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1. 뉴 에이지 운동
1) 뉴 에이지 운동의 발생원인
2) 뉴 에이지 세계관의 기초(셜리 매클레인을 중심으로)로서의
환생
3) 뉴 에이지 운동의 목표
4) 뉴 에이지 운동의 핵심사상
2. 윤회와 환생
1) 어원적 定意
2) 환생설의 기원
3) 환생설의 사상적 특징
(1) 카르마(Karma;業)에서의 해탈 ; 인본주의적 성격
(2) 신비주의와 강신주의 사상(Occultism)적 성격
(3) 그노스틱 철학과 신비체험
4) 동양과 서양의 환생설 비교
5) 환생설 비판
나가는 말
참 고 문 헌
들어가는 말
오늘날 한국교회 뿐 만 아니라 기독교 내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교회가 현실에 정신적 지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미 서구사회에서는 반(反)기독교적인 풍토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그 가치관을 세워 나가는 초고속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二律背反的인 것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흥미가 오늘의 세대를 뒤덮고 있다는 점이다. 서점들의 진열대는 방대한 양의 밀교문학(esoteric
literature)으로 채워지고, 영화와 비디오들은 보이지 않는 영적존재들을 소재로 하여 그들을 우주의 주인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청소년 잡지들은 동양의 다양한 정신(심리)공학 (Psychotechnique)을 제공하면서 영적존재들을 새로운 예언자, 20세기의 신들로 간주하고 그들이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선전한다.
더구나 매스미디어는 오늘의 세계가 수천, 수만, 수억년 전의 삶이 환생한 것인 양 온통 미신적 요소들에 대한 관심으로 一色하고 있다.
하나님을 떠나 살면서도 허무를 극복할 만한 초월적인 현상, 즉 환생설의 만연이 그것이다.
신비주의, 유행심리학, 우주 인문주의, 영매, 접신술, 마법, 샤머니즘, 점성술, 사후체험, 육체 분리, 미확인 비행물체(UFO) 접촉, 그리고 힌두교와 불교의 여러 요소들이 교묘하게 섞여 있는, 소위 뉴에이지 철학과 믿음이 도래 함으로써, 환생의 영향력이 계속
해서 증가하고 있다. 그것은 기독교 뿐만이 아닌 과학적 무신론이나 실존주의적 불가지론에 대한 독특하면서도 은밀한 대안이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현실적 상황에서 환생에 대한 사고의 만연은 역사적 기독교에 심각한 도전이 되며 지금까지의 어떤 이단보다 더 치밀하고 친숙한 형태로 접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환생에 대한 이해와 각성은 현대교회의 가장 큰 도움으로 작용될 수 있을 것이다.
1. 뉴에이지 운동
동양의 사상 체계는 인간이 한 평생에 자신의 신성을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므로 윤회를 거듭해야 하는데 윤회는 업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이 어떤 종류의 것이냐에 따라서 신성에 접근하는 정도가 결정되며 결
국 그들의 궁극적목표는 윤회를 끝마치고 우주와 하나가 되는 합일성에 도달하는 것이다.
궁극적인 실체는 하나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절대적인 선도 악도 진실도 거짓도 구분되지 않는 상태가 된다. 그들은 이러한 구분은 이 세상의 특징이며 그러한 구별은 극복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개인을 중요시하며 물질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서구인들에게 범신론이란 그리 매혹적인 사상은 아니다. 그러므로 뉴에이지는 세계관의 매혹적인 요소만을 취하여 만들어진 사상이다. 뉴에이지는 사람들이 꺼려하는 요소들은 삭제시켜버리고 현대의 시대적 상황에 맞게 사람들의 구미를 맞춘 것이다.
뉴에이지는 이제 단순한 방관자인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조차도 일시적인 유행 그 이상의 것이라는 인식이 일반화되었다.
즉,뉴에이지는 지위의 고하,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생활 전반에서 사람들을 유혹하는 중요한 문화사조가 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뉴에이지의 본질적인 주제인 자기 신격화(self-deifying)는 개인은 물론 조직, 단체, 사상에까지도 그 영향력을 확대시키고
있다.
셜리 맥클레인(Shirley Maclaine)이나 존 덴버(John Denver)와 같은 유명 연예인과, 프리쵸프 카프라(Fritjof Capra)와 같은 물리학자, 사업가인 에르나 어하드(Werner Erhard)와 같은 이들은 뉴에이지와 관련된 서적, 잡지, 신비치료요법, 정신
요법 세미나들을 확산, 장려하고 있다.
문화의 모든 영역이 뉴에이지에 의하여 잠식되어가고 있다. 급격히 확산되는 뉴에이지의 문화적 영향력에 대해 기독교는 처음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이제는 그것을 숙고하고 분석하여 폭로함으로써 그 실체를 밝히는데 진력하고 있다.
1) 뉴 에이지 운동의 발생원인
산업혁명과 18,19세기의 예술과 철학을 통한 유토피아의 갈망에 이어, 20세기 중반에 있던 두 차례의 전쟁으로 인하여 허무주의와 실존주의 철학의 부흥과 반문화 운동의 등장이 예고되었다. 60년대에 들어 오면서 세계 문명의 선두주자였던 미국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반문화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동양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면서 뉴에이지 운동은 대두되었다.
2) 뉴 에이지 세계관의 기초(셜리 매클레인을 중심으로)로서의 환생
뉴에이지는 윤회설을 내포한 범신론의 궁극적 실체 (ultimate reality)의 개념을 수용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독교의 유신론과 자연주의의 인간 개인의 가치를 중시하는 인간관을 수용하기도 했는데 오히려 후자에 더욱 비중을 두었다고 보는 것이 옳
은 분석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셜리 매클레인을 비롯한 뉴에이저들은 인간 하나하나가 신(Each individual is God)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그들에게는 자아가 궁극적 실체의 핵심이 된다. 셜리 매클레인은 특히 인간의 창조력을 중요시하는데 이것은 동양적
인 사고보다는 서구적인 사고의 색채가 짙다. 동양의 범신론에는 창조성이란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셜리 매클레인에게 있어서 자아란 매우 실제적인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자아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유일신 하나님으로 정의한다.
출애굽기 3장 5절에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명하신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세와의 구별됨을 강조하신 것이다. 즉 "나는 신이지만, 너는 아니다(I'm God, but you are
not)"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매클레인은 그녀 자신을 동양적인 신이 아닌 기독교의 유일신 하나님과 동등화시켜 버렸다. 성경은 분명히 그녀를 창조한 것은 유일신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을 비롯하여 모든 인간이 창조하고 파괴하며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생각은 기독교인들에게는 매우 황당하고 충격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매클레인이 시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성과 권능에 대한 도전이다. 이는 확실히 신성 모독이며 에덴 동산에서 뱀이 이브에게 속삭였던 유혹과 똑같은 속임수인 것이다.
매클레인은 인간자신이 가장 훌륭한 스승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위대한 진리라고 단언했다. 또한 그녀는 우리가 찾고있는 신이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닌 자아 속에 있다고 주장한다.
뉴에이저들에게는 두개의 세계가 존재하는데 가시적인 세계 (visible world)와 비가시적 세계(invisible world)로 나눠진다. 가시적인 세계가 보통사람들이 오감을 통해서 경험하는 현상적 세계라면 비가시적인 세계는 가시적 세계와는 전혀 다른 뉴에이
저들의 신비한 수단,즉 명상이나 침,무아경들을 통해 경험하는 세계를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수단을 더욱 계발하였는데 특히 매클레인은 몇몇 영매를 통하여 보이지 않는 영들과 교신한다.
케빈 라이어슨은 영매로서 그녀가 두개의 영들과 교신할 수 있도록 해주었는데 그 중 하나는 자신을 탐 맥퍼슨이라고 부르는 영으로서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시대에 소매치기를 했었다고 한다. 다른 영은 세베대의 요한으로서 성경의 요한 계시록을 자신
이 썼다고 주장하는 영이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것은 계시록의 내용과 전혀 무관하다.
그리고 매클레인은 정기적으로 요가와 명상을 하며 페루의 안데스 산맥에 있는 온천에 몸을 담그고 촛불을 응시하는 가운데 입신의 경험 (out-of-the-bodyexperience)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자신의 전생이라고 믿는 장
면들을 환상으로 보기도 하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저서에서 일단 비가시적 세계에 들어가면 시공을 초월하게 되며 크리스 그림슨의 침을 맞으면 무아경에 빠지면서 자신의 초자아를 만나게 된다고 밝혔다. 그 초자아는 그녀에게 "I am your higher unlimited self"라고 말했다고 한다.그
때부터 그녀는 그 초자아를 자신의 인도자로 여기게 되었다는것이다.
셜리 매클레인에게는 가르침 (teachings)이라고 부를만한 분명한 윤리성이나 도덕적 교훈이 없다.그녀가 정치적 도덕적으로 주장하는 이슈는 자유(liberal)이다. 그 녀의 결혼과 사생활에 대한 관념은 지극히 현대적이다.그녀는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곧
이혼한 후 여러명의 연인을 가졌고 그러한 관계에 대한 슬픔이나 죄악감을 느낀 적이 없다고 한다.
그녀의 윤리성은 형이상학에 근거한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신이 되기 위한 자기개발과 더 나아가서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녀는 말하기를 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은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한다. 그녀의 윤리관은 자아중
심적이며 모순에 차있다. 셜리 매클레인이 심취해 있는 사상 체계는 결코 인생의 참의미를 우리에게 줄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3) 뉴 에이지 운동의 목표
'첫째 인본주의(人本主義)의 부활이다. 제 2의 르네상스(Re-Renaissance)가 뉴 에이지 운동의 목표이다.
둘째 기존의 모든 비인간적 구조를 타파하고 인류가 하나 되는 인류 박애주의적(人類博愛主義勣)인 평등사회(平等社會)를 이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뉴에이지 운동은 인간의 자기 회복과 박애적 평등사회건설이라는 바람직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아니 주장해야 할 올바른 목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을 이루어 가는 방법 자체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신(神)의 위치에 설 때 가능하다고 주장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4) 뉴에이지 운동의 핵심사상
우리는 뉴 에이지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몇 가지 중요한 개념을 이해하여야만 한다. 앞서 이야기한 '비기독교적'이라는 개념과 더불어 또 하나 중요한 개념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뉴 에이지 운동은 특정한 종교나 철학적 기반을 가지고 출발한 운동이 아니
라 시대적 상황에서 발생한 반문화운동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여기서 '반문화 운동'이라는 단어를 유의해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또 하나는 실제적으로 와 닿는 문제라 할 수 있는 것인데, '사탄주의(Satanism)'와의 구별이다.
사탄주의의 일반적인 현상은, '첫째 사탄으로부터 힘을 얻기 위해 누군가의 억울한 희생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둘째 비도덕적인 모습이다. 여기에는 오직 쾌락의 추구만을 위한 집단 섹스, 살인 등이 포함된다.
셋째 환각이다. 마약의 사용 등을 들 수 있겠다.
넷째 참된 삶의 목적을 버리고 오직 이기주의만을 추구하게 된다. 순간의 쾌락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뉴 에이지 운동의 사상적 기반은 앞에서도 조금 언급하였지만, 동양사상이 그 기반이고 실제로 주도한 것은 서구인들이며 그들은 기계적이고 과학적인 문명에 대한 반문화 운동으로 시작하였기에 비과학적인 심령술 영매 초능력 등에 대해 편향적인 매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뉴 에이지와 Satanism과 동일시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뉴 에이지 운동의 기본 사상과 입장은, 비도덕적이며 반인격적인 사탄주의에 대하여 오히려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음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2. 윤회와 환생
1) 어원적 定意
'환생'(reincarnation)이란 말은 원래의 두 개의 라틴어 'in'(안에)와 'carnis'(육체)에서 나온 것으로, 함께 결합되어 '육체 안에'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접두어 're'(다시 재<再>)가 붙여질 때 이 말은 '다시 육체에'라는 의미를 기본적으로 나타낸다. 따
라서 환생은 본래 혹은 후에 다른 몸으로 변하는 각 사람의 영혼의 윤회적 진화를 말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그 영혼이 겨우 근원과 다시 합병할 수 있는 완전상태로 다듬어질 때까지 계속된다. 그 환생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최종 상태를 열반(nirvana) 또는
신적 우주와의 합일이라고 한다.
2) 환생설의 기원
환생설은 인도에서 처음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창세기에서부터 사단이 거짓말로 시작되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을 떼어놓아 사람을 죽게 하기 위하여 뱀은 금단의 열매를 두고 하와와 논쟁을 시작하였다.
뱀은 하와에게 하나님이 정말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물었다. 이미 질문에는 사기성이 내포되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하와는 펄쩍 뛰며 뱀의 말을 바로 잡아 주었다.
동산 나무의 실과를 다 먹을수 있으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시고 그것을 먹으면 죽게 되리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하와는 이 말씀을 아담으로부터 전해 들었기 때문에 정확히 전달하
지는 못했으나 그 말씀의 뜻은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뱀이 즉시 반격했다.
여기서부터 뱀의 거짓말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홍수 이후에 바벨탑의 건축을 지휘했던 니므롯이 죽자 그의 아내 새미라스는 계속해서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그녀가 낳은 유복자인 담무스를 니므롯의 환생이라고 주장했다. 또 하나님을 배반한 함의
자손들은 자신들이 노아의 자손이 아니라 가인 족 속의 환생이라고 하여 오시리스의 신화를 만들어냈다.
인도에서 환생설이 확고한 자리를 잡았던 이유는 아리안 족의 승려들이 드라바나족을 노예화하기 위하여 카스트 제도를 만들고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강제로 주입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사람들을 승려, 귀족, 평민, 노예의 네 계급으로 나누고
그것을 영원히 고정시키기 위하여 환생설을 이용했던 것이다.
즉 사람은 전생의 업보 때문에 나면서부터 그 계급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보다 나은 다음의 생을 위해서는 좋은 업을 쌓아야 하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소망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그 환생이라는 것이 한 두 번에 그치는 것도 아니고 수천 수만번을 반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도 사람들을 짓누르고 있는 것은 바위 덩어리 같은 '체념'뿐이다. 그들은 불행하게 태어난 데 대해서도 체념하고 현실을 극복해보려는 노력마저도 포기해 버린다. 또 환생설은 사람으로 하여금 최선을 하지 못하도록 속삭인다. 왜냐하면 다음번
생이 있기 떼문에 구태여 지금 다 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인도에는 오늘날과 같은 빈곤만 남아 있게 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내세우는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실상이다. 지금 인도의 1인당 GNP가 겨우 3백 50달러인 것을 보면 그들이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가는 짐작을 하고도 남는다. 환생설의 큰 문제는 윤리 도덕기준을 무너뜨리고 가정을 파괴한다는 점이다. 전생의 기억으로 병을 치료한다는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방법은 현재의 병을 전생과 연관시키는 것
이다.
예를 들어 물에 대한 공포증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가 전생에 홍수로 빠져 죽은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런 사례이다.
그런데 이런 안일한 발상에서 엄청난 문제가 생긴다. 예를 들어 어떤 아들이 자꾸만 아버지를 멀리 하고 미워하게 되자 어머니는 소위 전생을 말해주는 심리학자를 찾아간다. 그러면 그는 아들에게 최면을 걸고 그 전생의 기억을 불러낸 다음 그 아들이
전생에 어머니와 부부였기 때문에 그 아버지를 미워한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이런 사례는 수없이 많다. 95년 5월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윤회의 비밀을 찾아서'라는 소제목으로 환생의 실상을 추적한 일이 있었는데 거기서도 아버지와 딸이 부부였다느니 오빠와 누이가 부부였다느니 하는 터무니없는 이
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렇게 함부로 내뱉는 안일한 술법으로 인하여 당사자가 받게 되는 충격은 말할 것도 없고 이로 인하여 발생되는 인륜의 혼란은 참으로 엄청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사탄의 악독한 음해이며 이런 것은 우선 도덕적으로도 규탄을 받아
서 마땅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서(창 1:26) 즉 하나님을 닮게 창조하셨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성품이 유전되고 있으며 특히 그것이 부모에게서 자신에게도 물려진다.
바로 이것을 훼방하기 위하여 사단은 환생설을 퍼뜨리는 것이다.
먼저 에로 든 SBS의 추적을 통해서도 소위 심리학자 또는 신경정신과 의사라고 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사례가 모두 단순한 환상이나 악령의 주술에 의한 것이었음을 드러내주고 있다.
시내산 의료센터 과장이었다는 브라이넌 와시스 박사라는 사람이 알아냈다는 전생도 결국 어떤 '마스터 스피릿(Master Spirit)'이 가르쳐 주었다고 고백함으로써 그것이 악령의 주술이라는 것을 드러냈고 라마 승의 환생이라는 영국인 '롬장 람파'의 이야기로 60년대초의 베스트 셀러가 되었던 시릴 호수킨의 책은 모두가 허구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환생설이라는 것이 이렇게 악독한 사단의 음모에서 출발한 것인데도 사람들이 그것에 이끌리는 것은 점점 비정해지고 사악해지는 현대의 타락한 문화 속에서 허탈해진 마음을 그것으로나마 달래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 환생설을 바탕으로 하는 소위 '뉴 에이지'문화가 또 전세계를 휩쓸고 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훼방하려는 사단의 마지막 대공세인 것이다.
그러나 구원으로 가는데 안일한 길은 있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으로 나가지 않으면 인류에게 구원의 길은 없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게 하는 유일한 통로가 되시기 때문이
다."
3) 환생설의 사상적 특징
(1) 카르마(Karma;業)에서의 해탈 ; 인본주의적 성격
힌두교와 불교는 재생의 굴레로 부터의 최종 해방은 인간들에 의해서 성취될 수 있을 뿐이라고 가르친다. 인간 상태의 함정이나 고생을 통해서만이 영혼은 해탈(moksha) 혹은 사마드히(samadhi)을 보장하는 충분한 공덕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한 영혼은 다양한 생활방식으로 인간의 상태 즉 수많은 환생을 거치면서 도덕적 교훈을 익히는 진화의 대지로 발전한다.
(2) 신비주의와 강신주의 사상(Occultism)적 성격
New Age의 불가결한 가르침들 중의 하나이며, 사실상 New Age 의 구원에 대한 완전한 개념에 있어 극히 중요한 교리는 영혼의 윤회 (transmigration) - 또는 서양 세계에서 대중적으로 알려진 환생(reincarnation)이다.
New Age가 고대의 동방과 현대의 서구를 통합하려는 매혹적인 방법으로 환생요법을 쓰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나쁜 일들이 나쁜 업보에 기인한다
고 인정하면 우리는 최면술을 사용하여 우리를 전생으로 돌아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 환생은 힌두교나 불교에서 가르치는 것이다. 인간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죽음에 관한 수수께끼와 거기 관련된 문제는 인간의 관심사이다. 어떻게 하면 사망과 공포에서 전율하는 현대인들을 안심시킬 수 있을까? 그러기에 환생은 그 자체가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게 된다. 그런가 하면 크리스챤 가운데도 윤회사상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리고 환생과 부활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크리스챤들도 없지 않다. 그러나 환생과 부활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우선 '환생관'은 부정적인 것이며, 환생 자체가 몹쓸 인생에 돌아오는 것을 뜻한다. 이와 반대로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과 직결된 축복의 극치이며 믿는 사람들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그러나 환생론자들에게는 자기구원을 주장하고, 영혼을 온갖 다양한 환생을 통해서 '카르마(인과응보, 업, 숙명)'를 치름으로서 마침내는 재생의 바퀴를 벗어나 해탈에 이름으로서 스스로를 구원해야 만 한다. 더군다나 환생론에서는 세계를 덜 실재적인 상
태 즉, 본래부터 부정적인 의식의 환상적 투영, 우주의 창조적인 세력의 부산물로 본다.
또한 New Age Movement의 중요한 관심을 차지하는 것은 신의 세계화 인간의 세계, 정신세계와 물질세계, 이생과 저생의 연결, 그리고 어떤 활홀경이나 신비경을 체험, 무아상태에 이르는 것을 실천하고 챠넬링(Channeling)이라는 것이 있다. 무속 종교에서 언급하는 무당, 점술사, 치병자, 마술사, 샤만 등과 비교할 수 있는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챠넬링은 'New Age 형태의 접신술'로 불린다. 접신술은 심령술, 교령술, 신령술의 용어로 사용되며 인간이 알고 있는 신비술(Occultism) 중에서 가장 오래된 형태의 것이다. 챠넬링은 이승에서 있는 사람과 저승에 있는 사람이 서로 대화하거나 교통할 수 있다고 믿는 일종의 과학, 철학 또는 종교이다. 즉, 죽은 자들의 영들이 물질 세계와 영혼 세계를 연결하는 중매자의 역할을 하는 영매들을 통하여 이땅 위의 사람들과 교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챠넬링은 때로 대중에게 호응을 얻지 못한 적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옛날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져 내려 왔다. 그런데 지금으로 부터 100여년 전에 새롭게 발흥하여 급격하게 성장하다가 지금의 New Age Movement를 통하여 주로 사용되고 있다. 미국 앤드류 그릴리(Andrew Greely)와 시카고 대학교 국립 여론 조사회가 주관한 1980년대 중반 여론 조사 결과 미국인 성인 42%가 죽은 사람과
몇몇 형태로 직접 접촉하였던 것을 믿고 있다고 대답함을 볼 때 그 심각함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내세관은 인간이 죽으면 그 업보에 따라 환생한다는 윤회설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러한 내세관에는 물질, 생명, 인간 속에 있는 신의 힘을 개발하면 물질이 생물, 생물이 인간, 인간이 신으로 변형될 수 있다는 진화사상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3) 그노스틱 철학과 신비체험
환생 주기의 안팎이 어떤 것이든 간에, 그 목표나 목적이 신이나 우주와 녹아드는 것, 보다 자세히 말한다면, 재탄생의 고통스런 주기를 끝낼 정도로 신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자율성을 만물의 중심에 위치 시키는 '우주적 인본주의'9cosmic humanism)에서의 이 의견은 실제로 전체 환생의 교훈을 뒷받침하는 철학 체계의 정수다. 이 세계관은 '그노스틱 철학과 신비체험'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데, '그노스틱'(Gnostic)은 희랍어 그노시스(gnosis)에서 나왔고, 뜻은 '지식'이다. 이 앎은 학문적인 의미에서는 필수적인 지식이 아니다. 그노시스의 핵심은 우주와 신에 대한 직관적이면서도 실존적인 이해인데, 우주와 신은 하나이고 다르지 않다. 우주가 신이기 때문이다. 이 지식은 '신비체험' 즉 사람이 우주 전체 또는 신과 함께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 의식(consciousness)의 변형된 상태를 통해서 만이 도달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본래 영지주의는 인간의 중심성, 능력, 그리고 선천적인 신성을 주장하고, 초월적인 인격의 하나님 사상을 부정하고 또 어떠한 가치의 최종 상태도 낡은 것으로 치부한다.
환생의 개념이 존립하는 토대는 영지주의의 네가지 교리인데 그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범신론(pantheism), 단일론(monism)의 입장으로 만물은 하나이며 이와같은 만물의 통일은 神이 창조와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만일 우주가 신성하고 인간이 그 우주의 의식(意識) 부분이라면 인류는 본질적으로 신성하다.
셋째, 인생의 목적은 우리의 신적 본성ㅇ르 경험적으로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은 신적 절대자와의 연합에 의해서 이 실체를 완성하는 것이다.
넷째, '영적 기술공학'이나 신비체험의 숙달(요가, 명상, 마술의식 등)은 영적 능력을 완성 시킨다. 따라서 명인은 단순히 신에게 몰입해서가 아니라, 통제된 정신력을 통하여 우리의 실체를 창조함으로써 창조자가 도니다. 이 상태가 '각성' 혹은 구원이고,
따라서 죽음과 재생, 혹은 환생의 쳇바퀴를 벗어나게 된다.
4) 동양과 서양의 환생설 비교
환생은 동양에서 지배적인 삶의 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것은 형태야 어떻든 간에 거의 모두가 전통적으로 종교적 성향을 지닌 아시아 사람들을 움직이게 한다.
아시아적 견해에서는 삶을 종종 지루한 짐 즉 견뎌야 할 수준의 일로 간주한다. '다시 태어남과 고통의 바퀴'는 동양에서 자주 인용되는 구절인데, 여기에서 다시 태어남은 더없이 좋은 기회라기 보다는 훨씬 힘겨운 순간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아시아인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당연히 육체적인 생존의 절대적인 어려움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그렇지만 서구의 환생론자들이 주장하는 견해는 아주 다르다. 그들의 견해는 상이한 문화 및 철학적 전망, 즉 2천년 간의 기독교 사상의 결과를 재단 시켰다. 4세기에 이교와 신비 종교가 소멸하고 기독교가 우세해지고 난 후, 기독교의 부활에 대한 교훈은
유럽을 비롯해서 회교의 영향하에 놓인 세계에서 까지도 분명한 일치를 보게 되었는데, 회교 같은 경우는 성경의 사상을 끌어들여 부활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부활'이라는 용어는 각 종교의 전통마다 함의가 약간씩 상이하다. 개괄적인 의미에서 보면 부활은 죽음 이후에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각성되는 생명, 혹은 다신론적 입장에서 보면 여러 신들과의 각성으로 정의된다. 환생한 인간과는 대조적으로, 부활한 영
혼은 다른 몸을 걸치고 지상에 또다시 결코 돌아가지 않는다.
환생의 교훈이 18세기 계몽기 시절 서구에서 소생하고 또 신지학과 같은 19세기 신비운동에 의해서 일반인들 사이에 퍼지게 되었을 때, 이상한 철학적 혼합물이 유대-기독교 토양(土壤)에서 만개하기 시작했다. 서구 환생론자들은 동양인들의 경우처럼 인생을 슬프고, 지루하고, 고된 쳇바퀴로 보지 않고 낙관적인 선언과 함께 지상에서의 삶의 기쁨을 찬양했다. ... 서앵에서 환생론자들이 부각된 또 다른 이유는 뉴에이지 종교운동들이나 그 부산물, 가령 에르하드식 세미나 훈련(Erhard Seminars Training), 요가,선(禪)과 우리가 점성술의 황금기인 물병자리 시대에 이제 막 들어가고 있다는 신비적 반 문화 신앙과의 결합과 무관하지 않다. ... 따라서 힌두교와 불교의 전제들을 주로 기독교화된 문화 속으로 이식시키고 있는 요즈음의 환생론자들은 동양과 서양의 신앙을 혼합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5) 환생설 비판
환생은 하나님의 사랑이나 용서의 은혜를 제공하지 않고 긍휼의 본성을 소유하신 전능자 하나님에 대한 모든 개념을 포기한다.
첫째;신론 - 환생설은 우주를 지탱하고 또 끝없는 팽창과 수축의 주기 속에서 스스로를 밖으로 발산하는 비인격적인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모든 면에서 무한 하시지만, 인격적이시라고 말한다. 그분은 창조물과 분
리되어 있으면서도 자기 희생적인 사랑으로 피조물을 사랑하시는 신이다.
둘째;세계관 - 환생론에서는 세계를 덜 실재적인 상태 즉 본래부터 意識의 환상적 투영, 우주의 창조적인 세력의 후회스런 부산물로 보지만 기독교는 세계를 비록 일시적이고 타락하기는 햇지만, 현실로 간주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세심한 창조의 일부이기 때문에 분명한 목적을 지니고 있고 또 근본적으로 선하다.
셋째;인간 - 환생론에서는 사람들을 잠시 동안 불멸의 영혼으로 가득차 있다가 영원히 새로운 육신과 인격으로 나아가고 또 떠맡는 영혼으로 소멸되는 쓸모없는 빈껍데기로 간주한다. 이 영혼 혹은 영적 본질은 신의 일부로 인식된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에 인격과 도덕적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
넷째;구원의 방법 - 환생론자들은 자기 구원을 강조하고, 영혼은 온갖 다양한 환생을 통해서 카르마를 치름으로써 마침내는 재생의 바퀴를 벗어나 해탈을 성취함으로 스스로를 구원해야만 한다. 그러나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선물이고 인간의 공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다섯째;신정론 - 환생의 끝없는 순환들은 악의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한다. 악은 영원하다고 한다. 그러나 악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정복되었고 또 그가 세상을 심판하러 다시 오실 때 영원히 추방될 것이다.
나가는 말
2천년전 이스라엘에는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면서 이적과 기이한 일을 행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그 시대의 사람들을 혼돈케 했고 그 자신이 유대의 성전의 예언을 성취시킬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그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방법과는 다르게 행동했
다. 그는 종교지도자들과 동족들을 분노케 했다.
하지만 그가 제시했던 것은 새로운 삶, 하나님과의 친밀한 인격적 관계의 회복이었다. 그는 자신의 가르침을 위해 살았고 그것을 위해 죽었다.
그러나 그가 어떤 다른 인간과는 달랐던 한가지는 자신의 부활을 예언했었다는 것이다. 그가 의미했던 것은 윤회에 의한 환생이 아니었다. 그는 무덤에 들어갔던 그 육체대로 살아났던 것이었다. 그것에 대한 증거는 그의 제자에 의해 명확히 기록되어 있
다. 우리가 그를 믿어야하는 이유가 여러가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부활의 증거에 있다.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는 우리를 자기희생과 섬김의 삶을 위해 부르신다. 그의 윤리는 하나님 중심이요 타인지향적이다. 그의 가장 큰 계명은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는 여러 비유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가르쳤
고, 특히 사회의 소외당한 사람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졌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방황하는 가난하고 눌린 자들과 자리를 함께 하였다.
예수의 가르침에는 인간이 신이며 선악을 심판할 수 있는 진리를 가지고 있다
는 개념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예수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그분과 화해가 필요한 존재로 다루었다. 그것을 위하여 예수는 이 땅에 오셨던 것이다.그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선포했다.
우리의 임무는 잃어버린 신성을 기억해내어 뉴에이지가 주장하는 신격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진정한 위치를 인정하고 예수께서 성령을 통해 행하신 일에 대한 감사함으로 그분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자녀로
서의 삶을 시작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다.
신명기 18장은 여호와께서 이들을 가증히 여기시므로 이러한 것들을 너의 중에 용납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러한 `가증한 것들'에 오염되어 심판을 자초하지 않도록 깨어있어야 할것이다.
앞서 언급한 `분리'는 그들에게 물들지 않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들을 이교도들로부터 분리하여 특별한 민족으로 세우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는 자들에게서 분리되지 못하고 그들에게 동화되어 `영적간음'을 범했을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심판하심으로 그 백성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죄악된 문화로부터 분리되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죄로부터 분리되신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므로 우리도 거룩해야한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매우 강조했는데 그는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가르쳤다. 요한은 세상 자체를 기피하거나 인간의 모든 문화를 배척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의도했던 바는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멀리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거듭하여 가르쳤던 `순종'의 의미는 악은 어떤 형태든지 버리는 것이었다. 즉 그것과 분리되는 것이다. 또한 마태복음 6장24절에서는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버림받은 자, 죄인들과 함께하셨
지만 그는 어떤 종류의 문화적인 죄에도 굴복치 않으셨다.
`분리'는 反기독교적 사상에 대항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수단이다. 윤회와 환생의 세계관은 기독교의 그것과 완전히 대조된다.그러므로 양자는 결코 융화될 수 없는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참 고 문 헌
번역서
더글라스 R. 그루두이스. 「뉴에이지 운동정체」, 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 1992.
마크 C. 올브렉크. 「뉴에이지 운동과 환생」, 박영호역, 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