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강원도 - 남대천을 거슬러 올라오는 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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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1.10. 20:15조회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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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천을 거슬러 올라오는 연어
『여지도서』「풍속」조에 “농사와 잠업에 힘쓰고, 상례와 장례를 돕는다. 잔치를 베풀어 놀기를 좋아하며, 학문을 숭상하고 예의를 존중한다”라고 실려 있는 양양군은 본래 고구려의 익현현(翼峴縣) 또는 이문현(伊文縣)이었다. 신라 때 익령이라 고쳐서 수성군의 속현이 되었고, 고려 고종 때 양주방어사로 승격되었다. 조선 태조 때는 이성계의 고조할아버지인 목조의 외가 고을이라 하여 도호부로 승격되었으며, 태조 16년에야 지금의 명칭이 되었다. 안축이 양양향교(襄陽鄕校)를 두고 지은 기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대관령 동쪽은 산수가 기이하고 빼어났는데, 양양이 그 가운데 있다. 영령의 정기와 청숙한 기운이 반드시 허로 축적되지 않았을 테지마는, 100여 년 동안에 기이한 재주와 덕을 품은 사람이 이 고을에서 나와 인륜을 빛나게 한 자가 있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산수의 정기가 영험 없음과 고을 사람의 성품이 착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대개 이 고을은 예부터 오랑캐 지경에 이웃하여 변란이 여러 번 일어났으므로 학교를 세우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문장가인 강희맹이 “큰 들녘 동쪽 끝에 바다 해를 보고, 긴 숲 일면에 강 하늘이 보인다”라고 노래했던 양양 땅은 백두대간이 지나는 길목에 동해의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높고도 험한 산들과 함께 자리한다. 모양이 수려하여 매처럼 보인다는 매봉이 양양군 서면에 있으며, 점봉산(덤봉산)과 약수산 그리고 강원도를 대표하는 설악산이 있다. 조선시대에 어떤 사람이 점봉산 골짜기에서 엽전을 만들다가 발각된 이후 지금까지도 이 근처에서는 꽹과리 소리를 가리켜 “덤봉산 돈 닷 돈, 덤봉산 돈 닷 돈”이라 한다. 이러한 높은 산골짜기에서 남대천1)과 서림천, 물지천, 오색천 등의 물길이 발원한다. 강릉시 연곡면 오대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양양에서 동해로 들어가는 양양의 남대천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연어가 돌아오면서부터다.
연어는 북태평양의 베링 해와 캄차카 반도를 거치는 장장 1만 6000킬로미터를 모천회귀(母川回歸)라는 본능에 따라 헤엄쳐온다. 시인 안도현은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거슬러 오른다는 것은 지금은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간다는 뜻이지. 꿈이랄까, 희망 같은 것 말이야. 힘겹지만······ 아름다운 일이지. 그리고 그 연어가 아름다운 것은 떼를 지어 거슬러 오를 줄 알기 때문이야.
그러면서 이렇게 묻는다.
저 먼 곳 알래스카의 짙푸른 바다를 떠나 한반도의 크고 작은 강 남대천으로 연어들이 거슬러 오르는 이유를 아십니까? 거센 물살을 헤치고 높다란 폭포를 온몸으로 뛰어오르면서 좁고 가파른 강의 상류로 그들의 고향인 남대천으로 힘겹게 헤엄쳐 오르는 한 마리 은빛 연어를 아십니까?
연어들이 어떠한 연유로 고향을 찾아 회귀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모천의 특유한 냄새를 맡으면서 찾아온다 하고, 어떤 사람은 별을 보고 방향을 찾는다고 한다. 연어는 시속 200~300킬로미터 속도로 헤엄치는데, 북태평양에서 남대천까지 정작 보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한편 양양은 이름난 송이 산지다. 버섯 중 최고가 송이이고, 둘째가 표고, 셋째가 능이버섯이라고 한다. 어느 지방을 막론하고 송이밭은 딸에게도 알려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양양군 현남면 인구리에는 기이한 바위들이 둘러서 있어 장관을 이루는 죽도(竹島)가 있다. 예전에는 질 좋은 대나무가 많이 나서 화살용으로 나라에 진상했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 “양양대도호부 남쪽 45리 관란정 앞에 푸른 대나무가 온 섬에 가득하였다”라고 기록된 것처럼 죽도에는 관란정(觀瀾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고려 때 학자인 가정 이곡, 근재 안축, 통정 강회백 그리고 조선 성종 때 창파거사 이육이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시로 읊었다.
명사십리에 주문(朱門)을 열었는데
버들 그늘지고 꽃이 밝아 한마을이 되었구나
달이 동해에 돋으니 물결 망망하고
바람이 서새(西塞)에 부니 비가 침침하다
봉래와 영주(봉영蓬瀛)는 반드시 3000리나 격하지 않았고
운몽(雲夢)을 오히려 여덟아홉 개나 삼킬 듯하다
머리를 돌리니 장안이 어디멘고
응당 단공(端拱)하고 엄연히 높은 자리에 계시리라
그러나 아름다운 시에 등장했던 관란정은 사라져 지금은 빈터만 남았다. 죽도에는 북쪽 입구에 방선암(訪仙岩)이라는 큰 바위가 있고, 중허리에는 주절암(駐節岩)이 있으며, 동해 가에 연사대(鍊沙臺)가 있는데, 이 바위 위에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자국들이 있다. 일설에는 옛날에 신선이 주사(朱砂, 진한 붉은색의 다이아몬드 광택이 있는 괴상(塊狀) 광물)를 연마하던 자리라고 한다. 연사대 앞으로 한국전쟁 당시 날개 한쪽이 떨어져 나갔다는 학 모양의 바위가 있다.
죽도 북쪽으로 신선이 수도를 했다는 청허대(淸虛臺)가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산천」조에 “섬 밑 바닷가에 구유같이 오목한 돌이 있는데, 닳고 갈려서 교묘하게 되었고, 오목한 속에 자그마한 둥근 돌이 있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것이 전설에는 “둥근 돌이 그 속에서 이리저리 구르므로 닳아서 오목하게 된 것이며, 다 닳으면 세상이 바뀐다”라고 기록하였다.
“부 남쪽 25리에 있다. 바다 곁에 소나무가 10리를 연달아 푸르게 그늘져서 쳐다봐도 해가 보이지 않는다. 소나무 사이에 잡풀이 없고, 오직 산철쭉이 있어서 봄에 꽃이 피면 붉은 비단같이 난만하다”라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던 상운정(祥雲亭) 역시 사라지고 없다.
『용재총화』에는 “양양에서 남쪽으로 수리 떨어진 곳 길가에 돌이 서 있다. 항간에 전하기를 옛날에 암행어사가 주기(州妓)를 몹시 사랑하다가 이별하게 되자 시를 짓기를 ‘너, 돌은 어느 때 돌이뇨. 나는 금세의 사람이로다. 이별의 괴로움도 모르고 홀로 서서 몇 번이나 봄을 지냈던고’라고 하였다 하는데, 어떤 사람은 함부림(咸傅霖)이 지은 것이라고도 한다”라고 실려 있다.
남설악 주전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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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천을 거슬러 올라오는 연어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8 : 강원도, 2012. 10. 5., 신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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