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이 한 번 와 보기만 하면 반해 버리는 방콕, 와서 살아 보면 떠나기 싫어하는 방콕의 비밀은 무엇인가?
한국인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근무 기간을 마치고 귀국한 사람들로부터 태국이 그립다는 말을 흔히 듣게 된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태국에 다시 가 살고 싶다고 들 한다.
방콕은 가장 아름다운 것과 가장 추한 것이 공존하는 도시 이다. 혼돈과 질서가 사이 좋게 같이 사는 도시 이다. 방콕은 천사와 창녀가 동거하는 도시 이다.
왕과 거지가 같이 사는 도시 이다. 밤의 얼굴과 낮의 얼굴이 다른 두 개의 얼굴을 가진 도시 이다. 낮에 보았을 때 우중충한 도시의 얼굴이 밤만 되면 화려하게 불야성을 이루는 도시 이다.
아메리칸 드림처럼 청운의 뜻을 품고 와서 일확천금을 할 수 있는 곳은 아니어도 남의 간섭 받지 않고 최대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도시 이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 수 있는 곳이다. 외국인이 크게 태국인의 적대감에 부딪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도시 이다. 사람들이 양순(良順)하고 외국인을 관용하는 분위기 탓이다.
정년 퇴직한 노인들도 젊은 여자와 같이 새 삶을 구가할 수 있는 곳 이다. 아름다운 몸매의 아가씨도 많은 반면 게이도 많은 도시 이다. 궁전 같은 실내장식에 무릎 꿇고 써비스 하는 호스테스가 있는 바에서 귀족처럼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이 있는가 하면 백밧으로 마실 수 있는 술집이 공존하는 도시 이다.
비가 많이 오기 때문에 오래된 건물의 벽들은 시커멓게 썩어서 불쾌하며 추하게 보이고 여기 저기 벽이 헌 집들도 많고 도심의 전봇대는 전깃줄 전화줄 이 얽혀 가로수들을 위협하고 있는 도시이다. 더운 날씨 덕분에 하수도 냄새로 코를 감싸쥐게 하는 도시이다. 그뿐만 아니라 시가지의 여기 저기에 흘러가는 개울물은 도시의 폐수를 담고 있어 검은 색이다. 그런가 하면 싯가 3천만 밧이라는 폴쉐와 버스 길이만한 링컨 컨티넨탈 리무진이 도심을 달리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태국의 전봇대는 4각이다. 뱀이 감고 올라가지 못하도록 4각으로 만들었다고 흔히 말들 하는데, 글쎄... 그게 이유일까? 서울의 전봇대는 모두 지하로 매설 되어 겉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방콕의 전봇대들은 해마다 늘어나는 전선과 전화선 덕분에 오버로드 된 듯 축 처져 있는 곳이 많고 도시의 미관을 해치고 있다. 때문에 수난을 당하는 것은 가로수들이다. 전깃줄이 걸리게 되면 사정없이 가지를 잘라내기 때문이다.
도심의 주요 간선(幹線) 도로 이외에는 인도의 보도블록이 잘되어 있지 않아 들쭉 날쭉이 심하고 숙녀들이 하이힐 구두를 신고 다니기에 매우 불편해 보인다. 게다가 날씨는 사철 폭염이 내려 붓기 때문에 10분만 걸으면 등에 땀이 흥건해 지고 와이셔츠가 달라 붙는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이런 불편하고 누추해 보이는 방콕에 한 번 살아 보면 잊지 못해 또 오고 싶어하는 것이다.
방콕은 인구 6천2백만 명이 사는 태국의 수도 이다.
인구 1000만명의 대도시인 방콕은 주민등록상 주민이 8백만 명이고 외국인이 약 20%인 2백만명 정도가 살고 있다.(외국인 숫자가 잘 파악이 안되기 때문에 달리 말하는 자료도 있다)
타이어로 방콕을 끄룽텝이라고 부르는데 '천사의 도시'라는 의미이다. 메남 삼각주의 풍부한 쌀의 집산지 이기도 하다. 여섯 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총장 4,800km인 메콩강의 지류 차오 프라야 강이 시가지 중심을 지나고 있다.
차오 프라야 강은 도시 곳곳으로 연결되는 운하를 거느리고 있어 방콕은 "동양의 베니스"라고 불려지던 도시이다. 도시를 무작위(無作爲)로 가로지르는 운하는 옛날에는 배가 다니는 주요 교통로 였다. 지금은 큰 건축물들이 들어서고 다리가 많이 놓여 배가 다니는 수로로는 가치를 잃은지 오래이다. 그러나 아직도 배에 손님을 싣고 다니는 운하가 있다. 값이 싸다는 것뿐만 아니라 러쉬아워에 버스보다 빠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강원도 지사 였던 최각규씨가 무역 사절단을 대동하고 태국에 온 적이 있다.
이분은 70년대 박정희 정권에서 내무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장관 시절 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한다. 칫롬의 하이얏트 호텔에 묵었는데 이 일대는 고급스런 건물과 호텔, 백화점, 월드 트레이드 쎈터, 폴로클럽등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분이 바쁜 일정을 마치고 이 일대를 돌아보고 "우리는 언제 태국만큼 잘 살아 보나?" 하고 생각 했었다고 고백했다.
지금은 우리가 여유를 갖고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나라도 잘 살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들보다 더 행복해 진 것인가?
오히려 사람들의 생활은 왜 더욱 각박해져 가는가? 민심은 왜 더욱 흉흉해져 가는가? 국민 소득이 조금 높다고 우리가 여기에 와서 태국인들을 얕잡아 보고 다녀도 되는 것인가? 개천에서 용이 되었다고 개천에서 살던 시절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이들을 비웃고 다녀도 되는 것인가?
우리는 세계인과 좀더 잘 지내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이방인과 어울려서 사이 좋게 살아 본 역사가 없다. 이방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서투르기 그지 없다. 태국인의 이방인과 잘 지내는 지혜에서 배워야 한다. 이방인을 관용하고 그들의 장점을 국가 발전에 끌어들이는 현명함을 이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5천년 역사에 평균 5년에 한 번씩 외침을 겪었다는 우리는 외국에 대해서 경계심과 적개심을 먼저 배운 것은 아닌지? 외국하면 먼저 우리는 침략을 떠올리게 끔 되어있다. 수난의 역사 탓이다.
경제 규모에서 세계 12위라는 우리는 이제 아시아의 선진국이다. 과거의 외세관 만 가지고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국수주의와 유대인적인 민족주의만 가지고는 21세기 역사를 선도하는 진정한 선진국이 될 수 없다. 이민족과 잘 지내는 자가 글로벌 시대의 강자 이다. IT 기술의 발달로 국내 뉴스가 더 이상 국내 문제 만이 아니다. 인터넷의 일반화로 국내 뉴스는 거의 동시에 전세계에 접속된다. 대통령 탄핵을 우리만큼 세계가 긴장하면서 지켜보는 시대이다.
우리 가치관의 잣대만을 들고 다니며 세계인에게 들이대서는 그들을 감동시킬 수 없다. 20세기는 자본 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양대 사상에 의해서 세계가 지배 되었다. 그러나 21세기를 시작하는 지금 한 가지 사상은 죽어가는 폐병환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어떤 사상이 21세기를 지배 할 것인가? 분주하게 외국인과 교류하지 않고는 새로 태동하는 지배 철학에 뒤지는 자가 될 것이다.
앞으로 오는 21세기를 세계의 3류 국가로 전락하여 세계사의 뒤안 길을 방황하는 서러운 역사를 되풀이 하려는가? 우리는 외국인과 지내는 매너에 아주 서투르다. 많은 외국인과의 교류로 이제부터 그 지혜를 터득해 가야 한다. 여기에 우리는 겸손한 자세로 태국인 들에게서 무언가 배워야 할게 있는 건 아닌지...?
한 영국인 한테 태국을 왜 좋아 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You can enjoy maximum freedom in this city." 라고 대답했다. 자유스럽게 무슨 일이던 다 할 수 있다는 얘기 이다.
방콕의 길거리에는 항상 세계 가지각색의 인종들이 다니고 있다. 특히 서양 사람들이 많은데 아시아 나라 중에 이처럼 서양 사람이 많이 오는 도시는 방콕 말고는 없는 것 같다.
태국인은 외국인에 대해서 거부감이 없는 것 같다. 외국인에 대해서 배타적이지 않다.
이방인에게 언제나 따뜻한 눈 길을 보내고 미소 짓는다. 미소는 태국인의 특성중의 하나 이다. 때문에 태국은 "미소의 나라" 라는 별명을 얻었다. 역사적인 이유와 문화적인 배경이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관광 산업을 위해서 외국인에게 미소 지으라는 캠페인을 벌이고 미소를 억지로 파는 것이 아니다. 생활이 고달파 보이는 아파트 청소부들도 시장 바닥에서 배추 장사를 하며 그 날 그 날을 살아가는 도시 서민층 사람들도 한인 가정에서 일하는 식모들도 미소를 잃지 않고 살고 있다.
춥고 음습한 날씨를 갖고 있는 독일이나 영국, 스웨덴 등의 북 구라파 나라들의 노인들이 정년 퇴직하고 사철 따뜻한 태국에 와서 사는 사람이 많다. 이들은 대개 태국의 젊은 여자들과 동거 하고 있다. 태국인이 외국인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는 예이다. 저희 나라라면 어림도 없는 수작이지만 이는 또한 태국인들이 명분을 찾기보다는 실용주의적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태국의 국민성은 순하고 부드러운 편이다. 연장자나 윗 사람을 존경하고 그들의 말에 잘 순종 한다. 학생들은 스승에게 무릎 꿇고 과제물을 제시하고 어른들은 부처와 승려에게 합장배례(와이) 하므로서 예를 표한다. 여기도 역시 공자의 장유유서(長幼有序) 사상이 영향을 미치는 동양권 이다. 나도 회사에서 여러 명의 직원을 겪어 보았는데 순종적이라는 인상을 뒷 받침 해주는 사람이 많았다. 집에서 식모를 고용해도 대개 말 잘 듣고 주인을 거역하지 않는다.
처음 방콕에 온 사람은 승용차, 버스, 삼륜차, 오토바이가 내는 소음과 공사장에서 나는 포크레인으로 땅파는 소리, 건축 현장의 철빔 박는 뇌성과 같은 '땅 땅'거리는 소리 등 귀에 거슬리는 소음에 놀란다. 철물점에서 철판 자르는 소리, 건물의 바닥재로 쓰이는 대리석 깎는 소리, 주차장의 호루라기 소리 등의 소음에 짜증을 내기도 한다. 동네에서는 가끔 젊은이들이 골목에서 늦은 밤까지 술을 마시며 양동이 등을 북 삼아 두드리며 노래하는 소음에 시달리기도 한다. 가히 소음 공화국이다.
그런가 하면 방콕은 교통 지옥이라고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비만 오면 교통 체증은 절정을 이루는데 한 시간씩 길바닥에 차가 서 있어야 되는 때도 있다. 비가 많이 오면 물이 잘 빠지지 않기 때문에 물이 차서 자동차가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방콕은 지면의 높이가 해발 1미터 밖에 안 된다. 도심은 지난 10년 동안 객토를 하고 포장을 다시 해서 물이 차는 곳은 거의 없어졌으나 변두리는 여전히 물이 찬다. 그런가 하면 방콕의 길들은 도시 전체가 미로 이다. 옛부터 있어온 자연 발생적인 길들을 조금 넓혀서 현재까지 쓰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난마처럼 얽혀있는 수로 때문에 길을 곧게 내지 못했다는 것이 또 다른 이유 이다.
방콕에는 오토바이가 많다. 또 택시 오토바이가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생소하다. 교통 체증이 심할 때 택시 오토바이는 진가를 발휘한다. 차는 멈춰 있어도 오토바이는 차들의 사이 사이를 뚫고 계속 앞으로 전진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토바이는 위험하기도 하다. 사고가 많다. 나는 길거리를 걷다가 눈앞에서 사고가 나는 현장도 여러 번 목격했다. 금년부터 정부에서는 오토바이 운전면허증을 발급할 때 오토바이 사고 현장 사진 전시관을 둘러보도록 하는 것을 의무화 하고 있다.
마이카 시대는 보통 오토바이 시대를 거쳐서 온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은 오토바이 시대를 건너뛰어 곧바로 자가용 시대로 들어선 경우 이다. 세계 초유의 고속 경제 성장을 여기서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태국은 지금 오토바이와 자가용차가 공존하고 있는 시대인 것처럼 보인다. 아침 출근시간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직장 여성들이 오토바이의 뒷좌석에 모로 앉아 바란스를 잡고 가는 모습은 방콕의 또 하나의 볼거리 이다.
방콕은 환락가가 많기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해마다 외국 관광객이 1천만명 이상 찾아 오고 있다. 관광객의 속성이 먹고 마시고 놀고 쇼핑하는 것이다. 이들이 원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돈 벌이가 될 것이다. 관광은 쌀과 함께 주요한 이 나라의 외화 수입원이다. 그러다 보니 무희가 출연 하는 술집이 많고 창녀도 많다. 에이즈 환자가 많다고 한다.
정부는 이 때문에 딜렘마에 빠져 있다. 내 놓고 발표하자니 관광객이 줄어들 것이고 통계를 숨기자니 치료와 국민 계몽에 지장이 있는 것이다. 번화가인 실롬 거리에는 팟퐁이라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환락가가 있는데 밤에는 야시장과 함께 불야성을 이루는 곳이다. 10년 전쯤 에이즈가 그리 알려지지 않았을 때는 관광객이 많아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렇지는 않다. 에이즈 소문이 퍼지면서 손님이 뜸해진 것이라고 상인들은 말한다.
술집이나 유흥가 쪽에는 시골에서 올라온 여자들이 많다. 돈 벌이가 잘 되는 유흥가에 시골 처녀들이 몰리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태국에는 남자보다 여자 인구가 많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유흥가의 실태를 보고 하는 지레 짐작일 것이다. 방콕만을 본다면 사실일지도 모른다. 방콕의 유흥가에만 대략 100만명 정도의 여자들이 종사한다고 한다. 70년대에 서울 구로동에 가본 사람이 서울에는 여자 인구가 훨씬 많다고 말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태국에 여성 인구가 많아 보이는 또 다른 이유는 여자들의 사회활동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시장의 채소 과일 장수로부터 대기업의 중역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사회활동이 눈부시다. 은행의 창구에 가면 뒤에 앉아 있는 차장 지점장급에 여성이 많다. 아이를 양육하고 교육하는 것도 거의 여자의 책임인 것 같다.
중 상류층의 가장은 첩을 두 셋씩 거느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되면 자의반 타의반으로 아이들 양육 책임을 여자가 떠맡게 될 것이다. 이런 현상 때문에 태국을 모계사회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방콕에는 속속 고층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는데 새로 짓는 건물마다 독특하고 아름다운 디자인을 자랑하고 있다. 태국인들은 건물 디자인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서울 처럼 천편 일률적으로 성냥갑 거꾸로 세워 놓은 것 같은 모양이 아니다. 멋있게 지어놓은 고층 건물들을 본 한국인들의 반응이 재미있다.
"건물 멋있게 지어 놓았는데 외국 기술이 와서 지은 거죠?" 하고 묻는 사람이 많다. 내가 그 건물의 설계 과정을 일일이 본 게 아니기 때문에 외국 기술인지 태국 기술인지 알 수는 없지만 태국인은 건물 디자인도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발상이 재미 있다. 한국인 중에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파타야 가다 보니 공장들이 꽤 많이 있던데 산업 시설이 꽤 돼있는 모양이죠?" 태국을 50년대의 한국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초현대식 건물과 지상철과 지하철이 5분 간격으로 다니는 대 도시 이지만, 비온 뒤에는 개구리 울음 소리와 새벽에 닭 우는 소리, 각종 새소리, 매미가 떼지어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이 방콕이다. 새벽에 집밖의 나무에 와서 잠을 깨우는 각종 새소리는 신기 하기만 하다.
새벽에 담논 사두악의 수상 시장에 가면 여인네들이 삿갓을 쓰고 좁고 긴 목선에 각종 신선한 야채와 과일 생선을 싣고 노 저어 와서 파는 수상 시장을 볼 수 있다. 방콕의 도심으로는 운하들이 막혀 더 이상 들어 올 수 없으나 변두리에서는 아직도 집에서 소출한 농산물을 배에 싣고 와 파는 것이다. 옛날 타이인들의 수상 생활과 경제 활동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이는 태국에만 있는 독특한 풍물로서 외국 관광객들의 빼놓을 수 없는 관광지로 자리 잡았다. 뿐만 아니라 태국의 관광 안내 책자 화가들의 그림 소재 사진사들의 피사체로 많이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 작은 목선의 상인들이 모두 여자들이다. 예로부터 여자들의 경제활동이 활발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샹그릴라 호텔과 오리엔탈 호텔, 쉐라톤 호텔이 일렬로 서있는 차오 프라야 강변에서 앞이 버선코처럼 뾰족하게 쳐들고 있는 이국적인 모양의 목선을 타고 운하를 한 바퀴 돌면 강가에 기둥을 박아 지은 수상 가옥들을 볼 수 있다. 이 집에서 나온 아이들과 어른 부녀자들이 흙탕물로 뛰어들어 수영하는 것을 볼 수도 있고 이 더러운 물에 빨래하는 여인들을 볼 수도 있다. 타이만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좁고 긴 목선이 달리는 풍경이 이국적이다. 더러운 흙탕물도 관광 자원으로 한몫을 해내고 있는 것이다.
자기의 경제적인 형편에 따라 최저 생활을 할 수도 있고 귀족처럼 살 수도 있는 곳이 방콕이다. 가진 것 없는 사람도 남의 눈치 안보며 살고 있는 곳이다.
방콕은 사철 더운 날씨 탓에 길가 난장 식당이 많다. 라마9 로드 랍뺏의 난장 식당이나 수쿰빗 36의 오픈 식당가나 실롬 뒷 골목의 포장마차들이나 아속 썸밋타워 뒤의 포장마차들이나 펫차부리의 오픈 식당가나 도시 전체의 어느 골목에나 포장마차가 있다. 싼값에 맛있는 음식을 얼마든지 골라서 찬 맥주와 함께 즐길 수 있다. 호주머니 사정이 넉넉치 않아도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다.
숯불을 난장에 내어 놓고 돼지 목살이나 머릿 고기를 굽고 있는데, 술꾼이라면 그냥 지나치기가 어려울 것이다. 커무양이라고 부르는 돼지 목살 구이에 태국 위스키 쌩솜이나 씽하 또는 크로스터 맥주 한병을 비우고 가라는 강한 유혹을 거절하기가 힘들 것이다.
쌀 국수를 잘하는 집은 많다. 굳이 수쿰빗 26이나 수쿰빗 4의 전통있는 뀌띠아우 집을 찾아가지 않더라도 집 가까운 곳 어디든지 뀌띠아우집은 많다. 점심으로 뀌띠아우 한 그릇 사먹어 봐야 25밧(750원) 이면 된다. 식탁 위에 놓여 있는 양념 남빠픽과 고춧가루, 고추식초, 땅콩 가루, 젓갈을 듬뿍 넣고 설탕을 조금 넣어서 먹으면 맛이 일품이다. 길거리 싸구려 식당에서도 돼지고기나 닭고기, 새우나 게살을 넣은 볶음밥을 맛있게 하는 집이 많은데 한 그릇에 30밧(900원)이면 된다. 1인당 100밧(3000원) 정도면 돼지고기 볶음, 채소 볶음과 생선구이를 놓고 푸짐한 한끼를 해결할 수 있다. 가난한 사람도 끼니 걱정 않고 살 수 있는 곳이 방콕이다.
도시 서민층은 사철 티 샤츠 두벌 반바지 두벌 슬리퍼 한켤레로 지낸다. 방콕의 노동자층은 변두리 하숙방에서 두 세명이 합숙을 하며 산다. 돈이 좀 들어오면 노점에서 친구들과 술도 마시고 좀더 좋은 음식도 주문해서 먹고 하면서 호주머니의 돈을 다 써버려도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는 인생을 낙천적으로 산다고 보여진다.
그렇게 산다고 해서 잔뜩 주눅이 들어 부자의 눈치를 살피며 살지 않는다. 그렇다고 부자를 이유 없이 욕하고 시기하지도 않는다. 분수를 알고 지키며 사는 사람들인 것 같다. 오늘 돈이 없어도 내일이면 또 들어오고 들어오지 않으면 안쓰면 되는 것이니까. 500평 저택에 살면서 벤츠차 타고 다니는 사람과 이들의 행복 지수는 같아 보인다.
더러워 보이는 길거리 난장 식당에도 서양인들이 많이 앉아서들 무언가 먹고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이걸 보고 어느 한국인이 방콕에는 질 낮은 서양인들이 많이 온다고 말했던 기억이 있다. 한국에는 넥타이에 정장을 한 서양인이 많은 반면 방콕은 반바지에 슬리퍼를 끌고 다니는 서양인이 많기는 하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될 것인가? 정말 여긴 질 낮은 서양인들이 많이 오는 것일까? 아니면 그만큼 방콕이 자유스럽고 격을 찾지 않는 도시라고 해야 될 것인가?
여유가 있다면 수쿰빗 31의 나르시서스나 통로의 피아노바, 스쿰빗의 멤버쉽 클럽, 쏘이 랑스완, 싸톤의 멤버쉽 클럽에 가보라. 호스테스가 양탄자에 무릎을 꿇고 써비스하는 귀족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길거리에서 맥주 2병에 간단한 안주를 곁들여 마신다면 200밧(6000원)이면 된다.
당신이 식도락가라면 분위기 좋은 불란서, 이태리, 독일, 영국 식당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방콕에는 그 나라 사람이 하고 있는 세계 여러 나라의 식당이 다 있다. 중동 식당을 비롯 베트남, 인도, 중국, 일본, 한국 식당 등 아시아는 물론 불란서, 독일, 이태리, 영국, 스위스, 아일랜드 등의 식당을 그 국적의 사람들이 직접 하고 있다.
또 당신이 미식가라면 차이나 타운에 가 보라. 샥스핀 요리, 제비집 요리, 용봉탕 요리를 잘하는 집이 얼마든지 있다. 당신이 수산물 요리를 좋아한다면 수쿰빗 쏘이 24의 씨푸드 마켓 식당을 가보라. 우선 규모의 방대함에 압도당할 것이다. 그리고 살아 퍼덕이는 생선과 눈을 올리고 쳐다보는 머리통만한 게, 세계적으로 제일 비싼 요리로 쳐주는 바닷가재와 싱싱한 새우가 당신을 기다릴 것이다.
'If it swims, we have it.' 이라는 선전문구가 말하듯 해산물 종류는 다 있다. 바닷가재를 선택 하더라도 그리 망설일 이유가 없다. 한국의 3분의1 값도 안될 것이기 때문이다. 음식은 서양식이던 한국식이던 일본식이던 중국식이던 주문하는 대로 요리해 준다. 그리고 그 큰 식당이 어느새 꽉차는 것에 또 한 번 압도 당할 것 이다.
방콕 중심가의 어느 골목을 가도 일본 식당이나 술집, 가라오케가 일본어 간판을 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태국에 사는 일본인은 5만명 정도 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산업계의 거의 전 분야에 일본의 자본과 기술이 들어와 있다. 대학의 연구소등에도 많은 지원을 하고 있다. 먼 훗날을 내다본 장기적인 투자인 것이다. 중공업, 자동차, 석유화학, 전자, 지하철, 백화점등의 분야에서 일본의 투자는 괄목할 만한 것이다.
일본은 특히 자동차 분야에 집중적인 투자를 하고 있는데 태국을 동남아 자동차의 메카로 육성하려 하고 있다. 주변국들의 소득 수준이 올라갈 때에 대비해서 장기적인 안목으로 일찍부터 동남아 시장을 선점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다.
태국 식당은 보통 값이 싼 편인데 음식 종류도 많고 특히 태국 음식은 한국인들이 쉽게 친해질 수 있다. 고추 가루와 간장을 많이 쓰고 우리의 된장과 비슷한 콩으로 만든 장도 있다. 태국 음식은 짙은 향료를 많이 쓴다. 전부 천연향을 쓰는데 우리의 입맛에는 좀 진한 것도 있다.
화학 제품의 식초를 쓰지 않고 레몬즙으로 대신하고 생선의 비린내를 없애기 위해 '팍치'라고 하는 향초를 쓰는데 향이 너무 진해서 보통 한국인들은 싫어한다. 박하잎도 향료로 많이 쓰이며 모기를 쫓을 정도로 향이 짙은 풀닢도 똠양꿍(새우찌개)의 향료로 쓰인다. 월라파 라고 하는 진한 향을 가진 고춧닢 비슷한 향채는 쏨땀을 시키면 같이 나오는데 숙취를 제거하는 효과가 있다.
이렇게 음식에 향을 많이 쓸 뿐만 아니라 쏘스도 여러 가지가 있다. 한가지 음식에 한가지씩의 쏘스가 다 있다. 돼지 고기는 쏘스 A 오리고기는 쓰스 B 닭고기 튀김은 쏘스 C 이런식으로 쏘스가 다양하다. 서양인들이 특히 태국 음식을 좋아해서 시드니나 런던에는 태국 식당이 많다. 점심때 물어 물어 찾아 가보면 언제나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당신이 중동의 건설 현장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면 양고기에 향수를 느낄 것이다. 수쿰빗 쏘이 3의 중동 식당에 가보라. 통째로 누워 있는 양고기에서 갈비를 떼어 내어 식당 앞에 마련된 숯불 화로에서 구워 줄 것이다.
한가지 유감인 것은 중동 식당에서는 술을 팔지 않는다는 점이다.
당신이 통돼지 바베큐를 좋아한다면 수쿰빗 쏘이 23에 있는 독일 생맥주집에 금요일에 가보라. 커다란 통 돼지가 바베큐 화로 안에서 돌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파람 3에 애저 통돼지 구이만을 전문으로 값싸게 써비스하는 식당도 있다. 일반적으로 태국인들은 쇠고기보다 돼지고기를 선호한다. 태국의 소들은 모두 물소들이기 때문에 육질이 질기다. 한국 식당을 포함한 외국인 식당들에서는 호주나 뉴질랜드 수입 고기를 쓰고들 있다. 그러나 돼지고기는 어느 나라보다 맛이 있는 것 같다. 돼지고기가 육류의 대명사 쯤 되어 있다. 또 한가지 불교신자들은 쇠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도 많다.
태국의 김치라고 우리가 말하는 쏨땀을 먹고 싶다면 화람퐁 역 앞에 황혼이 깃들 무렵에 가보라. 수없이 많은 외국의 배낭족들과 함께 싼값에 얼마든지 골라서 찹쌀밥을 곁들여 즐길 수 있다. 여러 나라에서 모여든 가지각색의 외국인들과 함께 저녁 한때를 즐기는 낭만적인 분위기는 나그네의 향수를 달래기에 충분하다.
차오프라야 강변이나 크렁떠이 시장 주변의 불량주택에 실망했다면, 수쿰빗 31에서 63까지의 주택 들을 가보라. 최소 1라이(480평)에서 10라이(4,800평) 정도의 개인집들이 꽉 차있음을 알 것이다. 주차장이 좁아서 불편했다면 온눗 입구에 있는 로타스나 파람4의 까루푸에 가보라. 야외 주차장이 100라이(48,000평)는 될 것이다.
이런 야외 주차장이 아니더라도 방콕의 주차 시설은 좋은 편이다. 어느 건물이던 고층 빌딩은 주차 건물을 같이 가지고 있다. 대개 5~6층 정도의 주차 빌딩이 본 건물의 부속 건물로 마련되어 있다.
차들이 거의 일제라서 작다고 생각되면 잠시만 기다려 보라. 버스 길이만한 링컨 컨티넨탈 리무진이 나올 것이다. 일제차가 너무 많다고 생각되거든 좀더 관찰해 보라. 영국제 제규어, 롤스 로이스, 불란서제 르노, 뿌죠, 이태리제 알파 로메오, 훼라리, 독일제 벤츠, 포쉐, 폭스 바겐, 아우디, BMW, 오펠, 스웨덴제 볼보, 싸브, 미제 시보레 그리고 한국제 현대, 기아, 대우, 쌍용, 전세계에서 생산되는 차 종류는 다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민주광장 근처에 있는 카오산 로드는 세계의 배낭족들이 엄청 모여드는 곳이다. 갖가지 국적의 갖가지 피부색의 인종이 모여들어 매일 젊은이들의 축제가 벌어진다. 먹는 것과 숙박비가 최저로 들고 국내 여행에서 값싸고 편리한 교통편과 먹거리 숙박 시설 값싼 항공권의 정보가 넘쳐 나는 곳이다.
한국의 배낭 여행자들도 빼놓지 않고 들르게 되는 곳이 이 카오산 로드이다. 세계의 젊은이들이 모여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자기나라의 문화를 소개하고 같이 국내 여행 계획을 세우고 하는 기억들은 젊은 날의 낭만으로 깊게 각인되는 곳이다. 태국 여행을 말할 때 카오산 로드를 빼놓지 않고 말하는 배낭족들이 많다.
당신이 젊은 축이라면 시암 스퀘어의 하드록 까페나 수쿰빗 쏘이 26이나 실롬의 디스코 텍을 가보라 선남 선녀들이 밤 세워 춤을 출 것이다. 에뜨랑제인 당신은 국외자로서의 보는 즐거움을 덤으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마음에 드는 아가씨가 눈에 뜨이거든 같이 춤추지 않겠냐고 프로포즈 해도 크게 흉 될 것은 없다.
당신이 "뭐 좀 화끈한 거 없어?" 하고 묻는 화끈파라면 실롬의 팟퐁, 수쿰빗 쏘이 4의 나나 플라자 쏘이 23의 카우보이에 가면 된다. 화끈한 구미에 맞을 것이다.
방콕의 건물들이 규모가 작다고 생각되면 씨나카린의 씨콘 스퀘어나 칫롬 4거리의 월드 트레이드 쎈터, 빠뚜남의 베이욕 타워, 라차다의 훠춘 타워를 가보라. 벌어진 입을 다물기가 힘들 것이다.
아침 일찍 거리를 나가 보면 부녀자들이 음식을 들고 집 앞에 죽 나와 서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담황색 옷을 입고 맨발로 대 여섯 명씩 떼지어 오는 스님을 맞기 위해 서있는 것이다. 방콕의 어느 골목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인데 이것을 보면 불교가 태국인의 마음 밑바닥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음식을 봉지 봉지 넣고 봉투에 따로 돈을 넣어 준비하고 있다. 맨 발의 스님이 자기집 앞에 오면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음식과 돈 봉투를 바친다. 그리고 그런 자세로 한참동안 합장 배례 한다. 스님은 허리를 굽히지 않고 근엄한 표정으로 받아서 바랑에 집어 넣는데 받는 음식물이 많기 때문에 종자를 데리고 다닌다.
스님은 중생에게 치성을 드리는 기회를 주기 때문에 보시를 베풀고 있다는 것이 교리이다. 스님은 중생을 제도하는 수고를 하고 있는 것이지 동냥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미안해 하거나 송구스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문외한의 눈에는 그게 그거로 보이는데 말이다.
불교의 교리는 현세에서 덕을 많이 쌓으면 내세에 부자로 태어난다고 가르친다. 인간은 억겁(億劫)의 세월을 두고 윤회(輪廻)하면서 이승에서 저승으로 저승에서 이승으로 넘나드는 존재라는 것이다. 결코 없어지는 존재가 아니다. 전생의 공덕에 따라서 짐승으로도 인간으로도, 종으로도 고관대작으로도, 천하게도 귀하게도, 가난하게도 부자로도 다시 태어난다.
이 생과 사의 끝없는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은 마음 수양과 끝없는 선(禪)과 많은 공덕을 쌓음으로서 해탈하는 것이다. 태국인들이 가난해도 웃으면서 마음 편히 살고 있는 것은 이런 내세관을 가지고 있는 불교의 영향이 없지 않을 것이다. 태국의 불교는 또한 사회의 안정에 기여하고 있는 것 같다. 사회 전체가 작은 충격에 쉽게 동요되지 않는다.
태국, 스리랑카, 베트남 등의 동남아 국가들은 소승(小乘) 불교이다. 중국, 한국, 일본의 불교를 대승(大乘) 불교라 해서 구분 짓고 있다. 어떤 스님한테 그 차이점을 물은 적이 있었다. 소승 불교는 개인의 구제(救濟)에 중점을 두는 반면 대승 불교는 중생을 다같이 제도(濟度)하자는 교리의 차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소승 불교는 이기적이지 않느냐고 했더니 하나씩 구원해서 숫자가 많아 지면 중생이 되니 결국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태국의 불교는 자기만의 복락을 비는 이기적인 구석이 있는 것 같다. 태국의 전래 샤마니즘인 '피'를 믿는 사당이 아직도 많고 미신이라고 지탄받고 있음에도 시골에서는 전래의 민간 신앙과 불교가 결합해서 성행하고 있다.
영국인 친구가 아침에 불당 앞에서 정성껏 예불 드리는 여인을 보고 "부처님, 바라옵건데 오늘 제발 돈 보따리를 좀 줍게 해 주옵소서" 하고 빌고 있는 것이라고 농담을 했는데, 어느 정도 태국 소승 불교의 실체를 표현한 말인 것 같기도 해서 실소를 한 적이 있다.
불교는 태국인들의 의식 전반을 차지하고 영향을 미치고 있는 그들의 국교 이다. 많은 휴일과 국경일들이 불교와 관련 있다. 역대 왕들이 살았던 옛 왕궁과 같이 있는 절 왓 프라께오는 외국인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관광지가 되어 있다. 궁전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건물인데 왕실에서 예불을 드리던 절이 이 궁안에 있는 것 이다. 처음 방문한 한국인은 우선 절 모양이 한국의 것과 너무 다른데 호기심을 갖게 된다.
절 건물의 표면에는 황금색, 코발트색, 붉은 색, 초록색의 휘황 찬란하게 번쩍이는 손톱만한 타일을 붙였다. 그 옆 건물의 외벽에는 꽃들의 문양을 모자이크해 놓았는데 소름끼치는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여러 개의 탑들은 한국의 돌을 쌓아 만든 탑과는 아주 다르다. 원뿔 모양을 하고 있고 유연한 오목 곡선을 만들며 위로 뻗어 끝이 창끝 처럼 뾰족하게 되어 있다. 이 탑의 표면도 황금색으로 번쩍이는 타일을 붙여 치장했다.
그러나 왓 프라께오의 백미(白眉)는 높이 75cm의 메머럴드 불상이다. 불상의 크기로서는 작은 것이지만 이 것이 통 에머럴드라는 점이 혀를 내두르게 한다. 이 불상은 기원전에 인도에서 만들어진 것인데 스리랑카로 옮겨 졌고 수수께끼와 같은 미로를 통해 방콕까지 오게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로 더욱 사랑을 받고 있다.
왓 프라께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왓 트라이밋트라는 절이 있다. 이 절에는 무게 5.5톤의 순금 불상이 있다. 나와 같이 갔던 한국인이 현 시가로 1,000억원 정도라고 얘기해서 웃은 적이 있다. 이 근처에 왓 포라고 불리는 와불이 모셔진 절이 있다. 총장이 46m의 거대한 불상이 미소지으면서 누워 있는데 석가가 해탈하고 열반에 든 모습이라고 한다.
차오 프라야 강을 건너서 톤부리 쪽에 새벽사원 이라고 불리는 왓 아룬이 있다. 높이 75m의 사각 뿔대 모양의 탑이 유명한데 새벽 사원이라는 이름과 같이 새벽이나 석양 무렵에 탑의 실루엣이 강의 풍경과 어울어질 때가 가장 아름답다. 탑의 꼭대기까지 사람이 올라갈 수 있도록 가파른 돌계단이 있다.
태국인들의 순하고 너그러운 외면을 한 꺼풀 벗겨내면 단단한 자존심과 자부심을 갖고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자존심의 이면에는 오랜 역사와 전통이 뒷받침하고 있고 세계에서 가장 긴 재위 기간을 자랑하는 왕의 존재가 있다. 왕은 태국인들의 아이덴티티를 확인해 주는 마음의 표상이기도 하다. 때문에 왕은 국민들의 절대적인 존경을 받고 있다.
왕의 권위를 부정한다는 것은 자기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태국인들과의 교유(交遊)에서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관계가 단절됨은 물론이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왕을 욕하는 것은 자기의 자존심이 손상당한 것과 동일시 하는 것이다. 이런 자부심이 또한 파도를 타고 풍랑에 흔들려야만 하는 인생의 부침(浮沈)속에서도 태국인들이 미소를 잃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대의 유적과 현대적인 고층 빌딩, 고가 전철과 지하철이 무리없이 공존하고 있는 도시가 방콕이다. 차오프라야 강변 샹그릴라 호텔 가까운 곳에 행인을 실어나르는 선착장이 있다. 톤부리에서 시내로 직장인 학생 시장에 가는 주부들을 실어 나르는 배가 교통 수단으로서 아직도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옆 다리 위로는 벤츠차가 줄을 잇고 달리고 있다.
방콕은 시가지의 어디를 걸어도 무언가 재미 있는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이색적인 구석이 있는 도시 이다.
길 거리에 외국인들이 반이 넘게 지나다니는 실롬이나 싸톤, 수쿰빗, 프런칫, 위타유, 쏘이 랑스안 로드에는 싸구려 음식을 파는 포장마차가 즐비하게 있는가 하면 이태리 풍이나 독일풍, 영국풍의 깨끗하고 앙증맞게 꾸며 놓은 식당도 많다.
피부가 검은 여자도 태국에선 열등감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 같다. 서양인과 손잡고 거리를 걸어다니는 여자는 모두 피부가 검다는 특징이 있다. 피부가 하얗기만한 서양인들은 검은 피부에 매력을 갖는 모양이다.
태국의 인종 구성은 꽤 복잡하지만 대체로 피부가 하얀 북방계 한족, 피부가 검은 남방계 말레이족, 동쪽에서 온 크메르족과 타이족이 주류 이다. 말레이족과 타이족이 피부가 검은 편이다.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타이족과 말레이족이 정치나 공무원 세계에서는 우세한 것 같다. 반면 경제계에선 피부가 흰 북방계나 한족이 우세하다. 이 중에서도 중국계가 경제의 엎 스트림을 쥐고 있는데 이름난 재벌들은 거의가 중국계이다.
냉동닭 수출로 최대의 재벌이 된 CP 그룹, 철강과 니싼 자동차, 가와사끼 오토바이를 가지고 있는 시암 그룹, 최대의 은행인 방콕은행의 오너, 섬유로 재벌이 된 사하그룹등이 중국계이다. 신그룹의 오너이면서 현직 수상인 탁신 시나와트라도 조부 때 중국에서 이민 온 경우이다. 한 가지 재미 있는 현상은 실제 중국계 인구는 전 인구의 15% 정도라고 하는데 내가 만난 거의 모든 사람이 자기는 중국계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태국은 미스 유니버스를 두명 배출했다. 한명은 70년대이고 또 한명은 80년대 중반에 미스 유니버스가 되었는데 이름이 홍사쿨라라는 미인이다. TG항공의 모델로도 활동을 해서 90년대 중반까지도 TG항공을 타면 광고 영화에서 볼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태국 여성들은 몸매가 아름답다. 다이어트에 별 신경쓰지 않아도 날씬한 몸매를 자랑하는 여성이 많은 것 같다. 타이 여성들의 식습관에서 그 이유의 일단을 보게된다. 타이 여성들은 한번에 많이 먹지 않고 조금씩 자주 먹는다. 때문에 먹고 남아서 축적되는 칼로리를 방지할 수 있는 모양이다.
그런가 하면 모두 쌍꺼풀 눈들을 하고 있고 눈매가 아름답다. 태국인들 사이에는 쌍꺼풀이 아닌 눈이 더 인기라고 하니 우리에게는 아이로니가 아닐 수 없다. 일반적으로 체격은 한국 여성보다 작다. 대학에서 강사를 하는 한국인이 대학생들을 인솔하고 한국으로 수학여행을 갔었는데 한국인들이 모두 고등학생으로 보더라고 했다.
크렁떠이 시장은 방콕에서 제일 큰 오픈 마켓이다. 밤새워 시골에서 올라온 싱싱한 야채, 과일, 여러 가지 곡식, 고기류, 해산물, 가금류 없는 것 없이 다 있는데 가격들이 엄청 싸다. 서민층에서 상류층까지 하루종일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는데 비만 오면 땅이 질퍽거리고 각종 쓰레기가 내뿜는 냄새로 코를 들기가 어렵다.
여기서 한 2km 쯤 떨어진 곳에 방콕 최고의 백화점이라는 엠포리엄 백화점이 있고 세계 첨단 브랜드 전문점이 모두 모여 있다. 루이 비똥, 쎌리느, 크리스찬 디올, 구찌, 리바이, 죠지오 알마니, 웅가로, 지아니 베르사체, 발렌티노, 프라다, DK NY, 샤를르 주르당, 롤렉스, 까띠에, 피아젯, 론진, 불가리 등이다. 여기에 미국, 일본의 유명 브렌드 의류는 다 모여 있고 전자 제품 쪽으로 가면 GE, 쏘니, 필립스와 함께 삼성, LG도 큰 매장을 점하고 있다.
빠뚜남 마켓과 보배 마켓은 각종 의류점이 집결되어 있는데 손님의 90 퍼센트가 동 유럽과 소련의 보따리 장수들 이다. 때문에 싸이즈가 모두 큰 옷들 밖에 없다. 폴란드, 체코, 항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 소련 등에서 보따리 장수 아주머니들이 발 디딜 틈이 없이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한다.
북부 버스 터미널 가까운 곳에 짝뚜짝이라는 시장이 있는데 화려한 색상의 T샤쓰, 청바지, 목재 가구, 골동품, 화초, 히피족이 좋아할 것 같은 수 놓은 가죽 잠바 등 여러 가지 물품을 팔고 있다. 특히 골동품점에는 재미있는 물건들이 많이 있다. 오십년은 됨직 해 보이는 추가 있는 시계, 40년대에 나왔다는 영문 타자기, 삼십년 되었다는 중고 리바이 청바지, 2차 대전 때 신었다는 군화, 오십년 되었다는 싱어 미싱 등이 있다.
방콕에는 외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에 국제학교가 일찍부터 있어 왔다. 주로 미국과 영국 재단에서 세운 미·영의 커리큘럼을 따라가는 초·중·고등학교 들이다. 최근 3, 4년 내에 국제학교가 부쩍 더 많이 설립되어 현재는 50여개가 된다. 이 중 3, 4개 학교가 역사도 오래 되었고 소위 1류 학교인데 12학년 과정까지 졸업하고 미국의 IVY 리그나 영국, 호주 대학으로 진학 하는 학생이 많다. 교사들은 미국, 영국에서 초빙한 교사 자격증 소지자들로 철저하게 미국 동부 사립학교 수준의 교육 씨스템을 자랑한다.
한국 사람들이 자녀를 미국이나 카나다 호주로 유학을 많이 보내는데 방콕의 미, 영 학교를 선택한다면 경비가 적게 들 것이다. 하기야 생할비라면 미국보다 적게 들겠지만 학비야 미국 동부의 사립학교 수준이다. 일년에 1 만불 정도 이다. 이는 초·중·고등학교가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한 반의 학생은 20명을 초과하지 않고 교사들은 학생의 성격, 취미, 특성등을 잘 파악하고 지도 하고 있다. 인격적인 교육으로 자발적으로 아이들이 학습에 참여하도록 지도한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학교를 좋아 한다.
여름 방학이 2달 정도로 매우 긴데 이 기간에는 아이들이 빨리 개학이 되어 학교에 가고 싶어한다. 상위 학교는 캠퍼스도 넓고 각종 운동 시설, 수영장, 강당, 음악실, 과학실 등 부대 시설도 잘 되어 있다.
한국인의 교육열은 태국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비싼 교육비를 부담해 가면서 어떻게든 1류 국제학교에 보내려는 부모가 대부분이다. 방콕의 국제학교에는 대략 30여개국 국적의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에서 한국인 학생은 태국 인도 대만과 함께 제일 많은 수를 차지한다. 그리고 한국 학생들은 우수하다고 정평이 나있다.
미국으로 유학간 어린 학생들이 잘못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마약이나 나쁜 친구와 어울려 아이를 버리게 된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부모의 의사에 따라 반 강제로 미국에 떠밀려 왔다. 공부에 대한 비전도 없을 뿐만 아니라 미국 생활에 대한 준비도 덜돼 있다. 부모가 가라고 하니까 막연한 호기심에서 그들의 의견에 따랐을 뿐인 것이다. 학교에 입학해서 보니 자기가 배운 몇 마디 영어로는 도대체 선생과 친구들과의 의사 소통이 어렵고 거기다 주눅이 들어 쉬운 말조차도 입이 안 떨어 진다. 저희들끼리 하는 말은 도통 알아 들을 수도 없다.
게다가 이 친구들이 덩치는 왜 그리도 큰지 그들 앞에 서기만하면 겁부터 난다. 본토 서양 아이들의 텃세가 있기 마련이다. 주눅이 들어 다니는 아이를 왕따시키거나 놀려댄다. 주위에는 자기가 처한 어려움을 상담하고 조언해 줄 마땅한 어른도 없다. 뭐가 뭔지 모르는 상태로 1년쯤 학교를 왔다 갔다 하는데 중국이나 베트남, 히스페닉계등 우선 덩치에서 만만한 애들이 접근하게 되고 친구가 된다.
학교에서 칭찬을 받으며 제 위치를 찾고 자기 존재의 당위성을 인정받지 못한 아이는 학교 밖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한다. 다른 친구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는 마약, 싸움질에 몰두한다. 용돈이 모자라게 되면 절도도 서슴치 않는다. 또 기왕 하는 거 또래 중에서 우뚝한 존재로 인정 받고 싶어진다. 악행은 점점 더 대담해 지는 것이다.
대개 이런 변화 과정을 거칠 것이다. 특히 아이가 버리기 쉬운 곳이 미국이라고 한다. 판단력이 아직 미숙한 아이를 아무 제약이 없는 너무 자유스러운 분위기에 갖다 놓으니 제 갈 길을 잃어버리게 되는 모양이다. 이렇게 본다면 아이를 미국에 보내는 것은 실패할 수도 있다는 위험을 무릅쓴 일대 모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서양의 학교에 비해 태국의 국제학교는 훨씬 안전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동양 아이들이 많기 때문에 체격에서 열등하지 않다. 서양 아이들이 있다지만 그들에게도 외국이다. 태국 아이들이 텃세를 한다면 힘으로도 겨뤄 볼만 하다. 국제학교에는 태국의 아이들이 제일 많은 숫자를 차지한다. 만만치 않은 학비를 감안한다면 아주 부자집 아이들 이다.
태국 국제학교의 아이들은 미국에 비해서 위험에 노출될 기회가 많지 않다. 우리와 같은 동양 문화권이기 때문에 사회 분위기가 비슷하고, 어른을 존경하고 가르침에 순종하는 유교 문화권이다. 선생을 존경하는 점, 남녀 관계, 체면 치레, 염치라는 가치의 존중 등의 생활 문화가 우리와 비슷하다. 아이들을 미국과 카나다에만 보낼 것이 아니라 태국의 국제 학교를 권하고 싶다. 또 비행기로 14시간씩 걸리는 미국보다는 5시간 반박에 안 걸리기 때문에 당일로 갔다 오는 것이 가능하다. 졸업 후 미국의 대학에 들어 가는 것은 제 본집을 찾아 가는 것이기 때문에 어렵지 않다.
태국은 관광 대국이다.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은 한국보다 한 수 위이다. 나는 태국에서 10년 이상 살면서 태국인의 관점에서 한국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죽을동 살동 일만하다 가는 것이 인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된 것이다. 일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생계를 위한 수단이다. 일 자체가 인생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먹고 살 수만 있다면 인생을 즐기면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우주의 시간에 비한다면 찰라에 지나지 않은 것이 인생이다.
찰라를 살면서 일생을 찡그리고만 살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오늘 어려운 일이 닥친다 해도 곧 해결의 실마리는 손에 잡히는 것이다. 지금 앞으로 나아갈 신작로가 보이지 않는 것은 길이 굽어 있어 보이지 않는 것이지 길이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대개의 경우 인간은 직장에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물질적인 어려움으로 갈등하고 싸우고 큰소리 치고 때로 주먹다짐까지 하면서 혈압을 높히고 있다. 좋은 차와 좋은 아파트와 아이들을 일류 학교에 보낸다고 해서 행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겉으로 행복해 보이고 걱정이 없어 보이는 가정도 안을 들여다보면 꼽사등에 한짐씩 짐을 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얼마 전 우리는 남들이 부러워해 마지 않는 엄청난 돈과 명예를 가진자들의 허무한 마지막을 목격했다. 한국에 몇 안되는 재벌 기업의 오너도 현역 도지사도 선거로 시장에 당선되어 떵떵거리던 자도 대 건설회사의 사장도 일반의 기대를 저버리고 새처럼 고층 건물에서 몸을 날리고 돌맹이 처럼 한강에 몽땅 뛰어드는 것을 보았다. 돈과 명성을 주체할 수 없이 많이 가지고 있던 자들이다.
그런 것들이 행복을 약속하지 않는다는 반증에 다름 아니다. 분수를 알고 인내하는 마음의 자세가 보다 더 중요한 인간의 조건이다. 그렇다면 부족하다고 해서 주눅이 들어 남의 눈치나 보면서 우울한 나날을 보낸다는 것은 일회적(一回的)인 생(生)의 낭비이다. 신은 없는 대로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각자에게 다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부족한 것 없이 다 갖추어진 다음에 인생을 즐기자. 집도 사고 아이들 대학까지 마치고 자동차도 3,000cc 정도로 갖춘 다음 놀러 다니자. 그 때는 세계 여행도 다니고 하와이의 와이키키 해변이나 마이아미의 팜비치, 스페인의 카나리 해변, 남프랑스의 리비에라 해변에서 해수욕도 즐기자. 이국의 묘령의 여인과의 로맨스도 그 때 생각하자.'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인생을 즐길 자격 요건에서 미달인 사람이다.
부족하고 가난한 중에 여유를 갖는 방법을 터득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태국인들은 우리보다 현명하다. 다 갖춘 다음에는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은 시점이다. 내일 모레 화장장으로 갈 사람이 무슨 여한이 남아있어 세계 여행인가.
한국인은 "인생을 즐기자" 하면 무슨 문둥이가 나타난 것처럼 이상하게 볼 것이다. 한국인들이 너무나도 오랫동안 잊고 살아온 말이기 때문이다. 쉬면서 일도 해야 성수대교가 무너진다든가 삼풍 백화점이 내려 앉는다든가 격포에서 240명 실은 배가 뒤집어 진다든가 지하철 공사장이 무너진다든가 하는 일이 안 일어난다.
조급증은 큰 병이다. 이런 사고는 조급증의 병이 생산해낸 재해이다. 여기 여행 업계의 태국인이 '빨리 빨리'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관광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빨리 빨리'를 입에 달고 다닌다. 쇼핑점에 들어가서도 빨리 빨리 식당에서 먹는 것도 빨리 빨리, 차 타는 것도 빨리 빨리, 버스에 앉아서도 빨리 빨리 비행기 타고도 빨리 빨리를 외치며 서두르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조급하다. 전철역에서 줄을 섰다가 정작 기차가 들어오면 순서도 없이 몰려 든다. 기차역에서는 출발 시간까지 충분한데도 개찰구를 나오자 마자 뛴다. 추석 때 귀향 열차를 타려고 너도 나도 뛰다가 서울역 계단에서 여러 사람이 깔려 죽는 불상사가 있었다. 저 마다 뛰는 판에 다리가 불편한 노인은 뛰지 못하니 깔려 죽게 되어 있다.
서울에서 아침 출근 길에 끼어 들려는 차와 안 비켜 줄려는 차는 신경전을 한참 동안이나 치루고 나서야 어찌 어찌 순서가 정해 진다. 두 차의 빨리 빨리 철학이 충돌하는 것이다. 나는 방콕에서 끼어 들기를 시도했을 때 양보하지 않는 차를 만난 적이 없다.
방콕에 살고 있는 아주머니가 친정 부모들이 왔는데 택시를 잡기만하면 다리도 불편한 노인들이 뛰어가서 재빨리 들어가더라고 했다. 여기는 그렇게 뛰지 않아도 뒤에서 빵빵 거리지 않으니 그러지 말라고 매번 말하다가 지치더라고 했다.
방콕의 차들은 앞 택시의 손님이 내려서 트렁크의 짐을 천천히 내리고 다시 앞으로 가 운전수에게 차비를 천천히 지불하고 하는 것을 조용히 뒤에서 기다린다. 그뿐만 이 아니다. 앞의 트럭에서 수퍼마켓에 들여놓을 물건을 하나하나 다 내려놓을 때까지 기다려 준다. 서울의 대로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아마 그 운전수는 제명에 못 살 것이다.
한국인들은 그렇게 조급하게 서둘러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영국 시인 롱펠로는 심장의 고동은 무덤으로 가는 행진곡이라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순식간에 지나가는 청춘이요 빛이 반짝하는 사이에 늙어 버리는 것이 인생인데 그렇게 서둘러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래서 남보다 빨리 부자가 되었는가? 그래서 지금 남보다 행복한가?
방콕은 교통 지옥이라고 세계에 알려져 있다. 비가 오면 교통 적체가 더 심하지만 평소에도 한 시간씩 막히는 경우가 비일비재 하다. 추안 릭빠이 전번 수상이 국빈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외신 기자 클럽 회견 석상에서 어느 한국 기자가 질문을 했다.
"방콕에 취재차 방문 했을 때 교통이 막혀 약속 시간에 맞추어 목적지에 가기도 어려웠고, 방콕의 교통에 대해서 불평하는 태국인도 많이 만났습니다. 심할 때는 한 시간씩 길 위에 서 있어야 된다고 하는데 방콕 교통에 대한 어떤 대안이라도 갖고 계신지요? "하고 질문한 적이 있다.
"사실입니다. 방콕에서는 요즈음 신 상품이 잘 팔리고 있습니다. 차 안에서 쓰는 요강입니다. 이런 정도로 방콕의 교통은 최악입니다. 정부도 일찍부터 방콕 교통의 심각성을 알고 공적인 사적인 논의들도 많이 했습니다. 저는 제가 수상에 취임하면서 첫번째로 국민들한테 약속한 공약이 방콕 교통 문제의 해결이었습니다. 장기적인 계획으로 지금 도시 외곽으로 빠지는 고가도로를 많이 건설하고 있고 고가 전철도 완성 단계에 있습니다. 지하철도 지금 시작단계에 있습니다. 이 계획이 완성되면 방콕의 교통은 획기적으로 좋아지리라고 기대합니다."
수상이 외신 기자들과의 회견 석상에서 요강 얘기를 할 정도로 교통은 지옥이다. 한국에서 추석에 운전하고 귀향행렬에 참가해본 사람은 요강의 필요성을 알 것이다. 지금은 추안 릭빠이 수상이 말한 것 처럼 외곽 도로가 완성되어 있고 고가 전철과 지하 전철이 완성되어 있어 그 때 보다는 교통이 나아 졌다.
그런데 한가지 태국 운전자들의 특징은 절대로 뒤에서 빵빵 거리지 않는 다는 것이다. 마냥 기다려 준다. 4거리에서 거의 교통 순경의 청 홍 신호등 수동 조작으로 운용되고 있는데 교통 순경과 시비하는 사람도 없다.
이런 태국인 들의 넉넉하고 서두르지 않는 심성이 외국인들이 살아가기에 편안함을 주는 모양이다. 좋은 집이나 좋은 음식 좋은 옷으로 말한다면 뉴욕이나 파리, 런던을 능가 하겠는가? 그 보다 거기에는 없는 푸근한 인정들이 방콕에는 있는 것이다.
이런 인정들을 병원에 가도 경험하게 되는 것이 방콕 생활이다. 남편이 지병을 가지고 있는 한국 아주머니 한 분은 병원이 너무 친절해서 방콕에 남아 살기로 작정했다고 말했다. 방콕에서 계속 병원에 다녀 본 자기 입장에서 한국의 병원에 다시 가서 치료받는 다는 것은 끔찍하다고 했다. 자기가 잘나서 의사가 되었다는 듯이 거만을 떠는 의사의 무례함과 어디가 어떻게 나쁜지 어떻게 치료하면 되겠는지 앞 뒤 설명없이 급하게만 서둘러 대는 병원 분위기, 언제나 화난 것처럼 미소없이 냉기가 도는 간호사들을 다시 대할 자신이 없다고 했다.
방콕에서 병원에 가본 사람들은 한국의 병원과 금방 비교하게 된다. 싸밋티벳이나 밤룽락, 파람9 병원등 한국인들이 많이 가는 병원들은 의료시설이 좋고 의사의 수준도 높다. 거의 모든 의사들이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한다.
뿐만 아니라 의사들의 친절함은 한국인 환자들을 반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 발병의 원인 진행 상황 치료 방법등을 자세히 설명해 주고 그래서 자기는 이렇게 저렇게 치료할 계획이라고 말해준다. 그리고 그의 태도에서 친절이 배어 나온다.
한국의 권위의식 또는 엘리뜨 의식을 가지고 잔뜩 거만한 그리고 친절하게 설명할 줄 모르는 의사들에 습관이 된 우리들은 놀라울 따름이다. 이런 의사들의 태도에 면역이 된 한국인들은 거만을 떨고 권위있게 보여야 믿음이 간다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이다. 의사도 특수한 기술을 가진 써비스 업종이다. 고객에게 친절해야 되는 것이 세계의 어느 나라를 가던 남에게 써비스하는 사람의 기본적인 자세 일 것이다.
방콕의 북쪽에 위치한 국제 공항은 싱가폴의 창히 공항과 함께 동남아 최대 규모이다. 방콕 공항은 러시아의 에어로플롯를 비롯 , 브라질 발리그, 중동, 아프리카 항공사, 북한의 고려 민항까지 전세계의 항공기가 거의 다 들어온다. 그러나 태국을 찾는 관광객은 해마다 늘어 지금은 연간 관광객이 1,000만명을 넘어 1,500만명에 육박하고 있다. 현재 공항으로는 계속 늘어나는 여행객 소화가 어려워 진 것이다.
때문에 방콕의 동쪽 농누하우에 신공항을 짓고 있다. 신공항 계획 단계에서 싱가폴의 반대에 부딪쳤다. 싱가폴과 방콕이 서로 동남아 허브로서의 임무를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싱가폴은 깨끗하고 도로 정비등이 잘되어 있는 도시이기는 하지만 경직되어 있는 사회 분위기가 방콕과는 사뭇 다르다. 편안한 마음으로 즐기러 간 관광객이 싱가폴 처럼 숨막힐 것 같은 곳에 가서 '시야시' 될 일이 없는 것이다. 방콕과 동남아 허브로서의 자격을 놓고 싸운다면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싱가폴의 판정패 이다.
방콕은 항구 도시 이다. 전 세계로 퍼져 나가는 정기 수송선이 다 있어 물류 운송에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중동, 유럽, 남북미주, 아프리카, 동남아 어디든 쉽게 정기선을 잡을 수 있다. 한국의 선사(船社)들도 지점을 다 가지고 있는데 한진 해운, 현대 상선, 동남아 해운, 흥아 해운이 방콕에 지점을 두고 있고 정기선을 띄우고 있다.
한국이 동북아 허브로서의 역할을 국가 목표로 정해 놓고 노력하고 있다. 먼저 한국 사회의 자유스럽고 편안한 분위기가 확보되어야 한다는 것이 선결 조건일 것이다. 그리고 국민의 친절이 불가결의 요소이다. 불친절한 나라에 와서 내 돈을 써가며 설움 받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몇 년 전에 필리핀에서 한국의 단체 관광객이 집단 테러를 당한 적이 있다. 이들을 잡고 보니 한국의 공장에서 2~3년씩 일하고 돌아온 자들이었다. 한국에서 받은 설움으로 이를 갈고 돌아온 이들은 한국인에게 복수하자고 의기가 투합하여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돈 들이지 않고 인심을 얻을 수 있는 찬스를 잘 살리지 못하고 원수를 산 것이다.
국회에서 해외노동자 고용법이 통과된 후 좀 나아졌다고는 하나 아직도 불법 노동자들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국의 공장에서 필요하기 때문에 고용하고 있는 것이다. 겉으로 들어낼 수 없다는 약점을 이용하여 임금 착취 인권 유린 말 못 알아듣는다고 함부로 욕하고 한다면 장기적으로 국익에 손해이다.
우리는 일본을 욕할 때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잔인하다고 말한다. 시어머니를 욕하면서 자기가 시어머니가 되면 그대로 답습한다고 했던가? 욕하면서 배운다고 한다. 우리가 일본을 욕하면서 배워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몇 천만명의 인구가 가난한 나라에서 먹고 살아 보겠다고 온 몇 십만명의 노동자도 잘 포용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도 학벌들도 낮고 가난하여 주로 3D 업종에 일하러 온 사람들인데 이들도 포용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들보다 훨씬 강한 몇 십억의 세계 인구를 리드하는 지도국이 될 수 있겠는가?
방콕의 근교에는 가볼만한 관광지가 많다. 악어 수만 마리가 있는 악어 농장도 있고 로즈 가든도 있으며 파타야 해변 도시도 두시간 거리이다. 로즈 가든에는 우리의 겨울철에 장미가 만발한다. 강가에 위치한 리조트는 타이식 전통 주택인 높은 마루위에 지은 방갈로와 깨끗하게 꾸며놓은 연회장, 중국식 파빌리온, 연꽃이 만발한 중앙의 연못, 식당등을 갖추고 있는 정원이 볼만한 곳이다. 무엇보다도 타이 문화를 압축해놓은 문화 행사를 매일 보여 주고 있다. 타이 민속 무용, 타이 킥복싱, 타이 결혼식과 코끼리 타고 칼과 활을 쏘는 전쟁 장면을 보여준다. 악어 농장은 방콕에서 남쪽으로 10km 정도 떨어진 사뭇파칸에 위치해 있는데 우선 그 많은 악어들에 놀라게 될 것이다. 악어가 3만 마리가 있는 농장도 있다.
파타야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바닷가의 휴양 도시이다. 월남전이 한창일 때 캄보디아 국경 근처의 싸타힙에 부대가 있던 미 해군들에 의해서 개발된 휴양지 이다. 당시에는 보잘 것 없는 민박 시설과 원시 해변이 있었을 뿐이었다. 지금은 외국에 내 놓아도 손색이 없는 야자수가 우거진 해변, 고운 모래의 백사장과 호텔, 술집, 극장, 여러 국적의 식당들을 갖춘 관광도시가 되었다.
방콕에서 파타야로 가는 길도 하나뿐이던 것을 그 위로 고가 고속도로도 건설했고 자동차 전용 도로도 새로 건설해놓아 교통이 편리하다.
바다를 옆에 끼고 있어 공기도 상쾌하고 차들이 붐비지 않아 넉넉한 분위기 이다. 해변의 백사장은 10km가 넘게 길다. 또 백사장을 따라서 야자수가 쭉 늘어서 있는 풍경은 이국적이며 비키니 차림의 선남 선녀들이 거니는 모래사장은 낭만적인 흥취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산호 섬이나 코창 섬 같은 가까운 섬으로 배를 타고 관광을 갈 수도 있고 바다 낚시 해양 스포츠 시설들도 두루 갖추고 있다. 최근에는 잠수함까지 등장하여 바다 밑 관광도 가능해졌다. 가까운 코란섬에 배로 도착해서 섬의 뒷편으로 가면 타이만에서 몰려오는 파도가 거세다. 마른 나무를 주워다 모닥불을 피우고 캠프화이어를 한다면 일상의 췌사(贅事)를 씻어버리기에 충분하다. 산처럼 밀려오는 파도에 맞서 이은상의 '내고향 남쪽바다'를 불러보라. 태평양이 내 것이 된 듯하고 두고 온 작은 땅 한국과 좁은 땅에서 아웅 다웅하는 내 민족에 연민(憐憫)을 느낄 것이다.
방콕 시내에는 관광 대국 답게 호텔들이 많다. 어느 골목에나 호텔이 한 두개 없는 곳이 없다. 호텔 시설도 휼륭하고 써비스도 국제적 수준이다. 초특급에 해당하는 호텔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오리엔탈, 샹그릴라, 쉐라톤, 메리옷. 아마리, 임페리얼, 수코타이, 두싯타니, 하이얏트, 피닌슐러, 홀리데이 인, 노보텔 등이 명성을 자랑하는 호텔들이다. APEC, ASEM, ASEAN, PATA, 아시안 게임 등의 대형 국제 행사가 많이 열리기로도 유명한 도시가 방콕이다.
특히 차오프라야 강변의 오리엔탈 호텔은 설립한지 100년이 넘는 호텔인데 세계 최고의 호텔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다. 가장 오래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고 시설과 써비스에서 세계 최고이다. 규모가 크지는 않다. 손님이 편안하게 느끼는 아담하고 아늑한 분위기와 강변에 접해 있는 아름다운 야외 식당은 세계최고의 호텔 답다. 영국의 소설가 썸머세트 모옴이 집필했던 장소로도 유명한데 호텔의 구관을 'Author's House'라고 명명했다.
제 1회 ASEM(아시아 유롭 정상회담) 총회가 방콕에서 열렸을 때 영국, 불란서, 독일, 이태리, 스페인, 스웨덴등 구라파의 거의 모든 정상들이 오리엔탈 호텔에 묵었었다. 이 때 한국의 김영삼 대통령은 그 옆의 쉐라톤 호텔에 투숙하게 되어 나는 개인적으로 못내 아쉬워했던 기억이 있다. 처음 내가 오리엔탈 호텔을 찾아 갈 때 택시 운전수에게 '오리엔탈'이라고 정확하게 발음했더니 엉뚱한 호텔에 데려다 주었던 경험이 있다. 태국인들은 '오렌뗀 호텔' 이라고 발음해야 알아듣는 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방콕은 한국이 반납했던 아시안 게임을 포함해서 4차례의 아시안 게임을 개최했으며 1998년의 아시안 게임을 치르기 위해 새로운 스타디엄도 많이 신축했고 여기로 연결되는 고가 도로도 많이 건설했다. 가까운 장래에 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한 포석이라고 정부 관계자가 말한 적이 있다.
태국의 한인 이민 역사는 꽤 긴 세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계 2차 대전말에 일본군으로 버마 국경 전투에 참전하고 있던 중 1945년 종전이 되어 태국에 눌러 앉은 한인이 있었다. 당시의 버마는 영국의 식민지 이었으므로 영국과의 전쟁이었다. 태국은 인도 지나 반도처럼 불란서의 식민지도 아니고 영국의 식민지도 아니었기 때문에 일본에 적대적으로 대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태국은 전쟁의 참화를 모면할 수 있었고 종전후부터 지금까지도 일본과는 유대를 돈독히 하고 지낸다. 일본군으로 참전했다가 태국에 남게 된 한인은 10여명 이었다. 이들은 일본 교육을 받은 일본통 이었으므로 일본의 기술을 도입하거나 일본의 회사와 연계해서 사업을 한 사람도 있었고 위생병의 전력을 이용해서 의료 시술로 생계를 삼은 사람도 있었다.
모두 젊은 시절에 태국에 정착했으므로 태국 여자들과 결혼을 했다. 식수 정수 사업을 해서 부자가 된 사람도 있었고 일본의 건설회사와 합작해서 건설업으로 돈을 번 사람도 있었다. 일본군 장교출신도 있었고 사병 출신도 있었는데 모두 태국 사회에 정착하여 상류층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고 한국인은 세계의 어디에 가도 잘 적응할 수 있는 우수한 민족이라는 걸 증명해 보인 것이다.
그 후 한국 동란이 발발하여 태국 군을 파병하기에 이르렀고 50년대와 60년대에 태국 군과 결혼하여 태국에 온 여자들이 있었다. 이때까지도 태국에서의 한인 사회는 눈에 잘 뜨이지 않는 미미한 존재 이었을 것이다.
1964년에 한국은 월남전에 한국군을 파병하게 되었고 건설회사 토건회사 군납회사 수송 회사들이 속속 월남에 진출하게 되자 태국에 그 교두보를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바로 뒤에 온 중동 건설붐을 타고 태국에 정착한 한인 수가 늘어 나기 시작했다. 방콕 공항이 중동으로 가는 중간 기착지 였기 때문에 한인 상대 호텔 식당 유흥업소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태국에 한인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말 여행 자유화가 실시되면서부터 이다. 여행사를 필두로 기념품 가게 식당 한약방 가라오케 술집등이 늘어나게 되었다. 바로 뒤이어 해외로 진출하는 기업체가 늘어나면서 노동집약 산업인 의류, 완구, 양말, 신발을 필두로 건설 토건 회사 전자와 부품산업 컴퓨터 관련 산업, 자동차 부품, IT 산업등이 들어왔다.
현재 태국에는 14,000 ~ 15,000명 정도의 한인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사관이나 한인회에 신고들을 잘 안하기 때문에 정확한 숫자 파악이 어렵다.) 대부분 방콕에서 살고 있지만 촌부리, 시라차, 차청사오, 파타야, 라용의 공장 지대에도 상당수의 한인이 살고 있다.
인구분포로 봐서 여행업과 여행 관련업 종사자들이 제일 많은 숫자를 차지하고 있다. 또 개인 사업자들이 회사에 근무하는 인구보다 많다. 개인 사업분야에 대해서 질문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여기서 언급해 보고자 한다.
무역업과 오파업(보따리 장수 포함) 종사자, 이는 란(蘭)이나 바나나 망고 구와바 파인 애플등의 농산물 수출업, 냉동 새우, 오징어, 바닷가제, 민어, 갈치등의 수산물 오파, 유명 브랜드 의류와 슬리퍼등 수출업, 조화나 목재 완구, 수공예품, 가오리, 악어 가죽 제품 수출등이 있다. 식당과 식료품업, 식료품은 고추장, 된장, 김치, 떡등을 만들고 있다. 여행자 기념품점과 중간 휴게소, 보석 가게, 목욕 사우나 업. 골프장 임대업과 골프 투어 유치업, 옷 가게, 골프 샵, 자동차 임대와 여행 안내, 항공 티켓 판매와 화물 훠워딩, 도서 대여, 영화 필름과 DVD등 대여업, 명함등의 인쇄업, 신문지국, 컴퓨터 수리, 한약재 수출과 한약방, 비지니스 컨설팅, 인력 소개소, 한글 잡지 발행, 소규모의 호텔업과 하숙업, 정수기 대여업, 이삿짐 쎈터, 가라오케, 맛사지, 룸쌀롱등의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
교육 인력 자원부의 인가를 받고 자금 지원을 받고 있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과정의 학교가 있고 선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한인 국제학교도 있다. 한인 학교는 외국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국어 교육 못지 않게 영어를 집중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방콕에만 10여개의 한인 기독교 교회와 카돌릭 성당이 있고 한인 불교 사찰도 2개가 있다. 아직은 한인들 수가 많지 않아 한인 자체로 소화할 수 있는 대형 생산 공장이나 유통 업체가 없다. 이런점에서 아직은 본국 의존도가 높은 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자동차 같은 업종에서 투자를 많이 한다면 부품 업체등이 따라서 들어오게 될 것이고 자동차는 부품 종류가 1만여종이 되기 때문에 부대 업종에서 한인 산업이 활성화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대 자동차가 태국 시장을 소홀히 하고 있는 것 같아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안타깝기 그지 없다. 자동차가 독자적으로 우뚝 설수 없고 부대 산업 설비가 따라와 주어야 된다는 점에서 동남아 어느 나라 보다 태국은 유리란 입지 조건을 갖고 있다. 일본의 토요타, 혼다. 니싼, 스즈끼, 이스즈 5대 자동차 회사가 모두 태국에 생산 공장을 가지고 있어 부대 산업이 잘 발달되어 있다.
그리고 태국 자체 시장도 동남아에서 가장 큰 시장일 뿐만아니라 주변국들과 육로로 연결되어 있어 장래가 유망한 미래의 자동차 시장인 것이다. 동남아 국가들은 북미 공동시장과 유럽 공동 시장에 맞서 ASEAN 공동 시장을 태동시켰다. 2002년부터 품목별로 관세를 낮추기 시작하여 동남아 국가들이 취약한 IT, 통신 장비쪽에서 먼저 무관세 제도를 시작하였다. 2012년까기 농산물을 끝으로 ASEAN 무관세 지역이 완성된다. ASEAN 10개국이 무관세로 연결될 때 4억~5억 인구를 가진 대 소비 시장이 형성되는 것이다.
한인들은 대개 태국의 상류 사회의 생활들을 영위하고 있다. 보통 아이들을 미.영 재단의 국제 학교에 보내고 있고 월세 3만밧~5만밧(90만원~150만원) 정도의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방콕은 전세 아파트라는게 없고 전부 가구가 갖추어진 월세 아파트로서 태국인들은 콘도(미니엄)라고 부른다. 방콕의 콘도는 주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해서 지은 것이다. 이도 또한 질문하는 사람이 많이 있어 아파트 월세를 세분해 본다.
20평~40평 : 1만5천밧~3만밧(45만원~90만원), 40평~60평 : 3만밧~5만밧(90만원~150만원), 60평~80평 : 5만밧~7만밧(180만원~240만원), 80평~100평 : 7만밧~9만밧(210만원~270만원), 100평~150평 : 9만밧~15만밧(270만원~450만원) 정도 이다.
위의 평수는 공유면적이 포함 안된 실평수 이다. 태국인들은 수퀘어 미터를 쓰는데 100 스퀘어 미터라고 말할 때 실평수 100스퀘어 미터를 말한다. 아파트 형태는 미국식으로 널직 널직하고 큰 평수의 아파트가 많다.
한인이 사는 100평의 아파트를 가 보았는데 리빙룸이 운동장 이었다. 저쪽 끝에서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고 아이들 얼굴 보기가 쉽지 않아 작은 평수로 옮겨야 겠다고 주인은 불평을 했다.
한국인이 방콕에서 산다는 것은 먹는 것과 생활용품 값이 싸다고 해도 위와 같은 아파트 가격과 국제학교에 아이들이 다닐 경우 학비가 만만치 않기 때문에 생활비가 결코 적게 든다고 말할 수 없다. 또 자동차 값이 비싸다. 비싼 관세 때문인데 예로 현대 쏘나타 가격이 한국 가격의 두배 정도 이다. 자동차를 현지에서 생산하지 않고는 일본차와의 경쟁에서 결코 이길 수 없을 것이다.
태국의 역사와 문화를 말할 때 불교를 빼놓고서는 말할 수 없다.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문화 유산은 거의가 불교 사원이거나 불교와 관련이 있는 유적들이다. 옛 왕궁을 찾아도 정교 일체의 정치 제도를 가지고 있던 태국은 궁전과 절이 같은 장소에 존재한다. 지금도 태국은 정교 일체의 나라로서 태국의 남자는 모두 중으로서 수련 기간을 2~3 개월 마쳐야 한다. 국민 개병 제도와 함께 국민 계승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버마의 침략에 의해 지금은 폐허가 된 옛 아유타야 왕조의 궁전에 가도 궁전을 빙 둘러서 불상이 서 있고 버마군에 의해 불에 타고 목이 모두 부러진 채로 남아있다. 이토록 왕궁과 불교가 일체가 되어 있던 태국에 카돌릭 선교사가 들어와 선교를 시작한 것은 200년 전쯤이다. 200년 된 카돌릭 선교는 크게 성공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현재 카돌릭과 개신교 신자를 합쳐 기독교 인구는 0.6% 정도 이다.(0.2%라고 말하는 자료도 있다)
에스파냐의 제수윗 교단이 아시아에 포교를 시작한 것은 19세기 초 이었다. 방콕에도 카돌릭에서 포교에 힘쓴 흔적이 도처에 남아 있다. 사톤 실롬 프런칫 로드에 가면 거의 200년이 되는 성당이 남아 있고 중 고등학교도 많이 세웠다. 방콕 최고의 번화가인 실롬에 페허가 된채로 카돌릭 공원 묘지가 남아 있다. 왕성하게 선교사를 파견하던 시절의 묘지 처럼 보이나 그후에 선교사 파송이 중단되면서 돌보는 사람이 없어 폐허가 된듯이 보인다.
태국은 한국보다 먼저 서양 선교사들이 포교를 시작하였다. 비행기가 없던 19세기에 배를 타고 선교 여행을 떠났을 것이고 지역 특성상 동남아에 먼저 진입 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16세기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에 맞서 로마 카돌릭 교회는 교리를 강화하기에 이르렀고 원성이 높던 돈을 내면 죄사함 받는다는 면죄부 판매를 금지 시키기에 이르렀다. 그 당시 카돌릭 신부들의 타락은 극에 달해서 첩을 여러명씩 두고 있는가 하면 돈을 벌기 위해 매음과 술집 도박 알선업까지 손을 대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저간의 얘기들이 '천일 야화'라는 소설에 표현되어 있다.
급기야는 에스파냐에서 제수윗 교단이라는 급진적 카돌릭 정화 교단이 출현했고 이들은 부정을 저지르는 성직자는 물론 점쟁이 무당 이단자를 화형 시키는 마녀 사냥을 주도 하기에 이르렀다. 나중에는 교황에 의해서 이용당하는 교황 친위대로의 역할을 하게 되지만 출발 당시에는 카돌릭 정화와 포교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것이다.
카돌릭 부패 척결을 부르짖고 일어난 루터 칼빈 등의 개신교가 햇볕을 보게 된 것은 발생지인 유럽이 아니고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미 대륙에 간 일단의 영국인들에 의해서 이다. 본격적인 개신교의 세계 선교는 미국인들에 의해서 이루어 졌다.
한국의 개신교에서 태국에 선교사들을 많이 파견하고 선교에 힘쓰고 있지만 그 성공 여부는 아직 미지수 이다. 방콕에도 한국 선교사들이 많이 있으나 지방에도 많이들 나가 있다. 특히 치앙마이 북쪽의 산족 선교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경우도 있다고 듣고 있다. 에스파냐, 미국에 이어 한국인이 기독교의 선교 임무를 바톤 타치한 것같은 느낌이 든다. 한국에 언더우드, 아펜쎌러가 개신교 선교를 시작하고 중국에 노벨상 수상 작가 펄벅의 부친이 선교를 시작할 무렵 태국도 예외없이 개신교의 선교가 시작되었으나 그리 성공을 거둔 것 같지는 않다.
종교에 관한한 역사적으로 한국은 유별난 포용력을 보여왔다. 유교가 들어와서 본토 중국보다 더 열심히 배우고 연구해서 꽃을 피웠고 이로 인해서 시성 타골의 지적 대로 동방 예의지국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한국 사회에 그 사상적 기저(基底)를 이루고 있다. 공자의 유교 사상은 오히려 본토 중국에서는 잊어버린지 오래다.
불교가 들어온 신라 시대에는 귀족 사회의 종교 이었으나 샤마니즘과 무속신앙이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 한국 사회의 저변층까지 확대되어 펴져 나갔다. 신라 고려시대에는 왕실과 불교가 밀착되어 국사를 좌지 우지 할 수 있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이조의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국교의 지위는 잃었지만 민간에 깊게 뿌리내린 불교는 오늘날까지도 최다 인구를 자랑하는 강력한 종교로 자리잡았다. 불교는 현대에 와서 발생국 인도에서는 정작 미미한 종교가 되었다.
그리고 한국에 정착한지 100년 남짓의 기독교는 오늘날 인구의 25%(기독교계에서는 달리 주장한다)를 차지하는 또 하나의 강력한 종교로 자리잡았다. 한국 기독교계에서 남미 아프리카의 오지에까지 전 세계에 5000여명의 선교사가 나가 있다고 한다.
태국은 불교의 역사가 길고 국민들의 마음에 불교가 너무 깊게 뿌리 박혀 있을 뿐만 아니라 국교로서 보호하고 있는 한 여타 종교가 들어와서 빛을 보기란 어려워 보인다. 물론 태국은 일찍부터 민주주의 헌법을 채택하고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무슬림 힌두교 카돌릭 개신교 일본의 남녀 호랑개교까지 다 들어와 있고 자유스러운 종교 행위가 보장 되어 있다. 프런칫 로드에 일류 여학교라는 카돌릭 계통의 성모 여학교가 있다. 이 학교 출신과 얘기를 해 보았는데 "학교에 다니면서 존경하고 따르던 수녀 선생님도 많았고 열심히 카돌릭 교에 심취하면서 충실한 신자가 되려고 애도 써봤어요. 그러나 어려서부터 보아온 부모님들의 불교적인 분위기와 주위 환경 때문에 카돌릭 신자가 되기는 어려웠어요. 지금은 다시 절에 다니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한국의 통일교가 처음 방콕에 들어왔을 때 사회의 저변층에 뚫고 들어가 상당한 성과를 거두는 듯이 보였었다. 젊은이들이 집을 나와 단체로 합숙하면서 교리를 배우고 기도회에 참석하고 나중에는 단체로 결혼을 시켜주느니 하면서 선교에 힘쓰고 있었다. 태국 정부에는 국민 윤리 위원회라는 국가 윤리 문제를 심의 의결하는 기구가 있다. 왕실과 수상과 대법원장 국립 대학 총장으로 결성되는 국가 이념의 최고 심의 결정 기관이다. 여기서 통일교에 관한 부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추방 명령을 내린 일이 있다. 그런가 하면 한국의 기독교 선교사가 우상 추방을 주장하면서 불단과 불상을 철거하고 추방당한 일도 있었다.
태국은 분명 축복받은 나라이다. 각종 농산물과 과일 축산물 낙농제품 해산물이 먹고 남아돌 정도로 풍부하게 소출된다. 또 땅이 넓어서 방콕에서 차로 한 시간 정도만 나가면 지평선이 보이는 평야가 펼쳐 진다. 옛날 미국 서부 영화에서 보았던 것 같은 막막한 평원은 부럽기만 하다.
'기차는 원의 중심을 달린다' 라는 제목의 수필이 중학교 교과서에 실린 적이 있었다. 한국일보 사장 이었던 장기영씨가 미국 대륙을 기차로 여행하고 소감을 쓴 글이었다. 파타야로 가는 고속도로에서도 치앙마이로 가는 고속도로상에서도 원의 중심을 달리는 것 같은 지평선이 보이는 평야는 계속해서 펼쳐진다. 한반도 2.5배의 땅덩이에 산이 거의 없기 때문에 가도 가도 평야는 넓기만 하다. 북쪽으로 가다 보면 넓은 논들이 눈에 많이 뜨이는데 어떤 논은 일개 면 정도의 크기인 것도 있다. 헬리콥터로 농사지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 광대한 평야를 처음 본 한국인들의 반응은 "야 여기에 한국사람들 데려다 놓으면 날고 기겠는데..." 하는 것이다. 좁은 땅에 사는 우리 눈에 그냥 놀려 둔 넓은 평야는 아깝기만 하다. 그런가 하면 남쪽으로는 긴 해안선을 자랑하고 있다. 사철 뜨거운 태양과 야자수가 늘어서 있는 이국적인 긴 해안의 백사장은 외국 관광객을 유혹하고 있으며 이들이 뿌리는 외화가 엄청난 액수이다.
국토의 북쪽 끝 중국과의 국경지대에 이르러서야 산들이 나타나는데 히말라야 산맥에서 뻗어나온 산들로서 해발 2,500m가 넘는 산들이 있다. 이 깊은 산중에는 자기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가진 소수 민족들이 살고 있다. 아카, 카렌, 몬, 리슈, 파뎅등 50여개 소수 인종 부락이 있다. 현재도 이들의 주된 생업은 양귀비 재배라고 한다. 세계 오피엄의 50%가 이 지역에서 나온다. 태국은 20년 전부터 이들을 태국 학교에 입학시켜 교육시키고 태국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으며 수공예품 단지등을 만들어 생업을 영위할 수 있도록 꾸준히 계몽하고 있다.
그러나 미얀마, 라오스등의 국경안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들은 아직도 오피엄 재배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 오피엄 킹핀으로 유명한 인물이 쿤사이다. 미국 정부에서 그를 체포하려고 했을 때 미얀마 정부에서 보호해 주었던 사실은 유명하다. 그는 다시 산속에 들어가 이 소수 인종들을 다스리고 있으며 사설 군대까지 가지고 있다. 태국, 미얀마, 라오스의 삼국이 만나는 이 고산 지대를 황금의 삼각주(Golden triangle) 라고 부른다. 양귀비 재배에서 벌어들이는 돈과 연관이 있는 말이다. 지금은 거의 모든 오피엄이 미얀마를 통해서 나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태국에도 이의 운반책이 있어 마약 비지니스에 관여하고 있는 조직이 있었다. 탁신 시나와트라 현 수상이 작년부터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적극적으로 소탕 작전을 벌여 지금까지 1,200여명이 현장에서 사살 되었다.
그러나 이 산족들을 보기위해서 외국인들이 많이 몰려오고 있다. 특히 용감한 서양 사람들의 탐험 여행 코스가 되어 있고 이로 인해서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있으니 외화 획득원의 하나 인 것이다.
나도 이 산족 마을 한 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 부락의 모습이 우리의 옛날 시골 농촌 마을과 비슷한 것에 놀랐다. 나무 기둥을 세우고 흙으로 벽을 바르고 마른풀을 엮어서 지붕을 이어 놓은 모습은 한국 농촌의 초가집과 같았고 화장실은 나무 널판지를 양 다리 간격으로 대서 볼일 볼 수 있도록 했으며 돼지 우리는 통나무를 엮어 만들어 놓았는데 내가 어려서 본 한국 농촌 마을의 모습과 너무 닮아 있었다.
한국의 관광객은 최근 연간 약 70만명이 태국을 방문하고 있고 이 숫자는 점점 더 늘어나는 추세이다. 한국 관광객 수가 중국 일본 다음으로 많은 숫자인데 한국의 인구에 비해서 대단히 많은 사람이 태국을 방문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방콕의 한인들은 관광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제일 많다. 관광 회사, 기념품점, 식당, 중간 휴게소, 가라오케, 한약방, 관광 안내 등의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
퇴직 후 연금을 받는 서양인들이 많이 와서 살고 있고 이들이 쏟아 붓는 외화는 불로소득이나 다름이 없다. 주석 광산, 싸파이어 광산, 은 광산, 철광산이 있는가 하면 남쪽의 안다만 해상에서 석유도 나온다. 최근 다시 쏭클라 남쪽 바다에서 유정이 발견되어 바다 밑에 파이프 작업을 하고 있다.
이런 풍부한 자연의 혜택으로 인성이 각박하지 않다. 매사가 여유롭게 흘러간다. 남을 밀치고, 제치고, 밟고, 디디고 올라서야만 하는 치열한 경쟁을 하지 않고도 먹는 문제가 쉽게 해결되는 나라이다. 남의 나라에 의한 침략을 받아 본 적이 없어 타국인을 그리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마련 되어있다.
방콕의 어디를 가도 사철 꽃이 많다. 비닐하우스 재배가 아니라도 야외 어디서나 꽃 재배가 가능하고 철 따라 꽃이 피어난다. 특히 가로수가 꽃이 피는 종류가 많다. 2층 3층 높이의 나무에 꽃이 만발한 가로수는 행인의 발걸음을 멈추기에 충분하다. 어느 집 정원에도 자스민 나무를 많이 볼 수 있다. 자스민 꽃은 시도 때도 없이 연중 계속 피어 그윽한 향기를 행인에게 선사한다. 꽃에 향기는 없지만 난(蘭) 종류가 많고 언제 어디서나 여러 가지 소담스러운 난 꽃을 볼 수 있다. 난 종류는 한국에 수출도 많이 하고 있다. 한국에서 사무실 개업식에 초대되어 갔었는데 선물로 들어온 꽃이 거의가 태국의 난이었다.
먹을 것 풍부하고 나무와 꽃이 지천이고 농업 용수로 쓰고 남을 만큼 비가 많이 내려 쌀이 넘쳐 수출하고 있고 지하자원과 석유를 산과 바다에서 얻을 수 있는 태국은 분명 축복 받은 나라이다. 그러나 좋은 날씨와 물질적인 축복만 가지고는 방콕을 다 설명할 수 없다. 가진자 뿐만 아니고 못 가진자들도 마음이 안정되어 있다. 편안한 마음으로 일상을 살고 있다. 이는 한국의 어딘가 불안한 사회 분위기와 대조를 이룬다.
한국은 북한이라는 적과 장거리포 사정거리 안에 대치하고 있다는 점이 불안의 한 원인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자는 일념으로 경제 발전을 위해서 좌우 돌아볼 여유없이 앞만 보고 돌진해온 지난 30년 동안의 굽고 접쳐진 그늘이 사회 전반에 회색빛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한국은 지금 앞으로 닥쳐 올 국가의 운명을 이끌어 갈 방향 설정도 확실하게 하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최근 국내의 여론 조사에서 61%의 국민이 앞날에 대한 희망없이 살고 있다는 결과가 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다. 그런가 하면 작년과 올 한해 동안 1만명 이상의 자살자가 발생했다. 화장실 갔다가 뭐 볼 시간 없이 열심히 일한 덕분에 국민 소득은 선진국의 수준이 되었으나 사람이 살기는 더 힘든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태국 사회의 안정성을 불교와 왕의 존재에서 찾는 사람이 있다. 왕이라는 절대자가 서민의 편에 서서 돌보고 있다는 믿음은 종교와 마찬가지로 국민들에게 위안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왕이 내편에 서 있는 한 누구도 나와 내 가족을 위협할 수 없다는 믿음 같은 것 말이다. 유럽에는 왕이 있는 나라가 많다. 나는 유럽에서 왕이 있는 나라는 사회가 안정되어 있고 조용하고 질서 있게 흘러간다는 인상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태국에서 왕은 군림만 하고 직접 통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국민 개개인의 심성에 깊이 자리 잡고 종교의 절대자처럼 국민성을 순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 아침에도 언제나 처럼 조깅화를 신고 거리에 나선다.
어젯밤 엄청 내린 비로 도로가 말끔해 졌고 가로수의 잎들이 샤워를 하고 가로등 밑에서 진초록으로 반짝이고 있다. 개들이 보도의 여기 저기에 구부러져 아직들 자고 있다. 아직 어둑 어둑한 시간인데 길거리의 무삥(돼지고기 꼬치구이) 장수는 숯불을 피우며 연기를 내뿜고 있고 또후남(두유) 장수는 꽈배기를 튀기기 위해 기름을 숯불에 데우고 있고 파인애플 수박 워터멜론을 짤라 주는 과일 장수는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하고 있고 뀌띠아우(쌀국수) 장수는 국물을 국자로 젓고 있고 파카파우 무삽(돼지고기 볶음 덥밥) 장수는 각종 반찬 종류를 유리 진열장에 내다 놓고 있다.
조금 있으면 직장인들이 노점 옆에 내놓은 허름한 의자에들 앉아 간단한 아침 요기들을 할 것이다. 직장 아가씨들이 이런 저런 음식과 과일을 봉지 봉지 싸 들고들 갈 것이다. 그리고 지상과 지하로 전철이 다니는 시가지는 차가 밀려 시속 40키로 쯤으로 서서이 움직일 것이다. 그런 차들 사이를 오토바이들이 미니스커트의 아가씨를 뒤에 싣고 요리조리 곡예를 하며 갈 것이다. 인간 세상이야 어찌 돌아가던 숫한 사연을 감싸 안고 흙탕물인 채로 말없이 오늘도 차오프라야 강은 흐른다. -끝-
질문에 대한 답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태국 생활을 하기 위한 구체적인 것' 이라고 질문을 하셨는데 질문이 광범위 합니다. 제 나름대로 다음과 같이 분류해 보았습니다.
1. 직업을 얻는 것
2. 사업을 시작하는 것
3. 태국 생활에 필요한 의, 식, 주 문제
4. 태국 관광
1. 직업을 얻는 것
한국에 지금 대졸 실업자가 많다는 얘기를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태국은 여기에 진출해 있는 한국의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에 취직하기가 한국보다 쉽습니다.
태국에서 국제학교를 나오고 대부분 미국, 영국, 호주로 유학들을 가기 때문에 대졸자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지 진출 한국 업체가 찾는 인재는 태국 사정에 밝고 영어와 태국어에 능통한 사람을 요구하기 때문에 한국에서 교육받은 사람이 태국 진출회사에 취직하기는 어려워 보이는군요.
2. 사업을 시작하는 것
구체적인 아이템이 있고 태국에서 시작해서 승산이 있는 사업이라면 태국의 자금력 있는 파트너를 찾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외국인대 태국인의 상법상 자금 비율은 49 : 51입니다. 내가 자금력이 전혀 없이는 힘들다는 얘기입니다.
태국인이 못 미더워서 그 반대의 경우를 문의하는 경우가 많은데 BOI(Board of Investment) 등록을 하고 생산량 전량 수출이라든가 하는 등의 자격 요건을 갖추면 100% 외국인 투자도 인정이 됩니다. 이 경우 수입 관세가 면제되기도 합니다. 또 한국 처럼 수출이 완료되면 관세 환급제도도 있습니다.
3. 태국 생활에 필요한 의, 식, 주 문제
아파트는 외국인이 구입할 수 있습니다. 외국인이 땅을 사는 것은 안되지만 대지가 있는 주택일 경우 법인 이름으로 구입이 가능합니다. 아파트는 모두 전세가 없고 월세 아파트 인데 가구가 다 마련되어 있어 장농을 가지고 이사 다녀야 하는 불편은 없습니다. 고급 아파트일 경우 가구들이 딜럭스 합니다.
아파트 보증금은 보통 2개월분 이고 월세는 선불입니다. 계약 기간은 원하는 대로 1년 2년 3년... 을 할 수 있고 계약 기간이 끝나고 나갈 때는 보증금을 돌려 받습니다. 이 때 아파트에 손상된 부분이 있으면 보상하고 나머지를 받습니다.
의(衣), 식(食) 문제는 한국보다 엄청 싸고 종류도 많고 지천이라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옷, 신발은 한국 것이 좋습니다. 태국의 옷, 신발은 몸에 잘 맞지 않고 감의 질이 안좋고 메이킹이 엉성해서 맘에 안들 겁니다. 한국은 의류, 신발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으니까요.
4. 태국 관광
제가 아래에 알려 드리는 website에 들어가도 많은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만, 중앙 일보에서 나온 세계 관광 안내 책자 중에 태국편이 추천할 만 합니다.
★★★ 태국 관계 website :
1. Thailove.net - 한글판, 배낭 여행자들이 만드는 톡톡 튀는 에피소드, 여행 경험 스토리들이 있습니다.
2. Thailandguidebook.com - 영어판, 태국의 대학생들이 만드는 태국 관광지 안내가 사진과 함께 실려있습니다.
3. ThailandLife.com - 영어판, 태국의 불교, 음식, 결혼, 장례풍습, 언어, 마약 등에 대한 사회 전반을 이해 할 수 있도록 소개하고 있습니다.
4. Thilandtrade.com - 영어판, 태국의 manufacturer, producer, exporter, importer를 광범위 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5. www.tot.or - 영어, 태국어판, 태국의 정치 행정 조직, 교육제도, 건강복지제도, 군사관계 등 태국이라는 나라 전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