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AtcdVdMadpY
[TV문학관] 15화 등신불 (1981/05/23) < 1:55:46
등신불 / 김동리
등신불(等身佛)은 양자강(揚子江) 북쪽에 있는 정원사(淨願寺)의 금불각(金佛閣)속에 안치되어 있는 불상의 이름이다. 등신금불(等身金佛)또는 그냥 금불이라고도 불렀다.
그러니까 나는 이 등신불, 등신금불로 불리워지는 불상에 대해 보고 듣고 한 그대로를 여기다 적으려 하거니와, 그보다 먼저, 내가 어떻게 해서 그 정원사라는 먼 이역의 고찰(古刹)을 찾게 되었었는지 그것부터 이야기 해야겠다.
내가 일본의 대정대학 재학 중에, 학병(태평양 전쟁)으로 끌려 나간 것은 일구사심(1934)년 이른 여름, 내 나이 스물 세 살 나던 때였다.
내가 소속된 부대는 북경(北京)서 서주(徐州)를 거쳐 남경(南京)에 도착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부대가 당도할 때까지 거기서 머무르게 되었다. 처음에 주둔(駐屯)이라기보다 대기(待機)에 속하는 편이었으나 다음 부대의 도착이 예상보다 늦어지자 나중은 교체부대(交替部隊)가 당도할 때까지 주둔군(駐屯軍)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때 우리는 확실한 정보는 아니지만 대체로 인도지나나 인도네시아 방면으로 가게 된다는 것을 어림으로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라도 오래 남경에 머물면 머물수록 그만치 우리의 목숨이 더 연장되는 거와 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교체부대가 하루라도 더 늦게 와 주었으면 하고 마음속으로 은근히 빌고 있는 편이기도 했다.
실상은 그냥 빌고 있는 심정만도 아니었다. 더 나아가서 이 기회에 기어이 나는 나의 목숨을 건져 내어야 한다고 결심했다. 나는 이런 기회를 위하여 미리 약간의 준비(조사)까지 해 두었던 것이다. 그것은 중국의 불교 학자로서 일본에 와 유학을 하고 돌아 간--특히 대정대학 출신으로--사람들의 명단을 조사해 둔 일이 있었다. 나는 비장(秘藏)한 작은 쪽지에서 ‘남경 진 기수(陣
奇修)’란 이름을 발견했을 때, 야릇한 흥분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며 머리 속까지 횡해지는 듯했다.
그러나 낯선 이역의 도시에서, 더구나 나 같은 일본군에 소속된 한국 출신 학병의 몸으로써, 그를 찾고 못 찾고 하는 일이 곧 내가 죽고 사는 판가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들, 그때의 그러한 용기와 지혜를 내 속에서 나는 자아내지 못했을는지 모른다.
나는 우리 부대가 앞으로 사흘 이내에 남경을 떠난다고 하는--그것도 확실한 정보가 아니고 누구의 입에선가 새어 나온 말이지만--조마조마한 고비에 정심원(靜心院--남경에 있는 중국인 불교 포교당)에 있는 포교사(布敎師)를 통하여 진 기수씨가 남경 교외의 서공암(棲空庵)이라는 작은 암자에 독거(獨居)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 내가 서공암에서 진 기수시를 찾게 된 것은 땅거미가 질 무렵이었다. 나는 그를 보자 합창을 올리며 무수히 머리를 수그림으로써 나의 절박한 사정과 그에 대한 경의를 먼저 표한 뒤 솔직하게 나의 처지와 용건을 털어 놓았다.
그러나 평생 처음 보는 타국 청년--그것도 적군의 군복을 입은--에게 그러한 협조를 쉽사리 약속해 줄 사람은 없었다. 그의 두 눈이 약간 찡그러지며 입에서는 곧 거절의 선고가 내릴 듯한 순간, 나는 미리 준비하고 갔던 흰 종이를 끄집어 내어 내 앞에 폈다. 그리고는 바른편 손 식지 끝을 스스로 물어서 살을 떼어낸 다음 그 피로써 다음과 같이 썼다.
“願免殺生 歸依佛恩”(원컨대 살생을 면하게 하옵시며 부처님의 은혜 속에 귀의코자 하나이다).
나는 이 여덟 글자의 혈서를 두 손으로 받들어 그의 앞에 올린 뒤, 다시 합장을 했다.
이것을 본 진 기수씨는 분명히 얼굴빛이 달라졌다. 그것은 반드시 기쁜 빛이라 할 수는 없었으나 조금 전의 그 거절의 선고만은 가셔진 듯한 얼굴이었다.
잠깐 동안 침묵이 흐른 뒤, 진 기수씨는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를 따라 오게.”
나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뒤를 따라 갔다.
깊숙한 골방이었다.
진 기수는 나를 그 컴컴한 골방 속에 들여 보내고 자기는 문을 닫고 도로 나가 버렸다. 조금 뒤 그는 법의 (法衣--中國僧侶服) 한 벌을 가져와 방안으로 디밀며,
“이걸로 갈아 입게”
하고 또다시 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제야 사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나의 가슴 속을 후끈하게 적셔 주는 듯했다.
내가 옷을 갈아 입고 났을 때, 이번에는 또 간소한 저녁상이 디밀어졌다.
나는 말없이 디밀어진 저녁상을 또한 그렇게 말없이 받아서 지체없이 다 먹어 치웠다.
내가 빈 그릇을 문밖으로 내어놓자 밖에서 기다리고나 있었던 듯 이내 진 기수씨가 어떤 늙은 중 하나를 데리고 들어왔다.
“이 분을 따라오게. 소개장은 이분에게 맡겼어. 큰절(本刹)의 내법사 스님한테 가는…….”
“……………”
나는 무조건 네, 네, 하며 곧장 머리를 끄덕일 뿐이었다. 나를 살려 주려는 사람에게 무조건 나를 맡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길은 일본 병정들이 알지도 못하는 산속 지름길이야. 한 백 리 남짓 되지만 오늘이 스무 하루니까 밤중 되면 달빛도 좀 있을 게구……그럼…… 불연(佛緣) 깊기를…… 나무관세음보살.”
그는 나를 향해 합장을 하며 머리를 수그렸다.
“……………”
나는 목이 콱 메여 옴을 깨달았다. 눈물이 핑 돈 채 나도 그를 향해 잠자코 합창을 올렸다.
어둡고 험한 산길을 경암(鏡岩)--나를 데리고 가는 늙은 중--은 거침없이 걸었다. 아무리 발에 익은 길이라 하지만 군데군데 나뭇가지가 걸리고 바닥이 패이고 돌이 솟고 게다가 굽이굽이 간수(澗水)가 가로지른 초망(草莽) 속의 지름길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어쩌면 그렇게도 잘 뚫고 나가는지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내가 믿는 것은 젊음 하나 뿐이련만 그는 이십 리나 삼십 리를 걸어도 힘에 부치어 쉬자고 할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쉴새 없이 손으로 이마의 땀을 씻어 가며 그의 뒤를 따랐으나 한참씩 가다 보면 어느덧 그를 어둠 속에 잃어 버리곤 했다. 나는 몇 번이나 나뭇가지에 얼굴이 긁히우고, 돌에 채여 무릎을 깨우고 하며 “대사…” “대사…” 그를 불러야만 했다. 그럴 때마다 경암은 혼잣말로 낮게 중얼거리며 나를 기다려 주는 것이나, 내가 가까이 가면 또 아무 말도 없이 그냥 휙 돌아서서 걸음을 옮겨 놓기 시작하는 것이다.
밤중도 훨씬 넘어 조각달이 수풀 사이로 비쳐 들면서 나는 비로소 생기를 얻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경암이 제 아무리 앞에서 달린다 하더라도 두 번 다시 그를 놓치지는 않으리라 맘속으로 다짐했다.
이렇게 정세가 바뀌어졌음을 그도 느끼는지 내가 그의 곁으로 다가서자 그는 나를 흘낏 돌아다보더니, 한 쪽 팔을 들어 먼데를 가리키며 반원을 그어 보이고는 이백 리라고 했다. 이렇게 지름길을 가지 않고 좋은 길로 돌아가면 이백 리 길이라는 뜻인 듯했다.
나는 한 마디 얻어들은 중국말로 “쎄 쎄”하고 장단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했다.
우리가 정원사 산문 앞에 닿았을 때는 이튿날 늦은 아침녘이었다. 경암은 푸른 수풀 속에 거뭇거뭇 보이는 높은 기와집들을 손가락질로 가리키며 자랑스런 얼굴로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또 고개를 끄덕이며 “하오! 하오!”를 되풀이했다.
산문을 지나 정문을 들어서니 산무데기 같은 큰 다락이 정면에 버티고 섰다. 현판을 쳐다보니 태허루(太虛樓)라 씌어 있었다.
태허루 곁을 돌아 안마당 어귀에 들어서니 정면 한 가운데 높직이 앉아 있는 가장 웅장한 건물이 법당이라고 짐작이 가나 그 양 옆으로 첩첩이 가로 세로 혹은 길쭉하게 눕고, 혹은 높다랗게 서고 혹은 둥실하게 앉은 무수한 집들이 모두 무슨 이름에 어떠한 구실을 하는 것들인지 첫 눈엔 그저 황홀하고 얼떨떨할 뿐이었다.
경암은 나를 데리고, 그 첩첩이 둘러앉은 집들 사이를 한참 돌더니 청정실(淸淨室)이란 조그만 현판이 붙은 조용한 집 앞에 와서 기척을 했다. 방문이 열리더니 한 스무 살이나 될락말락한 젊은 중이 얼굴을 내밀며 알은 체를 한다. 둘이서(젊은이는 방문 앞에 서고 경암은 뜰 아래 선채) 한참동안 말을 주고 받고 한 끝에 경암이 나를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에는 머리가 하얗게 세고 키가 성큼하게 커 뵈는 노승이 미소 띤 얼굴로 경암과 나를 맞아 주었다. 나는 말이 통하지 않으므로 노승 앞에 발을 모으고 서서 정중히 합장을 올렸다. 어저께 진 기수씨 앞에서 연거푸 머리를 수그리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한 번만 정중하게 머리를 수그려 절을 했던 것이다.
노승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나에게 자리를 가리킨 뒤 경암이 내어 드린 진 기수씨의 편지를 펴 보았다.
“불은(佛恩)이로다.”
편지를 읽고 난 노승은 이렇게 말했다(그것도 그때는 알아듣지 못 했지만 나중에 가서 알고 보니 그랬다. 그리고 이것도 나중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이 노승이 두어해 전까지 이 절의 주지를 지낸 원혜대사(圓慧大師)로 진 기수씨가 말한 자기의 법사(法師)스님이란 곧 이분이었던 것이다).
그날 저녁 나는 원혜대사의 주선으로 그가 거처하고 있는 청정실 바로 곁의 조그만 방 한 칸을 혼자서 쓸 수 있게 되었다.
나를 그 방으로 인도해 준 젊은이--원혜대사의 시봉(侍奉)--는,
“저와 이웃이죠.”
희고 넓적한 이를 드러내 보이며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자기 이름을 청운(淸雲)이라 부른다고 했다.
나는 방 한 칸을 따로 쓰고 있었지만 결코 방안에 들어앉아 게으름을 피우지는 않았다. 나를 죽을 고비에서 건져 준 진 기수씨--그의 법명(法名)은 혜운(慧雲)이었다--나 원혜대사의 은덕을 생각해서라도 나는 결코 남의 입장에 오르내릴 짓을 해서는 안되리라고 결심했다.
나는 아침 일찌기 일어나 세수를 하고, 예불을 끝내면 청운과 함께 청정실 안팎과 앞뒤의 복도와 뜰을 먼지 티끌 하나 없이 쓸고 닦았다.
뿐만 아니라, 다른 스님들을 따라 산에 가 약도 캐고 식량 준비도 거들었다(이 절에서도 전쟁관계로 식량이 딸렸으므로 산중의 스님들은 여름부터 식용이 될 만한 풀잎과 나무 뿌리 같은 것들을 캐러 산으로 가곤 했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손발을 깨끗이 씻고 내 방에 끓어 앉아 불경을 읽거나 그렇지 않으면 처운에게 중국어를 배웠다(이것은 나의 열성에다 청운의 호의가 곁들어서 그런지 의외로 빨리 진척이 되어 사흘만에 이미 간단한 말로--물론 몇 마디씩이지만 대화하는 흉내까지 낼 수 있게 되었다).
아무리 방에 혼자 있을 때라도 취침 시간 이외엔 방안에 번듯이 드러눕지 않도록 내 자신과 씨름을 했다. 그렇게 버릇을 들이지 않으려고 나는 몇 번이나 내 자신에게 다짐을 놓았는지 모른다. 졸음이 와서 정 견디기가 어려울 때는 밖으로 나와 어정대며 바람을 쐬곤 했다.
처음엔 이렇게 막연히 어정대며 바람을 씌던 것이 얼마 가지 않아 나는 어정대지 않게 되었다. 으례껀 가는 곳이 정해지게 되었다. 그것은 저 금불각(金佛閣)이었던 것이다.
여기서도 물론 나는 법당 구경을 먼저 했다. 본존(本尊)을 모셔 둔 곳이니 만큼 그 절의 풍도나 품격을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 주는 곳이라는 까닭으로서보다도 절 구경은 으례껀 법당이 중심이라는 종래의 습관 때문이라고 하는 편이 옳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법당에서 얻은 감명은 우리 나라의 큰 절이나 일본의 그것에 견주어 그렇게 자별하다고 할 것이 없었다. 기둥이 더 굵대야 그저 그렇고, 불상이 더 크대야 놀랄 정도는 아니요, 그 밖에 채색이나 조각에 있어서도 한국이나 일본의 그것에 비하여 더 정교한 편은 아닌 듯했다. 다만 정면 한가운데 높직이 모셔져 있는 세 위(位)의 불상(훌륭히 도금을 입힌)을 그대로 살아 있는 사람으로 간주하고 힘겨룸을 시켜 본다면 한국이나 일본의 그것보다 더 놀라운 힘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나로서는 어디까지나 ‘살아 있는 사람으로 간주하고 힘겨룸을 시켜 본다면’ 하는 가정에서 말한 것이지만, 그네의 눈으로써 보면 자기네의 부처님(불상)이 그만큼 더 거룩하게만 보일는지 모를 일이었다. 더 쉽게 말하자면 내가 위에서 말한 더 놀라운 힘이란 체력을 뜻하는 것이지만 그들의 눈에는 그것이 어떤 거룩한 법력이나 도력으로 비칠는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특히 이런 생각을 더하게 된 것은 금불을 구경한 뒤였다. 금불각 속에 모셔져 있는 등신불(등신금불)을 보고 받은 깊은 감명이 그 절의 모든 것을, 특히 법당에 모셔져 있는 세 위의 큰 불상을, 거룩하게 느끼게 하는 어떤 압력 같은 것이 되어 나타났다고나 할까.
물론 나는 청운이나 원혜대사로부터 금불각에 대하여 미리 들은 바도 없으면서 금불각이 앉은 자리라든가 그 집 구조로 보아서 약간 특이한 느낌이 그 안의 불상(등신불)을 구경하기 전에 이미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법상 뒤곁에서 길 반 가량 높이의 돌계단을 올라가서, 거기서부터 약 오륙십 미터 거리의 석대(石臺)가 구축되고 그 석대가 곧 금불각에 이르는 길이 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더구나 그 석대가 똑같은 크기의 넓적넓적한 네모잽이 돌로 쌓아져 있는데 돌 위엔 보기 좋게 거뭇거뭇한 돌 옷이 입혀져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법당 뒤곁의 동북쪽 언덕을 보기 좋은 돌로 평평하게 쌓아서 석대를 만들고 그 위에 금불각을 세워 놓은 것이다. 게다가 추녀와 현판을 모두 돌아가며 도금을 입히고 네 벽에 새긴 조상 조상(彫像)과 그림에 도금을 많이 써서 그야말로 밖에서는 보는 건물 그 자체부터 금빛이 현란했다.
나는 본디 비단이나, 종이나, 나무나, 쇠붙이 따위에 올린 금물이나 금박 같은 것을 웬지 거북해하는 성미라 금불각에 입혀져 있는 금빛에도 그러한 경계심(警戒心)과 반감 같은 것을 품고 대했지만, 하여간 이렇게 석대를 쌓고 금칠을 하고 할 때는 그대들로서 무엇인가 아끼고 위하는 마음의 표시를 하느라고 한 짓임에 틀림없을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 아끼고 위하는 것이 보나마나 대단한 것은 아니리라고 혼자 속으로 미리 단정을 내리고 있었다. 나의 과거 경험으로 본다면 이런 것은 대개 어느 대왕이나 황제의 갸륵한 뜻으로 순금을 많이 넣어서 주조(鑄造)한 불상이라든가 또는 어느 천자가 어느 황후의 명목을 빌기 위해서 친히 불사를 일으킨 연유의 불상이라든가 하는 따위--대왕이나 황제의 권리를 보여 주기 위한 금빛이 십상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이러한 생각은 그들이 이 금불각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좀처럼 문을 열어 주지 않는 것을 보고 더욱 굳어졌다. 적어도 은화(銀貨) 다섯 냥 이상의 새전(賽錢)이 아니면 문을 여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선남 선녀의 큰 불공이 있을 때라야만 한다는 것이다(그리고 이때--큰 불공이 있을--에도 본사 승려 이외에 금불각을 참례하는 자는 또 따로 새전을 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구나 신도들의 새전을 긁어모으기 위한 술책으로 좁쌀 만한 언턱거리를 가지고 연극을 꾸미고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으리라고 나는 아주 단정을 하고 도로 내 방으로 돌아왔다가 그때 마침 청운이 중국어를 가르쳐 주려고 왔기에,
“저 금불각이란 게 뭐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물어 보았다.
“왜요?”
청운이 빙긋이 웃으며 도로 물었다.
“구경 갔더니 문을 안 열어 주던데…….”
“지금 같이 가 볼까요?”
“무어, 담에 보지.”
“담에라도 그럴 거예요, 이왕 맘 난김에 가 보시구려.”
청운이 은근히 권하는 빛이기도 해서 나는 그렇다면 하고 그를 따라 나갔다.
이번에는 청운이 숫제 금불각을 담당한 노승에게서 쇳대를 빌어 와서 손수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문앞에 선 채 그도 합장을 올렸다.
나는 그가 문을 여는 순간부터 미묘한 충격에 사로잡힌 채 그가 합장을 올릴 때도 그냥 멍하니 불상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우선 내가 예상한 대로 좀 두텁게 도금을 입힌 불상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내가 미리 예상했던 그러한 어떤 불상이 아니었다. 머리 위에 향로를 이고 두 손을 합장한, 고개와 등이 앞으로 좀 수그러진, 입도 조금 헤벌어진, 그것은 불상이라고 할 수도 없는, 형편없이 초라한, 그러면서도 무언지 보는 사람의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사무치게 애절한 느낌을 주는 등신대(等身大)의 결가부좌상(結跏趺坐像)이었다. 그렇게 정연하고 단아하게 석대를 쌓고 추녀와 현판에 금물을 입힌 금불각 속에 안치되어 있음직한 아름답고 거룩하고 존엄성 있는 그러한 불상과는 하늘과 땅 사이라고나 할까, 너무도 거리가 먼, 어이가 없는, 허리도 제대로 펴고 앉지 못한, 머리 위에 조그만 향로를 얹은 채 우는 듯한, 웃는 듯한, 찡그린 듯한, 오뇌와 비원 비원(悲願)이 서린 듯한, 그러면서도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랄까 아픔 같은 것이 보는 사람의 가슴을 콱 움켜잡는 듯한, 일찌기 본적도 상상 한 적도 없는 그러한 어떤 가부좌상이었다.
내가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부터 나는 미묘한 충격에 사로 잡히게 되었다고 말했지만 그러나 그 미묘한 충격을 나는 어떠한 말로써도 설명할 길이 없다. 다만 나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처음 보았을 때 받은 그 경악과 충격이 점점 더 전율과 공포로 화하여 나를 후려갈기는 듯한 어지러움에 휩싸일 뿐이었다고나 할까. 곁에 있던 청운이 나의 얼굴을 들아다 보았을 때도 나는 손끝 하나 까딱하지 못하며 정강마루와 아래턱을 그냥 덜덜덜 떨고 있을 뿐이었다.
(저건 부처님도 아니다! 불상도 아니야!)
나는 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목이 터지도록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나의 목구멍은 얼어붙은 듯 아무런 말도 새어 나지 않았다.
이튿날 새벽 예불을 마치고 내가 청운과 더불어 원혜대사에게 아침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스님은,
“어저께 금불각 구경을 갔었니?”
물었다.
내가 겁에 질린 얼굴로 참배했었다고 대답하자 스님은 꽤 만족한 얼굴로,
“불은이로다”
했다.
나는 맘속으로 그건 부처님이 아니었어요, 부처님의 상호가 아니었어요,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을 깨달았으나 굳이 입을 닫치고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스님(원혜대사)은 내 맘속을 헤아리는 듯,
“그래 어느 부처님이 제일 맘에 들더냐?”
물었다.
나는 실상 그 등신불에 질리어 그 곁에 모신 다른 불상들은 거의 살펴보지도 못했던 것이다.
“다른 부처님은 미처 보지도 못했어요. 가운데 모신 부, 부처님이 어떻게나 무, 무서운지……”
나는 또 아래턱이 덜덜덜 떨리어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원혜대사는 말없이 나의 얼굴(아래턱이 덜덜덜 떨리는)을 가만히 건너다 보고만 있었다. 그러자 나는 지금 금방 내 입으로 부처님이라고 말한 것이 생각났다. 왜 그런지 그렇게 말해서는 안될 것을 말한 듯한 야릇한 반발이 내 속에서 폭발되었다.
“그렇지만…… 아니었어요…… 부처님의 상호 같지 않았어요.”
나는 전신의 힘을 다하여 겨우 이렇게 말해 버렸다.
“왜, 머리에 얹은 것이 화관이 아니고 향로래서 그러니? …… 그렇지, 그건 향로야.”
원혜대사는 조금도 나를 꾸짖는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의 그러한 불만에 구미가 당기는 듯한 얼굴이었다.
“……………”
나는 잠자코 원혜대사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곁에 있던 청운이 두어 번이나 나에게 눈짓을 했을 만큼 나의 두 눈은 스님을 쏘아 보듯이 빛나고 있었다.
“자네 말대로 하면 부처님이 아니고 나한(羅漢)님이란 말인가. 그렇지만 나한님도 머리 위에 향로를 쓴 분은 없잖아. 오백나한(五百羅漢)중에도……”
나는 역시 입을 닫친 채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스님의 얼굴을 쳐다 볼 뿐이었다.
그러나 원혜대사는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 주지 않았다.
“그렇지, 본래는 부처님이 아니야. 모두가 부처님이라고 부르게 됐어. 본래는 이 절 스님인데 성불(成佛)을 했으니까 부처님이라고 부른 게지. 자네도 마찬가지야.”
스님은 말을 마치고 가만히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한다.
나도 머리를 숙이며 합장을 올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 아침 공양을 마치고 청정실로 건너 올 때 청운은 나에게 턱으로 금불각 쪽을 가리키며
“나도 첨엔 이상했어, 그렇지만 이 절에선 영검이 제일 많은 부처님이라고.”
“영검이라고?”
나는 이렇게 물었지만 실상은 청운이 서슴지 않고 부처님이라고 부르는 말에 더욱 놀랐던 것이다. 조금 전에도 원혜대사로부터 ‘모두가 부처님이라고 부르게 됐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그때까지의 나의 머리 속에 박혀 있는 습관화된 개념으로써는 도저히 부처님과 스님을 혼동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 그래서 그렇게 새전이 많다오.”
청운의 대답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들려 주었다.
…스님의 이름은 잘 모른다. 당(唐)나라 때다. 일천수백 년 전이라고 한다. 소신공양(燒身供養)으로 성불을 했다. 공양을 드리고 있을 때 여러가지 신이(神異)가 일어났다. 이것을 보고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서 아낌없이 새전과 불공을 드렸는데 그들 가운데 영검을 보지 못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 뒤에도 계속해서 영검이 있었다. 지금까지 여기 금불각(등신금불)에 빌어서 아이를 낳고 병을 고치고 한 사람의 수효는 수천 수만을 헤아린다. 그 밖에도 소원을 성취한 사람은 이루 다 헤어릴 수가 없다…….
나도 청운에게서 소신 공양이란 말을 들었을 때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러면 그럴 테지……”
나는 무슨 뜻인지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잇달아 눈을 감고 합장을 올렸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의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염불이 흘러 나왔다.
아아, 그 고뇌! 그 비원(悲願)! 나의 감은 두 눈에서는 눈물이 번져 나왔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는 발작과도 같이 곧장 염불을 외었다.
“나도 처음 뵜을 때는 가슴이 뭉클했다오. 그 뒤에 여러번 보고 나니까 차츰 심상해지더군.”
청운은 빙긋이 웃으며 나를 위로하듯이 말했다.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나에게는 아무래도 석연치 못한 것이 있다…….
소신 공양으로 성불을 했다면 부처님이 되었어야 하지 않는가. 부처님이 되었다면 지금까지 모든 불상에서 보아 온 바와 같은 거룩하고 원만하고 평화스러운 상호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에 가까운 부처님다움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거룩하고 부드럽고 평화스러운 맛은 지녔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금불각의 가부좌상은 어디까지나 인간을 벗어나지 못한 고뇌와 비원이 서린 듯한 얼굴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어떠한 대각(大覺)보다도 그렇게 영검이 많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나의 머리 속에서는 잠시도 이러한 의문들이 가셔지지 않았다. 더구나 청운에게서 소신공양으로 성불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부터는 금불이 아닌 새까만 숯덩이가 곧잘 눈에 삼삼거려 배길 수 없었다.
사흘 뒤에 나는 다시 금불을 찾았다. 사흘 전에 받은 충격이 어쩌면 나의 병적인 환상의 소치가 아닐까 하는 마음과, 또 청운의 말대로 ‘여러 번’ 봐서 ‘심상해’진다면 나의 가슴에 사무친 ‘오뇌와 비원’의 촉수(觸手)도 다소 무디어지리라는 생각에서이다.
문이 열리자, 나는 그날 청운이 하던 대로 이내 머리를 수그리며 합장을 올렸다. 입으로는 쉴새 없이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며……눈까풀과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며 나의 눈이 열렸을 때 금불은 사흘 전의 그 모양 그대로 향로를 이고 앉아 있었다. 거룩하고 원만한 것의 상징인 듯한 부처님이 상호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우는 듯한, 웃는 듯한, 찡그린 듯한, 오뇌와 비원이 서린 듯한, 가부좌상 임에는 변함이 없었으나, 그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랄까 아픔 같은 것이 전날처럼 송두리째 나의 가슴을 움켜잡는 듯한 전율에 휩쓸리지는 않았다. 나의 가슴은 이미 그러한 ‘슬픔이랄까 아픔 같은 것’으로 메워져 있었고 또, 그에게서 ‘거룩하고 원만한 것의 상징인 부처님의 상호’를 기대하는 마음은 가셔져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나는 다시 눈을 감고 합장을 올리며 입술이 바르르 떨리듯 오랫동안 나무아미타불을 부른 뒤 그 앞에서 물러났다.
그 날 저녁 예불을 마치고 청운과 더불어 원혜대사에게 저녁 인사(자리에 들기 전의)를 갔을 때 스님은 나를 보고,
“너 금불을 보고 나서 괴로와하는구나?”
했다.
나는 고개를 수그린 채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너 금불각에 있는 그 불상의 기록을 봤느냐?”
스님이 또 물으시기에 내가 못 봤다고 했더니, 그러면 기록을 한번 보라고 했다.
이튿날 내가 청운과 더불어 아침 인사를 드릴 때 원혜대사는, 자기가 금불각에 일러 두었으니 가서 기록을 청해서 보고 오라고 했다.
나는 스님께 합장하고 물러나와 곧 금불각으로 올라갔다. 금불각의 노승이 돌함(石函)에서 내어 준 폭이 한 뼘 남짓, 길이가 두 뼘 가량되는 책자를 받아 들었을 때 향기가 코를 찌르는 듯했다(벌레를 막기 위한 향료인 듯). 두터운 표지 위에는 금글씨로 ‘만적선사소신성불기(萬寂禪師燒身成佛記)’라 씌어 있고, 책모리에는 금물이 먹어져 있었다.
표지를 젖히자 지면은 모두 재빛 바탕(물감을 먹인 듯)이요, 그 위에 사연은 금글씨로 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었다.
萬寂法名俗名曰耆姓曹氏也金陵出生父未詳母張氏改嫁謝公仇之家仇
有一子名曰信年似與耆名十有餘歲一日母給食干二兒秘置以毒信之食
耆偶窺之而按是母貪謝家之財爲我故謀害前室之子以如此耆不堪悲懷
乃自欲將取信之食母見之驚而失色奪之曰是非汝之食也何取信之食也
信與耆黙而不答數日後信去自家行蹟渺然耆曰信巳去家我必携信然後
歸家卽以隱身而爲僧改稱萬寂以此爲法名住於金陵法林院後移淨願寺
無風庵修法干海覺禪師寂二十四歲之春曰我生非大覺之材不如供養吾
身以報佛恩乃燒身而供養佛前時忽降雨沛然不犯寂之燒身寂光漸明忽
懸圓光以如月輪會衆見之而震感佛恩癒身病衆曰是焚之法力所致競擲
私財賽錢多積以賽鍍金寂之燒身拜之爲佛然後奉置干金佛閣時唐中宗
十六年聖曆二年三月朔日
만적은 법명이요, 속명은 기, 성은 조씨다. 금릉서 났지만 아버지가 어떤 이인지는 잘 모른다. 어머니 장씨는 사구(謝仇)라는 사람에게 개가를 했는데 사구에게 한 아들이 있어 이름을 신이라 했다. 나이는 기와 같은 또래로 모두가 여나믄 살씩 되었었다. 하루는 어미(장씨)가 두 아이에게 밥을 주는데 가만히 독약을 신의 밥에 감추었다. 기가 우연히 이것을 엿보게 되었는데 혼자 생각하기를 이는 어머니가 나를 위하여 사씨 집의 재산을 탐냄으로써 전실자식인 신을 없애려고 하는 짓이라 하였다. 기가 슬픈 맘을 참지 못하여 스스로 신의 밥을 제가 먹으려 할 때 어머니가 보고 크게 놀라 질색을 하며 그것을 빼고 말하기를, 이것은 너의 밥이 아니다. 어째서 신의 밥을 먹느냐 했다. 신과 기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며칠뒤 신이 자기 집을 떠나서 자취를 감춰 버렸다. 기가 말하기를 신이 이미 집을 나갔으니 내가 반드시 찾아 데리고 돌아오리라 하고 곧 몸을 감추어 중이 되고 이름을 만적이라 고쳤다. 처음에는 금릉에 있는 범림원에 있다가 나중은 정원사 무풍암으로 옮겨서, 거기서 혜각선사에게 법을 배웠다. 만적이 스물 네 살 되던 해 봄에, 나는 본래 도(道)를 크게 깨칠 인재가 못되니 내 몸을 이냥 공양하여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함과 같지 못하다 하고 몸을 태워 부처님 앞에 바치는데, 그 때 마침 비가 쏟아졌으나 만적의 타는 몸을 적시지 못할 뿐 아니라, 점점 더 불빛이 환하더니, 홀연히 보름달 같은 원광이 비치었다. 모인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크게 불은을 느끼고 모두가 제 몸의 제 몸의 병을 고치니 무리들이 말하기를, 이는 만적의 법력 소치라 하고 다투어 사재를 던져 새전이 쌓여졌다. 새전으로써 만적의 탄 몸에 금을 입히고 절하여 부처님이라 하였다. 그 뒤 금불각에 모 시니 때는 당나라 중종 십 육년 성력(연호) 이년 삼월 초하루다.
내가 이 기록을 다 읽고 나서 청정실로 돌아가니 원혜대사가 나를 불렀다.
“기록을 보고 나니 괴롬이 덜하냐?”
스님이 물었다.
“처음같이 무섭지는 않았읍니다마는 그 괴롭고 슬픈 빛은 가셔지지 않았습니다.”
내가 대답하자, 스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당연한 일이야, 기록이 너무 간략하고 섬소(纖疏)해서……”
했다. 그것이 자기는 그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한 말씨였다.
“그렇지만 천 이백 년도 넘는 옛날 일인데 기록 이외에 다른 일을 어떻게 알겠읍니까?”
또 내가 물었다.
이에 대하여 원혜대사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산(절)에서는 그것을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그러니까 그만치 금불각의 등신불에 대해서는 모두들 그 영검을 두려워하고 있는 셈이라고 정색을 하고 말했다.
원혜대사가 나에게 들려 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이것은 물론 천이백 년간 등신금불에 대하여 절에서 내려오는 이야기를 원혜대사가 정리해서 간단히 한 이야기이다.
……만적이 중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는 대개 기록과 같다. 그러나 그가 자기 몸을 불살라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 동기에 대해서는 전해 오는 다른 이야기가 몇 있다. 그것을 차례로 쫓아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만적이 처음 금릉 법림원에서 중이 되었는데 그때 그를 거두어 준 스님에 취뢰(吹賴)라는 중이 있었다. 그 절의 공양을 맡아 있는 공양주 스님이었다. 만적은 취뢰 스님의 상좌로 있으면서 불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취뢰 스님이 그에 대한 일체를 돌보아 준 것이다.
만적이 열 여덟 살 때--그러니까 그가 법림원에 들어온지 오년 뒤--취뢰 스님이 열반하시게 되자 만적은 스님(취뢰)의 은공을 같기 위하여 자기 몸을 불전에 헌신할 결의를 했다.
만적이 그 뜻을 법사(법림원의) 운봉선사(雲峰禪師)에게 아뢰자 운봉선사는 만적의 그릇(器) 됨을 보고 더 수도를 계속하도록 타이르며 사신(捨身)을 허락지 않았다.
만적이 정원사의 무풍암에 해각선사를 찾았다는 것도 운봉선사의 알선에 의한 것이다. 그가 해각선사 밑에서 지낸 오 년간의 수도생활이란 뼈를 깎고 살을 가는 정진이었으나 법력의 경지는 짐작할 길이 없다.
만적이 스물 세 살 나던 해 겨울에 금릉 방면으로 나갔다가 전날의 사신(謝信)을 만났다. 열 세 살 때 자기 어머니의 모해를 피하여 집을 나간 사신이었다. 그리고 자기는 이 사신을 찾아 역시 집을 나왔다가 그를 찾지 못하고 중이 된 채 어느덧 꼭 삼십 년 마에 그를 다시 만난 것이다. 그러나 그때 다시 만난 사신을 보고는 비록 속세의 인연을 끊어버린 만적으로서도 눈물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착하고 어질던 사신이 어쩌면 하늘의 형벌을 받았단 말인고, 사신은 문등병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만적은 자기의 목에 걸렸던 염주를 벗겨서 사신의 목에 걸어 주고 그 길로 곧장 정원사에 돌아왔다.
그때부터 만적은 화식(火食)을 끊고 말을 잃었다. 이듬해 봄까지 그가 먹은 것은 하루에 깨 한 접시씩뿐이었다(그때까지의 목욕 재개는 말할 것도 없다).
이듬해 이월 초하룻날 그는 법사 스님(운봉선사)과 공양주 스님 두 분만을 모시고 취단식(就壇式)을 봉행했다. 먼저 법의를 벗고 알몸이 된 뒤에 가늘고 깨끗한 명주를 발끝에서 어깨까지(목 위만 남겨 놓는)된 뒤에 가늘고 깨끗한 명주를 발끝에서 어깨까지(목 위만 남겨 놓는) 전신에 감았다. 그리고는 단위에 올라가 가부좌(跏趺坐)를 개고 앉자 두 손을 모아 합장을 올렸다. 그리하여 그가 염불을 외우기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곁에서 들기름 항아리를 받들고 서 있던 공양주 스님이 그의 어깨에서부터 기름을 들어 부었다.
기름을 다 붓고, 취단식이 끝나자 법사 스님과 공양주 스님은 합장을 올리고 그 곁을 떠났다.
기름에 결은 만적은 그때부터 한 달 동안(삼월 초하루까지) 단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가부좌를 갠 채, 합장을 한 채, 숨쉬는 화석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례에 한 번씩 공양주 스님이 들기름 항아리를 안고 장막(帳幕)(흰 천으로 장막을 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오면 어깨에서부터 다시 기름을 부어 주고 돌아가는 일밖에 그 누구도 이 장막 안을 엿보지 못했다.
이렇게 한 달이 찬 뒤, 이날의 성스러운 불공에 참여하기 위하여 산중의 스님들은 물론이요, 원근 각처의 선남 선녀들이 모여들어, 정원사 법당 앞 넓은 뜰을 메꾸었다.
대공양(大供養--燒身供養을 가리킴)은 오시 초에 장막이 걷히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오백을 헤아리는 승려가 단을 향해 합장을 하고 선 가운데 공양주 스님이 불 담긴 향로를 받들고 단 앞으로 나아가 만적의 머리 위에 얹었다. 그와 동시 그 앞에 합장하고 선 승려들의 입에서 일제히 아미타불이 불려지기 시작했다.
만적의 머리 위에 화관같이 씌워진 향로에서는 점점 더 많은 연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오랫동안의 정진으로 말미암아 거의 화석이 되어 가고 있는 만적의 육신이지만, 불기운이 그의 숨골(정수리)을 뚫었을 때는 저절로 몸이 움칠해졌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눈에 보이지 않게 그이 고개와 등가슴이 조금씩 앞으로 숙여져 갔다.
들기름에 결은 만적의 육신이 연기로 화하여 나가는 시간을 길었다. 그러나 그 앞에 선 오백의 대중(승려)은 아무도 쉬지 않고 아미타불을 불렀다.
신시(申時) 말(末)에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그러나 웬일인지 단위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만적의 머리 위로는 더 많은 연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염불을 올리던 중들과 그 뒤에서 구경하던 신도들이 신기한 일이라고 눈이 휘둥그래져서 만적을 바라보았을 때 그의 머리 뒤에는 보름달 같은 원광이 씌워져 있었다.
이때부터 새전이 쏟아지기 시작하여 그 뒤 삼 년간이나 그칠 날이 없었다. 이 새전으로 만적의 타다가 굳어진 몸에 금을 씌우고 금불각을 짓고 섯대를 쌓았다…….
원혜대사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나는 맘속으로 이렇게 해서 된 불상이라면 과연 지금의 저 금불각의 등신금불같이 될 수밖에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많은 부처님(불상) 가운데서 그렇게 인간의 고뇌와 슬픔을 아로새긴 부처님(등신불)이 한 분쯤 있는 것도 무방한 일일 듯했다.
그러나 이야기를 다 마치고 난 원혜대사는 이제 다시 나에게 그런 것을 묻지는 않았다.
“자네 바른 손 식지를 물어 보게”
했다.
이것은 지금까지 그가 이야기해 오던 금불각이나 등신불이나 만적의 분신공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엉뚱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나는 달포 전에 남경 교외에서 진 기수씨에게 혈서를 바치느라고 내 입으로 살을 물어 뗀 나의 식지를 쳐들었다.
그러나 원혜대사는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 뿐 더 말이 없다. 왜 그 손가락을 들어 보이라고 했는지 이 손가락과 만적의 소신공양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겐지 이제 그만 손을 내리어도 좋다는 겐지 뒷말이 없는 것이다.
“……………”
“……………”
태허루에서 정오를 아뢰는 큰 북소리가 목어(木魚)와 함께 으르렁 거리며 들려온다.
**********************************
[TV문학관] 19화 역마 | (1981/08/29) < 1:55:12
역마 / 김동리
「화개장터」의 냇물은 길과 함께 흘러서 세 갈래로 나 있었다. 한 줄기는 전라도 구례(求禮)쪽에서 오고 한 줄기는 경상도쪽 화개협(花開峽)에서 흘러 내려, 여기서 합쳐서, 푸른 산과 검은 고목 그림자를 거꾸로 비치인 채, 호수같이 조용히 돌아, 경상 전라 양도의 경계를 그어주며, 다시 남으로 남으로 흘러내리는 것이, 섬진강(蟾津江) 본류(本流)였다.
하동(河東), 구례, 쌍계사(雙磎寺)의 세 갈래 길목이라 오고가는 나그네로 하여, 「화개장터」엔 장날이 아니라도 언제나 흥성거리는 날이 많았다. 지리산(智異山) 들어가는 길이 고래로 허다하지만, 쌍계사 세이암(洗耳岩)의 화개협 시오 리를 끼고 앉은 「화개장터」의 이름이 높았다. 경상 전라 양 도 접경이 한두 군데일리 없지만 또한 이 「화개장터」를 두고 일렀다. 장날이면 지리산 화전민(火田民)들의 더덕, 도라지, 두릅, 고사리들이 화갯골에서 내려오고 전라도 황아 장수들의 실, 바늘, 면경, 가위, 허리끈, 주머니끈, 족집게 골백분 들이 또한 구렛길에서 넘어오고 하동길에서는 섬진강 하류의 해물 장수들이 김, 미역, 청각, 명태, 자반 조기, 자반 고등어들이 올라오곤 하여 산협(山峽)치고는 꽤 성한 장이 서는 것이기도 했으나, 그러나 「화개장터」의 이름은 장으로 하여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장이 서지 않는 날일지라도 인근(隣近) 고을 사람들에게 그곳이 그렇게 언제나 그리운 것은, 장터 위에서 화갯골로 뻗쳐 앉은 주막마다 유달리 맑고 시원한 막걸리와 펄펄 살아뛰는 물고기의 회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주막 앞에 늘어선 능수버들 가지 사이사이로 사철 흘러나오는 그 한(恨) 많고 멋들어진 춘향가 판소리 육자배기들이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게다가 가끔 전라도 지방에서 꾸며 나오는 남사당 여사당 협률(協律) 창극 광대들이 마지막 연습 겸 첫 공연으로 여기서 으례 재주와 신명을 떨고서야 경상도로 넘어간다는 한갓 관습과 전례(傳例)가 「화개장터」의 이름을 더욱 높이고 그립게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가운데도 옥화(玉花)네 주막은 술맛이 유달리 좋고 값이 싸고 안주인--즉 옥화--의 인심이 후하다 하여 화개장터에서는 가장 이름이 들난 주막이었다, 얼마 전에 그 어머니가 죽고 총각 아들 하나와 단두 식구만으로 안주인 옥화가 돌아올 길 망연한 남편을 기다리며 살아 간다는 것이라 하여 그들은 더욱 호의와 동정을 기울이는 것인지도 몰랐다. 혹 노자가 딸린다거나 행장이 불비할 때 그들은 으례 옥화네 주막을 찾았다.
"나 이번에 경상도서 돌아올 때 함께 회계하지 라오."
그들은 예사로 이렇게들 말하곤 하였다.
늘어진 버드가지가 강물에 씻기우고, 저녁놀에 은어가 번득이고 하는 여름철 석양 무렵이었다.
나이 예순도 훨씬 더 넘어 뵈는 늙은 체장수 하나가, 쳇바퀴와 바닥 감들을 어깨에 걸머진 채 손에는 지팡이와 부채를 들고 옥화네 주막을 찾아왔다. 바로 그 뒤에는 나이 열 대여섯 살쯤 나 뵈는 몸매가 호리호리한 소녀 하나가 조그만 보따리를 옆에 끼고 서 있었다. 그들은 무척 피곤해 보였다.
"저 큰애기까지 두 분입니까?"
옥화는 노인보다 「큰애기」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다. 노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저녁상을 물린 뒤 노인은 옥화에게 인사를 청했다. 살기는 구례에 사는데 이번엔 경상도 쪽으로 벌이를 떠나온 길이라 하였다. 본시 여수(麗水)가 고향인데 젊어서 친구를 따라 한때 구례에 와서도 살다가, 그 뒤 목포로 광주로 전전하였고, 나중 진도(珍島)로 건너가 거기서 열 일여덟해 사는 동안 그만 머리털까지 세어져서는, 그래 몇 해 전부터 도로 구례에 돌아와 사는 것이라 하였다. 그렇지만 저런 큰애기를 데리고 어떻게 다니느냐고 옥화가 묻는 말에 그렇잖아도 이번에는 죽을 때까지 아무데도 떠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인데 떠나지 않고는 두 식구가 가만히 굶을 판이라 할 수 없었던 것이라 하겠다.
"그럼, 저 큰애기는 하라부지 딸입니까?"
옥화는 남포불 그림자가 반쯤 비낀 바람벽 구석에 붙어 앉아 가끔 그 환한 두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곤 하는 소녀의 동그스름한 어깨를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다.
노인은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평생 객지로만 돌아다니고나니 이제 고향 삼아 돌아온 곳(求禮)이래야 또한 객지라 그들 아비 딸이 어디다 힘을 입고 살아가야 할는지 아무데도 의탁할 곳이 없다고 그들의 외로운 신세를 한탄도 했다.
"나도 젊었을 때는 노는 것을 좋아했지라오. 동무들과 광대도 꾸며 갖고 댕겨 봤는듸 젊어서 한 번 바람들어 농게 평생 못 가기 마련이랑게…… 그것이 스물 네 살 때 정초닝게 꼭 서른 여섯 해 전일 것이여, 바로 이 장터에서도 하룻밤 논일이 있었지라오."
노인은 조용히 추억의 실마리를 더듬는 듯, 방안을 두리번거리며 살펴보곤 하는 것이었다.
"어이유! 참 오래 전일세!"
옥화는 자뭇 놀라운 시늉이었다.
이튿날은 비가 왔다.
화개장날만 책전을 펴는 성기(性騏)는 내일 장 볼 준비도 할겸 하루를 앞두고 절에서 마을로 내려오고 있었다.
쌍계사에서 화개장터까지는 시오리가 좋은 길이라 해도, 굽이굽이 벌어진 물과 돌과 산협의 장려한 풍경이 언제 보다 그에게 길덜미를 내지 않게 하였다.
처음엔 글을 배우러 간다고 할머니에게 손목을 끌리다시피 하여 간 곳이 절이었고, 그 다음엔 손윗 동무들의 사랑에 끌려다니다시피쯤 하여 왔지만 이즘 와서는 매일같이 듣는 북소리, 목탁 소리, 그리고 그 경을 치게 회맑은 은행나무, 염주나무(菩提樹), 이런 것까지 모두 싫증이 났다.
당초부터 어디로 훨훨 가 보고나 싶던 것이 소망이었지만, 그러나 어디로 간다는 건 말만 들어도 당장에 두 눈이 시뻘개져서 역정을 내는 어머니였다.
"서방이 있나, 일가친척이 있나, 너 하나만 믿고 사는 이년의 팔자에 너조차 밤낮 어디로 간다고만 하니 난 누굴 믿고 사냐?"
어머니의 넋두리는 인제 귀에 못이 박일 정도였다.
이러한 어머니보다도 차라리, 열 살 때부터 절에 보내어 중질을 시켰으니, 인제 역마살(驛馬煞)도 거진다 풀려 갈 것이라고 은근히 마음을 느꾸시는 편이던 할머니는, 성기가 세살 났을때 보인 그의 사주에 시천역(時天驛)이 들었다 하여 한때는 얼마나 낙담을 했던 것인지 모른다. 하동 산다는 그 키가 나지막한 명주 치마저고리를 입은 할머니가 혹시 갑자을축을 잘못 짚지나 않았나 하여, 큰절(쌍계사를 가리킴)에 있는 어느 노장에게도 가 물어 보고 지리산 속에서 도를 닦아 나온다던 어떤 키 큰 영감에게도 다시 뵈어 봤지만 시천역엔 조금도 요동이 없었다.
"천성 제 애비 팔자를 따라 갈려는 게지."
할머니가 어머니를 좀 비꼬아 하는 말이었으나 거기 깊은 원망이 든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말엔 각별나게 신경을 쓰는 옥화는,
"부모 안 닮는 자식 없단다. 근본은 다 엄마 탓이지."
도리어 어머니에게 오금을 박고 들었다.
"이년아 에미한테 너무 오금박지 마라. 남사당을 붙었음, 너를 버리고 내가 그놈을 찾아갔냐, 너더러 찾아 달라 성화를 댔냐?"
그러나 서른 여섯 해 전에 꼭 하룻밤 놀다 갔다는 젊은 남사당의 진양조 가락에 반하여 옥화를 배게 된 할머니나, 구름같이 떠돌아다니는 중과 인연을 맺어 성기를 가지게 된 옥화나 다같이 「화개장터」주막에 태어났던 그녀들로서는 별로 누구를 원망할 턱도 없는 어미 딸이었다. 성기에게 역마살이 든 것은 어머니가 중 서방을 정한 탓이요, 어머니가 중 서방을 정한 것은 할머니가 당사당에게 반했던 때문이라면 성기의 역마운도 결국은 할머니가 장본이라, 이에 할머니는 성기에게 중질을 시켜서 살을 때우려고도 서둘러 보았던 것이고, 중질에서 못다푼 살을, 이번에는 옥화가 그에게 책장사라도 시켜서 풀어 보려는 속셈인 것이었다. 성기로서도 불경(佛經)보다는 암만해도 이야기책에 끌리는 눈치요, 중질보다는 차라리 장사라도 해보고 싶다는 소청이기도 하여, 그러나 옥화는 꼭 화개장만 보기로 다짐까지 받은 뒤, 그에게 책전을 내어 주기로 했던 것이었다.
성기가 마루 앞 축대 위에 올라서는 것을 보자 옥화는 놀란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며,
"더운데 왜 인저사 내려오냐?"
곁에 있던 수건과 부채를 집어 그에게 주었다.
지금까지 옥화에게 이야기책을 읽어 들려주고 있은 듯한 낯선 계집애는, 책 읽던 것을 멈추고 얼굴을 들어 성기를 바라보았다. 갸름한 얼굴에 흰자위 검은자위가 꽃같이 선연한 두눈이었다. 순간, 성기는 가슴이 찌르르하며 갑자기 생기 띠어 진눈으로 집 앞에 늘어선 버들가지를 바라보았다.
얼마 뒤, 계집애는 안으로 들어가고, 옥화는 성기의 점심상을 차려 들고 나와서,
"체장수 딸이다."
하였다. 어머니도 즐거운 얼굴이었다.
"체장수라니?"
성기는 밥상을 받은 채, 그러나 얼른 숟가락을 들지도 않고, 그의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구례 산다더라. 이번에 어쩌면 하동으로 해서 진주쪽으로 나가 볼 참이라는데 어제 저녁에 화갯골로 들어갔다."
그리고 저 딸아이는 그 체장수의 무남 독녀인데 영감이 화갯골 쪽으로 들어갔다. 나와서, 하동 쪽으로 나갈 때 데리고 가겠다고, 하도 간청을 하기에 그 동안 좀 맡아 있어 주기로 했다면서, 옥화는 성기의 눈치를 살피듯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화갯골에서는 며칠이나 있겠다던고?"
"들어가보고 재미나면 지리산 쪽으로 깊이 들어가 볼 눈치더라."
그리고 나서, 옥화는 또,
"그래도 그런 사람의 딸같이는 안 뵈지?"
하였다. 계연(契姸)이란 이름이었다.
성기는 잠자코 밥숟가락을 들었다. 그러나 밥은 반도 먹지 않고, 상을 물려 버렸다.
이튿날 성기가 책전에 있으려니까, 그 체장수 딸이 그의 점심을 이고 왔다. 집에서 장터까지래야 소리 지르면 들릴 만한 거리였지만, 그래도 전날 늘 이고 다니던 「상돌엄마」가 있을 터인데 이렇게 벌써 처녀티가 나는 남의 큰애기더러 이런 사환을 시켜 미안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정작 그녀 쪽에서는 그러한 빛도 없이, 그 꽃송이같이 화안한 두 눈에 웃음까지 담은 채, 그의 앞에 밥함지를 공손스레 놓고는, 떡과 엿과 참외들을 팔고 있는 음식전 쪽으로 곧장 눈을 팔고 있었다.
"상돌엄만 어디 갔는듸?"
성기는 계연의 그 아리따운 두 눈에서 흥건한 즐거움을 가슴으로 깨달으며, 그러나 고개는 엉뚱한 방향으로 돌린 채, 차라리 거칠은 음성으로 이렇게 물었다.
"손님이 마루에 가뜩 찼는듸 상돌엄마가 혼자사 바삐 서두닝께 어머니가 지더러 갖고 가라 했어요."
그동안 거의 입을 열어 말하는 일이 없었던 계연은, 성기가 묻는 말에, 의외로 생경한 전라도 쪽 토음(土音)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 가냘프고 갸름한 어깨와 목하며, 어디서 그렇게 힘차고 괄괄한 음성이 울려 나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줌이나 될 듯한 가느다란 허리와 호리호리한 몸매에 비하여 발달된 팔다리와 토실토실한 두 손등과 조그맣게 도톰한 입술을 가진 탓인지도 몰랐다.
"계연아, 오빠 세숫물 놔 드려라."
이튿날 아침에도 옥화는 상돌엄마를 부엌에 둔 채 역시 계연에게 성기의 시중을 들게 하였다. 세숫물을 놓는 일뿐 아니라 숭늉 그릇을 들고 다니는 것이나 밥상을 차려 오는 것이나 수건을 찾아 주는 것이나 성기에 따른 시중은 모조리 그녀로 하여금 들게 하였다. 그리고는,
"아이가 맘이 컴컴치 않고, 인정이 있고, 얄미운 데가 없어."
옥화는 자랑 삼아 이런 말도 하였다.
"저의 아버지는 웬일인지 반 억지 비슷하게 거저 곧장 나만 믿겠다고, 아주 양딸처럼 나한테다 맡기구 싶은 눈치더라만……"
"옥화는 잠깐 말을 끊어서 성기의 낯빛을 살피고 나서 다시, 그래 너한테도 말을 들어 봐야겠고 해서 거저 대강 들을 만하고 있었잖냐…… 언제 한번 데리고 가서 칠불(七佛) 구경이나 시켜 줘라."
하는 것이, 흡사 성기의 동의를 구하는 모양 같기도 하였다.
그리고 나서 옥화는 계연의 말을 옮겨, 구례 있는 저의 집이래야 구례 읍에서 외따로 떨어진 무슨 산기슭 밑에 이웃도 없이 있는 오막살인가 보더라고도 하였다.
"그럼 살림은 어쩌고 나왔을까?"
"살림이래야 그까진 거 머 방문에 자물쇠 채워 두었으면 그만 아냐, 허지만 그보다도 나그넷길에 데리고 나선 계연이가 걱정이지."
이러한 옥화의 말투로 보아서는 체장수 영감이 화갯골에서 나오는 대로 계연을 아주 양딸로 정해 둘 생각인 듯이도 보였다. 다만 성기가 꺼릴까 보아 이것만을 저어하는 눈치 같았다. 지금까지 몇번이나 옥화는 성기더러 장가를 들라고 권했으나 그는 응치 않았고, 집에 술 파는 색시를 몇 차례나 두어도 보았지만 색시쪽에서 간혹 성기에게 말썽을 내인 적은 있어도 성기가 색시에게 그러한 마음을 두는 일은 한번도 있은 적이 없어, 이러한 일들로 해서, 이번에도 옥화는 그녀로 하여금 성기의 미움이나 받지 않게 할 양으로 그녀의 좋은 점만 이야기하는 듯한 눈치 같기도 하였다.
아랫집 실과 가게에서 성기가 짚신 한 컬레를 사들고 오려니까 옥화는 비죽이 웃는 얼굴로 막걸리 한 사발을 그에게 떠 주며,
"오늘 날씨가 너무 덥잖냐?"
고 하였다. 술 거를 때 누구에게나 맛뵈기 떠 주기를 잘하는 옥화였다. 계연이는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계연아, 너도 빨리 나와, 목마를 텐데 미리 좀 마시고 가거라."
옥화는 방을 향해서도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항라 적삼에 가는 삼베 치마를 갈아입고 나오는 계연은 그 선연한 두 눈의 흰자위 검은자위로 인하여 물에 어리인 한 송이 연꽃이 떠오는 듯하였다.
"꼭 스무 해 전에 내가 입었던 거다."
옥화는 유감(有感)한 듯이 계연의 옷맵시를 살펴 주며 말했다.
"어제 꺼내서 품을 좀 주여 놨더니만 청승스리 맞는고나, 보기 보단 품을 여간 많이 입잖는다, 이앤…… 자, 얼른 마셔라, 오빠 있음 무슨 내외할 사이냐?"
그러자 계연은 웃는 얼굴로 술잔을 받아 들고 방으로 들어가 마시고 나오는 모양이었다.
성기는 먼저 수양 버드나무 밑에 와서 새 신발에 물을 축이었다. 계연이도 곧 뒤를 따라 나섰다. 어저께 성기가 칠불암(七佛庵)까지 책값 수금 관계로 좀 다녀올 일이 있다고 했더니, 옥화가 그러면 계연이도 며칠전부터 산나물을 캐러 간다고 벼르는 중이고, 또 칠불암 구경은 어차피 한번 시켜 주어야 할게고 하니, 이왕이면 좀 데리고 가잖겠느냐고 하였다.
성기는 가슴도 좀 뛰고, 그래서, 나물을 내가 어떻게 아느냐고, 싫다고 했더니 너더러 누가 나물까지 캐라느냐고, 앞에서 길만 끌어 주면 되잖느냐고 우기어, 기승한 어머니에게 성기는 더 항변을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성기는 처음부터 큰길을 버리고,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수풀 속 산길을 돌아가기로 하였다. 원체가 지리산 밑이요, 또 나뭇길도 본디부터 똑똑히 나 있지 않는 곳이라, 어려서부터 자라난 고장이라곤 하지만 울울한 수풀 속에서 성기는 몇번이나 길을 잃은 채 해매곤 하였다.
쳐다보면 위로는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은 산봉우리요, 내려다보면 발아래는 바다같이 뿌우연 수풀뿐, 그 위에 흰 햇살만 물줄기처럼 내리 퍼붓고 있었다. 머루, 다래, 으름은 이제 겨우 파랗게 메아리 쳐 있고, 가지마다 새빨간 복분자(나무딸기), 오디(산뽕나무의 열매)는 오히려 철이 겨운 듯 한 머리 까맣게 먹물이 돌았다.
성기는 제 손으로 다듬은 퍼런 아가위나무 가지로 앞에서 칡덩굴을 헤쳐 가며 가고 있는데, 계연은 뒤에서, 두릅을 꺾는다, 딸기를 딴다, 하며 자꾸 혼자 처지곤 하였다.
"빨리 오잖고 뭘 하나?"
성기가 걸음을 멈추고 서서 나무라면 계연은 딸기를 따다 말고, 두릅을 꺾다 말고, 그 조그맣고 도톰한 입술을 꼭 다물고는 뛰어오는 것인데, 한참만 가다 보면 또 뒤에 떨어지곤 하였다.
"아이고머니 어쩔꺼나!"
갑자기 뒤에서 계연이가 소리를 질렀다. 돌아다보니 떡갈나무 위에서, 가지에 치맛자락이 걸려 있다. 하필 떡갈나무에는 뭣하러 올라갔을 까고, 곁에 가 쳐다보니, 계연의 손이 닿을 만한 위치에 그 아래쪽 딸기나무 가지가 넘어와 있다. 딸기나무에는 가시가 있고 또 비탈에서 있어 올라갈 수가 없으니까, 그 딸기나무와 가지가 서로 얽힌 떡갈나무 쪽으로 올라간 모양이었다. 몸을 구부려 손으로 치맛자락을 벗기려면 간신히 잡고 서 있는 윗 가지에서 손을 놓아야 하겠고, 손을 놓았다가는 당장 나무에서 떨어질 형편이다. 나무 아래서 쳐다보니 활짝 걷어 올려진 베치다 속에, 정강마루까지를 채 가루지 못한 짤막한 베고의가 훤한 햇살을 받아 그 안의 뽀오얀 것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성기는 짚고 있던 생나무 지팡이로 치맛자락을 벗겨 주려 하였으나, 지팡이가 짧아서 그렇겠지만 제 자신도 모르게, 지팡이 끝은 계연의 그 발가스레하고 매초롬한 종아리만을 자꾸 건드리고 있었다.
"아이 싫어! 남에서 떨어진당게!"
계연은 소리를 질렀다. 게다가 마침 다람쥐란 놈까지 한 마리 다래 넌출 위로 타고 와서, 지금 막 게연이가 잡고 서 있는 떡갈나무 가지 위로 건너뛰려 하고 있다.
"아 곧 떨어진당게! 그 막대로 저 다램이나 때려줬음 쓰겠는듸."
계연은 배 아래를 거진 햇살에 훤히 드러내인 채 있으면서도 다래 넌출 위에서 이쪽을 건너다보고 그 요망스런 턱주가리를 쫑긋거리고 있는 다람쥐가 더 안타까운 모양으로 또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요놈의 다램이가……."
성기는 같은 나무 밑둥치에까지 올라가서야 겨우 계연의 치맛자락을 벗겨 주고, 그러고는 막대로 다시 조금 전에 다람쥐가 앉아 있던 다래 넌출도 한번 툭 쳤다. 이 소리에 놀랐는지 산비둘기 몇 마리가 「푸드득」하고 아래쪽 머루 넌출 위로 날아갔다.
"샘물이 있어야 쓰겄는듸."
계연은 치맛자락을 걷어 올려 이마의 땀을 씻으며 이렇게 말했다.
모롱이를 돌아 새로운 산줄기를 탈 때마다 연방 더 우악스런 멧부리요, 어두운 수풀을 지나 환하게 열린 하늘을 내다볼 때마다 바다같이 질펀한 골짜기에 차 있느니 머루, 다래 넌출이오, 딸기, 칡의 햇덩굴이다. 산속으로 들어갈수록 여기저기서 난장판으로 뻐꾸기들은 울고, 이따금씩 낄낄거리고 골을 건너 날아가는 꿩 울음소리마저 야지의 가을 벌레 소리 듣는 듯 신산을 더했다.
해는 거진 하늘 한가운데를 돌아 바야흐로 머리에 불을 끼얹고, 어두운 숲 그늘 속에는 해삼 같은 시꺼먼 달팽이들이 허연 진물을 토한 채 땅에 붙어 늘어졌다.
햇살이 따갑고, 땀이 흐르고, 목이 마를수록 성기들은 자꾸 넌출 속으로만 들짐승들처럼 파묻히었다. 나무딸기, 덤불 딸기, 산 복숭아, 아가위, 오디, 손에 닿는 대로 따서 연방 입에 가져가지만 입에 넣으면 눈 녹듯 녹아질 뿐, 떨적지근한 침을 삼키면 그만이었다. 간혹 이에 걸린다는 것이 아직 익지 않은 산 복숭아, 아가위 따위인데, 딸리 녹은 침물로는 그 쓰고 떫은 볼에까지 묻어졌다. 먹을수록 목이마른 딸기를 계연은 그 새파란 산복숭아서껀, 둥그런 칡잎으로 하나 가득 따서 성기에게 주었다. 성기는 두 손바닥 위에다 그것을 받아서는 고개를 수그려 물을 먹듯 입을 대어 먹었다. 먹고 난 칡잎은 아무렇게나 넌출 위로 던져 버린 채 칡넌출이 담뿍 감겨 있는 다래 덩굴 위에 비스듬히 등을 대이고 누웠다.
계연은 두 번째 또 칡잎의 것을 성기에게 주었다. 성기는 성가신 듯이 그냥 비스듬히 누운 채 그것을 그대로 입에 들이부어 한입 가득 물고는 나머지를 그냥 넌출 위로 던졌다. 그리고 그는 곧 코를 골기 시작하였다.
세 번째 칡잎에다 딸 기알 머루 알을 골라 놓은 계연은 그러나 성기가 어느덧 잠이 들어 있음을 보자 아까 성기가 하듯 하여 이번엔 제가 먹어 치웠다.
"참 잘도 잔당게."
계연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자기도 다래 덩굴에 등을 대이고 비스듬히 드러누워 보았으나 곧 재채기가 났다. 목이 몹시 말랐다. 배도 고팠다.
갑자기 뻐꾸기 소리가 무서웠다.
"덩굴 속에는 샘물이 없는가?"
계연은 덩굴을 헤치고 한참 들어가다 문득 모과나무 가지에 이리저리 얽히고 주렁주렁 열린 으름 덩굴을 발견하였다.
"이것이 익어 있음 쓰겄는듸."
계연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아직도 파아란 오이를 만지듯 딴딴하고 우들우들한 으름을 제일 큰 놈으로만 세 개를 골라 따 쥐었다. 그리하여 한나절 동안 무슨 열매든지 손에 닿는 대로 마구 따 입에 넣곤 하던 버릇으로 부지중 입에 가져가 한 번 덥석 물어떼었더니 이내 비릿하고 떫직스레한 풀 같은 것이 입에 하나 가득 끼었다.
"아, 풋내 나!"
계연은 입안의 것을 뱉고 나서 성기 곁으로 갔다. 해는 벌써 점심때도 겨운 듯 갈증과 함께 시장기도 들었다.
"일어나 샘물 찾아 가장게."
계연은 성기의 어깨를 흔들었다.
성기는 눈을 떴다.
계연은 당황하여, 쥐고 있던 새파란 으름 두 개를 성기의 코끝에 내어 밀었다. 성기는 몸을 일으켜 그녀의 둥그스름한 어깨와 목덜미를 껴안았다. 그리고는 입술이 포개졌다.
그녀의 조그맣고 도톰한 입술에서는 한나절 먹은 딸기, 오디, 산 복숭아, 으름 들의 달짝지근한 풋내와 함께, 황토 흙을 찌는 듯한 향긋하고 고수한 고기(肉)냄새가 느껴졌다.
까악까악하고 난데없는 가마귀 한 마리가 그들의 머리 위로 울며 날아갔다.
"칠불은 아직 멀지라?"
계연은 다래덩굴에 걸어 두었던 점심을 벗겨 들었다.
화갯골로 들어간 체장수 영감은 보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떠날 때 한 말도 있고 하니 지리산 속으로 아주 들어간 모양이라고, 옥화와 계연은 생각하고 있었다.
"산중에서 아주 여름을 내시는 갑네."
옥화는 가끔 이런 말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끈기 있게 이야기책을 들고 앉곤 하였다. 계연의 약간 구성진 전라도 지방 토음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맑고 처량한 노래 조를 띠어 왔다.
그동안 옥화와 계연의 사이에 생긴 새로운 사실이있다면, 옥화가 계연의 왼쪽 귓바퀴 위에 있는 조그만 사마귀 한 개를 발견한 것쯤이었다.
어느 날 아침, 그녀의 머리를 빗어 땋아 주고 있던 옥화는 갑자기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참빗 쥔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어머니 왜 그리여?"
계연이 놀라 물었으나 옥화는 그녀의 두 눈만 멀거니 바라보고 있을 따름 말이 없었다.
"어머니 왜 그러시여."
계연이 또 한번 물었을 때, 옥화는 겨우 정신이 돌아오는 듯, 긴 한숨을 내쉬며,
"아무것도 아니다."
하고, 다시 빗질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계연은 속으로 이상한 생각이 들었으나 아무것도 아니라는 옥화에게 다시 더 캐어 물을 도리도 없었다.
이튿날 옥화는 악양(岳陽)에 볼일이 좀 있어 다녀오겠노라면서 아침 일찌기 머리를 빗고 떠났다. 성기는 큰방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소나기가 왔다. 계연이가 밖에서 빨래를 걷어안고 들어오면서,
"어쩔 거나, 어머니 비 만나시겄는듸!"
하였다. 그녀의 치맛자락은 바깥의 신선한 비바람을 묻혀다 성기의 자는 낯을 스쳐 주었다. 성기는 눈을 뜨는 결로 손을 뻗쳐 그녀의 치맛자락을 거머잡았다. 그녀는 빨래를 안은 채 고개를 홱 돌이켜 성기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두볼에 바야흐로 조그만 보조개가 패이려 할 때,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어머니 옷 다 젖겄는듸!"
또 한번 이렇게 말하며, 계연은 마루로 나갔다. 성기는 어느덧 또 코를 골기 시작하였다.
성기가 다시 잠이 깨었을 때는, 손님들이 마루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계연은 그들의 치다꺼리를 해주고 있는 모양으로 부엌에서,
"명태랑 풋고추밖엔 안주가 없는듸!"
하고 소리가 났다.
나중 손님들이 돌아간 뒤, 성기는 그녀더러,
"어머니 없을 땐 손님 받지 말라고."
약간 볼멘 소리로 이런 말을 하였다.
"허지만 오늘 해 넘김, 이 술은 시어질 것인듸, 그냥두면 어머니 오셔서 화내시지 않을 것이오?"
계연은 성기에게 타이르듯이 이렇게 말했다. 조금뒤 그녀는 다시 웃는 낯으로 성기 곁에 다가서며,
"오빠, 날 면경 하나만 사 주시오. 똥그란 놈이 꼭 한 개만 있었음 쓰겄는듸."
하였다. 이튿날이 마침 장날이라 성기는 점심을 가지고 온 그녀에게 미리 사 두었던 조그만 면경 하나와 찰떡을 꺼내 주었다.
"아이고머니!"
면경과 찰떡을 보자, 계연은 놀란 듯이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그 꽃 같은 두 눈에 웃음을 담북 담은 채 몇 번이나 면경을 들여다보곤 하더니, 그것을 품속에 넣고는 성기가 점심을 먹고 있는 곁에 돌아앉아 어느덧 짝짝 소리까지 내며 찰떡을 먹고 있었다.
성기는 남이 보지 않게 전 앞에 사람 그림자가 얼씬할 때마다 자기의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서 그것을 가리워 주었다. 딴은 떡뿐 아니라 참외고 복숭아고 엿이고 유과고 일체 군것을 유달리 좋아하는 그녀의 성미인 듯하였다. 집 앞으로 혹 참외 장수나 엿장수가 지나가는 것을 보면 계연은 골무를 깁거나 바늘겨례를 붙이다 말고, 튀어 일어나 그것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멀거니 바라보며 섰곤 하였다.
한번은 성기가 절에서 내려오려니까, 어머니는 어디 갔는지 눈에 띄지 않고, 그녀만이 마루 끝에 걸터앉은 채 이웃 주막의 놈팡이 하나와 더불어 함께 참외를 먹고 있었다. 성기를 보자 좀 무안스러운 듯이 얼굴을 약간 붉히며 곧 일어나 반가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오빠!"
"……"
그러나 성기는 그러한 그녀를 거들 떠도 보지 않고 그대로 자기의 방으로만 들어가 버렸다. 계연은 먹던 참외도 마루 끝에 놓은 채 두 눈이 휘둥그래서 성기의 뒤를 따라왔다.
"오빠 왜?"
"……"
"응 왜 그리여?"
"……"
그러나 성기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그녀가 두 팔을 성기의 어깨 위에 얹어, 그의 목을 껴안으려 했을 때, 성기는 맹렬히 몸을 뒤틀어 그녀의 팔을 뿌리치고는 돌연히 미친 것처럼 뛰어들어 따귀를 때리기 시작하였다.
처음 그녀는,
"오빠, 오빠!"
하고 찡그린 얼굴로 성기를 쳐다보며 두 손을 내어밀어 그의 매질을 막으려 하였으나, 두 차례 세 차례 철썩철썩하고, 그의 손이 그녀의 얼굴에 와 닿자 방구석에 가 얼굴을 쿡 처박은 채 얼마든지 그의 매질에 몸을 맡기듯이 하고 있었다.
이튿날 장에 점심을 가지고 온 계연은 그 작고 도톰한 입술을 꼭 다문 채, 말이 없었으나, 그의 꽃같이 선연한 두 눈엔 어저께의 일에 깊은 적의도 원한도 품어 있지 않는 듯하였다.
그날 밤 그녀가 혼자 강가에 나와 있는 것을 보고, 성기는 그녀의 뒤를 쫓아 나갔다. 하늘엔 별이 파랗게 빛나고 있었으나 나무 그늘은 강가를 칠야같이 뒤덮어 있었다.
"오빠."
계연은 성기가 바로 그녀의 곁에까지 왔을 때 일어나 성기의 턱 앞으로 바싹 다가 들어서며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불렀다.
"오빠, 요즘은 어쩌자고 만날 절에만 노 있는 것이여?"
그 몹시도 굴곡이 강렬한 전라도 지방 토움이 이렇게 속삭이었다.
그즈음 성기는 장을 보려 오는 날 이외에는 절에서 일체 내려오지를 않았다. 옥화가 악양명도에게 갔다 소나기에 젖어돌아온 뒤부터는, 어쩐지 그와 그녀의 사이를 전과 달리 경계하는 듯한 눈치라, 본래 심장이 약하고 남의 미움 받기를 유달리 싫어하는 그는, 그러한 어머니에 대한 노여움도 있고 하여 기어코 절에서 배겨내려 했던 것이었다.
이날 밤만 해도 계연의 물음에, 성기가 무어라고 대답도 채 하기 전에, 「계연아, 계연아!」하는, 옥화의 목소리가 또 어느덧 들려 오고 있었다. 성기는 콧잔등을 찌푸리며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아, 어머니도 어쩌면 저다지 야속할까?」
성기는 갑자기 목이 뿌듯해졌다.
반딧불이 지나갔다. 계연은 돌 위에 걸터앉아, 손으로 여뀌 풀을 움켜잡으며, 혼잣말같이, 또 무어라 속삭이는 것이었으나 냇물 소리에 가리어 잘 들리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일찌기 성기가 방안으로, 부엌으로 누구를 찾으려는 듯 기웃기웃하다가 좀 실망한 듯한 낯으로 그냥 절로 올라가고 말았을 때, 그녀는 역시 이 여뀌풀 있는 냇물 가에서 걸레를 빨고 있었던 것이다.
사흘 뒤에 성기가 다시 절에서 내려오니까, 체장수 영감은 마루 위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고, 계연은 고개를 떨어버린 채 마루 끝에 걸터앉아 있었다. 머리를 감아 빗고 새옷--새옷이래야 전날의 그 항라 적삼을 다시 빨아 다린 것--을 갈아입고, 조그만 보따리 하나를 곁에 두고, 슬픔에 잠겨 있던 계연은, 성기를 보자 그 꽃같이 선연한 두 눈에 갑자기 기쁨을 띄며 허리를 일으켰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 순간, 그 노기를 띤 듯한 도톰한 입술은 분명히 그들 사이에 일어난 어떤 절박하고 불행한 사실을 전하고 있었다.
막걸리 사발을 들어 영감에게 권하고 있던 옥화는 성기를 보자,
"계연이가 시방 떠난단다."
대번에 이렇게 말했다.
옥화의 말을 들으면, 영감은 그날, 성기가 절로 올라가던 날 저녁때에 돌아왔었더라는 것이었다. 그 이튿날이니까, 즉 어저께, 영감은 그녀를 데리고 떠나려고 하는 것을 하루 더 쉬어 가라고 만류를 해서, 그래 오늘 아침엔 일찌기 떠난다고 이렇게 막 행장을 차려서 나서는 길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실상 모두 나중 다시 들어서 알게 된 것이었고, 처음은 그저 쇠뭉치로 돌연히 머리를 얻어맞은 것같이 골치가 띵하며, 전신의 피가 어느 한 곳으로 쫙 모이는 듯한, 양쪽 귀가 머리 위로 쫑긋이 당기어 올라가는 듯한, 혀가 목구멍 속으로 말려 들어가는 듯한, 눈언저리에 퍼어런 불이 번쩍번쩍 일어나는 듯한, 어지러움과 노여움과 조마로움이 한데 뭉치어 발끝에서 머리끝까지의 그의 전신을 어디로 휩쓸어 가는 듯만 하였다. 그는 지금껏 이렇게까지 그녀에게 마음이 가 있어 떨어질 수 없게 되었으리라고는 너무도 뜻밖이었다. 그것이 이제 영원히 헤어지려는 이 순간에 와서야 갑자기 심지에 불을 켜듯 확 타오를 마련이던가, 하는 것이 자꾸만 꿈과 같았다. 자칫하면 체면도 염치도 다 놓고 엉엉 울음이 터질 것만 같이 목이 징징 우는 것을, 그러는 중에서도 이 얼굴을 어머니에게 보여서는 아니 된다는 의식에서 떨리는 입술을 깨물며, 마루 끝에 궁둥이를 찧듯 털썩 앉아 버렸다.
"아들이 참 잘 생겼소."
영감은 분명히 성기를 두고 하는 말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성기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지 않은 채, 그들에게 무슨 적의나 품은 듯이 앉아 있었다.
옥화는 그동안 또 성기에게 역시 그 체장수 영감의 이야기를 전해 들려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리산 속에서 우연히 옛날 고향 친구의 아들이 된다는 낯선 젊은이 하나를 만났다. 그는 영감의 고향인 여수에서 큰 공장을 경영하는 실업가로, 지리산 유람을 들어왔다가 이야기 끝에 우연히 서로 알게 되었다. 그는 영감에게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살자고 했다. 영감은 문득 고향 생각도 날 겸 그 청년의 도움으로 어떻게 형편이 좀 펼 것 같이도 생각되어 그를 따라 여수로 돌아가기로 결정을 하고 나오는 길이라--, 옥화가 무어라고 한참 하는 이야기는 대개 이러한 의미인 듯하였으나, 조마롭고 어지럽고 노여움으로 이미 두 귀가 멍멍하여진 그에게는 다만 벌떼처럼 무엇이 왕왕 거릴 뿐 아무것도 분명히 들리지 않았다.
"막걸리 맛이 어찌나 좋은지 배가 부르당게."
그동안 마지막 술잔을 들이키고 난 영감은 부채와 지팡이를 집어들며 이렇게 말했다.
"여수 쪽으로 가시게 되먼 영영 못 보게 되겠구만요."
옥화도 영감을 따라 일어서며 이렇게 말했다.
"사람 일을 누가 알간듸, 인연 있음 또 볼 터이지."
영감은 커다란 미투리에 발을 끼며 말했다.
"아가, 잘 가거라."
옥화는 계연의 조그만 보따리에다 돈이 든 꽃주머니 하나를 정표로 넣어 주며 하직을 하였다.
계연은 애걸하듯 호소하듯한 붉은 두 눈으로 한참 동안 옥화의 얼굴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또 오너라."
옥화는 계연의 머리를 쓸어 주며 다만 이렇게 말하였고, 그러자 계연은 옥화의 가슴에다 얼굴을 묻으며 엉엉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하였다.
옥화가 그녀의 그 물결같이 흔들리는 둥그스름한 어깨를 쓸어 주며,
"그만 울어, 아버지가 저기 기다리고 계신다."
하는 음성도 이젠 아주 풀이 죽어 있었다.
"그럼 편히 계시요."
영감은 옥화에게 하직을 하였다.
"하라부지 거기 가 보시고 살기 여의찮거든 여기 와서 우리하고 같이 삽시다."
옥화는 또 한번 이렇게 당부하는 것이었다.
"오빠, 편히 사시오."
계연은 이미 시뻘겋게 된 두 눈으로 성기의 마지막 시선을 찾으며 하직 인사를 했다.
성기는 계연의 이 말에 꿈을 깬 듯, 마루에서 벌떡 일어나, 계연의 앞으로 당황히 몇 걸음 어뜩 어뜩 걸어오다간, 돌연히 다시 정신이 나는 듯 그 자리에 화석처럼 발이 굳어 버린 채, 한참 동안, 장승같이 계연의 얼굴만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편히 사시오."
이렇게 두 번째 하직을 하는 순간까지도, 계연의 그 시뻘건 두 눈은 역시 성기의 얼굴에서 그 어떤 기적과도 같은 구원만을 기다리는 것이었고 그러나, 성기는 그 자리에 그냥 주저앉아 버릴 뻔하던 것을 겨우 버드나무 가지를 움켜잡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계연의 시뻘겋게 상기된 얼굴은, 옥화와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잊은 듯이 성기의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으나, 버드나무에 몸을 기대인 성기의 두눈엔 다만 불꽃이 활활 타오를 뿐, 아무런 새로운 명령도 기적도 나타나지 않았다.
"오빠, 편히 사시오."
하고, 거의 울음이 다 된, 마지막 목소리를 남기고 돌아선 계연의 저만치 가고 있는 항라 적삼을, 고운 햇빛과 늘어진 버들가지와 산울림처럼 울려오는 뻐꾸기 울음 속에, 성기는 우두커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성기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게 된 것은 이듬해 우수(雨水) 경칩(驚蟄)도 다 지나, 청명(淸明) 무렵의 비가 질금거릴 즈음이었다. 주막 앞에 늘어선 버들가지는 다시 실같이 푸르러지고 살구, 복숭아, 진달래들이 골목 사이로 산기슭으로 울긋불긋 피고 지고 하는 날이었다.
아들의 미음 상을 차려 들고 들어온 옥화는 성기가 미음 그릇을 비우는 것을 보자, 이렇게 물었다.
"아직도 너, 강원도 쪽으로 가 보고 싶냐?"
"……"
성기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여기서 장가들이 나랑 같이 살겠냐?"
"……"
성기는 역시 고개를 돌렸다.
--그해 아직 봄이 오기 전, 보는 사람마다 성기의 회춘을 거의 다 단념하곤 하였을 때, 옥화는 이왕 죽고 말 것이라면, 어미의 맘속이나 알고 가라고 그래, 그 체장수 영감은, 서른 엿서 해 전 남사당을 꾸며 와 이 「화개장터」에 하룻밤을 놀고 갔다는 자기의 아버지임에 틀림이 없었다는 것과, 계연은 그 왼쪽 귓바퀴 위의 사마귀로 보아 자기의 동생임이 분명하더라는 것을, 동정하노라면서, 자기의 왼쪽 귓바퀴 위의 같은 검정 사마귀까지를 그에게 보여 주었다.
"나도 처음부터 영감이 「서른 여섯 해 전」이라고 했을 때 가슴이 섬짓하긴 했다. 그렇지만 설마 했지, 그렇게 남의 간을 뒤집어 놀 줄이야 알았나. 하도 아슬해서 이튿날 악양으로 가 명도까지 불러 봤더니 요것도 남의 속을 빤히 듸려다나 보는 듯이 재줄 대는구나, 차라리 망신을 했지."
옥화는 잠깐 말을 그쳤다. 성기는 두 눈에 불을 켜듯한 형형한 광채를 띠고, 그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차라리 몰랐으면 또 모르지만 한번 알고 나서야 인륜이 있는듸 어찌겠냐."
그리고 부디 에미 야속타고나 생각지 말라고 옥화는 아들의 뼈만 남은 손을 눈물로 씻었다. 옥화의 이 마지막 하직같이 하는 통정 이야기에 의외로도 성기는 도로 힘을 얻은 모양이었다. 그 불타는 듯한 형형한 두눈으로 천장을 한참 바라보고 있던 성기는 무슨 새로운 결심이나 하듯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었다.
아버지를 찾아 강원도 쪽으로 가 볼 생각도 없다. 집에서 장가들어 살림을 할 생각도 없다, 하는 아들에게, 그러나, 옥화는 이제 전과같이 고지식한 미련을 두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 어쩔랴냐? 너 졸 대로 해라."
"……"
성기는 아무런 말도 없이 도로 자리에 드러 누워 버렸다.
그리고 나서 한 달포나 넘어 지난 뒤였다.
성기가 좋아하는 여러 가지 산나물이 화갯골에서 연달아 자꾸 내려오는 이른 여름의 어느 장날 아침이었다. 두릅회에 막걸리 한 사발을 쭉 들이키고 난 성기는 옥화더러,
"어머니 나 엿판 하나만 마춰 주." 하였다.
"……"
옥화는 갑자기 무엇으로 머리를 얻어 맞은 듯이 성기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지도 다시 한 보름이나 지나, 뻐꾸기는 또다시 산울림처럼 건드러지게 울고, 늘어진 버들가지엔 햇빛이 젖어 흐르는 아침이었다. 새벽녘에 잠깐 가는비가 지나가고, 날은 다시 유달리 맑게 개인 「화개장터」삼거리릴 위에서, 성기는 그 어머니와 하직을 하고 있었다. 갈아입은 옥양목 고의 적삼에, 명주 수건까지 머리에 질끈 동여매고 난 성기는, 새로 마춘 새하얀 나무 엿판을 걸빵해서 느직하게 엉덩이 즈음에다 걸었다. 윗목 판에는 새하얀 가락엿이 반넘어 들어 있었고, 아랫 목판에는 팔다 남은 이야기책 몇 권과 간단한 방물이 좀 들어 있었다.
그의 발 앞에는, 물과 함께 갈리어 길도 세 갈래로 나 있었으나, 화갯골 쪽엔 처음부터 등을 지고 있었고, 동남으로 난길은 하동, 서남으로 난 길이 구례, 작년 이맘 때도 지나 그려가 울음 섞인 하직을 남기고 체장수 영감과 함께 넘어간 산모퉁이 고갯질은 퍼붓는 햇빛 속에 지금도 하동 장터 위를 굽이돌아 구례 쪽을 향했으나, 성기는 한참 뒤 몸을 돌렸다. 그리하여 그의 발은 구례 쪽을 등지고 해동 쪽을 향해 천천히 옮겨졌다.
한 걸음, 한 걸음, 이 발을 옮겨 놓을수록 그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지어. 멀리 버드나무 사이에서 그의 뒷모양을 바라보고서 있을 어머니의 주막이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갈 무렵 하여서는, 육자배기 가락으로 제법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가고 있는 것이었다.
2014년 03월 01~02일
2014년 3월 22일~30일, 전남 광양시 전역 개최, 행사 프로그램, 일정 안내.
화개장터 영상
___________________
하동송림에서 하동포구까지 약 7km
섬진강 따라 `하동송림에서 하동포구까지`
첫댓글 전라도와 경상도 그 사이 흐르는 섬진강 화개장터도 보이고 ㅎ
저두 한때 댕겨왔죠
국내 여행을 다니며 적어보는 글 ...
잘 읽고 댕겨 갑니다 ㅎ
3월 초순에 갔더니 벚꽃은 당연 피질 않았고
4월 중순에 갔더니 벚꽃은 당연 지고 없더라
물론 벚꽃 보러 간건 아니지만 은근히 아쉬운
맘도 남더라. 순천에선 낙안읍성을 하동에선
섬진강과 화개장을 구경한 적 있다면 그외의
다른 곳도 많이 유람 했으리라~ 이왕이면 글
올릴 때 사는 곳 혹은 주변 경치 좀 보여 주시면 어떨까 싶소. 오래간 함께했던 애견과의
이별 슬픔도 지금처럼 바쁘게 살다 보면 조금
씩 잊혀지리라 삶이란 많은 것들과의 만남과
이별임을 알기게 난,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질 듯싶소. 오욕과 칠정에서 해방 되는 날이 언제
일까만은 어느새 많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음이어라-아닌강 ㅎ짧게.
회자정리가 내준 숙제를
반정도 읽다가 눈 아파서 포기~
딸은 엄마의 인생을 닮는다는
정도 이해하고
그냥 사진으로 즐기고 있다
글씨 너무 작은것은
노안이라 읽기가 힘들다
사진은 조목조목 자세히 보고간다
고맙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읽고 볼 여유도 없거나
아니면 관심조차 없다란 것을 내가 모르랴
만은 이렇게 올리기 위해서 조금은 애썼음을
밝힘이요 ㅎ소설 전문을 찾는 것도 쉽지도
않더라~ 그래도 내가 청년시절 흥미롭게
읽었던 단편 소설이기에 다시 한번 읽을 수
있었음에 의미를 두려 한다네. 부전자전이란
말이 있듯이 때론 운명적으로 비켜갈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을 듯하오. 나 역시 개성상인의
기질 없음을 이미 오래전 알게 되었고 약간의
역마살은 어디로부터 물려받았는지 굳이 알고
싶지도 않음이어라.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즐길 만큼 혹은 전국을 배회해야 할
특별한 이유도 없을진대 언젠간 그리 하고파라~ 그렇기 위해선
@회자정리 사지라도 멀쩡하게 잘 관리 하여야 겠으라
물론ㅍ현재의 처지가 녹록지 않음을 알고
있거니와 무작정 떠날 수는 없는 바 적어도
10년 후쯤을 기약해 봄직하여라. 그 후 20년
쯤을 ㅎㅎ 참말로 내가 욕심이 과하넹~
어쨌건 눈이 최고의 보배라 여기시고 작은
글씨 굳이 읽으려 하진 마셔라 나도 시력이
안 좋은데 원시라 먼 것은 잘 안 보여도 가까운
것 보는 것에 지장 받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
으로 여기고 싶소. 원시와 근시에도 물론 장단
점은 있겠지만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보완하며 살면 족한 것을. 오후 늦게 하늘공원 갔다가 서쪽에서 강풍이 불어와 바람 한번 제대로
맞았단 기분이 들었다지요 . 봄삐대장도
오늘 수고 하였네라^^
@회자정리 그래도 2/3정도는 기를 쓰고 읽었다네
회자정리 친구가 쥐방 불을
꺼트리지 않도록 노력하고
도와주는것에 항상 고마움을
느낀다
오늘도 뜻 있게 살아가자
며칠 전 쭉 읽다가
중간에 ..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왔던
등신불.
공부를 떠나
매우 충격적이었던 내용으로 기억됨.
등신불..
아~
등신불!
다시 읽는
등신불과 역마.
인연.
가슴 속 한 같은 응어리.
그래,
역마로라도 풀어내야지.
안 그러면
병 나거나 미쳐버릴 수도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