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23일(월)■
(누가복음 17장)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묵상/눅 17:11-19)
◆ 예루살렘에 내려가시다
유대인들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내려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마리아를 피해서 가는 방법과,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방법이다. 대부분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꺼려서 거리가 수십km가 더 늘어날지라도 우회하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사마리아인들도 유대인들이 통과하는 것을 반대하기도 했다(눅 9:53-54).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셨다는 말씀은 사마리아를 우회하는 전통적인 길을 택하셨음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이 후에 여리고에 들러서 삭개오를 만난다(눅 19:1-2). 여리고는 예루살렘 동편에 있는 마을로서 유대인들이 갈릴리와 예루살렘을 오갈 때 사마리아를 우회하는 전통적인 길에 위치한다.
예루살렘에 내려가시는 길은 예수님 생애 마지막 여행이다. 아마도 예루살렘에서 붙잡혀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까지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시점일 것이다.
◆ 부요하신 예수님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나병 환자들이 열 명이 모여있었다.
이들이 예수님께서 지나신다는 소문을 듣고 멀리 서서 외쳤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에 예수님께서는 즉시 응답하셨다.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나병 환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인 줄 알았다. 율법에 의하면 나병 환자가 정결케 되면 제사장의 확인절차를 거쳐야 정상인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레 14:2-32) .
멀리 서서 외치는 나병 환자들의 요구는 사람들에게 종종 무시되었다. 그것이 당연시 되던 시대였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달랐다. 이들의 요구에 친절하게 응답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자기를 부르는 자들에게 부요하시다.
오늘날 우리들은 욕심으로 구하는 많은 것을 응답받지 못한다고 그의 부요하심을 의심하지만, 구원에 대해서만큼은 우리 주님은 절대적으로 부요하시다.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2-13)
◆ 감사하는 자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열 명이 모두 깨끗함을 받았지만, 사마리아 사람만 돌아와서 감사했다.
나병환자에게 있어서 나병이 깨끗함을 받은 것은 엄청난 사건이다. 본인에게는 오늘날 사법고시 붙은 것이나, 국회의원에 당선된 것보다 더 놀랍고 감격스러운 사건이다. 종종 우리 인생 속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아쉽고 간절할 때는 그렇게 겸비하고, 믿음이 진실해 보였던 사람이 막상 성취되고 난 뒤에는 다시 방자하게 된다. 하나님의 용도가 쓸모를 다했다고 생각한다.
대학 붙기 전에는 그렇게 기도도 열심히 하고, 고3임에도 예배에 늦지 않고 꼬박꼬박 참석하던 학생이 있었다. 그의 간절함에 나도 하나님께 그 학생만큼은 꼭 붙여달라고 간구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명문대학에 붙자마자 바로 그다음 주부터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다. 늦잠 잤기 때문이란다. 그다음 주에는 아예 아침에 깨우러 갔다. 그러자 잠을 깨운다고 짜증을 내었다. 몇 주 계속하다가 결국 나는 포기했다.
기복신앙의 결과가 이렇다. 내가 복 받는 경우에만 하나님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큰 복은 병 치유나 부자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바로 그 분이시다. 비록 여러 고난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을지라도, 결국 내게 가장 큰 복은 그분을 알게 된 것이다.
나병 환자 열 명 중에 아홉 명은 자신이 치유받아서 정상인 된 것이 너무나 기뻤고 이 소식을 빨리 가족과 친구들과 공유하는 것이 더 급했을 것이다. 그게 무슨 잘못이랴. 그러나 그들은 더 큰 복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게 된 것임을 알았어야 했다. 나병 환자들은 정상인이 된 것이 신날지 모르나, 며칠만 지나면 그것은 곧 시들해질 것이다. 사실 정상인들은 자신이 정상인인 게 그렇게 신날 일로 생각하지 않는다.
진짜 신나고 보람된 일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이다. 무한하신 하나님은 아무리 연구해도 끝이 없다. 그리고 알면 알수록 놀라운 삶을 살게 된다.
종종 기도 응답받았을 때, 큰 기쁨이 넘침은 단순히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보다 무려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과 내가 이런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 더 기쁘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이 엉터리 신앙이라고 무시했다. 그런데 그런 사마리아인은 예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했지만, 소위 세련된 신앙을 가졌다고 자부하던 유대인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 많은 지식과 신분이 무슨 소용이랴. 정작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감사할 줄 모르는데...
아, 우리의 감사는 종종 너무나 억지스럽고 간사하다.
우리는 진정으로 감사해야 할 상황 속에서도 감사에 몰두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감사할 줄 모른다고 비난하는 데 더 몰두한다. 우리는 잘난 체에 찌들어있고, 사람들의 칭찬만 추구한다. 진정으로 감사하다면 이 사마리아인처럼 주님 발 아래에 엎드리며 예배하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예배자는 다른 사람을 판단할 겨를이 없다.
주님은 이 사마리아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다. 우리의 믿음은 기적을 일으키지는 못하지만, 이렇게 칭찬받게 하고 하늘로부터 임하는 진짜 믿음을 체험하게 한다.
주 예수여,
저를 택해주시고, 구원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자랑에 찌들고 감사를 잊어버리는 악한 습성에서 구해주십시오.
진정한 예배자가 되게 해주시고, 감사가 넘치는 자로 살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