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행가능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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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희
눈을 떴다. 유리로 된 방에 나 혼자 누워있는 것이 낯설다. 일어나려고 몸을 움직여보니 가슴이 턱턱 결린다. 여기저기 매달린 호스도 방해가 된다.
여기가 어디지? 내가 왜 여기에?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고개를 돌려 두리번 거려보니 중환자실인 것 같았다. 머리는 깨진 유리병으로 마구 찌르는 듯 아프고 갈비뼈도 무사하지 않은 듯 숨을 드려 쉴 수가 없다. 답답한 산소마스크, 등 밑에서는 환자의 욕창을 방지하기 위함인지 컨베어밸트 같은 것이 주기적으로 드르륵 드르륵 허리를 훑으며 기분 나쁘게 지나가고 있다.
왜 내가 여기에 있을까? 생각을 뒤로 돌려봐도 잘려나간 시간을 기억해 낼 수가 없다. 오늘이 무슨 요일일까?
토요일에 세브란스에 입원하고 있는 언니랑 하룻밤 지내려고 버스를 타고 신촌 노타리에서 내렸다. 만만찮은 병원 주차비가 아까워서였다. 언니가 좋아하는 심심풀이 뻥튀기 한 봉지랑 내가 먹을 햇반 두 개를 사들고…….
길 건너편을 보니 병원 셔틀버스가 떠나고 있었다. 하나를 놓쳤으니 십 여분을 기다려야겠구나하고 빨간불이 켜진 신호등을 무심히 보고 있었는데……. 여기까지만 생각이 난다.
그런데 지금은 밤일까 낮일까. 아무도 없는 유리방에 덩그러니 누워있는 나는 살아있는 것일까 죽어있는 것일까. 가족들이 몰려들어 왔다. 면회시간이란다. 서로들 눈짓을 한다. 이제 한시름 놓았다는 뜻인가? 미쳐 물어볼 틈도 없이 면회시간이 끝나고 있다. 아쉬운 듯이 등 떠밀려나가는 사랑하는 내 자식들과 남편, 저녁에 한 번 더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나갔다.
혼자 남아 있다. 다음 면회시간까지 내가 살아있을 수 있을까? 정신이 혼미해지고 흐릿한 불 밑에서 아무리 정리해 봐도 잘려나간 시간은 그저 깜깜하기만 하다. 그런데 삼일이나 지났다니…….
중환자실은 한밤중이 더 바쁜듯하다.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그들은 흰 유령의 움직임처럼 발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갑자기 내 방 앞 침대에 의사들이 몰려들었다. 조금은 소란스럽게, 맞은편 환자를 심폐소생술을 하는 듯 의사들이 번갈아 환자의 가슴을 짓눌렀다 떼는 몸짓을 하고 있다. 흰 가운을 입은 그들은 모니터를 봐가며 환자를 보며 동분서주했다. 이내 가늘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더니 흐느낌도 잠깐이었다. 하얀 시트를 덮은 침대가 밖으로 나가고 있다.
그 순간, 새로 바꾼 내차 쏘나타의 계기판이 생뚱맞게 떠올랐다. 시동을 걸면 휘황한 계기판 중앙에 주행가능 거리라는 글이 한글로 쓰여 있다. ‘새 차에 또 새 기능이 하나 늘었군’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지금 문득 그것이 떠오르는 것은 뭘까? 죽음과 주행가능 거리와의 관계를 생각해 본다. 하얀 시트에 덮여 나간 저 환자는 자기의 주행가능 거리를 알고 있었을까?
사림들은 자기의 주행가능 거리를 알게 된다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그것은 아마도 하루하루를 고문 받는 마음으로 살아가거나, 아니면 남은 삶의 주행거리를 깨끗이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사람이 있거나, 자포자기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문득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 이라는 글을 읽은 것이 생각난다. 자아 성찰과 입관(入棺)체험을 통해 다시 태어나며, 죽음을 준비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남겨진 사람들을 배려함에 있다고 했다. 그런 죽음을 웰다잉(well dying) 이라고 한다. 인간답게, 아름답게, 품위있게 죽자는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나도 품위있는 마무리를 하기위하여 날마다 삶을 반성하며 일기처럼 임종노트(living will)를 써서 자연스레 유언장을 만들까.
나의주행가능 거리가 여가까지일까. 내 옆엔 아무도 없다. 이번에는 머리가 욱신욱신 쑤시고 구역질이 난다. ‘면회시간은 언제인거야’ 간호사가 진통제를 놔 준다. 몸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고 눈꺼풀이 무겁게 감긴다.
생각도 하기 싫은 병원생활이다. 나중에 알아보니 내 사고는 버스정류장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정지선을 지키지 않은 버스가 신호를 기다리고 서 있던 나를 백미러로 치였다고 했다. 다행스럽게 버스기사가 나의 잘려나간 시간을 자기 잘못으로 인정했다.
지금은 매일 남편이랑 비봉산 마실길에 오른다. 내가 중간 쉼터에서 차를 마시며 책을 읽는 동안 남편은 정상을 정복하고 내려온다. 집에 올 때는 덤으로 강아지풀을 한 움큼 뽑아다 머그컵에 꽂곤 한다. 그러면 식탁은 싱그러운 풋내음의 산이 된다.
요즈음 한 가지 변한 것이 있다. 기름 값이 너무 비싸 찔끔찔끔 조금씩 넣던 기름을 빵빵하게 채워 넣는 버릇이다. 그리고는 길어진 주행가능 거리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운전한다. 마치 내 주행가능 거리를 바라보듯이.
첫댓글 내 인생의 주행거리를 짐작해봅니다. 좋은 수필에 마음을 헹군 느낌입니다. 감상 잘 하고 갑니다.
주행가능 거리 그것은 기름의 분량에도 좌우되겠지만 차가 얼마나 노후했느냐에 따라서도 결정되겠지요. 마음을 숙연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