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99]학창시절 친구들의 소중함
아직은 스무 살 넘어서 생긴 일들은 거개 다 기억하는 편이지만(과음으로 필림 끊어지는 것말고는), 어린 시절과 초중등시절 친구들과의 헬 수 없었을 에피소드들은 이상하게도 거의 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제 모처럼 고교 3학년 같은 반 친구 네 쌍과 모임을 가졌다. 오전엔 정읍 구절초축제 구경을 한 후, 옥정호식당에서 점심(송어회+매운탕)을 하기로 했으나, 나는 다른 친구의 혼사 때문에 축제는 가보지 못하고 점심에 합류했다. 이후 옥정호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이 좋은 카페(그랑게)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수다를 떨며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대부분 경험해 봤겠지만, 학창시절의 '추억 더듬기'만큼 재밌는 것도 별로 없을 터. 선생님들 품평회를 거친 후 입학한 지 벌써 50년이 되므로 동기동창들의 근황 파악이 주요 화제였다. 그런데, 오늘 새삼 놀라운 것은, 그들은 내가 모르는 나에 대한 일화들을 나보다 훨씬 더 많이, 자세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친구가 나에게 가랑이 사이에 머리를 거꾸로 박고 사진찍은 것을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앨범에 사진이 있다며 귀가한 후 찾아보니 언젠가 없앤 모양이어서 서운했다. 비만 오면 교복 윗도리를 벗어 빙빙 돌리며 비를 맞은 버릇이 있었던 모양이다. 또한 낡은 신발의 뒤축을 항상 구부려 신고 다녀 선생님한테 혼이 많이 났던 것은 기억한다. 그런데, 그 이유는 시골 농사꾼인 아버지께 신발 사달라는 말을 매주 내려가면서도 차마 하지 못한 것때문이었다. 하여, 일부러 불량학생처럼 보이려고 교복 후꾸도 잠그지 않고, 가방은 삐딱하게 옆구리에 끼고, 교모도 당연히 쓴둥만둥 다닌 것이다. 말하자면 '개똥철학자' 흉내를 철저하게 낸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교복 살 돈이 없으니, 전주 남부시장에서 구입, 군복을 까맣게 물들인 ‘스모루’라는 바지를 입고 다녔으니, 문제아도 아닌 문제아가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고교시절 나의 기행(맨발로 옥상 모서리를 걸어다니는 등)은 그렇게 시작됐다. 가난 때문에. 흐흐. 한 친구는 우리집에 와봤다는데 전혀 기억이 없다. 무협지를 100여권 쌓아놓고 읽더라, 또 한 친구는 당시 베스트셀러였다는 『김찬삼 세계여행기』라는 큰 책을 끼고 다녔다고 하는데 그것도 기억이 없다. 단지, 띄엄띄엄 몇 개 생각나는 것은, 2학년때 흥사단을 몇 번 나가며 『기러기』라는 잡지와 함석헌 선생이 펴내는 『씨알의 소리』라는 월간지를 접하여 정기구독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자투성이의 이기백 교수 『한국사신론』이라는 책을 통독 탐독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 크게 화제가 된 것은 고교생 주제에 벌인 일탈逸脫행위들, 음주와 흡연이야기였다. 한 친구는 완전 ‘범생’으로 공부밖에 몰랐다며 놀랍다는 말을 연신 했다. 하기야 어떤 친구는 하숙집 주인하고 그렇고 그런 관계로 공짜로 다녔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야자(야간자습) 시간에 생일을 축하한다며 월담을 하여 중국집에서 빼갈 한 도꼬리를 친구들과 마시고 왔는데, 앞자리의 공부 잘하는 친구가 술 냄새난다며 담임에세 찔렀다. 담임의 호출에 바짝 쫄았는데, 다행히 선생님이 “졸업하고 나중에 막걸리 한잔 하자”며 때리지도 않고 보내준 것이 두고두고 고마워, 졸업 20주년 기념식때 체육관에서 1반에서 7반까지 돌며 업어드린 적도 있다. 아무튼, 결코 자랑스럽지 않은(그렇다고 쪽팔리지도 않지만) 내 고교시절 ‘과거의 퍼즐’이 나를 목격하고 증언하는 몇 친구들로 인하여 하나하나 맞춰지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들 말고, 누가 나의 10대 후반(질풍노도는 아니다)의 시시콜콜 일화들을 기억해 말해줄 것인가.
말하자면, 이제부터 10년이 될지, 20년이 될지는 모르지만, 인생 후반 ‘제2의 삶’에 있어 없어서는 안될, 분기별로 한번쯤 만나 같이 가야 할 친구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올 여름 심한 장마와 폭우로 바짝 말라붙어 거북등을 보이던 옥정호가 출렁출렁 물이 차 보기에 심히 좋았다. 나만 옆지기 아내가 없어 조금은 쓸쓸하기도 한 가을날의 일기. 전라고6회 동창회 | [찬샘편지 90신]초여름 주말 ‘초로初老’의 부부동반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