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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길
박 흥 섭
내가 한 시대를 살아오면서 수많은 사람들과의 많은 인연을 맺으며 고마운 사연과 소중한 추억을 기록해보고 싶었던 것이 평소에 소망 이었다. 그러나 막상 생애 평범한 보통 사람의 심정으로 비록 무딘 글을 적어 가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지난 일을 기억하기도 어렵고 기억나는 것도 내놓을 만한 일인가 주저하고 망설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마음속을 풀어내놓으면 후련하고 머리가 가뿐할 줄 알았는데 끄집어내 적어보니 부끄럽고 머리가 더 어지러워지지만 감히 용기를 내어 적어 본다.
내가 태어난 시대는 역사적으로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 시골 농촌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어린 유년기는 부모님 슬하에선 어려움 없이 잘 살아가는 듯 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아버님을 일찍 잃고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래도 주변사람들의 도움으로 힘든 삶을 잘 버티어 왔다.
20대 중반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이보다 더 험한 세월을 겪을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들 때가 많았다. 하지만 부끄러움도 모르고, 체면 불구하고 오직 삶에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고군분투 노력하며 험난한 고개를 넘었다.
“가난(家難) 과 고난(苦難)을 하늘이 내게 내린 복(福) 이었나 생각 하고.”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 사서 한다는 말이 있다. 내 가 젊어서 호의호식 했다면 오늘에 내가 없어 을 것이라 생각한다. 고생한 보람으로 젊은 패기하나로 천방지축 불철주야 가리지 않고 동서남북으로 다닐 수 있었다. 이렇게 지금까지 살아 온 지난날을 회상하는 것은 온고지신(溫故知新)에 담겨있는 의미처럼 과거를 뒤돌아봄으로써 미래를 새롭게 한다는 의미에서 출발하게 되었다.
고희가 지난 나이에 늦게나마 어설프게 생각나는 대로 마음속에 간직한 사연을 털어놓고 보니 더욱 마음이 조이고 쑥스러움만 앞선다.
1. 어 린 시 절
어린 시절 내가 자란 곳은 봄이면 꽃피고 새가 울던 공기 맑아 조용한 충북 청원군 북이면 석성리(돌패이)다 여름이면 보강천 개울에서 물장구치며 송사리 잡고 뒷동산에서 삘기 뽑고 뻐꾹새 꾀꼬리 노래하면 앞들에서 송아지 음매하는 시골 농촌 마을이다.
울도 담도 없이 아카시아 나무로 둘러싸여 있는 초가집, 먼동이 트면 아카시아 향기 가득하고 참새 떼가 숨바꼭질을 하며 아침을 깨운다. 한나절이나 되어야 햇살이 들고 나뭇잎에 맺힌 이슬이 은구슬처럼 영롱하게 빛나 향수에 젖게 한다. 서북쪽으로는 넓은 들판에 농장이 펼쳐져 있어 바라만 봐도 마음이 풍요로운 산골짝이도 아니고 광야도 아닌 동산을 낀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아버지의 고향은 괴산군 증평읍 율리 두메산골이다.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은 외할아버지 내외분이 외롭게 살으시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고희가 넘으신 외할아버지 홀로 계시니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다 친 족하 손자 이지만 하루 이틀 아니고 봉양할 사람이 없다. 막내딸인 어머니 가 할아버지 살아생전 모시겠다고 내 나이 두 살 때 이곳으로 이사를 하였다고 한다.
명절 때는 아버지 따라 고향에 가면 친척 아저씨 형들이 반가워해주고 칭찬해주어 고향에 자주 가고 싶었다. 고향 에는 과일나무도 많이 있어 철 따라 고향에 가면 큰 아버지는 과일을 도 따 주시고 동갑나기 동무들도 많아 큰집에 가면 집에 오기가 싫었다. 추석 명절 때 가면 큰 아버지는 이 감나무는 네 아버지가 심은 너의 나무 다 하시며 홍시 감을 따 주시고 집으로 올 때 아버지는 감을 한 짐 가지고 오시어 마을에 나누어 먹었다. 내가 살고 있는 마을에는 과일 나무가 별로 없었다. 아버지는 세상 살아가는 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고 결국 이곳에 뿌리를 박고 살게 되었다.
한참 뛰어놀기 좋아하던 내 나이 6살 에 아버지는 한문을 배우라고 집에 한문선생님을 모셔다 한문을 가르치셨다. 하늘 천, 땅 지, 검을현, 누를 황, 선생님이 천자문을 가르치시지만 밖에서 아이들 소리만 들리지 글을 읽는 것은 건성이다. 그래도 입에 발린 천자문 한 권을 다 외웠다. 아버지는 천재아들을 둔 냥 좋아하시며 떡을 한시루 해서 동네잔치를 하시었다. 철없는 나는 그것이 싫었다.
아이들이 모두 학교에 가고 혼자 있으니 아이들과 뛰어놀고 싶었다. 하루는 아버지 몰래 학교 가는 아이들 따라서 학교에 가서 선생님에게 입학 시켜 달라고 했다. 선생님이 이다음에 어머니나 아버지와 같이 와야 한다며 다음에 오라고해서 혼자 집으로 온 적이 있다. 입학하는 날 어머니와 함께 학교에 입학했는데 체구가 또래 아이들 중에 가장 작았고 항상 같은 반 아이들에게 힘에 밀려 많이 힘이 들었다.
초등학교까지 거리는 약 2km 정도 아침에 학교 갈 때는 동네 아이들이랑 함께 가기 때문에 재미있었다. 집에 올 때 는 같은 반 아이들이 없어 늘 혼자 와야 하기 때문에 멀게 만 느껴지고 하교 길이 힘들었다. 학교에서 집으로 오려면 동골, 한샘 말, 신촌 등 여러 마을을 거쳐야 했다. 그때는 마을마다 학교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이 있어서 때로는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해코지를 하기도 한다.
혼자 오는 날은 아이들을 피해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많은 어려움이 겪기도 했고. 아이들과 마주치면 싸우기도 많이 했는데 힘에 밀려 맞고 오는 때가 많았다. 일찍 학교 간 것이 후회스러웠지만 그만 둘 수는 없었다.
아버지 혼자 농사일하시기 엔 벅차서 봄가을 농사철에는 한 달씩 머슴을 두고 봄이면 근동네 사람들이 품에 쌀 을 달라고 줄을 섰다. 그 당시 보리 고개를 넘든 시대. 봄에 쌀 한말 얻어다 먹으면 농사철에 삼일씩 일을 해주었다.
집에 오면 아버지 혼자 농사일 하시는 게 힘들어 보이고 바쁘시기 때문에 숙제를 대충하고 소 풀을 뜯기러 들로 또는 개울가에 나가 소 풀을 뜯긴다. 집에 오면 아버지는 항상 소에게 보릿겨를 물에 타서 소에게 먹이는데 잘 먹지 않는 날은 물만 잔뜩 먹여 왔다고 가끔 야단을 맞기도 했다.
당시 보리 고개를 넘든 시대. 봄에 쌀 한말 얻어다 먹으면 농사철에 삼일씩 일을 해주었다.
집에 오면 아버지 혼자 농사일 하시는 게 힘들어 보이고 바쁘시기 때문에 숙제를 대충하고 소 풀을 뜯기러 들로 또는 개울가에 나가 소 풀을 뜯긴다. 집에 오면 아버지는 항상 소에게 보릿겨를 물에 타서 소에게 먹이는데 잘 먹지 않는 날은 물만 잔뜩 먹여 왔다고 가끔 야단을 맞기도 했다.
2. 초가집을 잃다
초등학교 6학년 가을 황금물결이 넘실대고 수확의 기쁨에 먹지 않아도 배부를 시기에 우리 집에는 뜻 하지 않은 재앙이 들었다. 초가삼간 집이 불이 나서 뼈대만 남기고 타버린 것이다.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쁜 가을 추수철이라 어린 동생이 당시 3살, 7살짜리가 어머니를 도와준다고 아궁이 불을 집히려고 아궁이에 있는 불탄 재를 끄집어내어 불을 집히려니 불이 붙지 않아 불씨가 없는 줄로 알고 우물가에 가신 어머니에게 성냥을 가지러 간 사이에 묵은 재에서 불씨가 살아나 나뭇간으로 옮겨 붙어 순식간에 초가 삼 칸 집이 다 타버린 것이다.
들판에서 벼를 베든 사람들 수십 명이 다 모여 불을 껐지만 속수무책 이었단다. 나는 그날 학교에서도 벼 베기 작업을 하고 어둠이 깔린 즈음에 집에 오니 집은 형체도 없이 타버리고 마을 사람들과 아버지는 잔불정리에 바쁘고 아버지는 온몸에 화상을 입어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바쁜 농사철이라 집을 새로 지을 수도 없고, 늦은 가을이라 찬 서리가 나려 추위를 당장 피할 수 없었다.
다음날 동네 사람들이 추수하는 작업을 멈추고 뒷산에서 나무를 베어다 벽만 남은 집에 이리저리 얼기설기 지붕만 덮었다. 검게 그을린 벽은 황토 흙물로 매질을 하여 보기 흉하지 않게 하고 찬바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막아주었다. 비만 새지 않게 응급조치를 움막을 꾸미고 추운 겨울을 지내니 6.25 난리가나서 1.4 후퇴당시 피난민이 뒷산에 움막을 짓고 겨울을 보내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황소도 한 마리 있었는데 소 외양간도 다 타버려 날씨는 점점 추어지고 소 막을 지을 겨를도 없어서 다음날 황소는 큰집으로 이사를 갔다. 소가 이사 가는데 나를 보고 몰아다 주고 오란다. 12살 어린나이에 소를 몰고 30리 길을 나섰다. 아버지하고 함께 큰집에 다녀 보긴 했으나 먼 길을 소를 몰고 혼자 간다는 것이 겁이 났다.
큰집을 가려면 증평 읍내를 지나가는 길이 있고, 오솔길로 논두렁 밭두렁을 지나 산 고개를 넘어가는 길이 있었다. 어린마음에 증평읍내로 지나가면 달리는 차 소리에 소가 놀래서 뛰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 오솔길로 소를 몰고 갔다. 어디쯤 갔을까 어느 들판을 지나는데 논에서 벼 베는 사람들이보고 남에 소를 몰고 간다고 소고삐를 낙아 채고 실랑이를 하여 한참 고역을 치루기도 했다.
초정 고개에 올라서니 큰집 마을이 저만큼 보인다. 기진맥진 힘이 빠져 갈수가 없어 잠시 쉬어갈려고 소고삐를 길게 나무에 매어놓으니 소도 배고 고픈지라 풀을 잘 뜯어 먹고 있다. 잠시 누어있는 다는 것이 깜박 잠이 들었다. 소가 음매 울음소리에 깜짝 놀라 깨어보니 해는 서산에 걸쳐 있어 어둠이 깔리고 있다.
덜컥 겁이 났다. 초정고개는 옛날부터 무인지경 험난한 고개라 도적떼들이 고개에 진을 치고 있다 오고 가는 행인들에 물건을 뺏는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황급히 재촉하여 고개를 나려오니 인적이 보여 마음이 놓였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친척 아저씨를 만났다. 깜짝 놀리며 어째 네가 소를 몰고 오느냐고 묻는다. 자초지종을 말 하니 아저씨는 깜짝 놀라며 아버지는 다친 곳은 없냐고 안부를 물으며 내일 집에 갈 때 함께 가자고 하신다. 아저씨는 아버지와 동갑나기 친구로 한 마을에서 같이 자란 죽마고우(竹馬故友)이시란다.
아저씨와 같이 큰집으로 가니 큰아버지가 보시고 깜짝 놀라신다. 아저씨가 내가 한말을 대신 해주니 큰 아버지께서 깜짝 놀라시며 소고삐를 받아 외양간에 매니 큰집에는 갑자기 소가 두 마리가 되었다.
‘지금생각 하면 시장에 내다 팔면 되는 것을 왜 큰집에 맡겼는지 궁금하다’
다음날 큰아버지와 아버지 친구 분과 함께 증평 읍내를 거쳐 집으로 왔다. 아버지 친구는 증평 읍내에서 이것저것 물건을 한보따리 사시고 한약방에 들려 놀란데 먹을 한약도 사 오신 것으로 생각된다.
집에 오신 큰 아버지와 아버지 친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 부둥켜안고 한동안 울음을 참지 못하고 침묵이 흘러다. 큰 아버지는 아버지 의 몸 상태를 이곳저곳 살피시고, ‘그래’얼마나 놀랬느냐! 위로하시고 이만 한 것이 다행이라며 며칠 동안 집안 정리를 해주시고 가셨다.
3. 새집으로 이사
엄동설한 추위를 움막 같은 집에서 보내고 봄이 오자 아버지는 집 지을 준비에 분주하시었다. 우선 모아둔 돈이 많은 것도 아니 라 땅을 팔고 살림 밑천 이라는 황소도 팔았다. 이웃집에 먹여 달라고 맡겨놓은 소까지 팔아 집 지을 준비를 하셨다.
불나기 전부터 초가집이 남루해서 새집으로 지으려고 생각을 하시고 고향으로 갈까 망설이고 계셨었다. 어차피 불이 나서 새집을 지어야 하는데 집터가 너무 좁다고 이곳저곳 찾아보았지만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하고 다시 그 자리에 집을 짓기로 하고 집 지을 준비를 하시었다.
“일생에 한번 짖는 집.” 잘 지어 보신다고 벌목장에서 나무를 사시고 증평 제재소에서 다듬었다. “1955년대” 그 당시는 짐을 운반하는 트럭이 많이 없었다. 차를 구 하던 중 당시 군부대 37단 군인차를 임대하여 운수업을 하는 차 가있었다. 밤에 군인 트럭으로 목재를 싫고 오다가 지금에 대율리 앞 도랑을 건너오다 차가 빠져 그곳에 목재를 떼어놓았다. 다음날 다시 운반 해준다고 약속은 하고 차일피일 미루니 아버지는 집 지을 날자는 닦아오고 애가 탄다.
할 수 없이 대율리 우마차로 찬샘 마을까지 싫어오고 찬샘 마을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저녁마다 지게로 저 날라 목재를 운반하였다. 집을 짓기도 전에 목재운반에 큰 고생을 하시었다. 그래도 아버지가 평소에 덕을 많이 쌓으셔서 근동에 어른들이 저녁마다 목재를 무료로 운반을 해주어서 고마웠다.
흙벽돌집을 지으면 돈도 덜 들고 쉽게 지을 수 있었는데 목조 집을 짓는 는다고 고생을 많이 하신 것 같다. 대목장인 목수 두 분이 두 달 넘게 집을 짓고 집을 세우고 나면 수수깡으로 벽을 엮는데 근동 사람들이 울력으로 어 준 것으로 생각 된다. 황토를 바르는 토역 장인이 한 달을 넘게 바른 것으로 생각된다.
목 조 집으로 (ㄱ) 기역자로 꺾어서 대창 마루도 넓게, 마을 사람들에 쉼터로 쓸 수 있게 하고 마을에서는 제일 좋은 집으로 지은 것 같다.
새로 집 짓고 집들이 하는 날은 돼지 한 마리 잡고 떡하고 풍물패 불러 고사를 지냈다. 삼개 부락 주민을 초청하여 잔치를 하시고 그동안 도와주신 분들에게 고무신도 한 켤레씩 선물로 주셨다. 새집 짓고 다음 해 막내 동생 동생이 태어났다.
불은 났지만 새집을 짓고 아들도 낳고 복 받았다고 근동에서 사람들이 아버지가 천성(天性)이 선(善) 하시어 초가집을 새집으로 바꾸어 주고, 아들도 점지해 주셨다고 축하해 주시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 싱글 벙글 웃음꽃을 달고 사 섰었다. 그러나 그 행복이 오래 가지 못했다.
막냇동생 3살, 내 나이 16살 되든 해 봄 아버지는 원인 모를 병환으로 병원도 다니시고 한의원도 다니시며 침도 맞고 다니시지만 차도는 없고 점점 몸이 쇠약해 지 시었다. 한 2개월 고생 하시고 향년 47세 한참 혈기 왕성 하고 자식들과 삶 에 뜻을 이룰 시기에 내 겼을 떠나셨다.
4. 아버지의 임종
부모들은 누구나 자식을 금지옥엽으로 키우지만 우리 아버님은 더욱 애틋한 사랑으로 나를 키워 주시었다. 나는 열두 살 초등학교 6학년 까지 외아들에 여동생 2명 삼남매가 오붓하게 자랐다. 아들을 선호하든 그 시절에 의학이 발달하지 않아 어린나이에 홍역, 마마 등 전염병으로 많은 아이 들를 잘 키우기 힘들었든 시절 이란다. 마을에 동갑 나기 아이들이 많이 있었는데 홍역, 마마 등 전염병으로 일찍 동갑나기아이들을 잃었단다. 늦게 남동생이 태어났으니 남동생과는 12살, 띠 동갑 차이가 난다. 그렇게 철모르고 곱게 자라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일 학년을 마치고 가정 형편상 학업을 중단하고 대신 한문 서당 공부를 하였다. 그러나 한문 공부도 2년을 배우다 그것마저 중단 하게 되었다. 내 나이 열여섯 살 되 던 해 봄에 갑자기 아버님이 병환으로 누어 게시었다. 농번기가 닥쳐오는 봄철이라 병환 중에도 농사일이 걱정이 되시어 하루는 아버지가 조용히 나를 부르신다. 아무래도 내가 몸이 아파서 당분간 농사일을 못 하겠으니 병이 나을 동안만 동네 모내기 하는데 따라 다니며 심부름이라도 해주면 동네 사람들이 모는 심어줄 것이다. 나는 그때 까지는 농촌에 살았지만 밭에 풀 한포기 뽑아보지 않고 자랐다. 모내기철에 모를 심을 줄도 모르니 따라다니며 심부름만 해주는 것도 보통 힘 드는 일이 아니었다. 난생처음 해보는 농사일 아버지가 완쾌 할 때 까지만 잠시 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날이 갈수록 아버님 병환은 점점 심해지시고 나는 너무 힘이 들었다. 아버지 가 병환 중이라 멀리 사시는 큰 아버지 가 오셔서 아버지 병간호를 하시며 농사일을 도와주시었다. 어머니는 3살 박이 남동생이 있으니 동생들 보살피며 집안 살림하시기도 힘이 붙치 시었다.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아랫 방 에서 주무시고 나와 어머니 3살 박이 남동생 여동생들은 윗방에서 잠을 잤다. 하루는 일을 마치고 들어오니 아버지가 평소와 다름없이 고생 많이 했다며 조금만 고생하면 아버지가 일어나면 너는 하던 공부나 해야 한다. 하시며 나를 걱정해주신다. 너무 힘들어 잠시 아버님 과 이야기를 나누고 윗방에서 잠에 골아 떨어져 자는데 갑자기 큰 아버님이 동생동생 큰소리로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깨어보니 큰아버님이 아버님을 부둥켜안고 울고 계시었다. 아버님은 향년 47세에 운명하시었다. 어린 자식들을 두고 젊은 연세에 떠나시는 아버님은 눈도 감으시지 않은 채 운명을 하시었다. 바뿐 농사철 이 다보니 이웃에 아저씨, 형님들은 장례절차를 의논 한다. 집이 너무 가난하고 철부지 아이들만 있으니 3일장을 하기가 번거롭다며 당일 장례를 모셔야 한다고 한다. 마지막 가시는 길 3일 아니면 5일 장으로 모시는데 당일 아니면 5일 장을 해야 한단다. 그러나 그 당시 사정으로는 별도리가 없어 던 것 같다. 마지막 떠나는 아버님에게 수의도 삼베가 아닌 문창호지 로 기워 입히신 것으로 생각이 된다. 당일 장례를 모시고 너무 허전해서 아버님 혼백을 대청마루에 모셔놓고 1년을 삭망 차례로 모셨다. 아버님 잃은 슬픔은 태산이 무너지는 아픔 이었다. 가시는 아버지 가 되살아날리 없고 마지막 가는 상여를 어린동생들과 뒤따르는 아픔의 통곡은 주의 사람들도 울음을 참지 못하고 함께 울어 주었고 하늘도 하루 종일 비가 내리어 가시는 아버지에 애통함을 더 슬프게 해 주었다. 아버님 생전에 돌아가셔서라도 고향으로 가시고 싶어 하시었는데 형편이 여의치 않아 집 넘어 밭에 모시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소년 가장이 되면서부터 사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나는 서서히 고난에 길로 들기 시작 한다. 홀로 되신 어머니에 아픔 마음은 아들에 마음 몇 배 더 슬프고 애닳프 시었겠지만 아픔을 참아가며 자식들 배 골리지 않으시려고 불철주야 걱정이 태산 같으시었을 것이다.
농사가 끝났다고 농한기를 그냥 쉬는 게 아니다. 겨울에는 먼 산에 가서 땔감을 해 와야 가족들이 조석 밥을 지을 수 있고 난방을 해야 추위를 면할 수 있었다. 겨울철에 나무를 하러가려면 어름이 둥둥 떠나려오는 보강천 개울을 건너 10리 나 되는 먼 산, 진천군 초평면 에 가서 나무를 해야 한다. 어느 날은 우리는 청원군 이고 나무를 하는 곳은 진천군이라서 행정구역이 달라 진천군 산림계에서 나와 나무를 빼앗기도 한다. 나무를 해온대야 장정들에 3분의 1정도, 까치 집 만큼도 안 되는 것 빼앗기고 오는 날은 고생만하고 빈 지게를 지고 오 는 날은 울화가 끌어 오르지만 참아야 한다. 다음날 다시 먼동이 트면 그 산으로 가야 하니 어머니는 어린 것이 고생 한다고 애가 타신다.
농사지을 땅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가족 생계는 이어갈 정도는 되었는데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라 세상 물정도 모르는 철부지 자식에게 물려준 것은 농사짓던 농토 몇 마지기에 가난뿐이고 어머니에 힘겨운 삶에 어린 동생들 뿐이라 어머니 역시 3살 박이 아들 돌보랴 농사일 하랴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시고 그래도 장남이라고 나에게 매사를 의지를 하려 하신다. 우선 몸에 배인 농사꾼이 아니라 농사를 하려니 힘만 들고 겨우 입에 풀칠하는 게 고작 이다. 가난에 찌 들으니 남보다 열심이 살아도 남들만큼 소출이 오르지 않으니 더 힘들었다. 어찌하면 이 가난을 벗어날 수 있을까! 체력 도 허약해서 농사일은 내 체질에 맞지 않는 듯하다. 여러모로 궁리를 해보았으나 뾰족한 방법은 없었다. 우선 농사일을 할 사람이 없으니 한발도 밖으로 나갈 형편도 못되었다. 당시 농사일을 접고 기술을 배우면 농사 짖는 것 보다는 힘도 덜 들고 수입도 좋았다. 그러나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는 도시에 가서 기술 학원이라도 다녀야 하는데 당장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해결되지 않아 움직일 수 없어 애만 태웠다. 언제가 기필코 꿈을 이루어야겠다는 꿈만 꾸며 세월만 흘러갔다.
5. 군에 입대
내가 살던 고향에 보강천이 흐르는 주변에 넓은 들판이 있다. 제방이 약해 장마철에 비가 많이 오면 물이 넘쳐 들판이 침수가 되고 농작물이 모두 물에 잠기어 떠내려가고 농사를 망치는 수난을 매년 겪게 되어, 정부에서 제방을 새로 쌓아 높이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제방을 쌓는데 그 당시는 나무로 가로 세로 1m 크기로 네모진 큰 통을 만들어 인부들이 흙을 지게로 져다 붙고, 여인네들은 함지박, 바구니로 여다 부어 한 통 가득 차면 얼마씩 품삯을 주고 제방 둑을 높이는 작업을 어렵게 하여 품삯을 받아 생계를 유지했다. 힘은 들고 능률은 오르지 않았지만 보릿고개를 넘던 시절 그렇게 하루하루 품을 팔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한쪽 옆에서는 불도저가 한 삽씩 밀어다 쌓으면 사람들 수십 명 져다 부은 흙보다 더 많은 양의 흙을 밀어다 쌓는다. 참 신기하고 장비기사는 힘도 들이지 않고 장비를 여유 있게 조정하니 많은 사람들에 부러움을 사고 있다. 어린 나이에 나도 장비일 하는 것이 신기해서 몇 날을 구경 하였다.
기사 아저씨에게 태워달라고 조르니 처음에는 사고 난다고 태워주지 않았다. 여러 날 보고 우리 마을에서 숙식을 하니 얼굴이 익숙해져 도자를 태워주어 재미있고 아저씨가 장비를 조정하는 것이 신기했다. 나도 이다음에 어른이 되면 이런 장비를 배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시골에서 농사일만 하는 것을 보고 자랐으니 힘든 일 하시는 아버지가 항상 불쌍하고 저녁이면 아버지 다리를 주물러드리면 아~~ 시원하다 하시며 너는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고 아버지처럼 농사꾼은 되지 말라고 하시었다.
우리아버지뿐 아니라 모든 아버지들에 바램 일 것이다. 공부를 해서 아버지 꿈을 이루어주면 좋겠지만 아버지 뜻을 받들지 못하면 불도저 운전이라도 해야지 하는 꿈이 잠재하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물려주신 농장을 천직으로 알고 농업에 종사 했는데,군인 가면 집안 대소사를 누가 보살피나 걱정이 태산 같지만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군대에 가서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선배들의 조언을 듣고 입대하기 전에 어릴 때 꿈꾸어왔던 불도저 운전이라도 배우고 싶은 마음에 신상명세서 란에 학력은 증평공고 졸업, 직업은 불도저 운전을 적어 넣었다. 병무청에서 신체검사 결과 병과 가 공병 을 받아가지고 군에 입대를 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건강한 남성이면 피할 수 없는 것이 국방의 의무를 지키기 위해 가정을 떠나 군대 가서 일정 기간 복무를 해야 하는 것이다. 나에게도 피할 수 없는 입영 영장이1963년 12월 29일 나왔다.
당시 우리 집은 내가 가장으로 농사를 지었는데 군인을 가고나면 40대 초반의 어머니. 16살 여동생 12살 여동생 7살 남동생 4가족이 살고 있었다. 내가 군인 가면 집안 농사는 누가 지을 것인가 걱정이 태산 같지만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어린 동생 들은 학교에 다닐 것이고 큰 여동생이 처녀농군으로 3년 동안 고생 할 것을 생각하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입영 전날 1964년 2월 7일 송별회 한다고 친구들이 와서 밤새도록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어머님에게는 훈련소까지만 갔다 오겠다고 안심 시켜 드렸다.”
다음 날 함박눈이 펄펄 휘날리는데 7km 되는 보강 천 둑길을 친구들과 함께 걸어 증평에서 기차를 타고 충주 교현 초등학교까지 갔다. 가벼운 마음으로 입대를 하였는데 마음 한 옆으로는 집안 살림의 걱정스러움이 자리 잡고 있어 마음에 무거운 짐을 안고 입영을 하게 되었다.
함께 간 고향친구들이 훈련소 가는 군용열차로 청주까지 함께하며 사기를 충전시켜 주어 한층 활기찬 기운을 안고 입영을 할 수 있었다.
친구들과 청주에서 작별하면서 부터는 친한 친구 한사람 없이 외톨이가 되었다.
입대하는 병사들이 저 마다 고향친구, 학교친구 등 친구들과 삼삼오오 어울러져 헤어지지 않으려고 우왕좌왕하는데 나는 함께할 친구가 없다 보니 외롭지만 홀가분한 마음으로 활동 할 수 있었다.
훈련소 입소하기 전에 수용연대에서 신체검사를 하기위하여 대기 하는데 여기서 군부대로 입대를 하느냐, 집으로 가느냐. 선택을 해야 한다. 어느 날 외사촌 형님 친구가 수용연대 신검 대 근무 한다며 찾아 왔다. 외사촌 형님이 친구에게 부탁을 한 것이다.
가정형편을 전하고 신검 대에서 귀가 할 수 있도록 도와주라고 하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결정을 하란다. 망설여진다.
집으로 돌아가느냐? 군인 임무를 마치느냐? 진 퇴 양난에 처했다.
여기서 불합격 판정을 받고 영원히 면제가 된다면 집으로 가겠지만 1년 후에 다시 재 소집되면 늦게 입대하여 고생 하는 것보다 입대 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 될 것 같아 입대를 결심하고 빠르게 찾아다니며 신체검사를 하고 군번을 받았는데 그 때부터 내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이다.
집안 형편을 생각하면 불합격으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어차피 가야 할 길이기에 집에 가족들에게는 미안 하지만 군에 입대를 결심했다.
1964년 2월 13일 논산 훈련소 29연대 6중대 6소대 입소를 했다. 그날이 음력 설날 이라 훈련소 에서 구정 명절이라고 사과 하나 씩을 주어서먹고 하루를 쉬었다. 다음날부터 고된 군사 훈련이 시작 되었다. 전투에서 살아남기 위한 훈련, 오늘에 땀 한 방울이 내일에 피 한 방울 이란 슬로건을 걸고 고된 교육을 6 주 동안 무사히 마치고 후반기 교육 받기위해 배출 대 에서 대기 중 이다.
6. 육군공병학교
논산 훈련소에서 기본 군사 훈련 6주를 마치고 후반기 2차 특과병 교육을 받기위해 야간열차 에 몸을 싣고 어디론가 달려간다. 그 당시 군대 이동은 야간 군용열차로 이동했고, 행선지는 비밀이었다. 전방으로 가는지 후방으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고 무조건 열차에 몸을 싣고 밤새도록 달려간다.
새벽녘에 먼동이 트기 시작하여 차창 밖을 내다보니, 대구역을 지나고 있었다. 대구역에서 잠시 멈추고 병력일부를 하차시키고 다시열차는 남으로 달린다. 이른 봄이라 복사꽃 살구꽃이 손짓하는 벌판을 바라보니 감회가 새롭다. 그러나 감회에 젖는 순간 열차는 부산 구포역에 장병들을 쏟아 놓고 열차는 기적을 울리며 남으로 달려간다. 열차와 이별을 하고 구포역에서 인원점검을 마치고 잠시 기다리니 군용트럭 수 십대가 들어온다. 어디로 가는지 몰라도 트럭은 흙먼지를 날리며 비포장도로를 한동안 달려 도착한 곳은 김해육군 공병학교다.
1964년 4월5일 봄이 무르 익어가는 참 좋은 계절에 육군공병학교에 입교를 했다. 우연히 마음먹은 대로 잘 풀려 나가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해진다.
공병학교 연병장에 장병들을 집결 시켜놓고, 학교장이 환영인사를 한다. 먼 곳까지 오느라고 고생을 했다며 공병에 대한 특수성을 설명하고 공병에 임무가 전투에 승리를 좌우하는 가장 중대한 임무를 수행하는 선봉부대 라 중대한 임무를 수행하는 군인이라고 강조와 함께 인사말을 마친다. 잠시후 학과장이 중졸, 고졸, 대학생 등 학력별로 분류해서 헤쳐 모여 한다.
같이 간 친구 가있는 병사들은 떨어지지 않으려고 우왕좌왕하는데 나는 친구도 없이 혼자였으니, 고등부에 줄을 섰다. 고등부 이상 학력자들 중에서 특과병, 즉 기술 병을 선발하는 것이다.
여러 종목이 있어 각 종목별로 교관이 교단에서 설명을 한다. 어느 종목은 배우면 기성 부대 가서 무엇을 하고 등등 설명을 한 후 각자 희망하는 곳이 있으면 줄을 서란다. 마침 건설 중장비 반이 있었다. 10주 교육 이란다. 군에 입대하기전 부터 배우고 싶어 하던 종목이기에 중장비 반에 줄을 섰다.
선발인원 32명을 선발하는데 53명이나 줄을 섰다. 연병장에서 기초적인 시험을 보는데 문제에 답은 O X 로 표기를 한다. 시험을 보고나서 가슴이 두 근 두근 콩닥콩닥 뛴다. 여기에서 떨어지면 일반 공병으로 가는 것인데 일반 공병은 야 공단 아니면 건 공단 즉 도로공사 아니면 건축공사장에서 중노동을 하는 것이다. 걱정이 된다.
잠시 후 합격자를 호명한다. 한참을 기다려도 내 이름을 부르지 않으니 가슴은 타 들어간다. 마지막 순간 박흥섭 이란 이름 세 마디가 연병장에 울려 퍼질 때는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마치 대학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리 보다 더 반가웠다.
평소 꿈꾸어 왔던 꿈을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합격한 장병들을 기간 병이 인솔하여 각 내무반으로 들어간다. “학생 2중대 3내무반.”군번 순서대로 침상자리에 앉힌다. 군번 순서대로 앉다보니 앞뒤로 괴산군 청안면 친구들과 함께 자리를 하게 되었다. 나도 본적이 괴산군 증평이니 동향 친구나 마찬 가지고 함께하니 한결 마음이 편하다.
나는 3202번이고 아래병사는 3203번이다. 같은 공병 병과로 같은 과에서 같이 교육을 받는 것은 극히 힘든 일이다. 논산 훈련소에서 군번 받을 때 줄을 같이 섰는데 서로 아는 사이도 아니고 앞으로 어찌될지는 예측 할 수 없으나 우선 같이 만나게 된 것만으로도 보통 인연이 아니고 하늘이 맺어준 인연인가보다 반갑다.
아무튼 원하든 기술을 배우게 되어 남보다 열심히 하려고 첫날 학과 출장할 때 공구 담당을 뽑는데 충주에서 온 병사, 나, 그리고 전남에서 온 병사 3명이 공구 담당을 했다. 아침에 학과 수업을 가면 공구를 수령하고 실습을 맡치고 오후에 공구를 반납을 하는 것이다.
첫날은 품목 별로 헤아리기 좋게 진열을 하란다. 공구에 대해서 지식이 없는 나는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다른 병사 2명은 공구 정리를 잘 했다. 기간 병이 공구 검사를 하는데 두 친구는 품목 별로 잘 정리를 했는데 나만 못했다고 단체기합으로 빳다를 다섯 대씩을 맞고 다시 정돈을 해서 반납을 했다.
다음날부터는 그들이 내 것을 먼저 정리 해주어 무난히 넘기고 그 덕에 빨리 익힐 수 있었다.
모든 건설 중장비 에 대한 정비교육 을 10 주 동안 이론 과 실습을 철저히 자세하게 가르친다. 야전에 나가서 언제고 장비가 고장이 나 면 신속하게 수리해서 공사에 지장이 없도록 해여 한다는 것이다. 남보다 열심히 노력했다. 10주 교육하고 졸업 시험 볼 때는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를 했다. 성적순서 에 따라 10등 이내는 1지망. 2지망 가고 싶은 곳으로 보내 준단다.
나와 내 아래 K병사는 전체에서 수석을 하여 우리는 1지망을 2군으로 적어 냈다. 그 친구와 나 그리고 G 병사 3명이 같이 처음 1964 6 월 13일 발령지가 2군 서울 한남동 o o 단 본부였다. 단본부에서 일주일후 K병사는 김포로, 나는 안양으로 G병사는 인천으로 각각 헤어졌다. 여름휴가 때 다시 광주군 동부면 미사리로 갔는데 같은 날 K병사도 휴가를 와서 함께 휴식을 하고 3박 4일에 휴가를 보내고 헤어 졌다.
이제는 다시 만나기 힘들 것 이라 생각하고 아쉬운 작별을 하며 제대 후 고향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그런데 다음에 다시 또~~~ 우리는 천생의 인연인가보다. 다음에 다시 만나 군복무를 마칠 때까지 함께 근무를 했고 그 인연으로 그 친구의 여동생과 백년가약을 맺어 평생 고락을 함께하고 있다.
7. 군 복무를 마치고
군복무를 무사히 마치고 집 에오니 역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농사 일 뿐이다. 나 없는 동안 여동생 혼자 몽두남발하고 논으로 밭으로 다니며 고생을 많이 했다. 우선 집에 급한 일만 정리하고 직장을 알아보려 했으나 농사일 이라는 게 끝이 없는 것이다. 한해 농사만 마무리 짖고 농사를 접는 다는 일념으로 농사를 지었다.
군에서 평소 원하든 중장비 기술은 배웠기에 국토건설에 이바지 하려하는데 자격증이 없다고 받아 주는 곳이 없다.
농사일이 힘들어 제대하고 올바른 직장을 잡지 못해 방황 하다 서청주 복대동에서 조그마한 슈퍼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시내 갔다 오는 길에 지금에 강서 가로수 길을 조성하는데 가로수f를 옮겨 심는 곳을 둘러보니 군부대에서 같이 근무한 최 중사가 기중기를 끌고 와서 가로수 운반 작업을 하고 있어 반가웠다.
현역에 근무할 때 많은 도움을 받은 분인데 여기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 이게 누구시오. 반가웠다. 누가먼저라 할 것 없이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그동안에 안부를 뭇고 회포를 풀고 싶었으나 최 중사는 작업 중이라 더 이상 시간에 여유가 없어 아쉬운 작별을 하고 헤어졌다.
C 중사는 고향이 강원도 삼척이라 다시 만나기 어려울 거라 생각 했는데. 인연은 비켜 가지 않나 보다. 뜻밖에 이렇게 만날 줄 이야 최 중사는 제대하고 건설부 대전 사업소에 근무한다며 시간 있을 때 만나자고 약속을 하고 헤어 졌다.
그 후 불도저 면허증을 내고 대전 건설사업소를 가서 불도저 기사로 취업을 하였다. 처음 일 나간현장이 당시 제천 단양지역에 큰 물난리로 농경지가 매몰 되어 수해복구, 대민 봉사 작업 이었다. 당시 단양지역에 물난리로 도로가 끈기고 농경지가 떠나려가서 주민 피해가 말로 표현 할 수 없이 참혹했다.
한겨울 단양 고습재 (지금의 고수동굴 넘어) (그때는 고수동굴을 발견하지 않음)를 넘으면 밑에는 수십 m 낭 떨어지라 도자가 미끄러질까봐 몸이 움츠려 들었고. 그 당시는 길이 좁아 차가오면 한쪽에 비켜섰다. 지나가는 실정이었다. 대강면, 가곡면을 다니며 수해복구를 하고나니 건설부장비가 각 지역 도청 건설사업소로 편입이 되었다. 나는 충북 도청 사업소 소속으로 도내 토목 공사 만 다녔다. 여름철에는 도로공사 겨울철에는 농경지 정리 공사 현장을 다니다 보니 집에는 손님 같았다.
그 당시 떠오르는 현장은 70년대 초 단양 영춘면 제방 공사현장이 잊혀 지지 않는다. 영춘면가려면 남한 강을 건너는 다리가 없어 버스나 승용차는 배를 타고 건너다닐 때이다. 도자 는 배가 부서진다고 건너 주지 않아 환 벨트를 늦추고 남한강여울로 건넜다. 또한 그 당시수석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수 천 만원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강바닥을 밀어다 제방을 쌓았으니 강바닥 돌이 모두 보물 수석 이었을 것이다 수석하면 단양 오석(烏石)을 제일로 알아주었다.
또 기억나는 현장은 청주 우암산 우회 도로이다. 삼일 공원에서부터 시작 했는데 내가 선발대로 제일 먼저 작업을 했다. 토질이 질어서 빠지고 비탈이라 트랙이 벗어지고 참 고생 많이 했다. 한 500m 는 내가 하고 간 것 같다. 도청에 한 3년 근무 했으나 장비 기사로 희망이 없어1970년대 중반에 대기업으로 나가 전국을 무대로 도로, 산업단지 울산에 발전소. 석유 비축 단지등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은 현장을 누비고 다녔다.
80년대는 주로 울산 화력발전소, 석유화학 공단을 조성하면서 주야로 근무를 하고 집에는 한 달에 한번 손님처럼 오는데 당시는 자가용이 없어 대전에서 갈아타야 집에를 왔다. 한달에 하루 이틀 얼굴을 대면하니 아이들은 아버지란 사람이 낯이 설어 피하고 안기지 않아 마음이 아프다. 그래도 방학 때는 회사에 배려로 아파트를 빌려주어 한 달 씩 함께 생활할 수 있어 삶에 긍지를 가지고 근무를 했다.
모든 장비가 현장에서 항상 위험이 따르는 법이다. 특히 도자는 속도가 느려서 안전하다고 생각 하는데 높은 바위산에서 표토 작업을 할 때, 암석 발파작업 자리를 내어줄 때 항상 긴장 하고 주시해야한다. 한번은 부마 고속도로 현장에서 일이다. 발파작업으로 암석을 싫어내고 다시 발파자리를 내기 위해 바닥 정리를 한 30분 하다보니 위에서 이슬이 끈임 없이 내려 잠시 3분정도 관망하니 수백 톤 의 바위덩어리가 무너져나려 잠시 피한 것이 위기를 면한 적이 있다.
잠시 방심하고 한 번 더 밀었으면 바위더미에 묻혀 인생이 끝났을 것이다. 같이 근무하든 한 친구는 도로에서 추레라에 도자를 싣다가 옆으로 넘어져 논으로 굴러 떨어져 현장에서 사망하는 변을 당하기도 했다.
90년대 들어 회사 생활을 접고 장비 사업을 시작 했다. 서울시 지하철사업에 뛰어들어 지하 2,30m땅속을 파헤칠 때는 위에서 철골 작업을 하는 위험을 감수하고 작업을 할 때 도 있다. 그래도 한 40여년 동안 객지 생활을 하면서 아무 탈 없이 지내온 것은 조상님에 보살핌 천지신명에 보살핌이 있어 오늘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고 감사드립니다.
8. 잊지 못할 인연
한생을 사는 동안 우리는 우연이든 필연이든 많은 사람들과 끊임없이 인연을 맺고 살 아 간다. 비단 사람과 사람의 인연이 아니어도 기르는 동물이나 화초, 동식물과의 인연 또한 예사롭지 않은 만남이다. 하물며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며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 과 사람의 인연이 어찌 소중하지 않을까?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한사람의 만남의 인연이 영웅이 될 수도 있고 범죄자가 될 수도 있다. 만남의 중요함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므로 다가오는 사람은 소중하고 아름답게 가꾸어 갈 줄 알아야 한다.
스치고 지나가는 한줄기 바람처럼 잠시 잠깐 머물다 지나는 사람인줄 알아 는데 그 인연으로 삶에 질이 바뀌어 평생을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군대생활을 할 때 일이다”
대구에 중장비 정비부대가 창설되는데 대구로 전출을 가야한다는 것이다. 그 당시 서울에 2군 공병단 본부에서 10개월 정도 근무해서 졸병은 면 하였다. 대구에 2군 중장정비 부대가 창설 데여 전출을 가니 전국 각 부대에서 차출되어 모였다. 공병학교 동기생들도 몇 명 왔는데도 제일 말단 졸병이 되여 고생이 심했다.
아침 조회시간에 서울 2군 공병단에서 나려온 동료를 만나면 1내무반 2내무반 병사들은 전국 각 부대에서 모인 병사들만 있었다. 선임병사들이 군기 잡는다고 저녁마다 야구방망이가 춤을 추고 있다고 한다. 엉덩이 피멍이 든 친구들이 한두 명이 아니고 도저히 못하겠다고 탈영까지 생각 하고 있는 병사들도 몆 명 있었다.
나는 다행이 기존 부대 내무반으로 배치가 되어 저녁마다 오락회 한다고 저녁마다 한잔씩 나누며 좋은 분위기로 즐겁게 지냈다. 그렇게 2개월쯤 지났을까! 아침조희시간에 C 중사 가 나를 비롯해 3명에 병사 들을 호명하면서 빨리 관물을 정리해 배낭을 꾸려 연병장으로 집합하란다.
그 당시 부대 분위기가 하도 험한 때라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나 어리둥절하면서 겁먹은 표정으로 각자 배낭을 챙겨 집합하니 잠시 후 트럭을 타란다.
대구 시내를 벗어나 왜관 쯤 올 때 까지도 어디로 무엇을 하러 가는지 아무도 모르고 추측만 한다. 당시 군인들 이동은 비밀로 하든시절이고 최 중사임도 만난시간이 얼마 되지 않고 엄격해서 좀처럼 말도 못 붙일 때다.
구미에 도착해서야 파견 나온 것 이란 걸 알았다. 구미에 도착하니 이미 파견 나와서 근무하는 병사가 10 명이나 있는데 우리일행 4 명을 현재 있는 4 명과 교체 하는 것이다. 미리 알려주면 마음이 한결 가벼웠을 것인데 하루 종일 불안과 공포에서 보내야 했다.
C 중사 는 부대 복귀할 병사들을 태우고 부대로 가고 파견대 남은병사들은 신병들 환영회 해준다고 모 식당에서 환영만찬으로 한잔 하고 파견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당시 선산군 구미 읍 문 성리 넓은 들판 주변으로 낙동강이 흐르고 있는데 제방이 없어 장마 때면 낙동강 물이 범람해 농작물이 다 쓸려 떠나려가는 피해를 입어 농민들에 애를 태워 정부에서 치수사업을 하는데 군인부대. 공병대 중장비를 동원해서 제방을 쌓는다. 우리는 그 장비를 정비해주기 위해 10명의 정비사가 파견 나와 주둔하며 정비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구미 파견 근무를 6개월 정도 하니 현장공사도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여 장비가 한 대 두 대 철수 하니 우리도 부대로 복귀하여 부대에서 며칠 했다.
최 중사 가 부른다.
처음에는 매몰차고 냉정하게 보여 서먹서먹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내다 보니 다정다감하고 농담도 잘할 정도로 정이 들었다.
야, 박 상병.
예, 저 말입니까,
야, 너 말고 누가 또 있어.
사무실 로 들어 와봐.
선임자 가 부르면 항상 걱정이 앞서는 게 군대이다.
무슨 잘못이 있어 벌을 주려나 걱정을 하며 사무실 로 들어서니 파견 근무하다 부대 들어오니 힘들지 내일 포항 구룡포 로 파견 보내 줄 터이니 준비해“
내일 이동정비 차가 가니 그 차타고 가도록해.
포항시 구룡포읍 대보리 호미 곳 구만리에 육군 O O 부대가 신설한다. 공사현장에 중장비가 여러 대 있어 장비 정비를 위해 정비병으로 파견 나와 이는 것이다.
구룡포 현장에서 8개월 근무 중 경주 남산 국토개발 사업현장으로 다시 파견 되어 근무하니 군 임무를 마칠 때가 되었다.
우연이 최 중사 만나 군 생활 하는 동안 파견대에서만 근무하다 제대를 했고 제대 후 에는 서로 소식이 끊겼다.
제대하고 올바른 직장을 잡지 못해 방황 하다 서 청주 복대동에서 조그마한 슈퍼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시내 갔다 돌아오는 길에 지금에 강서 가로수 길에 청주시에서 가로수 길을 조성하는데 둘러보니 최 중사가 기중기를 끌고 와서 가로수 운반 작업을 하고 있어 반가웠다.
아니 이게 누구시오. 반가웠다. 군부대 생활 하는 동안 친 형제 보다 더 정 스 럽 게 보살펴 준 선임 병 이다.
누가먼저라 할 것 없이 반가운 인사를 나누며 그동안에 안부를 뭇고 회포를 풀고 싶었으나 최 중사는 작업 중이라 더 이상 시간에 여유가 없어 아쉬운 작별을 해야 했다.
최 중사는 고향이 강원도 삼척이라 다시 만나기 어려울 거라 생각 했는데. 인연은 비켜 가지 않나 보다.
뜻밖에 이렇게 만날 줄 이야 최 중사는 제대하고 건설부 대전 사업소에 근무한다며 시간 있을 때 만나자고 약속을 하고 헤어 졌다.
그 후 친 형제처럼 자주 만나 삶에 길을 의논하고 좋은 길이 있으면 이끌어 주었고 다독여주어 그 덕분에 삶에 길을 찾아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많은 도움을 받았다. 최 중사는 고향이 강원도 삼척이라 다시 만나기 어려울 거라 생각 했는데. 인연은 비켜 가지 않았나 보다.
9. 첫 아이 낳던 날
음력 9월 초1일 오늘은 큰아들 생일 이다. 감회가 새롭다.
큰아들 생일을 되돌아보면 탄생에 기쁨보다 마음이 아프고 아내에게 항상 미안 하다.
60 년대 시골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가난하게 살았는데 가을추수에 바뿐 시기이다. 만삭에 몸으로 도 편안이 쉴 수도 없고 추수를 거들어야 하는 실정이다.
당시 시골 농촌에는 의료 시설 혜택도 제대로 받을 수 없었고 산부인과 병원 진료를 받으려면 청주까지 나와야 하는데 교통편이 여의치 않아 청주 나오는 일조차 쉽지 않아 제대로 진료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고작 북이면 보건소에서 간단한 진료에 의지하여 출산 예정일조차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보건소 에서 음력10 달 에나 출산 한다하여 준비도 없이 지내고 출산 전날도 조를 하루 종일 도리깨질을 하며 타작을 했다.
음력 8월 30일 밤 12시경부터 배가 아프다고 했지만 출산 예정일이 한 달 정도 남아 으니 낯에 도리깨질을 많이 해서 그런가보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밤을 지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통증은 심해저 아침에서야 산통이란 것으로 생각 했다.
출산 예정일이 한 달 이나 남아있으니 아무런 준비도 없어 어머니는 서둘러 미역을 사러 가시는데 미역 살돈이 없어 밭에서 무를 한 둥구니(집으로 만든 둥근 바구니) 뽑아 가지고 증평 장으로 가시고 나는 밭에서 추수를 하는데 아무래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하던 일을 멈추고 집으로 들어오니 아내는 심한 산통에 지처 있고 여동생 혼자 안절부절 발만동동 구르고 있어 겁이 났다.
요즈음 같으면 119를 호출해서 산부인과로 옮겨 출산을 하겠지만 그 당시 시골에는 전화도 없고 갑자기 연락할 방법이 없으니 집에서 자연출산을 하든 시절이라 애만 태운다.
심한 진통 끝에 음력 9월 초하루 낯 12시에 옥동자를 출생하고 아내는 기진맥진 지 처 있었다.
출산준비에 아무런 지식도 경험도 없는 여동생 과 둘이서 이웃집 아주머니에 도움으로 출산 후 수습은 했는데 당장 산모에게 먹일 미역국 도 준비하지 앉아고. 태어난 아기 입을 옷조차 준비 하지 못하고 애만 태우고 안절부절 마음만 급했다.
미역 사러 가신 어머니는 오시지 않고 산모는 기진맥진 혼수상태가 되어 어머니 마중을 나갔다. 자전거를 타고 한 2Km 쯤 가니 어머니가 보인다. 반가웠다. 그런데 어머니도 급하게 오신다고 오시는데 어머니에게 화만 냈다.
애기 낳았냐?
아들 낳았어요.
아이고, 잘했구나. 고생했다.
미리미리 준비를 해야 하는데 준비하지 못한 게 잘못이지 어머니에게 화를 낸게 미안 하고 송구스러웠다. 어머니를 자전거로 모시고 달려 와서 미역국을 끓여주고 아기 옷을 입히고나니 마음이 조금 안정이 되었다. 아들을 낳았다는 기뿜보다 아내가 고생했다는 생각에 항상 마음이 편하지 않다
천고마비 좋은 계절에 출산해서 좋겠다고 남들은 축하 하지만 가을추수 바쁜시기라 산후 조리도 못한 탓에 지금도 산달만 되면 온몸이 쑤시고 아프다 하여 항상 마음이 아프다.
어렵게 태어난 첫아들은 아무 탈 없이 성장해 지금은 대기업에 임원으로 재직하고 있어 흐뭇하고 고맙고 행복 하다.
아내는 출산에 비밀이란 주제로 KBS 아침마당에 출연하여 장원으로 입상하는 영광을 차지했다.
10. 가장 소중한 사람
우연히 만나게 된 당신이 인연이 되여 평생을 함께 내 곁에서 힘든 일을 함께하면 서도 내색 한번 하지 않고 지켜 주어 참 고마워요.
나 지나온 세월동안 가장 소중하고 귀한 사람은 바로 당신 입니다.
비 내리는 날 나의 가슴에 햇살 같은 우산을 받쳐 주고 바람 부는 날 촛불처럼 꺼져 가는 나의 영혼에 꽃망울 같은 미소 와 함께 향기로운 숨결을 붙여준 당신이 있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어다오.
4남매에 장남인 나를 만나 맏며느리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부모님 도 안 계시는 가정에서 철없는 동생들을 당신에게 맡기고 객지로 돌아다닐 때 당신 혼자 감당 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이 모두 다 헤쳐 나간 당신에게 항상 고맙고 감사 했다오.
더욱이나 동생들 결혼 시킬 때 부모님을 대신 해서 부모님이 해야 할일을 혼자 빈틈없이 준비해서 결혼식을 시켜준 당신께 무어라 고맙다고 해야 할까 마음속에 간직만 하고...
‘수고 햇소,
‘고마워요,
한마디 못하고 살아온 나을 이해 해주고 따라준 당신 정말 고마워요.
지난날 눈감아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당신의 얼굴 내 마음 창가에 그리움 앞에서 턱 고이고 않아 있는 기다림을 마음으로 읽어내는 그 순간 얼마나 애절한 밤을 오래 동안 지새웠을까!
생각 하면 마음이 저려오곤 했지요.
바람이 창문을 흔들면 혹여나 당신의 발소리가 들리지나 않을까!
숨 조리며 까맣게 가슴 태우며 지낸 날이 얼마였든가!
저녁노을 붉게 물든 날이면 혹여 당신의 그리움도 저렇게 물들지 않았는지 우리는 항상 안타까움으로 물들어 있어 지요.
큰 아들 결혼하고 살림살이를 실어 보내든 날 당신은 큰아들 떠나보내는 아쉬움을 떨치지 못하고 눈시울이 붉어 졌지요.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객지로 나가 있는 동안 나대신 아들을 의지하고 생활하다 아들마저 떠나는 허전함에 마음 조리든 그 순간 얼마나 애틋했을까! 결국 그날 나도 현장을 가야하는데 떠나지 못하고 아내의 허전한 마음을 조금 이나마 추 슬려 주려고 다음날 현장으로 떠났지만 우리에 아쉬움은 쉽게 채워지지 않았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가슴 한편에 그리움으로 쌓아둔 사랑하고 싶은 당신. 당신은 내가 살아가면서 가장소중 하게 아끼고 간직해야만 하는 보석 같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당신이 이제껏 살아오면서 가졌던 어려움을 더 크고 깊은 사랑으로 행복을 주고 싶습니다.
당신이 이제껏 나에게 쏟아 왔든 그 사랑보다 더 아름답고 소중한 사랑으로 크고 깊은 행복을 안겨주고 마지막 눈감는 날까지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사랑이 당신이었다고 나였다고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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