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103]『전라도닷컴』의 기획특집 ‘운봉고원길’
지난 토요일 오후, 막 배달된 월간 『전라도닷컴』의 시월호 ‘운봉고원길’ 기획특집을 보고 숨이 막힐 뻔했는데, 오늘 아침, 또 한번 기가 막힌 경험을 했다. 추석 황금연휴차 친정에 온 제주 2년살이 동생부부네 배웅을 오수역에서 하는데, 창구에서 기차표를 끊은 중년 사내의 외모와 신장 그리고 몸피가 지난해 홀연히 세상을 떠난 친구와 너무 닮아, 하마트면 그의 호인 ‘벽곡’을 큰 소리로 부를 뻔한 것이다. 그의 동생이라도 되는 걸까? 사람이 그렇게 닮을 수 있다니, 희한한 일이다.
전라도닷컴 기획특집은 8쪽에서 37쪽까지 이어지는데, 두 번째 페이지의 노거수老巨樹 숲 속의 정자亭子 사진이 왜 이리 낯익을까 했더니, 내가 몇 년 전 가본 그 친구의 고향마을 정자였다. 이럴 수가? 300여년이 다 된 당산나무도 확실히 기억한다. 그 옆 축성 표석을 내 눈으로 실제 읽으며 유서깊은 마을이라고 칭찬도 했었다. ‘補脈有林萬代(보맥유림만대) 乾隆(건륭) 十三年 二月 二十四日 築’ ‘1784년 2월 24일 성을 쌓고 나무를 심어 기가 허한 지맥을 보완하여 자손만대 번영하게 한다’고 쓰여 있었다. 그 마을이 남원시 운봉읍 신기마을, 인동장씨 집성촌으로 제법 규모가 컸다. 인터뷰를 한 장남림씨도 틀림없이 그 친구의 일가일 터.
올해도 정월 초이렛날 여지없이 제祭를 지냈다는데 그 축문을 읽어보자. “한 마을이 맑고 깨끗해지니 드디어 사특함이 물러가고, 복록이 내리니 재물과 곡식이 한없이 넓고 부귀가 겸전하도다. 문필이 크게 일어나 천만 년 오래도록 보존할 것이며, 이 신기마을은 실로 당산의 덕과 당산의 공에 의지하였으니, 삼가 술과 과일로써 신께 경건히 드리나니 흠향하소서” 마을공동체의 안녕을 바라는 경건한 기원이 오롯이 담겨 있지 않은가. 경찰관으로 정년퇴직한 후 고향에 홀로 내려와 80대 중반의 노부를 모시며 30여 마지기의 쌀농사를 지었다. 일에 눈썰미(일머리)가 뛰어나 모도 이앙기로 직접 심고, 사과대학도 다니며, 야산 7000여평을 트랙터로 개간하여 마사토를 한창 팔다가 몹쓸 병마가 들이닥쳐 투병 8개월만에 졸지에 스러졌다. 그러니 어찌 그 죽음이 아깝지 않을 것인가. 읍내 탁구교실에서 지도를 하는 등 스포츠맨으로서 발군의 실력자였다.
5월말 바래봉 철쭉제를 두 번이나 같이 오르며, 겨울에 비닐푸대를 갖고 와 눈썰매를 타자고 했다. 처서가 지나면 장씨 종중산의 많은 봉분들을 같이 벌초하여 용돈을 벌자고도 했다. 농사정보도 시시때때로 주고받았다. “최기자, 시방 이삭비료헐 때여”그 정다운 목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어느 친구가 귀향하는 친구의 고향집 리모델링 공사를 하는데, 40여km나 떨어졌는데, 거의 3주를 출퇴근하며 궂은 일을 도와줄 수 있겠는가. 그는 그야말로 ‘진국’이었다. 그래서 그가 너무 그립고, 그러하니 더욱 안타깝다. 그와 함께 눈 덮인 바래봉을 헤쳐 내려오며 송뢰松籟(솔바람소리)를 처음 들었다. 솔바람소리도 3종류가 있다했다. 송운松韻은 잔잔하게 스치는 소리이고, 송도松濤는 파도소리 같다고 했던가. 퉁소소리 같으면 송뢰라 했다.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죽어다깨어나도 알지 못하는 솔바람소리, 그 소리를 들어보고 싶지 않으신가. 운봉雲峯은 구름에 둘러싸인 봉우리라는 뜻일 터, 해발 500미터 지리산 자락의 고원이다. 왕년에 호주에서 선물한 면양을 키워 이름이 났는데, 지금은 온산을 붉게 물들이는 철쭉군락지로 유명하다. 바래봉 정상에 서면 ‘어머니산’ 지리산 연봉을 주우욱 훑을 수 있다.
비전마을의 황산대첩비지와 바로 그 옆에 있는 판소리의 가왕 송흥록과 박초월의 생가가 있는 동편제마을도 자랑스러워하며 보여줬던 친구다. 황산전투의 완벽한 승리, 소년장군 아기발도를 물리친 이성계의 고려군. 피바위(람천이 왜구들의 피로 물들었는데, 유독 이 바위가 붉으죽죽하다)는 또 어떠한가? 게다가 ‘달을 끌어올린다’는 ‘인월引月’의 지명은 얼마나 예쁜 이름인가(황산전투 당시 칠흑같은 밤을 밝히고자 간절한 기도로 달을 끌어당겨 싸우고 승리했다는 전설을 담은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일제는 자기들의 패배를 지우려는 듯 황산대첩비를 깨부셨다. 파비각破碑閣과 어휘각御諱閣을 보며 슬픈 역사의 상념에 잠기기도 했다. 몽매한 제국주의자들의 후예, 선조들의 전철을 밟는 아베(암살)와 기시다여! X잡고 반성하라.
아무튼, 생각지 못한 운봉고원길 기획특집을 읽으며, 졸지에 세상을 떠난 친구 생각에 내내 우울했다. 추수秋收를 거의 다 한 참말로 가을가을한 가을날에 엊그제 치즈축제가 끝난 임실 치즈테마파크를 혼자서 찾았다. 축제기간은 인산인해로 즐길 수가 없다고 한다. 아아- 천지에 국화비까리가 장관이다. 노랑노랑, 보라 보라 꽃화분 뭉치들을 보면 우울한 마음과 찌푸른 얼굴이 금세 풀린다. 거기에다 스위스 루체른역을 빼다막은 본관건물이라니, 왕년에 아내와 한 달간 다녀온 추억에도 잠긴다. 우아하게 커피는 한잔 마셔야 하리라. 벨기에 출신 지정환(귀화 1호) 신부의 ‘임실 헌신’과 한국 사랑 이야기가 무척 감동적이다. 세상에 어쩌면 이런 이타적인 인간이 있을까? 운암에 사는 친구에게 꽃구경을 같이 하자고 전화하니 득달같이 달려오면서, 완주 비봉에 사는 친구까지 합세, 점심을 같이 했다. 모처럼 번개팅 성공! 의리, 의리하면 역시 전라도의 전라고등학교닷! 오늘도 해피데이! 임실 전통시장에서 산 만원어치 양파모종과 봄동 6천원어치. 오후 남은 들깨를 털고 짧아지는 해, 아예 추워진 저녁판에 심기 바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