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구치9 - 270여년 통신사를 보내며 선린우호한 관계가 메이지유신으로 끝나다!
일본 혼슈 서쪽에 자리한 시모노세키 는 부산에서 밤에 배를 타면 다음날 아침에 도착하며 후쿠오카 에서
기차를 타도 가까운데.... 야마구치현의 서북부 바닷가에 자리한 옛 조슈번의 수도 하기(秋 추) 시 는
시모노세키 에서 후쓰(普通 보통, 완행) 기차를 타야 하니, 열차에 따라서는 나가토 長門(장문) 역
에서 한번 갈아타거나.... 또는 고구시 小串(소환) 역과 나가토 長門(장문) 역 에서 2번 갈아 타야 합니다.
동서고금 5천년 역사에서 이웃나라 끼리는 99% 철천지 원수지간 이니, 국력이 강해지면 예외없이
이웃나라를 핍박하고 조공을 바치라고 요구하며 이를 소홀히 하게되면 침략을 하게되니 100년
평화 가 드문데.... 두 나라가 평화롭다는 것은 국력이 서로 비슷하다는 것이니 힘이 있으면서도
우리는 전쟁 보다 평화를 사랑한다며 이웃의 약한 나라를 침략하지 않는 사례 는 찾아볼수 없습니다.
이웃나라의 침략을 피하는 길 중에서 첫번째는 고려가 몽골에게 하거나 조선이 명나라에 햇듯 굴복해
특산물과 사냥용 매에 처녀등 조공을 바치고 말을 기르고 배를 만들어 바치면서 전쟁시 앞장서서
화살받이가 되거나 두번째는 국력과 군사력 을 길러 적이 감히 침략하지 못하게 하거나, 세번째는
군사력이 약하다면 제3국에 조공하며 동맹 을 맺어서는 이웃나라의 침략에 대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조선과 일본은 1603년에 에도 도쿠가와 막부 성립후에 화의하고는 12차례 통신사 가 왕래하며 서로
선린우호 했는데, 400명에서 500명에 이르는 통신사가 일본에 가면 일본은 무려 1년 반의 예산을
들여 극진히 대접했으니.... 1875년 운양호 침범까지 270여년간을 평화롭게 지냈는데, 인류역사에
유례를 찾아볼수 없는 예외적인 평화시대로 메이지유신으로 막부가 무느지면서 평화 는 끝나게 됩니다.
1864년 막부군 15만의 1차 조슈 정벌 로 존왕양이파는 숙청되고 친막부파 집권후 4천명 조슈번에
대해 80명 으로 시작한 다카스키 신사쿠와 이토 히로부미의 반란 은 시모노세키 점령 후에는
야마가타 아리토모등이 합류하니 300명으로 불어나서는 조슈군을 격파하니 조슈군의 개편은
오무라 마스지로 가 맡았는데 1865년 3월 군령권을 통일해 1866년 막부와 2차 전쟁 에 대비합니다.
일본의 전통인 사무라이 군대 를 버리고 평민 까지 징집한 국민개병제 로 근대화를 성공시킨 조슈번의
오무라 마스지로는 후일 1877년 정한론 문제로 사쓰마번의 사이고 다카모리가 1만 2천 병력으로
세이난전쟁 반란을 일으키자 신정부군을 총 지휘해 구마모토 방어에 성공하는데.... 근대화로 사무라이
들이 직장을 잃고 칼을 차는 특권도 폐지되어 토사구팽 당하니 다카모리는 불만을 밖으로 돌라려 했다는?
그 전에 존왕양이파 인 조슈번(야마구치현) 지사 들은 교토로 올라가 일왕의 공경들을 움직여서
260여년간 일본을 통치해온 에도 도쿠가와 막부 로 부터 권력을 일왕(천황) 에게로 회수
하려다가 라이벌인 사쓰마번(가고시마) 이 에도 막부와 연합해 저지 하니 큰 전투가 벌어집니다.
이른바 1865년 4월의 금문의 변 으로 조슈번 은 병사가 적어 중과부적으로 참패 하는데, 당시
교토 전투에서 살아남았던 가쓰라 고고로 는 숨어지내다가 마침내 조슈번에 복귀합니다.
일본 270개 번 중에 하나에 불과한 조슈번이 무력으로 조정을 장악 하려다가 실패한 것입니다.
가쓰라 고고로가 없을 때 다카스키 신사쿠 와 이토 히로부미 는 저 영국인 글로버의
제안으로 시모노세키를 개항 해 무역의 이득을 취하려다가 양이(攘夷) 를 부르짓는
조슈번의 강경파 무사 들로 부터 원성을 사니...... 암살을 피해 번 밖으로 도주 합니다.
조슈번으로 돌아온 가쓰라 고고로 (기도 다카요시) 가 "개항 포기" 를 선언하고는...
강경파 무사들을 달래면서 신사쿠와 히로부미도 귀국 하는데, 이 무렵 막부는
프랑스 차관 240만불로 요코스카를 툴롱항 처럼 개조하며 2차 조슈 정벌 을 선언합니다!
*** 다카스키 신사쿠가 1천명으로 함락한 규슈 제번 막부군 2만이 지키던 북슈규 고쿠라성 ***
이에 시코쿠 도사번 출신의 지사로 일본 최고 검객인 사카모토 료마 는 견원지간인 조슈와
사쓰마번간의 화해 를 추진하고자 사이고 다카모리 에 이어 사쓰마번 중신들까지 설득
하여 신뢰가 쌓이자 사쓰마의 자금을 빌려 나가사키에 해운회사 가메야마사추 를 설립합니다.
한편 사카모토 료마 의 친구인 도사번의 나가오카 신타로 는 교토 금문의 변 에서 조슈군과
함께 싸운 인연을 이용해 조슈번의 가쓰라 고고로 (기도 다카요시) 등을 설득합니다.
료마 는 사이고 다카모리 와 담판해 사쓰마번의 이름으로 무기를 구입 해 조슈군에게
넘겨 주는데..... 당시 상하이 에는 미국 남북전쟁이 끝나 무기가 산 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1865년 7월 이토 히로부미 와 가오루는 나가사키 에서 무기 중개상 글로버 를 만나서는
소총 7천정( 후장총인 신식 미니에총 4천정 ) 과 군함 을 구입하는데 당시 막부군
소총인 게벨총은 전장총 구식으로... 미니에 후장총은 전장총 10정의 위력 이 있었습니다.
저 스코틀랜드 출신 영국인 글로버 는 서양 무기를 일본에 중개해 막대한 돈을 벌어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나가사카 미나미 야마테 언덕에 저택을 지으니....
글로버 가든 이라 불리는 곳인데 훗날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 부인" 의 모델이 됩니다.
나가사키에 주둔한 미해군 대위 핀커턴은 현지처 를 두기로 하고 열다섯 살의 꽃다운 게이샤
조초 상 을 만나 동거만 하려는데 조초 상은 반드시 결혼식 을 올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몰락한 화족가문 여식으로 게이샤 노릇을 하고 있지만 아버지 영전에 부끄럽지 않아야 하니까!
조초상 은 핀커튼과 결혼을 위해 종교까지 기독교 로 바꾸었지만 남편은 미국
으로 떠난지 3년, 언젠가 핀커턴이 “나비(조초) 야!” 라고 부르며 나타날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이때 부르는 아리아 가 저 유명한 "어떤 갠 날" 입니다.
그분은 떠나기 전 말씀하셨어요
오 버터플라이 귀엽고 자그만한 아가씨
예쁜 저 새가 보금자리를 트는 계절에
돌아오겠오 라고 했어요 그분은 반드시
돌아오실거예요 울기는 왜 울어 의심하지 말아야지요
하지만 핀커턴은 미국에서 케이트와 결혼 했으니..... 하녀 스즈키는 차마 말하지 못합니다!
마침내 핀커튼이 돌아왔으나 새 부인 케이트 를 대동한 것은 아들을 찾으러 온 것이라!!!
피는 물 보다 진하다고 했으니, 아버지가 아들을 찾으러 다시 온건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비로소 자신이 그토록 믿었던 남편(?) 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명예를
잃고 사느니 죽는게 낫다는 아버지의 말을 떠올린 조초 상은 세살배기 아들 트러블의
눈을 가린 뒤 병풍 뒤로 들어가서 자결 하는데 사실을 모르는 아들은 마냥 즐거워 합니다!
오페라 "나비 부인" 은 오랫동안 미국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오페라 로 저 유명한
브로드웨이 뮤지컬 "미스 사이공" 의 원천이 바로 나비 부인 이니 나비 부인의
후속작으로 클로드는 베트남 여인 킴 과 미국 장교 크리스 의 비극적 사랑을 그립니다.
월남전쟁에서 한국군인과 사업가들이 베트남 현지처 에게서 낳은 1만여명 의 "라이 따이한" 과
필리핀 에 간 사업가와 유학생들이 현지 처녀에게서 낳은 3만 에 달하는 "코피노" 도 문제라!
한국인 아버지들은 처자식을 버리고 도망쳐온 후에 새 장가를 들고는 제 자식들을 찾지 않습니다!
나비 부인에서는 핀커튼이 제 자식을 찾고자 다시 일본에 오고 프랑스 정부와 미국 정부 는
적국인 베트남 과 교섭을 하여 자기네 피가 섞인 아이들 은 모두 데려가서는 자국에
입양 을 시켰는데, 대한민국 정부 는 현재 까지도 "모르쇠" 로 일관하는 것이 차이점이네요?
연극 "나비 부인" 을 본 푸치니가 만든 오페라가 전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다 보니
영국에서 발레로도 제작되었는데 인스부르크 발레단 의 엔리케 가사 발가는 게이샤
조초(나비)역 에 한국의 강수진 을 염두에 두고 안무했으니 참신한 해석이 돋보인다나요?
한편 료마 는 조슈번이 일방적으로 신세를 지면 곤란하다고 보아 흉년으로 고통받는
교토 주둔 사쓰마군을 위해 조슈산 쌀을 중개해 조슈번의 체면 을 세워줍니다.
일본에서는 부모들이 아이에게 어릴적 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하는 말 이 있으니...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 迷惑をかけない ( 메이와쿠오카케나이, 폐를 끼치지 않는다 ) 라!
해서 버스를 탈 때도 친구가 토큰 하나 내어주는 법이 없으며 셋이서 술을 마시고
10,000엔이 나오면 와리깡 이라고 각기 3,333엔씩 동전까지 세어 정확히 나누어 계산 합니다.
이는 남에게 신세 를 지면 "빚" 이 되는 것이니 살아 생전에 그걸 갚지 못하고 죽으면 "인간이
아닌 것" 이라! 해서 부채 의식을 지니지 않도록 료마가 해결해 준 것이지요? 어떻게 보면
가식이라 할수도 있지만 조슈인들은 그렇게 해서라도 사쓰마인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다는?
이후 교토에서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로 조슈번의 가쓰라 고고로 (기도 다카요시) 와 사쓰마번의
사이고 다카모리 는 토회간살적 ( 討會奸薩賊 ) 오랜 원한 을 씯고는 "동맹" 을 맺습니다.
교토에서 전투한 일로 처음에는 자리에 앉기는 커녕 얼굴을 마주 보는 것도 거부했던 원수들 인데...
료마가 자존심 문제 로 주저하는 다카모리 에게 “조슈가 가엽지 않느냐” 고 말하니 깨우친 다카모리가
먼저 머리를 숙이고 조슈에 동맹을 제안하는데.... 임진왜란 직전에 조선과 일본이 서로 먼저 국서를
보내지 않을려고 신경전을 벌였던 일이 떠오르니, 명칭을 '회답 겸 쇄환사 (回答兼刷還使)' 라 했습니다?
해서 사카모토 료마 는 메이지 유신 3걸 중에 하나인 사이고 다카모리 를 큰 북 과 같으니... 크게
두드리면 큰소리, 작게 두드리면 작은 소리 가 난다고 했는데, "포용력과 친화력" 이 컸던
것이라! 말이 쉬워 그렇지.... 명예가 중한 사무라이가 원수에게 먼저 고개를 숙이는 것은 어렵지요?
조슈번(야마구치현) 하기시 마쓰모토촌 에 요시다 쇼인 이 세운 학숙 쇼카손주쿠 (松下村宿) 에서 기라성
같은 인재가 쏟아졌으니, 메이지유신후 야마구치현이 되면서 이토 히로부미 로 부터 아베신조 까지
무려 8명의 총리와 대신(장관) 에 장군을 배출했듯이... 사이고 다카모리가 태어난 가고시마 도 그러합니다.
가고시마의 가지야 마을 加治屋町(가치옥정) 에서도 메이지 유신 3걸 중에 2명인 사이고
다카모리 와 오쿠보 도시미치 외에도 러일전쟁시 육군 총사령관 오야마 이와오 원수
그리고 대마도 해전의 도고 헤이하찌로 제독과 해군대신 사이고 쓰구미치 가 탄생합니다.
1866년 5월 도쿠가와 에도 막부는 조슈 2차 토벌 을 결의하고 조슈번주 부자의 에도 출두 및
36만석 중에 10만석 삭감을 통고하고 쇼군 이에모치 는 오사카성에 대본영 을 설치합니다.
270개 번 중에 하나인 조슈번이 이제는 막부 및 전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게 된 것 입니다?
막부군 10만 대병을 맞아 일본의 270개 번 중에 하나로 인구에서는 웅본이라 전 일본의
60분지 1에 불과한 조슈번 (야마구치) 이 동원한 병력은 4천 으로... 막부군은 세토내해
오시마에 산요의 게이슈, 산인의 이시카와 그리고 규슈의 고쿠라 로 쇄도해 들어옵니다.
그래도 천만 다행인 것이 사카모토 료마의 주선으로 원수인 사쓰만번과는 비밀리에 동맹을
맺었으니, 사쓰마번 이 조슈번의 하기시 공격을 거부 해 전투는 5곳 중에 4곳 에서만
벌어지게 되는데.... 6월 7일 막부군은 조슈번 변경 오시마 大島 를 맹포격 하고는 점령합니다.
조슈번은 불과 4천의 병력으로 10만 막부군을 맞아 저 네곳의 전선을 방어해햐 하는 위기 상황에서
육상전은 오무라 마스지로 와 이토 히로부미 에게 맡기고..... 해군 총독 다카스키 신사쿠 는
점령된 오시마 탈환 을 위해서 200톤급 군함 헤이인마루 1척을 이끌고 6월 12일 야밤에 기습 합니다.
막부군은 10만 대군으로 공격해온지라 4천에 불과한 조슈번 이 감히 반격할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해 방심 했으니.... 1천톤급 후지산등 서양 군함 4척과 일본 전함 6척등 10척 이 있었으나
야밤중이라 엔진을 끈 상태여서 움직이지 못해 괴멸 당하니 신사쿠는 오시마 탈환에 성공 합니다!
전격적으로 오시마 섬 을 되찾은 다카스키 신사쿠 는 숨돌릴 사이도 없이 1천 결사대 를
이끌고 에도 막부의 직할 영지이자 규슈를 통제하는 전략 요충으로 구마모토와
후쿠오카등 규슈 6개 번에서 2만명 이 집결해 있던.... 북규슈의 고쿠라성 을 공격 합니다.
2만명의 적군을 향해 불과 1천명 으로 돌격하는 무모한 공격에서... 5척의 군함을
2개 함대로 나누어서는 1함대는 신사쿠 가 지휘해 다노우라 포대 를
공격하고 2함대는 도사번의 사카모토 료마 가 지휘해 북규슈 모지 를 공격합니다.
6월 17일 료마 함대의 지원 을 받은 야마가타 아리토모 는 500명 을 인솔해 상륙전 을
펼친 끝에 7월 2일 고쿠라선 방어선 을 돌파하고 7월 27일 총공격을 실시 합니다.
당시 막부군 총사령관 은 집정관인 오가사와라 나가미치 인데, 막부는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 로 부터 600만냥 군자금과 일곱척 군함 차용을 교섭중 이었습니다.
막부군은 10만대군이라 해도 각 번에서 온 군대는 목숨을 버릴 생각이 없었고 무기도 재래식 이라
화력이 약했는데.... 7월 20일 쇼군 이에모치 가 갑자기 사망하고 막부가 혼란에 빠지자 의욕이
저하된 나가미치가 도망치니 막부군은 31일 고쿠라성에 불을 지른후 퇴각하고 8월 2일 함락됩니다.
4천에 불과한데다가 평민이 섞인 조슈군 이 10만 사무라이 막부군을 이긴 이유로는 막부에 의해
동원된 각 번의 군대는 남의 전쟁 이지만... 조슈군은 자기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로 사기충천 한데다가 나가사키 영국인에게서 구입한 조슈번의 무기는 대포와 기관총 에
신식 소총은 막부군 재래식 소총 10자루의 위력 을 가졌으니 화력에서 앞선 때문 으로 보입니다?
고쿠라성 小倉城(소창성) 은 세키가하라 전투의 용장 호소카와 細川 타다오키 가 번주로 임명되자
규슈 나카스에 있던 본성 을 1602년에 고쿠라 로 옮기면서 축성한 거성 입니다.
1632년 2대 번주 호소카와 다다토시가 구마모토번으로 올겨가면서 오가사와라씨가 번주로 옵니다.
1959년에 일본 정부가 고쿠라성을 재건할 때 1866년 경인년 호랑이 해 에 성이
불탔으므로..... 호랑이 암수 2마리 를 성의 벽에다가 그려 넣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관광객들이 보게되는 저 고쿠라성은 전후에 재건된 것이라는?
이에모치 후임 쇼군 대리 요시노부 는 고쿠라성 함락에 전의를 상실 하고 조정에 조슈정벌
철회를 요청 하는데, 그는 도쿠가와가씨 에서 분가한 히토쓰바시 가문의 당주 로
부친이 번을 다스리다 보니 직할 영지와 가신단 및 군대가 없는 귀공자로 자란지라
자신의 영토 유지를 위한 사생결단 식의 치열한 전투의식 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10만대군이 쌀을 매점 하자 쌀값이 폭등 해 잇코잇기 가 일어나니 버틸수 없었는데 막부가 통치권을
조정(일왕)에 돌려준 대정봉환 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슈번과 사쓰마번에 히젠번과 도사번 이
5천으로 교토를 공격할 때 막부는 1만 5천 대군에도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패배했으니 무진전쟁은
신정부군이 승리해 메이지유신 으로 이어지고 신정부는 침략야욕을 드러내 조선에 운양호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