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이야기] 삼성 이병철의 우리 문화재 사랑
글 : 제이풍수사
글 게시일 : 2023. 9. 20.
우리 나라는 일제 강점기와 동족 상잔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수많은 문화재가 해외로 유출되거나 팔려 나갔다. 국립중앙박물관에 2십만 점이 넘는 문화재가 있지만 고고학이나 문화사적인 가치보다 감상을 위주로 한 예술품으로 본다면 그와 비슷한 숫자의 고미술품이 이국 땅에 유배된 셈이다. 그 와중에 조상의 예술혼이 신광을 찌르는 고미술품이 아직도 국내에 남아 전하는 것은 어찌 보면 행운에 속할 일이고, 그 뒤에는 한 점을 지키고 보존하는데 혼혈의 힘을 바친 선각들이 있었다. 거액의 상속 재산을 이용하여 문화재 수집과 보호에 심혈을 기울인 전형필, 무형의 문화유산을 학술적으로 조사, 연구하여 우리의 뿌리를 잇고자 했던 송석하, 그리고 6.25 이후 해외로 빼돌려진 문화재를 되사 오거나 해외로 반출되지 못하도록 붙잡은 이병철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혜성같이 빛을 발한 분들이다.
청자진사표형주전자를 바라보는 삼성의 이병철 회장
이병철이 자라던 시골집에는 필묵이 담긴 문갑이나, 제사에 쓰는 술병들이 고태스러워 그는 서른 살이 넘어서면서부터 자연스럽게 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나는 수집품 자체보다는 그 물건으로부터 마음의 기쁨과 기의 조화를 구하고 있다.’
우리 문화재의 귀한 멋과 맛에 대한 그의 변론이며 신념의 말이다. 서화부터 시작한 미술품 수집은 점차 토기․고려청자․조선백자로 뻗어 나갔고, 나아가 불상과 금속유물 그리고 석조물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범위로 확대되었다. 70년대 초가 되자, 수집품은 어느새 1천여 점이 넘었고,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것만 10여 점에 달했다. 모두 뛰어난 안목으로 잡은 일급품들로 양과 질에서도 이미 개인 취향의 범위를 넘어섰다. 그러자 그는 그 동안 수집한 고미술품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고민하였다. 비록 개인의 소장품이나 그것들은 모두 민족의 문화유산이다. 그 때, 눈이 번쩍 뜨이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1974년, 박병래 박사가 전 생애를 통해 수집한 백자 360여 점을 국립박물관에 기증한다는 기사였다. 박병래는 ‘성누가병원’의 신망 높은 의사로 1920년대부터 반세기 동안에 걸쳐 우리 고미술품, 특히 조선백자의 수집에 깊은 애정과 정열을 쏟아 온 분이다. 비록 재산은 많지 않았으나 평생을 조촐하게 지내면서 백자 수집에는 대수장가로 알려졌다. 이병철은 새로운 사명감에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하였다. 한국 동난 후, 치안이 부재할 정도로 혼란에 빠지자, 많은 수장가들이 침몰하고, 그 와중에서 일확천금을 노린 파렴치한에 의해 막대한 양의 문화재가 현해탄을 건너갔음을 잘 알던 그이다.
‘민족 문화의 유산을 더없이 해외로 유출, 산일(散逸)시켜서는 안된다.’
그래서 소장한 문화재를 영구히 민족 유산으로 보존할 미술관을 건립하기로 마음먹었다. 미술관은 문화재의 보전, 체계적 수집, 감상과 연구, 그리고 교육에 있어 가장 적합한 문화 공간이기 때문이다. 호암 미술관은 1976년에 착공하여 1982년에 개관하였다. 미술관은 그 자체가 조형미를 갖도록 우리 나라 고유의 건축미를 살리고, 나아가 오래 견딜 수 있도록 1층을 불국사 백운교와 같은 아치형 돌계단으로 만들고 지붕에는 청기와를 얹어 아름답고도 장중하게 꾸몄다. 내부는 국내에서 가장 앞선 최신의 습도조절장치와 조명, 방화, 방법 등의 시설을 완벽하게 갖춘 현대식 시설을 갖추었다. 미술관이 완공되자, 이병철은 30년간 애써 모은 토기, 청자, 분청, 백자, 금속유물, 민속공예 등 2,174점을 기증하였다. 이때부터 호암 미술관은 삼성문화재단의 애정과 보살핌을 받으며 우리의 역사를 배우는 교육의 터전으로, 문화예술의 꿈을 키우는 창조의 산실로, 문화재를 오늘에 되살리는 첨병으로 그 사명을 다하고 있다. 이병철의 유품 중에 ‘空手來空手去(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라고 쓴 서예 작품이 몇 점 있다. 세상 모두가 그를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란 뜻에서 ‘돈병철’이라 불렀을 때이다.
‘나는 돈을 벌지 않았어. 사람을 얻었을 뿐이지. 내가 가진 것이 있다면 후손들에게 물려 줄 미술품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