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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엄포구) |
(포구의 낚시배들) |
고려 원종12∼14년(1271년∼1273)경 엄장이(구엄리)란 지명으로 설촌되었다. 口傳에 의하면 삼별초 반란 당시 토성축조 때 구엄리 사람들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이때 삼전사와 원수사에 처음으로 집이 들어섰다.
조선 명종14년 : 1559년 강려목사(지방장관)가 부임하면서 바닷물로 소금을 암반에서 제조하는 방법을 가르친 후 염전이라 불렀다.
조선 순조17년 : 1817년∼1850년 비석거리 소재 송덕비가 건립되었다. [윤목사와 장목사가 잠시 머물렀다가 그 자취를 남기고 간 비석을 말한다(구장면)]
조선 철종원년 : 1850년 엄장면(비석거리 두 목사 비에 엄장면이라 적은 것으로 보아 당시 삼엄리로 분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해년 10월 엄장면 당시 윤공제덕비와
장공선정비가 건립되었다. 이때 '장(莊)'자를 '엄(嚴)'자로 하여 三嚴莊里로
조선 고종11년 : 1874년 리에 전위된 경민장을 두었다.
조선 광무 9년 : 1905년 전위 경민장을 파하고 구장으로 개칭하였다.
조선 순종원년 : 1807년 이재수(李在守)난에 이재수가 구엄리를 지나다 구명되었다.
서기 1917년 : 세부측량으로 이경계가 확정되었다.
서기 1922년 : 동년 6월 30일 사립 일신학교가 개교되었다.
서기 1922년 : 현 일주도로가 개설되었다. (예전에는신작로라 부름)
서기 1939년 : 2월 1일 구엄공립심상소학교는 사립일신학교를 흡수하고 재단법인 기금으로 부지를 매입하여 구엄리 1069번지에 설립인가, 同年 6월 1일 6년제
4학급으로 개교하였다.
서기 1948년 : 4월3일 발생한 4.3사건 시, 11월 9일과 12월 19일에 좌익들이 학교, 교사, 가옥, 가축 등에 방화하고 살인을 하며 구엄리에 3회 습격하였고,
일신학교 교사는 전소되었다. 이후 4.3사건의 악화로 민.관이 민보단을 조직하여 마을을 경비하고자 마을주변에 석성을 축조했다.
마을경계 요소요소에 초소를 설치하고 24시간 경비를 서게되었다.
서기 1973∼1990년 사이에 세탁장 수도, 전기와 전화 농용수에 이르기까지 준공되고 가설되었다.
참고문헌
우낙기,『국민관광 제주도지』, 정문사
『제주대학국어교육학술조사보고서』 제5, 6편
『제주도역사지리일람』 제5편
『월간 관광제주』 4호 5호(4.3문제)
구엄리 해안도로의 석양 (Photo by Ponytail)
구엄리의 명칭 유래
옛날에는 삼림이 주변에 성하므로 별로 힘을 들이지 않고 거목이나 용재를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남벌로 인하여 삼림이 없어졌다고 한다. 농산물은 주로 보리, 조, 콩 등이며 해산물은 해초류, 패류, 잡어 등이다. 1960년대 초까지도 天日鹽등을 생산하였다. 마을 서북쪽 해변에 천연암반이 약 500평정도가 있어 생산되는 천일염(鹽)은 농도와 미각이 특출하여 염전(鹽田)값도 좋은 농토보다 높을 뿐만 아니라 수입도 더 나았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인근 마을에서는 下待하는 뜻으로 염장(鹽匠 소금바치)이 사람이라 불러서 연유를 모르는 사람들은 마을이름으로 오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鹽田이 이재수난[李在守亂(1907∼1910년)]때에는 이재수가 이 마을 근처를 지날 때 천주교 신도들이 염전(鹽田) 간수통 속에 숨어서 구명(求命)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의 해안암지(海岸巖地)에 천연적인 鹽田(소금밭)이 있어 소금생산이 유명했으며 염(鹽)의 저장금고가 있는 마을이라 해서 염장이(鹽藏伊)라 부르기도 했다고 하는데 연구가 더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남사록』에 의하면 도내에는 염(鹽)의 생산이 별로 없었다고 하였다. 명종(明宗) 14년(1559년)에 姜侶 牧使가 赴任하여 바다물로 소금을 제조하는 방법을 교학(敎學)하여 그 후부터 염전이(鹽田伊) 또는 염장(鹽匠)이라 했다.
문헌에는 암장이(巖莊伊) 또는 암동(巖洞)으로, 고서(古書)에는 석굴일암(石窟日巖-바위굴)과 심통일동(深通日洞-깊은 바윗골)으로 또는 암구청기(巖口淸崎-우뚝솟은 바위)와 壁立千佃(몹시 높게 우뚝선 벽)과 같이 嚴莊(바위)이라 함은 그 장엄한 기상과 奇巖怪石(바위)의 정경으로 보아 俗傳해 왔다. 그 후 유의어를 통하여 볼 때 변천은 巖莊伊 또는 엄장이(嚴藏伊)를 嚴莊伊(엄쟁이)로 변하였고, 구엄리(舊嚴里)로 개명된 것은 세부측량(細部測量)에 따른 경계선 확정 (境界線 確定)에 따라 "엄쟁이"를 三嚴里(삼엄쟁이)로 분리하여 리명을 개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옛날 자리돔을 잡았던 '자리테우'
※ 제주도 역사지리일람 제5편 참조[濟州道(島) 歷史地理一覽 第5編 參照]
고증으로 참고가 되는 것은 조선 순조(純祖) 17년(1817) 건립한 비석(碑石)거리에 있는 행정관 공덕비 또는 院동산에 있었으나, 현재는 탐라박물관(耽羅博物館)에 소장중인 공덕비 등으로 1850년대까지 엄장면으로 된 것을 알수있다.(비석거리에 있는 목사윤공 애민제덕비(牧使尹公 愛民濟德碑)와 사상장공 인선 민 선정비(使相張公 寅瑄 民 善政碑) 건립이 1817년(純祖 17) 11월과 1851년(哲宗 2) 10월에 엄장면(嚴莊面) 당시 건립됨)
마을의 구획선도 1914∼1917년도까지 세부측량 당시 마을의 경계를 확실히 하고, 그리고 195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엄장면(嚴莊面) 당시 삼엄리로 분리하게 되니 '장(莊)' 자를 생략하여 엄(嚴)자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일제치하 때 일본군들이 작전용으로 이용할 때 기재의 편의상 엄(嚴)을 암(岩)으로 사용 체신부(遞信部)까지 암(岩)자를 사용했으나 행정상으로는 엄연히 엄(嚴)자로 되었고, 해방 후에도 미군상륙 시 일군의 지도를 복사하여 사용했기 때문에 岩자로 되어 있었으나 지방주민이 구암리(舊岩里)로 쓰거나 부른 사실은 없다.
옛 구엄포구 (사진 利石 고영일)
지명유래
▷ 비석거리
마을 동남쪽 일주도로변을 말한다. 출향유지들의 고향의 발전을 위하여 후원한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공덕비가 즐비하게 세워져 이곳을 비석거리라 하였다.
▷ 논겉길(논골)
마을 남쪽에 수산봉앞 북쪽으로 내리면 森田寺趾(삼밭달절간) 하천류(내깍)에 이르며 원동산 원수(논골물)를 이용하여 논의 경작을 해오며 연변으로 폭 8m의 도로를 보고 논겉길과 논골물이라 하였다.
▷ 선창(船艙)
마을 북쪽으로 포구가 다리처럼 만들어 배가 닿게 한 것을 선창(船艙)이라고 한다. 안 선창과 바깥 선창이 있고 지금은 방파제를 밖으로 연장하였다.
▷ 감은코지
마을의 바닷가에 있는 뻗어나간 절벽을 말한다.(可文洞을 일컫는다)
▷ 구능밭
상동 동쪽 구렁에 있는 밭을 말한다.(밭에 능이 아홉 개가 있다하여 궈능밭이라 함)
▷ 당알언덕
당이 있었던 아래쪽 언덕빼기를 말한다.
▷ 도둑년 묻은 태역
태역은 잔디의 제주방언이다. 이 잔디밭 밑에 도둑질한 여자를 묻었다는데서 연유되었다.
▷ 모감
모감은 옛날 목장의 안쪽이였던데서 연유했는데, <큰모감 >과 <작은모감>이 있다.
▷ 삼밭알
三田에 있는 아래란 뜻으로 삼밭알에 원이 있어 삼전하원(삼밭알원)이라 불렀다.
▷ 셋가름
上洞의 복판에 있는 동네이름이다.
▷ 서치강굴
상동 서북쪽에 바닷물과 면해 있는 굴인데, 옛날 일본교포들의 지원으로 水源을 개발하다가 방치된 상태이다
▷ (엄장처)<철무지개)
엄장포구(嚴蔣浦口)-선창(船艙)의 다른 이름이다.
▷ 소로기동산
마을 동북쪽에 있는 높은 괴석이 있는 동산의 이름이다.(솔개 모양의 괴석있는 동산)
▷ 상코지
마을 북쪽 선창으로 뻗어나간 큰 코지이름이다.
▷ 생이동산
마을해변 서북쪽에 기암괴석이 높은 동산이름이다. 생이는 새를 뜻하는 제주어이다. 새를 닮았다고 하여 붙인 이름인지 새들이 많다고 해서 붙인 이름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 구름비물
마을 동쪽 하천류(내깍) 연변에 있는 샘물이다.
옛날 조밭풍경이다.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구엄리에선 조농사를 많이 지었다.
도대불
구엄리 선창은 엄장포라 불리는데, 이 선창 동쪽의 해안 암반 위에 도대불이 세워져 있다. 도대불이 축조되기 이전에는 나무를 세워 그 위에 잠망등을 달아 선창의 위치를 알리곤 했다.
구엄리 도대불은 1950년대에 상자형 도대불을 축조하고 상단에 철제탑을 세워 호롱불로 불을 밝혔다. 조업을 나가든 나가지 않던 매일 불을 켰다가 새벽녘에 껐다. 선창 주변은 바다를 관망하기에 아주 좋은 위치이다.
한편 강한 해풍에도 이 도대불 주변에는 파도가 닿지 않았다고 한다. 1974년 인근에 아세아 방송국이 개국되어 방송국 안테나의 불빛으로 선창의 위치를 찾을 수 있게 되자 더 이상 도대불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구엄리 도대불은 상자형으로, 기간부는 상하 2단의 구조를 하고 있다. 상단의 중앙에는 철제탑을 세웠는데 호롱불을 보호하기 위한 갓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철제탑은 1997년 멸실되었다. 상자형 2층의 형태로 현무암으로 거친 다듬을 하였고, 높이 165㎝에 철탑은 185㎝였으며, 하단은 310㎝, 상단은 197㎝였다.
제주도의 도대불은 최근 몇 년 사이에 거의 사라지고 없다. 그럼에도 구엄리 도대불은 옛 모습이 보존되고 있어 이에 대한 지속적 보존이 절실한 형태이다. 도대불에 대한 이해를 위한 안내문을 설치하고, 지속적으로 보존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참고문헌]
• 『북제주군의 문화유적』 1(북제주군, 1998)
작살을 쥔 해녀의 모습
제주올레 16코스
<코스 경로 (총 17.8km, 4~5시간)>
고내포구 - 다락쉼터 - 신엄포구 - 남두연대 - 중엄새물 - 구엄포구 - 수산봉둘레길 - 곰술 - 수산저수지둑방길 - 수산리 - 수산밭길 - 예원동복지회관 - 장수물 - 항파두리입구 - 항몽유적지 - 고성숲길 - 고성천길 - 숭조당 - 청화마을 - 향림사 - 광령초등학교 - 광령1리사무소
구엄리 포구
고내리의 작은 포구에서 출발한 길은 해안을 따라 구엄까지 이어진다. 일부 해안길은 작은 오솔길 산책로이고, 일부는 바다와 맞닿은 길, 일부는 해안 도로를 따라 간다.
넓은 소금빌레가 펼쳐진 구엄포구를 지나면 길은 내륙으로 방향을 튼다. 봉긋하게 솟은 수산봉을 향해 마을과 밭길을 지나 수산봉 둘레를 돌면, 커다란 곰솔이 지키고 선 수산의 넓은 저수지에 이른다. 저수지 둑방 위를 가볍게 걸어 마을을 통과하면, 키 큰 나무들이 줄지어 서서 옛 토성, 항파두리로 발길을 이끈다. 성을 빠져나가면 아름다운 숲길, 계곡길이 반긴다. 숲을 빠져 나온 길은 이제 마을을 보여주며 종착지 광령에 다다른다.
구엄리 해변가 밭
고내에서 구엄까지의 쪽빛 바다, 아직도 하얀 소금기가 햇빛에 빛나는 소금빌레, 낚시꾼들이 한가롭게 세월을 낚는 잔잔한 저수지, 키 큰 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우는 호젓한 숲, 삼별초가 항전을 벌였던 옛 토성, 제주의 여느 마을과 다를 바 없이 평화롭고 소박한 마을들, 돌담을 두른 밭….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이어 보여주는 길, 제주올레의 열 여섯 번째 길, 고내~광령 올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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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옜날 옜날 한 옜날에 친구 따라 강남간다고 구엄에 대여섯번 들른적있는데 두분중 한분께서 배를 태워준다고 의기양양하게 배타고 한바당에 노를저어 나갔는데 구멍난배(남의배)인줄 모르고 한바당에서 물이차올라와 구사일생으로 배에서 탈출 한기억이 새롭습니다!!!!
임당수에 자넬 데려간 사람이 누군지는 밝혀도라~!ㅎㅎ
깅이죽은 안 드셨는가?
두 사람 중에 한사람일꺼여마는...ㅋ
깅이죽은 표선에서 먹어본개 처음이지만 정말 맛이 끝내주더라!!!!
필이네 집 간 사람덜은
구엄바당에서 잡은 깅이로
'깅이죽'덜 끓여 먹었을거여~! ^^
오거사님 키토산 땜시 맛있는건가? 보말죽은 어디가면 먹을수있는가요? 요즘 카이세르님은 어디계신가?! ㅂㅏ쁘신가보다,족적을 못 봐서리....
제주시에서 어디엔가 보말죽 허는디 있덴헤라...
순철이가 알테쥬~! ^^
어디서 들어본적 이신가? 죽은 별로라..
보말은 잘못 먹으면...
탈 나기 쉬운 거라~!^^
모슬포 오일시장안에 있는
옥돔식당에
보말국과 보말칼국수가 유맹허다고 허네...ㅎㅎ
은제 함 가봅시다!
보말로는 죽이 아니라 미역과 함께 국을 끓이면 제맛인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