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연의 권사
다음은 어머니 남연의 권사님의 사후체험을 따님인 김양자 집사님이 간증한 것을 녹취한 것입니다.
(1) 어린 소녀의 믿음
남연의 권사님은 불교 집안의 맏딸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13살 되던 해 우연히 몸종과 함께 외출하였다가 여선교사를 만나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권사님 집안은 소문난 갑부였으나, 남존여비의 사상이 지배적이었던 때라 아들들은 동경으로 유학을 보낼 정도였으나, 딸은 집 안에 가두어두다시피 했습니다. 그래서 집 안에 거의 갇혀 있었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어린 소녀의 마음속에서 날로 더욱 뜨거워졌습니다.
그것을 알게 된 집안 어른들은 꾸짖기도 하고 달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굽히지 않자 심한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때로는 매를 맞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믿음은 더 강해졌습니다. 팔도에서 유명한 무당들을 차례로 불러 일 년에 열두 번씩 굿을 하고, 곡간마다 지푸라기로 만든 무서운 우상들이 걸려 있는 귀신을 섬기는 집에서 계속 박해를 당하다간 산송장이 될 것 같아 권사님은 가출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제일 사랑해주는 어머니에게 졸라대기 시작했습니다. 어차피 집 안에 있으면 죽게 될 것이니 내보내주면 공부를 열심히 하여 금의환향하겠다고 끈질기게 설득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린 딸이 고초를 당하는 모습을 보고 남몰래 안타까워하던 어머니는 그 간청을 받아들여 들어주었습니다. 어머니는 딸을 남장으로 변장시키고, 배낭에 돈을 가득 넣어 새벽에 밖으로 내보내주었습니다.
(2) 하나님의 인도와 테스트
권사님은 오직 예수님 한 분을 믿고 나왔으나 사실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소녀를 버려두지 아니하고 "대구로 가라"는 영감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외출도 거의 하지 못했던 소녀는 어디로 가야 대구인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발길을 닿는 대로 가기만 하면 대구가 될 것이다."라는 영감을 주어 인도하셨습니다. 이렇게 발길이 인도하는 대로 한 달가량 걸려 대구에 도착하여 어느 순경에게 "대구에는 선교사들이 많이 산다는데, 선교사가 사는 곳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하자 근처에 있는 양옥집으로 안내해주었습니다.
미국 선교사는 미소를 띠며 반갑게 맞아주었고, 마침 새벽기도를 시작하려던 선교사들은 아름다운 소녀가 예수를 잘 믿기 위해 공부를 하고 싶다는 간청을 듣고 하나님이 보내주셨음에 틀림없다고 기뻐하면서 마치 천사가 찾아온 듯이 대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 공부를 가르쳐주기는커녕 세탁과 청소, 간단한 서양요리 등 힘든 집안일들만 시켰습니다. 자라면서 일이라곤 해본 적이 없는 권사님은 너무 힘들고 서러워 남몰래 울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성경공부를 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극복했습니다. 온갖 궂은일을 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고, 찬송을 부르며 기쁜 마음으로 봉사했습니다.
이처럼 6개월을 한마디 불평 없이 맡은 일에 충실하자 어느 날 선교사들이 불러서 "그동안 우리는 네가 진정한 하나님의 딸인지, 정말 하나님의 귀한 일꾼이 될 수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께 절대 순종할 수 있고 또 인내할 수 있는지를 시험해보았다. 그런데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는 그동안 희생과 봉사를 잘 해냈으므로 이제부터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우리에게 성경과 학문을 배워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권사님을 시험하기 위해 휴가 보냈던 가정부를 다시 불러 공주처럼 돌보아주었습니다. 권사님은 당시 선교재단에서 운영하는 대구 신명여중 1학년부터 다니게 되었습니다.
(3) 가족들의 박해와 결혼!
권사님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공부도 잘하고 예수님을 잘 믿는 모범생이었습니다. 5년이 지나 학교를 졸업한 후 권사님은 멋쟁이 신여성으로 변했고, 하와이 신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장학금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신여성으로서 해외유학을 간다는 것은 너무나 귀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자부심을 느낀 그녀는 부모님에게 승낙도 받고 기쁘게 해드릴 겸 집을 찾아갔습니다.
한편, 마산에서는 맏딸이 실종되자 막대한 보상금을 내걸어 행방을 수소문하였고, 성과가 없자 죽은 줄로 포기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이때 완전히 신여성으로 변모한 권사님이 찾아오자 문을 연 옛 몸종도 못 알아보았습니다. 권사님이 자신을 밝히자 비로소 알아차린 몸종은 이 사실을 알리었습니다. 그러나 대청마루에서 장기를 두고 있던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몽둥이를 들고 나와서 "그렇지 않아도 네가 노란 귀신을 우리 남씨 가문에 들여와 망신시키고 결국 도망가더니, 이제는 네가 노란 귀신이 되어서 집 안에까지 찾아 들어왔으니 우리 남씨 집안은 완전히 망하게 됐다"고 노발대발하면서 매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심한 매질을 당한 권사님은 기절했고, 동네에 소문이 날세라 그녀를 다락에 숨겨놓았습니다. 그래도 딸을 가장 사랑했던 어머니는 딸을 정성껏 치료하고 보약까지 먹였습니다.
건강이 회복된 권사님에게 자초지종을 다 들은 어머니는 주님에게 헌신한 딸을 막을 길이 없다고 판단, 유학에 필요한 구비 서류에 도장을 찍어주었고 다시 몰래 탈출시켜주었습니다.
그리하여 권사님은 군용비행기로 하와이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산 부둣가에서 혼송예배를 드릴 때 오라버니가 뒤쫓아 왔고, 붙잡혀서 유학길이 좌절되었습니다. 또다시 매질이 반복되었고 집으로 끌려온 권사님은 죽든지 아니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시집을 가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고 자신을 드리기로 서원한 권사님은 불교 집안에 시집을 가기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세 번재 탈출을 감행했습니다.
이제는 대구 선교사 저택에도 머무를 수 없게 되어 상해로 건너갔습니다. 주님 한 분만 의지하고 낯선 땅에 도착한 권사님은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YMCA(기독청년회관)를 찾아갔습니다. 이곳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기독 청년들과 어울리면서 신앙생활을 계속하였습니다. 특히 청년회 회장이 많은 호의를 베풀어주었고 마음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혼자보다 둘이 힘을 합해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두 사람은 결혼하였습니다. 이때 27세 때였습니다. 당시는 13세에 시집가서 15세면 아기를 낳을 때였고 27세의 여자는 할머니 취급을 받았습니다.
시집생활은 대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소문난 기독교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유학을 보낸 장손이 할머니가 다 된 색시를 데리고 들어오자 시어머니가 크게 실망하였고, 자식을 갖지 못할 것이라는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더구나, 신여성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핍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나마 신앙심이 깊은 시아버지의 사랑은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많아 애기를 낳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기우였고 권사님은 쑥쑥 애기를 낳았습니다. 넷을 출산했는데 모두 딸이었습니다. 아들을 낳아 대를 이어야 하는 집안 사정 대문에 다서째 애기를 가졌는데 다섯째도 딸이었습니다. 여섯 번째 딸아이의 출산을 거쳐 일곱째는 틀림없이 아들을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게 웬일입니까? 또 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 여덟째로 태어난 딸이 바로 이 간증을 한 김양자 집사님입니다.
김양자 집사님은 어렸을 때부터 태어나지 말아야 했다는 서러움을 받으면서 자랐습니다. 이 서러움이 깊은 상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를 통해 주님을 영접한 후 상처도 아물고 오히려 여덟째 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여덟째 딸을 안고 권사님 부부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동일한 감동을 주셨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의 간절한 소원이 있어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간청하지 않느냐? 그동안 계속 딸을 낳아도 감사하기만 하고 그저 아름답고 슬기롭게 키우겠다고만 하니 너희의 원대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지 않았느냐?"
그때부터 부부는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하니 아들을 달라고 합심하여 기도했습니다. 때는 권사님의 나이 47세로 경수도 끊어져 임신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100세, 사라가 90세에 이삭을 가질 수 있었던 기적을 믿고 매달렸습니다. 그러자 기적적으로 임신이 되었을 뿐 아니라 아홉째로 아들을 주시었고, 그 뒤 아들을 하나 더 주시어 10남매가 되었습니다.
(4) 남연의 권사의 독실한 신앙
김양자 집사님은 어릴 때 새벽이 되면 어머니가 일어나 기도하시는데, 주위의 소외당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불러가며 중보기도를 하고는 10남매를 위해 기도하고, 기도를 끝마칠 때는 언제나 10남매 중의 막내를 십일조로서 주님께 바치오니 주님의 종이 되게 해달라고 간구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권사님의 믿음은 훌륭했으나 자식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풍족한 집안에서 부러울 것 없이 자랐고, 최고의 교육들을 받았기 때문에 모두 교만했습니다. 부모가 이름 있는 장로, 권사였으므로 교회에는 부지런히 다니고, 주일학교 선생이나 성가대의 직분을 맡기도 했지만, 참된 믿음이 없었습니다.
특히, 주의 종이 되게 해달라고 십일조로 바친 막내아들 집안에서 황제처럼 떠받들어지며 자라더니 중3이 되면서 옆길로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철없을 때는 어머니께서 밤낮 입버릇처럼 기도하던 주님의 종이 최고의 영예인 줄 알았으나, 자라면서 주님의 종이 제일 구질구질한 목사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반항하기 시작했습니다.
권사님은 자식들이 속을 썩여도 실망하지 않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특히, 사랑이 충만해서 남을 위해 중보기도 할 뿐 아니라 이웃을 위한 희생과 봉사를 말없이 실천했습니다. 해가 질때면 시장에 나가 그날 물건을 팔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장사들로부터 후산 값을 주고 사면서 "저는 예수 믿는 할머니입니다.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 하고 전도했습니다. 사랑의 실천을 동반한 전도는 항상 상대방에게 감화를 주어서 많은 영혼을 구원했습니다. 집안 살림이 풍족했으므로 시장에서 사들인 배추, 감자, 생선 그리고 집 안에 남아도는 옷 등을 챙겨서 그 다음 날 홍제동 언덕, 판자촌의 빈민굴로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할머니 왔습니다. 물건 받아가세요" 하며 나누어주었습니다.
빈민굴 안에는 환자들이 많았습니다. 폐병으로 각혈하거나, 암으로 죽을 날만 기다리거나, 영양실조로 일을 못하는 환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권사님은 냄새나는 환자들의 방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고 뒤치다꺼리를 다 해주었습니다. 이렇게 전도하고 들어올 때면 울어서 눈이 퉁퉁 붓고, 보따리 속에는 균 덩어리, 고름 덩어리, 피 걸레가 다 된 환자들의 옷들을 싸가지고 와서 빨아서 다시 갖다주곤 하였습니다.
이런 권사님을 자식들은 무척 핍박했습니다.
"어째서 예수를 그처럼 구질구질하고 청승맞게 믿어야 하느냐?"
"얼마나 무식하면 그런 사람들을 상대로만 전도하느냐?"
"어째서 아버지처럼 경건하고 거룩하게, 멋있게, 신사답게, 지성적으로 예수를 믿지 못하느냐?" 하며 어머니 가슴에 못을 박았습니다.
한편, 장로인 아버지는 다른 신앙태도를 가진 분이었습니다. 서재에는 기독교서적으로 꽉 들어차 있고, 성경에 해박해서 목사님들이 묻거나 책을 빌리려 찾아올 정도였습니다. 더구나 부유해서 교회에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항상 제일 많이 하고 구제 사업에도 앞장서곤 했습니다. 하지만 늘 자신을 내세우고 자랑하기를 기뻐했습니다.
자식들은 그런 아버지의 신앙태도를 더 좋아했기 때문에, 어머니에게 아버지를 본받으라고 윽박지르고 창피해 죽겠으니 제발 판자촌은 찾아다니지 말라고 구박했습니다. 그처럼 자식들과 남편으로부터 구박을 받으면서도 권사님은 한 번도 반박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항상 웃으면서 하나님만은 아신다고 답변하시거나 아니면 신앙의 뿌리가 깊어지면 이해할 때가 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남몰래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며 괴로움을 극복했습니다.
(5) 위암 사형선고와 영광스러운 죽음
그런데 건강해서 병을 모르고 지내오신 권사님이 어느 날 체하여 토할 것 같다면서 막내딸에게 약을 사오라고 했습니다. 약도 효력이 없자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면서 병원에 가고자 했습니다. 병 한 번 걸려본 적이 없는 권사님이 스스로 병원을 가겠다고 나서자 자녀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모시고 갔습니다. 의사의 진단은 악성 3기의 위암이었고, 수술도 할 수 없는 상태여서 20일간의 시한부 사형선고가 내려졌습니다.
건강했던 어머니가, 더구나 며칠 전만 해도 판자촌을 누비고 다니시던 전도왕이 위암이라니, 가족들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진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당시 암의 권위자인 박사님에게 다시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똑같았습니다. 10남매는 권사님을 불광동 집으로 모셔놓고 예배를 드리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기묘한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암환자는 임종이 가까워질 때 피부가 검게 타들어갑니다. 그러나 권사님은 정반대로 천사의 얼굴처럼 빛을 발하는 영광스러운 얼굴로 변화되는 것이었습니다. 권사님은 10남매에게 찬송과 기도와 성경읽기를 게을리하면 시커멓고 추하기 짝이 없는 동물 모양의 마귀들이 나타나 집 담을 넘어 방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지만, 예배를 드리면 마귀들이 질색하며 떠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머리맡에 앉아 찬송과 기도와 성경읽기를 그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러나 가정을 갖고 있는 자식들이 24시간 예배를 계속하는 것은 무리라서 3개 조를 편성해서 차례로 그 일을 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암환자의 얼굴은 날로 빛을 발하였고 교회에서 병문안을 왔다가 모두 놀라는 것은 물론 오히려 위안을 받고 돌아가곤 하였습니다.
1968년 9월 23일이었습니다. 이상한 예감을 느낀 권사님이 가족들을 모두 불러 고별예배를 드렸고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고별예배가 끝난 후 맏딸과 막내딸만 남게 한 후, 주님 앞에 갈 때가 되었으니 깨끗이 씻기고, 몸단장을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갈 때 입으려고 옛날부터 준비해두었던 아름다운 옥색 한복을 입혀달라고 했습니다. 준비가 끝난 후, 다시 가족을 불러 모은 권사님은 3가지의 유언을 하고 명심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첫째는, 무엇보다 사랑 충만하여 주님이 대속하신 사랑의 극치를 본받고 그 사랑을 실천하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은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발버둥쳤지만, 결국 못다 하고 가게 되었으니 자식들이라도 실천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둘째는, 철저한 십일조 생활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소유지만 10의 9를 우리가 쓰도록 허락해주신 만큼 10의 1은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돌려드려야지 그것마저도 도적질하면 절대 복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셋째는, 알곡신자가 되어 섬기는 제단에서 주님의 종을 받들고, 헌신하며 봉사하는 신앙생활을 하라고 하시었습니다.
유언을 끝내고 10남매로 하여금 그 유언을 3번 반복하도록 하신 다음에야 비로소 마음을 놓고, 이것은 나의 말이 아니요, 주님의 명령이니 죽을 때까지 잘 지켜서 모두 천국에서 같이 만나자고 기뻐하시었습니다. 그리고 연약한 두 팔을 올리고 영안으로 하늘을 바라보시며 "오, 사랑의 하나님, 그 크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이제 저를 오라 하시니 주님 곁으로 가옵니다." 하면서 서서히 영혼이 떠났습니다. 순간 장내는 울음바다로 변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불쌍한 우리 어머니! 이 세상 사는 동안 호강 한번 못 해보고 고생만 하시다가 떠나가신 어머니! 저희 불효자식들을 용서하십시오." 하며 목 놓아 울었습니다.
(6) 살아난 권사님의 충격적인 간증
시간이 흐르자 모두 지칠 대로 지치고 장례 준비도 할 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김양자 집사님은 계속 가슴을 치면서 뒹굴며 울며 기도했습니다.
"오, 하나님 아버지, 살아 계시어 역사하심을 믿습니다. 제발 불쌍한 저희 어머니를 한 번만 살려주시면 목숨을 다하여 효도하겠나이다."
이렇게 부르짖으며 어머니를 끌어안고, 뺨과 뺨을 비비며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습니다. 혼자만 울고 있는 줄 알았더니 막내도 앞에서 서럽게 목 놓아 울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주님의 종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지만, 철이 나면서부터 그 기도에 반기를 들고 옆길로 빠지면서 어머니의 가슴을 상하게 했던 막내가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통곡했습니다. 그러다 지쳐 자리를 떠났습니다.
이제, 홀로 남은 김양자 집사님은 더욱 애타게 울부짖었습니다. 그렇게 5시간이나 흘렀습니다. 정말 미쳐버리고 말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김양자 집사님은 겨우 슬픔을 억누르고 어머니의 시신을 반듯이 정돈하고는 시트를 얼굴 위에 덮었습니다. 그리고 방을 나가며 뒤돌아보았습니다.
순간 그녀는 깜짝 놀랐습니다. 눈을 의심했습니다. 이게 웬일입니까? 시트 밑의 어머니가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것이 보였습니다. 김양자 집사님은 자신의 눈에 그만 헛것이 보이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다시 보아도 분명히 현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살아났어요!"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가족들은 양자가 장시간 동안 울부짖으며 뒹굴더니만 드디어 돌았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김양자 집사님은 소리가 작아 못 들은 줄 알고 다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러나 막내가 달려왔습니다. 그때는 이미 권사님이 시트를 제치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습니다.
막내도 "어머니가 살아났어요!" 하고 소리치자 그제야 모두 놀라 우루루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습니다. 김양자 집사님이 제일 먼저 달려가 어머니를 껴안고 감격의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눈동자는 초점이 흐리고 방 안을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면서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여기가 어디냐? 내가 왜 이런 곳에 와 있지? 이렇게 더럽고 추하고 냄새나는 곳에 와 있을 내가 아닌데 ... " 하며 엉뚱한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이상한 말씀과 행동에 안타까워진 김양자 집사님은 어머니를 흔들면서 "어머니, 정신 차리세요. 여기가 어디긴 어디에요. 여기가 더럽고 추하고 냄새가 난다니 무슨 말씀이에요? 여기는 바로 어머니가 사시던 불광동 집 어머니 방이에요. 제발 정신을 차리세요." 하고 외쳤습니다.
그제야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어머니의 눈동자가 제대로 자리를 잡고, 초점이 분명해지고, 집사님을 똑바로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눈에서 빛이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입을 열어 말씀을 하시는데, 5시간 전만 해도 겨우 들릴 듯 말 듯 개미 소리처럼 연약했던 목소리가 갑자기 위엄 있고 우렁찬 목소리로 변했습니다.
권사님은 가족들을 알아보고 이름을 부르시더니 급히 하시는 말씀이 "얘들아, 잘 듣거라. 지금 시간이 없다. 어서 속히 연락을 해서 모든 우리의 권속과 친척을 모아오도록 해라. 내가 시급히 전할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눈에서 발하는 빛과 너무도 권위 있고 당당한 목소리에 모두 위압되어 "당장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방을 뛰쳐나갔습니다. 가족들이 분담하여 1개 조는 불광동 버스종점 공중전화로 달려가고, 다른 조는 잠들어 있는 옆집을 깨워 전화를 빌리고, 나머지 조는 수첩을 꺼내놓고 사방의 모든 권속들과 친척들에게 연락하기 시작했습니다. 권사님이 살아나신 때가 밤 11시 30분이었으므로 통행금지 30분을 앞두고 있어서 서울 구석구석에 흩어져 사는 권속과 친척을 다 불러 모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늦은 시간에 무엇을 타고 어떻게 왔는지 불광동으로 모두들 통행금지시간 전에 달려왔습니다. 권사님은 자신을 응접실의 한가운데 눕히고 그 주의의 모든 방문을 터서 자리를 넓힌 다음 둘러앉도록 했습니다. 10남매는 특별히 차례대로 가까이 앉게 했습니다. 모두 40여 명이 넘었습니다. 권사님이 비로소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10남매와 김 장로님 그리고 권속들과 친척들이여, 지금부터 하는 말은 나의 말이 아니요. 주님께서 직접 전하는 말씀이니 잘 경청하시어 그대로 실천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마치 능력의 선지자처럼 그 목소리는 권위 있고 우렁차고 당당했으며, 눈에서는 광채가 나 모두 완전히 압도되었습니다.
지금부터의 천국 지옥 간증은 이때 권사님이 전한 말씀을 글로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