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렵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자,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2)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3) 그러고 나서 아브라함은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가져다 아들 이사악에게 지우고, 자기는 손에 불과 칼을
들었다. (6)
'하느님께서'로 번역한 '웨하엘로힘'(wehaellohim)에서 하느님을 '엘로힘'
으로 표현한 것은 하느님의 절대성 즉 전지전능하심과 인격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하느님께서 전지전능 즉 절대 능력과 지혜로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에도 '엘로힘'이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명칭은 하느님께서 창조주 되심과 구원 역사를 주도하심을 보여주는
명칭이다. 이러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내면을 몰라서가 아니라 확인하여 더
큰 기쁨을 누리시기 위해 몸소 그의 믿음에 대한 시험을 주관하고 계신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은 '엘로힘'
앞의 정관사 '하'(ha)가 붙은 데서 더 드러나는데, 지금까지 아브라함을 인도하고
보호해 주셨던 바로 '그 하느님'이 앞으로 전개되는 시험을 주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시험해 보시려고'
'시험해 보시려고'로 번역한 '닛싸'(nissa)에서 '시험하다'에 해당하는 '나싸'(nassa)는
구약에서 36회 나온다.
그런데 이 단어가 사람이 주어일 경우에는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을 시험했을 때도 이 용어가 사용되었다
(탈출17,2.7). 따라서 모세는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은 인간이 절대로 해서는
안될 일로 규정하여 금지 시켰다(신명6,16).
하지만 이 단어가 주어를 하느님으로 할 때에는 하느님께서 인간이 당신을
경외하는지 '알아 보시다'(test), '입증하다'(prove)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쓰였다.
따라서 여기서 '닛싸'는 상대방을 잘못 행하도록 '유혹하다'(tempt)는 의미보다는
무엇을 입증하기 위해 '시험하다'(test)는 뜻을 지니고 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성숙과 오롯한 순종을 몸소 확인하시고,
또한 확증하시고자 시험대 위해 그를 올려 놓으신 것이다.
일찌기 하느님께서 가나안 땅에 남은 이민족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시험하셨다
(판관2,22; 3,1.4). 또한 바빌론 대신들이 히즈키야에게 사절단을 보내었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히즈키야를 돕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시험하셨다
(2역대32,31).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이러한 시험의 목적은 시험받는 자를 엄밀히 단련하여 그가
하느님을 더 잘 알고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였다(탈출16,4; 신명8,2; 시편26,1-3).
마찬가지로 여기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진정한 의도는 이사악을
죽이는데 있지 않고 하느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지를 알아보는 데 있다(창세22,12).
이 시험을 통해 아브라함의 신앙을 얼마나 크게 성장시키고 또 얼마나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해 이렇게 하시는가를 생각해야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그 명령에
긴장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의 이성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것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만든 모든 윤리, 도덕, 인륜까지도 하느님의 말씀보다 앞세우지 말아야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면 우리에게 닥친 모든 시험을 이길 힘을 갖게
된다(야고1,12).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하느님께서는 이런 시험의 도구가 될 이사악을 삼중으로 반복 강조함으로써,
아브라함의 인간적이고 본능적인 부성애를 깊숙히 자극하신다. '외아들', '독자'로
번역된 '예히드카'(yehidka)의 원형 '야히드'(yahid)는 구약에서 10번 나오는데,
8번이 '독자'라는 뜻으로, 2번이 '유일한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시편22,20; 35,17).
사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이사악은 외아들(독자)이 아니었다. 그의 배다른 형 이스마엘이
있기 때문이다(창세16,1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악을 '외아들'이라고 번역한 것은, '
외아들'(독자)이라는 말이 '부모에게 소중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태오 복음 3장 17절을 보면,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향해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라고 하셨다. 이것과 병행하는 요한 복음 3장
16절과 18절은 '외아들' 이라고 했다.
이처럼 '독생자' 또는 '독자'의 의미가 신구약에 있어서 모두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라는 개념과 더불어 '부모의 지극히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지극히 사랑하는 아들 이사악을 바치라고
했던 것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시험하려는 의도만이 아니고, 모리야 산에서 이사악을
죽여서 제물로 삼으시려고 한 것도 아니며, 오히려 자신의 아들인 예수님을
갈바리아 산 언덕의 십자가에 못 박아 희생제물로 죽이실 것을 미리 보여 주기 위한
사랑의 표현이었다(요한3,16).
또한 '사랑하는'으로 번역된 '아하브타'(ahabtha)에서 '사랑하다'에 해당하는
'아하브'(ahab)라는 말은 단순히 '좋아하다'는 뜻 이상으로 '바라다', '갈구하다'
(시편40,17), '기뻐하다'(이사56,10)란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이 표현 속에서 이사악에 대한 아브라함의 지극한 부성애와 아들로 인해 아브라함이
갖고 있었던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이 강조되어 있다.
하느님 당신 스스로가 이사악에 대한 아브라함의 사랑을 잘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계약으로 주어진 유일한 후손인 그의 아들 이사악을 모리야 산에서 제물로 바치하고
하셨던 것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향하여 오직 당신만이 그들의 가장 큰 희망,
가장 큰 기쁨과 행복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시편16,2).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원문의 '웨하알레후~레올라'(wehaallehu ~ leolla)를 직역하면, '그리고 너는 그를
태우는 제물로 바치라'(sacrifice him ~as a burnt offering)가 된다. 하느님께서는
번제의 통상적인 제물인 정결한 짐승들과 새들(창세8,20)대신, 아브라함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신 아들 이사악을 온전히 태워 번제로 드릴 것을 요구하셨다.
한편 '번제'를 뜻하는 '올라'(olla)는 '올라간다'를 뜻하는 '알라'(alla)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이것은 희생물을 태운 연기를 하늘로 올라가게 해서 하느님께서 향내를
맡으시도록, 하느님께 향기로운 제물을 드리는 제사의 한 방법이다(창세8,20).
창세기 22장 6절에 불과 더불어 칼을 준비한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외아들 이사악을
죽여 목과 손과 발을 자르고, 각 부분의 각을 떠 번제단 위에 놓고 불을 붙여 바치는
번제의 과정을 조금도 차질없이 마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는 데서 드러나지만,
이것은 단순한 영적인 복종이 아니라 인간으로서는 이해와 상식을 초월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하느님께 대한 순종과 온전한 헌신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