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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손님 쉼터 스크랩 소수서원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
소윤당 추천 0 조회 22 14.09.03 09:0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소수서원                 紹修書院

 

 

 

 

 

 

 

소수서원의 원래 이름은 ' 백운동서원(白雲洞 書院) '이다. 1542년 풍기군수(豊基郡守)로 재임하던 주세붕(周世鵬)이 이곳 백운동(白雲洞)에 고려 말의 유학자 안향(安珦)의 위패를 봉안하면서 서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듬해 학사(學舍)를 건립하고 백운동 서원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우리 역사상 최초(最初)의 서원이다.

 

 

 

 

 

 

 

 

주세붕(周世鵬)은 경상도 칠원(漆原) 사람으로 정치와 유학 그리고 시(詩)에 능한 인물이었다. 1522년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 홍문관, 성균관 등에서 근무하며 교학(敎學)의 진흥에 힘썼다. 1541년 풍기군수(豊基郡守)로 부임하여 5년 동안 선정(善政)을 베풀어 그의 이름은 훌륭한 목민관(牧民官)이 대명사가 되었다. 부임 이듬해인 1542년 주세붕은 숙수사(숙수사)의 옛터인 백운동(白雲洞)에 성리학(性理學)의 선구자인 ' 회헌 안향 (晦軒 安珦) ' 을 기리는 회헌사(晦軒사)을 세웠다. 

 

 

다음 해인 1543년 주세붕은 주자(朱子)의 백록동학규(白鹿洞學規)를 본받아 사당(祠堂)을 서원(書院)으로 확장하고 그 이름을 '백운동서원'이라고 불렀다. 1548년에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 풍기군수(豊基郡守)로 부임하였으며, 백운동 서원에 대한 다음과 같은 시(詩)를 남겼다.

 

 

 

 

小白南墟古順興        소백산 남쪽 폐허가 된 옛 고을 순흥 땅   /   竹溪寒瀉白雲層        죽계 차가운 물 흘러내리고 흰 구름 피어나네   /   生材衛道功何遠        인재를 길러 도를 지키니 그 공적 얼마나 대단한가   /   立廟尊賢事匪曾        사당을 세워 선현을 존중함은 일찍이 없었던 일   /    景仰自多來俊碩        흠모하고 우러러 여러 곳에서 뛰어난 인물들이 몰려오니   /   藏修非爲慕寒騰        학문을 배우는 것은 벼슬길을 흠모해서가 아니라네   /   古人不見心猶見        옛 사람들을 보지는 못하나 마음으로 볼 수 있고   /    月照方塘冷欲氷        네모난 연못에 비치는 달 차기가 얼음 같구나

 

  

 

퇴계 이황(退溪 李滉)은 명종(明宗) 임금에게 상소를 올렸고, 1550년 소수(紹修)라는 현판을 하사받았다. 이렇게 해서 백운동서원은 소수서원(紹修書院)이 되었고, 서적, 토지 노비를 하사 받았다. 여기서 소수(紹修)라는 명칭은 당시 대제학(大提學)이던 신광한(申光漢)이 임금에게 올린 ' 기폐지학소이수지(旣廢之學紹而修之) '에서 따왔다.

 

 

이것은 ' 이미 학문이 피폐해 졌으니 이어서 닦을 수 있게 하라 '라는 의미이다. 즉 .. 이곳 순흥(順興)에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순흥부사(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이 단종복위운동과 관련되어, 이곳 순흥(順興)은 폐읍(廢邑)되고 순흥향교(順興鄕校) 역시 폐쇄되었었는데, 이미 폐지된 학교를 다시 세워 유학을 잇게 하겠다는 의미이다.   

 

 

 

 

                                                  학자수                         學者樹

 

 

 

 학교는 언제나 이 땅 이 나라의 희망이다. 옛 사람들에게도 학교가 내일의 희망을 일궈가는 자리었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선현(先賢)들은 학교를 짓고 맨 먼저 주변에 나무를 심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에 그런 학교 숲의 원형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솔숲 가운데 하나이다.   

 

 

 

 

 

 

 

소수서원 입구, 서원 경내로 들어가는 길에 낙랑장송(落落長松 .. 가지가 길게 늘어진 키가 큰 소나무)이 길게 늘어서 있다. 300년에서 길게는 천년의 세월을 간직한 소나무 수백 그루가 마치 소수서원(紹修書院)을 향하여 경배(敬拜)하듯 군락을 지어있다. 이곳 소나무는 겉과 속이 모두 붉은 적송(赤松)으로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광륭사 미륵보살 반가사유상도 이 적송(赤松)으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소수서원 솔숲에는 오래 전부터 '학자수(學者樹)'라는 별명으로 불려 온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소수서원(紹修書院) 설립 초기에 경내에 심은 1,00여 그루의 소나무 중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현재까지 남아 있는 소나무들이다. '학자수(學者樹)'라는 이름은 처음에 나무를 심을 때부터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세붕(周世鵬)은 허물어진 숙수사(宿水寺) 터를 지나다가 언덕 아래로 개울이 흐르는 이곳의 풍광(風光)에 마음이 기울어 서원을 세울 자리로 점찍었다. 맞은편 연화봉(蓮花峰) 기슭에 늘 흰 구름이 머물고 있어서 '백운동(白雲洞)'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1년여에 걸친 공사 끝에 서원은 완공되엇으나 주세붕(周世鵬)의 눈에는 평지(平地)인 서원 터의 기운이 약하게 보였다. 땅의 기운을 보완하기 위하여 그가 선택한 방법은 나무를 심는 일이었다. 기왕에 심을 나무라면 이곳에서 배움의 길을 닦아 나갈 유생(儒生)들의 표상이 될 소나무가 좋겠다고 생각한 그는 좋은 소나무를 구해 서원 곳곳에 심었다. 어떠한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학문의 뜻을 굽히지 않는 선비의 절개를 상징하기 위한 나무로 소나무가 제일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숙수사지                      宿水寺址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자리하고 있는 소수서원(紹修書院) 입구에는 서원에는 어울리지 않는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서 있다. 즉, 숙수사(宿水寺)라는 통일신라시대의 절이 조선시대에 폐사된 뒤, 이 절터에 우리나라 최초(最初)의 서원이자,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지어졌기 때문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창건(創建)된 숙수사(宿水寺)는 ' 속세선연 조계산수 (俗世善緣 曺溪山水) '라는 불교 용어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그 의미는 ' 세세토록 좋은 인연으로 가르침을 쌓는다는 뜻과 감로수(甘露水)를 지칭하는 동시에 화엄종찰(華嚴宗刹) '이라는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숙수사 유물                      

 

 

 

 

숙수사의 폐사 원인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이견(異見)이 있지만, 소수서원경내에 남아 있는 각종 유물 그리고 주초석(柱礎石)의 크기로 미루어 융성했던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경주 황룡사(皇龍寺)와 그 규모가 같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숙수사(宿水寺)는 고려 말 문인 '노여'의 시(詩)등에 언급된 바 있으며, 현재 소수서원 입구에 당간지주 1기가 있고, 출토된 다수의 금동불상과 건축부재로 사용된 석재 등은 소수서원 경내 및 소수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현재 소수서원이 자리하고 있는 곳에서는 여러가지의 출토유물이 발견되었다. 1953년 소수서원(紹修書院)의 뒷편에 신설되는 소수중학교(紹修中學校) 건립 공사 중에 발견되었는데, 현재 이곳에는 당간지주와 불상대좌 및 광배(光背) 등의 유물이 소수서원 경내에 남겨져 있어 이곳이 숙수사(宿水寺)의 옛터이었음을 웅변하고 있다.  

 

 

 

 

 

                                                    숙수사의 폐사                  

 

 

 

 

세조(世祖) 3년인 1457년 10월, 단종(端宗) 복위를 위한 거사(擧事)가 이곳 순흥(順興)에서 있었는데, 그 단종복위운동이 실패하자 그 본거지이었던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가 토벌군인 관군(官軍)에 떼죽음을 당한 일이 있었다. 이른바 정축지변(丁丑之變)이다. 이로 인한 관군(官軍)의 방화(放火)로 숙수사는 폐허기 되었고, 후일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周世鵬)이 그 자리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 훗날 소수서원)을 세웠다는 것이다. 주모자로 지목받던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 등을 기리는 제단(祭壇)인 금성단(錦城壇)이 소수서원 입구 맞은 편 근처에 있으니 그럴듯한 추정이다. 

 

 

그러나 다른 추정도 있다. 1231년(고려 고종 18)부터 40여 년간 계속된 고려에 대한 몽골의 침입으로 숙수사(宿水寺)가 폐사되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의 근거는 1953년 인근에서 출토된 25구(軀)의 불상들이 지름 60cm, 높이 75cm를 넘는 큰 항아리에 넣어져 묻혀 있던 것을 발견하였는데,

이 불상(佛像)들이 6세기에서 8세기 정도의 시기에 조성된 불상들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불상들은 국립대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큰 항아리에 묻는다는 것은 피란(避亂)을 전제로 하는데, 단종복위운동은 한동안 몸을 숨긴다고 수습될 수 있는 사안은 아닐 것이다. 큰 항아리에 묻혀 있는 숙수사의 유물들 ... 난리를 만나 서둘러 불상을 땅 속에 파묻은 스님들의 긴박한 움직임이 눈에 보이는 듯 선하다.   

 

 

 

 

                                        당간지주                     幢竿支柱

 

 

 

 

 

 

 

 

 

 

 

당간지주(幢竿支朱)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사찰 앞에 설치하였던 건축물로서, 그 주변 지역이 사찰이라는 신성(神聖)한 영역임을 표시하는 역할을 하였다. 돌로 조성한 것이 일반적이지만, 철(철), 금동(金銅), 나무로도 만들었다.

 

 

두 개의 기둥을 60 ~ 100cm 간격으로 양쪽에 세우고 마주보는 안쪽 면에 간(竿)을 설치하기 위한 간구(竿口)나 간공(竿孔)을 두고 아래에는 간대(竿臺)나 기단부를 설치하였다. 간구(竿口)는 반드시 안쪽 상단부에 있으며, 그 아래의 간공은 구멍의 수가 일정하지 않다. 이러한 시원(始源) 형식은 시대에 따른 변화가 없으며, 각 면에 장식된 문양과 지주(支柱)의 치석(治石) 수법만이 시대적 특징을 보일 뿐이다.   

 

 

 

 

 

 

 

 

 

 

 

이곳 당간지주는 보물 제59호로 지정되어 있다. 높이는 3.65m, 한 변의 길이는 0.53m의 규모이다. 두 개의 지주(支柱)가 59cm의 간격을 두고 동서(東西)로 마주 서 있다. 안쪽 면은 조각이 없으나 바깥쪽 면은 중앙에 능선(稜線)의 종대(縱帶)를 조각하였다. 정상에서 1.17m, 밑에서 2.34m까지의 사이는 전면적으로 음각(陰刻)되어 마치 넓은 홈을 판 것과 같이 보이며, 전후의 양 측면에는 너비 7cm의 외연선(外緣線) 무늬를 돌리고 그 중앙에는 다시 세로로 능선(稜線)을 조각하였다. 바깥쪽의 상부는 정부(頂部)에서부터 둥글게 경사졌으며, 중간에 1단의 굴곡을 두었다.

 

 

당간을 고정시키는 간(竿)은 정상부의 안쪽 면에 직사각형의  홈을 파서 설치하였다. 지주(支柱)와 당간을 받치는 지대석(地臺石)은 지면이 깎여나가 없어졌으나, 지주 양쪽에 장대석(長大石) 한 개씩이 놓여 있고, 이 장대석의 일면에 원호(圓弧)의 받침이 조출(彫出)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지대석의 일부로 추정하고 있다. 이 당간지주는 지주의 높이에 비하여 전체적으로 가늘고 길게 가공되었고, 각 면의 조각도 세련된 수법으로 단아하게 새겨져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수작(秀作)으로 평가받고 있다.    

 

 

 

 

 

                                    소수서원                          紹修書院

 

 

 

 

 

 

 

 

 

 

 

 

서원(書院)이란 조선 중기 이후 명현(名賢)을 제사하고 인재를 키우기 위하여 전국 곳곳에 세운 사설(私設) 교육기관인데, 서원(書院)이라는 명칭은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 궁중에 있던 서적(書籍)의 편수처(編修處)이던 ' 여정전서원(麗正殿書院)' 그리고 집현전서원(集賢殿書院)에서 유래한 것인데, 송(宋)나라 때 지방의 사숙(私塾)에 조정(朝廷)에서 서원(書院)이라는 명칭을 부여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그리하여 수양(首陽), 석고(石鼓), 악록(嶽麓), 백록동(白鹿洞) 등의 4대 서원이 생겼으며, 특히 주자(朱子)가 강론을 하던 '백록동서원'은 매우 유명하였다.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서원이 도입되었는데, 선현(先賢)과 향현(鄕賢)을 제향(祭享)하는 사우(祠宇)와 청소년을 교육하는 서재(書齋)를 아울러 갖추게 되었는데, 고려시대로부터 조선 초기까지 서재(書齋), 서당(書堂), 정사(精舍), 선현사(先賢祠), 향현사(鄕賢祠) 등과 문익점(文益漸)을 제사하는 도천서원(道川書院)이141년(태종 원년) 단성(丹城)에, 김굉필(金宏弼)을 제사하는 천곡서원(川谷書院)이 성주(星州)에, 김구(金坵)를 제사하는 도동서원(道東書院)이 1534년 부안(扶安)에 각각 세워졌으나, 모두 사(祠)와 재(齋)의 기능을 겸비하고 있는 서원(書院)은 아니었는데,  

 

 

 

 

 

                                     백운동서원                      白雲洞書院

 

 

 

 

세종(世宗) 때 설립되었다는 기록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나라 최초(最初)로 국학제도를 본떠 선현(先賢)을 제사지내고, 유생(儒生)을 교육한 서원으로 알려져 있다.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周世鵬)이 풍기지방의 교화(敎化)를 위하여,이곳 출신 유학자이며 고려 유교의 중흥자인 안향(安珦)을 배향하기 위한 사묘(祠廟)를 설립하였다. 그 후 중종(中宗) 38년인 1543년 유생(儒生) 교육을 겸비한 ' 운동서원(白雲洞書院)' 설립한 것이 시초이다.

 

 

주세붕(周世鵬)은 이곳 서원(書院)에 자주 와서, 유생(儒生)과 더불어 토론을 벌이는 등 정성을 기울였고, 그 결과 이곳 서원 유생(儒生)들이 4~5년만에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사람들이 ' 입원자편급제 (入院者便及第) '라고 부를 정도이었다.

 

 

이후 1546년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한 안현(安玹)은, 유생(儒生)의 정원을 10명으로 정하고, 고양절차(供養節次), 서원의 재정(財政), 경리(經理)관계를 규정한 '사문입의(斯文立義)'를 만들어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고, 운영정책을 보완하였다. 백운동서원은 약 30마지기의 토지와 18명의 노비(奴婢) 그리고 4명의 원직(院直) 등을 소유함으로써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 시기에는 서원이 사묘(祠廟)의 부속된 기관으로 인식되고 있었으며, 유생(儒生)들의 독서를 위한 건물로 그리고 과거(科擧)공부 위주의 학교로 알려져 있었다.      

 

 

 

 

 

                                      퇴계 이황                   退溪 李晃

 

 

 

 

 

 그 후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이 '백운동 서원'을 보고 중국의 백록동(白麓洞) 고사(古事)처럼 조정에서 사액(賜額)과 전토(田土)를 주도록 건의함에 따라, 명종(明宗)은 1550년 이를 권장하는 의미에서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고 친필(親筆)로 쓴 액(額)과 서적을 하사하고 학전(學田), 노비(奴婢)를 급부하면서 이들 토지와 노비에 대한 면세(免稅), 면역(免役)의 특권을 내려 이것이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되었다. 

 

 

당시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퇴계'는 과거(科擧)를 위한 독서보다는 수기(修己)와 강명도학(講明道學) 위주로 변화를 꾀하였다. 특히 '이퇴계'는 을사사화(乙巳史禍)를 겪은 뒤 관료로서 왕을 보필하고 경륜을 펴기보다는 학문의 연구와 교화(敎化), 특히 후진의 양성을 통하여 학파(學派)를 형성함으로써 향촌(鄕村) 사회를 교화하고, 나아가 장래의 정치를 이끌 인재를 확보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당시 붕괴된 교학(敎學)을 진흥하고, 사풍(士風)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서원의 진흥이 시급하다고 주장하면서 중국의 예에 따라 사액(賜額)을 건의하면서 국가의 지원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후 서원의 설치는 전국에 미쳐 명종(明宗) 이전에 설립된 것이 29개, 선조(宣祖) 때는 124개소에 이르렀고, 당쟁이 극심하였던 숙종(肅宗) 때 설치된 것만 300여 개소에 이르러 1도(道)에 80~90개의 서원이 세워졌으며, 국가 공인(公認)의 절차인 사액(賜額)의 청원에 따라 사액을 내린 서원도 늘어나 숙종(肅宗) 때만 해도 130여 개소에 이르렀다.  

 

 

 

 

 

 

                                        사액서원                    賜額書院

 

 

 

 

 

풍기군수이던 이황(李滉)이 당시의 붕괴된 교학(敎學)을 진흥하고 사풍(士風)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서원의 보급이 시급하다고 주장, 주세붕(周世鵬)이 1543년에 설립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 대해 송(宋)나라의 예(例)에 따라 사액(賜額)과 국가의 지원을 요청하였다.이에 1550년 명종(明宗)은 '소수서원'이라는 현판과 사서오경, 성리대전 등의 서적을 하사하였는데, 이것이 '사액서원'의 시초이며, 이후 서원이 국가의 공인(公認)을 받아 발전하고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액서원에 대한 경제적 지원 .. 1550년 사액서원에 서적, 토지, 노비 등을 하사하는 법규를 마련하였다. 서적은 사서오경, 성리대전 등 서원 교육에 필요한 것이고, 토지는 3결(結 ... 3결에 한하여 지급되었다는 의견과 3결에 한하여 면세되었다는 의견이 있다), 노비(奴婢)는 노(奴)와 비(婢) 각 1명씩 지급하였다. 그러나 초기 백운동서원의 노비가 18명이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지방관과 유지들의 후원으로 대개 이를 초과하였으며, 각종 현물의 조달과 제공도 성행하였다. 

 

 

서원의 토지(土地)는 공식, 비공식으로 면세전(免稅田)으로 취급되어 국가의 재정을 침식하였고, 노비도 마찬가지이었다. 노비는 군역(軍役)의 면제에 악용되었다. 이에 사액서원에 대해 3결 이상의 토지를 점유하는 것을 금지하는 명령이 내려지기도 했으며, 노비(奴婢)의 수를 7명으로 제한하기도 했다. 원생(院生)의 수(數)도 처음에는 백운동서원의 예에 따라 10명 정도이었으나, 이후 각종 역(役)을 피하기 위해 원생으로 등록하는 경우가 많아지자 20명으로 제한하기도 했다.     

 

 

 

 

 

 

 

 

 

 

 

이후 서원의 건립이 활발해져 중종 때부터 명종 때까지 30개의 서원이 설립되었는데, 그 중 4개의 서원이 사액(賜額)을 받았고, 서원의 설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선조(宣祖) 때부터 숙종(肅宗) 때까지는 577개의 서원이 새로 생기고 그 가운데 100개의 서원이 사액(賜額)을 받게 되었다. 

 

 

 

 

                                                      서원의 폐해

 

 

 

 

이렇게 서원이 증가한 것에는 여러 원인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당쟁(黨爭)이 격화되면서 자파(自派) 정치세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원은 학연(學緣), 지연(地緣)을 근거로 형성된 각 붕당 세력에 자파의 학문적 우월성과 정치력을 파급시킬 수 있는 매개체로서 필수불가결한 공간이었다. 한편 종법제(宗法制), 가부장제(家父長制)의 발달에 따른 가문의식(家門意識)의 성장도 이 시기의 서원 증가(增加)에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자기 문중(門中)의 인물을 추배(追配)하는 것은 문중의 권위를 세우는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동족간의 족적인 유대, 결속력을 강화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서원이 늘어나고 그 폐단이 심해지자 1695년(숙종 21)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한 대현(大賢)을 제외하고는 지방관의 연대책임 하에 서원의 첩설(疊設)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폐단이 그치지 않아 문묘(文廟)에 종사한 대현(大賢)이라도 그 서원이 19개를 초과하면 첩설(疊設)하는 것을 금지하였고, 1714년에는 종사의 유현(儒賢)이라 해도 첩설(疊設)을 금지하고 사액(賜額)을 허가하지 않을 것을 선포했다. 

 

 

이후 서원의 남설(濫設)이 줄어들어 경종 때부터 고종(高宗) 초까지는 42개의 서원이 새로 설립되고 37개의 서원이 새로 사액(賜額)되었을 뿐이다. 서원의 정비책도 계속되어 1727년에는 1714년 금령(禁令) 이후 첩설(疊設)된 서원을 철폐하게 되었고, 다음 해부터는 사액을 허가하지 않았다. 1868년 (고종 5)에는 '흥선대원군'의 명령에 의하여 비사액서원이 철폐되었고, 1870년에는 사액서원도 자손이 이를 주관하여 붕당(朋黨)을 만들고 백성을 해치는 일이 많다고 하여 철폐하였으며, 1871년에는 첩설(疊設)된 서원을 모두 철폐하여 전국에 47개만 남게 되었다.         

 

 

 

 

                                                       서원의 구조

 

 

소수서원 문성공묘(文成公廟) 서쪽에는 강학당(講學堂)이 자리하고 있다. 강학당은 유생들이 모여서 강의를 듣던 곳이다. 배흘림 기둥을 세운 건물 사방으로 툇마루를 빙 둘러 놓으 전청후실(前廳後室)의 양식이다. 강의실에서 공부하던 유생(儒生)이 밖으로 나갈 때 스승에게 등을 보이지 않고 뒷걸음을 쳐서 물러나도록 만든 구조인 것이다.

 

 

 

 

 

 

위와 같이 서원(書院)에는 흥학양사(興學養士), 즉 학교 기능의 강학당 그리고 존현제향(尊賢祭享), 즉 제사 기능의 사당이 있다. 소수서원의 강학당(講學堂)과 사당(祠堂)의 배치는 조금 특이하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서원은 전학후묘(前學後廟)라고 해서 학교를 앞에 세우고 사당을 뒤에 두는 중국식을 따르고 있지만, 소수서원의 동쪽에 학교,서쪽에 사당을 두고 있는 동학서묘(東學西廟)의 배치구도를 지니고 있다.  소수서원은 초기 서원의 구조이므로, 그 후 서원의 엄격한 규범성이 아직 확립되지는 않았다.  

 

 

 

 

 

                                       죽계천                         竹溪川

 

 

 

 

 

 

 

 

 

 

 

소수서원을 감싸며 흐르고 있는 죽계천(竹溪川)이다. 소백산을 발원지로 하는 이곳 '죽계천'은 낙동강 원류(源流) 중의 하나이다. 세조(世祖) 3년인 1457년 10월, 단종복위를 위한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자, 그 본거지이었던 이곳 순흥(順興)의 백성들과 선비들은 토벌군에 의하여 몰살 당한다. 세 살 이상의 백성들은 모두 죽이라는 세조(世祖)의 지시가 있었다고 한다. 그 시신(屍身)들이 죽계천에 수장(水葬)되었고, 그 핏물이 20리 밖 안정면 동촌리까지 흘러가 그 동네를 지금도 '피끝마을'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이른바 정축지변(丁丑之變)이다. 이러한 피비린내 나는 역사도 있지만, 옛 선현들은 죽계천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 이곳 소수서원에 배향되고 있는 안축(安軸)의 '죽계별곡(竹溪別曲)'이 유명하다.   

 

 

 

 

 

 

 

 

 

 

 

죽계별곡(竹溪別曲)을 지은 안축(安軸)은 고려 말의 문인이다. 자는 당지(當之), 호는 근재(謹齋),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현리(縣吏)를 지낸 석(碩)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아버지 대까지 대대로 순흥(順興)에서 향리(鄕吏)를 지내다가, 그에 이르러 과거를 통해 중앙정계로 진출한 전형적인 신흥사대부이다. 그가 죽은 지 2백여 년 뒤인 조선 중종 39년인 1544년, 당시 풍기군수로 있던 주세붕(周世鵬)이 안축(安軸)을 소수서원에 추향(追享)하였다.  

 

 

 

 

 

                                        죽계별곡                     竹溪別曲

 

 

 

 

고려 충숙왕 때 안축(安軸)이 지은 경기체가(景幾體歌)이다. 전체 5장으로 이루어졌으며, '근재집(謹齋集)' 권2와 '죽계지(竹溪誌)'에 수록되어 있다. 작품의 배경이 되고 있는 '죽계(竹溪)'는 지금의 경상북도 풍기군에 있는 시내 이름이며, 풍기(豊基)의 옛 지명인 순흥(順興)은 안축(安軸)의 관향(貫鄕)인 동시에 고향이다.

 

 

 

 

 

 

 

 

 

 

 

 

 

 

 

 

 

 

 

 

 

 

 

 

 

 

 

 

 

 

 

이 작품은 안축(安軸)의 고향인 풍기(豊基) 죽계(竹溪)의 경치를 읊은 것으로서, 제1장은 죽계의 지역적 위치와 경관을, 제2장은 누(樓), 대(臺), 정자(亭子) 위에서 기녀(妓女)들과 유흥(遊興)하는 모습을, 제3장은 향교(鄕校)에서 공자(孔子)를 따르는 무리들이 봄에는 경서(經書)를 외우고, 여름에는 현(絃)을 뜯는 모습을, 제4장은 천리(千里) 밖에서 그리워하는 모습을, 제5장은 성대(聖代)를 중흥하여 태평을 길이 즐기는 모습을 각각 노래함으로써 고려 신흥사대부(新興士大夫)의 의욕에 넘치는 생활감정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의 내용은 죽계지방의 풍경을 노래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좀더 깊은 의미에서는 향리(鄕吏) 계층의 신흥사대부의 왕성한 의욕과 자기 과시 그리고 유락(遊樂), 학습 상사 등으로 나열된 유학자들의 태평성대의 향유 의지를 표현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즉, 자연의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유교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것이 주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취한대                          翠寒臺

 

 

 

몇 그루 노송(老松)이 멋진 정경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반드시 물이 필요하다. 주변 경관 역시 뛰어나다. 바람과 물, 송림(松林)이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태를 만들어 내는 곳, 바로 누정(樓亭)을 짓는데 꼭 필요한 요건이다.

 

 

소수서원 입구를 들어서 송림(松林) 사이를 지나는 길, 깊은 호흡을 한다. 솔향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물소리 나는 곳으로 다가가 건너다 보면, 시내 건너 노송 몇 그루와 함께 어우러진 정자가 보인다. 취한대(翠寒臺), 1550년, 당시 풍기군수이던 '퇴계 이황'이 처음으로 지은 정자이다. 이 아름다운 곳에 정자를 짓고 소수서원 원생들이 시(詩)를 지으면서 청운의 꿈을 키우도록 한 곳이다.    

 

 

 

 

 

 

 

 

 

 

 

 

취한대(翠寒臺)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 이름을 붙인 정자(亭子)로, 푸를 취(翠)와 찰 한(寒)자를 쓴다. 송취한계(松翠寒溪)에서 한 자씩 차용한 것으로 '소나무는 푸르고, 시내는 차다 '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소수서원에서 발행한 자료에 의하면, ' 푸른 연화산의 산기운과 죽계의 시원한 물빛 '을 뜻한다고 써 놓았다. 이 이야기가 더 운치있는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죽계천 이쪽의 서원에서는 공부를 통해 머리와 가슴을 뜨겁게 하고, 저쪽의 취한대에서는 풍류를 통해 머리와 가슴을 식혔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대 최고의 유학자인 '퇴계 이황'은 이곳 소수서원을 자주 찾아와 후학을 가르쳤다. 특히 '이황'은 죽계수(竹溪水)라고 부르는 서원 앞 개울 건너편 오솔길을 산책하는 것을 무척 즐겼다. 그가 특별히 좋아하던 자리인 이곳을 퇴계는 손수 "취한대(翠寒臺)라고 이름붙이고 주위에 21그루의 소나무심었다고 한다. 그 많은 나무들이 지금은 모두 죽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 가운데 두 그루는 고사목(枯死木)으로 남아 있다. 

 

 

 

 

 

 

 

 

하얗게 말라죽은 이황의 고사목(枯死木)은 서원 경내로 들어서는 대문 앞의 경렴정(景濂亭)에서 훤히 바라다 보인다. 이황이 쓴 '백운동'과 주세붕(周世鵬)이 쓴 '경'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남아 있어 '敬자바위'라고 부르는 큰 바위 바로 옆이다. 여러 그루의 침엽수들이 늘어선 가운데에 허옇게 말라 죽은 두 그루의 나무가 바로 '이황'의 소나무 고사목이다.   

 

 

 

 

                                                      경(敬)자 바위

 

 

 

 

소수서원 입구에는 죽계수(竹溪水)가 흐르고 있어 그 운치를 돋우고 있다. 죽계수는 멀리 '초암계곡'에서 발원한 계곡으로 주위로 바위가 병품처럼 펼쳐져 있으며, 울창한 노송(老松) 숲이 어우러져 절경을 빚고 있다. 경렴정(景濂亭)에서 이 경치를 바라보면 경(敬)과 백운동(白雲洞)이라는글씨가 음각(陰刻)된 바위가 있다.

 

 

 

 

 

 

 

 

 

주세붕(周世鵬)은 '백운동서원'을 창건한 후 이 바위에 ' 경(敬)'자를 새기고  ' 오! 회헌(晦軒)선생을 선사(先師)로 경모하여 서원을 세우고 후학(後學)들에게 선사의 학리를 수계(受繼)하고자 하나 세월이 흐르게 되면 건물이 허물어져 없어지더라도 '경(敬)'자만은 후세에 길이 전하여 회헌(晦軒) 선생을 선사로 경모하였음을 전하게 되리라 '고 하였다고 한다. 즉, 서원에서 학문을 공부하는 생원(生員), 진사(進士)들이 늘 보고 마음에 새기라는 주세붕의 의도일 것이다.

 

 

경(敬)은 성리학에서 '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여 흐트러짐이 없다는 주일무적(主一無適) '의 의미로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수양론(修養論)의 핵심이 되는 선비들의 지침이며 성인(成人)이 되어 가는 지름길과 같아 효경(孝經)과 맹자(孟子)에서는 공경(恭敬)의 뜻으로, 논어(論語)에서는 삼가 근신(謹身)하는 의미로 풀이하고 있다.

 

 

또한 경(敬)은 ' 敬以直內 義以方外'를 '경'자 한 글자로 나타낸 것으로 ' 경(敬)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義)로써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바르게 한다 '는 뜻으로 그 글자를 보면서 선비로서의 행동을 바로잡자는 의미이다. '敬'자 위에 흰 글자로 씌어진 '白雲洞'이라는 글씨는 퇴계 이황이 새긴것으로 전해 온다. 그 뜻은 당연히 소수서원의 옛 이름인 '백운동서원'을 가리키는 것이다.  

 

   

 

 

 

 

 

 

 

 

소수서원앞에 죽계수(竹溪水)가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그 천변(川邊)에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으며, 그 밑에 깊은 소(沼)가 있다. 이 소(沼)는 별다른 이름이 없이 '백운동소(白雲洞沼)'라고 불리어지고 있다. 여기에는 '경자바위'와 어우러져 역사적 사실과는 관계없이, 또는 확인되지 않은 채 여러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경(敬)자 바위에 얽힌 전설

 

 

 

 

주세붕(周世鵬)이 숙수사(宿水寺)를 헐어내고 서원을 건립하던 당시, 숙수사에 있던 불상(佛像)들을 모두 이 바위 아래 소(沼)에 던져버렸다. 그러자 한(恨)이 맺힌 불상들이 밤이 되면 소(沼)로 첨벙거리며 뛰어롤라 사람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다. 이를 전해들은 주세붕이 소(沼) 위의 바위에 '敬'자를 음각(陰刻)하였더니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경(敬)은 주자철학의 근본으로 공경(恭敬)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 이로써 불상(佛像)들의 한(恨)이 위로받았기 때문이다 라고 하는 전설이 그 하나이다. 

 

 

또 다른 전설은 ... 이 소수서원 터에 숙수사(宿水寺)라는 거찰(巨刹)이 있어 인근뿐 만 아니라 먼곳에서 수많은 참배자들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 불행하게도 1457년(세조 3), 이곳 순흥(順興)에서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의사(義士)들이 추진하던 단종복위운동이 탄로나면서, 당시 세조가 보낸 관군(官軍)들에 의하여 '순흥도호부'가 혁파되었다. 

 

 

숙수사도 불타버리고, 백운담소에는 그 당시 희생된 의사(義士)들의 시신이 많이 수장(水葬)되었으며, 의사(義士)들의 시신에서 흘러나온 피가 죽계(竹溪)를 타고, 10여 리를 흘러 멎은곳을 직므도 '피끝마을'로 부리어지고 있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되려 죽임을 당한 의사(義四)들의 넋이 밤만되면 울기를 90년 뒤인 소수서원 창건 후까지 이어졌다. 주세붕이 돌에 유교이념인 '敬'을 음각하고, 그 원혼을 위로하고자 붉은 글씨로 덧칠한 후로는 혼령들의 울음이 그치고 편히 잠들게 되었다고 한다.    

 

 

 

 

 

                                       경렴정                       景濂亭

 

 

 

 

 

 

 

 

 

 

연화봉(蓮花峰)을 마주 대하고 취한대(翠寒臺)를 굽어 보면서 서원 밖에 세워져 있다. 시냇물 소리가 들리고, 아래에는 맑은 못이 있다. 바위에 새겨진 ' 경(敬) '자가 담심(潭心)에 어려, 난간에 기대어 감상하노라면 숙연히 공경하는 마음이 일게 하고 그윽이 소쇄(瀟灑)한 정취에 잠기게 한다.  

 

 

 

 

 

 

 

 

소수서원 입구의 오른쪽에 있는 이 경렴정(景濂亭)은 유생(儒生)들이 자연을 벗삼아 시(詩)를 지으면서 휴식을 취하였던 정자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 중의 하나이다. 서원의 밖에 위치하여, 서원의 일정한 규칙이 없었던 초기의 배치형식이다. 1543년 주세붕(周世鵬)이 처음으로 건립하였으며, 현판의 글씨는 퇴계(退溪)의 제자이며, 초서(草書)의 대가인 황기로(黃耆老)가 썼다.

 

 

 

 

 

 

 

 

 

 

 

 

                                         강학당                    講學堂

 

 

 

 

 

보물 제140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강학당(講學堂)은 학문을 강론하던 장소로, 이곳 소수서원을 건립한 주세붕(周世鵬)이 군학사(群鶴舍)를 옮겨온 것이다. 전체적으로 큰 대청을 형성하고, 방(房)은 한쪽에만 있다. 대청 북편에는 명종(明宗)의 친필인 '소수서원(紹修書院)' 편액이 걸려 있다. 서원의 양대 기능 중 학문을 강론하던 건물로, 이 강당에서 길러낸 원생에 약 4천명에 달하여, 대부분 '퇴계 이항'의 문하생이 망라되어 있더 유서 깊은 곳이다. 건물도 잘 보존되어 있어, 조선시대 건축사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장대석(長大石)의 높은 기단(基壇)을 쌓아 그 위에 자연석을 다듬은 초석(礎石)을 놓았으며,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겹처마로서 웅장하면서도 고색(古色)이 잘 간직되어 있다. 사방 둘레에 너비 1m 정도의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툇마루 가장자리는 높이 6.5cm, 높이 8.5cm의 턱을 두었고, 기단 네 모서리에는 추녀를 받는 활주(活柱)를 설치하였다.

 

 

정면 4칸 중 좌측 3칸은 마루이며 우측 1칸에는 방 두 개를 마련하였다. 기단 3면에 계단을 설치하였으며, 굴뚝은 마루 밑에 조그마한 구멍을 뚫어 처리하였다. 기중 윗몸에서 앙서 하나를 내어 기둥 위에 놓인 주두(柱頭)와 결구시킨 초익공 구조를 이루고 있다. 가구(架構)는 5량으로 대들보 앞뒤의 평주 위에 걸고, 이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를 받치고, 종보 위에는 파련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건물은 남북(南北)으로 길게 동향(東向)하고 있으며, 서원 입구에서 바로 강학당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남쪽 기단에 계단을 설치하였다. 정문을 면하여 '백운동(白雲洞)' 현판이 걸려 있다. 강학당 북쪽에 있는 일신재(日新齋)와 직방재(直方齋)는원장, 교수 및 유사(有司)의 집무실 겸 숙소인데, 동서재(東西齋)가 독립되어 있지 않고 양재(兩齋)가 한 동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건물이다.   

 

 

 

 

 

 

 

 

 

 

 

 

 

 

                                        문성공묘                    文成公廟  

 

 

 

 

 

 

 

 

 

보물 제1402호 지정되어 있다. 우리나라 성리학(性理學)의 시조인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을 주향(主享)으로, 안축(安軸), 안보(安輔), 주세붕(周世鵬)을 배향하고 있다. 1542년(중종 37)에 건립되었다. 명호를 사(祠)가 아닌 묘(廟)로 지칭하는 몇 안 되는 사당 중의 하나로, 이곳 문성공묘의 격(格)을 짐작할 수 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초익공식 맞배지붕집으로, 양측 박공에는 풍판(風板)을 달았다. 건물 왼쪽과 뒷편에 장대석(長大石)으로 축대를 쌓았으며, 전면에 툇간을 두었다. 장대석(長大石) 낮은 기단 위에 둥근 주춧돌을 놓고 배흘림기둥을 세웠다. 기둥머리 부분에는 주두(柱頭) 아래에 도리 쪽으로 첨차를 두고 보 방향으로는 쇠서를 내고 안쪽으로 보아지 모양을 하여 툇간의 보(湺)를 받쳤다. 가구(架構)는 2고주(高柱) 오량(五樑)으로 대들보를 전면 고주(高柱)와 후면 평주(平柱) 위에 걸고, 첨차로 짜인 동자기둥을 놓아 종보를 받치고 그 위에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쳤다. 내부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고, 창호(窓戶)는 전면에 매 칸 쌍여닫이 세살문을 설치하였다. 지붕에는 모로단청을 올려 품위 있어 보이는 건물이다.    

 

 

 

 

 

 

 

 

 

현판 글씨는 중국 명(明)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썼다. 사방에 흙담을 둘러 다른 공간과의 위계(位階)를 구분하고 정면에 일각문, 오른쪽에 협문(夾門)을 두었다. 매년 3월과 9월에 제향을 올린다. 주세붕(周世鵬)이 직접 쓴 제향의식과 절차를 기록한 '홀기문서(笏記文書)'가 전하고 있다. 현존하는 초상화 가운데 가장 오래 되었다고 전하며, 국보 제11호로 지정된  안향(安珦)의 초상화, 그리고 안향(安珦)이 원(元)나라에서 가져 왔다는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坐圖 .. 보물 제 485호)가 안치되어 있다.

 

 

  

 

 

 

 

 

 

사당(祠堂)에는 묘(廟)와 사(祠)가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대부분의 사당이 '사(祠)'라 칭하고 있으며, 조정 내에서 많은논의를 통하여 모든 대신들의 동의가 있고, 이를 임금이 인정한 특정한 사당만을 묘(廟)라 칭하고 있다. 그 예를 들면 조선 역대 임금들을 모신 종묘(宗廟)가 있고, 성균관에는 공자(孔子)를 모신 문묘(文廟 ... 공자의 존칭인 대성지성문성왕묘의 줄임말)가 있다.

 

 

 

 

 

                                          전사청                     典祠廳

 

 

 

 

 

 

 

 

 

전사청(典祠廳)은 문성공묘(文成公廟) 뒤쪽에 남향으로 자리하며, 제상용 그릇 등을 보관해 두던 곳이다. 건물의 규모는 전면 3칸, 측면 1칸이며 두 칸은 마루로, 나머지 한 칸은 방으로 되어 있다. 그 위치는 문성공묘에 가장 가까이에 있어 '춘추향사'에 집사들이 제물(祭物)을 장만하고 사용할 제기(祭器)를 보관하는데 편리하게 지어졌다.   

 

 

 

 

 

                             일신재. 직방재                         日新齋. 直方齋

 

 

 

 

 

소수서원 강학(講學) 공간인 강학당(講學堂) 뒷편에 자리잡고 있는 일신재(日新齋)와 직방재(直方齋)는 안동지역 유지들의 저택 사랑채와 비슷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두 개의 건물이 붙어있어 하나의 건물로 보인다. 일신재와 직방재는 소수서원 창건 이후 263년이 지난 1805년에 건축되었으며, 전형적인 다른 서원의 동서재(東西齋)에 해당하는 건무리다.  

 

 

 

 

 

 

 

 

 

 

 

서쪽의 직방재(直方齋)는 소수서원의 원장(院長), 동쪽의 일신재(日新齋)는 교수들의 숙소이다. 그 중간방은 제임(諸任) 또는 유사(有司), 즉 소수서원을 운영하는 행정요원들의 방이다. '대학(大學)'에서 '일신(日新)'을, 주역(周易)에서 '직방(直方)'을 인용하여 이름을 지었다. 즉, 선비는 학문을 통해 직방으로 속(人格)과 겉(品行)이 익어야 참선비(선달 ..先達)가 되고, 겉만익다가 말면 건방(乾方)이 들어 결국 건달(乾達)이라는 실패자가 된다.  

 

 

원래 하나의 건물을  둘로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학문의 단계에 따라 일신재와 직방재로 나누고 있다. 동쪽 구석에 위치한 지락재(至樂齋)와 학구재(學求齋)에 비해서 축대도 높고, 건물 자체도 격식있게 꾸며 놓고 있다. 소수서원의 건물배치는 하학상달(下學上達), 즉 학문의 차례와 단계를 뜻하며, 날마다 새롭게 한다는 일신재(日新齋), 그리고 깨어 있어 마음을 곧게 한다는 직방재(直方齋), 이 '직방재'에 이르면 학문을 크게 이루게 되므로 비로소 명륜당이라 불리는 강학당(講學堂)에 들어 세상의 이치를 밝히게 된다고 하였다.  

 

 

 

 

 

 

 

 

 

 

 

 

 

 

 

직방재(直方齋)는 건물이 자리한 방향의 우측에 있는 두 칸을 말하며 '주역(周易)'의 ' 깨어 있음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바른 도리로써 행동을 가지런히 한다 ( 敬以直內 義以方外 ) '는 말에서 각각 '직(直)'과 '방(方)'자를 취했다. 일신재(日新齋)는 직방재 좌측에 있는 두 칸을 말하며 '일신(日新)'은 ' 인격도야가 나날이 새로워지라. (日日新又日新 )라는 의미로 '대학(大學)'에서 이름을 인용하였다.

 

 

건물구성은 중앙의 우물마루 두 칸과 양쪽 협실 각각 두 칸으로 정면 여섯 칸, 측면 한 칸 반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툇마루가 조성되어 있다. 한편 직방재와 일신재는 강학당(講學堂)의 뒷편으로 두 칸 정도 물러 있으면서 마루와 방의 높이도 강학당(강學堂)보다 한 단(段) 낮게 하였는데, 이는 사람이 거처하는 숙소를 선현(先賢)들의 학문을 숭상하는 강학당보다 낮추고자 해서이다. 선인들은 단순히 배움에 앞서 삶 속에서 선현들의 학문을 얼마나 공경했는가를 알 수 있다.  

 

  

 

 

                                             장서각                  藏書閣

 

 

 

 

일반적으로 서원(書院)의 장서각(藏書閣)은 강학공간(講學空間)에 부속되는 주요건물로서 선현(先賢)들의 문집 등을 판각한 목판(木版)을 보관하는 곳이며, 목판(木版)을 제작할 재정적인 능력이 있는 규모가 큰 서원(書院)은 장판각(藏版閣)을 별도로 두기도 하였다. 대개 장서각의 구조는 습기(濕機)를 방지하기 위하여 바닥은 땅에서 떨어트려 마루의 형태를 취하고 환기구(換氣具)나 '살창'을 설치하고 있다.   

 

 

 

 

 

 

 

 

 

장서각(藏書閣), 오늘날의 대학도서관이다. 임금이 하사(下賜)한 어제본(御製本)을 비롯하여 약 3천여 권의 장서(藏書)를 보관하던 곳이다. 서적은 '좌우지선(座右之先)'의 예에 따라 으뜸자리에 둔다고 하여, 스승의 숙소(宿所)보다 오른쪽에 배치하였다. 이 건물은 1543년에 주세붕(周世鵬)이 건립하였다. 

 

장서각(藏書閣)의 위치는 '좌우지선(座右之先) '의 예를 따라 서책(書冊)은 으뜸자리에 둔다고 하여 스승이숙소인 '직방재(直方齋)'의 오르쪽에 자리하고 있다. 이 또한 서쪽을 높게 여기는 우리나라 고유 사상인 ' 이서위상(以西爲上) '의 한 표현으로 선현(先賢)들의 가르침을 간직한 책(冊)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학구재. 지락재                       學求齋. 至樂齋 

 

 

 

 

 

 

 

 

 

 

 

 

 

학구재(學求齋)와 지락재(至樂齋)는 유생(儒生)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던 곳으로, 스승의 처소인 직방재(直方齋), 일신재(日新齋)의 동북쪽에 'ㄱ'자로 배치되었다. 학구재(學求齋)란  ' 학문을 구한다 '는 뜻으로 일명 동몽재(童蒙齋)라고도 하며, 지락재(至樂齋)는 ' 배움의 깊이를 더하면 즐거움에이른다 '는 뜻으로 앙고재(仰高齋)라고도 한다. 

 

 

건물의 형태를 살펴 보면 중앙의우물마루 좌우(左右)로 각각 온돌방 한 칸을 두고 있는 '학구재'와는 달리 지락재(至樂齋)는 한 칸의 온돌방 외에 나머지 두 칸은 우물마루로 처리하여 외부공간과 마주하도록 개방하였다.

 

 

유생(儒生)들이 학문에 정진하는 공간인 학구재와 지락재는 온돌방과 온돌방 사이에 진리(眞理)의 숫자인 ' 3 '을 상징하여 둘 다 3칸으로 꾸며졌으며, 건물 입면 역시 배움을 장려하기 위한 의도로 '공부(工夫)'의 '工'자 형태로 되어 있다.  또한 학구재와 지락재는 스승의 거처인 직방재, 일신재보다 한자(一尺) 낮게 뒷물림하여 지어졌는데, 이는 '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 '는 윤리의식이 건축구도로 형상화된 것이다. 건물배치에서부터 예(禮)를 염두에 둔 선인(先人)의 인간적인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이 구도를 마주하게 되면 ' 글선생은 만나기 쉬워도 사람 만드는 스승은 드물다 .. 經師易遇 人師難逢 '는 말이 무색해진다.    

 

 

 

 

 

 

 

 

 

 

 

 

 

 

 

                                          영정각                      影幀閣 

 

 

 

 

영정각(影幀閣)은 소수서원 내 중요한 영정을 봉안하기 위하여 1975년 신축한 목조건축물이다. 건물의 위치는 장서각(藏書閣)과 직방재(直方齋)의 후면에 있으며 규모는 전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며 모로단청을 하고 있다.

 

 

 

 

 

 

 

 

 

이 영정각(影幀閣)은 국보 제 111호로 지정되어 있는 '회헌 안향(晦軒 安珦)'의 영정과 보물 제717호로 지정되어 있는 주세붕(周世鵬)의 영정 그리고 회암 주희, 문충공 오리 이원익, 문익공 한음 이덕형, 문정공 미수 허목, 등의 영정 5점을 봉안하고 있다. 현재 원본은 소수박물관 수장고로 옮겨 보관하고 영정각에는 대신 복사본을 전시하고 있다.

 

 

 

 

 

                                      회헌 영정                       晦軒影幀

 

 

 

 

고려 충숙왕(忠肅王)이 안향(安珦)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궁중에서 일하던 원(元)나라 화가에게 그리게 한 것으로, 반신상(半身像)이며 30도 각도의 좌측상이다. 본래 순흥향교(順興鄕校)에 안치해오다가 1457년 순흥부사(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이 금성대군(錦城大君)의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어, 부(府)가 폐지되자 한양의 안씨종가(安氏宗家)에 옮겨졌다가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세워지자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우리나라 영정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국보(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 중기의 문신인 '회헌 안향(晦軒 安珦)'의 초상화로 가로 29cm, 세로 37cm의 반신상(半身像)이다. 안향(安珦)은 고려 원종 1년(126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하였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원(元)나라에 다녀오면서 주자학(朱子學)을 우리나라에 보급한 인물로 우리나라 최초(最初)의 '주자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림의 화면은 상하로 2등분 되어 위에는 글이 쓰여 있고, 아래에는 안향의 인물상이 그려져 있다.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왼쪽을 바라보며 붉은 선으로 얼굴의 윤곽을 나타내었다. 옷주름은 선(線)을 이용하여 명암(明暗)이 없이 간략하게 처리하였다. 시선(視線)의 방향과 어깨선에서 안향의 강직한 인상이 보여지고 있다.

 

 

소수서원에 있는 이 초상화는 안향(安珦)이 세상을 떠난지 12년 후인 고려 충숙왕 5년(1318), 공자(孔子)의 사당에 그의 초상화를 함께 봉안할 때 1본(本)을 더 그려 흥주향교(興州鄕校)에 모셨다가, 조선중기 '백운동서원'이 건립되면서 이곳에 옮겨 놓은 것이다.이 초상화는 현재 전해지는 우리나라 초상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초상화로, 고려시대 초상화 화풍(畵風)을 알 수 있어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귀중한 작품이다.   

 

 

 

 

                                    주세붕 영정                   周世鵬 影幀

 

 

 

 

 

 

 

 

 

보물 제717호로 지정되어 있다. 주세붕(周世鵬)의 좌안팔분면(左顔八分面) 반신상(半身像)이며, 그 크기는 가로 62.5cm, 세로 134cm의 크기이다. 사모관대(紗帽官帶)의 정장 관복(官服)을 입은 모습을 그렸다.

 

 

화면 위에는 여백을 두고 아래로 인물의 상반신을 크게 배치하였는데, 왼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견본채색화(견本彩色畵)이다. 간략한 선으로 얼굴을 묘사하였고, 몸체는 풍만하게 표현하였다. 작품을 제작한 시기와 작가는 알 수 없으나, 화면의 퇴색(退色)된 정도와 옛 격식의 필법으로 보아 조선 중기에 그린 그림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초상화는 주세붕의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의 바탕이 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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