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대 에쿠스를 기억하는가? 순수 현대 기술로 만들어진 모델이 아닌, 미쓰비시와 공동 개발한 모델이다. 1999년 출시됐으니, 벌써 19년 전 일이다. 현대자동차는 에쿠스라는 이름으로 판매를 시작했고 미쓰비시는 프라우디아라는 모델명을 사용했다. 당시 에쿠스의 목표는, 1997년 메르세데스-벤츠 E-클래스(W124) 플랫폼으로 만들어진 쌍용자동차 체어맨에 대항할 모델을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후륜구동 모델인 체어맨과 달리 에쿠스는 전륜구동 모델이었기에 쇼퍼드리븐 자동차로는 매력이 없을 줄 알았다.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고 에쿠스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몰랐다. 기업체 사장님을 비롯해 힘깨나 쓰는 형님들까지 에쿠스를 선택했다. 그렇게 많은 이의 선택을 받은 에쿠스는 승승장구하며 2세대로 진화한다.
2세대 에쿠스의 큰 변화는 디자인 변화와 구동 방식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에쿠스가 속한 카테고리는 쇼퍼드리븐으로, 곧 안락함과 핸들링에 유리한 후륜구동이 당연하게 여겨진다. 후륜구동으로 등장한 2세대 에쿠스 역시 많은 사랑을 받았다. 3세대의 등장은 현대자동차 그룹의 큰 변화와 맞물린다. 바로 고급 브랜드인 제네시스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는 제네시스 브랜드를 출범하며, 3세대를 공개한다. 3세대는 에쿠스라는 이름 대신, EQ900으로 명명됐다. 단, 수출형 모델은 G90로 나갔는데, 제네시스(모델)는 G80로 변경하며 통일성을 부여했다.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인 3세대 페이스리프트 모델. 일단, 이름부터 수출명과 같은 G90로 바뀌었다.
디자인의 변화를 보면, 이름 바뀐 건 아무것도 아니다. 4세대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파격적인 변화다. 헤드램프는 위아래 2개씩 4개를 배치했고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주간주행등은 펜더까지 깊숙이 이어진다. 크레스트 그릴은 오각형 형태로 아래쪽을 늘어뜨려 웅장한 오라를 풍긴다. 옆모습은 간결하면서도 품위 있다.
시선을 사로잡는 휠 디자인은 보기에는 좋지만, 씻을 때는 고생 좀 하게 생겼다. 테일램프는 2단 구성이다. 아래쪽은 양쪽을 이어주며 넓고 낮은 느낌을 준다. 머플러도 크레스트 그릴 형상으로 구현해 G90의 통일성을 높였다. 사실 G90를 처음 마주한 건 시승 전 프리뷰 행사장에서였다. 당시 촬영을 금지해 오직 눈으로만 보고 머리에만 저장해야 했다. 당시 차내를 봤던 느낌은, 겉모습이 너무 변했기에 상대적으로 심심했다. EQ900과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고 버튼류의 배치 등 변화의 폭이 작았기에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시승차를 천천히 둘러보고 만져본 느낌은 첫날과 달랐다.
유럽산 모델은 역사가 깊은 만큼 장인 정신과 최신 기술로 유행을 선도하지만, G90는보다 안정적인 방식으로 다가선 듯하다. 고급스럽지 않다는 건 아니다. 질감도 좋고 시트도 훌륭하다. 다만, 올드한 느낌이 강하게 남는다. 부쩍 추워진 날씨에 엔진 예열 시간 동안 12.3″ 대형 디스플레이 모니터 이곳저곳을 눌러본다. 반응은 빠르고 화면 전환은 부드럽다. 한 가지 재미난 기능을 발견했는데(EQ900 때도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운전자의 키와 몸무게 그리고 앉은키가 어느 정도 인지 입력하면 시트 포지션이 최상의 운전 자세를 추천해주고 운전자에게 추천 포지션으로 바꿀 것인지 물어온다. 이에 응하면 시트가 자동으로 움직이며 운전 자세를 잡아준다. 내 경우는 등받이 각도가 약간 뒤로 움직이는 정도였다. 이 기능은 G70에도 있다고 누가 알려줬다. G80는 안 타봐서 모르겠단다. 나도 G80와는 인연이 없어 해당 기능 유무는 잘 모르겠다.
계기반은 전형적인 2개의 원형 스타일이다. G70에 올라간 디지털 클러스터도 올릴 수 있었을 테지만, 스포티한 느낌보다 중후한 느낌을 살리려는 의도로 보인다. 대형 세단에 걸맞은 NVH. 고요하다. 시승차는 3.3T 레터링을 두른 모델로 8단 자동변속기와 4륜구동의 조합이다. 최고출력은 370마력(6000rpm), 최대토크는 52.0kg·m(1300~4500rpm)다. 출력의 갈증은 없다. 스포티하게 달리는 자동차가 아니다 보니, 차라리 웅장하게 움직이는 크루징 능력이 더욱 부각돼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는 모델이다. 이런 모델은 힘이 세다고 해서 발을 살짝만 올려도 경거망동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언제나 차분하게 움직이며 탑승객의 눈살을 찌푸리지 않게 해야 한다.
가다 서기가 반복되는 시내 구간에서 매우 편안하다. 브레이크 답력도 만족스럽다. 과거 현대자동차는 초반에 답력이 몰려 있어 안전벨트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했지만, 그런 모습을 더는 찾아보기 어렵다. 페달을 밟는 정도에 따라 세심하게 차를 세울 수 있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만큼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고속도로에서 드라이브 모드를 스포츠로 돌렸다. 시트 좌우에서 상체를 잡아주는 천사의 손길이 뻗어 나와 허리 부분을 떠받치며, 좌우로 요동칠 상체를 옥죈다.
가속 페달은 민감해지고 철저하게 숨겼던 엔진음이 본색을 드러내지만,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온다. 스포츠카처럼 감성을 채워줄 음색은 아니지만, 달릴 준비가 끝났다는 느낌은 충분히 전해준다. 무게감이 늘어난 스티어링 휠은 운전자가 의도한 라인을 그리기 수월해진다. 차체는 차분하게 코너를 대하고 타이어는 끈질기게 아스팔트를 물고 늘어진다. 순간 2세대 에쿠스를 시승할 때가 떠올랐다.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로 코너를 돌아 나가려는 순간 자세 제어 장치가 개입해 너무 쉽게 한계점을 보여줬던 기억. 그때와 비교하면 굉장한 발전이다. 참고로, 오늘 시승한 3.3 터보 모델과 3.8 자연흡기 모델의 차이는, 어댑티브 서스펜션의 유무다. 3.8 모델은 좀 더 느긋한 주행을 원하는 사람에게 어울린다는 의미다. 물론, 동일 트림 기준 3.8 모델이 더 저렴하다.
G90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뒷좌석이었다. 포근하게 감싸주는 시트는 평생 누려볼 수 없는 사치를 부리는 느낌이고 앞좌석 헤드레스트에 달린 모니터는 목적지가 멀더라도 지루할 틈이 없다. 추운 날씨, 따뜻한 열선 기능과 히터는 눈꺼풀을 무겁게 만들며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오랜만에 스쳐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희망찬 2019년을 준비하려 했지만, “내려요”라는 소리에 눈을 떴다. 뒷좌석 느낌을 전하고 싶어도 장시간 잠들어버리는 바람에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G90를 유럽 프리미엄 브랜드 플래그십 모델보다 좋다고 할 순 없다. 그렇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다만, 이 정도의 품질로 만족할 만한 사람은 매우 많다. 가장 중요한 건, 가격 경쟁력이다. 3.8 자연흡기 엔진 럭셔리 트림의 가격은 7706만 원부터 시작해 5.0 프레스티지의 가격인 1억1878만 원까지다. 5.0 프레스티지에서 선택할 수 있는 선택 옵션은 2가지로 가격은 374만 원이니 최고가는 1억2252만 원이다.
3세대 EQ900에서 가장 많이 팔린 트림은 3.8 모델이다. G90 역시 파워트레인의 변화가 없는 만큼 3.8 모델의 판매가 가장 많을 걸로 예상된다. G90를 시작으로 G80의 새로운 모델 그리고 제네시스 브랜드 최초의 SUV가 등장한다면, 본격적인 고급 브랜드 시대를 열 것이다. 분명, 과거보다 좋아진 상품성은 이미지를 끌어올리고 있다. 고급 브랜드를 출범시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주사위는 던져졌으니 좋은 결과가 나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