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의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서울 건천동(지금의 중구 인현동 부근)에서 출생하였다.
임진왜란 때 삼도수군통제사로서 거북선을 건조하여
옥포, 당포, 당항포, 한산도 앞바다와
부산, 명량, 고금도 등의 해전에서 왜선 수백 척과 왜병 수만 명을 무찔렀으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왜군의 유탄에 맞아
관음포에서 선조 31년(1598) 12월 16일(양력) 54세를 일기로 전사하였다.
그러나 충무공의 유언에 따라 그의 조카 완이 공의 운명을 숨기고
대신 진두지휘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공의 서거를 발표하였다.
장군의 묘는 최후 진지인 고금도에 모셨다가
이듬해 아산시 금성산으로 모셨으며
광해군 6년(1614)에 현충사에서 9㎞ 떨어진 음봉면 어라산 현 위치로 이장하였다.
충무공 묘는 충남 아산시 음봉면 고룡산로 12-38에 소재하며, 사적 제1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도비
충무공 묘역 입구에 신도비 2기가 세워져 있다.
우측의 보호각 안에 충무공 이순신의 신도비가 있고
좌측은 충무공의 5대손 충민공 이봉상의 신도비이다.
충무공 이순신 신도비
충무공 사후 거의 100년이 지난 조선 숙종 19년(1693)에 비로소 건립되었다.
조선 효종 때 이순신 장군의 외손 홍우기가 김육에게 청하여
신도비문을 받아 신도비 건립을 시작하였고 이순신 장군의 증손 이관진이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한 뒤 숙종 19년(1693) 신도비 건립이 완성되었다.
높이 365cm인 신도비는 효종 때 영의정 김육이 짓고, 문인이자 글씨에 능한 오준이 썼다.
거북 형상의 받침돌과 용을 조각한 머릿돌을 얹은 신도비는 고려 이전 시대의 양식이다.
받침돌 귀부의 거북이 머리는 정면을 바라보지 않고 좌측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웃고 있는 듯한 얼굴 표정이 상당히 해학적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만져서인지 코가 유난히 까맣다.
두 마리 용이 서로 엉켜 바라보고 있는 머릿돌 이수의 형상은 매우 세련되고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충민공 이봉상 신도비
충민공 이봉상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5 세손으로, 조선 숙종 2년(1676)에 출생하였다.
경종이 즉위한 1720년 포도대장과 훈련원도정을 지내고
이듬해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에 이어
경종 4년(1724) 총융사(摠戎使)가 되었으며,
같은 해 영조가 즉위하자 한성부 우윤 및 훈련대장을 역임하였다.
이때 이광좌, 조태억 등의 죄상을 논박하였다가 정미환국으로 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이봉상은 어영대장에서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좌천되었다.
영조 4년(1728)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켜 청주를 함락시키고
당시 충청병사인 이봉상에게 투항을 요구하였으나
이봉상은 충무가(忠武家)의 충의(忠義)를 내세워 끝내 굽히지 않고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
좌찬성으로 추증되고, 충민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비석 상단에 충신 충청도 병마절도사 증이라고 전자로 새겨진 신도비는 영조 22년(1746)에 세워졌으며,
비문은 이재가 짓고 민우수가 썼으며, 전자(篆字)는 유척기가 썼다.
상석(床石) 받침에 기와지붕을 얹은 신도비는 전형적인 조선 시대 양식이다.
선영
신도비 뒤로 덕수 이 씨 선영이 자리하고 있다.
올라가 보면 묘역이 반듯하고 자못 웅장하여 이곳에 이순신 장군의 묘가 있을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충무공 묘소는 이곳에 있지 않고 우측 길로 가야 나타난다.
홍살문
홍살문 좌측 솔밭 안에 덕수 이 씨 선영이 자리하고 있다.
초석 위에 두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기둥 사이 위에는 보를 연결한 뒤
그 위에 화살 모양의 뾰족한 나무를 나란히 박았으며
가운데는 삼지창으로 처리하고 중앙에 태극 문양을 달았다.
못
묘소로 오르는 길 우측에 못을 조성하여 잠시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어제 이순신 신도비
조선 정조 18년(1794) 임금이 친히 비명을 지어 세운 어제 이순신 신도비이다.
기둥처럼 높은 초석 위에 기둥을 세우고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심포 겹처마 팔작지붕의 비각은
가운데 문을 설치한 정면 중앙 칸을 제외하고 모든 초석과 초석 사이는 화방벽을 설치하였고,
초석 위의 기둥 사이에는 벽 대신 홍살(붉은 화살)을 설치하였다.
이 비각은 온양 행궁에 1795년 건립한 영괴대비(靈槐臺碑) 비각과 유사한 형식이다.
비 꼭대기에 상충정무지비(尙忠旌武之碑, 충의를 드높이고 무용을 드러내는 비)
여섯 글자가 전서체로 새겨져 있다.
정조는 역대 어느 임금보다도 이순신 장군을 추모하는 정이 깊었던 군주로
이 비문에 "우리 장하신 선조께서 나라를 다시 일으킨 공로를 세우심에 기초가 된 것은
오직 충무 한 분의 힘 바로 그것에 의함이라 이제 충무공에게
특별히 비명을 짓지 아니하고 누구 비명을 쓴다 하랴"라고 그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 비는 정조가 이순신 장군에게 최고직인 영의정을 증직 한 후인 1794년에 완성되었다.
풍수지리에 따라 묘소 동남쪽 아래에 신도비를 세웠는데 왕릉에 세운 신도비가 모두 그 규칙을 따른다.
이순신 장군 묘
이순신 장군과 부인 상주 방 씨가 합장된 묘는
둥근 봉분 형태이며, 봉분 아래에 화강석 9개로 호석을 둘렀다.
봉분 좌우에 야구공 크기의 석봉 1쌍이 놓여 있고,
주위에는 곡장(담장)을 둘렀으며, 봉분 좌측 아래 즉 동남쪽에 2기의 묘비가 서 있다.
좌측은 이순신의 5대손 이봉상이 청하여 이이명이 짓고 1720년에 세운 것이고,
우측은 순국 400주년인 1998년 이순신 후손이 세운 석비로 강영훈 국무총리가 글씨를 썼다.
봉분 앞에 길고 편평한 장대석인 계체석을 깔아 층을 만들어 자연스럽게 봉분 주변을 높였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이 놓여 있지만 그 앞에 놓인 상석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상석 앞에 향로석이 놓여있다.
상석 좌우에 동자석 1쌍이 협시하고, 그 뒤에 석봉이 좌우 1쌍 놓여있다.
뒤로 망주석과 석양 및 문인석이 각 한 쌍씩 배치되었고, 중앙에 장명등 하나가 불을 밝히고 있다.
호석
호석을 살펴보면 봉분의 정중앙에 ‘향 내 병 외정(向內丙外丁)’이라고 크기가 작은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 말은 봉분을 중심으로 시계 방향으로 글씨를 새겼다는 의미이다.
유명 수군도독 조선국 증영의정 덕풍부원군 행삼도통제사
시충무 덕수이공지묘 정경부인 상주 방 씨 부좌
(有明水軍都督朝鮮國贈領議政德豐府院君行三道統制使諡忠武德水李公之墓貞敬夫人尙州方氏祔左)
명나라 수군도독에 속한 조선국 영의정을 추증받은 덕풍부원군이자
삼도통제사이며 시호가 충무인 덕수 이공의 묘에 정경부인 상주 방 씨가 합장됨
부좌란 부부를 합장할 때 아내를 남편의 왼쪽에 묻는 것을 뜻한다.
유명수군도독을 굳이 쓴 이유는 당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듯하다.
사진에서 봉분 좌우에 석봉이 1쌍 놓여 있고, 봉분 앞 바닥에 놓인 석물이 혼유석이고 큰 석물이 상석이다.
봉분 뒤의 곡장(담장)은 현충사 성역화사업과 관련하여 묘역을 정비하면서 1975년에 설치한 것이다.
묘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사후에 선무공신 1등에 책록 되고 덕풍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좌의정으로 증직 되었다.
그리고 이순신의 5대손 이봉상이 이이명에게 청하여 비문을 짓고 1720년에 새로 건립한 묘비이다.
증 효충장의 적의협력 선무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 영 경연사 덕풍부원군 행 정헌대부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충청전라경상삼도수군통제사 시충무 이공순신지묘, 정경부인 상주방 씨 부좌
(贈效忠杖義迪毅協力宣武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 經筵事德豐府院君行正憲大夫全羅左道水軍節度使兼忠淸全羅慶尙三道水軍統制使 諡忠武 李公舜臣之墓, 貞敬夫人 尙州方氏 祔左)
석봉
곡장(담장) 아래 장대석으로 조성된 계체석 밑에 야구공 같은 석봉이 놓여있다.
묘소에는 모두 4개의 석봉이 놓여있다.
동자석
무덤 양옆에 서서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고 그 터를 지키는 지신(地神)을 의미한다.
석양
석양을 받침돌 위에 세우고 앞다리와 뒷다리 사이의 공간은 석재를 파내지 않고 편평하게 다듬었으며,
뿔은 귀의 둘레를 감싸듯 동그랗게 말려 있다.
문인상
묘를 옹위하는 수호자 역할을 하는 상징적인 석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