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7일날 안동 이육사 문학관에 들렀을 때 마침 이옥비 여사, 이육사 시인의 단 한분 혈육인 따님이 나와서 강연을 해 주셨지요. 좀처럼 대중 앞에 나서지 않으신다는 그분은 그날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믾은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그 따님이 제일 좋아하는 아버지의 시랍니다.
왼쪽 두번째 빨간 모본단 저고리 입은 분이 이옥비여사
꽃 이육사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때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北)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 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이여.
한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 성(城)에는 나비처럼 취(醉)하는 회상(回想)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저항시인 이육사의 단 하나 남은 혈육 이옥비여사를 만난 건 행운이었습니다. 의령 안동 여행을 간다고 할 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인 이육사선생의 문학관에 들리는 일정 때문에 무리를 해서라도 간다고 확답을 했었지요. 일본의 한 관저에서 요리와 꽃꽂이를 하며 사시다가 안동 이육사 문학관에서 상임이사 일을 하시면서 통역일도 겸하여 하고 계시는 모양입니다.
<문학관 담벼락 문양이 너무 예뻐서>
어머니의 팔베개를 하고 잠이 들때면 어머니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고 또 해 주셔서 나중에는 듣기가 싫었답니다. 그러니 지금은 그때 그렇게 어머니에게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이런 자리에 나와 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해드릴 수 있겠느냐고 고맙다고 하시는군요,
그분이 전하는 아버지의 기억은 모두 어머니에게 듣고 또 듣고 했던 이야기이지만 단 한가지 청량리 역에서 용수를 쓰고 밧줄로 결박을 당한 아버지의 모습은 스스로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구에 살던 때 학교에서 집으로 가려면 형무소 앞을 지나게 되는데 용수쓴 죄수들의 모습을 보기 싫어서 일부러 빙빙 둘러서 가곤 했다고 합니다.
이육사님은 잡혀가는 날도 나비 넥타이를 맬만큼 옷차림에 매우 신경을 쓰신 분이셨다고 합니다. 술이 고주망태가 되어 오신 날도 바지를 이불 밑에 깔고 주무시기도 했고 어디 멀리 나가실 때는 와이셔쓰 칼라를 하나 더 덧대는 스페어 칼라를 가지고 나가셨다합니다. 삼촌들도 6형제가 모두 다 멋쟁이들이셨답니다.
삼촌들은 이육사 시인의 부인을 어머니처럼 아끼고 사랑하셨는데 이옥비 여사는 자주 오시는 삼촌들이 싫었답니다. 아버지 생각이 나는 게 부담되었다고 했어요. 그런데 자기가 커서 서울 살이를 해 보니까 한 달에 한 번 다녀가기도 어려웠더라는 겁니다. 그런 걸 한달에 서너번씩 와서는 머물다 가시는 정성을 그제서야 알겠더랍니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나와 이옥비 여사와 사진을 한 번 찍고 이육사 시인의 시가 적힌 2013년 달력을 사고 뒤꼍으로 가니 육우당 이육사님의 6형제가 나고 자란 집을 복원해 두었더군요. 청포도 샘에서는 물이 졸졸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아직도 정녕 타오르는 꽃 성이었습니다. 그분의 영혼이 거기서 숨을 쉬고 있는 한. <소리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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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즐감합니다. 돌아보며 추억한다는 것이 행복하네요. 만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