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기 전부터 눈이 내렸다. 햇살처럼 찬란한 3월의 눈. 이 눈을
나는 십 년 전에 보았고 팔 년 전에 보았고 팔 년 만에 다시 보았다.
2월에는 눈이 오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겨우내 정한 약속 장소로 연애
편지를 들고 가는 3월의 아침에 눈이 내렸다. 창가에 서서 눈 오는
풍경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토끼 한 마리가 생각났다. 나를 버리고
달아난 못 생긴 토끼. 하늘은 토끼의 우체국일까. 눈이 토끼처럼 변
덕을 부렸다. 비가 되었다가 가는 눈발이 되기도 했다. 이 세계는 물
과 얼음의 중간쯤 되는 너무 빨리 도착한 정거장인지도 모르겠다. 1월
에는 행복했다. 토끼와 나는 너무 닮았고 우리는 어떤 관계도 맺을 수
있었다. 2월에는 불행했다. 숱한 기념일을 토끼와 함께 보내는 동안
나는 무거워졌고 살이 오른 토끼는 솜털처럼 가벼워졌다. 토끼조차도
나를 버리는 지옥같은 28일의 일기를 쓰지도 않고 지웠다. 아무리 2월
을 지워도 3월은 지워지지 않았다. 눈을 감아도 토끼는 자꾸 물과 얼음
의 꽃들을 내게 보냈다. 피었다 흐르는 하얀 꽃들의 괴리만큼 감정의
온도에 따라 나도 얼었다가 녹기를 반복했다. 지금 섭씨 영도의 진창속
에서 너에게 편지를 ! 쓴다. 내가 서 있는 이 창가는 시간보다 빠른 온
도가 흐른다. 거기는 지금 몇 시인가? 섭씨 영도는 울먹이기 좋은 온도
다. 보내려고 쓴 건 아니지만 이 편지를 네가 받아줬으면 좋겠다. 알려
다오. 이 창가도 네가 있는 곳과 같은 시간 속에 있는지. 너의 편지가
급하지 않다면 영도에 와서 내 대신 울어 다오. 내 느슨한 애정을 물어
뜯고 달아난 토끼처럼 나를 허술하게 안아 다오. 언제든 너의 팔뚝을
내가 물어뜯을 수 있게. 지금 지독한 영도다.
-『시현실 2006년 여름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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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이 시인은 젊은 나이일 것입니다.
내 기억에도 수년전에 못생긴 토끼가 일본에서 건너와 한반도를 누빈 적이 있습니다.
사랑의 수명이 길어야 18개월이라는 못난 연구도 있는 세상이지만,
감정의 온도가 날씨처럼 변한다는 사실이 그와 나를 같은 나이에 머물게 합니다.
날씨가 하도 무더워 이 시를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