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살고싶은 곳 - 조선의 특산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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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1.10. 01:34조회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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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1 : 살고 싶은 곳
조선의 특산물들
이중환은 목화 외에 지역적으로 중요한 농작물로서 “진안의 담배밭과 전주의 생강밭, 임천ㆍ한산의 모시밭, 안동ㆍ예안의 왕골밭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곳들은 모두 지역민들의 생업이라기보다는 대규모의 재배지로서 부자들이 이익을 독점하는 데 기여했다. 이 밖에 조선시대에 유명했던 특산물을 보면, 이수광의 『지봉유설』에서 거창의 감, 보은의 대추, 밀양의 밤, 충주의 수박, 희양의 매송자, 안변의 배를 들었고,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강계의 인삼과 담비가죽, 함경도 경성 북부의 삼베, 남평의 부채, 순창의 종이, 담양의 채색상자, 동래의 흡연기구, 경주의 수정, 해주의 먹, 보령의 벼루 등을 소개하였다.
상주곶감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조선시대에 유명했던 특산물로 거창의 감, 보은의 대추, 밀양의 밤, 충주의 수박, 희양의 매송자, 안변의 배를 들었다.
우선 담배에 대해서부터 알아보자. 담배는 그 당시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의 기호식품 또는 혐오식품으로 중요시되고 있다. 담배의 원산지는 남아메리카 중앙부 고원지로서 유럽에 전파되면서 관상용이나 약용으로 재배되었으며. 현재는 북위 60도에서 남위 40도에 걸쳐 전 세계에서 경작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1618년(광해군 10)에 일본을 거쳐 들어왔거나, 중국의 북경을 내왕하던 상인들에 의하여 도입된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나라 재래종의 품종명이 일본에서 도입된 것은 남초ㆍ왜초라 하고 북경이나 예수교인에 의하여 도입된 것은 서초라 한 점을 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전래된 담배는 1921년까지 300여 년간은 자유롭게 경작되었다가 그 뒤에는 전매제도로 바뀌었다.
우리나라에서 재배되고 있는 담배의 품종으로는 재래종ㆍ황색종ㆍ벌리종ㆍ터키종 등이 있다. 담배는 어른들의 기호품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여 왔던 만큼 권위의식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사랑방에서 들려오는 할아버지의 담배 잡숫는 소리는 곧 할아버지가 집안에서 차지하는 권위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경도잡지』에 의하면 조관(朝官)들은 반드시 담뱃서랍이 있었고 비천한 자는 존귀한 사람 앞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18세기에서 19세기 무렵에는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흡연을 즐겼다고 한다.
담배백과사전 『연경』에는 담배가 가장 맛있을 때를 “글 읽기를 오래 해서 목구멍이 탈 때 피면 달기가 엿과 같다고 하고 대궐에서 임금님을 모시다 퇴궐하자마자 무는 담배에는 오장육부가 향기로우며, 겨울밤 첫닭 울음소리에 잠이 깨어 이불 속에서 한 대 피우는 맛은 봄이 피어나는 것과 같다”라고 하여 매우 사실적인 묘사를 하고 있다.
“번갯불에 담뱃불 붙인다”라는 속담은 성미가 급하여 무엇이든 그 당장에 처리하려 하거나, 몸 움직임이 매우 재빠른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담배씨로 뒤웅박을 판다”라는 말도 있는데, 이는 사람이 몹시 좀스럽거나 잔소리가 심한 경우를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담방귀타령」이라는 민요도 여럿 있다. 그중에 “귀야 귀야 담방귀야 / 동래 울산 담방귀야 / 너의 국도 좋다드니 / 조선국을 왜 왔나 / 나의 국도 좋다마는 / 너의 국을 유람왔네”로 시작되는 노래가 대표적이다. “담바권지 불우전지 / 담바초에 불이 붙어”라는 구절이 있는, 경상남도 울주군에서 채록된 민요에는 저승에 가서 담배 피운 죄를 용서받는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는 담배 피우는 것을 일종의 죄악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건강을 최우선으로 삼는 풍조 때문에 담배가 갈수록 설 자리를 잃어 가고 있다. 건강을 해치는 가장 대표적인 기호식품이라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마다 정초가 되면 전국 각지에서 담배를 끊겠다고 맹세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하지만 2003년 10월 필자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만났던 북한의 청소년과 남자 어른들은 남한의 1980∼1990년대 상황처럼 담배를 많이 피우고 있었다.
전통차
청산도 보리
전주 이강주
이중환은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바람과 이슬을 음식으로 삼을 수가 없고, 새의 깃과 털로써 옷을 대신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살아갈 곳은 기름진 땅이 있는 곳이 제일이고, 배와 수레와 사람과 물자가 모여들어서 서로 교류할 수 있는 곳이 그 다음이다”라고 하였다.
목화와 담배 외에도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식품들이 많이 있는데 그중 한 가지가 고추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독살시키려고 가져왔지만 오히려 우리 민족의 체질에 맞아 애호품이 되어 버렸다는 속설이 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을 보면, “고추에는 독이 있으며 일본에서 가져온 것으로 왜겨자라 부른다”는 말이 나온다.
일본의 『초목육부경종법(草木六部耕種法)』에 “1542년 포르투갈 사람이 고추를 가지고 와 전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1713년 출간된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라는 책에는 “고추는 남방의 야인들이 1596년에서 1614년 사이에 담배와 함께 가져왔고 중국에는 명나라 말엽인 1600년경에 도입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추의 원산지는 남미 아마존강 유역으로 1493년 콜럼버스가 스페인으로 가져가 유럽에 전파하였고 이것이 17세기경에 중국과 일본에까지 전파되었던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경북의 영양, 전북의 임실, 충남의 청양, 충북의 음성 등지에서 대량으로 재배하고 있으며, 순창의 고추장이 유명하다. 이렇듯 한국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고추를 두고 강인희 교수는 “고추가 전래됨으로 인하여 담백미를 즐기던 전기시대 식생활과는 달리 후기시대에는 조화미가 중시되는 식생활로 변화하였다”라는 평가를 한 바 있다.
순창 고추 © 이종원
고추가 전래됨으로써 담백미를 즐기던 전기시대 식생활과는 달리, 조화미가 중요한 후기시대의 식생활로 변화되었다.
다음으로는 마늘을 들 수 있는데, 허준의 『동의보감』에 “마늘은 성(性)이 온(溫)하고 맛이 매우며, 부스럼과 풍습(風濕)을 없애고 냉(冷)과 풍(風)을 쫓아내며, 비장을 튼튼하게 하고 위장을 덥게 한다. 뱀과 해충에 물린 데를 치료하고 곽란을 멈춘다. 염증과 창증을 낫게 하는데 마늘은 가능하면 익혀 먹으라. 익히면 매운맛이 사라지고 보양이 된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단군신화에도 나올 정도로 우리에게 친숙한 마늘은 전국 각지에서 재배되지만 경북 의성과 고흥, 해남, 강진 등지의 마늘이 예로부터 유명하다.
농작물은 아니지만 식탁에 빼놓을 수 없는 식품으로 소금이 있다. 생활필수품인 소금은 물물교환시대에 화폐의 역할을 하였으며 사원에 바치는 공물이 되기도 하였다. 로마시대에는 군인들의 봉급을 곡식이나 돈 대신 소금으로 지급했다고 하며 고대 그리스인은 소금으로 노예를 사들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부터 바닷물로 소금을 만들었으나, 오늘날 우리에게 낯익은 천일제염이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1907년 이후의 일이다.
소금은 그것을 생산하는 일도 어려웠지만 유통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백제 때에는 남한강을 따라 충주, 단양, 영월 등지까지 소금 유통로가 형성되었고 금강 연안에도 소금유통로가 형성되어 영동군 양산면 일대까지 소금을 실은 배가 들어와 소금실들이라는 지명이 지금도 남아 있다. 서울에서 소금을 판매하는 염전으로는 경염전, 마포염전, 용산염전 등이 있었다.
유통구조는 소금을 거래하는 상인들이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생산된 소금을 싣고 와서 경강의 여객주인(旅客主人)에게 넘기고 여객주인은 다시 시전상인인 염전에게 넘겨 소비자들에게 파는 구조였다. 조선 후기의 소금 1섬 가격은 쌀값의 2분의 1에 해당하는 2냥 정도였지만 소금이 흉년이 든 해에는 값이 올라 4,5냥이 되기도 했다. 소금 상인들은 이러한 가격차를 이용하여 재산을 늘리기도 하였다.
서해안 염전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부터 바닷물로 소금을 만들었으나, 오늘날 우리에게 낯익은 천일제염이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1907년 이후의 일이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고구마, 감자, 옥수수, 호박, 토마토 등이 우리나라에 들어왔는데, 요즘 사람들이 건강식품으로 즐겨 먹는 호박은 원래 호과(胡瓜)라고 불렀고 『성호사설』에 보면 18세기 초에 들어온 것을 알 수 있다.
이중 고구마와 감자는 재배방법도 쉽고 가뭄을 잘 견디며 생육도 좋아 급속도로 전국에 퍼져 나가 대표적인 구황식품이 되었다. 고구마는 18세기 중반 통신사 조엄이 대마도에서 들여와 경상도를 중심으로 재배되다가 경기도 아래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감자는 이규경이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의하면 1824년과 1825년 사이에 관북에서 처음 들어왔다고 실려 있다.
볼리비아를 중심으로 한 남아메리카의 안데스 산맥의 저지대나 멕시코가 원산지인 것으로 추정되는 옥수수는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었다. 그래서 이름조차 중국의 음인 위수수에서 유래하여 우리식 발음인 옥수수가 되었다. 오늘날 감자와 옥수수는 강원도의 특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가 되었다. 특히 강냉이 밥, 강냉이 수제비, 강냉이 범벅과 같은 주식과 옥수수 설기, 옥수수 보리개떡, 올챙이묵 등은 강원도의 대표 음식이며 늦은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강원도의 모든 길에는 찐 옥수수가 널려 있다.
일월산 약초 © 이종원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생리에 관계된 것을 비천하게 여겼다. 그러나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생명을 지키고 또 죽은 사람을 보내는 데에도 모두 재물이 필요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의 특산물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1 : 살고 싶은 곳, 2012. 10. 5., 신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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