로 실어 와서 군사들을 먹이고 백성을 모집해 묵혀진 땅 수천 이랑을 개간하였다. 가을이 되자 곡식이 크게 익어 수만 섬을 거두었다. 일부는 어려운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 쓰고 나머지는 창고에 저장하였다. 주와 역관에 곡식이 쌓여 있게 된 일이 이때가 처음이었으므로 백성들이 크게 감복하였다. 그 후에 이영도가 서울로 행차하기 위해 배를 빌리든지 말꾼이 나가면, 백성들이 스스로 술 항아리와 술잔을 가지고 와서 전송하였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도 늙은 아전이나 역졸이 그의 자손을 보게 되면 옛날의 은혜로운 일을 말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자가 있기도 하였다.

 이영도는 1596년 익위사익찬으로 제수되고 겨울에 비변사 낭청으로 제수되었으며 1597년 봄에 익위로 제수 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97년 그 해 조정에서 호조에 일이 많아서 일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데 그런 인재를 찾기가 어렵다는 논의가 있었다. 이에 임금의 특별한 명으로 그를 호조 좌랑으로 삼았다.

 그 해 8월에 명나라 장수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의주에 도착했다. 양호가 군량 조달 방안에 대해서 묻자 비변사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이영도 밖에 없다고 임금에게 아뢰었다. 이영도가 역마를 달려 의주에 도착한 후 양호를 만나 군량 조달 방안을 조목조목 따져서 세밀하게 대답했는데 그 방안이 모두 적절하였다. 양호가 크게 놀라며 한 나라의 재상이 될 만한 역량을 지녔다고 평가 하였다. 양호는 “내가 국왕을 보면 역량에 알맞은 큰 자리에 임용함이 좋겠다고 말하겠다”라 하였다. 명나라 군대를 접빈하는 책임을 맡고 있던 접반사 한은 이덕형이 그 사실을 임금에게 아뢰었다. 이로 인해 이영도는 9월에 호조정랑으로 승진하였다.

 이영도가 일을 마치고 돌아와 복명하니 임금이 직접 불러 힘든 일을 잘 처리하였다고 위로하였다. 얼마 후 명나라 대군이 남하하였다. 조정에서는 이영도가 계획을 잘 세우고 일을 잘 처리한다 하여 명나라 군사가 남쪽으로 이동하기 전에 그를 먼저 보내서 군량을 미리 준비하도록 하였다. 그는 명을 받고 죽령을 넘어 안동으로 오면서 미리 여러 고을에 공문을 보내서 군량을 조달하여 운반하도록 했다. 그리고 자신은 대군을 따라 경주로 가서 군량 공급이 끊임없이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당시 전쟁이 이미 오래 진행된 상황이라 군량의 조달이 매우 어려웠다. 그 때문에 당시 명나라 군대의 이동로에서 군량을 담당하는 관원이 모두 명나라 군사들에게 구타를 당하는 등 험한 꼴을 겪었다. 그러나 명나라 군사들도 이영도가 진중에 출입하는 것을 보면 문득 엎드려서 절하며, “우리들을 먹여 주는 분이시다”라 하였다. 그가 군량을 잘 조달한 것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타고난 지혜를 다하고 온 마음과 몸을 기울였던 까닭이었다. 그는 폭풍 속에서 밥을 먹고 비에 목욕하며 한겨울에 맨땅에서 지내기도 하였다. 이런 수고로움을 본 명나라 장수는 그를 한고조 때의 명재상 소하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이영도는 단순히 군량만을 잘 조달한 것이 아니다. 그는 1593년 연원도 찰방 시절에 충주판관을 맡아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지어 그 수확으로 백성을 구휼하고 군량을 조달한 일이 있다. 민생과 국사를 동시에 해결한 것이다. 그러한 사실이 널리 알려져 1594년 갑오년 임금이 여러 재상에게 인재를 천거하라 하였을 때, 이영도는 곽재우 등 여러 사람과 함께 나란히 추천되었다. 이영도를 추천한 약포 정탁은 추천 이유를 “그가 농사일에 밝아 백성들에게 농사를 잘 짓도록 할 수 있으며, 땅의 마르고 습한 성질을 잘 이해하며,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토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영도는 그 말을 듣고 웃으면서, “농사에 밝아 식량을 잘 마련하는 것은 내 본분이고 원하는 바이다. 하물며 지금은 백성들이 식량에 곤란을 겪고 나랏일로서도 풍년이 되어야 하는 때이다. 내 어찌 힘쓰지 않으랴”하여 손수 개간하고 농사꾼과 섞여서 직접 경작을 수행하였다.

 당시에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일은 농업 생산력의 증대였다. 농업 생산의 증대와 이에 다른 민생의 안정 없이는 전쟁도 수행할 수 없었고 나랏일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요즘말로 말하면 농업 경영을 잘 하는 것이 바로 민생의 안정 방안이요 국가의 안정 기반이었던 것이다. 이런 점을 인정받아 이영도는 1599년 8월 특별히 뽑히어 경상도 재상경차관이 되었고 그 직무를 훌륭하게 수행하였다고 일컬어진다. 사실 왜적이 7년이나 주둔하는 동안 우리 백성 중 생업을 잃은 자가 수없이 많았다. 그들의 일부는 적에게 붙어서 삶을 도모하였다. 그러니 적의 무리는 날로 늘어나고 우리의 형세는 날로 위축되었다. 그나마 남은 각 읍의 백성들 또한 장차 흩어지고 전복될 지경이었다.


유성룡은 그러한 사정을 다음과 같이 임금에게 올렸다.


우리나라의 백성으로 적의 포로가 된 자들이 적 가운데 있어서 스스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들에게 복역합니다. 또한 그들이 적의 이목이 되어 다반사로 못된 짓을 저지르니 통분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 무리는 모두 생업을 잃고 떠돌며 방황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적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는 자들이라 하더라도 삶을 꾸려갈 방도가 없고 형세가 장차 더 나빠진다면 그들 또한 적에게로 들어가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적의 통제를 벗어나지 못한 자들이 이러한 일을 보게 되면 벗어나려 하다가도 도리어 그대로 머무를 것입니다. 마땅히 양곡을 담당하는 관리, 예컨대 이영도, 성안의 같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생업과 거처를 마련해 주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들을 적의 소굴로부터 좀 덜어진 곳으로 옮기게 하여 농사짓기 편리한 넓은 개활지를 택하여 농사지을 곡식과 종자와 소를 주어 편안하게 머물러 살게 할 방안을 강구해야 합니다. 나아가 몇 년 동안은 그 부역을 면제해 주어 그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하면 적 가운데 머무르는 자들이 그 소식을 듣고 서로 알려 끊임없이 찾아올 것이며, 적의 자잘한 무리들이 스스로 고립될 것입니다.


 이영도는 1600년 명군이 철수한 뒤에야 비로소 귀가하였다가 9월 현풍 현감으로 나갔다. 이영도가 현풍에 간 지 겨우 1년 만에 떠돌던 백성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는데, 그가 백성들이 생업을 마련할 수 있는 근본 대책을 세웠기 때문이었으리라. 정경세(1563~1633)는 서찰을 보내서 그의 다스린 치적이 크게 나타났음을 치하했고, 순찰사 이시발(1569~1626)은 그의 표창을 상신해서 임금이 표리表裏(옷)를 하사하고 장려하였다.

 그는 1603년 김제군수로 승진하였고 1606년 청송부사로 승진하였는데 치적 평가에서 모두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1612년에 선혜청 낭관이 되었고 다음해 태복시 첨정으로 제수되었다. 가을에 군기시 부정으로 승진했다가 잠시 후 영천(영주)군수의 명을 받았다. 영천은 예안과 가까웠기 때문에 다스리는 경내에 이영도의 친척과 오랜 동료, 친구들 집이 많았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이 다스리는 일에 어려움이 많을 줄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공과 사를 분명히 하며 고을을 잘 다스렸다.

 1615년 정월 영천군수를 그만두는 것으로 이영도는 벼슬을 접는다. 그는 광해군의 정사가 어려워지고, 역신 이이첨 등이 여러 번 옥사를 일으켜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구금하고 대비를 유폐시키는 것을 보고는 “삼강이 끊어졌는데 어찌 벼슬을 하겠나”하였다. 1617년 선혜청 낭관으로 제수되고 이어 훈련원 도감으로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후 10년을 스스로 조심하면서 지냈다. 사실 1617년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여 강상의 떳떳한 윤리가 끊어지자 당시 명현으로 항소해서 의리를 붙들려고 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일찍이 3년 전에 그 기미를 본 사람은 오직 이영도 뿐이었다. 『주역』뇌지예雷地豫 괘의 2효 효사 “이른바 마음가짐이 돌같이 굳은지라 종일을 기다리지 않아서 곧음이 길하다”(介于石 不終日貞吉)는 것은 격류 속의 우뚝한 바위 같은 그의 의리와 절개를 잘 드러낼 수 있는 구절이다. 이때 이영도의 장자 기岐(守拙堂)또한 과거 공부를 그만 두었다. 사람들은 절개와 의리가 한 집에 모였다고 칭송하였다.

 당시 퇴계 선생 제자의 후예인 이강이라는 자가 예안에 살았다. 그는 이이첨의 무리인 정조의 데릴사위가 되어 그들 무리에 붙어 자못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영도는 그 이름을 도산유안陶山儒案에서 삭제하였다. 그 자가 문간에 와서 여러 번 뵙기를 청하였으나 그는 문을 굳게 닫고 들이지 않았다. 이는 대개 그들의 악함을 가만히 꺾고, 천지간 강상이 중하다는 것을 보이는 뜻이었다. 나아가 그 이후는 비록 평소에 서로 친밀하게 지내던 사람이라도 저 무리들을 능히 엄격하게 배척하지 않는 자에게는 절교하는 편지를 보내고자 하였다. 사람들이 화가 미칠 것을 걱정하였으나 그는 꿋꿋하게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나라의 기강이 위에서부터 무너져 내리던 때에 이영도는 격류 속의 우뚝한 바위처럼 행동하였던 것이다. 이는 안으로 가문을 빛내고 밖으로 원근 사람을 격려하는 일이기도 하였다.

 이영도는 1623년 인조가 반정하던 해 익산군수로 제수되었다. 다음 해 이괄의 반란이 일어나자 그는 군사를 모집하여 여산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그 해 12월 전임 군수가 군포의 세입을 모자라게 한 죄에 연좌 파직 되었으나 변명하지 않았다. 1629년 선공감 첨정으로 제수 되었으나 숙배 사은하고 돌아왔다. 1630년 내섬시정을 제수 받았다. 그해에 조정에서는 공론을 모아 그를 승정원에 추천하려 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는 그 해 겨울 원주목사로 제소되었다. 그때에 조정의 귀인이 남의 장지를 쟁송하는 일이 있었다.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법대로 처결했다. 그러자 그 귀인이 노해서 대관을 부추겨서 파직시켰다. 그 후 그 대관이 귀인에게 속은 바를 알고 못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했다 한다.

 이영도는 1636년 가을 군자감정으로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해에 맏형의 후사가 된 둘째 아들 억이 돌아갔다. 이어 겨울 청나라 군대가 서울을 함락시켰고, 여러 도의 군사가 잇달아서 패전하였다. 이영도는 연로해서 자력으로 근왕할 수가 없었다. 그는 고을 사람들에게 창의할 것을 권하는 한편, 자제에게 가문의 장정을 규합하고 가재를 내어서 군사 일으키는 일을 돕도록 명했다. 1637년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서쪽을 바라보며 통곡하였다. 그는 “우리나라가 당당한 예의의 땅으로 한갓 힘에 굴복하여 하루아침에 오랑캐의 더러움을 뒤집어썼으니 이는 만고에 우리나라 역사의 치욕이다”라 하면서 분통해 하였다.  가문의 고난과 나라의 환난이 만년에까지 그를 끈질기게 따라다닌 것이다. 곧이어 병이 들어 돌아갔다. 향년 79세였다.


4. 일생을 돌아보며

 이영도는 80여세를 살았으니 당시로서는 퍽 장수한 편이다. 그러나 그 삶의 세월은 늘 버겁고 힘든 나날이었다. 열둘 어린 나이에 아낌없이 사랑을 주시던 조부 퇴계 선생을 잃고 이어 다음해에 어머니 금씨 부인을 잃었다. 약관의 나이를 벗어나자마자 부친과 두 형을 두 해 사이에 잃었다. 혼자서 조부 퇴계 선생의 뜻을 기려야 하고 가문을 수호해야 하고 종통을 이어야 했다. 27세에 시작하여 80세가 가깝도록 50여 년 동안이나 종사한 나랏일도 한 번의 심각한 내우, 두 번의 비참한 외환을 겪는, 말로서는 표현하기 힘든 벅찬 나날이었다.

 어려서 퇴계 선생의 칭찬과 기대를 모을 만큼 재주와 국량이 뛰어났으나 조부처럼 학문으로 입신하기에는 그에게 지워진 짐이 너무 무거웠으며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너무 다급했다. 그 재능과 국량을 온통 고단해진 가문을 돌보는 일과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 일에 써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라의 일 틈틈이 가문의 일을 돌보아야 했으며, 가문을 돌보면서도 늘 나라를 걱정해야 했다.

 그러나 대현인 조부의 가르침은 일생의 지침이 되어 그를 돌보았다. 벼슬을 맡으면 직무에 오직 충실하였을 뿐 그 벼슬의 낮고 높음은 가리지 않았다. 특히 왜란 중 충주, 의주, 경주 등에서 이룬 공은 뚜렷하였다. 한창 전쟁 중인 어려운 때에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의 하나는 군량 조달이었다. 그는 이 어려운 임무를 온 힘을 기울여 잘 수행하였다. 더구나 그는 단순히 임시방편으로 군량만을 조달하지 않았다. 그는 그 일을 수행해 나가는 동안 한편으로는 백성들이 생활 기반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하여 만년의 기틀을 쌓았던 것이다.

 그는 무릇 여섯 번이나 주와 군을 맡아서 다스렸다. 그는 전쟁에 찌든 백성들이 편하게 살 수 있도록 생업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허물어진 공관과 창고 등을 복구하였다. 자신은 검소하게 지냈지만 백성에게는 넉넉히 베풀었다. 하지만 중국 장수의 표현대로 재상의 기량이 있었으나 벼슬은 목사에 그쳤다.

 그는 재상의 기량을 지녔으면서 동시에 따뜻한 성품이었다. 그는 벼슬에서 벗어나 있을 때에는 물론이려니와 벼슬 중에도 가문을 잘 수호하고 종족 인척간에 화목하게 지내고 이웃도 부지런히 돌보았다. 질병이 있으면 즉시 약을 구해 주었으며 상사가 있을 경우에는 더욱 열심히 도와주었다.

 이영도의 둘째 아들 억은 백부 이안도의 후계가 되어 상계 퇴계 선생의 종통을 이었고, 맏아들 기는 하계를 열었다. 도산 일대의 진성 이씨 마을 중 중형 순도의 후예가 둥지를 튼 의인을 제외하고 상계, 하계, 계남, 원촌 등이 모두 그의 후예들이 깃들어 살고 있는 마을이다.

 이영도는 세상을 뜬지 13년 뒤에 선무원종훈으로서 승정원 좌승지로 추증되었다. 1813년(순조 13)에 영남 유림 수백 인은 그에게 추증과 시호를 내리라는 상소를 올렸다. 시호는 내려지지 않았으나 그는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으로 추증되었다. 하계의 불천위는 이영도가 유일하다. 1960년대 그의 공을 기린 후손들에 의하여 불천위로 모셔졌다고 한다.

 이영도 일생의 공적은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가 지닌 고아한 풍모와 엄준한 절의는 사림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백성들을 사랑하는 어진 마음은 그가 고을살이를 한 고장의 유애비遺愛碑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선조를 잇고 후세를 연 덕은 자손들의 삶의 모습 속에 그림자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어린 날 성실하게 사는 것이 사람의 길이라고 깨우쳐 주신 조부 퇴계 선생의 가르침의 덕은 아닐까? (이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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