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전 한국인을 위한 '뽕' 팝(상)
우리나라는 적어도 80년대까지는 민족적, 자주적 지향이 아주 강했던 것 같습니다. 팝송을 듣는데도 미국의 빌보드에만 매몰되기를 거부해, 미국과는 다분히 성향이 다른 유럽에 자주 귀를 돌렸고, 또 그 가운데에서 우리 입맛에 맞는 노래만을 찾아내는 자주성을 발휘한 것이죠. 외국 노래를 듣더라도 우리와 궁합이 맞는 것, 이른바 '한국적 팝송'을 찾아낸 겁니다.
당연히 해외의 공신력 있는 차트와는 따로 놀며 유독 국내에서만 인기를 얻은 노래들이 줄줄이 등장했지요. '우리들만의 리그'가 형성되었던 겁니다. 그것이 메이저리그이든 마이너리그이든 상관없이 우리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취사선택해 향토적 팝송을 일궈낸데 따른 결실이었죠. 팝송의 토착화라고 할까요.
그 이전에는 확실히 미국의 빌보드차트가 팝송 청취의 기준이자 신주단지였지만 1970년대 후반 특히 1980년 초반 들어서는 외국의 인기 차트와는 상관없이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팝송이 기(氣)를 펴기 시작합니다. 저는 그것을 한국인을 위한 팝이라는 점에서, '코리안 뽕 팝'이라 부르고자 합니다. 캬~
물론 미국 문화가 밀물처럼 들어오던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이런 음악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제가 이번에 말씀드리는 음악은 '코리안 뽕 팝'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입니다. 이번에는 바로 이 노래들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추억의 편린들을 재생해보고자 합니다.
처음 등장하는 팀은 바카라(Baccara)라는 여성 듀엣입니다. 박카스가 아니라 바카라입니다. 스페인에서 태어난 메이테 마테우스(Mayte Mateus)와 마리아 메디올로(Maria Mediolo)로 결성된 이들은 주로 디스코의 강국 독일에서 활동했죠. 1978년 전국 방방곡곡을 초토화시킨 바로 그 노래.. 'Yes sir, I can boogie'! 멜로디는 몰라도 제목은 친근하지 않습니까?
우리말로 '예 선생님, 부기 춤 출 수 있어요'라는 타이틀만 봐도 뭔가 끈적끈적하죠? 목소리도 교태가 넘쳤어요. 죄송합니다. 전 생래적으로 이런 쪽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두 여성은 다른 노래에서 또 이렇게 외칩니다. 'Sorry, I'm a lady'. '죄송해요, 저는 숙녀에요'라고(우리보고 어쩌라고 -.-). 비록 이 두 곡은 미국 빌보드차트에는 상륙하지 못했지만 영국에선 탑 텐에 올랐고 이러한 성공으로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참가하기도 했답니다. 참가만 했습니다 -.-
1980년대가 되면서 코리안 뽕 팝은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합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린 팀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주목해주십시오. 둘리스(Dooleys)와 놀란스(Nolans)! 두 팀의 이름을 보고 뭔가 여러 가지가 비슷할 것 같다는 강력한 포스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정말 공통점이 많은 두 그룹이었는데요, '하나씩 하나씩' 설명해 드릴 게요. 우선은 가족들로 구성된 그룹이란 점입니다. 둘리 가문의 자녀들로 구성된 둘리스는 악기를 직접 연주하는 남녀혼성 밴드고 놀란 가(家)의 네 자매로 결성된 놀란스는 보컬그룹이라는 약간의 차이점이 있지만 가족이라는 끈으로 엮였다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죠. 물론 신세대분들에겐 둘리스 보다는 아기공룡 둘리가 더 친숙하겠지만요. 둘째는 모두 영국 출신이라는 점이구요,
그리고 세 번째는 당시 세계적인 규모로 치러졌던 일본의 <동경 국제가요제>에서 큰 상을 수상한 전력이 있다는 점입니다. 둘리스는 'Body language(퀸의 노래와는 동명이곡)'란 곡으로 금상을, 놀란스는 'Sexy music'으로 대상을 거머쥐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접점은 미국과 영국, 심지어는 이들에게 영광을 준 일본에서보다는 우리나라에서 정말 핵폭탄처럼 가공할 인기를 누렸다는 것이죠.
둘리스는 'Body language' 말고 그 다음에 발표한 'Wanted'란 곡으로 대한민국을 유린해버렸죠. 이 노래가 얼마나 인기가 있었으면 25년이 흐른 후인 올 여름, 그 추억에 기대어 개그맨 조혜련씨가 '아나까나 송'을 발표했겠습니까? 둘리스는 다음 음반에서 'The dancer'란 곡으로 그 인기를 이어갔습니다. 당시 팝 팬들에게는 보물과도 같았던 잡지 <월간팝송>의 1981년 3월호 표지인물이 둘리스였는데, 기사 제목을 보니 이렇게 되어있군요. '아바(Abba)에 도전하는 최선두 주자 둘리스, 한국에 오다!!'
8인조(6인조가 둘리 가족)였던 그들은 내한공연이 거의 없던 1980년대 초반에 수시로 찾아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공연을 한 외국 가수'라는 기록을 놓고 현재까지 에어 서플라이(Air Supply)와 경쟁할 정도죠. 너무 자주 공연을 해서 제 살을 깎아 먹었지만 우리에겐 팝 공연에 대한 갈증을 다소나마 풀어준 참 고마운 그룹으로 기억됩니다.
그에 비해 놀란스는 딱 한 차례 내한공연을 가졌습니다. 이게 기억나는군요.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땐 아파트에 살았는데 어느 날 함께 엘리베이터를 탄 여자가 놀란스의 공연을 보고 왔는지 놀란스의 팜플렛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무지 오래된 일인데 그걸 어떻게 기억하냐고요? 놀란스 멤버들이 다 예뻤거든요. 아무튼 놀란스도 1980년대 초반에 'Sexy music'을 비롯해서 'I'm in the mood for dancing'이나 'Don't love me too hard' 같은 노래들로 우리나라 라디오를 석권했습니다.
다음은 1980년대 롤라장의 단골 레퍼토리였던 'Harlem desire'와 'I'm gonna give my heart'로 날렸던 런던 보이스(London Boys)! 런던 출신임을 유난히 강조했던 이 두 소년들은 그 밖에도 'London nights'나 'My love' 같은 노래들로 1980년대 후반, 대한민국 격동의 역사와는 사뭇 다른 경쾌하고 흥겨운 노래들로 인기를 누렸죠. 1987년에는 한양대학교에서 공연을 하기로 했지만 '외국의 싸구려 대중음악 공연을 우리 학교에서 할 수 없다!'는 그곳 학생들의 반대로 무산되기도 했습니다.
그럼 이렇게 영국 뮤지션들만 인기가 있었냐하면 그건 절대 아니죠. 코리안 뽕 팝의 최대 강점은 비록 유럽 국가 지역에만 한정된 감은 있지만 나름대로 여러 나라들의 대중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입니다. 독일, 스위스, 스페인, 노르웨이, 프랑스, 이탈리아, 심지어는 필리핀까지요.
필리핀 출신의 포크 가수 프레디 아길라(Freddie Aguila)가 부른 'Anak'을 기억하시나요? 가출한 아들에게 바치는 이 노래는 1978년 가을부터 1979년 봄까지 우리나라를 휩쓴 불세출의 스매시 히트송입니다. 거리든 다방이든 사방이 깡그리 이 노래로 덮였으니까요.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프레디 아길라는 1979년 MBC 주최 <서울 국제가요제>(일본에지지 않으려고 우리도 국제가요제를 만든 거죠)에 게스트로 초대될 정도였습니다.
지금부터는 'Made in Germany'입니다. 독일 출신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누린 팀은 모던 토킹(Modern Talking)일 것입니다. 디터 볼렌(Dieter Bohlen)과 토마스 앤더스(Thomas Anders) 두 남자로 구성된 이들은 'You're my heart, you're my soul', 'Brother Louie', 'Atlantis is calling (S.O.S. for love)', 'Cheri cheri lady', 'Sexy sexy lover' 등이 사랑 받으면서 1980년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가공할 파급력을 전파하며 나이트클럽과 롤라장을 평정했죠. 물론 이들도 유럽과 아시아에서의 인기와는 상관없이 북미에선 반응이 썰렁했습니다.
1977년 독일에서 결성된 아라베스크(Arabesque) 또한 우리에겐 잊을 수 없는 그룹이죠. 미카렐라 로즈(Michaela Rose), 산드라(Sandra), 자스민 엘리자베스 베터(Jasmin Elizabeth Vetter)로 구성된 아라베스크는 'Hello Mr. Monkey'로 코리안 뽕 팝에 한 획을 그었죠. 이 노래는 당시 국내 최고인기를 구가하던 '강병기와 삼태기'가 일부 차용해 한층 기성세대의 뇌리에 박혀 있고, 2001년에는 왁스가 'Money'란 노래로 번안해서 불러서 그 영향력을 대물림했지요.
그러나 팝 마니아들은 여기서 얘기를 그치면 섭섭해 합니다. 'Someone is waiting for you' 정도는 나와야 '으음, 음악 좀 들었네!'라는 소리를 하죠. 1980년대 초반에는 조금 전에 언급한 MBC 서울 국제가요제에 초대 손님으로 출연해, 앞에 언급한 두 곡을 포함해 여러 노래를 주구장창 불렀습니다. 멤버 중 보조개가 선연히 기억되는 섹시녀 산드라는 'Moonlight flower'의 주인공인 루마니아 출신의 아티스트이자 'Sadness part 1'이나 'Return to innocence'로 유명한 이니그마(Enigma)의 실질적인 인물인 마이클 크레투(Michael Cretu)의 부인이기도 합니다.
몽골의 영웅 징기스칸(Dschinghis Khan)을 이름으로 내건 혼성 5인조 그룹 징기스칸. 국내에선 'Dschinghis Khan', 'Rom', 'Machu Picchu', 'Lorely' 같은 곡들이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에 걸쳐 살벌하게 인기를 누렸죠. 올림픽이 열린 1988년에는 MBC 서울 국제가요제에 참여했다가 남성 보컬리스트 피터 알렉산더(Peter Alexander)가 'Smile again'이라는 영화 주제곡으로 알려진 헝가리 출신의 또 하나 '코리안 뽕 팝 그룹' 뉴튼 패밀리(Newton Family)의 보컬리스트 에바(Eva)와 그만 눈이 맞았죠. 에바의 솔로 곡 'Midnight' 또한 많은 뽕 팝 팬들을 그녀의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참, 둘은 결국 백년가약을 맺었습니다. 뭐,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리안 족으로 독일과 여러 면에서 동질감을 가지고 있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위대한 뽕 팝 그룹 기억나십니까? 그 이름도 잊혀지지 않는 남성 3인조 댄스 팝 그룹 조이(Joy)입니다. 1986년은 정말 조이의 해였습니다. 마돈나(Madonna)도,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도, 심지어는 모던 토킹도 조이라는 유치한 이름을 가진 그룹 앞에선 무릎을 꿇어야 했죠. 'Touch by touch'란 노래는 라디오는 물론 레코드 가게, 카페, 롤라장까지 암세포처럼 삽시간에 퍼졌으니까요.
하늘을 모르고 높이 올라가던 바벨탑처럼 조이의 인기가 올라가자 뵈는 게 없던 그들은 꼼수를 칩니다. 일본 발매를 목적으로 녹음한 노래 'Japanese girl'을 잽싸게 'Korean girl'로 개명해 인기에 영합하는 얕은 수를 보였고, 1987년 내한공연에서는 연주 대신 반주테이프를 틀어놓고 노래를 하는 립싱크 사기극을 벌였던 거예요. 이렇게 성의 없는 모습은 국내 스포츠 신문의 1면 톱기사로 게재될 정도였습니다. '라이브가 아닌 가라오케 쇼로 10대들의 돈을 긁어모았다'는 거죠. 20여년이 흐른 지금 세 멤버들은 과연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가끔 궁금하기도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그들은 한국을 절대 잊지 못할 거란 겁니다.
2005년 7월에 내한공연을 가진 바 있는 보니 엠(Boney M) 기억하시죠? 1978년에 발표한 'Rivers of Babylon'으로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유로 디스코와 레게음악을 알린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이 노래는 이들의 원곡이 아니라 레게의 영웅인 지미 클리프(Jimmy Cliff)가 주연한 영화 < The Harder They Come > 사운드트랙에 수록된 멜로디언스(Melodions)의 오리지널을 리메이크 한 겁니다.
'Rivers of Babylon'은 1978년 빌보드차트 30위까지 올라 엄밀히 말해 코리안 뽕 팝은 아니지만, 그래도 예외로 분류되지는 않습니다. 미국에서는 30위인데 한국에서는 1위(라디오 각종 팝 프로에서)였으니까요. '이불 개고 일어나서 밥 먹어...'하는 식으로 노가바된 것도 잊을 수 없군요.
보니 엠은 이 곡 외에도 바비 헵(Bobby Hebb)의 노래를 커버한 'Sunny'와 'Daddy cool', 'Belfast', 'Hooray hooray it's a holi holiday', 그리고 1985년에 국내에서 대박을 기록한 'Happy song'으로 보니 엠은 우리나라에선 정말 '행복한' 그룹이었습니다. 이 곡은 개그맨 김병조가 진행했던 당대 최고의 인기프로 <일요일 밤의 대행진>의 마지막 장면에 깔려 더 사랑을 받았죠.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뽕 팝 가수는 에프알 데이비드(FR David)가 아닐까 합니다. 튀니지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음악활동을 시작한 그는 1983년에 'Words'란 곡으로 대한민국을 할퀴어버렸습니다. 마치 허리케인 카트리나처럼요. 1983년 하면 마이클 잭슨이나 폴리스(Police)의 노래가 전 세계를 호령하던 시기였지만 우리나라만큼은 그들보다 에프알 데이비드의 'Words'가 한해를 완벽하게 접수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노래가 미국의 빌보드 싱글 차트 62위까지 올랐다는 사실입니다. 어쨌든 그에 비해서는 국내에서는 메가톤급 히트를 기록한 거죠.
당시 연말 차트에서 마이클 잭슨의 'Billie Jean', 'Beat it'이나 폴리스의 'Every breath you take', 그리고 보니 타일러(Bonnie Tyler)의 'Total eclipse of the heart'를 물리치고 'Words'가 당당히 1위를 차지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후에 'Music', 'Pick up the phone', 'Girl', 'Sahara night', 'Don't go' 등이 철저하게 우리나라 라디오 전파를 지배했죠. 20년이 흐른 2003년 12월에 첫 내한공연을 가졌을 때 30대와 40대가 주요 관객이었다는 사실이 그 당시의 인기를 말해줍니다.
옛 추억에 잠겨 글을 쓰다보니 너무 길어졌습니다. 그래도 언급하지 못한 뮤지션들은 지난 번처럼 나열만 하겠습니다.
* 영어에 익숙하지 않던 어린 시절 굼벵이 댄스 밴드로 알고 있었던 굼베이 댄스 밴드(Goombay Dance Band)의 'Sun of Jamaica', 'El Dorado', 'Rain'.
* 닐 세다카(Neil Sedaka)의 원곡을 리메이크 한 이럽션(Eruption)의 'One way ticket'. 1979년 겨울에 대박을 친 이 노래는 얼마나 인기를 누렸는지 코미디언 출신 가수 방미가 '날 보러 와요'로 번안해 불러 단숨에 인기가수로 부상했죠.
* 이탈리아 출신의 느끼한 남자 가수 가제보(Gazebo)의 'I like Chopin'. 참 대단한 뽕 팝이었습니다. 그 외에 'Masterpiece'도 인기였어요.
* 스페인 출신의 당시로선 꽃미남 가수라 할 수 있는 데이비드 라임(David Lyme)의 'Bam bina', 'Bye bye mi amor'. 믿지 않으시겠지만 저는 롤라장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노래는 좋아합니다.
* '독일 판 사만사 폭스'인 사브리나(Sabrina)의 'Boys'. 수영복 입고 날뛰는(?) 뮤직비디오가 제 청소년 시절을 괴롭혔죠. 으...
* 씨 씨 캐치(C.C. Catch)의 'Heartbreak hotel', 'soul survivor'
* 스파냐(Spagna)의 'Call me'.
* 오~호... 라디오라마(Radiorama)의 'Yeti'.
* 루 센(Lou Sern)의 'Swiss boy'. 고등학교 때 스위스에서 살다가 전학 온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의 별명이 바로 이 노래에서 제목을 따온 '스위스 보이'였죠. 지금도 반창회에서 그 친구를 보고 있습니다만 저를 포함한 많은 친구들은 아직도 그를 '스위스 보이'라 부릅니다. 근데 녀석 이름이 뭐더라...
* 앤지 골드(Angie Gold)의 'Eat you up'.
* 발음이 중요했던 사라(Sarah)의 'Tokyo town'. '도쿄 타운'이라고 하면 창피당합니다 '도끼오 타운'이라고 해야 왕따의 공포에서 해방됩니다.
* 핀지 콘티니(Finzy Kontini)의 'Cha Cha CHa'.
* 'Don't let me be misunderstood'와 'You're my everything'의 주인공인 산타 에스메랄다(Santa Esmeralda)의 'Another cha cha'.
1980년대에 왜 이렇게 뽕 팝이 많았을까요? 좀 무거운 얘기가 되겠지만 12.12.사태와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5공 신군부는 국민들의 관심을 비정치적인 분야로 돌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프로야구가 시작됐고 '국풍 81'이라는 관제행사를 열었던 거죠. 그 일환으로 팝송을 엄하게 규제했던 1970년대에 비해 문호를 좀더 개방했던 겁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전보다 (국적으로든 스타일로든) 풍족해진 팝송 세계에서 다양한 음악을 접할 수 있었죠.
그렇기에 우리나라는 1980년대가 음악 듣기에 관한 한 가장 낭만적인 시대가 아니었나합니다. 음악성이나 사회적인 면을 떠나 우리가 가장 순수하고 솔직하게 음악을 받아들이던 그런 면에서요. 여기 등장한 가수들과 노래들은 소위 '나까 팝송' '수준 이하'라고 멸시 당했지만 돌이켜보니 당시 이 곡들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은 진실했던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쓰는 제가 지금 그러니까요... '알기 위해 팝을 들은 게 아니라 즐기기 위해 뽕 팝을 들은' 것을 누가 깔볼 겁니까? 다음번엔 1990년대 이후의 코리안 뽕 팝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2005/09 소승근 (gicsucks@hanmail.net)
* IZM - New Stream *
첫댓글 지난 1987 년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조이 내한공연을 TV 녹화방송에서 봤습니다 보컬리스트는 손수건들고 얼굴에다 땀닦고 혹시 중병든거 아닐까요 korean girls 를 부를때 박자놓치고 실수가 있엇답니다 제가 보기로는 조이 맴버들이 연주하는걸 봤어요 반주테이프 틀어놓고 립싱크하는 사기극이었다구요? 설마? 조이는 한국팬들한테 우롱하고 실망주는 그런 사기꾼들이엇군요 어떻게 깜쪽같이 속일수 있어요? 조이는 한국팬들한테 개망신 당했죠 그래서 해체된거 아니에요?
옛기억이 새록새록~~ 중고등학교때쯤 신나게 들었던 노래들....글구...딱한번 가봤던 롤러장에 대한 기억까지...ㅋㅋ
말미의 글이 가슴에 와닿네요. 국풍81.ㅎㅎㅎ코리안 뽕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