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바람 속의 크리스틀
딱히 어떻게 하겠단 계획도 없이 두
사람의 생활은 비밀스럽게 하루하루
이어졌다.
굳이 비밀일 것까지는 없는 일이었지만
아직은 두 사람밖에 모르는 일이었으므로
공공연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들어올 때 경비가 뭐라고 하지
않아요?"
"아니."
"눈치챘을 거야."
"우리가 한두 살 먹은 어린애야? 그런
것까지 신경 쓰게."
"그래두."
"신경 쓸 것 없어. 그 사람들이 우리
"그렇더라두 자기랑 나랑은 입장이
다르지. 나는 여기 살던 사람이니까."
"그게 정 거북하면 이사가구."
"어디루?"
"어디든."
어디든이란 그의 대답이 하연은 성에
차지 않는다.
그의 말뜻은 어디서 살면 어떠냐, 함께
있는 게 중요하지 그 뜻이겠는데 그는 왜
그의 집으로 가자는 얘기는 하지 않을까.
"어미닌 동생네 가 계시다면 집엔 누가
있어요?"
"혼자 되신 고모님이 와 계셔."
"자기 요즘 집에 안 들어가두 암말
안해요?"
"왜, 하지."
"바쁘다구 그럼 그런 줄 알어."
"언제까지 바쁘다구만 할 건데?"
"여보세요 하연씨. 그런 것까지 안 정해
놓고 살아도 됩니다요."
"허지만 일년 열두 달 바쁘다구만 할 순
없잖아요."
"그럼 그때 가선 술 마시느라 그런다
그러지 뭐."
끝내 하연을 밝히겠다는 얘기는 없다.
처음 만났을 때 그가 했던 얘기로
미루어 보면 당장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그 어머니가 학수고대한다는 결혼 얘길
신나게 진전시킬 듯도 싶었는데, 그때는
오히려 하연이 쪽에 명확한 결심이 서
있질 않아 그가 그렇게 서두르면 어쩌나
걱정했었다.
세레나데에 선심 쓰듯 꽃 한 송이 던져
주는 그런 기분이었다.
네가 11년 동안 갈망해 왔던 꽃을,
그래, 한번 가지게 해주지.
어떠냐, 황홀하냐.
다분히 자포자기적이고 교만함도 섞인
그런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물줄기가 트이자 그는
당연한 듯 하연에게로 밀려 들어왔고 일이
그렇게 되자 하연으로서도 새삼 그를
밀어낼 명분이 없었다.
"어머니께 아직 내 얘기 안했죠?"
"아직."
하연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세히
알고 싶다.
결혼은 정말 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이대로 즐기고 싶다면 괘씸하고 결혼을
하고 싶다면 그것 역시 지금은 곤란하다.
아니,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이혼한 지 한 달 만에 하연이 결혼을
했다는구나.
그랬을 때 하연이 만세! 하고 박수를 쳐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다.
좀 너무했지 않아?
이혼한 지 한 달 만이라면 그 이혼,
하연이한테 문제 있었던 거 아냐?
어쩌면 남편 강세까지도 그런 생각을
할지 모른다.
멍하니 당하는 얼굴로 이혼해 주더니
정작 속셈은 따로 있었군.
옛날부터 따라댕겼던 남자? 그럼
그렇겠지.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그렇게
억울하다. 이 억울한 누명의 구더기가
무서워 장은 못 담그겠다.
그러다 하연은 제풀에 피식 웃었다.
나도 참 너무 덜 떨어졌다. 버려진
마당에 동정표 긁어 모아서 뭘 하겠다고.
그러면서도 결혼은 이르다는 생각을
굳힌다.
결혼도 즐기는 것도 그 어떤 대답도
하연이 원하는 것이 아니면서 그래도
하연은 기종의 생각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다.
"자기, 뭐 생각해?"
기종이 하연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다정하게 물었다. 그의 말은 언제나
따뜻하게 들려서 아, 이 따뜻함만으로도
좋다, 그런 생각을 하게 한다.
하연이 그를 보고 웃었다.
"얘기해 봐. 내가 교통정리해 줄께."
"난 자기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게 알고 싶어서 복잡해."
"저런, 진작 얘기하지. 난 간단한
생각밖에 안하고 있는데."
"어떤 생각?"
"같이 있으니까 참 좋다는 생각."
"그것뿐이야?"
기종은 뭔가를 찾듯 자신의 심장을
내려다보더니
"응, 그것뿐인데."
했다.
"내 가슴엔 방이 하나 밖에 없어.
하연이가 들어오면 그것으로 꽉 차서 다른
생각들은 대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근데 나는 왜 이렇게 복잡하지?"
"하연이는 맨션이구 나는 단칸방이라
그런가부지 뭐."
하연은 그가 끄는 대로 그의 단칸방에
머리를 기댔다.
나중에 헤어진다 하더라도 편의주의로
즐기는 남자보다는 늘 결혼이 하고 싶어
하연이만 보면 숨이 꼴깍꼴깍 넘어가는
그런 남자와 같이 있고 싶다고 그녀는
그의 단칸방에서 그런 생각을 한다.
순정은 변하기 쉬운 사람 감정 중에서도
가장 안심이 되는 조강지처와도 같은
감정이다. 그러나 그 감정에도 약점은
있다. 바로 열렬함의 부족이다.
하연은 기종을 받아들이고 난 후 그
약점을 깨달았다. 그러나 깨달았다고 해서
순정 하나에 자기 몸을 달랑 얹어
버리고 그 다음 내 인생도 덩달아 얹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망설이면서 그러면서도
또 한켠으로는 그가 모두를 얹어 달라고
졸라 주었으면 바라고 있다.
조르고 또 조르면 조르는 게
고마워서라도 줄 텐데.
"난 포로야. 하연이 맘대로 구워 먹어도
되고 삶아 먹어도 돼."
"끔찍한 소리 하구 있어. 내가 지금
식인종 시리즈 하재?"
"하자."
"좋아 그럼. 나 오늘 자기 볶아 먹을
거야."
"멸치 볶을 때 씻어서 볶아?"
"왜?"
기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건 볶을 사람이 씻는 거야."
하연이 그의 뒤를 따라 욕실로
들어갔다.
"머리 떼구 내장 빼구."
하연의 그의 셔츠와 바지 혁대를
풀었다.
"그 다음엔?"
"몰라."
하연이 그냥 욕실을 나가 버리자 기종이
하하 웃었다.
이어 샤워 물줄기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그가 온몸에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밖으로 나왔다.
"수건 줘."
"수건 안에 있잖아."
그의 알몸은 언제나 생소하다. 어둠
속에서 그의 따뜻한 체온과 맞닿아 있을
때면 참으로 친근하고 정다운데 불쑥
눈앞에 알몸으로 서 있으면 언제나 그는
낯설고 타인 같다.
"꼭 내외하는 것 같애."
그가 머리칼의 물기를 털어내며 하연이
옆에 앉았다.
"옷 입어."
"금방 볶아 먹을 건데 뭐하러 입어?"
"강도 같단 말야."
"발가벗은 강도 봤어?"
그가 오늘따라 유들유들하게 군다.
"벗은 거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왜
그래?"
"감정이 달아올랐을 때하구 생으로 가만
"그러니까 지금 우리 마님께서는 전연
배가 고프지 않다 그 말씀이구나.
그렇다면 내가 고프게 해 드려야지."
그가 장난처럼 하연의 가슴 꼭지를 툭툭
건드리기 시작했다.
"문 열어 주세요 아줌마."
그의 치기어린 장난 속에 몸이 말려드는
동안에도 하연은 그가 결정적인 말
한마디를 해주기 바랐다. 결혼하고
싶다고.
느닷없이 강세가 찾아왔다.
하연이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데 대문
벨이 울렸다.
그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라고는
기종이밖에 없어 생전 안하던 아양까지
"당신이세요오?"
"응, 나야."
분명 다른 목소리인데도 너무나
오랫동안 귀에 익었던 목소리라 기종의
목소리로 착각하고 문을 열었다.
"호호호, 자기 정말 집 너무 밝힌다."
하마터면 이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올
뻔했는데 강세의 얼굴과 맞닥뜨려지는
순간 말은 용케도 입 언저리에서 멈춰
주었다. 그러나 웃고 있던 입만은 그래도
웃는 모양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좋은 일 있는 모양이군."
성큼 강세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곤
그가 이 집을 떠나기 직전까지 당연하게
행세했던 남편 모습 그대로 성큼성큼
안방으로 들어갔다.
논 속옷가지들을 치웠던가.
그때까지 멍청하니 대문 고리를 잡고 서
있던 하연은 부리나케 안방으로 쫓아
들어갔다.
안방은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깨끗이 치워진 안방에 이번에는 강세의
옷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더운 물 나오지?"
그는 구태여 하연의 대답을 들을 것도
없이 욕실로 들어갔다.
그의 태도는 너무나 그 전과 똑같아서
이혼한 흔적조차 없다.
저 사람 좀 봐.
하연은 어이가 없어 입을 벙하니 벌린
채 기운찬 물소리만 듣고 있었다.
강세가 이혼했다는 걸 깜박 잊은
그의 착각을 빨리 깨우쳐 줘야겠는데
그렇다고 목욕하는 사람 내쫓을 수는 없어
빨리 목욕 끝나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그러고 있자니 하연의 가슴에서는 간장
타는 냄새가 난다.
이 사람이 돌아가기 전 기종이 들어서면
어떡하나.
이럴 경우 하연이 난처하고 두려운 건
기종이어야 할 텐데 이상하게도 강세 쪽이
더 난처하고 두려웠다.
기종이 드나드는 걸 강세가 알면
어떡하나.
흡사 남편 출근하고 없는 사이 정부를
불러들이고 있었던 것만 같다.
눈앞이 캄캄하고 머리 속이 어지럽게
뒤엉켰다.
그가 목욕을 끝내고 나오며 말했다.
"안돼요. 빨리 돌아가세요."
그렇게 얘기해야 하는데 하연은
하연대로 배고프다는 그의 말에 습관처럼
부엌으로 간다.
그때 기종이 들어서며 말했다.
"여보, 나 왔어."
숨이 턱턱 막혀 허우적대는 하연을
기종이 흔들었다.
"여보, 여보, 하연아."
마지막 하연아 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
"꿈꿨어?"
아직 반쯤은 꿈속에 잠겨 있던 의식이
꿈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현실로
돌아왔다.
기종이 하연의 코를 콕 눌러 주며
웃었다. 다행히 꿈 내용까지는 묻지
않았다.
하연은 방금 일어났던 일이 꿈 같지가
않았다.
하연의 무의식 저편에서는 불시에
강세가 들이닥치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냉정하게 따지고 들자면 강세가 불시에
들이닥칠 리도 없고 설사 들이닥친다
하더라도 남남인 마당에 이쪽이 엎어져
있든 고꾸라져 있든 그가 상관할 일도
아니다.
그런데도 하연의 가슴은 무거운 돌로
짓눌려져 있는 것처럼 암담하고 답답하다.
어쩌면 그가 올지도 몰라.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 들러봤달 수도
있고, 혹 그의 소지품 하나가 집구석
어디엔가 있어 그걸 찾으러 왔달 수도
있고.
"이살 가야겠어."
자다 말고 이사를 가야겠다고 하는 말이
이상하게 들렸는지 엎드려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기종이 하연을 돌아보았다.
"내일 당장 이 집부터 내놓고."
"왜,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서
이사가래?"
"농담하지 마. 농담할 기분 아니야."
"알았어. 내가 집 알아볼께."
집을 알아본다는 말에 하연의 생각은
직접적인 문제로 좁혀졌다.
"알아본다는 게 무슨 뜻이야?"
"마땅한 집이 있나 알아본다구."
"우리 영영 이렇게 살 거야?"
"이렇게 산다는 건 무슨 뜻인데?"
"나쁜 짓하는 사람처럼 언제까지구 숨어
살 거냐구."
"우리가 지금 숨어 사는 건가?"
"그럼 왜 자기 집 놔두구 따루 집을
알아본대?"
"집엔 고모님이 계시잖아."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 지금까지 말
한마디도 없다가 느닷없이 집으로 살림을
옮기는 것두 그렇잖아."
"자기 얘기 참 이상하게 한다."
"이상하게 하는 게 아니야. 일엔 순서가
있다는 거지."
"그럼 그 순서를 얘기해 봐. 지금부터
"우선 하연이 결심부터 서야지. 말로는
그러지만 지금 당장 우리 집으로 옮기자면
옮길 수 있어?"
당장 그의 집으로 못 옮길 것도 없을 성
싶은데 그의 말투는 어디까지나
하연이에게 그 이유가 있다는 뜻 같다.
"내가 옮긴다면?"
"그럼 그렇게 하지 뭐."
그의 대답은 너무나 간단하고 쉽다.
그러나 그 쉬운 대답 속에 기쁨이 보이질
않는다.
하연의 말 한마디 결심 하나에 그때마다
언감생심 꿈도 못 꿨던 소원 하나가
이루어진 듯 기뻐하리라는 기대는 번번이
무너진다.
이 사람 감정 표현이 무뎌서 그런가.
"하나두 안 좋아하는 것 같애."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근데 말하는 투가 뭐 그래."
"남잔 그래."
남잔 정말 그런가. 좋아도 크게
좋아하는 내색 않고 여자처럼 즉석에서
감격하지도 않고.
하연은 강세를 생각해 본다.
같이 살아 본 남자라곤 강세밖에 없으니
남자의 공통분모를 찾아볼 때마다 더듬어
볼 사람이라곤 강세밖에 없다.
강세도 그랬던가.
그랬던 것도 같고 안 그랬던 것도 같다.
물처럼 흘러 가는 일상에 일일이 감정의
색깔을 매겨 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다.
그러나 기종과 강세는 많이 틀린다.
때까지는 하연으로 하여금 번번이 기대가
빗나가는 허전함을 느끼게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대만족하며 살았던 것 같지도
않다.
요는 내가 이 사람에게 기대가 너무
많은 거야.
손을 하나 잡아도 그냥 잡는 게 아니라
이렇게 잡아 주면 좋아하겠지, 이렇게
쳐다봐 주면 좋아하겠지, 선심 쓰는 듯한
그 알량함 때문이야.
하연은 자신의 가슴이 꽉 차지 않는
이유는 바로 자신에게 있다고 반성했다.
입장을 바꿔 봐도 그렇지.
서른한 살이 되도록 결혼도 않고 온갖
고생 다해 가며 오늘에 이른 아들에게 그
어머니가 갖는 기대는 얼마나 큰 것일까.
자식에게 정은 더 가는 법이고 어렵게
성공한 자식일수록 더 커 보여서 그런
자식을 두고 부리는 욕심도 대단할
것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이혼한 여자 하나를
데리고 와서 결혼하겠습니다, 하면 그
어머니가 얼마나 실망할까. 한평생이 푹
꺼져 버리는 듯 휘청할 것이다.
"어렵겠지?"
"뭐가?"
"어머니한테 내 얘기 하는 게."
"이제 말씀 드려야지. 기회 봐서."
그의 난처함이 생각만으로도 가엾어서
하연은 그의 등을 따뜻하게 싸 안았다.
욕심 부리지 말자. 이혼하고 허둥지둥
갈피 못 잡는 여자, 사랑으로 잡아 준
이 사람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정화네
가게에 나가 앉아서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마다 자신을 찍어 붙이고 있었을지
모른다.
한심하고 더러워지기 전에 한 남자에게
주저앉혀진 것만도 구원이지.
"얘기 안해도 돼. 하기 어려우면."
하연의 그의 등에 얼굴을 묻은 채
말했다.
"좋으면 됐지 뭐. 좋아한다고 반드시
결혼해야 된다는 법도 없고, 사실 결혼이
그리 대단한 건 아니야. 같이 있기는
매일반인데 뭐."
"그래도 결혼은 해야지."
아, 이 사람이 결혼할 생각을 하긴
하는구나. 하연은 그의 그 말 한마디로
"난 어쩜 자기가 오랫동안 꿈꿔 왔던
그런 여자가 아닐지도 몰라. 평범하고
보잘것없고."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니야."
기종이 돌아누우며 하연을 가슴으로
안았다.
"자기 자신을 하찮게 생각하면 남도
하찮게 생각해. 그런 소리 하지 마.
하연인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괜찮은 여자야. 따뜻하고 너그럽고 소녀
같은 순진함도 그대로고."
하연은 자신이 따뜻하다거나 너그럽다고
구태여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그가
그렇게 얘기해 주니 어쩌면 자신은
따뜻하고 너그럽고 순진한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싶어 그냥 그런 소릴 했대도 괜찮아.
자기가 원한다면 난 언제고 자기가 원하는
그런 여자가 되겠어."
"이미 그런 여자야, 하연인."
하연은 그를 만나서 처음으로 베푸는
심정이 아닌 보답하는 심정으로 그를
받아들였다.
뜨거운 장작난로 옆에는 오래 있을 수도
없는 걸 왜 그동안 나는 그가
장작난로이기만을 바랐던가. 조용한 이해,
다정한 입맞춤 그것만으로도 이렇듯
충만해지는 것을.
어느 때보다 달콤한 잠에 빠져 있는
하연을 전화 벨소리가 깨웠다.
"김치 담가 놨으니 가지러 오너라."
어머니였다.
먹을까 봐."
전화 벨소리로 잠을 깬 게 속상하다.
겨우 김치 하나 때문에 그 사람의
잠까지 깨우다니.
"알았어요."
전화를 끊고 돌아서는데 다시 벨이
울린다.
"얘, 기범씨 왔더라. 너 한번 봤으면
하던데."
이번엔 정화였다.
"오후 세시쯤 일루 다시 오겠다구 했어.
그러니까 그 시간 맞춰 오면 돼. 아직
시간 있으니까 미장원 가서 마사지두 하구
머리두 좀 만져. 내가 잘 가는 집 소개해
줄께. 가만, 미스 정이 휴가라구 그랬는데
왔는지 모르겠다. 내가 전화해 보구
정화는 제가 흥분해서 하연의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하연은
어이가 없어 잠시 수화기를 들고 있다가
문득 기종이 등 뒤에 와 있다는 걸 알고는
전화를 끊고 돌아섰다.
"내가 비켜 줄걸 그랬지?"
"무슨 뜻으로 하는 소린데?"
"나 때문에 하고 싶은 얘기도 못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자기 때문에 못한 게 아니야. 저쪽에서
따따따따 하고는 끊어 버려서 할 새가
없었던 거지."
"어떤 나팔수가 혼자 따따따따 나팔을
불었지?"
그러자 나에요 하듯 전화 벨이 다시
울렸다.
니 얘기 해놨으니까 신촌 로터리 있잖아.
거기서 합정동 쪽으로 가면......"
"정화야."
"응, 그래. 내가 일러주는 대로 가 봐.
미스 정, 그 여자 마사지 하난 끝내 주는
여자야. 그러니까 신촌 로터리에서......"
"내 얘기두 좀 들어 봐!"
정화가 숨도 안 쉬고 내쏟는 말허리를
하연이 신경질적으로 끊었다.
"응? 응, 그래 뭔데? 해봐."
그제서야 정화가 한 호흡 쉬며 하연의
말을 기다렸다.
"내가 거길 왜 가니? 갈 이유도 없고,
그 사람 만날 이유도 없어."
"얘 좀 봐. 영란인 우리 친구야. 그
친구 신랑이 오랜만에 귀국해서 옛날 친구
뭐니? 너 영란이 몰라? 기범씨 몰라?
옛날에 느들이 어떻게 얽히구 설켰건
지금쯤 담담하게 친구 신랑으루, 옛친구루
만날 수도 있는 거잖아. 애가 왜 그래?"
마사지 운운할 때만 해도 호사가가
가지는 이상한 생기에 들떠 있더니 그
생기에 쐐기가 박히자 재빨리 공자왈
맹자왈한다.
"아무튼 난 나가기 싫어."
"너 아직도 기범씨 가슴에 꽉 넣어 두고
있구나. 그러니까 뭐가 안
되지. 넌 니 가슴에 꽉 품어 안고
아니에요 하면 그만인 줄 알지만 다른
사람 눈은 못 속여. 냄새가 나는데 어떻게
속이니? 괜히 내숭떨지 말구 나와. 나만
입 다물면 아무도 모르는 일이잖아. 나 입
여는 사람이야."
이 친구는 도대체 무슨 사건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이러는 것일까.
"나, 요즘 결혼 준비 땜에 좀 바빠."
하연은 자신도 미처 생각지 않았던 말을
불쑥 해버리고 말았다.
"결혼 준비를 하신다구? 그럼 하셔야지.
잘됐네. 오랜만에 모두 모여서 그 얘기두
좀 듣구 그러자."
정화는 하연의 결혼 얘길 믿지 않는 것
같다.
"아주머니. 그대가 지금 처녀시라 몸을
사리는 겁니까? 야야, 웃기지 말구 나와.
내가 시원한 주스 공짜루 멕여 줄께."
기범과 무슨 약속을 어떻게 했는지
정화는 쉽게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쉽게
있는 것 같아 하연은 기분이 나쁘다.
"넌 내가 무슨 속셈이라도 있어 그러나
하는 모양인데 나 아무 속셈 없어요. 그냥
옛친구 두루두루 만나 옛얘기 하면서
회포나 풀자는 생각밖엔."
"아무튼 시간이 없어. 미안해."
더 들을 것도 없어 하연은 전화를 끊고
코드까지 빼버렸다.
"친구가 중매 선다구 그러는 모양이지?"
"중매 선다면 나가지 왜 안 나가."
"그러게 말야. 박기종이보다 잘난 남자
만날지도 모르는데."
"그럼 나갈까?"
"그럼 진짜 그 얘기야?"
"아니야."
"그럼?"
한번도 하연에 대해서 시시콜콜 물어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왜 그래 자기?"
"불안해서 그래. 진짜 그런 일 생기면
어쩌나 하구."
"그렇게 자신이 없어?"
"나한테 자신 있는 게 어딨어."
"그래 가지구 어떻게 살았어? 지금껏."
"세상 일이야 하나에다 하나 보태면
둘이 되지만 사람 일이야 어디 그래?"
"사람 일두 세상 일이야. 그리구 난
이미 자기 여자잖아. 자신 못 가질 게
뭐가 있어."
자신이 기종의 여자라는 걸 확인이나
시켜 주듯 하연이 그의 목을 껴안았다.
"안아두 안아두 확신이 안 서."
오늘따라 미적거리는 그를 출근시키고
하연은 생각했다.
일단은 이 집을 떠야겠다.
하연이 혼자 산다는 걸 아는
사람으로부터 일단은 숨어 있고 싶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어느 시점에 가선
결혼도 하게 될 거고 그런 다음 다시
나서도 늦진 않다.
하연은 기종과 같이 함께 살 집을
알아보고 싶어 기종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아직 출근하시지 않았는데요."
여직원의 또랑또랑한 말속에 들어 있는
사장님이란 칭호가 하연을 대단히
만족시켜 주었다.
"아마 곧 도착할 거에요. 오는 즉시
집으로 전화 좀 달라고 해주세요."
크게 바쁘지 않다면 점심시간쯤 약속을
해서 만나리라 생각한다.
그러면 그는 전망 좋은 레스토랑,
아니면 호강받는 느낌이 들 정도의
식당으로 데리고 가서 그들이 갖는 첫
외식의 즐거움을 표해 주리라.
그리고 나서 두 사람은 그들이 꾸미고
살 알맞는 집을 알아보러 다닐 것이다.
이왕이면 새로 지은 아파트 쪽을 골라
봐야지.
그 사람으로선 처음 시작하는 살림이니
만치 모든 걸 새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게
어느 모로 보나 기분 좋은 일일 것이다.
당분간은 두 사람만이 잉꼬처럼 붙어 살
집이니 작은 평수가 오히려 나을 것이다.
집은 새로 지은 것에 중점을 두고
장만해야겠지.
하연은 앉은 채 방안을 둘러본다.
벽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티크장이며
화장대가 갑자기 하품이 날 만큼 따분해
보인다. 소파도 낡아서 눈만 흘기면 솜이
삐져나올 것 같고 커튼도 늙은 노파처럼
추레하다.
그 커튼 뒤에 그림자가 고스란히 비치는
작은 몸을 숨기고 서서 술래잡기를 하자고
조르던 딸아이 모습이 손에 잡힐 듯
선했으나 하연은 얼른 머리를 털었다.
지금 이 시간에 아이 생각을 한다는건
스스로 결박을 짓는 거나 다름없다.
지난날들에 그리움은 없으나 그러나
아이들 생각이 떠오르면 언제고 겁부터
난다.
싶어질까 봐, 그래서 한번이라도 보게 해
달라고 낯선 여인 앞에서 애걸하게 될까
봐, 하연은 언제고 아이 생각이 날라치면
그 싹부터 가차없이 잘라버렸다.
그래, 낡은 살림살이에 미련 가질 것
없어. 내게 중요했던 모든 걸 빼앗기고 난
뒤 그들의 기억이 담겨 있는 잡동사니
물건들을 껴안고 있으면 뭘해.
하연은 새 아파트에 새로 들여놓을
품목들을 적으려다 잠깐 멈추었다.
예산을 세우기 위해서는 우선 이 집이
어느 정도 나가는지부터 알아야 했다.
상가 전화번호가 적혀 있는 책자를 펼쳐
복덕방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기종이 곧 전화를 걸어올 테니 그
전화받고 난 다음 복덕방에 알아봐야지.
같아 화장실 가고 싶은 것까지 참고
기다렸다. 그러나 전화는 예상했던 시간을
훨씬 넘어서까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혹시 싶어 수화기를 들어 봤으나 고장은
아니었다.
아무리 차가 밀려도 지금쯤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인데 아가씨가 전달을 안했나.
생각이 아가씨에게 미치자 그 아가씨
전화받는 목소리가 썩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딱히 어느 부분이라고 꼬집어 얘기할 순
없지만 여하튼 목소리가 주는 인상은
호의적이지가 않았다.
"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말 자체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는데 그
없었다.
망할 계집애. 사장이 총각이라 은근히
넘보고 있었다는 게야 뭬야.
오늘 기종이 들어오면 당장 잘라
버리라고 해야겠다. 사장 전화를 대신
받는 입장이면 비서거나 아니면 최소한 그
사장으로부터 월급받는 사원일 게 아닌가.
그런 여사원의 목소리가 고분고분하지
않다면 그건 회사를 위해서도 맨 처음
시정되어져야 할 문제다.
한 집안의 인상이 대문에서
결정지어지듯 한 회사의 인상도 전화받는
목소리에서 결정지어진다. 그런데다
전하는 것까지 소홀히 해?
그 아가씨로 해 회사가 당장 무너지고
있는 것 같다.
일단 그 문제는 기종을 만난 다음에
해결하기로 하고 복덕방에 전화를 걸었다.
희희낙락 잘살고 있는 집에 걸핏하면
전화를 걸어 혹 집 내놓으시지 않겠냐고
묻던 때완 달리 복덕방 주인은 시들하게
대답했다.
"원체 움직이질 않아서요. 요즘은
팔겠다는 사람도 없고 사겠다는 사람도
없어요. 정 파실 생각이면 좀 있다
내놓으시죠. 지금은 내놔도 제 값 받기
힘드니까요."
"그렇더라도 시세는 어떤지......"
"글쎄 매매라는 게 있어야 시세라는
것도 있는데...... 가만 있자, 그 집이 몇
평이죠?"
"28평이오."
해도 오천까진 받았어요."
오천이라. 와아, 생각보단 많다.
처음 이사 올 때 이천팔백이었는데.
하연은 다른 집 오른 건 생각지도 않고
제집 오른 것만 횡재한 것 같아 황홀할
지경이다.
전화를 끊고 오천으로 예산을 짜기
시작했다.
우선 집을 열여덟 평으로 줄이면 적어도
열 평 값이 남는다.
그것으로 침대 사고 색깔 맞춰 시트며
이불이며 베개...... 그리고 커튼. 아,
도배도 근사한 벽지로 새로 해야지.
그러나 어느 것 하나 값을 아는 게
없으니 제대로 예산을 짤 수가 없다.
오늘 기종을 만나면 두루두루 값도
짜 봐야겠다. 그에게도 예산에 대한
의견이 있을 것이다. 자기도 얼마를
보태겠다든가 아니면 그 돈은 하연이
몫으로 고스란히 저축하고 자기가 그
예산을 다 대겠대든가. 생각만으로 가슴이
부풀었다.
아, 내게 오천이란 돈이 있다.
기종에게서 전화가 온 건 기다리다 못해
아침에 남은 밥으로 혼자 점심을 대충
때우고 난 두시 경이었다.
"아, 미안해. 사우나 갔다가 깜박 잠이
들어버렸어."
전화받는 여직원 목소리를 두고 신경을
곤두세우다가 아무래도 못난 짓인 것만
같아 중요한 손님 쪽으로 생각을 돌려
놓고 있던 하연은 사우나란 소리에 적이
지금이 두시니 깜박 잠이 든 것치곤
너무 길다. 게다가 전화 저쪽의 소음으로
미뤄 봐서 아직도 사무실은 아닌 것 같다.
"어디에요 거기?"
"으응, 목욕탕. 지금 막 옷 입고
나가려다 연락받고 전화하는 거야."
"바빠요?"
"응, 조금."
지금껏 사우나에서 늘어졌던 사람이
하연이 희망을 품고 있는 질문에 바쁘다고
대답하는 게 다소 괘씸하단 생각이
들었다.
"바쁘면 전화 끊구요."
"왜, 무슨 일이 있어?"
하연의 시뜻한 대꾸에 그가 바짝
다가서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지 말자. 난 어른이니까. 그리고
5천만원을 쓸 화려한 구상이 있지 않은가.
"만나구 싶어 지금."
"일찍 들어갈께."
"그게 아니구 지금."
"세시까지 은행 사람 만나기루 했어. 그
일 끝나는 대루 들어갈께."
그의 목소리가 다소 초조하게 들렸다.
느긋한 사우나 뒤의 상쾌함이나
여유로움이 전연 없다. 그 목소리에
매달려 떼를 쓸 계제가 전연 아닌 것 같아
하연은 상냥하게 알았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오늘만 날이 아니다. 내일도 있지
않느냐.
하연은 외출하려고 작정했던 김에
"엄만 무슨 기운이 남아 돈다고 딸년
먹을 김치까지 담가 놓고 그러우."
"맥 놓고 앉아서 제대로 밥이나 챙겨
먹나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랬는데 생각보다 밝은 모습으로
나타난 하연을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
좋아라 해야 할지 더 안쓰러워해야 할지
몰라 어머닌 잠시 염탐하듯 딸을
살펴보았다.
"그래, 어떡허구 지내니 요새."
안방에서 거실로 나오며 아버지가
물었다. 이혼 후 하연이 무슨 몹쓸 병에나
걸린 사람인 양 일체 쳐다보지도 않던
아버지였다.
"아, 아버지 집에 계셨군요."
미리 주눅이 들어 인사도 못했던 자신을
알았다는 듯 무안하게 웃었다.
"혼자 있기 힘들면 집으로 들어오너라."
감격적인 용서였다.
갑작스런 이혼으로 정신이 멍해 있을 때
아버지가 이래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친정으로 오고 안 오고를 떠나서 하연은
그때 아버지의 냉담 때문에 한 가닥 남은
체온마저 다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그러나 지금 아버지의 냉담이 풀렸다고
해서 감격할 때가 아니다.
"괜찮아요 아버지."
"괜한 오기 부리지 말고 아버지
말씀대로 해. 그 몹쓸 사람이 아이까지 다
안고 나갔으니 니가 좀 견디기
어려웠겠니."
하연은 자신의 마음속에 걸려 있는 오색
나올까 봐 얼른 고개를 숙였다. 자신은
이미 새 파도를 타고 있는데, 아버지
어머닌 아직도 이혼의 잿더미에 앉아
있다.
"이제 그 잿더미에서 일어나세요. 전
벌써 다 잊은 걸요."
진정 밝은 목소리로 자신의 변화를
알리고 싶었지만, 그러나 그러기엔 염치가
좀 없다. 1년이나 지났으면 모르겠다.
아니 6개월만이라도 지났다면 그렇게 염치
없지는 않겠다.
"여자 혼자 그러고 있으면 괜한 소리
듣는다. 친정이 없다면 또 모를까. 흉한
소리 듣지 말고 당장이라도 옮겨."
혹 어머닌 무슨 소릴 들은 게 아닐까.
남자가 드나든다든가, 아니면 아예 함께
"왜, 누가 뭐라 그래요?"
그러나 그 말엔 아무 대꾸 없이 어머닌
유과가 든 둥근 접시를 갖고 와 앉는다.
"먹어라. 아버지 제자가 시골에서 갖고
왔더라."
어머닌 김치 때문에 하연을 부른 게
아닌 듯싶다.
유과를 집어 한입 베어무는데 문득
정화네 집이 이 근처 어디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도둑 제 발 저린 격으로
대뜸 정화가 뭐라 그래요 하고 물어 볼
수도 없다. 그러나 어머니가 그 얘길 먼저
꺼내 주었다.
"누구냐, 니 친구...... 그 앨 시장에서
만났다. 난 봐도 모르겠던데, 그 애가
먼저 아는 체를 하더구나."
"내 친구 누구?"
"글쎄 이름은 모르겠다. 이 동네 어디
산다던데."
정화가 틀림없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다그치는 음성이 되었다.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 사람들 남 말
좋아하는 게 어디 어제 오늘 일이냐."
"아니 뭐라 그랬게?"
"모르겠다. 무슨 소린가 하긴 하는데 난
제대로 듣지두 않았다."
딸에 관한 얘긴데 왜 제대로 듣지
않았겠는가. 그냥 흉한 구설쯤으로 덮어
두고 싶은 게 어머니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세우셨나. 콧대 부러질려구."
하연이 친정집을 나와 곧바로 '티롤'에
들어서자 정화가 제딴엔 우정이랍시고
눈을 흘기며 생글거렸다.
너 우리 엄마한테 무슨 소리 했어? 안
그래도 나 때문에 기죽어 있는 노인네들,
니가 친구로서 그럴 수 있냐. 대충 이런
말을 퍼붓자고 달려왔는데 칸막이 뒤에서
기범의 얼굴이 쑥 나타나는 바람에 그만
말문이 닫혀 버렸다.
참 그렇지. 아침에 이 사람을 만나라고
정화가 전활 했었지.
친정집에서 어머니의 얘기를 듣고
여기까지 달려올 동안 기범에 대한 생각은
완전 백지상태였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하연은 그를 만나러 온 꼴이 되고 말았다.
정화는 긴한 전화도 아닌 것 같은데
전화통을 붙들고 이쪽은 아예 모른
척이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앉게 되면
나중에 저 계집앤 또 무슨 소리로 나발을
불까. 그러면서도 그 자릴 박차지 못하고
하연은 자리에 앉았다.
"오랜만이야."
기범의 말투는 옛 그대로였으나 그의
외모는 깊게 달라져 있었다.
얼핏 보기엔 허름해 보이는 마직 상의를
걸쳤는데, 안에 받쳐 입은 셔츠랑
기막히는 색조로 어울려 이태리
밀라노쯤에서 수입해다 놓은 사람 같았다.
"어떻게 지냈어?"
"그냥 그렇지 뭐."
그러면서 하연은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좀 고상해 보이는 옷을 입고 나올걸.
알록달록 밝은 꽃무늬가 프린트된
원피스가 여기 오기까지는 화사해
보였는데 기범의 세련된 옷 색상 앞에서
그만 촌스럽게 기가 꺾였다.
"내가 많이 잘못했지?"
그가 지난날을 사과하듯 말했다. 친구
영란과 어울려 제가 먼저 모반을 일으켜
놓고도 하연이 결혼한단 소리에
"나쁜 년!"
저주에 가까운 목소리로 축하인사를
대신하던 기범은 아니었다.
"그땐 어렸어."
그는 그 말로 변명하는 자신을 하연이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지금두 어리기는 마찬가진 것 같은데."
쳐다보았다.
"어른이 됐다면 새삼스레 날 만나는 건
피해야지."
기범이 피식 웃었다.
"한번 만나 보구 싶었어."
"왜? 얼마만큼 불행한지 확인하구
싶어서?"
그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아직두 날 원망하는구나."
어럽쇼. 그는 정화와 같은 소릴 한다.
하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지 말고 좀 앉아. 오랜만에
만났는데."
"오랜만에 만났다고 반가울 처지도
아니잖아?"
긴 세월 동안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기범이 빙긋 웃었다.
"그래, 그런 얘기라도 좀 하자. 나한테
변명할 기회도 좀 주고."
"미안해. 난 지금 그럴 마음이 아니야."
"그럼 왜 나왔어?"
"기범씨 와 있다는 거 깜박 잊었어. 안
믿어도 할 수 없지만."
하연은 정화가 있는 곳으로 갔다.
정화는 그때까지 전화통에 매달려
있었다. 하연은 그 전화기를 빼앗아
제자리에 놓아 버렸다.
"어머 얘 좀 봐. 얘기도 안 끝났는데."
"너 우리 엄마한테 무슨 소리 했어?"
"내가 무슨?"
"함부로 내 얘기 하고 댕기지 마. 난
아직 널 친구루 믿구 있으니까."
나와 버렸다.
친구로 믿고 있다고? 천만에. 이미
옛날부터 정화는 믿을 만한 친구는
아니었다.
"너 명진이 애인 봤니? 꼭 강아지처럼
귀엽게 생겼더라."
그런 얘기에 같이 재밌어 하며 같이
웃어 놓고도 명진이를 만나면
"얘, 하연이가 니 애인 개새끼라고
하더라."
로 바꿔 놓는 아이였다. 발끈한
명진이가 삼자 대면을 시켜 따지면 정화는
또
"강아지가 그럼 개새끼지 소새끼니?"
로 빠져 나가곤 했다.
그런 아이를 내가 믿는다고?
하연은 입맛이 썼다.
감정대로 하자면 욕이나 한 사발 퍼부어
주고 나와야 하는데 토미 건을 위시해서
제 자신의 현재 입장이 여러 가지로
떳떳하지가 못하다.
정화가 작정만 하면 하연이 개잡년이
되는 건 너무나 간단하다.
그게 겁이 나서 하연은 널 믿는다는
소리로 백기를 흔들어 놓고 나온 것이다.
애초 그 앨 찾아간 게 잘못이야.
그렇다고 달리 찾아갈 친구가 없었다는
것에 하연은 씁쓸한 열등감을 느낀다.
어쩌다 난 이 나이까지 친구 하나
제대로 갖지 못했을까.
그러자 기범이 그 원흉이었다는 원망이
든다.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은 기범이 영란과 반란을
일으킴으로 해서 멀어져 갔다.
많은 친구들이 기범의 배신을 규탄해
주고 위로해 주었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하연은 수치심 때문에 혼자가 되고자 고개
숙인 채 문을 닫아 걸었다.
그때 하연의 편이 돼 주었던 친구들은
얼마 안 가 영란이 쪽으로 합세해 버렸다.
"사랑은 쟁취야. 쟁취할 수 있는
사람만이 사랑할 자격이 있는 거고."
하연은 사랑할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
돼버렸고 그로 해서 지금은 찾아갈
친구조차 없이 돼버렸다.
"아, 지금 와?"
기종이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난 누구 만난다길래 늦을 줄 알았지."
하연은 안방으로 들어가 입고 나갔던
원피스를 훌렁 뒤집어 벗었다.
무심코 안방으로 따라 들어오던 기종은
하연의 옷 벗는 모습에 흠칫해서 도로
나갔다.
저 사람은 아직도 소년 같은 데가 많이
남아 있는데 난 남자하고 살았던 티를
너무 공공연히 내보이고 있는 것 같애.
하연은 그런 자신이 두루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홈 웨어를 입으려다 그 옷 역시
펑퍼짐하게 퍼져 있는 여편네를
연상시키는 것 같아 쫄쫄이 검정바지에다
역시 검은 반팔 스웨터로 바꿔 입었다.
있게 보인다. 과찬을 아끼지 않는다면
발레리나 같기도 하다.
하연은 대단히 흡족해져서 거실로
나왔다.
그러나 기종은 하연이 방을 쓸 듯이
치렁거리는 홈 웨어를 입었건 몸에 찰싹
붙는 발레복을 입었건 아무 상관없는
얼굴로 하연을 보았다.
"차 한잔 할래요?"
"그러지."
하연은 물주전자를 올려놓고 찻잔을
준비했다.
다른 날은 찻잔 두 개만 달랑 들고 마주
앉았었는데 오늘은 찻잔 받침도 준비하고
그 옆에 티스푼도 얌전하게 놓았다.
"꼭 끼는 옷이라 잘 안 입었는데 입고
차를 마시며 하연은 지나가는 말처럼
기종의 관심을 건드렸다.
"좋은데 뭘."
기종의 빗나가는 대답에 하연은 풀썩
웃었다.
"왜?"
"아니."
차를 마시는 동안 하연은 오늘 있었던
일 중 어떤 얘기부터 꺼낼까 생각했다.
기종이 먼저 화제를 만드는 법은
없었다. 간혹 있다면 그건 11년전
얘기였고 하연은 이제 그 얘기에 질려
버렸다.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얘기도 있을 법하고, 현재 하고 있는 일,
심지어 그날 있었던 바깥 일에 대해서도
전엔 제 스스로 얘기를 꺼낼 줄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설사 하연이 쪽에서 물어도
그의 대답은 너무 간단해서 두 마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느니 하연이 쪽에서
얘기를 만드는 게 나았다.
"오늘 아침 난 꿈이 많았어요."
그러다 문득 전화받던 아가씨 생각이
났다.
"회사 전화받는 아가씨, 못쓰겠던데요."
"왜?"
기종이 당황한 얼굴로 찻잔에서 입을
뗐다.
그의 당황해 하는 모습이 하연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사장의 아내 될 사람으로서 조금은
우쭐한 기분으로 객적은 세도를 부려 보는
그런데 그는 흡사 꼬리라도 밟힌
얼굴이다. 그것이 이상해서 하연은 꼬리를
더욱 세게 밟아 보았다.
"잘라 버리세요, 당장."
"왜? 전화로 뭐라 그래?"
"그럼요. 당신 애인처럼 굴었어요."
"그것뿐이야?"
"그 이상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해요?"
그러자 그의 일순 굳었던 표정이 풀리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다면 잘라야지."
그가 웃음을 담고 말했다.
"정말이에요."
이번엔 하연이 정색하는 얼굴을
만들었다.
"그래, 그렇게 하자구."
짚어 본 남녀관계는 아닌 듯했다. 하연이
소리내어 웃었다.
"농담이에요."
"알아."
"어떤 여자에요?"
"누구? 미스 김? 사무실에서 일하는
여자일 뿐이야."
"예뻐요?"
"글쎄."
언제나처럼 자신의 얘기로 돌아가면
기종의 대답은 짧아진다.
"그러지 말구 자세히 얘기 좀 해봐요."
"글쎄, 예쁜지 안 예쁜지 잘 모르겠어.
그런 쪽으로 쳐다본 적은 없으니까."
"일은 잘하구요?"
"비교적."
"글쎄."
"자기 직원 나이도 몰라요?"
"내가 그 많은 사람 이력서를 어떻게 다
외구 다니누?"
"그럼 나보다 많아요 적어요?"
"많을 걸. 서른은 넘어 보이니까."
"근데 왜 결혼 안했대요?"
"그것까지야 알 수가 있나."
그 얘기는 더 이상 끌고 갈 건덕지가
없어 보였다.
"근데 왜 아까 당황해 했어요?"
"당황하긴. 갑자기 잘라 버리라고
하니까 무슨 일인가 했지. 그래, 오늘
어디 나갔었어?"
그가 화제를 하연이 쪽으로 돌렸다.
"자기 만나서 우리 살 집도 알아보고
그럴 생각이었는데 자기가 바쁘다니까 난
내 볼일 보구 댕겼지 뭐."
"바쁜 일 끝나면 내가 알아볼 테니까
너무 서둘지 마."
"너무 큰 집은 필요 없어요. 우선은
작고 아담한 집에서부터 시작해요, 우리."
"알았어."
대답 끝으로 부지불식간에 한숨이 딸려
나왔다.
"걱정 있어요 당신?"
얘기하느라 식어 버린 커피잔을 들며
기종이 이번에도 한숨을 섞어 말했다.
"걱정이 왜 없겠습니까.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가는데."
비록 한숨을 섞었다 해도 말투는
농담조여서 하연은 자기가 마신 커피잔을
들고 일어났다.
기운내야 하니까 이 몸은 밥부터 짓지요."
"그럼 그동안 이 몸은 풍진이나 벗겨
내지요."
기종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목욕할
준비를했다.
오전 내내 사우나에 있었다면서 또
목욕을 하나 싶었지만 하연은 그 말을
참았다. 조금 전 그가 '바쁜 일
끝나면'이라고 말했을 때도 바쁜 사람이
사우나에서 몇 시간씩 보내냐고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이쪽은 단지 질문에 불과하지만 듣는
사람은 불쾌할 수도 있다. 잔소리 같고
따지는 것 같고 못 믿는 것 같고 의심하는
것 같고.
하루에 목욕을 두 번 하면 어떻고 세 번
바빠도 경우에 따라 오전 시간이 텅 빌
때도 있는 법이다.
"등 밀어 드려요?"
"괜찮아. 오늘 사우나에서 껍질 홀랑
벗겼으니까. 그냥 찬물 좀 뒤집어 쓸
거야."
말 않기를 잘했지. 회사 일로 그냥
바빴다고 해도 될걸 전화 기다리다 시뜻해
있을 거 뻔히 알면서도 곧이곧대로
사우나에서 잠이 들었다고 얘기하는
우직하고 순직한 사람 아니냐.
그렇게 곧이곧대로 사는 사람도
성공하는 거 보면 세상이 그렇게 막
돌아가는 것만은 아닌 듯도 싶다.
"이 김치 어머니가 담그신 건가?"
기종은 아침 전화로 하연이 친정에
빈손으로 돌아오는 하연을 보았지만 그는
대체적으로 눈썰미가 섬세한 사람은
아니었다.
"얘기하느라 잊어먹구 그냥 온 거
있죠."
"무슨 얘기가 그렇게 재미있었길래?"
하연은 물을 가질러 일어났다. 그의
질문이 꼭 대답을 원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것보다 어머니가 했던 얘기를 그대로
옮기기가 망설여졌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이혼의 잿더미에 앉아 있는 줄
알고 계시더라. 설마하니 그 동안에
남자가 생겼으리라곤 생각도 안하시더라.
이 이야기에서 하연은 너무나 빨리,
그리고 너무도 쉽사리 새 남자를 맞아들인
부끄러움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설사 그 새 남자가 기종이라 할지라도.
"당당하지 못할 게 뭐 있어? 누구를
위해서 주저앉아 있어야 돼? 빨리
시작하는 게 뭐가 나빠!"
하연의 오기가 그렇게 소리치는데도
하연은 웬지 기분이 나빴다.
비련의 주인공이 될 생각이 없으면서도
비련의 주인공으로 남아 있지 못하는
자신에게 느끼는 이 부끄러움은 무엇일까.
남이 측은하게 생각하는 게 가당찮아
펄펄 뛰고 싶은 심정이면서도 결코
측은하지 않은 현재를 숨기고 싶은 건
무엇 때문일까.
외짝 눈 가진 사람들만 사는 세상에 두
눈 가진 사람이 부끄러워지는 그런 걸
거야.
자위하고 일단 그 생각은 덮어 버렸다.
누가 뭐라건 나는 내 식으로 산다 하고
당당하게 고개 쳐들 수 있어야 하는데 난
마음만 그렇지 대가 세질 못해서 그래.
덮어 버린 생각 위에 변명이 모포처럼
날아와 하연을 위로해 주었다.
그러나 세상 일은 숨기고 싶다고
숨겨지는 건 아니었다.
이른 아침, 새벽의 욕정으로 뒤엉켜
있는데 차임 벨이 울렸다.
하연은 순간 온몸이 그대로 굳어 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기종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얼른 하연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누구지?"
"글쎄, 이 시간에 집을 보러 올 리도
없고."
팔아 달라고 부탁한 지 한 달이 다
돼서였다. 아주머니 집부터 해결해
드려야겠다고 생각해서 여기저기 수소문을
했다고 생색을 내었다.
어제는 그 생색이 고마웠는데 지금은
날벼락 같다.
"어떤 개떡 같은 성질을 가진
사람이길래 꼭두새벽부터 집을 보러
오지?"
가슴이 할랑거리는 가운데서도 하연은
복덕방 생각밖엔 하지 못했다. 그 외엔
전화도 없이 찾아올 사람이라곤
없었으니까. 아니, 없다고 생각했다.
"옷 다 입었어?"
뒤집혀 있는 잠옷 소매에 연신 헛팔질을
하면서 하연은 기종이 옷 입는 것부터
차임 벨을 계속 울었다.
"누구세요?"
하연은 잠옷 허리띠를 허둥지둥 찾아
매며 현관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대문 밖에 있는 사람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토록 가슴이 할랑거린 이유를
알았다.
"별일 없니?"
어머니 역시 가슴이 할랑거리고 있는
얼굴이었다.
"웬일이세요? 무슨 일 있어요?"
"글쎄, 왜 전화는 뽑아 놔 가지구
사람을 걱정하게 만드니?"
뽑혀진 전화 코드를 꽂으며 어머니가
화를 냈다.
"꿈자리가 사나워서 전화를 했는데 전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돌아서던
어머니가 이번에는 기종을 보고 털썩
주저앉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이 그대로 숨이 넘어갈
것 같다.
기종도 하연도 그 얼굴 앞에서 같이
숨이 넘어가는 것 같다.
뭐라고 말문을 열기느느 열어얄 것
같은데 갑자기 부닥친 일이라 머리 속은
그대로 백지상태다.
"저...... 엄마......"
간신히 입을 뗐으나 그 다음 이을 말이
없다.
이럴 때 기종이라도 변죽 좋게 나오면
같이 설레발이라도 칠 텐데 그는 하연이가
설명해 줄 때까지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인사하세요. 엄마에요."
하연은 순서 없이 엄마부터 가리켰다.
"안녕하십니까."
기종이 선 채 머리만 꾸벅했다.
지금 판국에 안녕하십니까라니. 무슨
인사를 저렇게 하지. 넙죽 엎드리지
못하고.
"......엄마, 저......"
소파 팔걸이에 의지한 채 어머니가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로 간신히 일어났다.
그리곤 쓰다 달다 한마디 없이 그대로
나가 버렸다.
하연은 붙잡을 엄두도 염치도 없어
그대로 멍하니 서 있다가 기종을 향해
돌아섰다.
"어쩜 사람이 그래요? 그렇게밖에
얘기를 꺼내야잖아요."
별안간 왜 자기에게 화를 터뜨리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기종이 하연을 보았다.
"그래 당신은 제 어머닐 보고도 아무 할
얘기가 없다는 거에요?"
"순서가 그렇지 않잖아."
"순서가 그렇지 않다뇨? 그럼 어떻게
해야 순서가 되는 건데요?"
"갑자기 오실 줄 알았나 누가."
"누군 알았어요? 허지만 맞닥뜨렸으면
거두절미하고 우리 관계를 밝혀야죠."
"당신은 왜 못했어?"
"나보단 그래도 남자 쪽이 얘기하기가
수월하잖아요."
"아무 것도 모르는 노인네한테 내가
뭐라 그래."
탓 내 탓으로 언성을 높였다.
"이제 어떡할 거에요?"
"......"
그는 대꾸 없이 연달아 두 대째의
담배를 피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요?"
"나가 봐야지."
그는 이 일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처럼
나가 버렸다. 그가 나가자 하연은 새삼
난감해졌다.
"오늘 저녁에 집으로 좀 오너라."
함께 오라는 건지 혼자 오라는 건지
아버지는 그 말만 하곤 전화를 끊었다.
"어떻게 하죠?"
하연은 기종에게 전화했다. 기종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건 분명 혼자 가 보라는 뜻이었다.
중요한 대목에서 남자가 나서 주지 않는
게 야속하기도 했지만 그로서도
갑작스러운 일이라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애써 이해하려 했다.
그렇다고 전쟁터에 혼자 내보내다니.
하연은 대책 없이 전쟁터로 떠밀려
나가는 경험 없는 병사처럼 두렵고 서운한
마음으로 혼자 친정으로 갔다.
"니 얘기 좀 듣자.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인지."
아침에 어머니가 하얗게 질리던
모습과는 달리 아버지는 딸에게 생긴
변화에 기대를 걸고 있는 얼굴이었다.
아버지의 그런 기대 앞에 하연은 혼자
앉아 있는 게 죄스럽고 민망했다.
아버지가 뭐라시기 전에 기종이 먼저
나서서 시원시원하게 앞으로의 계획을
얘기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 일에서 웬지 한 발 비껴
서 있는 느낌이고 그의 그런 비겁함을
아버지에게 들키고 있는 느낌이다.
"시기는 언제쯤 잡고 있니?"
"......"
당사자끼리 구체적인 내일에 대해
주고받은 게 없으니 얘기할 건덕지가
없다. 그렇다고 그렁저렁 지내다가 적당한
기회 봐서 결혼하겠노라 얘기할 수도
없다. 게다가 부모 앞에 노출된 마당에서
보여주는 기종의 태도는 하연으로 하여금
이 일을 이쯤에서 결단내고 싶게 했다.
그렇다고 이것 역시 이 자리에서
"제가 알아서 할께요."
한참 만에 하연은 간신히 이렇게
대답했다.
"물론 알아서 하겠지만 처신하는데
각별히 신경 써야 한다. 남의 입에 한번
오르내리기 시작하면 사람 추해지는 건
금방이야."
"예, 알았어요."
그쯤에서 아버지는 하연의 소관으로
얘기를 일단 끝내 주려는 듯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어머니가 나섰다.
"뭐하는 사람이냐?"
"사업한다나 봐요."
"무슨 사업?"
이 대목에서 하연은 말문이 막혔다.
그러고 보니 그가 무엇을 하는지 하연은
"잘은 모르지만 꽤 크게 하고 있나
봐요."
자신의 귀로도 그 얘기는 허황하게
들렸다.
"그 쪽은 홀몸이냐?"
"어머니가 계시고 형제가 몇 있나
봐요."
대답을 하면서 하연은 자신에게 염증이
일었다. 무엇 하나 똑똑하게 아는 게
하나도 없지 않은가.
그날 집으로 돌아와서도 하연은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화풀이는 몽땅 기종이에게로
건너갔다.
"도대체 당신은 뭐하는 사람이에요?
어디 사는 누구에요? 왜 난 당신에 대해서
하는지,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나와는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인지 왜 난
아무 것도 모르죠?"
기종이 사정하듯 하연의 손을 모아
쥐었다.
"미안해. 내가 가서 전부 말씀 드려야
하는데 이 나이 되도록 아직도 어른이라면
무서워서, 정말 미안해. 나도 오늘은 도통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어.
어르신네 찾아뵙고 넙죽 엎드려서 귀한
따님 제가 맡겠습니다 사정을 해야 한다고
마음속으로는 열두 번도 더 엎드리고 열두
번도 더 사정했는데 정작 이렇게
돼버렸어. 정말 미안해. 내일이라도
찾아뵙고 내 그렇게 할께."
그가 진정으로 미안해 하고 사죄하는
"그럼 얘기해 봐요. 순서껏, 어떻게
얘기할 건지."
"우선 집을 보러 다니는 중이니까 집이
결정되는 대로 결혼식도 올리겠다고."
"집을 언제 보러 다니기나 했나 머."
마음이 풀어진 하연이 입을 삐죽했다.
"보러 다녔어 그동안."
"정말?"
"논현동 빌라를 봐 둔 게 있는데
내일이라도 같이 가 봐. 마음에 들 거야."
"빌라? 그럼 엄청 비싸겠네. 이 아파트
팔아 가지고는 어림도 없겠다."
"이 아파트 얼마나 나간다구."
그는 그러니까 하연의 재산에 대해선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
하연은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사업하는 사람일수록 돈에 쪼들린다구
하던데."
"큰돈에 쪼들리지 푼돈에 쪼들리진
않아."
아, 그러니까 빌라 한 채 정도는 푼돈에
불과하는구나, 이 사람은.
"진짜, 자기 무슨 사업해? 엄마가 물어
보시는데 대답할 말이 있어야지."
"내가 섬유 수출한다는 얘기 안했던가?"
"안했어. 섬유 수출이면 어떻게 하는
거야? 천 같은 거 수출하구 그러는 거야?"
하연의 무식함이 귀여운 듯 그가 하연의
볼을 가볍게 쥐고 흔들었다.
"쉽게 얘기하면 그런 거지."
"그럼 공장두 있어야잖아."
"그럼 공장두 없이 해?"
생각보다 이 사람은 제법 큰 재산가인
듯하다.
"참 내일 공장 내려가야 해. 아침 일찍
갔다가 잘하면 모레쯤 올라 올 거야."
하연은 그가 이틀씩이나 집을 비운다는
게 대견하면서도 응석처럼 싫은 기분이
들었다.
"이틀씩이나?"
"한창 바쁠 땐 노상 공장에서 살았어.
내가 요즘 하연이한테 빠져 있느라 이러구
있는 거지."
"그럼 앞으로 노상 떨어져 사는 일이
많겠네."
"사업하는 사람 남편으로 두면 그 정돈
각오해야지."
"싫어. 떨어져 있는 건."
"어떤 방법?"
"내가 내일 주물공장에 가서 이쁜 깡통
두 개 만들어 올 테니까 같이 빌어먹자."
"아이 엉터리."
하연은 걷잡을 수 없이 재밌어져서
어린애처럼 칭얼대기도 하고 밤거리의
여자처럼 농도 짙은 교태도 부려가며
무지개 같은 앞날에 황홀해 했다.
"나, 내일 자기 따라가면 안돼?"
"안될 게 뭐 있어."
"그럼 간다."
"가자."
아, 이렇듯 행복이란 간단한 걸, 아침엔
왜 그렇게 난감하게 떨었던가.
"시계 맞춰 놓고 자야지."
등뒤에서 끊임없이 덤벼드는 기종을
자명종을 맞췄다.
"자기 자꾸 그럼 나 내일 아침 일찍 못
일어난단 말야. 그러지 말구 자. 남매처럼
다정하게 손만 잡고. 알았지."
"어림없는 말씀을 왜 이렇게 하시나."
그날따라 기종은 유난히 하연을 보챘다.
그러는 기종이 재미가 나 하연은 한껏
도망을 다니다가 제풀에 달아올라
쓰러졌다.
"졌지?"
"몰라."
아침 시계소리에 잠이 깼을 때 기종은
한밤중이었다.
"자기야 일곱시야. 일찍 가얀다면서."
설핏 잠이 깬 기종이 다시 하연을
안았다.
나가겠다."
"조금만."
"조금이란 게 어딨어."
"가만 있어. 조금만."
하연은 그가 하는 대로 가만 내버려
두었다.
문득 그가 놀란 듯이 소리쳤다.
"일곱시가 넘었잖아."
후다닥 일어난 그가 급히 샤워를 끝내고
나갈 준비를 했다.
"어떡허지. 아침도 못 먹고."
"가다 먹으면 돼."
그가 뛰어나가고 하연은 웃으며 그를
배웅했다.
"전화해야 돼."
같이 가겠다는 어제의 약속도, 하연의
잊은 듯 바쁘기만 했다.
열한시 조금 못미처 복덕방에서 집을
보러 왔다.
기종이 빌라를 봐 둔 게 있다고 했고
하연이만 좋다고 하면 당장이라도 이사갈
수도 있을 것 같아 하연은 값이야 어떻든
팔아 버리기로 작정했다.
"어젠 댁에 사람이 안 계시더만요."
살 사람이 집을 둘러보고 있는 동안
복덕방 김씨는 담배 한 대를 빼물며
말했다.
"네......좀."
"사실 지금은 값이 안 좋은 때라
파시라고 하기가 좀 뭐한데
말입니다......"
"여기 값이 안 좋으면 이사갈 집도 안
"그렇게 생각하면 또 그렇지요. 아,
어떻게 구경 좀 하셨습니까?"
김씨가 부리나케 담뱃불을 비벼 껐다.
집을 보러 온 남자는 깐깐해 보이는
얼굴을 찌푸리며 마땅찮은 듯 고개를
갸웃했다.
하연은 면전에서 자신이 퇴짜를 당하는
듯한 모욕감이 일었다. 이 집 어디가
어때서.
그러나 그건 집 값을 좀더 깎아 보려는
제스처였던 모양으로 김씨와의 몇 마디
얘기에서 금방 종결이 나버렸다.
가격은 일전에 얘기하던 선에서 2백이
내려 있었다.
그때도 좋은 값은 아니라고 했는데.
"아파트 값이라는 게 일정한 시세가
마찬가질 겁니다."
어느 아귀에 빠듯하게 돈을 맞춰야 할
일도 없는 하연에겐 2백을 손에 덜 쥐는
게 문제가 아니라 자기의 것이었던 집이
30 넘긴 노처녀마냥 제 값을 못하는 게
못내 자존심이 상하고 서운했다.
그렇지만 하연은 한시 빨리 이 집을
떠나고 싶었다.
논현동 빌라가 기다리고 있는데 낡은
감상 따위 쥐고 앉아 애착을 떨 건 없다.
하연은 팔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보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집 문서에 기재된 명의인의 인감과
주민등록등본을 뗄 길이 없는 것이었다.
집은 아직도 강세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그것으로 이 집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하연은 이 일로 다시 강세를
만나야 하는 일과 부닥친 것이다.
그러나 하연은 썩 내키는 일은 아니라
하더라도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강세를 만나 집을 팔겠다고 하면 그는
자신의 인감과 기타 구비서류들을 다
만들어 줄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는 양도소득세니 뭐니 그런 것
때문에 이름을 바꿔 놓지 않았으리라.
하연은 그렇게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강세를 만났다.
"여, 오랜만인데. 무슨 일이야. 이렇게
아름다운 부인께서 날 다 만나러 오시구."
하연은 전남편을 만나러 오면서
조금도 심각하지 않았다. 딴 여자를
즐기러 나온 남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집을 팔려구요."
거두절미하고 하연은 이 말부터 꺼냈다.
그의 농담을 한마디라도 받아 주면 그것이
곧 기종에게 죄가 되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런데?"
"집은 아직 당신 이름으로 되어 있구
그래서......"
"그럼 아직 내 집이군 그래. 난 집 팔
생각이 없는데."
그는 농처럼 가볍게 웃어 넘기고는 차를
주문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시원한 주스라도
한잔 대접해야지. 그래 어때? 요즘 재미
재미 좋자고 하연이가 그를 버리고 떠난
것 같다.
"인감하구 주민등록등본이 필요해요."
하연은 한 가지 말만 되풀이했다. 그의
양미간에 성가신 느낌이 슬쩍 지나갔다.
"집은 왜 팔려구?"
"이사를 갈려구요."
"어디루?"
"어디든 그건 알 거 없구요."
히히히, 그가 주스잔을 들며 소리내어
웃었다.
"알면 찾아갈까 봐 그래? 아니면 알고도
안 찾아갈까 봐 그래?"
"언제까지 되겠어요?"
"왜 그렇게 급해? 결혼이라도 하나?"
가슴이 뜨끔했다. 구태여 숨길 일도
얼른 나오지 않았다.
"그래요. 결혼해요."
하연은 목구멍으로 밀어내듯 간신히 이
말을 했다.
그가 의외인 듯 휘파람을 휘익 불었다.
"어떤 사람이야?"
"그런 것까지 얘기해야 돼요?"
"하는 게 좋지. 내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3일 후에 다시 전화하겠어요. 서둘러
주세요."
하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세가
주스잔을 입에 댄 채 한손으로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신중히 해, 신중히. 능력 있어 금방
결혼하는 건 좋지만 세상엔 날도둑놈들이
"그런 걱정 하지 않아도 돼요."
"집에서 서둘러 준 거야? 아님 하연이가
선택한 거야?"
"제 선택이에요."
"그렇담 문제 있군."
"없어요. 당신관 다른 사람이니까."
"이것 봐. 나를 선택했던 그 안목으로
또 누구를 선택했다면 그게 그거야."
만나서 하등 즐거울 것도 없는 전처
앞에서 시종 실실거리는 강세의 얘기를
귓등으로 흘려 넘기면서도 이상하게 그
말만은 가슴에 그대로 와 안겼다.
"제 밥벌이는 하는 친구야?"
무시해도 너무 무시한다. 스물두 살의
안목으로 저를 선택했다 해서 지금도 저
같은 남자나 찾아댕기는 줄 아는
다른지를 구구절절 설명해 주고 싶었다.
너같이 하루 아침에 날아가는 그런
무책임한 남자가 아니야. 너같이 한 달에
한번 받는 봉급에 목매다는 사람도
아니고. 그는 너와 스케일이 달라.
논현동에 빌라를 사 두고 공장도 있고
수출도 하고.
그러나 그 얘기를 다 할 수는 없었다.
논현동으로 이사간다는 얘기만 했다.
"결혼을 하겠다면 막을 생각은 없어."
기가 막혀서. 제가 무슨 권리로 막아?
"허지만 그 사람 집으로 시집을 간다면
구태여 지금 살고 있는 집을 팔 필욘
없잖아. 시집갈 때까지만 살아. 그 다음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그게 무슨 뜻이에요?"
남자한테 시집가면서 그건 뭐하러 챙겨.
나도 돈 쓸 데 많은 사람이야."
"그럼 그 서류 안해 주겠다는
얘기에요?"
"이것 봐. 시집갈 때까지만 살아.
시집갈 때까지만. 미국에서도 결혼하는
마누라한테까지 생활비를 대주진 않아."
언제 생활비 한푼 대준 적이 있느냐고
대들려다 하연은 기가 막혀 그를
쳐다보았다.
"처음부터 그 집 당신 마음대로 하라고
서류 던져 준 거 아니야. 내가 무슨
재벌이라고 그걸 몽땅 줘? 그냥 살고
있으라고 했던 것뿐이야. 당장 갈 데도
없는 것 같으니까."
앞이 캄캄하고 이혼의 분함이 새삼
라이터를 챙겨 쥐고 일어났다.
"애들 보고 싶어 그러나 하고 측은해서
나왔더니 애들 얘기는 한마디도 안 물어
보는군."
강세는 그대로 나가 버렸다.
하연은 얼이 빠진 채 한동안 그러고
앉았다가 눈앞에 그대로 놓인 주스잔을
들어 단숨에 다 마셨다.
난, 그러니까 뭐야. 결혼에도 속고
이혼에도 속았다는 거야?
하연은 당장 기종을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지방 공장에 내려가
있을 것이다. 그곳에 어디든 당장 달려
내려가 그로부터 위안이나 어떤 해결책을
듣고 싶다.
하연은 공장 주소를 알기 위해 전화를
가지 않고 사무실에 있다지 않는가.
"여기 복잡한 일이 좀 있어서 못 갔어."
서울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하늘이 도운
것 같아 하연은 기종을 만나러 갔다.
강세의 한마디로 간단히 알거지가 된
하연은 춥고 초라해진 자신을 다독이기
위해서도 기종의 근사한 회사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고 싶었다.
그가 늘 앉는 푹신한 소파에서 그의
비서가 날라다 주는 뜨거운 차를 그의
다정한 시선 속에서 마시고 싶었다.
그리고 높은 산에서 느끼는 얕은 산의
하잘것없음을 내심 비웃어 주고도 싶었다.
그러나 기종은 호텔 커피숍으로 오라고
했다. 기종은 기종대로 처음으로 밖에서
만나는 하연을 나름대로 대접하고
"난 당신 회사로 가고 싶은데."
"그건 다음에."
서운하지만 또 한편 생각해 보면 아무
것도 모르는 직원들 앞에 느닷없이 사장의
여자로 나타나는 것도 기종으로선 준비가
필요하리라.
"손님으루 찾아가두 안돼요? 처음이니까
손님일 수도 있지 뭐."
하연은 자신이 지금 철부지 어린애처럼
떼를 쓰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기종을
그의 사무실에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거둘 수가 없었다.
"일 방해 안하고 얌전하게 앉았다 올
텐데. 난 당신 일하는 모습도 보고 싶고
그렇단 말예요."
"글쎄 그건 다음에 하자구. 나 지금 S
가려던 참이라 그래."
"약속 있는데 내가 가면 어떡해."
"그건 금방 끝나는 일이야."
"금방 끝나는 일이면 크게 중요한 일도
아니겠네. 전화로 처리 안돼요?"
"거참."
전화기 저쪽에서 성가신 듯 쯧, 하고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알았어요."
S 호텔 커피숍에 도착했을 때 기종은
이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손님은요?"
"막 갔어."
커피잔이 막 날라져 오는 것으로 보아
그도 방금 온 것 같은데 선 자리에서 일
끝내고 돌려 보낸 모양이다.
막 커피잔을 놓고 돌아서는 종업원에게
하연도 커피를 주문해 놓고 앉았다.
"무슨 일 있었어?"
일단은 산뜻한 얼굴로 만나자 했는데
알거지가 된 상심은 곳곳에서 빗물마냥
흘러 내리고 있었던 듯하다.
"차부터 좀 마시구요."
하연은 기종이 밀어 주는 찻잔을 손에
들고 뜨거운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실내는 일본인 인테리어 전문가가 손을
댔는지 일본식의 정갈함으로 밝고
화사했다.
그러나 대리석 바닥과 대형
유리창문으로 해서 사람들의 소리가
곳곳에서 탁구공 튀듯이 퉁겨져 울리는
것이 흠이었다.
구질구질한 얘기를 해야 하는 자신이
하연은 서글펐다.
"그건 한마디로 사기야."
하연의 얘기를 들은 기종이 이마에 불끈
정맥을 돋우며 말했다.
"고발해. 이혼빙자 위자료 사기로."
"......."
하연은 눈물이 떨어지려는 걸 간신히
참고 찻잔만 연신 입에 붙였다 뗐다 하고
있었다.
"당신 지금 당장 법률사무소 찾아가.
가정법률사무소 알지? 거기 가서 서류
작성해서 고발해. 앉은 자리에서 집
뺏기구 있지 말구."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한 모금 마시고
있는데도 다리 아래서부터 달달달 떨리고
이제 와서 강세가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보다 그런 강세를 고발하라는 기종의
완강한 태도가 몇 배 더 무섭고 몇 배 더
떨렸다.
고발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하물며
기종이 그런 말 하리라곤 더더욱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나중에 그 일로 하연이 새삼 분해서
펄펄 뛰어도 기종이 눌러줄 줄 알았다.
(그까짓 거 없었던 셈 쳐. 그거 없다고
당장 길거리 나앉는 거 아니잖아. 내가
해줄께. 그 사람이 못해 준 거 내가 열 배
백 배 더 해줄께. 잊어버려. 알았지?
잊어버려.)
이렇게 말해줄 줄 알았다. 그러나
기종은 그렇게 말하는 대신 위자료를
싶게 조목조목 구구절절 하연을
교육시키고 있었다.
"난 그 사람 상대로 싸우기 싫어요."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가만 있다가
국으로 이혼당한 것만도 분하지 않아?"
이혼했기 때문에 자기를 만날 수
있었다고는 왜 생각해 주지 않는가.
이쪽에서 분하다 해도 기종이 쪽에서
그래서 오히려 잘됐다는 얘기를 해야
아귀가 맞는데.
"찾아야 돼. 자기 권리는 자기가 찾아야
하는 거야."
닭장 같은 아파트 한 구멍을 놓고
기종이 이렇듯 침을 튀길 줄을 몰랐다.
강세보다는 기종이 쪽이 더 아연해서
하연은 잠시 바보처럼 멍청해 있다가
"지금 갈려구? 내가 같이 가 줄까?"
"아뇨. 잠깐 화장실에 갔다 와서요."
하연은 화장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본다.
서른도 안된 얼굴이 휴지처럼 구겨져
있다.
눈가에 지저분하게 번진 아이라인을
닦아내고 분첩으로 얼굴을 다시 만졌다.
그리고 기종에 대해 뭔가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하연의 부모님을 찾아뵙겠다고 해
놓고 지방 간다고 나가더니 일이 있어 못
갔다고 하고 지금은 다시 한가한 듯
법률사무소까지 따라가겠다고 한다.
하연은 화장실을 나와 곧바로 호텔을
빠져 나왔다.
위치를 가르쳐 주려 하지 않았다.
"사장님 들어오시는 대로 연락
드리겠어요. 어디라고 할까요?"
"아뇨. 지금 사장님 심부름으로
전화하는 거에요. 책상 서랍에 도장을
가져 오라고 해서."
"그럼 사장님 좀 바꿔 주시겠어요?"
"지금 손님하구 급하게 어디 가시면서
절더러 찾아 가지구 오랬어요."
"사장님 말씀이 있기 전에는 그 방엔
아무도 못 들어가게 돼 있어요."
"이것 보세요. 사장님 말씀으로 중요한
심부름을 하는 건데 아가씨가 왜 그렇게
된다 안된다 말이 많아요?"
"죄송합니다. 사내 규칙이 그래서요."
전화가 끊어졌다. 울컥 치미는 감정을
"시간이 급한 일이에요."
말해 놓고 보니 정말 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기종의
사무실을 두 눈으로 확인해야겠다.
아가씨 말을 좋게 해석하자면 엄한
규칙에 보안도 철저하고 기강이 꽉 잡힌
회사 같다. 그러나 위치마저 가르쳐 주지
않는 건 어딘지 정당하지 못한 비밀의
냄새가 난다.
"그럼 그 근처까지 내가 갈 테니까
아가씨가 좀 가지고 나오세요. 어디로
가면 되죠?"
"도대체 아주머닌 누구세요?"
아주머니? 전화기의 불분명한 소음
속에서도 대뜸 아주머니로 불려질 만큼 내
목소리가 늙어 있단 말인가? 아니면
없음이 아주머니 범주로 낙착해 버린
것일까.
"집사람이에요."
느닷없이 목소리가 떨리고 울음기마저
섞였다.
"......."
그 쪽에선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발을 동동 구르듯한 이쪽의 사정을
내려다보고라도 있는 듯 그 쪽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그 전에도 몇 번인가 전화하셨댔죠?
그분이신가요?"
"그래요. 그분이에요."
얼결에 자신을 그분이라고 말해 놓고
나니 하연은 바람 좀 분다고 때묻은
든다.
"아가씨, 나 좀 만나요. 아가씨가
이쪽으로 와도 좋고 내가 그 쪽으로 가도
좋고."
규칙 따지는 것으로 보아 근무시간엔
안된다고 거절할 줄 알았는데 무슨
생각엔지 순순히 그러마고 대답했다.
"서대문 로터리에 금붕어다방이 있어요.
그리로 오세요."
하연은 곧바로 택시를 타고 서대문
쪽으로 달렸다.
"빨리 좀 가 주세요. 빨리요."
금붕어 다방은 방금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건물의 2층에 있었다. 목조 계단
위에 깔아 놓은 카핏에 발이 놓일 때마다
질컹질컹 물이 밟혔다.
찾아드나 싶었는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TV 의 권투 중계를
보고 있었다.
"여기에요."
수족관 옆에 앉았던 여자가 손짓으로
먼저 하연을 아는 체해 주었다.
"미안해요. 바쁜데 나오게 해서."
"괜찮아요. 바쁠 것도 없어요."
산뜻한 여직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자는 의외로 볼품없이 펑퍼짐하고
투박하게 생긴 모습이었다.
"미스 김, 맞아요? 협진실업의......"
"맞아요. 협진실업의 미스 김도 되고,
해동물산의 미스 김도 되고, 광명산업의
미스 김도 되고......"
미스 김이 자조하듯 투박한 입술을
"박기종 씨하고 결혼할 거 아니죠? 만일
결혼할 생각이면 말리려구 나왔어요.
보아하니 그 쪽이 속고 있는 것 같아서요.
나두 왕년에 그런 남자 만났다가 진 다
빠져서 간신히 도망쳤는데 팔자가 워낙 그
모양인지 조상 묘를 잘못 썼는지
직장이랍시고 들어와 보니 또 그런
건달집단이지 뭐에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같은 패거리
놀음을 하군 있지만 정말 한심해서
미치겠어요. 나 어디 일자리 하나만
알아봐 주세요. 네?"
전화를 통해 상상했던 이미지와 너무
달라 다른 여자가 다른 일로 나와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녀는 분명 박기종이란 이름을 들먹였고,
제대로 짚어 얘기하는 걸로 보아 번지수가
틀린 건 아닌 것 같다.
"웃기지도 않아요. 코딱지만한 사무실에
사장이 일곱이에요. 전부 사장이죠. 난 그
사장들 전화받아 주는 비서고."
"그래도 그 사람들 각각 하는 일은 있을
거 아녜요?"
"있죠. 눈먼 돈 어디 있나 찾아 헤매는
일이요. 아주머니 이혼하고 위자료로 받은
집이 한 오천 간다면서요?"
머리 꼭대기로 피가 솟구치듯 띵 하더니
혈관이 그대로 경직되는 통증이 왔다.
"누, 누가 그래요? 기종씨가 그래요?"
"그 사람이 안 그러면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하연은 한번도 기종에게 아파트의
그렇다면 그 사람이 혼자 알아보았다는
얘기가 되지 않는가.
세상에.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치사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그, 그거 챙기겠다고
나한테...... 나한테......"
낯선 여자 앞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하연은 볼썽 사납게 울기 시작했다.
하연의 울음을 잠시 지켜 보고 있던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일자리 구하기 전까지는 거기에
목매달고 있어야 하니까 그때까지는
비밀로 해주세요. 우린 서로 만난 일도
없는 거에요. 아셨죠?"
여자가 다방을 나가고 난 후에도 하연은
계속 무너지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울고
어쩌면 이럴 수가 있을까. 그 선량해
보이는 얼굴로 사랑을 앞세워 다가온 그가
기실은 하연의 위자료 때문이었다니.
그래서 그것을 받지 못하게 됐을 때
그렇게 펄펄 뛰는 소리를 냈었구나.
분하고 암담하기가 강세와 이혼했을
때보다 더했다.
결혼하려고 했는데 결혼해서 다시 한번
잘살아 보려고 했는데.
하마터면 알건달과 결혼할 뻔했다는
생각보다 결혼하고자 했던 사람의 실상이
어째 그 모양밖에 되지 않는지에 실망이
더 컸다.
"나를 선택했던 그 안목으로 또 누구를
선택했다면 그게 그거야."
강세의 그 말이 살아났다. 잘사는
했는데 뭉개기도 전에 그 말속에 되레
거꾸로 처박힌 꼴이 됐다.
울음이 진정되자 난감한 한숨이 거푸
터졌다.
"아가씨."
누군가가 하연의 어깨를 툭툭 쳤다.
돌아보니 TV를 보고 있던 뒷자리의
청년이 하연의 어깨를 치고 있었다.
뒷자리에 들릴 만큼 소리내어 운 것
같진 않은데 TV 보는데 방해될 만큼 그
소리가 컸었단 말인가.
"저 금붕어 좀 봐요."
청년이 수족관을 가리켰다. 영문을 몰라
하연은 시키는 대로 금붕어를 봤다.
"금붕어는 입을 벌린 만큼 물을
먹어요."
하연은 콤팩트를 꺼내 붉어진 눈시울을
분첩으로 대충 누른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울지 말고 살아요. 다 자기 할
탓이니까. 씩씩하게 삽시다. 네?"
사람이 한번 밟히니까 별게 다 간섭을
한다. 나이도 어린 게 건방진 것
같으니라구.
하연은 카운터로 가 차값을 냈다.
"잔돈 없으세요?"
사람들은 정말 왜 이럴까. 잔돈 있으면
잔돈 내지 큰돈 자랑하려구 낸 줄 아나.
"잠깐 기다리세요."
거스름돈을 바꿔 오려는지 카운터에
앉았던 처녀가 주방 쪽으로 들어갔다.
처녀를 기다리는 동안 하연은 하릴없이
청년이 했던 말이 무섭게 와 닿았다.
금붕어는 입을 벌린 만큼 물을 먹는다.
그래 그렇구나.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이
상황도 내가 입 벌린 만큼 들어온 내
몫이구나.
하연은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기가 무섭게 거실의 전화 벨이
울었다. 기종이었다. 그는 대뜸 소리를
내질렀다.
"무슨 사람이 그래? 바쁜 사람 앉혀
놓고 간다 온다 말도 없이!"
"......."
"화장실 가서 졸도한 줄 알았잖아.
쇼크받구. 남자가 여자 화장실에 가 볼
수가 있나, 무작정 기다리다가 중요한
약속 다 펑크났잖아."
죽을 약속이냐고 퍼부어 주고 싶었지만
하연은 잠자코 있었다.
미스 김의 일자리를 하연이 책임지기
전에는 미스 김을 만난 일도 없고, 들은
말도 없어야 하고, 따라서 기종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 돼야
한다.
아무 대꾸가 없는 하연에게서 기종은
기종대로 심상찮음을 느꼈는지 말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왜 그래? 어디 아퍼? 아파서 그냥
들어간 거야?"
아프다고도, 괜찮다고도 아무 말도
하기가 싫었다.
"너무 상심하지 마. 그 집은 내가
나서서라도 꼭 찾아 줄 테니까."
온 정성을 다하는 것 같다.
"내 일찍 들어갈께. 공장에 전화 한
통화만 하고. 당신, 속 끓이지 말구
편안하게 한숨 자. 알았지? 내가 다
알아서 해줄 테니까 나만 믿구 아무 걱정
마."
그러나 그는 그날 들어오지 않았다.
다음 날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하연도 구태여 사무실에 연락해 볼 필요를
느끼지 않아 그냥 소식 없는 채로 하루를
보냈다.
이상할 만큼 담담했다. 그동안 부부나
다름없이 살을 맞대고 살아온 사람인데도
선을 그은 듯 달라진 그의 태도에 아무런
안타까움도 일지 않았다.
그래, 이렇게 끝나는 거지 뭐. 오히려
하지만 내일이라도 돌아와서 허튼 소리
해대면 어떡하지? 강세를 고발하라고 내
손목이라도 잡아 끌면 형편없는 싸움질만
계속될 텐데.
그러나 그 걱정은 사흘째 되던 날
강세의 전화가 해결해 주었다.
"이 바보야. 그러게 내 뭐랬어? 사람 좀
잘 보구 선택해. 내가 당신 말대로 서류
떼 줬으면 앉은 자리에서 나 바보 되고
당신 알거지 될 뻔했잖아."
"......."
"그 친구 날 찾아와서 협박을 하더군.
안 먹혀 들어가니까 이게 아주 흥정으로
나와. 나중에 얼마까지 내려갔는지 알어?
50만원만 주면 없었던 일루 해주겠대.
거지 같은 자식. 죽여 놓을래다 참았어.
그리구 당신, 이왕 이사갈 생각이었으니까
이살 가. 내가 명의 이전해 줄께. 그리구
말야, 당분간 결혼할 생각하지 마. 아직은
헛짚기 꼭 알맞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