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산천(山川)
영남산(映南山) 부(府)의 동북(東北) 1리쯤에 있으며 안동부의 주산(主山)이다. 산허리에 고정(古井)이 있으니 속칭 성재정(聖齋井)이라 한다. 비록 날이 가물어도 마르지 않으며, 붉은 무지개가 때때로 보인다.
저수산(猪首山) 안동부(安東府) 서북(西北) 1리쯤에 있는데 영남산(映南山)과 연이어 상대(相對)하여 솟아 있으며, 영남산과 함께 고을의 주산(主山)이 된다. 중간에 한 마을이 있으니 범씨동(梵氏洞)이라 한다. 동네에 작은 개울이 있는데, 이 저수산(猪首山)에서 발원(發源)하며 성중(城中)을 관류(貫流)하여 금문탄(金門灘)으로 들어간다.
태양산(太陽山) 안동부(安東府) 성서(城西) 문밖 2리쯤에 있는데 금수동(金水洞)은 그 아래에 있다.
부천산(富泉山) 안기역(安奇驛) 마을 남쪽에 있다.
사악(四嶽) 동(東)은 동악(東嶽) 이라 하며 절이 있다. 안동부(安東府)의 동쪽 7리에 있으며, 남(南)은 남산(南山)인데 순천사(順天寺)가 있으며, 부(府)의 남쪽 15리쯤에 있었으나 지금은 폐사(廢寺)
1)되었다.
서(西)쪽에는 서악이 있는데, 절이 있다. 부의 서쪽 5리에 있다. 북(北)쪽에는 금학산(金鶴山)인데 수정사(水晶寺)라는 절이 있다. 부의 북쪽 35리 쯤에 위치한다. 본부(本府)의 호장(戶長)
2)이 매년 사시(四時)에 제사(祭祀)를 지낸다.
와룡산(臥龍山) 부의 동쪽 30리에 있는데, 동쪽의 진산(鎭山)으로서 옛날에는 수다산(水多山)이라 했다. 백담(柏潭) 구봉령(具鳳齡)이 말하기를, “형상(形狀)이 누운 용과 같다” 하여 이렇게 이름지었다. 산정에 기우제단(祈雨祭壇)이 있는데 가물 때에 기우제(祈雨祭)
3)를 지내면 효과가 있다.
박 산(博 山) 안동부(安東府)의 동(東)쪽 25리에 있다.
인 산(仁 山) 안동부(安東府)의 동(東)쪽 30리에 있다.
무협산(巫峽山) 안동부(安東府)의 동(東)쪽 10리에 있는데, 금방기(金謗記)에 말한 “무협(巫峽)이 그 왼쪽에 늘어섰다.”라는 것이 바로 이 산이다.
문필산(文筆山) 안동부(安東府)의 남쪽 23리쯤에 있는데 일명 갈라산(葛蘿山)l라 한다. 기우단(祈雨壇)
4)이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신라의 김생(金生)
5)이 여기에서 글씨를 배웠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문필봉이라 한다.
봉지산(烽枝山) 안동부(安東府)의 남쪽 10리에 있으며 수침촌(水沈村)의 동쪽에 봉수(烽燧)가 있다.
화 산(花 山) 둘이다. 하나는 안동부(安東府)의 남쪽 10리 수침촌(水沈村)에 있으며, 여지승람(輿地勝覽)
6)에 이른바, 부동(府東) 14리에 있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 하나는 풍산현(豊山縣) 남쪽 10리쯤에 있다.
신석산(申石山) 안동부(安東府)의 남쪽 20리에 있으며 신석촌(申石村) 남쪽에 봉수(烽燧)가 있다.
기령산(奇靈山) 안동부(安東府)의 남쪽 36리 이현촌(梨峴村) 서쪽에 있다.
학가산(鶴駕山) 안동부(安東府)의 서쪽 30리에 있으며 혹은 하가산(下柯山)이라고도 한다. 안동(安東), 예천(醴泉), 영천(榮川) 세 고을이 둘러싸고 있으며 그 아래는 거찰(巨刹)과 소암(小庵)이 산허리에 펼쳐져 있다. 이곳에 올라 조망하면 안력(眼力)이 다함이 있어 제산(諸山)이 구질(丘垤)
7)과 같다. 소백산(小白山)과 대치(對峙)
8)하여 속전(俗傳)에, ‘모양이 나르는 학과 같다’하여 학가산이라 한다. 산의 최고봉을 국사봉(國祠峯)이라 하는데,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
9)이 적성봉(摘星峯)이라 고쳤다. 그 외에 유선봉(遊仙峯), 삼모봉(三茅峯), 난가대(爛柯臺), 학서대(鶴棲臺), 어풍대(御風臺)가 있는데 역시 송암(松巖)이 이름지었다. 산의 동쪽 모퉁이에 능인굴(能仁窟)이 있다.
천등산(天燈山) 안동부(安東府)의 서쪽 25리에 있다.
용 산(龍 山) 안동부(安東府)의 서쪽 15리에 있다.
청성산(靑城山) 안동부의 서쪽 15리에 있는데 일명(一名) 성산(城山) 이라 하며, 청산(靑山)이라고도 하고, 또 성산(城山)이라고도 한다. 금방기(金謗記)에 말하는 “성산(城山)이 그 우측에 뻗어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용산(龍山)의 남쪽에는 청(靑)과 성(城) 두 자를 합하여 청성산(靑城山)이라 한다. 김학봉(金鶴峰)
10)의 석문정사(石門精舍)와 권송암(權松巖)의 연어헌(鳶魚軒)이 있다. 송암기(松巖記)에 말하기를, ‘영가(永嘉)는 고칭(古稱) 산수향(山水鄕)으로 낙동강(洛東江)을 따라서 그것을 논(論)한다면, 청량산과 여산과 이 청성산을 병칭(竝稱)하고 나머지는 들은 적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청량산(淸凉山)은 다만 초상(初喪)할 뿐이며, 여산(廬山)은 한갓 유수(幽邃)할 뿐이니, 어찌 이 청성산(靑城山)이 두 산의 기상(氣象)을 겸(兼)하고 또 멀리 확 트인 경치(景致)와 같음이 있겠는가? 문인(文人)과 은자(隱者)가 서식(棲息)해서 높이 숭상함이 마땅하며, 절괴(窃愧)ㆍ 요료(寥寥)하여 백년(百年)에 그 이름을 들어 보지 못했으나 다만 폐사(廢寺)가 있는데, 어느 시대에 지었는지 그 연대(年代)는 알기 어려우며, 권상공(權相公) 예(輗)의 선영(先塋)이 그곳에 가깝기에 중창(重創)하고 수호하게 되니 그 경치가 소쇄하여 거처할 만 하였다. 상공(相公)께서 때때로 이곳에 유람하였고, 군수(郡守) 주신재(周愼齋)
11)가 이 산에 들어가 하루를 묵으며 시를 읊어 선경(仙境)에 비유했으나 상공(相公)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나무꾼과 목동(牧童)이 침입(侵入)하고, 방광자(放狂者)가 노니니, 산에는 대나무만 쓸쓸히 서 있고 절은 허물어져 풍우에 시달린 지가 20여년 이다. 내가 어려서부터 책을 들고 이 산에 오르내린 것이 한 해에도 두 세 번씩이었다. 매번 취벽(翠壁)에 기대어 띠집을 얽어서 부생(浮生)의 남은 기간을 한가롭게 보내고자 하였으나, 잘못 벼슬(科臼)에 떨어져서 오래되도록 몸을 빼내지 못하고 말았다. 이 해에 갑자기 깨달아 시간을 내어 산속에 들어가서 세속의 빈(貧)ㆍ천(賤)ㆍ부(富)ㆍ귀(貴)와 우(憂)ㆍ수(愁) 만려(萬慮)를 완전히 떨쳐버리고 확고하게 자연(自然)에 뜻을 두어 홀로 수양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비로소 감암(嵁巖) 아래 냉천(冷泉) 가에 터를 잡고 오는 가을에 정사(精舍)를 짓기를 기약하였다. 산(山)에는 적송봉(赤松峯), 대학봉(對鶴峯), 상진암(上眞巖), 적홍암(赤虹巖), 목단암(牧丹巖), 계수대(桂樹臺), 취소대(吹簫臺), 죽천대(竹泉臺), 구하대(鷗下臺), 세어(細魚)천, 한송단(寒松壇)이 있는데, 모두 송암(松巖)이 이름 지은 바로, 송암사십영(松巖四十詠)에 들어있다.
건지산(蹇芝山) 둘이다. 하나는 안동부(安東府)의 서쪽 25리에 있는데, 모양이 연엽(蓮葉)과 같고 산의 아래에 마암(馬巖)이 있고 절벽 아래에 상락대(上洛臺)가 있으며, 하나는 부북(府北)의 가창리(可倉里)에 있다.
상고산(上孤山) 안동부(安東府)의 서쪽 화곡촌(樺谷村) 앞의 남양담(南陽潭) 위에 있다.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
12)이 그 에 정자를 지었는데, 그 기초(基礎)가 지금도 남아 있다.
하고산(下孤山) 안동부의 서쪽 단지촌(丹地村) 수구(水口)에 있는데, 호산(湖山)의 승경(勝景)이 가장 기절(奇絶)
13)하다.
상산(上山) 일명 상산(商山)이라 하는데, 안동부의 서쪽 20리쯤에 있다. 천등산(天燈山)으로부터 전곡(轉曲)하여 西南으로 내려왔는데, 양봉(兩峯)이 기이하게 빼어나며 남쪽으로 금지촌(金地村)에 임하였다.
병산(甁山) 안동부의 북쪽 10리에 있다. 고려태조(高麗太祖)
14)와 견훤 견훤(甄萱, ?~936)
15)의 싸움에서 견훤(甄萱)이 패주하고, 시랑(侍郞) 김악(金渥)이 사자(死者) 팔천여인(八千餘人)의 시체를 쌓아서 흐르는 물을 막자, 물이 그 위로 흘러 넘쳤다.
무은산(茂隱山) 안동부의 북쪽 10리 가수천촌(嘉水川村)에 있다.
오이산(烏耳山) 안동부의 북쪽 10리 연비원(燕飛院)에 있다.
진봉산(振鳳山) 안동부 동쪽 15리 태이동(兌伊洞)에 있다.
사니산(師尼山) 안동부 북쪽 15리 이화어동(伊火於洞)에 있다.
고유산(高遊山) 안동부 북쪽 15리 행전(杏田)에 있다.
망지산(望芝山) 안동부 북쪽 20리 주촌(周村)에 있다.
오리산(梧里山) 안동부 북쪽 20리 보현(甫峴)에 있다.
오음산(五音山) 안동부 북쪽 30리 대동(大洞)에 있다.
옥산(玉山) 둘이다. 하나는 안동부 북쪽 30리 도기촌(道岐村)에 있으며, 다른 하나는 임하현(臨河縣) 북쪽 2리에 있다고도 한다.
조골산(照骨山) 안동부의 북쪽 40리 천등산(天燈山)에 있는데, 한 지맥(支脈)이 북쪽으로 달려 높이 솟았고 그 위에 기우단(祈雨壇)이 있다.
약산(藥山) 임하현(臨河縣) 남쪽 16리에 있는데, 현의 진산(鎭山)이 화현(火峴)에 뿌리는 박고 서쪽으로 내려와서, 웅반(雄盤)이 우뚝 솟았고 그 위에 봉수(烽燧)
16)가 있다.
개산(介山) 임하현(臨河縣)의 북쪽 2리에 있다.
아기산(阿岐山) 임하현(臨河縣) 동쪽 15리에 있다.
수정산(水精山) 임하현(臨河縣) 동남쪽 10리쯤에 있는데, 산의 남쪽에 낙연폭포(洛淵瀑布)가 있다.
비봉산(飛鳳山) 임하현(臨河縣) 서남쪽 40리, 송제(松蹄) 남쪽 2리에 있다.
수다산(水多山) 임하현(臨河縣) 북쪽 30리에 있는데, 그 뿌리는 영양현(英陽縣)의 일월산(日月山)으로부터 내려와서 청량산(淸凉山)이 되고, 그 산의 한 지맥(支脈)은 남으로 달려서 장갈현(長葛峴)이 되었으며, 또 그것이 굽어서 서남쪽으로 내려와 탄당현(炭堂峴)이 되었고, 남으로 달려 이 산이 되었다.
도마산(道馬山) 임하현(臨河縣)의 북쪽 30리에 있는데, 그 뿌리가 갈라져, 장갈현(長葛峴)으로부터 이 산이 되고, 그것이 굽어서 남쪽으로 20여리를 가서 여산(廬山)의 오로봉(五老峰)이 되었다.
성산(城山) 셋이 있다. 하나는 위에서 나왔다. 하나는 일직현(一直縣) 북쪽 2리에 있는데, 현(縣)의 진산(鎭山)이며, 하나는, 일직현(一直縣) 동쪽 5리 구미촌(龜尾村) 서쪽에 있다. 푸른 산줄기가 가로 막혀 그 모양이 성곽(城郭)과 같다.
감곡산(甘谷山) 일직현(一直縣) 동쪽 8리에 있는데, 약수우물(藥井)이 있다.
진릉산(震陵山) 일직현(一直縣) 북쪽 5리에 있다.
신감산(神感山) 일직현(一直縣) 동쪽 8리 구미촌(龜尾村)에 있는데, 모양이 엎드린 거북과 같다.
대전산(大田山) 일직현(一直縣) 동쪽 8리에 있다.
풍악산(豊嶽山) 풍산현(豊山縣) 북동쪽 1리에 있는데, 현(縣)의 진산(鎭山)이며, 그 위에 옛 산성(山城)이 있다.
고산(孤山) 풍산현(豊山縣) 북쪽 2리쯤에 있는데, 그 위는 평평하게 되어 있어서 백여명이 앉을 수 있다. 석천(石川)이 있어 근원(根源)이 학가산(鶴駕山)으로부터 내려와서 그 아래에 이르러 소담(小潭)을 이루었는데, 맑은 경치가 즐길 만하다.
비파산(琵琶山) 둘이 있다. 하나는 풍산현(豊山縣) 남쪽 2리에 있다. 하나는 소천부곡(小川部曲)의 남쪽에 있다.
병산(屛山) 풍산현(豊山縣) 남쪽 10리, 화산(花山)아래에 있다. 절벽(絶壁)이 깎은 듯이 섰으며, 맑은 연못이 둘러있다.
원지산(遠志山) 풍산현(豊山縣) 남쪽 20리에 있다. 원지초(遠志草)
17)가 많이 생산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했다.
거물산(巨岉山) 풍산현(豊山縣) 서쪽 15리에 있는데, 일명 흑운산(黑雲山)이라 한다. 산의 정상(頂上)에 원정(眢井)
*)이 있고 산의 서쪽 중턱에 초정(椒井)이 있으며, 산의 북쪽 중턱에 성재정(聖齋井)이 있다.
정산(井山) 거물산(巨岉山) 동쪽에 있다. 위에 고정(古井)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했다.
현공산(縣空山) 풍산현(豊山縣) 북쪽 15리에 있다. 학가산(鶴駕山)의 남쪽 지맥이다.
조파산(助坡山) 풍산현(豊山縣) 북쪽 10리에 있다.
오적산(五赤山) 풍산현(豊山縣) 북쪽 17리에 있는데, 서미동(西美洞)의 서북쪽이다.
대봉산(大鳳山) 오적산(五赤山) 서쪽에 있다.
직곡산(직곡산) 풍산현(豊山縣) 서북쪽 15리에 있다.
광석산(廣石山) 직곡산(稷谷山)의 서쪽에 있다.
발 산(鉢 山) 풍산현(豊山縣) 서북쪽 10리에 있는데, 평지(平地)에서 돌기(突起)
18)하여 높이가 백장(百丈)이나 되며, 모양이 놋주발 같아서 그렇게 이름했다.
나치산(羅峙山) 감천현(甘泉縣) 북쪽 3리에 있는데, 일명 고방산(古方山)이라 하고, 일면 주마산(走馬山)이라고도 하는데, 현의 진산(鎭山)으로 서쪽에 비봉산(飛鳳山)과 나란히 솟아있다.
호애산(虎崖山) 내성현(柰城縣) 서남쪽 2리에 있다.
당북산(堂北山) 내성현(柰城縣) 동남쪽 2리에 있다.
백병산(白屛山) 개단부곡(皆丹部曲) 서북쪽 10리에 있는데, 산의 한 지맥이 동쪽으로 돌아서 예부현(禮夫峴)이 되었다.
개내산(介乃山) 소천부곡(小川部曲) 남쪽 30리에 있다. 일명 비파산(琵琶山)이라 한다. 위의 삼층 석실과 도목(桃木)이 있는데, 그 크기가 기둥과 같으며, 결실(結實)하면 그 크기가 되(升)만 하고, 빛은 푸르며 단단하기가 돌과 같아서 사람들이 먹을 수 없다. 또 장군석(將軍石)이 있는데, 쌍으로 솟아 있고 눈(雪)처럼 희다.
봉래산(蓬萊山) 소천부곡(小川部曲) 동쪽 50리에 있는데, 절벽(絶壁)이 천길이며, 깊은 못이 가로 펼쳐서 푸른 새가 매양 사월이면 둥지를 찾아와서, 절벽 위에 새끼를 친다. 큰 것은 까치만하며 날아오르면 창공을 솟아오르니 사람들이 그것을 청학(靑鶴)이라 한다.
죽미산(竹薇山) 소천부곡(小川部曲) 동쪽 5리에 있다.
반이산(潘伊山) 소천부곡(小川部曲) 북쪽 80리에 있다.
청량산(淸凉山) 재산현(才山縣) 남쪽 15리에 있다. 안동부에서 95리나 떨어져 있는데, 장인봉(丈人峯)은 청량산(淸凉山)의 외봉(外峯)에서 자란 높은 봉우리요, 선학봉(仙鶴峯)은 장인봉(丈人峯)의 서쪽에 있으며, 자란봉(紫鸞峯)은 장인봉(丈人峯)의 동쪽에 있고, 자소봉(紫霄峯)은 청량 내봉의 종자(宗者)이다. 경일봉(擎日峯)은 자소봉(紫霄峯)의 동쪽에 있으며, 축융봉(祝融峯)은 자소봉의 남쪽에 있고, 탁필봉(卓筆峯)은 자소봉의 서쪽에 있는데, 봉우리 가운데 가장 높은 것이다. 연적봉(硯滴峯)은 탁필봉(卓筆峯)의 서쪽에 있고, 연화봉(蓮花峯)은 연적봉(硯滴峯)의 서쪽에 있는데 우뚝 솟은 모습이 마치 부용(芙蓉)과 같아서 승가(僧家)에서 말하는 의상봉(義相峯)이다. 봉의 동쪽에 연대사(蓮臺寺)가 있다. 향로봉(香爐峯)은 연화봉(蓮花峯)의 전봉(前峯)에 있는 것으로, 그 모양이 향로(香爐)와 비슷하다. 금탑봉(金塔峯)은 경일봉(擎日峯)의 아래에 있는데, 어떤 이는 치원봉(致遠峯)이라 한다. 최치원(崔致遠)
19)의 독서처가 치원대의 아래에 있다. 탁립봉(卓立峯)은 경일봉(擎日峯)의 밖에 있는데, 주세붕(周世鵬)의 기문(記文)에 , “청량산은 안동부 재산현에 있으나, 실은 태백산의 한 지맥(支脈)이 내려와서 정기(精氣)가 모인 것이다. 그것의 방박(磅礡)한 기운(氣運)이 결속하여 높은 봉우리가 되어 다투어 솟아났고, 한색(寒色)은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푸른 죽순이 난추(亂抽)함과 같고, 늠연(凜然)하여 공경할 만하다. 대천(大川)이 그 산 자락을 휘감은 것은 곧 황지(潢池)로부터 흘러온 것이다. 석벽은 높고 물은 세차게 흘러 배를 띄우지 못한다. 혹 창벽(蒼壁)이 긴 못을 끼고, 거울같이 푸른 물은 약수(弱手)가 청천(淸淺) 함과 같으며, 진세(塵世)에서 함부로 이 산을 찾아오지 못하게 하여 흐르는 물이 준 연후에 겨우 외부의 사람이 다닐 수 있으며, 산과 물로 인하여 경치가 더욱 그윽하다. 대개 이 산은 그 주위(周圍)가 백리(百里)도 못되나 산 봉우리가 층층이 쌓여서 깎아지른 절벽이 절벽을 이고 있고, 연애(煙崖)와 수목(樹木)이 그림 같으니, 진실로 조물주의 뛰어난 솜씨이다. 내가 옛날에 동쪽으로 금강산을 유람하고, 서쪽으로 천마산(天磨山)과 성거산(聖居山)을 답사(踏査)했으며, 남으로 가야(伽倻)와 금산(錦山)의 정상에 올라 두류산(頭流山)의 왼쪽 기슭을 굽어보았으며, 기타의 작은 산들도 수없이 유람하였다. 비록 감히 망녕되게 자장(子長)에게 비기지는 못하나, 운산(雲山)의 아담한 경치는 이미 말함이 오래다. 내가 생각건대, 해동(海東) 여러 산의 웅장함은 두류(頭流)의 맑고 빼어남만 못하고, 금강(金剛)의 기아한 경치만 못하며, 박연폭포(朴淵瀑布)와 가야(伽倻)의 동학(洞壑)만 같은 것이 없으나, 단엄(端嚴)하고 상개(爽介)함에 이르러서는 비록 작으나 업신여기지 못할 것은 오직 청량산(淸凉山)이 그러하다. 그런 까닭에 중국의 명산을 묻는다면, 반드시 먼저 오악(五岳)을 일컬을 것이니, 북은 항악(恒岳)이요, 서는 화악(華岳)이며, 남은 형악(衡岳), 중은 숭악(嵩岳)이나, 그 최대의 것은 대악(岱岳)이다. 그러나 그 작으면서 선경(仙境)인 것은 반드시 천태(天台)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 동국(東國)의 명산(名山)을 묻는다면, 반드시 먼저 오악(五岳)을 일컬을 것이니 북은 묘향(妙香)이요, 서는 구월(九月)이며, 동은 금강(金剛)이요, 중은 삼각(三角)이나, 그 최대이면서 남쪽에 있는 것은 두류(頭流)라 한다. 그러나 그 소산(小山)이면서 선경(仙境)인 것은 반드시 청량산(淸凉山)이다. 내 10세때에 이미 청량산이 있다는 것을 듣고, 한번 오르고 싶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지가 어언 37년이나 되었다. 풍기군수(豊基郡守)로 부임한 뒤로는 꼭가서 볼까 하여서 청량산의 동서쪽으로 가서 멀리 그 모습을 바라보고 번번히 다리를 수고롭게 하면서 문득 숙세의 팔을 뻗어 그 산 아래에 묵고서 돌아오게 되어, 안타깝고 슬퍼하며 목마른 듯 한 지가 또 사년이나 되었다. 이제 50세의 노쇠하고 창백한 늙은이인 내가 비로소 지팡이에 의지하여 연적봉두(硯滴峯頭)에 오르니 다행이다. 그 내외에 있는 여러 봉우리가 옛날에는 그 이름이 없었으나 중(僧)들이 전해서 내려오는 것으로, 오직 보살봉(菩薩峰), 의상봉(義相峯), 금탑봉(金塔峯), 연적봉(硯滴峯)만이 있으며, 외봉(外峯)으로는 오직 큰 봉우리는 금탑과 같은데, 간혹 치원봉(致遠峯)이라고 부르는 것은 치원대(致遠臺)가 그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의상봉 역시 의상굴(義相窟)이 그 아래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 그 거칠음이 이와 같았다. 점필재(佔畢齋)가 두류산(頭流山)에 있어서, ‘증거가 없어 믿지 못하여 이름 붙일만 한 것에도 이름 짓지 못했다.’ 라고 하였는데 하물며 나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기에 망녕되게도 참람히 봉우리들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주문공이 여산에서 기절(奇絶)을 만나면 문득 이름하여 일찍이 증거가 없더라도 이름짓기 아니함이 없었다. 이 청량산의 제봉(諸峯)은 만세를 거쳐도 이름나지 않으니 진실로 산을 좋아하는 자의 수치스러운 바이다. 만약 반드시 주자의 현명(賢名)을 기다린다면, 그것이 이름을 얻는 것도 역시 어렵지 않겠는가? 짐짓 그 이름을 짓나니 장래의 철인(哲人)들을 기다려 고치게 할 것이니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드디어 그 외봉(外峯)의 긴 것을 장인봉(丈人峯)이라 하니, 태자(太字)의 의미를 풀이한 것인데 이는 멀리 태산이 장악(丈岳)본뜬 것이다. 그 서쪽을 선학봉(仙鶴峯)이라 하고, 동쪽을 자란(紫鸞)이라 한다. 그 밖의 산의 세 봉우리는 모두 가볼 겨를이 없어 멀리 그 내봉(內峯)의 종자(宗者)만 이름지으니, 자소봉(紫霄峯)이라 하였는데, 창암(蒼巖)이 천척(千尺)으로 하늘 밖에 빼어났다. 동봉(東峯)을 경일봉(擎日峯)이라 하는데 빈욱봉(賓旭峯)의 뜻을 취한 것이다. 남봉(南峯)을 축융봉(祝融峯)이라 하는데 이는 형산(衡山)을 모방한 것이다. 자소봉에서 서쪽으로 50보(步) 미만에 가장 드러난 것이 탁필봉(卓筆峯)이라 하는데, 탁필봉에서 서로 10보(步) 미만쯤 가서 우뚝 솟은 것을 연적봉(硯滴峯)이라 한다. 연적봉의 서쪽에 봉우리가 탁출(擢出)여 부용과 같은 것을 연화봉(蓮花峯)이라 하니, 즉 연화사(蓮花寺)의 서봉이며, 승가(僧家)에서 이른바 의상봉(義相峯)이다. 연화봉 앞에 봉우리가 향로를 닮은 것을 향로봉(香爐峯)이라 한다. 금탑봉(金塔峯)은 경일봉(擎日峯)의 아래 탁립한 봉이며, 경일봉 외에 내ㆍ외봉을 합하면 무릇 12봉(峰)이니, 대개 구명(舊名)을 가진 것이 둘이고, 구명을 고친 것이 셋이며, 이름이 없는데 그렇게 이름지은 것이 여섯이다. 그 하나는 곧 탁필봉(卓筆峯)이니 이 역시 여산(廬山)의 탁필봉을 본뜬 것이다. 그 참람하여 피하지 못함이 있을 것이다. 자소봉(紫霄峯)은 대략 9층으로 열 하나의 절이 그 곳에 있다. 그 중에 백운암이 가장 높고, 다음이 만월암이요, 다음이 원효암, 다음이 몽상암, 다음이 보현암, 다음이 문수암, 다음이 진불암, 다음이 연화사, 다음이 별실ㆍ중대ㆍ보문암이며, 경일봉(擎日峯)은 대략 3층에 3사(寺)가 있으니 김생암ㆍ상대승암ㆍ하대승암이 있다. 금탑봉 역시 3층에 5사(寺)가 있는데, 산형(山形)이 탑과 같으며 다섯절은 모두 시렁처럼 중층을 둘렀으니, 치원암, 국일암, 안중암, 상청량암, 하청량암이 그것이다. 모든 절이 절벽을 지고 있어 아래로부터 쳐다보면 다만 깎은 듯한 절벽만 보일 뿐 그 위에 절이 있는 줄 알지 못한다. 이 절로부터 뒤는 모두 절벽이며, 절 앞은 모두 절벽과 대(臺)인데 연대사에서 보면, 금탑봉은 2,3층의 탑으로 되었으며, 치원암에서 보면 자하봉 역시 19층 탑인데, 이것은 모두 평생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것이다. 모든 봉우리를 보면, 게으른 자는 일어설 수 있게 하고, 폭포소리를 들으면, 탐욕한 자도 청렴하게 해주며, 총명수(聰明水)를 마시고 만월암(滿月庵)에 누우면 비록 신선이 아니라 하더라도 나는 꼭 신선(神仙)이라고 말할 것이다. 다만 괴상하게도 지지(地誌)와 국사(國史)에 모두 최치원을 말했으나 청량사(淸凉寺)만은 곧 합천(陜川) 가야산(伽倻山), 월류봉(月留峰)보다 못하다 하였다. 이 산은 비록 지지(地誌)에는 실려있으나 한 글자도 최고운이나 김생에 대한 언급이 없으니 그것은 후인들이 이 산을 높이려 하여 거짓되게 고운과 김생이 이산에 머물렀다고 한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이런 사실에 있었음에도 그 역사를 실전(失傳)해서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치원(致遠)으로 대(臺)의 이름을 삼고 절(寺)의 이름을 지었으며, 김생(金生)으로 굴(窟)의 이름을 삼고 절(寺)의 이름을 지었으며, 김생(金生)으로 굴(窟)의 이름을 삼고 절(寺)의 이름을 지은 천년의 발자취가 어떻게 그처럼 아침나절의 일인 듯 명백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모든 것들을 기록하여 사실을 아는 사람을 기다리려 한다. 아아! 이 산이 중국에 있었더라면, 반드시 이백(李白)
20)과 두보(杜甫)
21)의 음롱(吟弄)하는 바가 되고, 한유(韓愈)
22)와 유종원(柳宗元)의 기술하는 바가 되고, 주자(朱子)와 장횡거(張橫渠)의 등상(登賞)하는 바가 되어 온 천하에 크게 알려지지 않았겠는가. 그런데도 쓸쓸히 천년동안 고운과 김생 두 사람을 빙자하여 한 나라에 드러났겠는가. 진실로 탄식할 만하다. 이 청량산이 비록 이름은 안동에 속했으나 그 아래는 모두 예안땅으로 송재, 농암으로부터 이후에 홍유석사(鴻儒碩士)가 잇달아 배출되었으니 세상에서 말하기를, ‘청량산은 안동의 산이나, 실은 예안 인물의 지령(地靈)이 배출되었다.’는 설(說)이 어찌 거짓이겠는가? 이번 걸음에 잡영(雜詠) 팔십오수(八十五首)는 전후의 일들을 모두 기록하여 청량산산음(淸凉山散吟)이라 하니 거의 백여편이나 되었다. 돌아와 바닷가에 누워서 아이놈들과 함께 펼쳐보면 대략 이번 청량산 유람이 좋았음을 기억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시(詩)에게 말하기를,
하늘에 자하봉이 솟았으니,
봉우리 앞에 푸른 절벽이 조밀하도다.
절이 높으니 달에 가까워지고,
소나무가 늙으니 가을인줄 모르겠네.
문득, 바람을 타고 떠나고 싶으니,
도리어 학을 타고 노는가 의심나네.
어찌 꼭 대산(岱山)
23) 이 절정에 올라야 하리,
한번 봄에도 많은 시름 흩어지네.
자소봉(紫霄峯)
김생굴을 찾으려고,
먼저 경일봉에 올랐네.
하늘에 솟은 봉 우뚝이 높았고,
햇빛을 공경함에 정성이 깊었다.
한번 피리 부니 삼천(三天) 위이고,
고독한 지팡이는 만리를 가는 마음.
다른 해에 완부(阮孚)의 신으로,
다시 찾아 올 것을 기약한다.
경일봉(擎日峯)
연적봉 머리에서 한 지팡이 의지하고,
탁필을 휘둘러 누워서 하늘에 글씨 쓰고싶네.
나부끼는 양손에 천풍이 가득하니,
문득 삼매를 생각하며 축융봉을 내려오네.
연적봉(硯滴峯)
세상 밖 연하가 별유천(別有天)인데,
산중의 초목이 모두 신선인 듯 하여라.
삼층의 금탑봉이 그림 같은데,
유독 중층에 다덧 절 걸려있네.
금탑봉 앞 치원대,
멀리 바라보니 열두 절문 열렸네.
높고 낮은 푸른 절벽 석양 아래,
그 누가 화공을 빌려 그림에 옮길꼬.
금탑봉(金塔峯)
석봉이 천길이나 허공에 솟아,
탁립하여 당당하기 정사(正士)와 같네.
뭇 봉우리 진한에도 비길 곳 없어,
의연히 일찍이 화도 중에 보겠네.
탁립봉(卓立峯)
못 봉우리 다투어 김생굴 위에 드러나,
고월(孤月)이 아직도 걸렸으니 치원의 마음이라.
깊은 산중에 사람 보이지 않고,
천추의 대위에 홀로 옷깃을 여미네.
치원대(致遠臺)
퇴계 이선생의 발문에 이르기를,
안동부의 청량산은 예안현 동북쪽 수십리에 있으며 황의 선려(先廬)는 그 길의 반 쯤에 있다. 새벽에 떠나서 산에 오르면 날은 한낮이 못된다. 그러나 이것은 비록 경계는 타군으로 갈리었으나 실은 오가(五家)의 산이다. 황은 어려서부터 부형을 따라 이 산에서 몇 번이나 독서했는지 알지 못한다. 고요한 가운데 경서를 궁구함에 심히 득력(得力)하지 못하고서 경솔하게 세로(世路)에 나와 왕래할 즈음에 심경지(沈慶之), 공치규(孔稚圭) 배(輩)가 옆에서 따라 웃고 기롱 하는 듯 하다. 선산(仙山)으로 고개를 돌리니 옥같이 연하(煙霞)의 밖에 우뚝서고, 수십년래에 틈을 내어 산의 어구를 거닌 지가 겨우 한 두 번 뿐이었다. 기유년(1549)봄에 내가 풍기 고을에 갔을 때 다행히 주선생 경유의 유산록(遊山錄) 고울 사람에게서 얻어 읽어보고 거듭 거듭 그 기이함에 탄복하였다. 얼마 안가서 고을을 떠나 청량산 아래에 귀전(歸田)하고 병와(病臥)한 지 사년이나 되었어도 한번도 동문(洞門)을 두드리지 못했다. 참으로 뜻밖에도 지금 서울(京師) 에 와서 선생의 하료(下僚)로서 함께 즐겼다. 선생이 하루는 혜연(惠然)히 내방(來訪)하여 책 한권을 보이는데, 그것은 유록(遊錄)이었다. 전에 비하여 십중(十中) 사오(四ㆍ五)는 더해졌다. 이에 더욱 보지 못했던 내용을 보게 되었으니, 내가 이에 탄복하고 말하기를, ‘거룩하도다! 선생이 이 산(山)에서 얻음이여!’라고 했다. 홍몽(鴻濛)이 부판(剖判)하고 융결(融結)하여 고심(高心)한 경치가 몇 천만년인지 알지 못하고, 하늘이 그 경치를 갈무리고, 땅이 그 기이(奇異)함을 감춘 것은 곧 선생의 글을 기다려서 그것이 발천(發闡)된 것이니 어찌 이 청량산(淸凉山)이 큰 다행이 아니랴. 하물며 산의 제봉이 모두 불서(佛書)의 황망(荒茫)한 말과 불가(佛家)의 음혼(淫昏)한 이름을 무릅쓰고 지어졌으니 이것은 참으로 선구(仙區)의 욕(辱)이 되며, 오배(吾輩)의 수치(羞恥)이다. 이제 선생이 모두 고치고 절실하게 그 오욕을 씻었으니 산령(山靈)에 위로되고 정채(精采)가 빛남이 어떻하였겠는가. 후에 돌아가서 내 손으로 한통 써서 석실(石室)에 갈무리하여 반드시 잘 간직하리니 천년이 가도 썩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 끝에다 이름을 쓴 것도 큰 다행(多幸)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
주경유(周景游)의 유산운(遊山韻)차운(次韻)하니 무릉유록(武陵遊錄)은 그 필치가 훌륭하여 이는 장주(莊周)
24)의 바다 붕새의 말을 배운 것이다. 도리어 옛 남악(南嶽)을 읊기를 즐겨 호기로 인하여 방자함이 심하다.
주경유의 유청량산록의 뒤에 쓴 시에,
반평생 심장이 쇠끝같지 아니하여,
선산(仙山)의 묵은 빚을 오래 갚기 어렵다.
몽혼(夢魂)은 때로 다시 맑은 절벽을 능가하는데
몸은 지금도 오히려 진세(塵世)에 떨어져있다.
백낙천(白樂天)은 여산(廬山)에 들어가 햇빛을을 읊고,
한퇴지(韓退之)는 화악(華岳)에 올라 하늘 빛을 흔들었네
큰 문장을 다행히 얻어다 읽어보니,
천길 산에 도리어 같이 노니는가 의심된다.
라고 하였다.
여러 벗들과 청량산에서 놀기를 약속하고 말(馬)위에서 지은 시(約與諸遊淸凉山馬上作)에,
메 속의 산이 오히려 덜 깊음이 한이로다.
새벽 밥 먹고 다시 가서 찾으려네.
뭇 봉우리 눈 가득 나를 맞아 기뻐하니,
구름 속에 얼굴 지어 청음(淸吟)을 북돋우네.
십일월에 청량산에 들어가며(十一月入淸凉)라는 시(詩)에,
벼슬을 쉬고 향리에 있노라니,
양병(養病)에 자못 방해되는구나.
선산(仙山)이 멀리 있지 아니하여
목을 늘려 바라보며 이 마을 간절했네.
밤엔 고산암(孤山庵)에서 자고,
새벽에 두 재를 넘어갈 제
층층이 쌓인 얼음을 굽어보고,
첩첩이 가린 메를 우러러 보았도다.
나무다리 밟으며 세찬 개울 건널 때는,
각별히 조심하여 깨우친 바 많았노라.
깊은 숲에 태고(太古)의 눈(雪)이 쌓였고,
밝은 태양은 미세한 그림자도 없구나.
비스듬한 지름길은 낭떨어지 미끄럽고,
그 아래 굽어보니 함정과 다름없네.
가고 또 가니 힘은 이미 다했지만,
오르면 오를수록 마음 더욱 굳어지네.
산승(山僧)은 웃으며 수고했다 말하면서,
나를 서쪽집 고요한 곳으로 영접한다.
팔구일 동안 심신을 안정시키고,
문닫고 머리 내지 않았도다.
등륙(登陸)
25)의 성냄도 보지 못했거니,
하물며 바람소리 어찌 알았으리.
오늘 아침 비로소 햇빛이 고움을 아껴,
지팡이 짚고 바윗길이 펼쳐진 곳으로 갔다.
저 높은 재에 올라서는,
우주(宇宙)를 두 눈으로 바라본다.
쇠한 근력(筋力) 높은 산이 두려워,
이 소원대로 이루지 못한다네.
더위잡고 올라가서 좀 시험하려하나,
돌아보니 구름이 몇 길이 펼쳐졌네.
묘(妙)한 뜻 말하기 어려우나,
아름다운 그 경치 매양 홀로 간직했네.
어느덧 한 해가 저물어 가니,
이내 몸 깊이 숨어도 한하지 않으리라.
평생 친구 생각이 간절하여,
내 마음에 맴돌아 잊혀지지 않는구나.
고귀한 그 언약 실천하지 못했으니,
멀리 있는 사람 청하기도 어려워라.
이제 어이하면 이곳에 함께 와서,
힘써 절경(絶境)에 이르를꼬.
바위마다 눈내려 봉긋봉긋 솟았는데,
그 위에 달 비치니 더욱 말끔하여라.
유인(幽人)은 앉아서 잠자지 아니하고,
차가운 연못 빛이 암자에 비춰 주네.
밤이 이윽하여 향내마저 사라지니,
그윽히 조용함을 진실로 얻었노라.
만길 높은 벼랑 위에 옮겨서 깃드니,
발 아래 굽어보면 측량치 못할 레라.
병든 이네 몸 험한 곳이 두려워서,
자못 쇠한 나이에 거처하기 불안하네.
소연히 산 아래 내려가니,
구름 숲이 멀리 몇 리나 되는가.
구봉(九峯) 안동부의 동쪽 40여리에 있는데, 구봉(九峯)이 있는 까닭에 이렇게 이름지었다.
오로봉(五老峯)안동부의 동쪽 20리 여강서원(廬江書院)의 서쪽에 있다. 낙동강 물줄기 남쪽에 청자(靑紫)ㆍ옥채(玉菜)가 생산된다.
향로봉(香爐峯) 오로봉(五老峰) 동쪽에 있다.
향교봉(鄕校峯) 일직현(一直縣) 구미촌 남쪽에 있다. 속전(俗傳)에 옛날 향교가 그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향교봉이라고 했다.
규봉(圭峯) 풍산현 남쪽 20리에 있는데 속칭 만은봉(晩隱峯)이라 부른다.
학정봉(鶴頂峯) 내성현(柰城縣) 서쪽에 있다.
성황봉(城隍峯) 내성현(柰城縣) 북쪽에 있다.
성구현(城寇峴) 안동부 북쪽 8리에 있다. 안동부에서 예안까지 이르는 대로(大路)는 이 고개와 병산(甁山)이 연접한다. 고려 태조가 이 고개에서 견훤(甄萱)을 물리쳤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다.
풍현(風峴) 안동부 남쪽 15리 내림촌(內林村) 동쪽에 있다. 본부(本府)로부터 일직현에 달하는 큰길에 있다.
대현(大峴) 넷이다. 하나는 안동부 남쪽 13리 수침촌(水沈村) 동쪽에 있다. 부로부터 일직(一直)으로 가는 큰길에 있다. 하나는 안동부 서쪽 10리 안기역(安奇驛) 북쪽 안동부로부터 옹천에 달하는 큰길에 있다. 하나는 임하현 서쪽 안덕현계에 있는데, 안동부로부터 안강현에 달하는 큰길에 있다. 하나는 풍산현 남쪽 15리 화산 서현(西峴)에 있다. 위에 돌 모양이 사모(紗帽)같은 것이 있으며 현에서부터 하회(河回)를 거쳐 비안(比安)에 달하는 큰길에 있다.
면현(免峴) 안동부 남쪽 25리 풍현(風峴)으로부터 의성으로 가는 큰길에 있다.
광음현(光音峴) 안동부 남쪽 25리 일직으로 가는 대로에 있다.
금당현(金堂峴) 안동부 서쪽 19리 풍산으로 가는 큰길에 있다.
신석현(申石峴) 안동부 서쪽 27리 마감산(麻甘山) 서쪽 길에 있는데, 거북 모양의 돌이 있다.
두모현(豆毛峴) 안동부 북쪽 40리 옹천 서북에서 영천으로 가는 큰길에 있다.
유현(鍮峴) 안동부 서쪽 20리 부로부터 감천으로 가는 길에 있다. 옛날에 유점(鍮店)이 있었다.
마당현(馬堂峴) 안동부 서쪽 25리 동쪽으로 유현(鍮峴)에서의 거리가 5리쯤 되는데, 고개 위에 성황당(城隍堂)이 있다.
광흥현(廣興峴) 광흥사(廣興寺) 뒤 마당현(馬堂峴)에서 8리쯤 떨어져 있는데 매우 높다.
산성현(山城峴) 학사산 남쪽, 광흥사에서 6리쯤 떨어져 있는데 매우 높다.
저수현(猪首峴) 안동부 북쪽 10리에 있다. 부의 진산(鎭山)으로 고려왕이 견훤(甄萱)을 칠 때 유금필(庾黔弼)이 군사들을 이끌고 이 고개에서 견훤을 습격(襲擊)하여 격파(擊破)하였다.
오리현(梧里峴) 안동부 북쪽 25리 부(府)로부터 예안으로 가는 큰길에 있다.
백현(柏峴) 안동부 북쪽 20리 주촌(周村)의 동쪽에 있다.
소도마현(小道麻峴) 안동부 북쪽 60리 봉화로 가는 큰길에 있다.
옥산현(玉山峴) 안동부 북쪽 35리 도기촌(道岐村) 서북에 있다.
정현(正峴) 임하현 남쪽 5리에 있다.
추현(楸峴) 안동부 임하현 동쪽 30리 진보로 가는 큰길에 있다.
동산현(東山峴) 임하현 동쪽 40리 영양현과의 경계와 접하고 있다.
김극일(金克一) 의 시에,
가마를 타고 동산에 오르니,
산은 높고 길은 꾸불꾸불.
햇빛 비친 곳은 막 눈이 녹아지나,
그늘진 구렁은 여전히 한기가 일어나네.
마음은 돌아갈 길 바쁜데,
구름은 한가롭게 묏백리에 이는 구나.
몇이랑 밭이라도 갈 수 있다면,
벼슬 버리고 늙어가는 일 무엇이 어려우리.
주예현(舟曳峴) 임하현 동쪽 50리 영양 접경에 있다. 옛날 강원도로 통행하는 큰길에 있다.
이이현(耳而峴) 임하현 남쪽 길안현 동쪽 부(府)에서 청송으로 가는 대로에 있다.
탄당현(炭堂峴) 임하현 북쪽 40리 현에서 예안으로 가는 대로에 있다.
모현(茅峴) 길안현 서쪽 10리 의성현에서 청송으로 가는 큰길에 있다.
석현(石峴) 둘이 있다. 하나는 일직현 동쪽 현에서 의성으로 가는 큰길에 있다. 하나는 풍산현 서북쪽 10리 백야현(白也峴)으로 가는 큰길에 있다.
용각현(龍角峴) 일직현 서쪽 18리 현에서 비안(比安)으로 가는 큰길에 있다.
소두이현(小斗易峴) 일직현 서남쪽 9리 현에서 군위로 가는 큰길에 있다.
대두이현(大斗易峴) 일직현 서남쪽 18리 소두이현에서 군위로 가는 큰길에 있다.
오야기현(五野岐峴) 일직현 동남 15리 현에서 의성으로 가는 큰길에 있다.
우현(雨峴) 풍천현 남쪽 15리 증산(甑山) 북쪽 용궁(龍宮). 대죽(大竹)으로 가는 큰길에 있다.
사현(沙峴) 풍산현 남쪽 25리 만은봉(晩隱峯) 서쪽 비안(比安)ㆍ군위(軍威)로 가는 큰길에 있다.
백야현(白也峴) 풍산현 북쪽 15리 가마촌(佳麻村) 서쪽 예천으로 가는 큰길에 있다.
전피현(箭皮峴) 춘양현 동쪽 20리 현에서 삼척(三陟)으로 가는 큰길에 있다. 임진란 때 적병이 강원도에서 먼저 소천으로 들어와서 춘양으로 전향(轉向)하는데 의병장 정자(正字) 류종개(柳宗介) 가 사인(士人) 김인상(金麟祥), 윤흠신(尹欽信), 흠도(欽道)를 거느리고 이 고개에서 역전(逆戰)하다가 모두 흉봉(凶鋒)에 죽었다. 현인이 그들을 가련하게 여겨 마치 친척을 슬퍼하는 것 같았다. 그후 조정에서 류종개에게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증직(贈職)했으며, 후에 참봉 김융(金隆)이 이곳을 지나다가 느낌이 있어 시(詩)를 지어 말하기를,
활을 당겨 한갓 간담(肝膽)의 용기만 믿었더니,
풍우(風雨)에 홍모(鴻毛)가 한 칼에 가볍다.
장기(壯氣)는 충혼(忠魂)을 따라 매장(埋葬)이 안되어,
석봉(石峯) 천길에 성난 파도가 운다.
라고 하였다.
장현(獐峴) 둘이다. 하나는 춘양현 동남쪽 현으로부터 소천(小川)을 거쳐 울진으로 가는 큰길에 있다. 하나는 풍산현 서북 10리 광석(廣石)ㆍ거물(巨物) 양산(兩山) 사이 용궁(龍宮)으로 가는 큰길에 있다.
조현(助峴) 풍산현(豊山縣) 동북쪽 권산정(權山亭) 서쪽, 부(府)에서 예천으로 가는 경로(徑路)에 있다.
오적현(五赤峴) 풍산현 북쪽 10리 오적(五赤)ㆍ대봉(大鳳) 양산 아이 현에서 감천현(甘泉縣)으로 가는 경로(徑路)에 있다.
예부현(禮夫峴) 개단부곡(皆丹部曲) 북쪽 15리에 있다.
만항현(晩項峴) 개단부곡(皆丹部曲) 서북쪽 영춘현(永春縣)경계(境界) 30리에 있다.
도력현(道力峴) 개단부곡(皆丹部曲) 북쪽 20리에 있다.
고적현(高適峴) 개단부곡(皆丹部曲) 30리 영월(寧越)ㆍ정선(旌善)으로 가는 길에 있다.
개전현(階田峴) 재산현(才山縣) 남쪽 15리 현에서 안동부로 들어가는 길에 있다.
병현(竝峴) 재산현(才山縣) 동쪽 30리, 영양현에서 안동부로 들어가는 길에 있다.
도락천(道樂遷) 풍산현 남쪽 20리에 있다. 위에는 세 기봉(奇峯)이 있고 산허리에는 잔도(棧道)
26)가 있다.
공산당(公山堂) 일직현 동쪽 10리 구미촌(龜尾村)에 있다. 위에는 당(堂)이 있는데, 비가 오도록 빌면 영험이 있다.
무협대(巫峽臺) 안동부의 동쪽 무협산(巫峽山) 아래 선어연(仙魚淵) 위에 있다.
구선대(九仙臺) 안동부 동쪽 가야촌(佳野村) 수구(水口)에 있다. 고로(古老)들이 전하기를, ‘ 선(九仙)이 유서(遊棲) 한 곳’ 이라 하며, 구린교(九麟橋) 역시 그 동쪽에 있는 까닭으로 백담(柏潭) 구봉령(具鳳齡)의 ‘구선가구린(九仙駕九麟)’이란 싯구가 있다.
낙수대(落水臺) 천등산(天燈山)과 봉정사(鳳停寺)아래에 있는데 퇴도선생(退陶先生) 이 명옥대(鳴玉臺)라고 개명(改名)하였다.
상락대(上洛臺) 안동부 서쪽 25리 회곡촌(檜谷村)의 남쪽 기슭에 있는데,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이 일찍이 유상(遊賞)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지었다. 동쪽에 마암(馬巖) 절벽(絶壁)이 있어 천길을 깎아 세운 듯 하다. 암서(巖西)에는 석대(石臺)가 반회(盤回)하고 기괴(奇怪)한 경치가 형용하기 어려우며, 아래는 맑은 못에 배를 댈 만하고 위에는 수십 인이 앉을 수 있다. 돌 사이에는 비채(菲菜)가 많이 나는데, 전하기는 상락공이 심은 것이라 한다.
망천절벽(輞川絶壁) 풍산현(豊山縣) 남쪽 5리에 있는데, 일명(一名) 마라(碼羅), 또는 마애(麻厓) 라고도 한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 망라담천(網羅潭川)으로 낙강(洛江)이 영호루에서부터 흘러오는 것이다. 냇물의 남쪽에 적벽(赤壁)으로 된 삼봉(三峯)이 있는데 동쪽 것은 준엄(峻嚴)ㆍ단정(端正)하고 서쪽 봉은 위이(逶迤)
27)ㆍ고절(高截)하며, 중간의 한 봉은 작으나 기전(氣全)하여 초립경직(帩立勁直)하여 옥동봉(玉童峯)이라 이름했다. 봉의 서쪽에 간곡(澗谷)이 있고, 골짜기 가운데 정사(精舍) 수칸(數間)이 있는데 곧 박사 이돈(李燉)이 구축하였다. 삼봉(三峯)의 아래에 깊은 못이 있고 백사(白沙)를 금대(襟帶)같이 두르고, 경연(瓊然)히 장림(長林)이 둘렸으며, 그 경치가 기절(奇絶)하다. 융경(隆慶) 무진(戊辰)에 진사(進士) 이숙인(李淑仁), 생원(生員) 권경전(權景詮), 교수(敎授) 이령(李笭) 등이 배를 타고 적벽(赤壁)의 아래에서 유람하는데,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이 바라보고 시(詩)를 주어 말하기를,
추풍(秋風)에 술싣고 취하고 또 취해,
구로(鷗鷺)를 찾아서 청담(淸談)을 즐기네.
서리 맞은 단풍이 비단보다 붉은데,
우후(雨後)의 한파(寒波)가 쪽과 같이 푸르다.
두로(杜老)의 곡강(曲江)이 응당 멀지 않고,
소선(蘇仙)의 적벽(赤壁)에 부끄럽지 않네.
고가(孤歌) 한 가락에 노화(蘆花)가 저물고,
고개 돌려 정행(停行)하니 흥치(興致) 감당 못하네.
라고 하였다.
만력(萬曆) 병오년(丙午年) 여름에 부사(府使) 동포(東浦) 김륵(金玏)이 권기(權紀), 권행가(權幸可), 김집(金潗), 이돈(李燉)과 같이 청성산(靑城山) 아래에 배를 띄워 상락대(上洛臺)에 들러서 망천(輞川)에 유람하였다. 이돈(李燉)이 서(序)를 지어서 그 일을 서술(敍述)하여 말하기를,
옛 사람이 고을 살이를 하는데, 산수(山水) 경치(景致)를 좋아함이 어찌 한가함을 틈타서 자적(自適)할 뿐이겠는가. 대개 임금을 모시고 밝은 조정(朝廷)에서 힘을 다하여 한 세상에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이루고 만백성을 잘 살게 하는 이것이 즐거움인데, 때를 만나지 못하여 도(道)가 원수와 더불어 도모(圖謀)되어 양마(良馬)가 달리지 못하고, 난봉(鸞鳳)이 가시넝쿨에 깃들었으니, 옛날의 나라 다스리는 수완(手腕)이 지금은 세금(稅金) 독촉하는 관리가 되어 회포를 펴지 못하고 마음 속의 포부(抱負)를 소견(消遣)하기 어려워 공무(公務)의 여가(餘暇)에 답답함을 풀자면 등산임수(登山臨水)하여 나라를 걱정하고 시국(時局)에 상(傷)한 회포를 씻을 따름이다. 아아! 강릉(江陵)의 경치(景致)는 구령(九齡)이 그 청광(淸曠)함을 탄생시켰고, 저주(滁州)의 임학(林壑)은 구양수(歐陽修)가 그 수심(邃深)함을 즐겼다. 천년(千年)뒤에 어찌 그 사람을 생각하고 그 놀이를 본 받지 아니할까.
라고 하였다.
금년 여름에 내가 산관(散官)으로 집에 있었더니 하루는 그대의 부름을 받아서 가보니 공사(公事)였다. 그 일을 마치매 그대가 나를 보고 명령하기를 “너가 사는 곳의 기이(奇異)한 경치를 구경하기가 원(願)이나, 다만 공무(公務)가 좀 한가하기만 기다렸더니 지금 과기(瓜期)가 곧 되었으니 지체(遲滯)할 수 없고, 여러분과 곧 반일(半日)이라도 청유(淸遊)하고 싶으나 염려되는 것은 유람하는 일이 민사(民事)에 방해(妨害)될까 하네”라 하였다. 내가 그의 명령을 듣고 그의 뜻을 양해(諒解)하여 일어서 사례하여 말하기를, “백년(百年)을 감추어 발휘(發揮)하지 못한 일, 소동파(蘇東坡)의 놀이 같은 적벽강(赤壁江) 경치를 드러낼까 하였더니, 공의 명령이 마침 미치니 숙원(宿願)을 펼 수 있는데, 구름을 소제(掃除)해 주는 중이 있고, 나루를 건네주는 배가 있어 관청의 힘을 빌리지 아니해도 한번 놀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공(公)이 좋다고 했다. 또 일어나 청한대, “강바람과 산의 달이 성색(聲色)을 당할 수 있고, 학무용음(鶴舞龍吟)은 반드시 악기(樂器)가 있어야 하니, 한둘 광대는 본디 농부(農夫)로는 곤란합니다. 원컨대 갖추어 둘까 하나이다”하니, 공(公)이 허락하였다. 나는 이에 절하고 물러나니 대개 오월십삼일(五月十三日)이었다. 사흘을 지나 공(公)이 수솔(隨率)을 따르지 않게 하고 베옷을 입고 행리(行李)
28)와 차림을 간단히 하며, 피리와 거문고, 북 하나씩 가지고 짧은 돛대를 달고 물을따라 내려오니, 일로(一路)의 경치(景致)와 옛 고적이 모두 돌아보는 사이에 있었다. 영호루(映湖樓) 터에서는 공민왕 어필(御筆)을 생각하고, 석문정사(石門精舍)에서는 선현의 유풍을 생각하며, 상락대(上洛臺)에 올라 정동(征東)장수를 생각하고, 선묘(先墓)에서는 추모(追慕)의 정성을 다했다. 늙고 젊은 백성이 길을 막아 감탄하며 하례(賀禮)하는데, 공(公)은 오히려 겸손(謙遜)하게 맞아 들였다. 강월(江月)이 빛을 흘러 물을 따라 흘러 가는데, 전사(田舍)에 지숙(止宿)하였다. 나흘을 지나 말안장 대신에 배를 탔는데, 이는 백성이 수고할까 염려한 까닭이다. 추탄(秋灘)의 원사(園沙)를 지나서 단구(丹丘)의 고봉(孤峯)에 올라가니, 곧 마라(碼螺)의 상류(上流)이다. 이때 해가 처음 뜨고, 강운(江雲)이 반쯤 걷히며, 여울물 소리와 골바람이 숲을 사이에 두고 끊어졌다 이어지며, 학정부저(鶴汀鳧渚)는 가로 지른 물결에 은현(隱見)하며, 물상(物像)이 맑고 그윽하여 전일(前日)에 본 것과는 달랐다. 공(公)이 돌아보고, “그 뜻을 달리하여 신선(神仙)의 구역(區域)이 여기에 있구나” 하였다. 송삼(松杉)이 성긴 곳에 눈을 돌리니, 절벽(絶壁)이 옥을 깍아지른 듯, 증담(澄潭)이 눈에 드러난 듯, 여러 봉우리가 삼면에 경치를 이루고, 끊어진 숲이 일변(一邊)에 모습을 드러내어 넓은 들ㆍ맑은 모래, 그 경치(景致)와 기상(氣象)은 언어(言語)로 다 형용하지 못하겠다. 빨리 앞으로 달려서 강가에 도달하니, 한 쪽배가 버드나무 언덕 아래에 머물러 있으니, 곧 이른 바, ‘나루를 가로지르는 배'였다. 배에 올라 바람 부는 대로 흐르면서 사방을 돌아보고, 잔을 들어 서로 권하고 뱃전을 두드리면서 도산지곡(陶山之曲)을 읊었다. 그리고 옛 선현(先賢)의 지극한 즐거움을 사모하며, 소동파(蘇東坡)의 부(賦)
29)를 노래하여 옛 사람의 놀이를 생각하니 표표연(飄飄然)하고 호호연(浩浩然)하여 마치 진속(塵俗)을 떠나 신선(神仙)의 세상(世上)에 있는 듯 하였다. 쇠피리를 부니 신선새(鳥)가 춤을 추는 듯, 거문고를 타니 潛龍이 읊조리는 듯, 젊은이와 늙은이가 같이 즐기고, 높고 낮은 이가 같이 즐겨 비록 광악(廣樂)을 함께 아뢴다 하여도 오히려 그 즐거운 마음을 비유할 수가 없었다. 흥치(興致)가 다하여 배를 관어암(觀魚巖)아래에 대자 한 중이 석간(石澗)을 따라 앞서서 인도하니 곧 구름을 쓰는 중이었다. 공(公)이 벽라(碧羅)를 만지면서 창태(蒼苔)를 밟고 송운(松雲) 아래의 초가를 찾으며, 낚시터를 수석(水石)위에 찾아 나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오늘 놀이가 즐거웠느냐?”하였는데, 해는 저물지 않았고 돛대를 돌려 멈추지 아니하였다. 어떤 손(客)이 나에게 묻기를, “공(公)의 즐거움이 지극하나 공(公)의 귀가(歸家)가 급하다”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그대는 주회옹(朱晦翁)
30)의 곡강루기(曲江樓記)를 읽지 않았던가? 한가(閑暇)한 날이면 산수(山水)에 등림(登臨)하여 시(詩)를 짓되, 그 마음은 하루라도 조정(朝廷)에 있지 아니하지 못하고, 급급(汲汲)히 오직 도(道)가 행하지 아니할까 두려워 하였은즉 공(公)의 뜻도 여기에 있지 아니하였는가?”라고 하였다. 손이 말하기를 “그러하다면 곡강(曲江)의 놀이는 회옹(晦翁)의 기(記)에는 그 즐거운 가운데 근심을 들어내었으니 공(公)과 같은 놀이는 한 말로 표현(表現)할 수 없는가? 내가 일찍이 공(公)을 애모(愛慕)하는 마음이 있어서 감히 글 못한다고 사양 못했는데
권행가(權行可) 시(詩)에,
비가 강남(江南)을 지나니 시원하기 가을 같고,
원님이 조용하게 목란배(木蘭舟)를 탔구나.
좋은 때(良辰) 자연을 유연(留連)하여 취하였고,
좋은 경치에 난만(爛漫)하게 노는데 무슨 방해(妨害)가 될까.
적벽(赤壁)에 구름 걷히니 새 병풍이 되었고,
푸른 물결에 바람 움직이니 비단 무늬가 떴다.
도리어 노래 저문날 어룡이 춤추고,
머리 돌리니 뉘아니 흥을 거두지 않을까.
안동명승(安東名勝)은 망천(輞川)을 말하네.
맑은 놀이한 이 날은 소동파(蘇東坡)에 비긴다.
원님 아름다운 풍채(風彩)는 참 순리(循吏)이고,
박사(博士) 풍류(風流)는 정히 소년이다.
계수나무 돛대는 늦게 강물 속에 흔들리고,
옥 퉁소(洞簫)는 조용히 석양가에 하늘거린다.
서생(書生)이 왕마(王馬)의 붓을 잡지 못하니,
어찌 묘사(描寫)하여 좋은 일을 전할까.
라고 하였다.
김륵(金玏)의 시(詩)에,
좋은 경치를 탐승하는 것이 어찌 칠월(七月)의 가을을 기다리랴,
매화(梅花) 시절 따라 배를 띄웠도다.
술 마시는 중에 우연히 시선(詩仙) 이야기를 얻었고,
물상(物像) 밖에서 도리어 복지(福池)를 따라 놀았다.
그윽한 구경은 이미 일천 지경(地境)이 고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높이 읊으니 더욱 일생(一生)이 떠있음을 깨달았다.
산령(山靈)이 뜻 있어서 새로운 태도를 드러내니,
비가 갠뒤 풍연(風煙)이 흩어져 거두지 못한다.
진세(塵世)ㆍ광음(光陰)이 물 흐르듯,
도리어 적벽(赤壁)을 따라 흐르니 참으로 신선(神仙)을 배운다.
꿈에 외로운 학(鶴)이 강야(江夜)를 가로질러 놀랐고,
흥치(興致)는 소동파(蘇東坡)의 부(賦)짓던 해를 쫓아간다.
이 날 풍류(風流)는 우리들에게 있으나,
다른 때 즐거움은 뉘한데 붙일꼬.
확실히 알기는 좋은 일, 알아 줄 사람 없어.
응당 화공(畵工)를 기다려 그림 속에 펼칠까 하노라.
라고 하였다.
수암절벽(水巖絶壁) 풍산현 남쪽 20리 도락천(道樂遷) 서쪽에 있는데, 가장 기절(奇絶)하다. 앞에 나루로 통하는 배가 있다.
빈연석벽(賓淵石壁) 풍산현 남쪽 20리에 있는데, 원지산(遠志山) 북쪽은 천척(千尺)을 두기(斗起)하였다.
고방굴(孤芳窟) 임하현 서남쪽 40리 송제(松蹄) 남쪽에 있는데, 굴하(窟下)에 삼칸(三間) 암자(庵子)가 있다. 선승암(仙勝庵)이라 하며 쇠로써 기둥을 만들었다.
천등굴(天燈窟) 안동부 서쪽 25리 천등산(天燈山)에 있다. 세전(世傳)에 의하면, ‘능인(能仁)이 여기에 거(居)하면서 도를 닦았는데 천등(天燈)이 항상 여기에 달려 있었기에 이렇게 이름했다.’고 한다. 굴 입구에 소암자가 있고, 굴 속에는 능인(能仁) 선사(禪師)가 앉았던 선판(禪板)이 있다. 퇴계시에 말하기를, “부처가 천등산에 내렸단 말 정말 거짓이네” 라고 하였다.
능인굴(能仁窟) 안동부의 서북쪽 30리 학가산(鶴駕山)의 동각(東角)에 있다. 고승이 전하기를, ‘신라 대덕승(大德僧) 능인(能仁)이 인세(人世)를 절연(絶緣)하고 이 굴에 숨었다. 업경승(業經僧)천여명이 부석사에서 찾아 왔으나 끝내 그를 만나보지 못했는데, 떠날 때에 각각 돌을 모아서 탑을 만들었으니 그것을 이름하여 석탑(石塔)이라고 했다’ 한다.
김생굴(金生窟) 청량산(淸凉山) 경일봉(擎日峯)의 제 일층에 있는데, 암석(巖石)이 가장 웅준(雄俊)하고 비폭(飛瀑)을 회호(回護)하고 암상으로부터 흩어져 떨어져서 맑은 날에도 비가 오듯하다. 김생(金生)이 여기서 초서(草書)를 썼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하였다.
주신재(周愼齋)의 시(詩)에,
김생굴(金生窟) 속에서 김생(金生)을 생각하니,
만학천봉(萬壑千峰)은 아직도 그를 생각는 듯.
신필(神筆)은 일찍이 뭇 준초함을 옮겼음을,
오가(吾家)의 서첩(書帖)에서 분명(分明)히 보겠네.
라고 하였다.
승지암(承旨巖) 안동부 동쪽 40리 가탄(嘉灘)아래에 있다. 승지(承旨) 김연(金緣)이 바위 아래에서 놀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명암(鳴巖) 안동부 동쪽 35리 낙수(洛水) 서안(西岸)에 있다. 파도가 쳐서 바위가 울었기 때문에 '명암’이라 한다. 내한(內翰) 배용길(裵龍吉)이 작은 집을 그 위에 지었다.
검암(儉巖) 안동부 동쪽 35리 도목(桃木) 수구(水口)에 있다. 임연대(臨淵臺)가 그 위에 있으며, 퇴계 선생이 쓴 액(額)이 있다. 임연공(臨淵公)이 재(齋)를 지으려고 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아들 내한(內翰) 배용길(裵龍吉)이 초당(草堂)을 세웠는데, 이름을 ‘장육당(藏六堂)’이라 했다.
김극일(金克一) 시에,
물이 희니 문연(文練)이 날고,
산이 푸르니 옥잠(玉簪)이 빼어났네.
고요할 때에 지락(至樂)을 보고,
움직일 때 인심(仁心)을 증험하네.
라고 하였다. 여기에 임연공(臨淵公)의 도촌팔영(桃村八詠)이 있다.
수락암(水落巖) 감천현(甘泉縣) 서쪽 7리에 있다. 찬 물방울이 흩어져 떨어져 대낮에도 눈이 내리는 듯 하다. 곁에 대암(臺巖)이 있다.
백암(栢巖) 내성현(柰城縣) 동쪽 2리에 있다.
입암(立巖) 둘이다. 하나는 풍산현(豊山縣) 남쪽 빈연(賓淵)의 상류(上流)에 있다. 물결 위에 우뚝 솟아 높이가 3ㆍ4장(丈)이나 된다. 하나는 안동부의 서쪽 중봉촌 아래 시냇물 가운데에 있다. 높이가 3ㆍ4장(丈)이나 되고 두 그루의 소나무가 그 위에 있으며, 옆에 석굴이 있는데, 십수인(十數人)을 수용할 만하다.
토곡반석(兎谷盤石) 안동부 서쪽 24리에 있다. 가장 기절(奇絶)하며 도솔원(兜率院)의 계하(溪下)옆에 삼귀석(三龜石)이 계수 중간에 있는데 샘소리가 마치 옥이 구르는 것과 같다.
안막곡조산(安莫谷造山) 셋이다. 하나는 부성(府城) 북문 20보쯤 노동계(路東溪)의 서쪽에 있고, 하나는 석빙고 앞 개울의 서쪽에 있으며, 하나는 북문외(北門外) 북동 3리쯤 석불(石佛)아래 큰길 동쪽에 있다. 이 세 조산(造山)은 북구(北渠) 동구(洞口)의 허함을 막는다고 한다.
성내조산(城內造山) 넷이다. 하나는 관청 앞 공수(公須) 서쪽에 있는데, 사람들을 위하여 아전들이 설치하였다. 하나는 영청앞 큰길 중앙에 있는데, 관을 위하여 노비들이 설치했고, 또 하나는 사창(司倉) 동쪽에 있는데, 백성을 위하여 사람들이 설치하였다. 오른쪽 세 조산(造山)은 완연히 삼태(三台)와 같으며 하나는 사창(司倉) 남쪽 대지(大地)가운데 있는데, 섬과 같으며 상고에는 죄인(罪人)을 정배(定配)하였다고 한다.
삼가조산(三街造山) 성의 서쪽 문외 25보쯤 삼로(三路)가 합치는 곳에 있다.
율곡리조산(栗谷里造山) 동구(洞口)에 있는데, 동구(洞口)가 바로 부기(府基)를 향하는 것을 막는다. 그러나 마을 안에 고총이 있어 둘로써 곽(槨)을 만들었다.
신세리조산(新世里造山) 둘이다. 하나는 영남산 아래 대로 옆에 있고, 하나는 법흥사 아래 개목(犬項) 상두(上頭) 큰길 동쪽 숲 가에 있다.
유림조산(柳林造山) 포(浦) 송항(松項) 두 물줄기 사이에 있다.
존당조산(尊堂造山) 모은루(慕恩樓) 서쪽 언(偃)저리 남쪽에 있다. 안동부의 땅 모양이 행주형(行舟形)인데, ‘여기에 조산(造山)하여 배를 매는 도서(島嶼)를 본뜨고 금철(金鐵)을 묻어서 금기(金氣)를 왕성하게 했다’고 한다. 옛날 한 부관(府官)이 쇠(鐵)를 훔치려고 파냈을 때, 대낮에 날이 어두워지고 풍우가 크게 일어나서 끝내 파내지 못하였다고 한다.
안기조산(安奇造山) 신당(神堂) 앞 영은정(迎恩亭) 서쪽에 있다. 느릅나무와 버들을 심어서 북동(北洞)을 눌렀다.
개목조산(犬項造山) 영춘정(迎春亭) 서쪽 큰길 동쪽에 있다. 입춘일에 헌관을 정해서 동황(東皇)에게 제사를 여기에서 지낸다. 제사 지내는 날 오곡을 담아 그릇을 이 산 위에 놓고서, 어떤 곡식이 싹이 무성하게 나는 가를 보고서 농사가 잘 지어질 것을 점쳤다고 한다.
일직조산(一直造山) 다섯이다. 모두 현 남쪽 2리쯤에 있는데, 그 허함을 눌린다.
풍산조산(豊山造山) 둘이다. 모두 현 남쪽 2리쯤에 있는데 허원(虛遠)한 것을 눌린다.
합강(合江) 포항진(逋項津)과 와부탄(瓦釜灘) 이수(二水)가 합류(合流)하는 곳에 있다. 포항의 근원은 황지(黃池)에서 발원하여 소천(小川), 재산(才山)을 거쳐 흘러서 청량산(淸凉山)아래 가라연(加羅淵)이 되고, 고산(孤山)의 월명담(月明潭)이 되어 도산(陶山)에 이르러서는 또 탁영담(濯纓潭)이 된다. 이것이 또 달려서 여강(廬江)이 되어 포항진에 도달하며, 부기(府基)에는 간좌(艮坐)로부터 와서 곤좌(坤坐)를 향하여 흘러간다. 문경천(聞慶川)이 낙동강의 근원이라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와부(瓦釜)의 근원은 셋이 있다. 그것은 영양땅 일월산에서 나온 것으로 진보현(眞寶縣)과 청부(靑鳧)의 남천을 거쳐서 임하 남지곡에 합류하여 낙연폭포(洛淵瀑布)가 되고, 천전 비리연(飛鯉淵)이 되어 추월천(秋月川)ㆍ금소천(琴召川)과 합류(合流)하여 서쪽으로 송항(松項), 선어연(仙魚淵)이되어 와부탄과 송포(松浦)의 두 물줄기가 교차하는데 이르러 호수가 되었다가 구비틀어 서쪽으로 흐른다. 영호루와 청성산, 망천, 곡강, 명산, 화천, 구담을 거쳐 상주(尙州)에 달하여 낙동강이 된다.
독천(禿川) 둘이다. 하나는 부의 남쪽 20리에 있다. 그 근원은 의성현(義城縣)에서 나와서 정산(鼎山) 북쪽으로 흘러 남목천(南沐川)이 되고 또 서쪽으로 흘러 진묘천(陳杳川)이 되어 청성산 아래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군수(郡守) 이고(李股)가 정사(精舍)를 그 위에 짓고 ‘독천정사(禿川精舍)’라고 편(扁)하였다. 하나는 길안(吉安), 즉 금소천(琴召川)의 상류(上流)에 있다.
사천(沙川) 부의 서쪽 15리에 있다. 그 근원은 둘인데, 하나는 영천(榮川)군계에서 나오고 하나는 예안현계 우두촌(牛頭村) 남쪽에서 합하여 청성산 동쪽 낙강(洛江)으로 들어간다.
다추월천(多秋月川) 임하현 서쪽 5리에 있다. 그 근원은 보현산(普賢山)에서 나와 안덕현을 지나서 서쪽으로 굽어 흘러 금소천(琴召川)이 되고 다추월천(多秋月川)을 거쳐 비리연(飛鯉淵) 하류로 들어간다.
망진천(亡津川) 임하현 동쪽 7리에 있다. 속전(俗傳)에, 고려 권신 염흥방(廉興邦)의 별장이 박곡(朴谷) 있었는데, 길들인 올빼미를 날려보내 내려앉는 곳에는 ‘내 올빼미가 잡은 곳이다.’하여 밭을 빼앗았다 하니 그의 탐학함이 이와 같았다. 염흥방이 쫓겨나자 가산(家産)은 적몰되고 노복들은 이 망진천(亡津川)에서 죽음을 당했기에 ‘망진(亡津)’이라 했으나 지금은 망천(輞川)으로 고쳤다.
지원천(枝院川) 임하현 남쪽 50리에 있다. 청송부 서쪽 노어산(老於山)에서 발원하여 지원(枝院)과 신한천(神漢川)을 거쳐 합류하여 낙연(落淵)이 되었다.
도목천(桃木川) 임하현 북쪽 황지 하류에 있다. 임연재 배삼익이 그 상류에 살았으며, 백담 구봉령이 ‘도맥(道脈)’이라 이름하고 이에 시를 써서 말하기를, “활수가 양양한 도맥천(道脈川)이요, 근원을 찾아들면 응당 퇴계로 들어간다.” 라고 했다. 배삼익은 ‘도맥’이라 이름하기 미안해서 ‘도목(桃木)’으로 고쳤다.
사교천(沙橋川) 일직현 남쪽 1리에 있다.
학천(鶴川) 일직현 동쪽 2리 곧 구미천 하류에 있다.
구미천(龜尾川) 일직현 동쪽 10리 구미촌 앞 독천(禿川) 상류에 있다.
유천(柳川) 풍산현 남쪽, 즉 망천 하류에 있다.
창풍천(昌豊川) 풍산현 북쪽, 고산(孤山)을 지나고 남류하여 현을 둘러 서쪽으로 곡강(曲江)에 들어간다.
곡강(曲江) 풍산현 남쪽, 곧 망천 하류에 있다.
신천(新川) 감천현 서쪽 5리에 있다. 근원이 소백산 남쪽 물줄기 현 앞쪽의 물과 합하여 예천의 사천(沙川)으로 들어간다.
환수정천(環水亭川) 내성현에 있다. 그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문수산(文殊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백병산(白屛山)에서 나오는데 천광대(天光臺) 아래서 합류하여 현앞을 지나 서남쪽으로 흘러 영천현(榮川縣) 군계로 들어간다.
춘양현북천(春陽縣北川) 소천부곡에 있다. 그 근원은 넷인데, 하나는 황지에서 나오고, 하나는 금대산에서 나온다. 하나는 본적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천두에서 나오는데, 넷 물이 합류하여 산을 뚫고 남류하여 낙원(洛源)이 된다.
선어연(仙魚淵) 안동부 동쪽 10리 소을마촌 서촌 송항(松項) 아래에 있다. 백장 심연이 교룡의 굴택(窟宅)이 되고 그 위에 용단(龍壇)이 있으며 날이 가물면 비오기를 빈다.
용혈연(龍穴淵) 임하현 남쪽 15리에 있다. 일명 낙연(落淵)이라고 하며 지촌천(枝村川)과 신한천(神漢川)이 합류하는 하류에 있다. 양협이 서로 맞닿아 중간에 뾰족한 봉이 있으며, 석벽이 중단되어 폭포가 그 사이에 걸렸다. 깊이를 알 수 없으며, 매양 보리가 영글 때 작은 고기가 폭포를 따라 오르려고 하여 비약함이 눈과 같다. 옥병이 두르고 마을이 그윽하여 절경이 아닌 곳이 없다.
종연(鍾淵) 풍산현 남쪽 15리 화산의 서쪽 빈연의 아래 죽연의 상류에 있다. 북쪽에는 반석이 있고 40여인이 앉을 수 있으며, 속명 ‘구도암’(求道巖)이라 한다.
견항진(犬項津) 부의 동쪽 물야탄(勿也灘) 하류에 있다. 혹은 포항(浦項)이라고도 한다.
와부탄(瓦釜灘) 부의 동남쪽 3리에 있다. 상세한 것은 합강(合江) 아래를 보라.
물야탄(勿也灘) 부 동쪽 10리 요촌탄(蓼村灘) 하류에 있다.
요촌탄(蓼村灘) 부 동쪽 40리 예안현 부진(浮津) 하류에 있다.
막곡탄(幕谷灘) 부 서쪽 15리 용산(龍山) 아래에 있다. 송암 권호문이 망운탄(輞雲灘)이라고 불렀다.
이현탄(梨峴灘) 부 서쪽 15리 상계곡(上桂谷)동쪽에 있다. 일명 이화탄(梨花灘)이라 한다.
추탄(楸灘) 부 남쪽 20리 남양담(南陽潭) 아래에 있다.
원두포(園頭逋) 부 서쪽 25리 건지산(蹇芝山) 아래에 있다. 김방경(金方慶)의 채원 뒤에 판서 권예(權輗)가 여기에 정자를 지었다.
마산포(馬山浦) 풍산현 남쪽 30리, 이좌도(二座島) 아래에 있다. 동서로 30리를 바라볼 수 있다.
승선용추(勝仙龍湫) 임하현 서쪽 승선사(勝仙寺) 아래에 있다. 비폭이 절벽에 걸려 달린 고드름 줄기가 백척이다. 떨어져서 삼담(三潭)을 이루니 그 깊이를 알 수가 없다. 사산(四山)에 벽처럼 둘러쳐 인공의 흔적이 없다. 옛 늙은이가 전하기를, ‘신물(信物)이 사는 곳’이라 한다.
거무역용추(居無斁龍湫) 둘이다. 모두 길안현 남쪽 15리에 있다. 상용추(上龍湫)는 금학산(琴鶴山)으로부터 나와서 양협간을 흘러 용추를 이루었다. 협간은 겨우 한 자(尺)을 용납할 뿐이고 그 깊이를 알지 못한다. 그 아래에 맑은 연못이 있는데,
직강 이봉춘(李逢春)이 지은 시에,
학 같이 낡은 세 그루 나무,
용은 백 길 못에 서리었네.
단풍은 비단 같이 아름답고,
물은 푸르기가 쪽과 같아라.
붓을 휘둘러 좋은 시구 남기고,
술 두루미 열어서는 즐거이 담소하네.
이름을 이곳에 남기고자 한다면,
이끼 낀 바위를 쓸어야 하리.
라고 하였다.
하용추(下龍湫)는 자초산에서 나와 북쪽으로 7리 쯤 흘러 용추가 된다. 반석 위에 만휴정(晩休亭)이 있는데, 즉 보백당 김계행(金係行)의 만년 휴식의 장소이다. 스스로 제해서 말하기를
“나의 집에 보물이 없나니, 보물은 다만 청백 뿐이다.”
라고 하였다.
약봉(藥峯) 김극일(金克一)의 시에,
산은 열리고 샘물은 흘러 발이 옛처럼 걸렸는데,
솔은 높고 돌은 늙어 그림같이 새롭게 열렸네.
친구가 은근하게 부르지 않았다면,
청교에 어찌 단풍을 밟고 돌아왔으리.
산골물이 나를 일깨우니,
오늘 아침에 석문(石門)을 두드렸네.
바람 솔솔 부니 봄은 저물고,
구름은 두둥실 나그네는 술 취하네.
벼랑에 떨어지는 샘소리 낼앵하고,
바위 틈에 활짝 핀 꽃향기 그윽해라.
만일 조물옹이 굴레 벗지 않았다면,
빼어난 이 경치 만나지 못했으리,
라고 하였다.
직곡용혈(直谷龍穴) 안동부 북쪽 얼전계(乻田溪)의 하류(下流) 영천(榮川)의 경계에 있다. 석벽이 중간에 터져서 폭포가 그 사이에 쏟아지고, 상하가 못이 되었다. 속세에서 말하기를, ‘용의 두미(頭眉)가 감추어진 곳’이라고 말한다. 돌 구멍이 마롱(磨礱)과 같이 밝고 윤기가 난다.
무릉도(武陵島) 임하현 북쪽 15리 상촌(上村)의 서쪽 낙동강의 중앙에 있다. 구봉령 시에, “두 물이 합하여 저(渚)가 되었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무릉도(武陵島)라 하네.”라고 하였다.
구담(九潭) 풍산현 남쪽 10리 화산의 북쪽 곡강(曲江) 서쪽에 있다. 오어(烏魚),이(鯉), 즉(鯽)등의 고기가 많다.
이계(伊溪) 안동부 북쪽 15리 이화촌에 있다. 남으로 흘러 가수천(嘉水川)이 되고 또 동남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주계(周溪)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 근원이 소현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10리쯤 흐르다가 합류하여 옹천으로 와서 이송천(二松川)이 된다.
대계(大溪) 부의 북쪽 30리 대동촌(大洞村)에 있다. 예안 오천(烏川)에서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장사(長沙) 부동 6리 사저(沙渚)에 있다. 빛나는 그 색깔이 눈과 같다.
백지퇴(白地堆) 풍산현 북쪽 5리 방담(方潭)의 서쪽에 있다. 현에서 예천으로 가다가 5리쯤에 기둥이 서있다.
만운계(晩雲溪) 풍산현 서쪽 5리에 있다. 그 근원은 셋인데, 하나는 현공산(縣空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오적산(五赤山)에서 나오며, 하나는 직곡산(稷谷山)에서 나오는데, 동남이 합류하여 만운리를 지나서 방담이 되고, 유림천(柳林川)이 되었다.
용정(龍井) 부 동쪽 용정사(龍井寺)의 대하(臺下)에 있다. 낙동강과 맥이 통해 낙수가 창일하면 우물물도 불어나고, 날씨가 가물어 그 우물을 파면 비가 온다.
마당정(馬堂井) 부 서쪽 25리 대두솔(大兜率)의 동쪽에 있다. 속전에, ‘옛날에 용마가 우물에서 나왔다’ 한다. 또 ‘한 관리가 여기에 살다가 이 용마를 타고 경주관아(慶州官衙)에 조회하고 돌아왔는데 그 관리가 죽자 용마가 도로 우물에 들어갔다’고 한다. 가물때 기도하면 이 에 응해서 물이 불어나고, 우물의 반 쯤에 엷은 돌이 가로 막혀 있고 중간에 구멍이 있어 백척장승(百尺長繩)을 드리워도 오히려 그 바닥에 닿지 못한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선어연(仙魚淵)과 통맥(通脈)이 되어 낙동강이 불어나면 이 우물도 문득 누런 탁수(濁水)가 된다’고 한다.
서현정(西峴井) 서현촌 인가옆에 있다. 근처에 불결한 물건이 있으면, 혼탁해지기도 하고 혹은 물이 마르기도 하다가 기도를 하면 맑아진다. 그래서 이것을 ‘영천(靈泉)’이라 한다. 예안현의 앞 비암(鼻巖)의 강(江)이 불어나서 혼탁(混濁)해지면 이 샘도 또한 혼탁해지며, 강이 맑아지면 이 샘도 또한 맑아진다.
거곡초정(迲谷椒井) 임하현 동쪽 30리 동산현(東山峴)아래에 있다.
거물산초정(巨岉山椒井) 풍산현 서쪽 15리에 있다.
금산초정(金山椒井) 풍산현 금산리(金山里)의 앞 큰 들 옆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