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계수필창작교실 8기-18차시 합평자료(7월 8일 용)
문학치료(창작실기)
1. 조유순 여사/김옥수 5
1)이층 청소를 하다가 알코올 솜으로 전화기를 닦으려고 수화기를 들었다. 어머님과 시누이가 통화 중이었다. 얼마나 대화에 열중했던지 이층에서 수화기 드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던 것 같다.
2)80년대만 해도 집집마다 유선 전화기를 사용했다. 전화국에서 전화번호를 사고팔던 그 시대는 대부분 집에 전화가 1대 있었다. 밖에서 가족 중 누구를 찾는 전화가 오면 찾는 이를 불러 바꾸어 주었다. 전화기를 여러 대 설치한 집은 집안 여러 곳에서 전화를 걸고 받을 수 있었다. 1개의 전화번호를 효과적으로 활용한 셈이다. 안방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있을 때, 거실에서 전화하려고 수화기를 들면 통화내용이 들린다. 그럴 때 통화자는 가족 중 누가 또 다른 수화기를 드는 소리를 감지할 수 있어 제지하거나 3자 대화도 가능했다.
3)수화기를 소독하며 들으니 어머님은 내 흉을 보고 있었고, 시누이는 내 편을 드는 듯했으나 거의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내가 어머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며느리인 줄 알고 있었지만 혼란스러웠다. 벽이 한 겹 더 생기는 것 같았다.
4)“어머님도 내 마음에 안 들거든요!” 따지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 말 못했다.
5)다음 날,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진하게 우린 멸치 육수에 고명을 듬뿍 올린 잔치국수를 점심으로 올렸다. 식사 후 꼭 찾으시는 달달한 ‘고히(커피를 일컫는 일본어)’도 정성 한 스푼을 더했다. “오늘 따라 국수도 고히도 다 맛있네.” 하셨다.
6)돋보기를 찾아 쓰고 읽던 책을 집어 드는 어머님을 마주보며, “어무이는 왜 저를 싫어하시는데예?” 물었다. 어머님은 손에 든 책을 떨어뜨리며, “옴마야, 야아가 와 이라노? 내가 언제 니를 싫다카더노?” 시치미를 떼는 어머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7)어머님은 책을 다시 집어 들고 엉덩이로 두어 걸음 물러나 앉으시며, “이 여자 인생이 와 이리 기구하노. 꼭 내 같다.”하셨다.
8)당시 어머님과 나는 소설 ‘오싱’을 함께 읽고 있었다. ‘오싱’은 총 6권으로 된 일본작가가 쓴 소설인데, 내가 먼저 읽고 어머님께 넘겼다. 종일 독서할 수 있는 어머님은 가끔 내게 빨리 읽고 넘기라고 재촉하기도 할 정도로 그 소설에 빠져 있었다.
9)‘오싱’ 같은 인생이라고? 문득 어머님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면 거리감이 좀 줄어들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10)그날부터 거의 매일 어머님이 “이제 잘란다. 불 끄고 너그 방으로 가라.” 하실 때까지 어머님 방에서 TV도 보고 같이 지냈다. 어머님이 누우시면 일부러 어머님 이불 속으로 들어가 옆에 누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향이 짙은 로션을 온 몸에 발라드려도 없어지지 않는 노인 냄새가 싫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잔치국수는 자주 식탁에 올랐고, 방생까지 따라가 어머님은 친한 보살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매주 공중목욕탕도 같이 갔다. 어머님과 나는 그즈음 방영된 ‘이산가족 찾기’도 같이 보고 같이 울었다. 책을 읽다가 어머님이 공감할만한 대목에 줄을 쳐 어머님께 묻기만 하면, 이야기꽃이 피어났다.
11)1년쯤 지나자, 1913년생 조유순 여사에 대해서는 당신이 낳은 아들, 딸보다 막내며느리인 내가 더 많이 알게 되었다. 연민의 정과 함께 존경심이 우러났고, 응어리진 마음도 조금씩 녹았다.
12)처음 보는 사람들은 “딸이 엄마를 마이 닮았네, 늦둥인갑다.” 했다. 닮지 않았지만, 그 말이 싫지 않았고 어머님도 굳이 바로 잡지 않으셨다.
13)어머님은 조금씩 악화되어가던 심장판막증에 합병증까지 더해져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넘기셨다. 마흔 넘어 얻은 막내아들을 서둘러 결혼시킨 것도 얼마 못살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 후 어머님은 10년이나 더 사셨다.
14)어머님은 돌아가시기 2년 전부터 치매 증상까지 더해졌다. 마지막이 다가오자 당신의 생존 이유와 목적이었던 자녀들까지 다 잊었다. 가족 중 여자는 모두 아줌마, 남자는 모두 아저씨라 불렀다. 그러나 끝까지 나만 기억했다. 가족들이 번갈아 몇 번씩 물어도 어머님은 그때마다, 나를 “막내이, 우리 아아 아잉교”라고 했다.
15)어머님은 숨이 차 똑바로 눕지 못했다. 잠깐씩 모로 눕기도 했으나, 이불을 여러 채 포개어 쌓아놓고 이마를 이불에 대고 엎어지듯 앉아 있다가 그대로 주무시곤 했다.
16)그러다가 어린 시절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기도 하고, 그 시절 사람들과 혼자 이야기 했다. 어머님이 망상 속에 부르는 이름들과 이야기는 나만 알아들었다. 내가 “어무이, 누가 왔어요?” 물으면, 눈을 감은 채 대답하셨다. “그래, 숙제해야 하는데, 가스나가 자꾸 삽작에 서서 쑥 뜯으러 가자꼬 나오라 안하나.” 그 가스나는 어머님보다 두 해나 일찍 송도로 시집 간 어머님의 몇 안 되는 어릴 적 동무 ‘숙자’다.
2. 시작/박정애 3
1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아이를 격려하기 좋은 정도의 작은 재능이 있었다. 가끔은 글을 써서 칭찬을 받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간수를 먹은 순두부 같이 몽글하게 올라왔었다.
2 그 찰나의 꿈이 꺼진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5월에 교내 백일장이 열렸다. 딱히 거창한 행사가 아니라 수업 시간에 글을 쓰고 어버이날을 기점으로 시상하는 형식이었다.
3 백퍼센트 제출이 목표라며, 담임은 시험시간인 냥 분단 사이를 오가며 우리를 살폈다. 친구 몇몇이 아무렇게나 적어 내겠다는 반항 섞인 말을 했지만,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친구나 선생님에게 글로써 나를 알릴 기회가 될 것 같았다.
4 글감은 ‘어머니’였다. 한참을 생각해도 '어머니'는 글감이 될 수 없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인데다, 십 대인 나에게 모성이나 헌신 같은 '어머니'의 이미지는 와 닿지 않았다.
5 무엇보다 교과서에 나오는 어머니는 위대했지만 현실에선 달랐다. 아침에 오빠와 내가 다투었을 때만 해도, 어머니는 ‘계집애가 아침부터 시끄럽게 군다.’ 며 오빠의 편을 들었었다. 그 판결이 공정하지 않다는 생각에 울면서 등교를 했었다. 그날, 나에게 '어머니'는 아들만 챙기고 딸을 차별하는 사람이었다.
6 억지 고민 끝에, 국어 시간에 배웠던 ‘글이란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는 말을 생각해 내었다. ‘좋은 글은 솔직한 글’이라는 말도 떠올렸다. 나는 솔직하게 쓰자고 마음먹었다.
7 내 글의 제목은 ‘지우개’였다. ‘아들만 아끼는 엄마는 우리 집에만 있지 않다. 앞집에도 있고 뒷집에도 있다. 여자 아이들이 훌쩍이고 있으면 열의 아홉은 엄마에게 혼난 경우였고, 그 뒤에 혀를 날름거리는 아들들이 있다. 그런 엄마를 지우개로 지워 버리고 새로운 엄마를 바란다.’ 대략 그런 내용이었다.
8 얼마 후 조회 시간에 백일장 결과가 발표되었다. 글을 쓰는 것도 느닷없었지만 발표와 시상도 예고가 없었다. 교장 선생님이 수상자를 발표했고, 기다렸다는 듯 앞자리에 있던 한 학생이 단상에 올랐다. 우리 반 친구였다. 반 친구들이 잠깐 술렁거렸다가 잠잠해졌다.
9 준비라도 한 것처럼 배경음악이 나오고, 수상자인 친구가 자신의 글을 낭독했다.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어머니 당신은 초원이십니다. 나는 사슴이 되어 뛰어 놉니다.’로 시작하는 구절이다.
10 ‘저 친구 엄마는 우리 엄마와 얼마나 다르기에 사슴이 뛰어 놀만큼 넓다는 말인가.’ 비유법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그 설정은 나에게 박탈감을 주었다. 우리들의 엄마, 아니 최소한 내 엄마의 마음에는 초원은커녕 나에게 허락하는 작은 공간도 없어보였다.
11 그 아이의 글을 거짓이라고 단정 지었다. 그제야 받아들이기가 수월해졌다. 엄마에 대한 비교도 싫었지만, 그 아이보다 못한 내 실력을 인정하기가 더 싫었다. 상처받기 싫었던 비겁함에 얄팍한 재주까지 들통 나서 심사가 꼬여버린 것이었다. 나는 ‘글은 그럴듯한 거짓말에 불과하다. 거짓말을 잘 해야 인정받는다. 그렇다면 평생 글 따위는 쓰지 않겠다.’라고 결심을 했다. 부족했던 건 나의 자질인데 다른 탓을 한 것이었다. 어렸고 어설펐다. 그 후로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12 돌아보면, 진짜 잘못은 그때의 서툰 글이나 풋내 나던 생각이 아니었다. 제대로 시작해 보지 않고 포기한 것에 있었다. 시작 없는 성장이 있을 리 없다.
13 엄마를 이해한 것은 벌써 오래 전이다. 이제는 새로 시작하기 두려운 내 나이가 문제다. 근래에 와서야 외면했었던 글쓰기를 시작했다. 눈은 침침하고 손은 느리다. 시간을 많이 주어야 겨우 글 한 줄을 얻는다. 만족스럽지 않지만, 뭐 어떤가. 시작인 것을.
3. 아름답다는 말의 의미/이수진(2)
1) 나는 감기와 친하다. 환절기 때마다 앓고도 모자라 한여름에 누군가 옆에서 감기를 하면 따라 해 버린다. 코로나19 때문에 마스크를 쓰고 다녀서 한동안 감기를 모르고 살았는데 마스크를 벗자마자 독감에 걸려버렸다. 앓아보니 코로나 이전과 이후 강도가 달라졌다. 이전에는 감기에 걸려도 일상생활이 가능했는데 이번에는 모든 일정을 접고 누워있기만 했다. 평소 아파도 병원에 잘 가지 않지만 주사와 약을 동반하지 않고는 도저히 이겨낼 수 없었다.
2) 3주 가까이 누워 있으니 일상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부러웠다. 예전에 수술로 입원했을 때는 아예 포기하고 누워 있었지만, 아무리 심해도 감기인데 금방 일어나야지 하고 마음먹으면서 일어나지 못하니 조급증이 났다. 또 기침과 콧물 제조기가 된 나와 달리 창밖으로 웃으며 서로 어울리는 사람들을 보니 말끔하고 좋아 보이다 못해 아름다워 보였다.
3) 요즘은 어디서든 기침을 심하게 하면 주변 사람들한테 미안하고 눈치가 보인다. 나이드신 어머니한테는 접근금지가 불문율이다. 나 자체가 병균이 된 듯 가족들한테도 최대한 조심하며 격리하듯 지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에는 증상이 너무 지독했다. 건강해서 누구에게든 자신있게 나설 수 있으면 그게 바로 당당하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4) 언어의 사회성을 떠나 나 혼자 건강과 미에 대한 단어의 경계를 풀자 더더욱 확신이 생겼다. 새로 돋는 잎들이 싱그럽고 건강해서 더 아름다워 보이고 건강한 꽃들의 미소가 더 예쁘다. 겨우 회복해서 찾아간 산책로에는 눈에 닿는 모든 것이 빛났다. 그리고 그토록 반짝거린다던 이십여 년 전 어머니가 본 햇살도 알 것 같다.
5) 당시 어머니는 하혈이 있어도 병명을 찾지 못하다가 다행히 서울대 병원에서 원인을 찾아 자궁암 3기 수술을 받았다. 원인은 30년을 더 거슬러 내가 태어난 후에 출혈이 멈추지 않아 어머니는 자궁절제술을 받았다. 당시 의술이 발달하지 않아 이후 2-30년쯤 지나면 암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 현재는 절대 하지 않는 수술 방법이라고 한다.
6) 산모가 출혈이 과다해 몸 상태가 너무 약해 있어서 의사 말로는 ‘수술은 할 수 있지만 마취하면 못 깨어날 것’ 이라며 손을 놓았다고 했다. 어머니는 옆에 핏덩이 같은 나를 두고 갈 수가 없어서 팔다리를 묶어두고 마취없이 배를 가르는 고통을 견디셨다고 한다. 상상조차 잔인해서 몸서리쳐지는 일을 가는 숨으로 이어 견디셨을 어린 어머니가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애처롭다.
7) 완치판정을 받고 퇴원해 우리 집으로 모셔왔다. 바로 어머니댁으로 가시려 했지만 한 달만이라도 회복해서 보내드리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나이들어도 어머니는 언제나 자식에게 정신적 지주여서 무사히 수술을 마쳐서 회복만 하면 된다는 사실에 나는 세상을 다시 얻은 듯 기뻤다.
8) 한 달 후 어머니는 커다란 짐가방과 함께 집으로 가셨다. 집에 들어 서시던 어머니가 벽을 쓰다듬고 거실장, 소파, 식탁 등을 동선대로 만지다가 왈칵 눈물을 쏟았다. 다시는 못 올 줄 알았다며 서럽게 우셨다. 나는 그저 따라 울었다.
9) 다음날 어머니의 전화가 왔다. 늘 가던 산책로에 나가니 사람들이 반겨주고 햇살이 얼마나 예쁘게 반짝거리는지 모르겠다며 다시 태어난 것 같다고 했다. 늘 하던 모든 것들, 늘 먹는 것들, 늘 보던 것들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이게 바로 행복인걸 이제야 알았다고 했다.
10) 어머니의 강도높은 깨달음이 지금 내가 느낀 것보다 훨씬 진하고 깊겠지만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 나는 어머니의 감정을 알고 공감하기보다 단지 어머니가 이제 우리 곁에 오래 사실 수 있다는 기쁨에 매료되어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건강은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준다. 건강은 일상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만든다. 이보다 더 고귀한 아름다움은 없다. 적어도 내게 아름답다는 말의 의미에는 이제부터 건강을 추가한다!
11) 덧붙여 욕심내자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서 아름다움이라는 단어의 의미 변화를 기대한다. '성형의 나라'로 불릴 만큼 우리 사회가 외적 미에 치중하는 면이 있다. 지방대 의과가 서울대 이공계 학과를 앞지른 지 오래고 그 중에서도 성형외과가 가장 인기있는 과가 되었다. 외국인이 볼 때 한국인의 쌍꺼풀 수술한 눈은 몇 종류로 국한되며 성형한 코는 공장에서 찍어낸 모양 같다고 한다. 사람들마다의 개성이 있고 개성으로부터 나오는 매력이 있는데 그것을 버리면서까지 외모 지상주의의 기성품이 되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12) 또 자신의 콤플렉스를 보완하는 것은 좋지만 미에 너무 치중하다가 건강을 해치는 경우도 있다. 건강해서 활기찬 고유의 매력과 자신감이 오히려 그 사람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는 인식이 확산되면 좋겠다. 외면과 내면의 아름다운 요건에 건강한 기준이 뒷받침되어 각각의 개성을 아름답게 포용할 때 사회도 다양함 속의 화음이 더 잘 이루어질 것 같다.
4. 집마다 온도 차이(백복순 4)
1.집마다 부모자식간의 정을 표현하는 방법이 많이 다른 듯하다.
우리엄마는 아들을 사이비종교 교주를 모시듯 했고, 그 많은 딸들에게도 애틋하다못해 아릴만큼 애정표현이 과했다. 자식들이 가난한 시골집에 올때면 며칠전부터 싸줄 것과 먹을 것을 가려서 조목조목 준비한다고 정신이 없었고, 당일에는 버선발이 아닌 맨발로 마당에 쫓아나가 안고, 얼굴을 비비고 난리가 난다. 어떤 날은 30분을 걸어서 기차역까지 마중을 가기도 했다. 우리 엄마는 그랬다.
2.우리 시댁은 좀 달랐다. 남편이 어릴때 강원도 영월 산골마을에서 이사를 왔다. 시부모님은 예순나이에 부부가 합동으로 당뇨진단을 받았다. 결혼 전에도 남편은 “노인네들 또 입원했다”는 얘기를 조금 귀찮은 듯 했다. 어머님은 본인도 물론이거니와 남편을 위해서 당뇨예방 식이요법이나 운동을 계획하지 않았다. 흰쌀밥 세끼를 바꾸지 않았고, 병원 처방약이 고작이었다. 아버님은 입퇴원을 10여년 반복하다 돌아가시고, 어머님은 당뇨합병증으로 투석이 되는 요양병원에 계신다.
4.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시부모님과 애틋한 관계를 기대했던 나는 부모자식간의 정을 가늠할때 기준은 우리 엄마였다. 남편은 그런 나에게 결혼전 시부모님 소개하는 날을 많이 미뤘다. 시댁식구들과 첫 식사를 하는 날 나는 남편의 주저했던 마음을 이해하고도 남았다.
5.아버님은 여느 할아버지와 비슷했지만, 내 어깨보다 작은 키에 윗니, 아랫니 하나씩만 있는 어머님은 첫 만남에 늘어질때로 늘어진 몸빼와 낡은 잠바 입고 나왔다. 멀쩡한 자식들이 저렇게 많은데 어느 누가 신경을 쓴 흔적이 없는 차림이었다. 시댁 식구들은 머쓱한건지 부끄러운건지 모르는 어색함으로 식사를 이어갔고, 어머님은 후식으로 나온 수박 중 가장 큰 조각하나를 젓가락으로 쿡 찍어서 나에게 건네주었다. 당황하여 덥썩 받긴 했지만, 놀람보다는 실망감이 컸다.
6.시댁식구들은 모두 재미없는 순둥이다. 매사에 끊고 맺음이 확실한 나로서는 답답할때가 많았지만, 남편은 그때마다 강원도 사람들이 ‘속정이 많다’는 말로 둘러댔다. 위로 아주버님, 시누이 아래로는 미혼 시동생, 시누이 5형제끼리 정있게 인사 한적을 못보았다. 색깔로 치면 무채색이고, 온도로 치면 뜨뜨미지근하게 식어빠진 숭늉이다
7.아버님이 돌아가시는 슬픈 일이 닥쳐도 그랬고, 어머님이 이전 요양병원에서 병실 할머니들과 다툼으로 적응을 못해 다른 병원으로 옮길 때도 그랬고, 치매로 간호사들을 괴롭히는 지금도 그렇다. 애절하거나 간절하거나 급하지도 않다. 무덤덤하게 병원비 각출을 하는 정도로 반응할 뿐이다. 신혼에는 그런 시댁 분위기를 비꼬아 얘기해서 남편이 자주 벌컥하기도 했었다.
8.어머님은 입원하기 전에도 손주들 나이나 이름을 정확히 잘 몰랐다. 그저 귀하다는 눈빛으로 잠시 쳐다보다가 본인이 받은 용돈 봉투에서 지폐를 꺼내 손주들에게 주기 바빴다. 그것이 손주에 대한 최고의 사랑 표현이었다. 용돈을 주고 나면, 자식들 생일은 기억도 못하면서 갑자기 40년 전 옛날얘기가 매번 토시하나 틀리지 않고 시작된다. 부모님 재산을 자식 하나 없는 손윗동서가 한마지기도 안나눠주고 모조리 가로챈 얘기와 욕심 없고 무능한데 마음만 좋았다는 아버님 욕이 핵심이다. 그 레퍼토리 시작 낌새가 보이면 모두 흩어지고 나만 앉아 있다. 결혼생활 20년, 중증 치매인가 싶을 정도로 반복되는 노인네의 타령을 들어주는 여유도 생겼고, 미세바람 통하는 듯한 시댁식구들의 간격도 적응되어 가는 중이다.
10.한달에 두 번 자식들이 돌아가며 면회를 하던 중 요양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어머님이 치료와 식사거부에 투석까지 거부하시며, 치매가 심해졌다고 했다. 결정장애가 있으신 아주버님은 남편에게 의사면담을 미뤘다. 의사는 어머님의 기분전환을 위해 가끔의 외출을 권했다. 손위 시누이는 영상으로 면회를 한 후 단독 간병인이 돌보도록 1인실로 옮기자고 했다. 절절하지 않았지만,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대안이다.
11.친정식구들이었으면 과연 불쌍한 엄마를 서로 모셔간다고 난리였을까?. 어려움이 닥쳐도 애틋함을 항상 간직할 수 있을까? 가족이라면 당연히 친정집의 절절한 애정표현이 맞다고 주장해 온 나였지만, 남편이 어머님의 외출신청을 먼저 하지 않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나를 발견했다.
5. 처음으로/ 김혜순(1)
1. 직장 생활의 부푼 꿈을 안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곳은 병원이었다.
2. 나는 부산 시립병원 영양과 영양사로 근무하였다. 부산 시립병원은 현재 이름이 부산의료원으로 바뀌었고, 시설을 크게 확장하여 다른 곳으로 이전하였다. 그러나 이전하기 전까지는 부지 면적이 협소하여서 좁은 공간 안에 각 부서들이 성냥갑처럼 붙어있는 실정이었다. 요즘은 병원 식당이 지상이나 지하에 독립적으로 위치하나 80년대 그 당시는 병원 본관 뒤 끝 쪽에 있는 영안실 옆에 위치해있어서, 슬피 우는 곡소리가 자주 들려왔다.
3. 드디어 첫 출근하는 날! 설렘 속에 들뜬 마음으로 근무처인 병원 식당 영양과로 가고 있는데 내 눈앞에 하얀 천이 휙 지나갔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자세히 보니 방금 교통사고로 사망한 시체를 덮은 운구 하나가 지나간 것이었다. 운구 뒤를 따르며 울부짖는 울음소리와 함께 실신하여 땅에 쓰러지는 가족의 모습이 보였다. 후에 전해 들은 소식에 의하면 홀어머니가 갖은 고생을 하며 키운 외아들인데 알바를 나갔다가 음주운전자 트럭에 치여서 현장에서 즉사했다는 것이다. 너무나 측은한 생각이 들어서 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절로 나의 고개가 숙여졌고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채 엄숙하고도 진지한 표정으로 죽은 영혼이 천국 가기를 빌어주었다.
4. 마침 지나가던 의사 선생님이 기도하는 내 모습을 보고 “첫 마음 변치말고 일하렴” 라고 말해 주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라는 말씀으로 들렸다. 그 후, 나는 ‘생명 존중’이라는 마인드를 가지고 병원 근무하며 적응해 나갔다.
5.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나의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산부인과에서는 아기가 태어나 탄생의 기쁨을 알리지만 영안실에서는 하루에도 여러 명이 죽어 장례식을 치른다. 출생과 죽음의 반복을 매일 보면서 인생의 희비를 느꼈다. 인생이란 기쁨만도 또 슬픔만도 아닌 것임을 깨달았다. 하얀 천의 운구만 보아도 놀라던 과거 모습은 사라졌고, 오히려 환자복에 묻어있는 붉은 피나 고름 덩어리를 보아도 익숙해져서 무덤덤한 심정으로 예사로 여겼다.
6. 그러던 어느 날, 병원에 비상사태가 생겼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전염병 환자 한 명이 입원해서 원내 긴급 대책 회의가 잦아졌고, 영양과에도 어려움이 생겼다. 조리부에서 조리사가 만든 음식을 식사시간에 환자에게 가져다주는 일을 배식부에서 하는데 아무도 나서서 그 일을 하지 않겠다고 집단 거부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7. 배식 나갔다가 환자 접촉으로 전염병에 옮으면 영양사가 책임질 거냐 배식 못 나간다 말하며 볼멘소리로 완강히 거절하였다. 그때 조리원들이 모두 나를 보며, 영양사가 영양과의 책임자이니까 알아서 문제를 해결하라는 눈빛을 나에게 일제히 보내왔다. 입사 이래 처음 겪는 비상상항이 나를 덮친 것이다.
8. 나의 심장이 뛰며 울렁거리는 고통을 잠시 느꼈으나, 진정하고 담담한 심정으로 조리원들 앞에 섰다. 그리고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감염의 원인이나 치료법도 알 수 없는 희귀 전염병의 첫 환자라서 불안감이 있겠지요. 그러나 입원한 환자에게 밥을 제공해 줘야 하지 않겠어요? 암초에 부딪혀 바다에 침몰하는 타이타닉호 갑판 위에서 마지막까지 악기 연주를 하였던 연주자들처럼 우리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배식을 멈추면 안 됩니다” 나의 말을 듣고 숙연해지는 조리원들의 표정을 보면서 나는 명량대첩을 진두지휘하는 이순신 장군처럼 오른팔을 위로 치켜세우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혼자 가서 그 환자에게 음식 제공해 주고 오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보인 후에 격리 환자 독방으로 향해 갔다.
9. 조리원들 앞에서는 당당하게 말했지만, 나도 희귀 전염병 환자 대면이 처음인지라 마루타가 되어 긴장되었다. 한편으로는 마약 병동 안에 위치한 격리 독방의 구조가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던 터라 궁금하고 설레기도 하였다.
10. 가보니까 굳게 닫힌 철문의 하단부에 구멍 난 쇠 창문 하나가 있었다. 그 창문 사이로 음식을 밀어 넣어주면 되었다. 환자는 음식을 받자마자 부리나케 쩝쩝 소리 내며 먹는 게 아닌가? 맛있게 먹는 소리를 확인하고 나오면서 나는 왠지 기분이 뿌듯해졌다. 그래! 먹어야 살지 사람이 사는 곳은 다 똑같구나! 이런 생각이 들면서 병약한 환자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영양을 관리하는 영양사로서의 자부심을 느꼈다. 그때 얻은 깨달음은 처음이 나에게 안겨 준 새로운 선물이었다.
낯설어 두려움을 주기도 하지만 ‘처음’ 이란 말에는 언제나 설레고, 새로움을 주는 묘한 매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