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12월9일3부 예배] 본문 : 롬5:5-8절 제목 :부끄럽지 않은 소망[5] ♬410.344 기도 : 시무권사 고금자
기도 :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 합니다.
찬송 : ♬343 울어도 못하네 (엡2:8~9, 신뢰와 확신)
1 울어도 못 하네 눈물 많이 흘려도 겁을 없게 못하고 죄를 씻지 못하니 울어도 못 하네
후렴 :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 고난 보셨네 나를 구원하실 이 예수밖에 없네
2 힘써도 못 하네 말과 뜻과 행실이 깨끗하고 착해도 다시 나게 못하니 힘써도 못 하네
3 참아도 못 하네 할 수 없는 죄인이 흉한 죄에 빠져서 어찌 아니 죽을까 참아도 못 하네
4 믿으면 하겠네 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혜를 힘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
기도 : 시무권사 고금자
본문 : 롬5:5-8절 제목 :부끄럽지 않은 소망[5][합독 시무집사 이용진]
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의 자녀가로 선택받아 소망을 안고 사역하시는 모든 사역자들에게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더 하여 행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옆 성도에게 인사합니다.
① 소망으로 전진하시기를 바랍니다.
② 소망으로 더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할렐루야!
금주중식과 간식으로 봉사하신 가정에 하나님의 축복을 위하여 박수로 영광을 돌립니다.
주인이 먼 길을 떠나며 두 사람의 종에게 각각 한 채씩 집을 지어달라고 했습니다.
돈 아끼지 말고, 최고급 자재로 최신식 인테리어를 곁들인 집을 지으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의 종은 주인의 당부대로
주인이나 그 아들이 살집이려니 생각하고 최고급 주택을 건축했습니다.
면밀한 설계, 탄탄한 시공, 최고급 자재로 최신 문화주택을 완공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의 종은 심술이 나 있었습니다.
‘사는 집이면 됐지 무슨 놈의 집을 또 지으라는 건가.
아들도 좋은 집에 살고 있는데 웬 집 타령인가.’라며 저질 자재만을 골라 불량시공으로 건축을 마무리했습니다.
날림 집을 지은 것입니다.
주인이 돌아와 두 종을 불렀습니다.
“그동안 수고들 했다. 나를 위해 몸 아끼지 않고 봉사한데 대해 보답을 하고 싶다.
너희들이 그동안 정성 들여 지은 집을 선물로 주고 싶다. 받아주기 바란다.”
한 사람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고, 한 사람은 땅을 치며 후회했습니다.
2018년도 표어 : 지경을 넓혀 가는 교회[미7:11]
네 성벽을 건축하는 날 곧 그 날에는 지경이 넓혀질 것이라.
12월은 :소망의 지경을 넓히는 교회[시62:5,6]
5 나의 영혼아 2)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 도다.
6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본문 : 롬5:5-8절 제목 :부끄럽지 않은 소망[5]
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5:5절에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연단을 통해 이루어진 소망이 부끄럽게 하지 않는 근거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성도 가운데 계시며 역사하시는 성령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성도에게 ;
하나님의 약속을 보증해 주시는(인쳐 주시는) 분이시기에 ;
전신앙(全信仰)의 과정에 함께 계시고 보증하신 그 약속이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한편 '성령으로 말미암아'에 해당하는 헬라어는('디아 프뉴마토스')입니다.
이처럼 헬라어 전치사('디아') 다음에 목적격인('프뉴마')가 오지 않고 소유격인( '프뉴마토스')가 온 것은
성령이 원인이나 결과가 아니라 ;
하나의 수단 내지 방법이 됨을 암시합니다.
본문 외에도 신약 성경 전체에서 '디아' 다음에('프뉴마')가 온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다만('엔 토 프뉴마티')처럼 여격이 와서 방법을 나타낼 뿐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자랑할 것이 되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현재 자신이 성령으로 충만하다 하더라도 ;
이것으로 장래의 구원까지 보장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구원에 이르는 방법이요 수단이므로 중요한 것은 ;
성령 그 자체보다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가까이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가 아니면 하나님께로 갈 수 없는 것입니다(요14:6).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라고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성도와 함께 계시는 결정적인 근거는 ;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계심은
하나님의 사랑이 성도를 향해 물 붓듯이 부어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바울은 8:39에서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본문의 '부은바 됨이니'에 해당하는 헬라어('여케퀴타이')는 ;
3인칭 단수 완료 수동태 직설법으로 '쏟아 부은바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이 액체처럼 쏟아 부어졌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충분히 넘치게 부어졌을 뿐만 아니라 ;
모이는 물처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성도들에게 베풀어졌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하면서 ;
그 사랑의 표현이 가장 절정에 이른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첫째 : 우리가 연약할 때에 죽으셨도다[6]
둘째 : 인인과 선인을 위하여 죽는 자[7]
셋째 :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8]
첫째 : 우리가 연약할 때에 죽으셨도다[6]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5:6절에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라고 언급함으로써
본문의 의미를 보충하며 더욱 명확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엡2:3에서 ;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진술하고 있듯이,
'연약할 때에'는 ;
믿음이 약한 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시점을 가리킵니다.
이는 '연약할 때에'로 번역된 헬라어('아스데논')의 의미를 살려볼 때 분명해집니다.
('아스데논')은 ('아스데네스')의 제2격 복수로서 ;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소망이 없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자연인은 ;
그 자신이 스스로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는 힘이나 소망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특히 바울이 '우리가 아직 연약하다'는 ;
사실을 말한 것은 ;
우리가 전혀 구원의 소망이나 그 길을 찾을 하등의 힘이 없었음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화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代贖)의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과 가치가 전혀 없었음을 강조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기약대로 -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카타 카이론')은 ;
'정해진 시기에' 또한 '적절한 때에'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경륜(經綸)이 세상 가운데에서 시행될 정확한 시점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요2;4;4:23).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일찍이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된 바이거니와(사7:14;53:2)
하나님께서 일을 행하실 때에는 막연한 시기에 하는 것이 아니라 ;
만세전(萬歲前)에 예정하신 계획에 따라 행하십니다.
본 절의 '기약대로'는 ;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때가 '적절한 시기'
즉 '인류에게 가장 소망이 없던 때'였음을 의미하는바,
사건이 이루어진 때의 중요성을 강조함과 더불어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구약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께서 기약대로 이 땅에 오셨듯이,
재림도 기약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마24:42-44).
실로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로서 당신의 영원하신 계획대로
인류와 유주의 역사를 다스리시며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민23:19).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라고 하셨습니다.
경건치 않은 자는 8절의 '죄인'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곧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이 죄인이며 또한 경건치 않은 자입니다.
한편 '...를 위하여'에 해당하는 ;
헬라어('휘페르')는 ;
그 외에도 '...대신에', '...에 관하여'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이 불경건한 자들의 입장에서 이루어진 대속적인 사건이었음을 나타냅니다.
첫째 : 우리가 연약할 때에 죽으셨도다[6]
둘째 : 인인과 선인을 위하여 죽는 자[7]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5:7절에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혹 있거니와 -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에서는 ;
①의인(a righteous man)과 ②선인(a good man)이 대조되어 있습니다.
혹자는 이 둘을 구분하여 '선한 사람은 의로운 사람보다 더 위대하다는 특징을 지닌다.'고 진술합니다.
물론 문자적으로나 그 의미상 두 용어는 엄격하게 구분됩니다.
의인이 정의의 차원에서 있는 ;
사람이라면 선인은 사랑과 덕을 베푸는 사람이라는 어감을 지니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히브리인들이 시문학에서 즐겨 사용하는 평행 대구법(parallelism)을 이용하고 있으므로
본문은 평행된 두 구절이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
나아가 서로의 의미를 보충해 주는 문장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본문은 의롭고 선한 사람을 위해 ;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가끔 죽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와 같은 본문의 핵심은 인간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을 위해 ;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가끔 출현할 수 있다는데 있지 '의인'과 '선인'을 구별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본문은 의롭거나 선한 사람을 위해 죽는 희생적 행위 자체도 죄인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는 결코 견줄 수 없음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절대적 사랑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인간 세상의 보편적이고 통속적인 사랑을 소개하는 ;
형식의 비교법을 사용하고 있는 본절은 8절의 내용의 서론격입니다.
본문이 8절 내용에 대해 서론격이라 함은 ;
의인이나 선인을 위해 죽는 자는 혹시 있을 수 있으나,
죄인을 위해 죽는 자는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점에 있습니다.
결국 본문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절대적 우위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는 너무나도 무가치하고 자격이 없는 인간의 본질적 양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첫째 : 우리가 연약할 때에 죽으셨도다[6]
둘째 : 인인과 선인을 위하여 죽는 자[7]
셋째 :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8]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5: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에 이르러 바울은 요점에 봉착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인들'(하마르톨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죄인'은 ;
도덕적으로 의롭거나 선하지 않은 사람일 뿐만 아니라 ;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시작된 인간의 전적 타락성과 부패성으로 ;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Calvin)은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의미는 9절에 ;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이라는 대조적 표현이 나옴을 볼 때 분명합니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대조적 표현은 희생된 생명의 무한한 가치와 그분으로 말미암아 ;
은혜를 입은 사람의 무가치성의 대조를 극명하게 해줍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바울의 표현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①'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렸으니'(갈1:4),
②'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고후8:9),
③'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엡5:2),
④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딛2:14)등으로 ;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으심에 대하여 풍부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편 '...을 위하여'(휘페르)라는 표현이 6-8절에서 모두 네 번 나옵니다.
그는 본문에서 이 전치사 대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있어 ;
대속적 측면을 강조하는 전치사('안티')때문에를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 까닭은 ;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함과 더불어 그 밖의 다른 것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희생이 주는 대속적 특징 이외에 ;
그리스도 안에 내재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따라 남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의미를 강조하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휘페르')라는 ;
단어의 사용은 매우 적절합니다.
하나님께서...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관계,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과 세상과의 화목(고후5:19)
그리고 영적으로 죽은 자를 사랑으로 이끄시는 ;
그리스도(요15:12,13) 등에 관하여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바울이 두드러지게 나타낸 것은 특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입니다.
그는 이것을 강조하여 ;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여기서 '자기 자신의 사랑'이라고 말함은 ;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이고 영원하며 참됨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사랑은 자기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 ;
모범을 따르는 사랑이요 배운 사랑입니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사랑은 ;
그 근원이 인간에게 있지 않고 그 사랑을 주신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요일4:10,19).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을 확고하고 구체적으로 ;
인간에게 드러내셨으니 ;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한편 본절의 '확증하셨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슈니스테신')은 ;
'추천하다', '드러내다'란 의미입니다.
그래서 영역성경을 '나타내 보여 주다'(demonstrate)로 번역하거나(NASB, NIV),
혹은 단순히 '보여 주다'(show)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본문에서 주목되는 것은 바울이 동사의 시제로 현재성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헬라어의 현재시제는 현재에 발생하는 단순한 사건을 기술하는 것 뿐 아니라 ;
현재 진행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슈니스테신'을 보다 정확히 번역하자면 ;
'나타내 보여주고 계시느니라.'(is demonstrating)로 됩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은 과거의 단 일회적 사건으로 끝이 났으나
하나님의 사랑은 바울이 본 서신을 쓰는 당시뿐 아니라 ;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도 끊임없이 부어지고 있음을 나타내 줍니다.
첫째 : 우리가 연약할 때에 죽으셨도다[6]
둘째 : 인인과 선인을 위하여 죽는 자[7]
셋째 :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8]
❖그러므로 지경을 넓혀 가기를 소원하는 사역자들은!=====>
찬송 / 410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 (딤후1:12, 은혜와 사랑)
1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후렴: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2 왜 내게 굳센 믿음과 또 복음 주셔서 내 맘이 항상 편한지 난 알 수 없도다.
3 왜 내게 성령 주셔서 내 맘을 감동해 주 예수 믿게 하는지 난 알 수 없도다.
4 주 언제 강림하실지 혹 밤에 혹 낮에 또 주님만 날 그곳도 난 알 수 없도다.
축도 / 당회장 고 승철목사
외침 / 믿음은 능력의 힘을 주십니다.
❀ 지경을 넓혀 행복합시다.
❀ 지경을 넓혀 형통합시다.
❀ 지경을 넓혀 승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