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공고가 배출한 강진의 청자인 윤윤섭을 만나고..
년초 계획을 잡았던 강진 청자문화제 참관을 공지하였으나, 지리적 특성과 휴가철과 중복되는 관계로 동참하는 인원이 적었고 확정된 인원도 행사가 임박하여 조정되는 등으로 아쉬움을 남겼으며, 숙박문제도 행사전 예약을 하였다가 해약하는등 전체적으로 미비한 진행에 아쉬움과 불편을 격은 동참자에 사과를 우선 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 강진청자문화행사를 주최하는 윤동문에게 체계적인 지원과 동참이 없었던 점에 동문으로서 미안한 감을 느끼면서 윤동문의 행적을 미흡하나마 전문지 "藝鄕"의 자료를 기초로 정리합니다.
고고한 자태로 빛내는 비색청자의 거장인 청우요를 운영하는 윤윤섭 동문은;
-. 서울공고 요업과 59회 졸업 -. 제 2회 기능올림픽 도예부분 입상. -. 마산 요업연구소 유약연구원 -. 이천 고영재선생으로부터 수학. -. '83년 이천 해평요설립 작품활동 시작 -. 제 9회 전승공예품전 수상. -. 88올림픽 전승공예지정작가 추대. -. 한일 조형예술교류전 초대작가 -. 한국전통미술전 초대작가 -. 현 강진 청우요(靑友窯) 대표. -. 강진 도예공예사업 협동조합 이사장
강진 초입에 걸려있는 청우요 프랭카드 ( 아래 동창회프랭카드는 서요회협찬으로 김창현동문이 걸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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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sths.or.kr%2Fpicture%2F0307all%2Fkj_004.jpg) 고려청자의 전통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는 전남 강진의 도요지. 이곳은 청자의 비색을 꿈꾸는 동공의 후예들이 결국은 돌아가야할 탯자리라고 믿는 곳이다. 뼈를 받고 살을 받아 나고 자란 육신의 고향은 아니지만 옛 도공들의 혼이 서려있는 정신의 고향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강진군 대구면 청자촌에서 청우요(靑友窯)를 열고 있는 윤윤섭(尹允燮)동문도 먼길을 돌아 연어가 모천으로 회귀하듯 그렇게 강진으로 찾아들었다.
청자축제가 시작한 지난 26일 청우요를 찾은 날, 그 는 30도가 넘는 열기속에서 유약작업을 하느라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2003년 제8회 청자문화제를 맞는 비젼과 희망을 담기위해 2003마리의 학을 새겨넣는 대작업이었다.
도예의 명문교 서울공고 요업과를 입학하다
어릴 때부터 흙을 만지기 좋아하던 윤동문은 경남 진주 출신이며 그 는 도자기를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다는 일념으로 당시 도자기계의 국내최고의 명문인 서울공업고등학교 요업과에 입학한다.
재학시 전국 제2회 기능올림픽 도예부분에 입상하면서 도자기의 매력에 빠져들게된 윤동문은 68년 산청지방의 고령토를 세계각지로 수출하기 위하여 박정희대통령의 지시로 설립한 "마산요업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하면서 고령토 뿐아니라 각 지역에서 발견된 유역토 등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때 강진 청자연구소의 산파역할을 맡았던 이용회실장을 통해 강진 청자토에도 눈을 돌리게 되었으며, 윤동문이 본격적으로 들어선 것은 73년 물레를 가르쳐 준 고영재 선생을 따라 경기도 이촌 도자기촌으로 들어가면서 부터이다.
그 후 83년 고선생의 품을 떠나 "해평요"라는 자신의 요를 갖게 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에 나서게 된다.
윤동문은 이촌 도예촌에 초창기 멤버에 속한다. 그가 처음 이촌을 찾았을 때 6개에 불과했던 개인요가 지금은 200여개를 넘어설 정도로 번창하고 있다.
그는 당시에 상황을 "이촌에서 청자를 구을 때 주변에서 참 색깔이 곱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그게 모두 강진의 흙을 가져다 썻기 때문이죠. 필요한 원료들을 강진청자사업소 이실장에게 부탁하여 한차씩 불러다 쓰곤 했습니다."
윤동문은 그 후 제9회 전승공예품전 등에서 수상하여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88올림픽 전승공예작가로 지정, 한일 조형예술교류전 초대작가, 한국 미술전 초대작가 등을 역임하면서 도예가로서의 입지를 다져왔었다
20여년이 넘게 이천에서 터를 잡고 이름도 얻게 되었지만, 그는 가슴속에 청자의 본고장인 강진으로 낙향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강진 도예촌만이 온전히 청자만을 집중적으로 빚어내는데 비해 이천은 청자는 물론 백자, 유리병 등 온갖 것들을 만들어 내며 점차 상업화 되어가는 것도 그를 강진으로 불러드린 이유였다.
20여년 이천생활을 버리고 강진으로
마침내 지난 95년 도공의 조상이 묻혀있는 도공들의 선산이며 성지라고 여겨왔던 강진으로 터전을 옮겨 "청우요"를 열었다.
"청우요의 첫작품을 만들어 내던 날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어요.. 드디어 내가 강진에서 터전을 잡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하고 이제는 정말 나만의 비취색을 찾기 위해 피눈물나는 노력을 해야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청자를 빚어내는 과정은 기다림과 고뇌의 연속이다. 윤동문은 원하는 작품이 나오지 않았을 때의 심정을 "속이 썩어 들어간다"고 표현했다. 그는 한달에 약 70여점의 작품을 만들어 내지만 남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것들은 거의 없다며 겸손해 했다.
30년 도예인생중 자신의 작품이라고 "감히" 자신있게 내놓을 수 있는 것은 고작 2점 뿐이라고 겸손히 이야기한다
흙과 유약, 불이 어우러져야 최고의 작품
예전부터 우리 조상들은 나무로 불을 지피는 화목가마를 이용해 청자를 구워왔다. 하지만 현재 윤동문이 이용하는 가마는 가스를 사용한다. 화목가마로는 수요를 따라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청자는 화목가마를 이용해 구워내는 것 아니냐고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해 보면 화목이든 가스든 둘다 불을 이루워내는 원료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적당한 온도에서 정확한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냐 하는 것이죠. 하지만 저도 옛조상의 방식 그대로 청자를 만들어 내고 싶은 마음은 늘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도예가들이 청자를 빚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흙이라고 생각한다. 윤동문도 마찬가지이며 그래서 뛰어난 흙이 묻혀있는 강진으로 터전을 옮긴 것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강진 몽리지역의 흙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윤동문은 흙은 바로 사람의 몸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일단 몸이 건강해야 치장을 해도 멋이 나듯 청자도 좋은 흙으로 빚어내야 진정 원하는 작품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거기에 초벌구이 후 시유과정에서 사용하는 유약과 최상의 불이 삼박자를 맞춰야 은은한 비취색의 청자가 탄생하는 것이란다.
도예가들이라면 대부분 생활자기 보다는 "작품"만을 만들며 활동하고 싶어한다. 윤동문도 마음 같아선 오로지 작품에만 매달리고 싶지만 생활자기도 꾸준히 생산해 낸다. 찬찬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감탄해 마지 않는 고려청자도 그 시대에는 모두 생활용품으로 사용됐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일본등 외국의 경우도 도자기시장의 80% 정도를 생활도자기가 차지하고 있다
전시관에 진열된 작품중 대표작을 사진에 담고자 하니 축제행사장의 "명품관"에 진열되어 있다고 안내를 하여 그 곳에 도착하여 높이 50cm 의 "봉황당초문매병" 두 개를 가져와 어떤 작품이 더 좋은지를 물었다. 똑 같은 문양이 조각된 매병이었지만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둘은 색상의 투명감과 선명한 문양등이 표현하기 어렵게 달랐다.
윤동문이 이 작품을 소중히 여기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 바로 문양 때문이며 병에 새긴 문양인 "봉황당초문"을 지금은 돌아가신 나전칠기의 인간문화제인 김봉용 옹으로부터 직접 전달받은 것이란다.
물론 김옹의 작품을 보고 베껴 그릴 수도 있지만 그 문양을 직접 전수 받았다는 것은 그 에게 그 만큼 큰 영광이며 동시에 부담이 된다 하였다.....
이제는 후진양성에 힘쓸 터..
윤동문은 그 뛰어났던 우리의 도자기가 외국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것을 안타갑게 생각하였다.
모방하기를 좋아하는 한국의 일부업자들이 싸구려 도자기를 만들어 저가로 내다파는 바람에 현재 한국자기에 대한 외국의 평판이 깍일대로 깍인 상태라는 것이 그의 의견이다.
도자기의 발상지인 중국인 조차도 고려청자에 대한 감탄을 아끼지 않았는데.... 윤동문은 이 를 두고 "한국의 자기가 임금님의 자리에서 신하의 자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라고 표현했다. 이제는 고려청자의 종가인 이 강진지역 도공들이 종손답게 그 지위를 되찾아와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세계시장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일본자기는 우리 청자와는 달리 물감을 이용해 색을 내기 때문에 우리가 제대로 만들면 결코 따라올 수 없다고 강조한다.
해외진출과 함께 윤동문이 가슴에 담고 있는 또 하나의 포부는 바로 후진 양성이다. 아직은 좀더 내공을 쌓아야 할 때라고 그 는 겸손히 생각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진짜 도공을 길러 내겠다는 생각이며, 서울공고 후진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똑 같은 흙으로 빚고 같은 유약을 발라 한 가마에 구워내도 똑 같은 청자가 나오지 않는 경우가 허다 하단다. 최상의 재료를 썼다고 생각하는데 막상 얻어진 작품은 정반대일 경우도 있어, 이럴 때마다 그는 "가장 좋은 흙과 유약과 물길은 하늘과 땅이 품고 있다가 세상에 내 보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푸른색 자기 술잔을 구워내 열에서 하나를 얻었네 선명하게 푸른 옥 빛나니 몇 번이나 짇은 연기속에 묻혔었나 영롤하게 맑은 물을 닮고 단단하기 바위를 맞먹네. 이제 알겠네 술잔 만든 솜씨는 하늘의 조화를 빌었나 보구려.."
백운거사 이규보는 청자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한다..
고려청자의 신비한 비취색을 재현하는 것, 자신만의 비취옥을 찾고자 하는 것은 모든 도예가 들의 꿈이요, 희망이다.
시지프스가 온갖 고통속에서도 무거운 돌덩이를 끝없이 언덕으로 밀어 올리듯 진정한 도공의 후예 이기를 갈망하는 윤윤섭 동문의 도전은 오늘도 계속된다..
다 같이 이 시대의 진정한 도공이 되어 모교와 동문에 영광이 함께 하기를 빌며 다음을 기약한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sths.or.kr%2Fpicture%2F0307all%2Fkj_014.jpg)
2003년 7월 29일, 서울공고동창회 홈페이지 운영위원장 신광섭 정리하였으며, 이번 행사에 멀리서 참여한 김창현,최문옥부부와 따님에 감사드립니다.
소재지 : 전남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323-17 전화 : 061-434-3477, 011-765-3470. |
첫댓글 옛 자료의 이미지부분이 다 삭제되어 제가 오래전에 백업해둔 hdd 에서 이미지 옮겨 등록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