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가운데 서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혼자 쓰러져도 누구 하나
부를 사람이 없다는 외로움 때문이었을까.
그날따라 하연은 잠이 오질 않아 혼자
뒤척이다 아예 자는 걸 포기하고
일어났다.
차를 마실까 했으나 그것도 귀찮고
담배를 피워 볼까 했으나 사다 둔 담배도
없다.
술은 마시지 않기로 했다.
하연의 경우 술은 조금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흐트러진 감정은 더욱 흐트러지고
서러운 감정은 더욱 서러워져서 분별을
잃고 추태의 광란만 벌일 뿐이었다.
잠옷 위에 코트를 걸쳤다.
밤늦은 시간에 열어 논 가게도 없을
것이고 슈퍼마켓 앞에 자동판매기가
있었다는 기억을 떠올리며 동전주머니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희미한 외등 저쪽으로 아이 둘이 벤치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근처 독서실에서 공부하다 나온
아이인가 생각하며 하연은 슈퍼마켓
앞으로 갔다.
그러나 자동판매기는 불이 꺼져 있어
동전은 넣는 대로 다시 흘러 나왔다.
어디 가야 담배가 있을까.
주변을 돌아보았으나 지나가는 자동차의
불빛 외에는 일제히 어둠 속에 침묵하고
있었다.
블록을 걸어 내려갔다.
잠옷 아랫도리가 찬바람에 휘감기며
그만 돌아가자고 재촉한다.
하연은 늦은 밤 잠옷 바람으로 담배를
사러 다니는 자신의 꼬락서니를 느끼고
혼자 쓰게 웃었다.
처량하다, 처량해.
하연은 오던 길로 다시 되짚어
걸어왔다.
아이들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다.
희미한 불빛 속에서도 그 아이들은
독서실에 공부하러 다닐 만큼 커 보이지가
않았다.
이 시간에 부모들은 뭘하지? 애들이
밖에 나와 있어도 모르고 있게.
알지도 못하는 그 아이들 부모 욕을
이상한 느낌에 다시 돌아섰다.
하연이 다가가자 아이들은 도망이라도
갈 듯 발딱 일어났다. 두 아이가 손을 꼭
잡은 채 두려운 듯 하연을 쳐다보았다.
은지였다. 그렇다면 이 아이는? 이
아이는 은표인가?
하연의 온몸이 그대로 굳어 버릴 듯한
충격이 왔다. 아뜩했다.
"아니......"
입 속은 아무 말을 내보낼 수가 없이
말라 버리고 다음 순간 다리에 힘이 쑥
빠져 버려 하연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찬바람에 동태가 된 아이 둘을 하연이
끌어안았는지 다리에 힘이 빠진 하연을
아이들이 부축했는지 세 사람은 한
"세상에, 왔으면 들어오잖고, 밖에서
뭐하는 짓이냐 그게."
아이들이 얼어 있는 게 화가 나서
하연은 자기도 모르게 화가 난 음성이
되었다.
"화내지 마 엄마."
"화내는 게 아니야. 화내는 게."
그러면서도 목소리는 더욱 화가 나고
있었다. 내가 왜 화를 내니, 내가 왜.
"엄마가 싫어하기 땜에 난 오지
않을려구 했어. 근데 은표가 자꾸만
가자구 해서......"
목 너머로 뜨거운 덩어리가 물컹 밀려
올라왔다.
하연은 은표를 보았다.
걸음마도 채 하기 전에 떠났던 아이.
컸으니 은표도 저만큼은 컸겠구나 하고
머리 속으로 가늠해 보았던 것보다는
상당히 어리고 작다.
생각보다 어리고 작다는 것이 하연의
가슴을 턱없이 아리게 한다.
"은표야."
야단맞을까 봐 겁먹고 있는 누나 때문에
아이는 지레 주눅이 들어 고개도 못 든다.
"은표, 엄마 좀 봐."
아이가 고개를 들지 않으므로 하연은
아이의 턱을 받쳐 들었다. 고개는
들려졌으나 아이의 시선은 여전히 아래로
향하고 있다.
이 아이들은 왜 엄마가 저희들을 야단칠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저희들이 미워서
내 손으로 내동댕이치고 떠난 것도
미칠 것 같았던 밤이 수없이 많았는데.
아이들의 오해가 야속해서 하연은
한숨을 쉬었다.
흘러 버린 세월을 생략하고 단숨에
뛰어넘을 방법은 없을까.
엄마가 자리에서 일어나기만 해도
우유를 줄 거라는 믿음으로 벙긋벙긋 웃던
그 이심전심을 다시 찾을 수는 없을까.
"잘 왔어. 보구 싶었어."
아이가 눈을 조금 들었다. 그리고
하시라도 다시 내릴 준비를 하며
조심스럽게 하연을 쳐다보았다.
한정없이 여리고 슬픈 눈이었다.
손만 갖다 대도 상처받을 것처럼
조심스러운 눈이었다.
은표 역시 어릴 때의 모습은 남아 있지
간곳없고 갸름하니 야윈 얼굴이었다.
은지가 듬직한 모습으로 자라 있다면
은표는 계집애처럼 야들야들하고 예쁜
얼굴이었다. 하연은 두 아이를 한꺼번에
끌어안았다.
격정으로 떨리고 있는 하연의 거센
포옹에서 아이들은 비로소 엄마의 심정이
헤아려진 듯 냉장고 속의 버터처럼
딱딱하던 심신을 안심하고 풀어 내렸다.
"어엄마."
은지가 하연의 턱밑으로 제 얼굴을
비벼대며 어린애 같은 소리를 냈다.
"어디 보자. 어디 다시 한번 보자."
하연이 얼굴을 조금 떼며 아이들의
얼굴을 눈으로 번갈아 핥았다.
아이고 달기도 해라.
하연은 아이들 얼굴에 소나기를 퍼붓듯
입을 맞췄다.
아이들 얼굴은 그때까지도 겨울바람이
묻어 있어 이 아이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밖에 있었던가를 얘기해 주고 있었다.
"엄마 보고 싶어 왔으면 곧바로 들어올
것이지 이게 무슨 바보 같은 짓이야."
그들은 풀었다가 다시 껴안고 풀었다간
다시 또 껴안았다.
세상을 송두리째 안는다고 이렇듯
뿌듯하고 행복할까.
"엄마, 아까 밖엔 왜 나왔댔어?"
은지가 물었다. 하연은 대답 대신
웃었다. 담배를 사러 나갔었다는 대답은
할 수가 없었다.
"있지, 우린 그때 엄만 줄 몰랐어."
갔겠니.
"어떤 여자가 치렁치렁한 잠옷 위에다
코트만 걸치고 나오길래 내가 은표보고
뭐랬는지 알아?"
그러자 은표가 그 얘긴 말라는 듯 누이
팔을 잡았다.
"괜찮아."
은지가 은표 손을 가볍게 밀어냈다.
"괜찮아."
하연도 한마디 거들었다. 무슨 얘기든
다 듣고 싶다. 이 아이들이 하는
얘기라면.
"내가 있지, 지성 야성 다음에 뭐게?
그랬더니 은표가 감성! 그런다. 그래서
내가 아냐, 실성이야 그랬어."
은지와 하연이 깔깔 소릴내어 웃었다.
소리내어 웃지는 않았다.
모르고 했다 해도 엄마에게 실성이란
말을 쓴 게 미안해서인지 아니면 실성한
여자로 보였던 그 여자가 바로 엄마였다는
게 실망스러운지 은표의 얼굴에 떠올랐던
미소는 금방 사라졌다.
은지는 두 번째 만남이어선지 이미
흉허물없는 모녀지간으로 느껴지는데
은표는 새삼 낯선 남자 앞인 것처럼
어렵고 어떻게 하면 좀 잘 보일까 웃는
가운데서도 눈치가 보인다.
"은표는 우습지 않나부다."
"쟤 본래 저래. 시각적 심정적 부담을
주는 애야, 쟤."
은지의 말에 어릴 때도 은표는 소리내어
울거나 하는 법이 없었다는 생각이 났다.
애였어."
어릴 때의 얘기가 나오자 은지가 눈을
반짝 빛내며 하연의 코앞으로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엄마 나는? 나는 어땠어?"
"너는 심술쟁이였지."
"어떻게?"
"엄마가 눈만 한번 흘겨두 아빠한테
엄마가 때렸다구 고자질하구."
"내가? 진짜? 때려 주지 그랬어."
"이렇게 이쁜 걸 어떻게 때리니?"
하연이 은지의 코를 잡아 흔들며
웃었다.
그러나 머리 속에선 은지를 때려 주던
일들이 그림책이 되어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그렇게 많이 때렸을까?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 정신을 팔면서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노여움이 아이의
조그만 투정에도 신경질로 폭발하곤
했었다.
미안하다. 그건 어디까지나 어른들의
일이었는데.
그때 은표가 또다시 누이 팔을 잡았다.
무언가를 상기시키는 듯한 몸짓이었다.
그러자 은지가 시계를 보았다. 두시가
조금 지나고 있었다.
"졸려서 그래? 그럼 우리 안방으로 가서
자리 피구 누워서 얘기하자. 졸리면 졸린
사람부터 자기루 하구."
그러나 그게 아닌 듯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하연을 은지가 잡았다.
"간다구? 이 시간에?"
"우리, 엄마 아빠 몰래 나왔어."
은지가 현관문 열쇠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우리 집은 기숙사처럼 아홉시만 되면
무조건 자야 돼."
허구헌날 열두시에 들어오던 느이
아빠가 그러니까 이젠 아홉시 이전에는
꼬박꼬박 집에 들어온단 말이지?
새삼스런 분개가 하연의 가슴에서
연기를 피워 올린다.
"다들 잠든 거 보구 살짝 빠져 나왔어.
엄마가 찾아오는 거 싫어한다구 했는데도
은표가 창문만 보고 오자구 그래서."
하연은 은표를 보았다.
찾아오는 거 정말 싫어서 안된다고 한
싶어한 이 아이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하연의 눈에 금방 눈물이 고인다.
내가 실성한 여자처럼 담배를 사러
나가지 않았으면 영영 이 아이들을 못 볼
뻔했구나.
그러고 보니 은표는 이곳에 와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연은 이 아이가
어떤 목소리를 가졌는지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은표 몇 살이더라?"
세상에 자식 나이 묻는 엄마도 있는지
몰라. 하연은 얼른 질문을 바꿨다.
"은표, 엄마 보구 싶었니?"
"......네."
은지와 달리 은표는 존댓말을 썼다.
같다.
너무나 간단하고 너무나 짧아서
'네'라는 한마디로는 들은 것 같지가
않다.
아들아. 내 아들아. 너는 어떤 목소리로
얘기를 하는지 이 엄마에게 좀 들려주렴.
"6학년이라지? 공부는 잘하니? 친구는
많아? 어떤 과목이 제일 좋구 어떤 과목이
제일 싫지? 반찬은 뭘 잘 먹고 아픈 데는
없니?"
많은 질문을 하면 많은 대답을 들을 수
있겠거니 하는 생각에 두서없는 물음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아이는 가만 있다가
조용히 고개만 가로 흔들었다.
"얘기 좀 해봐. 우리 얘기 좀 하자 응?"
하연이 다시 아이의 등을 싸 안았다.
다음 제 누이 얼굴로 옮겨졌다.
누나 가자 야단맞겠다.
말은 안해도 시선은 그런 뜻이었다.
은지가 그 뜻을 알아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 가야겠어. 담에 또 올께."
그러자 은표도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에 언제?"
"틈 봐서."
은지가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두 아이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하연은 바삐 서두는 아이들이 이해는
되면서도 한켠으로는 얄밉기까지 했다.
아빠한테 야단맞는 게 그렇게 무섭니?
먼발치에서 엄마 창문이라도 보고
대수롭지 않다고 그렇게 생각할 배짱은
없니?
아이들을 상대로 하연의 말없는
어거지가 기를 썼다.
"엄마, 그럼 잘 있어."
은지가 잠깐 어디 심부름이라도
다녀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은표가 고개를 숙였다.
저 아이는 작별인사까지도 말없이 하고
갈 모양이구나.
"잠깐만."
하연이 벗어 놓았던 코트를 다시
입었다.
"바래다 줄께."
"추운데 괜찮아, 엄마."
추우면 느이들두 춥지 나만 춥니. 니가
딸이 어딨어? 그런 걱정은 엄마 몫이지 니
몫이 아냐, 이것아.
하연은 자동차 키를 찾아들고 밖으로
나왔다.
찬바람에 잠옷이 제일 먼저 질겁을 하며
종아리에 감긴다.
"실성한 여자 운전하는 것 좀 볼래?"
어차피 아이들을 보내야 할 시간이라면
기분 좋게 보내자 하고 하연이 코트
아래로 흘러 내린 잠옷자락을 흔들었다.
"엄마 보통 때로 그래?"
비록 코트를 걸쳤을망정 잠옷 차림으로
운전대에 오르는 엄마를 조금은
나무라는듯한 눈으로 은지가 물었다.
"보통 때도 그러면 진짜 실성했게? 걱정
마. 이런 차림일수록 운전은 조심하니까.
아니니까."
은지가 웃으며 앞문을 열었다.
순간 하연은 은지 대신 은표가 앞좌석에
탔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은지는 하연의 생각보다 먼저 그
생각을 하고 있었던 듯
"은표 너 여기 타."
하고 말했다.
그러나 은표는 누이가 열어 주는 차
문앞에서 멈칫거리고만 있었다.
"타, 빨리. 추워."
누이의 재촉에 은표가 마지못한 듯
자리에 올랐다.
"안으로 바짝 앉아."
그리고는 은표 옆에 은지도 바싹 붙어
앉았다.
아, 내 딸, 하고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시동을 건 후 엔진에 열이 가해질 동안
하연은 두 아이를 한 팔로 안았다. 은지가
키드득 웃었다.
웃고 있는 모녀 사이에 은표는 얼음
알갱이처럼 끼어 있었다.
아, 제발, 너도 니 누이처럼 좀
따뜻하게 풀어 보일 수는없니?
"은표는 늘 이렇게 조용하니?"
종내 첫 대면의 낯섬을 허물지 않는
아들아이가 안타까워서 하연은 은표의
머리에 제 얼굴을 비볐다.
"늘 그래, 얜."
늘 그렇다는 말이 조금은 안심을
주었다. 나한테만 그렇다는 건 아니지
그러니까.
"거기 무슨 불빛이 있는데?"
"나무에다 예쁜 불꽃들을 매달아 놓구
얼마나 근사한지 몰라."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을 구실을
만들려고 하연은 정도 이상의 설명으로
유혹을 했다.
"시청 앞보다 더 근사해?"
"그건 댈 것두 아니다. 얼마나 이쁜지
몰라."
"갈까?"
은지가 은표를 보고 물었다. 그러나
은표는 고개를 흔들었다. 솔깃해 하던
은지는 금방 단념했다.
"그냥 가. 그건 담에 보구."
유혹은 실패했다.
열두 살짜리 남자아이 유혹하기가
하연은 은지가 얘기하는 구기터널
쪽으로 차를 몰았다.
"담 일요일에 올 수 있겠니?"
"못 올 거야. 다 같이 스키 타러 가기루
했으니까."
"그럼 토요일 학교 마치구는?"
"우리 토요일 떠나. 용평으로."
스키 타러 가는 계획으로 은지는 즐거운
듯했다.
스키 얘기가 나오자 은지는 마냥 들뜨기
시작해서 아빠는 실버를 타는데 멋모르고
따라 올라갔다가 자기는 굴러 내려왔다는
얘기며, 은표가 레드를 타는 모습은
얼마나 예쁜지 비디오에 담아 두고 싶을
정도라는 얘기를 줄줄이 늘어놓았다.
하연은 실버가 뭔지 레드가 뭔지
옥타브 올라가는 것으로 미루어 봐서
대단히 재미있는 건가 보다 짐작만 할
뿐이었다.
"엄마도 타니?"
하연은 슬며시, 그러나 예사로운 투로
그들 엄마의 얘기를 물어 보았다.
"응, 엄마랑 나랑은 그린에서 놀아.
그래서 어떤 날은 하루 왼종일 아빠랑
은표를 못 보는 날두 있어. 갈 때는 다
같이 가가지구 스키탈 때는 타는 재미
때문에 그냥 남남이 되구 말아. 이번엔
엄마랑 나랑 열심히 배워 가지구 우리 네
식구 기러기처럼 레드를 타구 내려오자구
그랬어."
눈 위를 네 식구가 기러기 모양으로
타고 내려오는 모습이 사진처럼 눈앞에
아, 그 네 식구 중에 한 사람이
바뀌어서 나는 토요일 오후를, 그리고
일요일 하루를 돈 받고 도장 찍어 주는
일을 하며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구나.
때 아니게 한심하고, 때 아니게 서러운
생각이 든다.
그 기러기 중의 하나가 나일 수도
있었는데.
"지난번 실버에서 내가 굴러 내려올 때
말야 엄마, 엄마 생각은 어때? 스키 벗어
던지구 그냥 앉아 있으면 미끄럼 타듯이
쭉 미끄러져 내려올 것 같지? 그치?"
"응."
스키 벗어 던지고 앉아 있으면 어떻게
되는 건지 하연으로선 알 바 없었지만
"나두 그럴 줄 알았는데 글쎄 그게
아니더라구. 머리가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리가 아래로 내려갔다가 빙글빙글
돌면서 내려가는 거야. 그걸 보구 거기
있는 사람들이 배꼽을 잡구 웃은 건
상관없는데 아빠가 글쎄 골이 비어서
그렇대지 뭐야. 난 그 말을 듣구 얼마나
약이 올랐는지 몰라. 아무리 그렇지만
아빠가 그렇게 얘기할 수 있어? 골이
비어서 그렇다니, 안 그래 엄마?"
"그러게."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슬로프의
골이 패여서 그렇다는 걸 내가 잘못
알아들은 거였어. 호호호. 아, 엄마 저쪽
길루 꺾어야 돼."
하연이 급회전을 했다.
제외돼 있다는 서글픔이 막막하게 가슴을
채웠다.
골목은 흡사 끝없는 미로와도 같았다.
은지가 왼쪽을 지시하면 왼쪽으로
꺾었고 오른쪽을 지시하면 오른쪽으로
꺾었다. 은지의 오른쪽 왼쪽은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아이가 스키장 얘기를 할 때 느꼈던
소외감이나 섭섭함은 왼쪽 오른쪽을 두 번
꺾어 돌 때 이미 사라졌다.
엄마를 보겠다고, 아니 엄마의 방
창문만이라도 보겠다고 한밤중에 어린 두
아이가 이 어둡고 긴 골목길을
도둑고양이처럼 빠져 나왔을 광경을
생각하니 생각만으로도 하연은 가슴에
못이 박히는 것 같다. 정말이지 죄인이
한참 만에 은지는 말했다.
"됐어. 이쯤에서 세워 줘."
이쯤이라고 말하는 걸로 봐서 집 앞은
아닌 모양이다.
"집은 어디야?"
목이 잠겨서 쉰 목소리가 나왔다.
"저 골목만 돌면 돼."
"그럼 집 앞까지 가자."
"그냥 여기서 세워 줘."
아이가 초조한 내색을 하는 바람에
하연은 차를 세웠다.
아이는 엄마에게 집을 가르쳐 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집 앞에서 차 소리 내는
게 두려워서 그러는 것 같았다.
그래, 몰래 나왔다니까 그렇게 하자.
그러면서도 아이들의 몰래에 자기까지
부끄러웠다. 아이들은 그럴 수밖에
없다치지만 어른인 자기는 이게 뭔가. 집
앞에서 자동차소리 빵 내고 벨 탁 눌러서
당당하게 애들 들여보내고 돌아나올 순
없는 것인가.
그러나 하연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감쪽같이 스며들려는 아이들을 괜스레
들통내서 야단맞게 하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이 일이 드러남으로 해서 다시는
아이들을 못 보게 될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은지가 차 문을 열며 고맙다는 듯
하연을 돌아보았다.
"어쩌다 택시 타고 여길 올려면 열이면
열 다 투덜대기 일쑨데 엄마는 안
그러네."
느이들을 태우고 내가 투덜대게? 이보다
더 험한 꼬부랑길을 가자고 해봐라. 나는
더더욱 신이 나서 씽씽 달릴 텐데.
어린애다운 감사의 인사라는 것쯤
알고도 남지만 어느 한 가닥 엄마를 택시
기사와 동등한 자리에 앉혔다는 게 또
한번 자식과 엄마의 거리를 느끼게 한다.
"집 앞까지 같이 가자."
차에서 내리며 하연이 말했다.
"됐어. 이제 됐어. 엄만 가."
집까지 들릴 리도 없건만 아이는 질색을
해서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빨리
가라는 손짓을 했다.
골목을 돌아가며 손을 흔드는 은지의
모습이 십여 년 전 헤어질 때의 그 모습을
연상시킨다. 하연은 자동차의 핸들에
하연에게 있어 토요일은 별다른 의미가
없는 날이었다.
토요일은 근무가 일찍 끝나는 그런
직장에 다니는 것도 아니고 주말이라고
누가 불러내 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하연에게 있어 토요일은
월요일이나 화요일, 그 밖의 다른
요일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하루일
뿐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은지가 스키장 얘기를 하고 간
뒤부터 토요일은 하연에게 아이들
생각으로 꽉 차게 만들었다.
지금쯤 스키 장비를 차에다 싣고
있겠구나.
지금은 중부고속도로를 달리고 있겠지.
떠들고 있을 것이다.
"아빠 속력을 좀더 내봐요. 110킬로
도로에서 지금 뭐하는 거에요?"
그러면 딸아이의 충동질에 슬그머니
속력을 내려는 남편 옆에서 낯선 여자가
아내라는 명분으로 주의를 줄 것이다.
"천천히 가요, 천천히."
아마도 남편은 은지보다는 아내의 말에
따를 것이다.
"그래 천천히 가자. 급할 거 뭐 있니?
놀러 가면서."
그러나 은지보다 하연의 속이 먼저
뒤틀린다.
하연은 흥! 하고 그들을 향해 성을
냈다.
"엄마, 밤이라 차도 없는데 우리 신나게
지난번 밤늦게 아이들을 데려다줄 때
은지는 아무도 없는 빈 거리의 터무니없이
긴 신호등 앞에서 안달을 했다.
"그냥 가 엄마. 이 시간 아니면 서울
시내에서 언제 달려 봐? 그냥 한번 달려
보자니깐."
"안돼. 엄마 지금 잠옷 바람이란 말야."
잠옷을 핑계로 은지의 충동질을 묵살해
놓고 지금은 자기가 아닌 다른 여자가
묵살한다는 이유로 화가 난다.
지가 뭔데. 그것에 동조하는 남편은 또
뭐람.
그러다 하연은 혼자 픽 웃었다.
그들의 상황을 자기 마음대로 설정해
놓고 그것에 화를 내고 있는 자신이
웃기지도 않아 얼른 생각을 스키장 쪽으로
실버고 레드고 그게 어떻게 된다는
소린지 알 수 없으니 무조건 한 곳에 네
사람을 모아 놓고 기러기를 만들어 본다.
맨 앞에 남편, 그 뒤로 은표, 그리고
은지, 그 다음은 내려오든가 말든가
제쳐놓고 눈보라를 일으키며 미끄러져
내려오는 그들의 즐거운 모습을 그려
본다.
이쁘기도 하고 황홀하기도 해라.
하연의 상상 속에서 그들은 모두
캘거리에 모여든 스키선수들처럼 잘도
탄다.
그때 목소리 하나가 하연의 상상을
방해하고 들어왔다.
"엄마, 나 스케이트 언제 사줘?"
하연은 용평의 눈밭에서 태호의 얼굴로
그러나 후딱 정신을 차렸다.
아, 태호, 태호도 내 자식인데 왜 난
눈앞에 없는 자식만 그려보고 있단
말인가.
"엄마, 오늘도 바빠서 안되지, 응."
말로만 스케이트를 사주마 해 놓고 마냥
잊어버리고 있는 엄마에게 태호는 제가
먼저 이유를 달아 붙여 준다.
"아냐, 오늘은 사줄께."
그러면서 하연은 스케이트 대신 스키를
사줄까 생각한다.
태호를 핑계 삼아 용평에 갔다가
우연히(?) 그들을 만난다.
은지는 반가워하겠지만 나머지 식구들은
느닷없이 부딪친 하연을 향해 어떤
얼굴들을 할까. 모르긴 몰라도 흥이
그러자 줄곧 용평으로만 가 닿던 하연의
그리움도 초친 낙지처럼 오그라든다.
하연은 태호를 데리고 나가 스케이트를
사주면서 이 아이에게 스키를 못 사주는
것이 그들 때문이라는 원망이 또아리를
튼다. 그래서 내년이면 작아서 못 신을
스케이트건만 제일 비싼 걸로 샀다.
아이는 엄마 가슴에 뒤죽박죽으로 끓고
있는 원망도 모르고 하늘을 날 듯
기뻐했다.
"엄마, 이거 좋은 거지 그치?"
"그래, 좋은 거야."
시들하게 대답하고 가게를 나오는데
원색의 커다란 포스터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다이내믹한 포즈로 스키를 타고
있는 스키어의 모습이다.
붙어있는 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러나 곧 기운이 빠져 그 문을 도로
밀고 나왔다.
용평에서 만난 그들이 화들짝 반색을
한다 해도 태호에게 스키 장비를 마련해
주기에는 그 비용이 너무나 상상을 웃도는
엄청난 가격이었다.
하연은 기가 죽어 재빨리 그곳을
벗어났다.
"태호, 스케이트 좋지?"
하연은 좋은 스케이트를 사주었다는
것만으로 못해 주는 일에 대한 땜질을
했다.
아이는 충분히 좋아했으나 그러나
하연은 우울했다.
그 겨울은 내내 우울했다.
동네 스케이트장도 울상들이었다.
태호는 그 겨울, 방안에서 스케이트를
신어 보는 것으로 그쳤다.
그리고 눈이 오고 있는 동안
아이들에게선 아무 연락도 없었다.
그들의 즐거움에 빠져 이 엄마는 잊고
있는 것이리라.
아이들이 즐거우면 나도 즐겁다는
생각은 이미 색이 바래가고 있었다.
아, 빨리 봄이 왔으면.
밤마다 하연은 창밖을 내다본다.
두 아이가 들어오지도 못하고 밖에서
불켜진 창문만 바라보고 있을 리도 없건만
하연은 어느 날 밤 그렇게 찾아와 주었던
아이들의 마음이 그리워 자꾸만 창밖을
내다본다.
내다보면 아이들이 앉았던 벤치엔 쓸쓸한
나무 그림자만 가득하다.
모르는 남이라도 이렇듯 그리우면
찾아갈 수 있을 텐데 아는 사람을 안다는
이유로 찾아가지도 못한다.
차라리 남이었으면 친구로라도 왕래할
수 있으련만.
앞으로의 세월이 암담하기만 하다.
창밖엔 또 눈이 온다.
3월인데 눈도 미쳤다.
아이들이 찾아오지 않는 것이 오로지 눈
때문인 것 같아 하연은 죄 없는 하늘을
향해 삿대질이라도 하고 싶다.
그러던 중 은지가 찾아왔다. 밤도
아니고 낮에.
카네이션으로 앙징맞은 부케를 만들어
"너 이제 일학년이지? 공부 잘해야 돼."
태호의 입학식을 마치고 가까운 햄버거
가게에서 햄버거 하나를 사먹이면서
은표는 이제 중학생이 되겠구나. 자식이
졸업식을 하고 입학식을 해도 내 손으로
손수건 하나 사줄 수가 없으니, 하며 혼자
속으로 탄식하며 돌아온 하연이 앞에
은지는 활짝 웃는 얼굴로 들어와 태호의
입학을 아는 체해 주었다.
그러는 은지가 하연은 자신의 언니처럼
느껴진다.
"학교에서 오는 길이니?"
"응."
"은표랑 같이 오잖구."
"......"
은지의 얼굴에 엷은 그림자가 스쳐
"왜 무슨 일이 있니?"
"아니."
"은표는 언제가 입학식이지?"
"어제 했어."
"내가 공책이랑 연필 좀 사주고 싶은데,
괜찮겠니?"
엄마가 자식 학용품 사주는 것도 물어
봐야 한다니.
"안 사줘도 돼."
거절이구나. 이럴 때 남이라야
어거지라도 떠안기지.
하연의 그런 심중을 헤아린 듯 은지가
거절의 이유를 밝혔다.
"이모가 셋이나 되는데 셋 다 공책이랑
연필을 어떻게나 사갖고 왔는지 그거 다
쓸려면 앞으로 10년은 더 공부해야 될 것
"그럼 그거 말구 딴 거라도 뭐 필요한
거 없니? 은표가 뭐 갖구 싶다구 한 거
없었어?"
그러자 은지가 안됐다는 얼굴로 하연을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남자아인 왜 그렇게
보수적이지?"
하연은 언뜻 은지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보수적이라니?"
"있다 얘기할께."
은지는 태호 때문에 대답을 미루었던 듯
태호가 방으로 들어가자 비로소 그것에
대한 설명을 했다.
"은표는 태호를 이해하고 싶어하지
않아."
"그래서 같이 못 온 거야."
은표는 아직 태호를 보지 못했다.
밤중에 잠깐 다녀갔기 때문에 태호가
있는지도 모른다.
"니가 얘기했니? 어떻게 얘기했어?"
"내가 얘기한 게 아냐. 그날 은표가
내내 아무 말도 안했던 건 저 사진
때문이야."
은지가 벽에 걸려 있는 태호 사진을
눈으로 가리켰다. 흡사 정부를 감춰 놓고
있다가 들킨 것처럼 가슴이 덜컥했다.
"그래서? 은표가 뭐라 그래?"
"걘 좀 꽁한 애야. 줄줄이 지 속에 있는
얘기를 하는 편이 아닌데 언젠가 내가
엄마한테 가 보자 그랬더니 싫대."
쇠망치로 심장을 얻어맞는 듯한 충격이
"엄마한테 어째서 아들이 또 있는
거냥."
"그, 그래서, 넌 뭐, 뭐라 그랬니?"
은지에게도 태호에 대한 설명을 한 적이
없는데 이 아이는 태호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난 그랬어. 엄마가 외로운가부지
뭐...... 근데 은표는 그걸 이해하려 들질
않아."
이제 열다섯밖에 안되는 딸아이의
엄청난 이해 앞에서 하연은 눈물이
쏟아졌다.
외로운가부다고, 엄마가
외로운가부다고, 넌 그렇게 말했단
말이지.
펑펑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 못해 하연은
울었다.
은지는 은표의 몰이해 때문에 엄마가
우는 것이라 생각했음인지 엄마 곁으로
다가와 앉으며 부드럽게 엄마를 안았다.
"울지 마 엄마. 은표는 어려서 그래.
그리구 가만 보믄 남자들은 어른이구
아이구 보수적인 데가 많더라. 우리
체육선생님도 있지......"
은지가 체육선생을 도마 위에 올려 놓고
남자들의 융통성 없는 사고방식을
매도했다. 그것으로 엄마를 위로하려 하는
딸아이의 마음은 가상했으나 그러나
하연은 조금도 위로되지 않았다.
"그래서 은표는 영영 다시는 오지
않겠다는 거니?"
"......"
"내가 있잖아. 슬퍼하지 마. 내가 은표
몫까지 할께. 난 엄마를 잘은 모르지만
무조건 난 엄마 편이야."
하연의 귀에는 이미 아무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강세의 마음을 놓쳐 버렸을 때처럼 또
한번 버림받는 아득함만 가득했다.
"그럼 이제 영영 은표는 볼 수 없는
거니?"
은표에 대한 열쇠를 은지가 쥐고 있는
것처럼, 엄마에 대한 은표의 반감이 그
반은 은지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처럼
하연은 애원과 원망에 뒤섞여 있었다.
"크면 달라질지 모르지."
오히려 어른은 은지였다.
"달라질까?"
질문과 동시에 스스로 감지된 대답도
그렇고, 딱하다는 듯 시선을 비켜 버리는
은지의 눈빛도 같은 대답인 듯하다.
막막함이 울음이 되어 또다시 목구멍을
치받는다. 하연은 두 손바닥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그만해 이제."
은지가 하연을 흔들었다. 그러다 은지는
하연의 머리칼에서 흰머리를 발견했는지
그 와중에서도 머리칼 하나를 뽑았다.
나이 들면서 어쩌다 하나씩 눈에 띄는
흰머리가 자연스러운 현상임에도 하연은
은지의 손에 흰머리칼 하나를 뽑히는 순간
심장에 박혀있는 가책 하나가 뽑혀져
나오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그 흰머리는 은지나 은표와는 아무
세월이 없음으로 은지의 손에 뽑힌 그
흰머리는 다른 일에 정신을 쏟고 살아온
증거물처럼 하연을 뜨끔하게 만들었다.
은지가 흰머리칼을 하연의 눈앞에
장난스럽게 흔들어 보였다.
함께 살아온 모녀지간이라면 그건 응당
엄마두 이제 늙는다, 하는 놀림이었으나
하연은 당신의 자식에 대한 직무유기가
여기 있소 하는 것 같아 그것을 마주
바라볼 수가 없었다.
하연의 복잡한 심정과는 상관없이
은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뽑은 머리를
휴지통에 버리고 티슈를 뽑아 하연의
눈물범벅인 얼굴 앞에 디밀었다.
"엄마두, 그렇게 눈물이 많아서 어떻게
해?"
티슈로 얼굴을 닦으며 생각했다.
그래, 나도 울지 않을 때가 있었어.
세상이 내 식으로 돌아가지 않는 속상함
때문에 울 때도 있었지만 울면 울수록
세상은 더욱 나와는 반대로 돌아간다는 걸
알고부터는 오랜 세월 동안 울지 않고
살아왔었다. 그러면서 언뜻 내 속에 있는
눈물이 다 말라 버려 누가 성냥만
그어대도 한순간에 재가 될 것 같았는데
느이들을 만나면서 나는 또 물컹이가
돼버린 모양이다.
느이들 말 한마디 생각 한 토막이 나를
이리도 쉽게 뒤흔드는 걸 보면.
은지가 가고 난 뒤 하연은 쓰러지듯
자리에 누웠다.
물먹은 창호지처럼 방바닥에 철썩 붙어
떨어지고 있었다.
은표가 나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세상 사람 전부가 하연을 향해
활시위를 겨냥하고 있는 만큼이나 외롭고
무서운 것이었다.
거기다가 하연을 더욱 외롭게 하는 것은
그 반감에 대해 어느 한구석 변명을 할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은지처럼 자진해서 이해를 해주면
모를까, 태호에 대한 은표의 반감을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아들이 나로부터 등을 돌렸다.
어차피 내 아들아 불러가며 마주 보고
살 처지는 아니지만 그러나 안 보이는
곳에서도 그 아이가 마음을 닫아 걸고
있다는 건 견딜 수가 없었다.
어찌 그 막막한 길을 걸어갈 수 있겠는가.
이제 당신의 인생에서 유일한 우물은
매몰되어 버렸소.
은표의 태도 표명은 이 같은 통고였다.
하연은 그 통고를 받는 순간 앞뒤 가릴
분별도 없이 태호를 기종에게 보낼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떨어져 사는 한 아이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렇게 한다고 해서 반드시
얻으리란 보장도 없는 그 마음을 얻기
위해 곁에 있는 한 아이의 실체를 버릴
생각을 했다.
"이제 그만 울어, 태호가 무슨 일인가
하겠다."
은지의 말에 하연은 비로소 그 생각에서
화들짝 깨어났었다.
조심스럽게 건넨 말이긴 하지만 하연은
고개를 못들 정도의 꾸지람을 들언 것
같았다.
어차피 못 거둘 자식의 상처에 연연하지
말고 옆에 있는 성한 자식 하나만이라도
상처 줄 거리를 만들지 말라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 하면서도 은표 생각이 나고
은표야 하다 보면 태호한테 죽을 죄를
짓는 것 같다.
아, 이럴 때 그럴 듯한 변명 하나쯤
있어 줘도 좋으련만.
'엄마에게 태호가 있는 건 엄마의
외로움 때문'이라고 너무나 적절하고
너무나 근사한 변명을 은지가 해주긴
했지만 그것이 딸아이 쪽에서 해준 것이라
떠나 사는 아이들이 그리워서 그
그리움을 메울 방편으로 아이 하나를
낳았다면 그건 태호에게 미안한 일이지
떠나 사는 아이들에게 미안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도 왜 나는 그들에게만
이토록 죄인인가.
"넌 또 올 거지?"
은지가 떠나기 전 하연은 그렇게
물었었다.
은표가 안 온다고 너까지 안 오고 그럼
안돼. 넌 와야 돼. 너는 무조건 내
편이라고 했으니까.
은지가 딴소리 못하도록 '내 편'이라는
말에 쇠말뚝을 박아 놓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며 될 수 있는 대로 어린 마음에
부담 안 가도록 물었었다.
그러나 은지는 그 말엔 대답 않고
언니가 동생을 나무라듯한 어투로 하연을
쳐다보며 말했다.
"한숨 자. 찔찔 짜지 말구."
버르장머리 없는 그 말이 하연을 기쁘게
했다.
은지가 딸이 아니라면, 그리고 하연이
엄마가 아니라면 어떻게 어린 계집애가
어른을 향해 찔찔 짜지 말라는 투의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새삼스런 모녀 확인에 하연은
은지로부터 성은이 망극한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감격했다.
"그래, 울지 않을께."
말 잘 듣는 아이처럼 하연은 은지에게
약속했다.
있으면 언제라도 찾아와 주겠다는 언질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하연은 안심하고 눈을 감았다.
은지가 내 편인 이상 은표의 생각도
언젠가는 바뀌리라.
엄마에 대한 동생의 몰이해를 그냥
내버려 두고 있을 은지는 아니므로.
한바탕 울고 난 뒤끝의 안심이 하연을
편안한 잠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그러나 하연은 이것이 얼마나 일방적인
자기만의 생각인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은지가 돌아가고 난 1주일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 주일 안에 다시 또
오리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으므로.
그러나 2주일째는 오늘 올까 내일 올까
하루하루가 조바심이 났다. 식구들이 다
수업이 끝나는 낮시간에 잠깐만이라도
다녀가는 게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응당
낮에 오려니 하는 생각으로 바뀌어 벽시계
앞에서 몇 번이고 시간을 꼽아 보기도
했다.
지금은 아마도 점심시간일 테고
한시부터 5교시 수업에 들어간다치면
세시면 6교시 수업이 다 끝나겠지. 가만,
중3이면 7교시 수업까지 하던가? 한다치고
그러면 네시, 청소하고 종례하면 다섯시,
적어도 여섯시면 잠깐 볼 수 있겠다.
여섯시부터 돌던 수금을 여덟시로 바꿔
놓은지는 은지가 왔다 가면서부터였다.
그 즈음 거래처도 줄어 여덟시부터
움직여도 그닥 바쁘지는 않았다.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아이를
일에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다.
낮시간에 오지 않으면 혹 밤시간에 올까
해서 일을 끝내는 즉시 집으로 돌아와
기다렸지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록 은지에게선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시험인가? 아니면 아픈가?
어느 날은 시험이겠거니 하고 체념하고,
어느 날은 비가 오니까 하고 체념했다.
그러나 두 달이 지나면서부터는 이
아이가 안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하연은 은지의 학교로 찾아가 볼
생각을 했다.
그래, 그런 방법도 있는 걸 어쩌자고
나는 방안에서 속수무책으로 기다리고만
교문 앞에 자가용이 와 있는 걸
싫어하던 은지의 말이 생각나서 멀찌감치
안 보이는 곳에 차를 주차시켜 놓고
하연은 학교를 향해 걸어갔다.
운동장에선 무슨 시합을 하는지
여학생들의 왁자지껄한 소리와 호루라기
소리가 담을 넘어 들려 왔다.
은지가 얘기한 편협하고 보수적인
체육선생이 담 너머 있구나 하는 생각에
하연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교문 앞에 다다라 안을 보니 교실마다
동글동글한 머리통들이 한창 수업에
열중인 듯 보인다.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갈 입장도
아니어서 하연은 교문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처지도 아니고 은지의 교실을 참관할
입장도 아니다.
학교 주변에 있는 문방구점이며
떡볶이집들이 친근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저 문방구에서 은지가 지우개며
연습장을 사겠지. 저 가게에서는 친구랑
떡볶이를 먹으며 깔깔대겠지.
수업이 파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하연은
몇 번이고 그 가게들 앞을 왔다갔다하며
은지가 남겨 놓고 갔을 발자국들을
찾아본다.
저 아저씨는 우리 은지에게는 웃는
얼굴로 지우개를 건네 줬겠지. 저
아주머니는 떡볶이를 하나쯤 더 얹어
주기도 했겠지.
다가가서 절이라도 하고 싶을 만큼
괜찮다면 가게마다 전부 얼마씩의 돈을
맡겨 놓고 우리 은지 오면 그 애가
필요하다는 건 뭐든지 다 주세요, 그렇게
당부해 두고 싶다.
그러나 그래선 안될 것이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에 은지는
생모가 따로 있다는 걸 친구에게 알리고
싶지 않을 것이고 그걸 들통낸 엄마에게
두고두고 등을 돌려댈지도 모른다.
새소리 같은 차임 벨이 울렸다.
수업이 끝난 모양이다.
연인을 기다린들 이토록 가슴이 뛸까.
몇몇 아이들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나와
수위에게 외출증을 보인 다음 각기 필요한
문구들을 사 가지고 들어간다.
아직도 수업이 완전히 끝난 건 아닌
"몇 학년이지?"
하연은 한 아이에게 다가가 물어
보았다.
"삼학년이에요."
아이는 바쁜지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하며 뛰어간다.
3학년 수업은 몇 시에 끝나는지 물어 볼
겨를이 없다.
교문 밖으로 나온 몇몇 아이가 한결같이
다 바쁘다.
하연은 머쓱해서 물러섰다.
집에서 하루 종일 시계만 보며
기다리기도 했는데 지척에 은지를 둔
마당에 앞으로 몇 시간인들 더 못
기다리랴.
다시 차임 벨이 울리고 몇 째
수위는 아까부터 학교 앞을
왔다갔다하는 하연이 수상쩍은지 자꾸만
교문 밖에 나와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는
들어간다.
하연은 수업이 다 끝나서 은지가
나온다고 해도 걱정이다 싶다.
친구와 어울려 나오다 하연을 보면
반가워할까, 난처해 할까.
"얘 누구니?"
친구가 안 물어 볼 리 없고 그러면
은지는 틀림없이 난처해질 것이다.
난처하다 못해 울어 버릴지도 모른다.
하연은 뒷걸음질치다시피 해서 학교
앞을 벗어났다.
교문 앞에서 만날 생각을 하다니, 큰일
날 뻔했다는 생각이 든다.
골목 끝에다 차를 세웠다.
여기나 교문이나 마찬가진데 어떻게
하나.
그러나 돌아갈 생각은 나지 않았다.
자동차 안에서 하염없는 생각에 잠겨
있느라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몰랐다.
갑자기 골목이 미어터질 듯 아이들이 몰려
나오기 시작했다.
하연의 가슴이 쿵쿵 소리를 냈다.
마음은 급했으나 차 밖으로 나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몰려 나오는 아이들 전부가 은지 같다.
그 경황에도 여학교 시절 읽었던
미당(未堂)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난다.
경기여고 앞에서 하얀 제복의
여학생들이 몰려 나오는 것을 보고 썼다는
순아, 너 내 앞에 참 많이도
오는구나......
그때 하연은 그 시에 반대의견을
가졌었다.
비슷한 소녀들이 수천 명이 몰려 나와도
순이는 순이지, 어떻게 특별한 한 여자인
순이가 그들과 혼동된 채로 참 많이도
온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런데 아니었다. 하연의 눈에도
울긋불긋한 아이들이 모두 은지였다.
수많은 은지가 재잘재잘 떠들면서
하연의 차 앞을 무심히 스쳐간다.
그렇게 스쳐가는 은지들을 보느라고
정작 은지가 나오는 것은 보지 못했다.
갑자기 차 문이 열리면서 은지가 차에
올랐다.
느닷없는 방문객의 기습이라도 받은
것처럼 놀라서 하연이 은지를 쳐다보았다.
요술방망이가 은지 나와라 뚝딱 한 것
같다.
"언제 나왔어? 난 못 봤는데."
"가면서 얘기해."
하연은 차를 출발시켰다.
얼핏 보니 은지는 하연이 그닥 반가운
얼굴이 아니다.
"아픈가 하구...... 하두 안 와서."
하연이 변명처럼 말했다. 그러나 은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면서 얘기하자고 해 놓고 은지는 전연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아프진 않았지?"
"응."
"응."
"시험봤었니?"
"응."
"그래서 시간이 없었구나."
하연은 제켠에서 변명의 구실을 준다.
그러나 그 말엔 대답하지 않았다.
"왜 무슨 일이 있었니?"
"......"
"엄마가 찾아와서 싫어?"
"......"
"난 그냥 먼발치서 잠깐 얼굴이나
볼려구 그랬어."
"......"
"배고프지? 우리 어디 가서 저녁
먹을까?"
"......"
하연은 온갖 말을 다 주워 섬겼으나
은지는 시종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내가 오는 게 그렇게 싫으면 다신 안
올께. 그럼 됐지?"
"......"
하연은 한숨을 쉬었다. 느닷없이
하교길에 엄마가 나타났다고 해서 이렇듯
냉담할 수가 있는가. 그게 그렇게 싫으면
다신 안 오겠다고까지 했는데.
하연의 마음이 은지를 상대로
삐죽거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딸아이라는 게 이럴 수가 있담.
오죽이나 보고 싶으면 찾아왔을까 그
생각은 못해 주고.
차는 방향도 없이 달리고 있었다.
할지, 즈이집 쪽으로 가야 할지 하연의 집
쪽으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잡을 수가 없어
무턱대고 앞차 꽁무니만 따라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은지가 울음을 터뜨렸다.
하연은 당황했다.
예기치 않았던 아이의 울음에 하마터면
우는 아이를 달래려고 핸들을 놓을
뻔했다.
차를 어디다 세웠으면 좋겠는데
1차선으로 가고 있던 차를 갑자기 세울
수도 없다.
하연은 차선에서 눈을 뗄 수가 없어
오른손으로 은지의 무릎을 잡았다.
왜 그래?
손은 그렇게 묻고 있었지만 입으론 웬지
속상한 듯한 아이의 울음이 말로 변하면
그것이 어떤 말이 될지 듣기도 전에
겁부터 났다.
나로서는 얼굴 한번 본다고 찾아간 일이
이 아이에게는 그토록 속이 상하는
일이었단 말인가.
일견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면서
원망스런 생각이 들었다.
오냐, 알았다. 내 다시는 학교로 널
찾아가지 않으마.
하연의 생각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아이가 울음을 그쳤다. 그리곤 휴지 한
장을 뽑아 코를 풀었다.
"망할 자식."
혼잣말로 낮게 내뱉는 소리였으나 그
말이 어찌나 야무진지 하연의 귀에 단단한
하연이 힐끗 아이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아이는 여전히 창밖만 보고
앉아서 코 푼 종이를 돌돌 말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니?"
어쩌면 아이의 울음이 자기가 아니라
다른 방향의 것인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조심스럽게나마 말을 꺼내게 했다.
설마하니 엄마를 보고 망할 자식이란 소린
하지 않았겠지.
"......"
아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으므로
하연은 다시 물었다.
"엄마 들으라고 한 소리였어?"
"귀찮아. 말 시키지 마."
야박하기도 해라. 하연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은지가 속상한
얘기를 쏟아놓기 시작했다.
"어제가 기태 생일이었거든. 그래서
내가 생일선물을 하나 보냈는데 오늘 글쎄
3반에 있는 지영이 편에 그걸 도로 보냈지
뭐야. 자기는 그런 거 안 받겠대나 받을
수가 없대나 뭐 그딴 소릴 해가면서. 기가
막혀서. 그렇다고 지영이 편에 보낼 건
뭐냔 말야. 얼마든지 나한테 직접 얘기할
수도 있는 걸 갖구. 도대체 사람을 뭘루
알구, 망할 자식 같으니라구."
그 얘기를 듣는 동안 하연의 가슴은
두세 번 덜컥 소리를 냈다.
아이의 울음이 하연을 원망하는 것이
아닌 건 다행이었으나 , 그러나 이건
원망보다도 더 무겁게 만드는 얘기였다.
하연은 옆에 앉은 은지를 느낌으로 다시
그래, 이 아이는 이제 어린 아이가
아니구나. 헤어진 엄마만 애타게
그리워하는 그런 어린 아이가 아니구나.
기태가 누군진 모르지만 제 또래의
남자아이 때문에 속이 상해서 우는 그런
나이에 다다라 있구나.
한편 서운하고 한편 놀랍기도 했다.
하연은 차선을 바꿔 우회전했다. 차가
우회전을 하든 좌회전을 하든 은지 쪽에선
아무 말이 없었다.
기태에 대한 야속함만이 가득 차서
차의 방향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하연은 '샹그리라'라고 쓰인 경양식집
앞에 차를 세웠다.
차를 세운 후 비로소 하연은 은지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은지는 여전히 창밖만
"내리자."
말없이 은지가 차에서 내렸다.
시간이 어중간해선지 경양식집 안은
한산하고 조용했다. 흐느끼듯한 바이올린
소리가 혹시나 아이의 감정을 건드릴까
걱정이 됐지만 다행히 그 소리에 신경이
휘말리지는 않는 듯했다.
웨이터가 다가와 메뉴판을 건네
주었지만 은지는 그것을 받아서 테이블
위에 놓았을 뿐 들쳐 보지도않았다.
"봐. 먹구 싶은게 있나."
"......"
"엄만 배고파."
아이의 검고 서늘한 눈이 하연을
향했다. 속순썹은 아직도 물기에 젖어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이쁜지 기태도
"골라 봐. 먹고 싶은 거."
아이는 메뉴판을 보는 대신 웨이터를
향해 물었다.
"오므라이스 돼요?"
"네, 됩니다."
"그거 주세요 난."
배라먹을 것 같으니라구. 가재요리니
뭐니 맛있는 게 잔뜩 있는데 모처럼
찾아온 엄마 김을 새게 해두 유분수지
오므라이스가 뭐람.
하연은 오므라이스 둘을 시켜 놓고
은지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쳐다보아도 앳되고 말간 그
얼굴에 남학생이 끼어든 흔적은 어디에도
없는 듯이 보인다.
아직은 엄마밖에 모르는 그런 얼굴
"기태가 누군데?"
하연이 물컵을 들어 입술을 조금 축이며
예사로운 듯 말을 꺼냈다. 그러자 은지도
물컵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누구라구 해두 몰라, 엄만."
"그러니까 어떤 애냐구?"
"그냥 그런 애야."
은지는 성가신 듯 물컵을 소리나게
테이블에 놓았다.
"그냥 그런 애 때문에 속이 상할 정도로
시시한 애니 넌?"
은지의 눈썹이 분한 듯 파르르 떨리더니
금방 또 눈물이 하나 가득 고인다.
"엄만 그렇게밖엔 말을 못해?"
"니가 대수롭잖게 얘기하니까 나두
그렇게 말할 수밖에 더 있니?"
얘기가 이렇게 되면 안되는데. 하연은
속이 탔다. 물 한 컵을 다 마셨다.
아이와 마주 앉아 조곤조곤 뭔가 다정한
얘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생각잖은
남학생의 등장으로 하연은 자기 수준에서
한 단계 끌어올려진 듯한 어려움을
느겼다.
오므라이스가 왔으나 은지는 오이피클
한 조각만 집어먹고는 포크를 놓아
버린다.
"왜 그래? 먹잖구."
"천천히 먹으면 안돼? 음식 왔다구 꼭
그 자리서 허겁지겁 먹어야만 돼?"
기태에 대한 역정이 온통 하연에게로 다
퍼부어진다.
하연이 웃었다. 어이없고 기가 막혀서
은지가 또 하나의 오이피클을 집으며
하연을 향해 눈을 흘겼다.
엄마한테 역정을 낸 게 조금 미안한
얼굴이었다.
"그래 천천히 먹자. 천천히 먹을수록
좋지 뭘. 내 딸 얼굴 오래 볼 수 있구."
"기태 얘기 듣구 싶어?"
"그래, 듣구 싶어."
다소 쓸쓸해지는 느낌으로 하연은
대답했다.
솔직히 난 니 얘기를 듣고 싶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일들을 했는지. 이 자리에서 남의 집
아들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라고 그 얘길
들어야 하니? 하지만 니 생활에 그 아이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으니 안
"어떻게 알았어?"
하연은 흡사 재미난 얘기라도 기대하는
듯 최대한의 관심을 나타내 보였다.
"나는 걔 땜에 다리 부러지는 줄
알았어. 스키두 탈 줄 모르면서 중급자
코스에 와 가지구 정신 없이 부딪치구
그러는 거 있지."
은지의 얼굴에 조금씩 즐거움이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난 첨에 되게 신경질이 났어. 걔 땜에
눈밭에 뒹군 게 한두 번이라야지. 근데
리프트를 같이 타게 됐지 뭐야. 옷을
보니까 걔더라구. 한마디 해줄까 하다가
잘난 척하는 것 같아서 가만 있었는데
리프트가 글쎄 중간에서 서 버리지 뭐야.
난 그때까지도 사실 그 애가 어른인지
있었으니까.
근데 자긴 대정고등학교 일학년이래.
그러면서 내가 자기보다 위로 보였는지
누나 스키 잘 타던데 나 좀 가르쳐 줘요
그러지 않겠어?"
그 말을 하는 은지의 얼굴이 눈 속에 핀
꽃처럼 환해졌다,
기태를 만난 얘기는 계속됐다. 그리고
그 얘기가 계속되는 동안 은지의 얼굴은
점점 환해지고 목소리는 즐거움으로
또랑또랑해졌다.
그런 딸을 향해 하연은 계속 미소를
띄워 주며 듣고 있었지만 가슴 속에선 쉴
새 없이 원망의 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 겨울 엄마는 늙은 노파처럼 방구석에
그래 그 아이에게 스키 가르쳐 주는
재미에 엽서 한 장 띄울 생각도 못했단
말이지? 잘한다. 잘하는 짓이야.
"한번은 날더러 김지영이란 앨 아느냥.
우리 학교에 다닌대. 일학년 때 한반 했던
적이 있다구 그랬더니 그 애가 요즘 자기
골을 때리구 있대나."
이때부터 은지의 꽃봉오리 같던 얼굴은
꽃잎을 닫기 시작했다.
"그래 놓구선 그 애한테 내 선물을
되돌려 주라고 했어. 아마 그랬겠지. 요즘
내가 자기 골을 때리구 있다구."
하연의 가슴에서 끓고 있던 원망이 쑥
들어가 버렸다.
"엄마 왜 그러지? 남자애들?"
느닷없이 기범의 얼굴이 쑥 떠오른다.
하고 혀를 내민다.
내가 스무 살 때 당했던 일을 내 딸도
당하는구나 생각하니 기태란 놈을 잡아
주리를 틀어놓고 싶다.
"잊어버려. 더러 더러 그렇게 시시하게
노는 애들이 있어."
그러나 은지는 시시하다는 말에 승복을
안하는 얼굴이다.
"말은 그랬어. 자긴 지금부터 입시준비
때문에 딴 생각할 겨를이 없다구."
"정말 요즘은 고등학생만 됐다 하면
대학 때문에 정신이 없나부더라. 고2
됐으니까 그러기도 하겠지."
하연은 그 쪽으로 생각을 바꿔 주는 게
위로가 될 거 같아 그렇게 얘기했다.
"그렇다고 생일선물을 되돌려 주는 건
하연은 은지를 본다.
낸들 알겠니? 그것도 사내라고 사내
짓을 하는 모양인데. 그것보다 은지야, 난
니가 그런 하찮은 일에 마음을 쓰기엔
너무 아깝단 생각이 든다. 좀 의연할 수
없겠니? 그런 녀석이 한 트럭쯤 와도 눈
하나 깜짝 않을 만큼 좀 근사할 수
없겠어?
은지에게로 향한 그 생각이 간절한 만큼
하연은 자신의 스무 살이 온통 후회로
범벅이 되고 있었다.
기범이 자신으로부터 돌아섰을 때
자신도 지금 은지에게 바라는 것처럼
의연했으면 복수라도 하듯 결혼을
서두르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지금쯤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훔치듯이 만나고 있지 않을 텐데.
오므라이스는 차갑게 식었고, 두 사람
다 그것을 먹을 기분은 아니었다.
하연이 커피를 시키자 은지가 나두 하고
말했다.
"엄마, 로보캅 봤어?"
"로보캅이 뭔데?"
"영화. 걔가 스키 가르쳐 줬다구
대한극장에서 그거 보여줬어."
아이는 아직도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은지야."
"응?"
"니네 친구 중에두 남자친구 사귀는 애
있니?"
"있겠지 뭐."
들어?"
"어떤 생각이 들다니?"
"말하자면 그런 게 좋게 보이냐구."
"좋구 안 좋구가 어딨어? 사귀면 사귀는
거지."
"난 니가 콧대가 아주 높아가지구
남학생 같은 건 거들떠도 안 보구 그럼
되게 근사할 것 같애."
"가자."
은지가 재미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는 건 싫어?"
"글쎄 그게 근사한 건지 안 근사한 건지
난 잘 모르겠어."
하연은 자신도 해내지 못한 일을
딸아이에게 주문해 놓고 그것을 조금도
그들은 싸운 사람처럼 서로 속이 상해서
말없이 차에 올랐다.
구기터널 쪽으로 차를 몰면서 하연은
오늘 은지를 만나 그들만의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 너무나
서운했다.
"은표는 학교 잘 다니지?"
"......."
"그 윗도리는 언제 산 거니? 좀 작아
보인다. 엄마가 옷 하나 사 줄까?"
",......"
"왜 그래 또? 말두 않구."
"골목으로 꺾지 말구 터널 못미처 세워
줘. 저기 공중전화 박스 보이지? 거기."
"왜?"
"그냥 그렇게 해줘."
"엄마한테 왜 그래 너? 이러구 헤어지면
엄마 맘 편하니?"
"......."
하연은 은지가 가리키는 장소보다 훨씬
못미처에 차를 세우고 야단치듯 은지를
쳐다보았다.
은지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까처럼 미안하다든가 하는
표정도 없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더니 돌연 차 문을
열고 내리더니 뒤도 안 보고 말했다.
"엄마 결혼해. 다시는 나 찾아댕기지
말구."
쇠망치로 뒤통수를 맞았다고 이렇듯
아득할까.
하연은 멍청하게 앉아 전화 박스 속으로
기태에게 전화를 하는 걸까? 아니면
지영에게 다시 한번 확인을 해보는 걸까?
지금 저 아이 마음속엔 오로지 그
생각뿐이어서 엄마의 얘기가 다소
성가셨다 하더라도 절벽에서 떠밀어
버리듯 결혼하라니! 찾아다니지 말라니!
충격도 너무 크면 충격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설마하니
그런 말이 어찌 있을 수 있는가.
하연은 쫓아가서 은지를 붙들고 자기가
들은 말이 과연 정확하게 들은 말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생각일 뿐 몸은 정확하게
알아듣고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떨고
다시는 찾아다니지 말라구?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듯 앞이 안
보였다. 그 소나기 속에서 은지가 전화
박스를 밀치고 나오는 게 보였다. 그리고
곧바로 골목으로 뛰어들어 가는 것도.
아주 놓쳐 버리기 전에 난 저 아이를
한번 더 봐야 한다. 그리고 무슨 말인가
더 들어야 한다. 은지야, 은지야.
그러나 후들거리는 전신은 제자리에서
꼼짝도 못하고 꺽꺽거리는 울음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얼마를 그러고 있었을까. 주차위반으로
교통순경이 딱지를 떼려다 미친 듯이 울고
있는 여자에게 말도 못 건네고 가버렸다.
창식이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닷새가
지난 밤이었다.
낯이 설었다.
"웬일이야, 전화도 없이."
하연은 소파에 기진한 듯 누워 있다가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키며 아무 억양도
없는 목소리로 창식을 올려다보았다.
"전화하면 용건도 말하기 전에 끊어
버릴 것 같아서 그냥 쳐들어 왔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창식이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죽어 버리고 싶어."
생각잖은 말이 불쑥 튀어 나왔다. 닷새
동안 일도 안 나가고 안방에 누웠다가
소파에 누웠다가 몸부림을 치면서도 죽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불쑥 그 말이 튀어 나오자 닷새
내내 그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같이
"그래선 안되죠."
"은지를 만났어."
창식에게 그럴 생각이 아닌데도 걷잡을
수 없이 하소연이 터져 나왔다.
"은지가 날더러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또다시 울음이 해일처럼 하연을 덮쳤다.
하연이 울고 있는 동안 창식은 아무
말이 없었다. 우는 하연을 달래려 들지도
않았다.
울다 울다 제풀에 기진한 하연은 문득
한 가닥의 희망을 느꼈다.
창식이 왜 왔을까? 혹 은지의 사과를
전하러 온 건 아닐까?
어린 생각에도 제가 너무했다 싶어
"우리 엄마 좀 찾아가 봐주세요. 내가
속상해서 내뱉은 말 때문에 우리 엄마
자살이나 안했나 몰라. 빨리요. 빨리 좀
찾아가 봐줘요. 그리구 절대 진심이
아니라고 전해 주세요."
그래, 진심이 아니겠지. 자식이 엄마를
절벽 끝으로 밀어 버리는 일이 어찌
진심일 수 있겠어. 됐다, 은지야.
그것으로 됐어.
혼자 대답하며 하연은 울음의 끝을 죽여
나갔다. 곧 그 이야기를 창식으로부터
들을 수 있으리라.
그러나 창식은 거푸 담배만을 피울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닌가. 이 사람은 은지 때문에 온 게
아닌가 그럼.
말인가를 재촉하는 듯한 하연의 시선을
느끼자 피우던 담배를 끄고 곤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은지가 날 찾아왔었어요."
역시 내 생각대로군. 그래, 찾아와서
나한테 잘못했단 말을 전해 달라더란
말이지.
"은진 부담스러워 하고 있어요."
"......?"
"누님 심정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아이들에게 너무 끈끈하게 하지 마세요.
그걸 감당할 만한 나이가 아니잖습니까."
소파 팔걸이 얹혀 있던 하연의 팔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이 다음 어른이 돼서 제 생각 제
주장대로 살 나이가 되면 반드시 엄마를
그때까지 참으셔야겠어요."
"......."
울고 울고 또 운 끝이라 노여워할
기력도 없다.
하연은 자신의 몸뚱아리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텅텅 비어가는 것을 느꼈다.
두들기면 텅텅 소리가 날 것 같다.
그 소리는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울리고 또 울려서 점점 공명이 커지고
있다.
"은지는 고민하고 있어요."
하연의 내부에서 울리는 공명이 그
소리를 밀어냈다.
"가! 돌아가!"
이것은 애정이란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일방적인 폭행이다, 라고 하연은
마음대로 왔다가 이쪽에서 사랑을
준비하면 홀연히 떠난다. 자기네들만
부담스럽고 자기네들만 고민하는 줄 안다.
이쪽이 어떤 상처를 받는가는 상관
밖이다.
하연은 그러면서 생각한다. 내 사랑도
장님과 같았다고. 나도 이제는 나를 위해
불을 밝혀야 한다. 하연은 입 속이 남아
있는 울음을 모두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