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빵의 표징!
그 무진장함과 엄청난 오해
장 들로르므 신부님 강의록(1996년 12월 10일)
요한복음 6장에서는 상당히 심오한 문학 장르를 제안하고 있다. 이른바 인간이 체험하는 현실에서 표징으로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의 심층 열망에 답하는 현실로 넘어가게 하는 또 다른 문학! 바로 그것이다. 이번 여정은 현실적으로 먹을 필요에서 출발하여 표징의 차원인 “생명의 빵”과의 만남으로 이끈다. 이 여정은 두 개의 낯선 에피소드로 된 한 이야기를 통과한다. 큰 군중을 위해 작은 빵이 무진장한 빵이 되는 에피소드! 그리고 제자들을 깜짝 놀라게 한 바다 위를 걷는 에피소드! 이 이야기에 이어 예수님의 긴 담화가 이어진다. 담화의 일차적 대상은 먼저 군중이 되며 그다음 담화대상은 제자들이다. 이야기와 담화는 서로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분리해서 읽어서는 안 된다.
A. 이야기
1/ 빵의 표징(6,1-15)
a/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비교하라
처음에 군중은 그들이 본 표징들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온다. 군중은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어떤 필요도 표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도하고 있는 분은 예수님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마지막에 이르러 군중은 ‘표징을 보고’, 예수님이 오시기로 되어 있는 “예언자”라고 알아본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빠져나가신다. 다시 말해, 아무도 아무 것도 예수님께 요구하지 않을 때는 넘치도록 주신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분을 찾을 때, 그분은 그들을 빠져나가신다. 이 역설은, 군중은 그들이 본 것에서 진정 이해해야 할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지시가 아닐까? 두 이해사이의 간격! 오해가 있다. 예수님의 계획은 더 멀리 지향하는 것이다.
b/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살펴보라.(5-10절과 12-13절)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관계는 군중과 그들의 관계와 잘 구별된다.(2-5절ㄱ, 11절, 14-15절) 군중은 다 보지도 다 듣지도 못한다. 단순히 군중은 “그분께 온다”, 앉는다, 배불리 먹는다, 표징을 본다, ‘그 예언자시다’라고 말한다고만 서술되어있다. 제자들은 군중을 자리 잡게 하고, 남은 조각을 모을 때만 개입한다.
c/ 이 빵이 만들어지는 것을 따라가기.(표징의 구축)
부족한 빵이 넘치는 빵이 되는 작용과정은 묘사되어 있지 않다. 이 작용은 카나의 혼인잔치 때처럼 시선과 앎을 빠져나간다. 그러나 변화 단계들을 따라가 보자.
- 빵이 부족하고 빵을 살 방법이 없다.(5-7절)
- 조금의 빵을 물고기와 함께 찾았으나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이 조금의 빵은 그것을 잃어버린다는 조건에서 중요하다.
예수님은 그것을 “손에 들고” 가진 것을 비우신다.
- 예수님은 빵과 물고기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면서,
보이지 않는 증여자들과 그 빵을 연결시킨다.
- 예수님은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시고 나누어주신다.
- 남은 조각들이 버려지지 않도록 모아들이게 하신다. 열두 광주리나 된다.
이 모든 단계들은 주어진 빵-표징을 위해 필요하다.
이 빵은 구입하지 않는다.
이 빵은 잃어버림을 통과한다.
이 빵은 절대타자에게서 오는 선물과 관련된다.
이 빵은 쪼개어지고 나누어준다. 그래서 그 전체가 얼마나 되는지를 결코 볼 수 없다.
결국, 이 빵은 과도하다.(마치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너무 좋은 포도주와 같이.)
이 빵은 필요한 것을 넘어선다.
이 빵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남아 있다.
이것은 이 빵이 무진장하며, 잃어버릴 수 없으며,
참여하는 것(주는 이에게 빵은 결핍되지 않는다),
보편적이고, 모든 민족들에게 주어진 빵(123 부족과 12 사도)이라고 단언하는 방식이다.
군중의 필요와 열망을 넘어서, 돈의 힘과 인간의 능력 바깥에 있는 이 빵은
감사의 기도와 나누어줌 사이에 “볼 것이 없음” 곧 비어있음으로 표시된다.
이 빵-표징 혹은 시니피앙(기표)은 이 주제에 대해 오해할 위험과 함께 해석되기를 기다린다.
d/ 오해
어떤 의미에서 군중은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니다. 이 빵은 증여자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 “이분은 정말 그 예언자시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중이 당신을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신다. 곧 군중은 예수님에게서 예언자의 말이 아니라, 군중의 생계를 보장하는 능력을 기대한다는 것을 아신다. 군중은 이 “표징”을 보긴 했으나 일부만 보았다. 곧 놀라운 힘을 전제하는 기적으로만 본 것이다. 군중은 마치 표징이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주어졌고, 무한하게 반복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2/ 예수님이 물러가심 그리고 바다 위를 걷기(5절, 16-21절)
a/ 이 이야기를 앞의 이야기와 구분하지도 대립하지도 말라
아래의 대조들을 가늠해보자.
- 낮 / 밤
- 만족하는 군중 / 두려워하는 제자들
- 사람들이 찾을 때 피하는 예수님 / 사람들이 예기치 못할 때 다가오시는 예수님
- 사람들이 그분을 “임금”으로 삼으려 함 / 두려움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나타나심
군중과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을 알아보거나 못 알아보는 두 가지 방식이 있으며,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배치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b/ 예수님이 물러가심과 다시 나타나심
예수님은 혼자 산으로 물러가신다. 제자들은 바다로 출발하고, 어둠 속에 큰 바람이 불고 물결이 높게 일어도 겁내지 않는다. 그런데 제자들은 “바다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서야 두려움을 느낀다. 낮에는 빵의 변화의 핵심 작용에서 “볼” 것이 아무 것도 없었는데 비해(그리고 군중은 배불리 먹은 빵만을 보았다.) 밤에는 두렵게 하는 “본다는 것”의 과도함이 있다. 낮과 밤사이에 예수님이 사라졌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사라짐에서도 볼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나다(혹은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한다. 귀와 연결된 ‘봄(본다는 것)’은 나를 홀리게 하지도 두렵게 하지도 않는다.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시선을 변화시키고, 환상속에서 두려워했던 것으로부터 해방시켜준다. 그때, 두려움은 사라지고, 친숙함과 신뢰의 행위가 대신한다.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했다.”
c/ 감추어진 공간
그러나(독자에게는 놀랍게도)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는 이 공간과(아직 건너가야 하는 공간) 시간이(넘어가기 위해 필요한 시간)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합류하는 순간 사라진다. 이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났을 때와는 다르게 제자들과 합류한다는 표시다. 예수님은 산이라는 다른 곳에서 왔다. 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는 모른다. 제자들은 수평으로 노를 저어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수직으로 합류하신다. 그 순간, 제자들은 목표에 도달한다! “바로 나다”라는 말씀은 재회할 때 허물없음의 표현이다. 그런데 만일 이 말씀을 “나다(탈출 3,14 참조)”라고 듣는다면, 이 말씀은 완전히 다른 절대타자에게서 오는 말이다.
지평적 공간의 사라짐은(그리고 시간의 늘어남) 예수님이 우리가 보는 것과는 다른 분이심을 지시한다. 마치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은 12광주리가 이해하도록 주어진 빵이 먹은 빵과는 다르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처럼.
B. 예수님의 담화(22-71절)
1/ 찾아나섬과 빵의 선물(22-34절)
a/ 군중이 예수님을 찾아 나서다(22-26절)
예수님의 사라짐은 임금으로 삼으려는 군중의 열망과 어긋난다. 예수님은 우리가 상상하는 분이 아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어디에 계신지 언제 떠나셨는지도 모른 채 당장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그분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바다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만난 그들은 예수님이 언제 어떻게 이곳에 도착했는지를 알지 못한다.(22-25절) 배는 한 척 밖에 없었고 제자들이 예수님 없이 그들만 떠났기 때문이다. 군중은 예수님이 산을 지나서 제자들과 합류한 방식을 모른다. 군중은 수평에서만 예수님을 찾으며, 이미 보았던 그대로의 그분을 되찾았다고 믿고 있다.
예수님은 그들의 추구를 문제 삼는다. 왜 그리고 무엇을 찾는가?(26-27절) 왜냐하면 찾는 두 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 하나는 그들이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에, 그것이 반복되기를 갈망하는 추구요
- 또 하나는 그들이 표징을 보아서, 말하자면 신호를 주고 다른 것을 찾도록 초대하는 어떤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분을 찾고 있다는 차원의 추구다.
예수님은 군중이 먹을 것을 주는 임금을 꿈꾸었을 때 사라진다. 그 사이에, 예수님은 다르게 자신을 드러낸다. 그리고 예수님은 군중에게 그들이 표징을 보았다면 그분을 다르게 찾았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군중은 표징을 보았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표시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찾아야 하는 ‘남은’ 것을 보지 못했다. 군중은 빵은 먹었지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빵조각을 거두어들이는 것’에서 지시되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것이다.
b/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27-29절)
이 추구는 하나의 ‘일’이고 실행이다. 그러나 추구하는 두 방식이 있는 것처럼, 일하는 두 방식이 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이 “일”은 공간에서 찾으려고 애쓰는 데 있지도, 빵을 얻기 위한 노력을 면제해주는 어떤 사람을(마술적인 먹을 것을 주는 왕) 찾기 위해 바다를 건너려고 애쓰는 데 있지도 않다. 이 꿈의 빵은 일시적으로 배불리는 빵이며 죽는 것을 막아주지도 못하는 빵이다. 이 빵의 이미지가 떨어져 나가야만 한다. 그래야 찾는 일이 썩어 없어지지 않는 빵으로 방향전환이 된다. 소진되지 않는 양식으로 나누어준 빵들은 이 방향으로 표시를 했다. 이 빵들은 기적이 반복될 희망을 주기 위해 군중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 썩어 없어지지 않는 빵은 다음과 같이 명시된다.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하기(애써라)”는 생산하는데 있지 않고, 주는 것을 받아들이는데 있다. 이것은 갈망을 일깨우는 일이다. 그리고 주어진 빵의 자질은 주는 분의 자격과 연결된다. 말하자면 공간에서 예수님과 만나려 했을 때 그들이 찾던 것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인정하신 사람의 아들이었던가?
군중은 더 실천적인 방식으로 묻는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들)을(복수형) 해야 합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단수형으로 대답하신다. “하느님의 일은”, 이것을 위해 예수님이 일하시고, 이 일을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해야 하는 것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그분을 믿는 것은 마치 ‘너희’와 하느님이 일치하는 일 혹은 너희의 열망과 하느님의 열망이 만남과 같다. 이 ‘일’은 ‘표징을 보는 것’에서 표징을 행한 분을 “믿는 것”으로 넘어가게 한다.
c/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겠습니까?”
이 요구(30-31절)는 “표징을 보는 것”이 “믿음”을 향한 길을 열어준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기 위해 한 표징을 보여 달라고 한다. 예를 들어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에게는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만나와 같은 표징을 보여달라는 것이다. 전날 저녁에 먹은 빵을 만나와 비교할 수 없는 것일까?
예수님의 대답은 단호하다.(32-35절) 아니,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따라서 “하늘에서 오는 빵”에 대해 말하는 두 방식이 있으며, 예수님은 “참된” 빵에 대해 말하신다. 이 빵은 두 자질로 인해 완전히 구분되는 빵이다.
- “하늘에서 참된 빵”을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 선물의 시기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다. 이것은 더 명확하게 설명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이 선물은 지속적인 현재에 주어지며,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 조상들” 혹은 “너희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만나와 전날 저녁에 먹은 빵은 “하늘의 참된 빵”이 아니다. 이것들은 이 신비적 현재의 선물과 관련해서 이해해야 하는 표징들이다. 만나는 반복적으로 매일 주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전날 배불리 먹은 빵은 이것이 반복되기를 군중이 갈망하게 한다. 그러나 이 두 경우에, 표징은 양식으로 주어진 “기적적인” 양식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이 표징은 반복됨 없이 현재에 주어지는 “하늘의 빵”을 가리킨다. 표징들은 시간의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게 하면서 갈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이 선물로 열어준다.
d/ 마지막 요구: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34절)
이 말에는 어떤 진전이 보인다.(사마리아 여인 이야기에서 보듯이) 왜냐하면 요구가 있기 때문이다. 군중은 더 이상 예수님을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제 요청자가 된다. 그런데 이 요청은 애매하다. 왜냐하면 “늘”은 길어지는 시간으로 말하자면 탈출기에 나오는 만나처럼 시간 속에서 지속 반복되는 선물로 되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중은 하느님의 참된 빵이 “내 아버지”의 선물이라는 말을 듣지 못한 것은 아닐까? 아기의 삶을 지속시키기 위해, 어머니의 역할과 아버지의 역할이 구분될 수 있다. 곧 젖도 필요하지만 말도 필요하다. 이것은 성경 말씀을 상기시킨다.(이것도 만나와 관련된 것이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고,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군중의 요구는 빵을 많게 하신(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의 좋은 결론이 될 수 있다. 곧 표징이 열매를 맺기 시작한 것이다. 이 요구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님은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새 단계를 여신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너무나 놀라운 이야기이며, 다음 번 강의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다음번 강의를 위하여:
이어지는 텍스트를 (소가 여물을 먹듯이) 되새김질하면서 놀라움을 느껴보라.
그리고 아래의 것을 구분해보라.
- “나는 생명의 빵이다”에 관한 전개(35-40절).
이 말씀은 수군거림을 야기하며, 예수님은 대답하신다.(41-51절)
그리고 예수님이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51절)라고 말씀하실 때,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지며, 이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명확히 말씀하신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55절)
- 그 다음, 제자들과의 대화로 넘어간다.(59-60절)
이 대화에서 신뢰 문제가 제기되고, 핵심적인 말씀을 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60-71절)
이 말씀들을 명확히 하려고 하기 이전에, 적혀있는 순서대로 읽고 또 읽어봐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낱말들은 의미가 있으며, 더구나 이 낱말들은 우리 손에서 첨삭될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장 들로르므 강의록에서(1996년)
수정 정리: 마리 테스, 안데레사