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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문수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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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이야기 스크랩 고양시 동산동 `밥보시 할머니 석상`
들꽃* 묘연 추천 0 조회 12 09.10.01 23:0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고양시 동산동 ‘밥보시 할머니 석상’

 

<사진설명> 임진왜란때 지혜를 내어 왜군을 물리친 ‘밥보시 할머니 석상’을 모셔 놓은 고양시 덕양구 동산동 모퉁이 공원 모습. 

 

떡장수 할머니의 지혜로 왜구를 물리치다

 

600년 도읍지 서울을 병풍처럼 받치고 있는 북한산은 경기도 고양시에도 속하는 명산이다. 고양에서 바라보는 모습 역시 운치가 있어 고양시민들은 ‘북한산의 고양의 산’이라고 주장한다. 거대한 바위산인 북한산은 나한, 보현, 문수, 의상, 원효, 승가, 향로봉 등 불교와 연관된 봉우리들도 즐비해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신라나 고려인들의 ‘산 사랑’을 느끼게 해 준다. 여러 봉우리 가운데 고양시 동산동에서 바라보는 노적봉은 마치 큰 볏짚을 쌓아놓은 ‘노적가리’같이 보인다. 여기에 조선후기 임진왜란 때 왜구의 침입을 받았을 때 지혜를 가진 할머니를 기리는 석상에 담긴 설화가 나라사랑의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동산동 창릉 모퉁이 공원에 안치돼 있다. ‘밥 보시 할머니 석상’에 얽힌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시대는 임진왜란 당시로 전국의 민초들이 왜구들에 의해 짓밟힌 강토를 찾기 위해 봉기하고 있을 때였다. 이름하여 의병활동이다. 왜구는 1592년 아무런 명분도 없이 전쟁을 일으켜 남해를 거쳐 한반도에 들어오더니 이내 조선의 산천을 피로 물들이고 말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난지 8개월이 지난 조선 선조 26년(1593) 정월. 조선의 조정은 급기야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명나라는 이여송을 대장으로 임명하고 원군 4만 명을 파송해 조선을 도왔다. 명나라 총병관을 맡은 이여송은 조-명 연합군을 총지휘하며 왜군에게 함락되었던 평양성을 탈환했다. 그 여세를 몰아 한양을 수복하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1593년 정월 26일 한양을 눈 앞에 둔 고양시 벽제의 남쪽 숫돌 고개 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은 왜군에게 참패하여 북한산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사태를 맞았다. 전쟁에서 패한 명나라 이여송과 장수들의 일부는 북한산 노적봉 밑에 집결하게 되었다.

“도저히 방법이 없을까?”

애초에 조선을 발판으로 삼아 명나라까지 진격하려 했던 왜군은 이여송이 이끄는 부대를 섬멸시키기 위해 포위망을 좁혀왔다. 그러자 이여송은 고심 끝에 부하들에게 실의에 찬 어투로 말했다. “방법은 이제 두 가지 뿐이다. 첫째는 이대로 앉아서 죽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적에게 투항하여 목숨이라도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것이다. 어느 길을 택하는 것이 낫겠는가?”

주변의 병사들이 모두 한숨을 내쉬며 답답해했다. 그때 조선군의 총사령관 격인 도원수(都元帥) 김명원이 나섰다. “어찌 방법이 그것 뿐이겠습니다. 다른 길도 있습니다. 이미 죽기를 각오했으니 흩어진 대오를 정비하고 적에게 총반격을 가해 이번 패전의 수치를 씻어야 합니다. 그 길만이 둘로 갈라진 아군의 대오를 하나로 모아 군사력을 배가시키는 방법이 될 것이외다.”

이여송은 김명원의 말에 수긍이 갔지만 떨어진 사기를 끌어올릴 방법이 없다는 것도 감지했다. 그는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도원수의 말씀이 옳기는 합니다. 하지만 잘 아시다시피 우리 연합군은 이번 전투에서 많은 병력을 잃었습니다. 반면 저 간악한 왜구놈들은 의기가 양양하여 더욱더 날뛰면서 시시각각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포위망을 뚫어내기는커녕 여기에서 버티기조차 여간 어려운 형편이 아니오?”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당할 수만은 없질 않소.”

“…” 침묵이 흘렀다. 사위는 어두워지고 갑론을박하던 전략회의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제 야음을 틈타 언제 적들이 들이닥칠지 모르기에 경계근무를 강화하라는 이여송의 명령이 떨어졌다. 그때 저편 어둠에서 희미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거기 누구요?” “아 예, 나는 저 아랫마을 숫돌고개에 사는 떡장사 할미요. 장군들께 긴히 할말이 있으니 안내해 주겠소?”

초병들이 말했다. “이 난리통에 할머니는 무슨 변을 당하시려면 어찌하려 하시요. 어서 집으로 돌아가시요.” 하지만 떡장수 할머니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조선 사람으로 이 땅에 살면서 왜구놈들을 물리쳐야 한다는 생각은 여기 징집된 병사들 뿐만 아니라 우리같은 무지렁이 민초들도 같소. 이렇게 참패하여 궁지에 몰린 처지가 되었으니 지혜를 내어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겠소.”

할머니의 의지가 완고해 하는 수 없이 도편수 김명원 장군의 처소로 안내했다. “이 보시오. 장군. 내가 저 왜놈들을 물리칠 좋은 방도가 있으니 내뜻에 따라 잘 따라줄 수 있겠소?”

김명원 장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할머니께서 좋은 방도를 가지고 계신다구요?”

떡장수 할머니는 김명원 장군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술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러자 김명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에는 희색이 만연해졌다.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김명원 장군은 늦은 시간이었지만 이여송의 숙소로 달려가 떡장수 할머니가 일러준 전술을 설명했다. 이여송도 기쁜 표정을 지으며 손뼉을 쳤다. “좋습니다. 오늘 우리 군영을 찾은 할머니는 필시 조선을 구하기 위해 보내준 여신(女神)인지도 모르오.”

이여송은 급히 총동원령을 내려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지금 즉시 인근 마을로 내려가 짚단이란 짚단은 모두 가져와 노적봉에 쌓아라. 그리고는 즉시 횟가루를 구해 저 창릉천에 풀어서 아래로 흐르게 하라.”

임진왜란 때 북한산으로 몰렸던 조-명 연합군

창릉천에 살던 노파의 도움으로 위기 ‘극복’

밤이 깊었지만 병사들은 마을로 내려가 짚단을 구해 노적봉 주변에 쌓았고, 횟가루를 구해 창릉천에 풀었다. 지리에 밝은 마을 사람들도 밤이 새도록 흰 찰흙이 나오는 곳을 찾아 지게로 창릉천에 날라 부었다. 그러자 좁은 개울은 흰 쌀뜨물이 흘러가는 듯 색이 희뿌옇게 변해갔다.

다음날 왜구들이 총공격을 할 태세로 군영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새벽부터 바삐 움직인터라 병사들은 목이 마르자 취사병들이 물을 구하기 위해 창릉천으로 달려갔다. “아니, 개천이 왜 이렇게 희뿌옇지? 저 위에 조선과 명나라 군영이 있다더니 밥을 지어먹기 위해 쌀을 씻는 것 같구만?” 그러자 다른 왜구가 말했다. “이 사람아. 우리한테 패퇴해 도망간 조선과 명나라 사병들인데 어떻게 쌀로 밥을 지어먹는단 말인가?”

때를 맞춰 떡장수 할머니가 함지박에 쌀을 가득 담아 창릉천에 나타났다. 물을 기르기 위해 나온 왜구들은 할머니의 함지박에 든 쌀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할멈. 그게 뭐요?” 할머니는 퉁명스럽게 답했다. “보면 모르겠소? 쌀이지.” 움찔해진 왜구들은 대뜸 그 쌀이 어디서 나왔느냐고 되물었다.

“하도 먹을 게 없어 산에 가면 풀뿌리라도 구할까해서 노적봉 아래로 갔었소. 그런데 그곳에는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 수만 명이 아침을 먹기 위해 창릉천에 나와 있었소. 그들이 나를 보더니 불쌍하다며 이렇게 함지박에 쌀을 가득 담아 주지 않겠소. 그저 고맙다는 인사를 몇 번이나 하고 집으로 내려와 이렇게 쌀을 씻으러 온 거요.”

왜구들은 겁이 덜컥 났다. “저 산에 군량미가 그렇게 많단 말인가. 아니 저 봉우리 아래를 보시오. 볏짚이 수북한 걸 보니 이 노파의 말이 맞는 것 같소.”

<사진설명> 석상의 뒷모습.

떡장사 할머니는 더욱 힘을 주며 말했다. “여보시오. 당신들은 일본에서도 속고만 살았소. 이 늙은이는 이날 평생 살아오면서 거짓말 한번 안하고 산 사람이오.”

하도 진솔하게 말하는 떡장수 할머니의 말에 위축된 왜구들은 슬금슬금 뒷걸음을 쳤다. 군영으로 돌아간 취사병들은 상급자에게 수군수군 보고를 했고, 그 보고 내용은 이내 적장에게도 들어갔다. “함정이야.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저 산으로 우리를 유인하려는 것이야. 일단 후퇴를 해야 한다. 즉시 철군하라.”

그리하여 왜구들은 북한산을 떠나 임진강으로 되돌아갔고, 전열을 재정비한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왜구들을 뒤따라가 섬멸시킬 수 있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선조임금은 명령을 내렸다. “창릉천에서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을 구해 낸 노파의 뜻을 기려 석상을 조성해 만백성들이 알게 하라.”

그후 석상할머니는 ‘고석 할머니’ ‘밥보시 할머니’ ‘밥 할머니’ ‘밥 보살’로 불리며 수백년 동안 이 지역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하지만 일제시대때 조선을 강점한 일본이 할머니 석상의 머리를 잘라 버린 후 창릉천에 버렸다. 해방이 되자 마을 사람들은 다시 석상을 찾아 나라를 구한 할머니의 뜻을 잇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사라진 석상의 머리는 찾을 길이 없어 머리가 잘린 채로 있다가 2004년 이곳 모퉁이공원에 모셔졌다. 부처님오신날이 지난 21일 방문했을때는 ‘밥 보살’에 신심 있는 한 불자가 연등을 공양하며 ‘나라사랑의 뜻’을 기리고 있었다.

 고양=여태동 기자 tdyeo@ibulgyo.com

 

 찾아가는 길 /

서울 지하철 3호선을 타고 구파발 역에서 내려 문산 방면으로 가다가 고양시로 향하는 고가에서 ‘U턴’을 하면 ‘모퉁이 공원’이 나온다. 여기에 몇 개의 비문과 함께 목이 잘린 ‘밥 보살 할머니 석상’을 만날 수 있다.

참고 및 도움: 고양시 문화원 홈페이지, 고양시 정동일 문화재전문위원.

 

[불교신문 2429호/ 5월28일자]

2008-05-24 오전 11:26:42 /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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