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아야 합니다.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세상에서 권력과 권세를 잡은 사람은 살아가는 것만 보아도 표시 납니다. 크고 비싼 집, 비싼 차와 비싼 옷으로 호화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왕과 대통령은 말할 것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세상과 달라야 한다 하였습니다. 비싸고 큰 소유물로 자신을 드러내려는 유혹을 뿌리쳐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을 보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삶을 보면 왕이 아닌 아주 평범한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참된 모습을 예루살렘 입성하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입니다. 당시 왕과 전쟁에 승리한 장군들이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올 때는 군마를 타고 군중들의 환영 그리고 나팔을 불며 환대를 받았습니다. 이에 비하면 예수님의 입성 모습은 초라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주관자들과 다르셨습니다. 이유는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 아닌 섬기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세상 왕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만왕의 왕으로 죄로 죽은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서 주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닌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셨습니다.
나귀를 타고 오심은 스가랴 9장 9절의 말씀대로 오신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겸손하여 나귀를 타시나니”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겸손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심은 그 예언의 말씀을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 섬김의 봉우리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 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현실의 우리는 예수님 앞에 부끄럽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 부귀와 영화를 따르는 삶을 버려야 합니다. 세상 힘에 의하는 삶, 비싸고 크고 세상 권세와 명예를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절). 말합니다.
우리는 청지기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태운 나귀의 주인은 “주가 쓰신다”는 말에 나귀를 내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만물을 뜻대로 쓰실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맡겨 주신 것을 관리하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드려야 합니다. 로마서 11장 36절은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하셨습니다.
이기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